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민아가 반우정에게 힘을 조절하라고 말하려던 찰나 반우정은 이미 작은 주먹을 힘껏 뻗고 있었다.구재성은 그대로 날아가 