Share

제29화

Author: 복덩이
마치 보이지 않는 밧줄이 강민아의 목을 조르는 듯 그녀는 숨을 쉴 수 없었다.

심한기는 네이비 리넨 홈웨어를 입고 있었고 몸은 마르고 허약해 보였다.

그의 머리는 온통 희었고 등은 굽어 있었다.

강민아는 본능적으로 선생님이라고 부르려 했지만 자신은 이미 그럴 자격을 잃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순간 그녀의 시야가 흐려졌다.

“할아버지, 안녕하세요!”

반우정의 어린 목소리가 봄비처럼 상쾌하게 들려왔다.

“할아버지가 우리 엄마가 그렇게 자랑하시던 학식이 풍부하고 재능이 뛰어나신 교육자이자 뛰어난 수학자 심한기 할아버지 맞으세요?”

심한기는 통통하고 사랑스러운 반우정을 바라보며 굳게 다물었던 입을 열었다.

“네 딸이냐?”

강민아는 급히 답했다.

“네. 반우정이에요.”

옆에 있던 누군가가 흥분하며 말했다.

“교수님, 교수님께서 내신 문제 이분이 푸셨어요.”

잠시 멈칫하던 심한기가 응접실로 향했다.

강민아는 심한기의 걸음걸이가 안정적이라는 것을 발견했다.

심은호가 말한 것처럼 몸 상태가 예전 같지 않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심한기는 화이트보드 앞에 서서 강민아가 쓴 풀이 공식을 보다가 마른 어깨를 떨었다.

“내가 가르친 걸 다 기억하고 있었구나.”

그녀가 기억하고 있을수록 심한기는 서글펐고 강민아가 자신의 미래를 포기한 것을 용서할 수 없었다.

강민아가 화이트보드를 보며 말했다.

“대학에서 배운 지식을 다 잊어버린 줄 알았는데 화이트보드 앞에 서니 예전에 배웠던 공식들이 머릿속에 떠올랐어요.”

“정말 교수님의 제자였어?”

옆에 서 있던 남학생들이 속삭였다.

“아니다!”

심한기는 완고하게 부정했다.

강민아가 박사 학위를 포기하기로 한 날 그는 강민아에게 누군가 대학에서 지도교수가 누구였는지 물어보면 자신의 이름은 절대 말하지 말라고 선언했었다.

그렇게 강민아는 학사 학위만을 취득하고 학교를 떠났고 두 사람의 사제지간은 완전히 끊어졌다.

학생들은 즉시 입을 다물었고 심한기는 차가운 눈빛으로 강민아를 바라보며 목소리를 낮췄다.

“들어와서 얘기하자.”

그는 학생들 앞에서 강민아
Continue to read this book for free
Scan code to download App
Locked Chapter

Related chapters

  • 사라진 아내, 돌아온 나   제30화

    심한기의 미간이 잔뜩 찌푸려졌다.패륜이라는 말이 입에서 튀어나오려고 했지만 그는 있는 힘을 다해 참았다.“왜 그 꼴인 거야?”심은호는 분명 옷을 입고 있었지만 차라리 안 입은 것보다 더 요염해 보였다.심한기의 짙은 눈썹이 격렬하게 떨렸다.“비를 맞았어요.”심은호는 무심하게 답하며 젖은 앞머리를 쓸어 올렸다.강민아의 각도에서 보면 그의 옆모습은 완벽한 황금비율을 이루고 있었다.오뚝한 콧날은 미끄럼틀처럼 매끈했고 한쪽 볼의 깊게 팬 보조개는 시선을 끌기에 충분했다.심한기는 심은호의 부축을 받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저도 모르게 손으로 눈을 가렸다.아들의 존재감이 너무나 눈부셔 선글라스가 필요했다.“아버지, 침대에 누워 쉬셔야 해요. 너무 무리하지 마세요.”“내가 뭘 무리한다는 거냐?”‘무리하는 건 너잖아! 색기 넘치는 공작새가 되어버려서는...’심한기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강민아가 걱정 어린 시선을 보냈다.그가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심은호는 그를 침대에 눕혀 버렸다.심은호가 베개를 몇 번 두드리자 먼지가 흩날리며 심한기가 기침하기 시작했다.강민아는 급히 물을 따랐다.“교수님, 물 좀 드세요.”그녀는 물컵을 들고 와서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심한기를 바라보았다.‘조금 전까지만 해도 기운 넘치던 분이 갑자기 이렇게 기침을 멈추지 못하다니.’심한기는 기침하면서도 강민아에게 말하려 했으나 심은호가 그의 손을 눌러 제지하고 강민아의 손에서 물컵을 받아 들었다.차가운 손끝이 스치는 순간 그녀의 부드러운 살결이 느껴졌다.스치는 봄바람처럼 아무런 흔적조차 남기지 않았다.“아버지, 지금은 물 마시면 안 돼요. 잠시 쉬면 괜찮아질 거예요.”말을 마친 심은호는 강민아가 직접 따라준 따뜻한 물을 자신의 입으로 가져갔다.그 모습을 본 심한기는 말문이 턱 막혔다.심은호는 몸을 앞으로 숙이며 강민아의 시야를 가렸다.덕분에 강민아는 심한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 듣지 못했다.심은호는 심한기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네. 알겠어요.”‘알긴 뭘

  • 사라진 아내, 돌아온 나   제31화

    “아버지, 살살 좀 하세요.”심은호는 피하지 않고 심한기가 휘두른 지팡이를 맞았다.심한기는 지팡이 끝으로 심은호의 허리에 달라붙은 옷을 툭툭 쳤다.“좀 점잖게 굴 수 없어? 완전히 체면을 구기는구나. 여우한테 홀린 거야, 뭐야? 너! 너! 너! 도대체 왜 사람을 유혹하고 다녀?”“쉿! 목소리 좀 낮추세요.”심은호가 황급히 타이르며 말했다.“조용히 하라고? 이게 자랑스러운 일이냐?”심한기는 아들의 모습에 얼굴이 화끈거렸다.그러나 심은호는 태연하게 말했다.“계속 유혹해야 하는데 들리면 안 되죠.”심은호를 향해 눈을 흘긴 심한기는 기가 막혔다.강민아는 반우정에게 만화책 몇 권을 가져다주고 가정부에게 종이와 색연필도 빌려왔다.반우정은 집중력이 좋아 조용히 앉아 몇 시간 동안 책을 읽고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안녕하세요. 교수님께서 새로 출제하신 문제 좀 풀어보라고 하셔서요.”반우정에게 놀만한 것들을 쥐여준 뒤 강민아는 심한기의 학생에게 문제지를 한 장 달라고 했다.“서경 대학 학생이세요?”남학생은 다섯 살짜리 반우정을 흘깃 쳐다보며 물었다.“아니요. 저는 고연 대학 졸업했어요.”남학생이 다시 물었다.“석사생인가요? 아니면 박사생이세요?”강민아는 웃으며 답했다.“학부 졸업 후 공부를 계속하진 않았어요.”테이블 주변에 앉아 있던 몇몇 학생들이 고개를 들고 그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문제지를 건넨 남학생이 말했다.“그럼 이 문제 못 푸실 텐데요. 심 교수님이 내주신 문제는 최소 석사 2년 차 정도는 되어야 풀 수 있어요.”검은 뿔테 안경을 쓴 남학생이 조소하며 중얼거렸다.“학부생이 올림피아드 문제를 푼다고?”“아이도 저렇게 큰데 올림피아드를 전문으로 하는 사람은 아닌 것 같은데...”다른 학생이 팔꿈치로 그를 살짝 밀며 말했다.“하지만 교수님이 화이트보드에 적은 문제를 풀었잖아. 우리는 일주일 동안 연구했는데도 못 풀어서 교수님한테 엄청나게 혼났거든...”검은 뿔테 안경을 쓴 남학생은 강민아를 의심스럽게 바라보며 말

  • 사라진 아내, 돌아온 나   제32화

    심한기의 학생들이 모두 몰려들었고 그들은 구경거리를 보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흥, 봐봐. 이거 완전 엉망진창이야.”배진영이 문제 아래 적힌 공식을 보며 하나하나 조롱하기 시작했다.그러나 계속 스캔하던 그의 얼굴이 점점 굳어졌다.“이... 이게 증명이 됐다고?”강민아의 풀이는 그가 풀었던 방법보다 훨씬 간결하고 이해하기 쉬웠다.배진영은 자신을 한 대 치고 싶었다.‘난 왜 이런 풀이법은 생각해 내지 못했지?’“말도 안 돼! 썼다고 해서 정답이라는 보장은 없잖아.”다른 학생이 그의 손에서 문제지를 낚아채 갔다.주변 학생들도 목을 길게 빼고 증명 과정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침묵했다.강민아는 단순히 빠른 속도로 문제를 풀었을 뿐만 아니라 심한기가 낸 모든 문제를 증명해 낸 것이었다.강민아를 바라보는 학생들의 시선이 변했다.“선... 선배님. 너무 빠르신 거 아니에요?”“저 이거 이틀 동안 잡고 있었는데 선배님이 한 시간 만에 푼 것보다 못해요.”학생들은 믿을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고 강민아는 담담하게 말했다.“올림피아드 문제라면 대회 시간 안에 풀어야죠.”“그렇다고 해도 모두가 선배님처럼 빨리 풀 수 있는 건 아니잖아요.”강민아는 올림피아드 대회에서 늘 가장 먼저 답지를 제출하곤 했다.그녀는 대회 스타일에 특화된 실력을 갖추고 있었고 이것이야말로 심한기가 가장 안타까워하는 부분이었다.“선배님, 정말 학부만 졸업하신 건가요?”“예전에 몇 번 대회를 나간 적이 있어서 문제 풀이에는 익숙해요.”학생들은 그녀가 단순한 학부 졸업생이 아니라 올림피아드 전문가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선배님, 혹시 이 문제 풀이 과정을 설명해 주실 수 있을까요?”그 순간 무심코 고개를 돌린 반우정은 강민아가 화이트보드 앞에 서서 서경대 학생들에게 풀이를 설명하고 있는 모습을 발견했다.“와아...”반우정은 입을 동그랗게 벌리며 낮은 탄성을 내뱉었다.평소 강민아는 그녀와 반현민 옆에 앉아 나지막한 목소리로 숙제를 도와주곤 했다.하지만 지금 그녀는

  • 사라진 아내, 돌아온 나   제33화

    “선배님, 대회에서 만날 날을 기대할게요.”“꼴등 하면 재밌겠네.”배진영이 비웃듯 말했다.“ALI 수학 경시대회는 일반인도 참가할 수 있어서 매년 백지로 제출하는 사람도 많아요. 순위표에는 항상 0점이 가득하고 참가자의 이름과 신분도 공개되죠. 선배님,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세요.”강민아는 여전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만약 제 순위가 더 높으면 나는 ALI 경시 대회 성적이 강민아보다 낮다는 문구를 새긴 티셔츠 일주일 동안 입는 거 어때요?”이는 엘리트 학생들에게 가장 큰 모욕을 줄 수 있는 일이었다.수치스러운 문구가 적힌 티셔츠를 입고 서경대 캠퍼스에서 생활해야 할 테니 말이다.강민아의 도발에 배진영도 의지를 불태웠다.“좋아요. 저보다 잘하란 말은 안 해요. 하지만 200등 밖으로 밀려나면 교수님 댁에 와서 저희랑 같이 공부할 자격이 없으니 그만 오세요.”“진영아, 그래도 한 시간 만에 세 문제나 풀었어.”옆에서 다른 학생들이 그를 말렸다.“시험지 푸는 게 뭐 대수야? 대회에서는 LaTex로 답을 작성해야 해. 대학 때 배우기나 했겠어?”다른 학생들이 앞다투어 그를 달렸고 배진영은 자리에 앉으면서도 중얼거렸다.“가정주부가 수학 경시대회에 나간다고? 이건 사회적 자원 낭비야.”강민아는 마음을 가다듬고 시험지를 계속 풀었다.다른 사람들의 비웃음은 그녀를 상처입히지 못했다. 그녀는 자신이 힘든 길을 걷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하지만 그녀는 이 길을 걸어 정상에 오른 적이 있었고 그녀는 단지 다시 정상으로 돌아가려고 할 뿐이었다.시간은 빠르게 흘러갔고 그녀는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큰 문제를 하나 해결한 그녀의 마음은 자신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깊은숨을 내쉬며 고개를 든 순간 그녀는 잠든 반우정을 조심스럽게 안고 있는 심은호를 발견했다.그녀가 일어나려는 순간 심은호가 입 모양으로 말했다. “제가 데리고 들어갈게요.”강민아는 심은호가 심한기의 방으로 들어가는 것을 지켜보았다.심한기는 이미 침대에서 일어나 있었다

  • 사라진 아내, 돌아온 나   제34화

    육성민은 심은호가 반우정을 안고 있는 모습을 보자마자 차 문을 열고 내렸다.그는 190cm에 가까운 키에 단단한 근육질 몸매를 자랑했다.검은 반팔 티셔츠는 선명한 근육 라인에 의해 팽팽하게 늘어나 있었다.“주세요.”육성민이 심은호를 향해 손을 뻗자 단단한 근육이 뚜렷이 보였다.심은호는 가볍게 한숨을 쉬고 결국 반우정을 그의 품에 넘겼다.육성민은 한 손으로 정이를 번쩍 안아 들고 강민아를 향해 말했다.“가자.”강민아는 심은호에게 가볍게 인사를 건넨 후 육성민의 차에 올랐다.육성민은 반우정을 뒷좌석에 조심스럽게 눕히고 문을 닫은 뒤 운전석으로 향했다.심은호의 옆을 지나던 육성민은 싸늘한 시선으로 그를 훑어보았다.심은호는 육성민의 시선을 무시하고 부드러운 눈빛으로 강민아를 바라보며 말했다.“조심히 들어가요.”그는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지었지만 친근함보다는 어딘가 거리감이 느껴지는 웃음이었다.심은호는 차량이 점점 멀어지는 모습을 묵묵히 지켜보았다.육성민은 백미러를 통해 심은호를 흘끗 보더니 태연하게 물었다.“아까 그 사람은 누구야?”“심 교수님 아들 심은호야.”육성민이 나지막이 말했다.“전에 너희 학교에서 본 적 있어.”강민아는 대수롭지 않게 웃었다.“그냥 아버지 보러 왔던 거겠지.”강민아가 아는 한 심은호는 서경대 학생이 아니었다.하지만 육성민은 강민아를 만나러 서경대에 갔을 때 항상 강의실 뒤쪽 구석에 검은 마스크를 쓰고 야구 모자를 눌러쓴 남자를 떠올렸다.그 남자는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으려 애썼지만 육성민은 군에서의 경험 덕분에 오히려 그런 사람들에게 더 민감했다.“그놈 좀 수상해. 앞으로 조심해.”육성민이 차가운 목소리로 경고했다.강민아는 순간 멈칫했다.심은호를 수상하다고 생각하기엔 그의 이미지는 너무도 고결하고 완벽했다.육성민은 더 이상 그 주제를 이어가지 않고 바로 본론을 꺼냈다.“앞으로 어쩔 생각이야?”그는 이미 강민아가 반하준과 이혼했다는 걸 알고 있었다.그때 반우정이 깨어나며 말했다.“아빠

  • 사라진 아내, 돌아온 나   제35화

    강민아가 반우정에게 힘을 조절하라고 말하려던 찰나 반우정은 이미 작은 주먹을 힘껏 뻗고 있었다.구재성은 그대로 날아가 벽에 부딪혔다.균형을 잃고 바닥에 나뒹구는 그의 머릿속은 새하얗게 비어 있었다.“코치님, 괜찮으세요?”반우정은 얼른 구재성의 곁으로 달려갔다.그는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못한 채 가슴을 부여잡고 기침하기 시작했고 반우정은 그의 등을 두드려주었다.“웩!”아침에 먹었던 음식물이 그의 입에서 쏟아져 나왔다.“쯧.”육성민이 코를 찡그리며 혐오스럽다는 듯 혀를 찼다.강민아는 급히 걸레를 들고 바닥을 정리하기 시작했다.멀지 않은 곳에 강민아를 몰래 촬영하는 사람이 있었다.그는 곧장 촬영한 영상을 강나현에게 보내며 물었다.“이거 당신 언니 맞아?”강나현은 핸드폰 속 영상을 한참 바라보더니 웃음을 터뜨렸다.곧장 룸으로 향한 강나현은 문을 세게 열어젖혔고 안에 있던 남자들의 시선이 그녀에게 쏠렸다.그녀는 검은색 타이트한 운동복 상의와 레깅스를 입고 있어 길고 매끈한 다리가 돋보였다.긴 생머리를 가볍게 넘긴 그녀는 당당하게 반하준 옆에 앉았다.“하준 오빠, 우리 언니 좀 말려봐. 지금 헬스장에서 청소부 노릇하고 있다니까.”그녀는 조금 전 받은 영상을 반하준에게 보여줬다.순간 반하준의 눈빛이 싸늘하게 변했다.강나현은 그 변화를 느끼며 조소했다.“역시 언니는 가난한 집에서 자란 티를 못 숨겨.”청소 도구를 비품실로 가져다 둘 때 강민아의 핸드폰이 울렸다.낯선 번호였지만 구직 중이라 혹시 면접 관련 전화일까 싶어 바로 받았다.“언니, 나야.”강민아는 이미 강나현의 번호를 차단했는데 다른 번호로 걸려 온 전화였다.싸늘한 표정으로 전화를 끊으려던 순간 강나현이 말했다.“요즘 일자리 찾고 있다며? 마침 라이트 클럽에서 매니저 구하더라. 밤 10시 출근에 기본급은 160만 원, 잘하면 월 오륙백도 가능하다던데? 낮에는 정이 돌보고 밤에 정이가 잠들면 일할 수 있잖아. 언니한테 딱 맞는 일 같지 않아?”강민아는 헛웃음을 지었다.

  • 사라진 아내, 돌아온 나   제36화

    “쯧.”반하준은 핸드폰을 내려놓으며 짜증스럽게 혀를 찼다.‘아직도 날 이겨 먹으려고 하네.’강나현은 대뜸 반하준의 목을 감싸안고 장난스럽게 그의 가슴팍을 두어 번 툭툭 쳤다.그는 그녀의 행동을 거부하지 않았다.강나현은 그렇게 반하준에게 매달린 채 그와 함께 VIP 룸으로 돌아갔다.룸 안에서는 명문가 자제들이 모여 주식 시장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믿을 만한 곳에서 들은 건데 반씨 가문에서 이틀 전에 태화 증권에 120억 투자했다더라.”이들은 정보가 빠른 편이었다.강민아가 태화 증권에 백억 넘게 투자했다는 사실은 이미 퍼진 상태였다.순식간에 수많은 시선이 반하준을 향했다.반하준은 순간적으로 멈칫했지만 이내 무심한 태도로 의자에 기대며 말했다.“그냥 와이프가 운이 좋았던 거야.”사실 그는 강민아가 우연히 내부 정보를 듣고 베팅한 것이 아닌지 의심하고 있었다.‘내부 정보를 몰랐다면 무슨 배짱으로 그 많은 돈을 한 번에 투자했겠어. 하지만 주식 시장은 아무도 모르는 거야. 지금에 보면 돈을 벌고 있는 것처럼 보여도 실제 수익을 낼 수 있을지는 아직 모르는 일이지. 청소부나 하는 여자가 뭘 안다고...’반하준은 속으로 비웃었다.“당신이 준 120억과 부동산 그리고 주식들이 있으니 먹고 살 걱정은 하지 않아도 돼. 그러니 전남편 씨, 괜한 걱정은 그만해.”강민아가 했던 말이 자꾸 반하준의 귓가에 맴돌았다.‘지금 자기가 가진 자산이 온전히 자기 것이라고 착각하는 건가? 돈, 부동산, 주식... 내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회수할 수 있는데...’그때 누군가 조심스럽게 물었다.“근데 두 사람 정말 이혼한 거야?”반하준의 표정이 단숨에 싸늘해졌다.“그 여자가 투정을 부리는 중일 뿐이야. 7년 차 권태기 같은 거지. 돈 좀 쥐여 주고 실컷 놀게 내버려두면 결국 돌아올 거야.”그의 말에 모두 웃음을 터뜨렸다.“우리 하준 도련님, 정말 와이프한테 관대하네. 이렇게까지 챙겨줄 줄 몰랐어.”강나현도 덩달아 말했다.“여자는 참 피곤한 동물

  • 사라진 아내, 돌아온 나   제37화

    반현민이 신나서 외쳤다.“좋아요. 현이형! 기다릴게요.”전화를 끊은 후 강나현은 반하준을 향해 자랑스럽게 눈웃음을 지었다.“어때? 나 대단하지? 이제 오빠 아들은 내 말을 더 잘 들어.”반하준은 미간을 좁히며 단호하게 말했다.“위험한 일은 하게 하지 마.”“알았어. 나도 선은 넘지 않아. 현민이는 나랑 있어야 진정한 남자가 될 수 있다고.”...강민아가 복싱장으로 돌아왔을 때 반우정은 벌써 30분 넘게 훈련받고 있었다.분홍색 복싱 글러브를 낀 정이는 귀여운 양 갈래머리를 흔들며 규칙적인 리듬으로 샌드백을 강타하고 있었다.샌드백을 붙잡고 있는 구재성은 땀으로 온몸이 흠뻑 젖어 있었는데 마치 물속에서 건져 올린 사람 같았다.구재성은 숨을 헐떡이며 물었다.“괜찮아? 좀 쉴까?”숨을 몰아쉬며 묻는 구재성과 달리 반우정의 얼굴에는 땀 한 방울도 없었다.“아니요. 아직 100번 더 칠 수 있어요. 하나, 둘, 셋.”반우정의 기합 소리가 울려 퍼졌다.한 시간 후 구재성은 샌드백을 안고 바닥에 드러누웠다.그 모습을 본 강민아는 딸의 상태를 걱정하며 다가갔다.하지만 그녀의 입에서 나온 말은 뜻밖에도 구재성을 향한 걱정이었다.“코치님, 괜찮으세요?”구재성은 초점 없는 눈으로 천장을 바라보며 답했다.“대체 애한테 뭘 먹이는 거예요? 단백질 보충제라도 먹이나요?”“아니요. 평범한 건강식만 먹여요.”강민아가 조심스레 물었다.“정이한테 복싱 배울 자질이 있을까요?”구재성은 천장을 바라보며 떨리는 손으로 두 손가락을 펼쳐 보였다.“20% 정도 적성에 맞다는 건가요?”강민아는 긴장했다.“수업 두 번 더 하고 바로 시 대표팀으로 보내세요. 저는 더 이상 가르칠 게 없어요.”오후, 까맣게 개조된 오토바이가 굉음을 내며 헬스장 앞에 섰다.반현민은 강나현 앞에 앉아 있었고 헬멧을 올리자마자 마침 헬스장에서 나오던 강민아와 반우정을 보게 되었다.복싱 수업이 끝났음에도 여전히 흥이 남아 있었던 반우정은 공중에 주먹을 날리며 신나게 움직였다.그

Latest chapter

  • 사라진 아내, 돌아온 나   제222화

    강민아가 직접 서명한 합의서를 받아내고 말 거다.강민아는 미소를 지으며 되물었다.“내가 합의서에 사인할 것 같아?”남자는 짜증스럽게 말했다.“딱 한 번 기회 줄게. 얼마를 원하는지 말해.”반하준은 바로 백지 수표를 직접 건네주었고 강민아는 수표를 받아 들고 입꼬리를 올렸다.“펜.”제 발로 찾아온 돈인데 마다할 리가 없다.반하준은 변호사를 힐끗 쳐다봤고, 변호사는 곧바로 펜을 건넸다.강민아는 흔쾌히 수표에 숫자를 적고 반하준에게 다시 건넸다.“당신부터 사인해.”반하준은 강민아가 수표에 적은 숫자를 보며 숨이 턱 멎었다.“200억?”남자의 동공에 어두운 기운이 먹물처럼 퍼져나가며 그가 경멸 섞인 조롱을 뱉었다.“이건 사기지.”강민아가 대꾸했다.“형사님, 보시다시피 반하준이 먼저 백지 수표를 건네면서 적으라고 했어요.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인데 사기라고 모함하네요? 일부러 법을 무시하는 행위 아닌가요?”두 경찰과 변호사는 동시에 고개를 숙이고 기침을 두 번이나 했다.경찰이 조언했다.“반 대표님께서 금액을 말씀하시고 강민아 씨 의사를 묻는 게 어떻습니까?”변호사도 말렸다.“네, 저희는 진심으로 합의하기 위해서 여기까지 찾아온 거니까요.”“2억.”반하준의 말에 강민아는 헛웃음을 터뜨렸다.“당신한테는 강나현이 고작 2억밖에 안 돼?”남자의 호흡이 흐트러지며 강민아에게 경고를 날렸다.“넌 고작 보상금 2억밖에 못 받는다는 뜻이야.”강민아의 부드러운 눈매가 가늘어졌다.“반 대표님께서는 합의하러 온 게 아닌 것 같네요. 이만 가세요.”강민아가 문을 닫으려 하자 반하준의 큰 손이 문을 단단히 잡았다.“6억.”강민아는 반하준의 말투를 그대로 흉내를 내며 말했다.“여기가 시장도 아니고 왜 흥정을 하지? 반하준, 잘 들어. 기회는 딱 한 번 줄게.”반하준이 했던 말을 고스란히 돌려주었다.“200억,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200이야. 안 줄 거면 꺼져.”이내 강미아가 덧붙였다.“그 200억은 강나현 계좌에서 가져와.”

  • 사라진 아내, 돌아온 나   제221화

    반하준의 조롱하던 표정이 완전히 굳어졌다.강민아는 방금 샤워를 끝내고 머리를 말릴 겨를도 없이 서둘러 욕실을 빠져나왔다.젖은 머리카락이 어깨의 옷감을 적시고 긴 머리카락 몇 가닥이 가느다란 목에 달라붙어 있었는데, 희고 투명한 피부에 쇄골은 옷깃 위로 깊게 패 있었다.반하준은 그런 그녀를 바라보면서 목울대가 꿈틀거리며 저도 모르게 숨을 참고 있었다.두 경찰이 의미심장하게 반하준을 돌아보자 그는 기가 막힌다는 듯 웃었다.“강민아, 일부러 나 열받게 하는 거야? 나랑 나현이가 너랑 이 자식과 같아?”“반 대표님, 손부터 놓으세요.”한 경찰이 반하준을 다그쳤다.“이러면 일만 커집니다.”강민아는 손에 들고 있던 대걸레를 내려놓았고 반하준은 윤세현의 옷깃을 풀어주었다.강민아는 곧바로 윤세현의 손을 잡고 윤세현을 자신의 뒤로 보내 보호했다.윤세현의 얼굴은 창백했다. 조금 전 반하준이 옷깃을 잡자 오래전에 묻어두었던 과거의 기억들이 덩달아 튀어나왔다.반하준은 한사코 윤세현을 싸고도는 강민아의 모습에 경멸하며 콧방귀를 뀌었다.“나랑 세현이는 어렸을 때부터 같이 자라서 늘 가깝게 지냈어. 하지만 그냥 순수한 친구야. 우리 둘 사이에 정말 뭐가 있었으면 7년 전에 내가 당신을 만났겠어?”해명이 아닌 조롱이었다.[나현이랑 나는 20년 넘게 알고 지냈는데, 우리 둘 사이에 정말 뭐가 있었다면 널 만났겠어?]“반하준, 당신은 결혼생활 내내 강나현을 친구라고 곁에 뒀지만 난 당신과 결혼하고 몇 년 동안 한 번도 친구에게 연락한 적 없어. 난 당당한데 당신은 나한테 떳떳해?”반하준의 표정이 굳어지며 턱이 굳게 다물렸다.“세현이가 당신 전처 집에서 하룻밤 보내는 게 뭐가 문제야? 당신은 강나현이랑 호텔까지 가서 성인 남녀 단둘이 하룻밤을 보냈잖아. 안 그래?”반하준은 미간을 찌푸렸다.“나랑 나현이는 결백해!”강미나가 콧방귀를 뀌며 윤세현의 팔짱을 꼈다.“그래, 당신과 강나현은 세상에서 제일 깨끗하지. 그 더러운 속내로 나와 세현이 사이 모욕하지 마.

  • 사라진 아내, 돌아온 나   제220화

    반하준은 고개를 들어 팻말을 확인했다.번호가 맞다. 강민아가 정이와 함께 세를 얻어 사는 그 아파트였다.윤세현은 무채색 계열의 회색 체크무늬 잠옷을 입고 있었고, 잠옷 위에는 헐렁한 재킷을 걸치고 있었다.이제 막 스킨케어를 시작하려던 그녀는 스포츠 헤어밴드로 앞머리를 올린 상태였는데 그게 오히려 더욱 앳된 10대 소년처럼 보이게 했다.“반하준.”윤세현은 순간 얼굴을 찡그렸다.반하준과 정식으로 만난 적도 없었고, 5년 전 우연히 만난 몇 번의 만남에서도 윤세현은 그를 멀리서 바라보기만 했었다.하지만 나중에 반하준에 대한 정보를 수집했고, 강민아의 이혼 소식을 알게 된 후 반하준의 사진은 윤세현의 다트판이 되었다.어두운 시선으로 윤세현의 얼굴을 살펴보는 반하준에게서 갑갑한 압박감이 뿜어져 나왔다.“윤세현 씨?”남자는 군림하는 황제라도 되는 듯 오만하게 명령했다.“죽고 싶지 않으면 꺼지세요.”그러자 반하준을 뒤따르던 두 경찰이 동시에 헛기침했다.“반 대표님, 진정하세요!”경찰은 안중에도 없는 행위였다.“세현아.”강민아의 목소리가 욕실 유리문 너머로 들려왔다.“새 바디로션 가져오는 걸 깜빡했어.”윤세현이 곧장 답했다.“내가 갖다줄게!”조금 전 욕실에서 흐르는 물소리가 초인종 소리를 감췄다.강민아는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됐어. 나가면 그냥 네가 발라줘.”“민아야, 아직 나오지 마.”욕실에서 강민아는 의아한 듯 멈춰 섰다.윤세현은 손잡이에 손을 올려놓은 채 원수라도 되는 듯 반하준을 노려보고 있었다.“꺼져야 할 사람은 그쪽이죠.”7년 동안 반하준을 향해 쌓아왔던 분노가 이 순간 완전히 폭발했다.원수를 만났는데 눈이 뒤집힐 수밖에.엄규민이 공항에서 강민아가 다른 남자와 팔짱을 끼고 걷는 사진을 반하준에게 보냈을 때 그는 매우 불쾌했다.그러다 지금 두 눈으로 직접 낯선 남자가 잠옷 차림으로 강민아의 집에 나타난 것을 보았고, 게다가 강민아는 이 남자에게 바디로션을 발라달라고 한다.뜨거운 용암이 그의 이성을 집어삼키기

  • 사라진 아내, 돌아온 나   제219화

    심은호는 소파 주위를 두 번 돌아다니다가 육성민에게 전화를 걸었다.“여보세요.”육성민이 퉁명스럽게 전화를 받는데 다급하면서도 우렁찬 심은호의 목소리가 귓전을 울렸다.“삼촌이 빨리 가서 정이 데려와요. 민아 씨가 힘들게 오랜만에 옛사랑과 재회하는데 아무도 방해하면 안 되죠! 다음 주에 민아 씨 시범경기에 참가하니까 난 건강만 신경 쓸 거예요. 윤세현과 하룻밤 보내고 나면 기운을 차리지 못한다고요!”말하면서 심은호는 심장이 거듭 욱신거리는 것을 느꼈다.전화기 너머 헬스장에 있던 육성민은 짙은 파란색 트레이닝 복을 입고 있었는데 이미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축축하게 젖은 머리카락도 고슴도치 가시처럼 하나씩 솟아 있었다.육성민은 얇은 입술을 달싹였다. 가슴이 들썩이면서 젖은 옷 아래에 감춰진 근육이 이따금 굴곡진 선을 자랑했다.그는 한 손에는 휴대폰을, 다른 한 손에는 20㎏짜리 아령을 들고 있었다.지금 당장 심은호가 앞에 서 있다면 육성민은 아령을 손에 들고 거침없이 그의 머리를 내리쳤을 것이다.“누가 그쪽 삼촌입니까?”육성민이 욕설을 퍼부으려는데 심은호가 진지하게 물었다.“내가 삼촌이라고 부르는 게 거슬리죠? 낯설어서 그래요. 내가 몇 번 부르면 익숙해질 거예요.”육성민이 차갑게 쏘아붙였다.“죽고 싶습니까?”전화기 너머 심은호가 다시 본론으로 돌아왔다.“그쪽이 정이 안 데려가면 내가 가요. 하지만 내 주먹을 통제할 수 있을지는 장담할 수 없네요. 윤세현을 감옥에 보내고 싶지만 민아 씨가 슬퍼할 테니 그러진 못하겠죠.”육성민은 심은호의 슬픈 독백을 들으며 머릿속에서 지끈거리는 통증만 느꼈다.그는 도저히 참을 수 없어 솔직하게 다 얘기했다.“윤세현 씨는 여자고 민아 절친이에요. 당신 바보예요? 그쪽 클럽과 계약까지 했는데 아랫도리가 달려있는지 아닌지도 몰라요?”육성민의 꾸지람이 귀를 찔렀고, 심은호의 가느다란 속눈썹이 위로 쭉 뻗으며 2초 동안 머릿속이 하얘졌다.정신을 차린 그가 전화기 너머로 물었다.“윤세현이 여자라고요?”

  • 사라진 아내, 돌아온 나   제218화

    그런 그녀를 끌어당겨 서경으로 데려간 건 강민아였다.강민아에 비하면 그녀는 평범하기 그지없었다.윤세현이 서경에 온 첫해에 강민아가 장학금으로 그녀를 먹여 살렸다.문라이트 클럽에 영입된 그녀가 매니저에게 윤세현을 소개해 그녀의 내비게이터가 된 것이었다.빈센트와 다른 멤버들은 거금을 들여 데려온 해외 엔지니어라 처음에는 윤세현과 말도 하지 않았다.그런데 강민아가 그녀의 손을 잡고 계속해서 앞으로 달릴 수 있게 도왔다.두 사람이 각자의 길을 가게 됐을 때 강민아는 거의 전 재산을 털어 윤세현이 유학하는 데 보태주었다.[14살 때 반 선생님은 날 서경으로 데려와 가장 비싼 옷을 입히고, 가장 비싼 수입 문구류를 쓰게 하고, 차를 배정해 주고, 개인 아파트에 살게 해줬어. 나를 타락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과중한 노동과 불필요한 사교 활동을 멀리하고 공부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도와주신 거야. 이제 스무 살이 된 나는 너에게도 같은 삶을 주고 싶어. 뉴욕에서 제일 좋은 아파트에 살고, 제일 좋은 학교에 다니고, 의식주 모두 최고급으로 마련해주고 싶어.세현아, 난 네가 더 높이, 더 멀리 날아가는 모습을 보고 싶어.]과거 강민아가 한 말을 윤세현은 항상 기억하고 있었다.윤세현은 강민아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며 말했다.“네 말대로 여러 학과를 공부하다가 연구와는 적성이 맞지 않는다는 걸 깨닫고 미술, 디자인, 감상을 전공하게 됐어. 네가 내 비싼 학비를 지원해 주고 내가 용감하게 꿈을 이룰 수 있는 자본과 뒷심이 되어주었어. 민아야, 내가 만든 패션 브랜드는 밀란 패션쇼에 올랐고, 내가 디자인한 주얼리는 헐리워드에서 서로 뺏느라 바빠. 네 도움이 없었다면 난 정상에 오르지 못했을 거야. 네가 날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어줬어. 이젠 내가 돌아왔으니까 나도 널 돕고 싶어. 더 나은 네가 될 수 있게!”윤세현은 귓불이 붉게 물들면서도 오랫동안 마음에 간직했던 말을 용기 내어 강민아에게 전했다.강민아는 가슴에 뜨거운 열기가 소용돌이치는 것 같았다.그녀는 연분홍빛

  • 사라진 아내, 돌아온 나   제217화

    “...”할 말이 없다....저녁이 되자 강민아는 한 상 가득 차렸고 윤세현은 전부 자신이 좋아하던 음식인 것을 보고 순식간에 눈시울이 뜨거워졌다.그녀는 강민아 옆에 앉아 혀까지 삼켜버릴 기세로 고기찜을 먹기 시작했다.정신없이 허겁지겁 먹는 그녀를 정이가 빤히 바라보자 윤세현은 순간 부끄러움에 얼굴이 붉어졌다.“정아, 미안해.”정이가 고개를 가로저었다.“엄마 요리가 맛있다고 생각하는 건 나뿐만이 아니었네요. 현이 씨, 많이 먹어요!”과거 반씨 가문에서 연진숙은 강민아에게 반하준과 아이들의 하루 세 끼를 책임지라고 했는데, 강민아가 요리할 때마다 반하준과 민이는 늘 트집을 잡았다.매번 강민아가 하는 요리만 먹으면서도 민이는 그녀가 한 요리를 마지못해 먹는다며 둘러대곤 했다.“민아, 그렇게 먹기 싫으면 먹지 마.”정이가 말해봤지만 민이는 이렇게 대꾸했다.“엄마 체면 때문에 먹어주는 거야!”할머니에게 배운 버릇이라는 걸 안다. 반씨 가문 미래 후계자로서 자신이 뭘 좋아하는지 절대 남에게 드러내지 말라고 가르쳤으니까.그것도 모자라 강민아에게 더 훌륭한 재벌가 사모님이 되도록 노력하라고 했다.하지만 사람 마음에 가시가 박히면 그 가시를 빼버려도 아물지 않는 상처가 남기 마련이다.설령 엄마가 정말 부족한 게 있어도 정이는 강민아가 속상해하는 게 싫었다.게다가 정이 눈에 매일 엄마가 해준 요리를 먹는 건 무척이나 행복한 일이었다.강민아는 맛있게 먹는 윤세현을 흐뭇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그녀는 요리를 잘했지만 반씨 가문에서 7년 동안 지내면서 점차 자신의 요리 솜씨에 자신감을 잃어갔다.윤세현은 한 그릇을 뚝딱 비우고 또 한 그릇을 떠 왔다.강민아가 반찬 네 가지와 국물을 끓였는데 접시가 전부 텅텅 비어버렸다.세 사람이 식사를 마치고 윤세현과 정이는 설거지를 도맡았다. 아이는 윤세현을 데리고 아래층으로 내려가 음식물 쓰레기도 척척 버렸다.강민아가 따뜻한 물 석 잔을 따라 주방에서 나왔을 때 윤세현은 캐리어에서 접힌 서류를 꺼내 테이블

  • 사라진 아내, 돌아온 나   제216화

    그는 루나가 일부러 자신을 꼬드긴다고 생각했다.여자들이 이런 식으로 밀고 당기는 걸 수없이 봐왔으니까.하지만 루나가 원하는 스포츠카를 경매에 부쳤는데도 루나가 나타나도록 유인하는 데 실패했다.이에 반하준은 종주산에서의 레이스가 빠르고 격정적인 하룻밤 단꿈이 아니었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그런데 이번에 루나가 다시 나타난다는 말에 반하준은 엄규민에게 음성 메시지를 보냈다.“국제 레이싱 대회에서 루나가 나타나면 잘 지켜봐!”그는 루나의 헬멧을 벗기고 그녀의 진짜 모습을 보고 싶다는 강한 충동이 들었다....검은색 드림이 도로 위를 달리고 조수석에 윤세현이 앉았다.그녀는 고개를 돌려 운전하는 강민아를 바라보며 달콤한 미소를 지었다.마치 5년 전, 아니, 그보다 훨씬 더 이전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5년 동안 연락이 끊겼다가 다시 만났어도 마치 서로의 마음이 한 번도 떨어지지 않은 것처럼 조금의 어색함도 느껴지지 않았다.“발동기가 소음이 좀 심하네. 오늘 밤에 정비소로 보내서 제대로 고쳐야겠어.”강민아가 대답했다.“그래, 같이 가자.”그녀와 단둘이 있으니 윤세현은 부쩍 말수가 늘었다.“내가 돌아와서 시범경기에 참여하는 거야?”강민아는 흑백이 분명한 눈동자로 앞만 주시했다.“세현아, 난 언제 시작해도 늦지 않다고 생각해. 내가 다시 레이서의 길을 걷게 된다면 가장 먼저 함께하고 싶은 사람은 너야.”그녀의 말에 윤세현의 귀가 붉게 물들었다.“다시 레이서의 길을 가려고?”“응.”강민아는 핸들을 꽉 잡았다.“이번에는 더 이상 루나라는 이름에 숨지 않고 전 세계에 루나의 본명이 강민아라는 걸 알릴 거야.”육성민이 운전하는 SUV 뒷좌석엔 심은호와 정이가 앉아 있었다.심은호는 두 손을 운전석과 조수석 뒤편에 올려놓은 채 시선은 줄곧 이미 차들 사이로 사라진 드림을 노려보고 있었다.“쫓아가요. 바짝 붙어요. 기사님, 제 아내와 바람난 남자가 저 차 안에 있어요!”육성민의 이마가 들썩이며 푸른 핏줄이 툭 튀어나왔다.“당장 차 밖으로

  • 사라진 아내, 돌아온 나   제215화

    “루나도 시범경기에 참가한다고요?”이 소식을 처음 들은 엄규민은 강민아에게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그걸 어떻게 알아요?”하지만 이내 알 것 같았다. 윤세현이 강민아에게 말했겠지.강민아와 윤세현은 워낙 친한 사이였기 때문에 그녀가 레이싱에 대해 전혀 몰라도 윤세현으로부터 루나에 대해 들었을 것이다.루나가 시범 경기에 출전한다는 소식을 접한 빈센트는 승부욕에 불이 붙었다.“루나가 복귀한다고요?”그는 다른 동료들에게 이 소식을 전했다.“루나의 성공은 우리 덕분이라는 걸 보여줄 거예요. 우리의 도움 없이 루나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걸!”빈센트가 윤세현에게 흥분하며 말했다.“루나가 문라이트 클럽 대표의 챙김을 받아 우리보다 더 대단한 팀을 만들어야만 시범경기에서 좋은 성적을 따낼 수 있을 거야.”또 다른 엔지니어도 이렇게 말했다.“현재 전 세계에서 우리보다 더 강한 레이싱 팀은 없어. 우리는 아마추어 선수로 루나를 이길 거야. 윤세현, 똑똑히 지켜봐!”윤세현의 눈은 빨갛게 달아올랐고 얼굴은 피가 거꾸로 솟아올라 연분홍빛으로 물들었다.오만한 외국인들에게 너무 화가 나서 말도 잇지 못했다.그때 시원한 물처럼 차가운 강민아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그러면 어디 한번 두고 보죠. 너무 비참하게 지지는 않길 바라요.”강민아는 그들을 향해 담담한 미소를 짓고는 차가운 손을 윤세현의 뜨거운 볼에 갖다 댔다.“열 좀 식히고 집에 가자.”심은호는 강민아와 윤세현의 다정한 모습에 입에서 쓴맛이 느껴졌다.그는 팔짱을 낀 채 엔지니어라는 사람들을 쳐다보지도 않았다.문라이트 레이싱 클럽이 해체된 후 루나를 위해 일하던 팀원들은 여러 회사에 스카우트되어 높은 연봉을 받으며 일하게 됐다.빈센트는 문라이트 레이싱 팀에서 총괄 엔지니어로 있다가 클럽에서 일하던 경험으로 자서전까지 썼다.루나 곁에서 일했다는 경험만으로 여러 명문대에 객원 교수로 초빙되기도 했다.심은호가 일을 맡긴 매니저의 눈에 띄어 영입되었고 루나 덕에 유명세를 치렀으면서 이제 저만치 콧

  • 사라진 아내, 돌아온 나   제214화

    엄규민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윤세현이 말했다.“전 부신 그룹이 싫어요. 제가 소유한 회사 전부 부신 그룹과 협업하지 않을 거예요.”엄규민은 의아했다.“혹시 부신 그룹에 대해 어떤 오해가 있으신가요?”그가 강민아를 돌아보더니 알겠다는 듯 윤세현에게 물었다.“혹시 강민아 씨가 부신 그룹에 대해 좋지 않은 얘기를 했나요? 윤 선생님, 오해하지 마세요. 강민아 씨는 부신 그룹에 대해 모릅니다. 게다가 저희 대표님과 사이도 좋지 않습니다. 반 대표님께선 거금을 들여서 강나현 씨 레이싱 코치로 모시고 싶어 합니다. 신중하게 생각을...”“됐어요.”윤세현은 엄규민을 경계하는 표정으로 바라보더니 강민아에게 딱 붙어 그녀의 어깨에 턱을 올려놓았다.“난 루나만 위해서 일해요.”“윤세현, 하늘에서 떨어지는 돈을 왜 안 받아?”한 중년 남자가 다가왔다. 그의 이름은 빈센트, 문라이트 레이싱 클럽 엔지니어 중 한 명이었다.윤세현의 얼굴이 굳어졌다.“반하준이 세계적인 대회에서 프로 레이서가 아닌 아마추어 선수를 도와달라는데 부끄럽지 않아요?”빈센트는 대수롭지 않은 듯 두 손을 벌리며 말했다.“그냥 시범 경기잖아.”강민아는 엄규민과 윤세현의 말에서 대충 상황을 파악했다.“강나현이 국제 레이싱 대회에 출전한다고요?” 엄규민은 강민아에게 자랑스럽게 말했다.“저희 부신 그룹이 이번 서경에서 열리는 국제 레이싱 대회의 스폰서 중 하나라 강나현 씨가 레이서로 시범 경기에 출전할 예정입니다.”그러면서 웃으며 덧붙였다.“강민아 씨는 잘 모르겠지만 윤 선생님과 친구시죠? 윤 선생님은 최고의 여자 레이서 루나 선수 곁을 지켰어요. 훌륭한 내비게이터라 반 대표님께서 거액을 들여 데려가려는 거니까 강민아 씨는 윤 선생님 돈 버는 데 방해하지 마세요.”“호박에 줄 긋는다고 수박 되는 줄 아네.”강민아의 말에 엄규민의 잘난 척하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졌고, 옆에서는 윤세현이 빈센트에게 말했다.“아마추어 레이서가 시범 경기에 출전했다는 건 시범 경기에 출전할 수 있었던

Explore and read good novels for free
Free access to a vast number of good novels on GoodNovel app. Download the books you like and read anywhere & anytime.
Read books for free on the app
SCAN CODE TO READ ON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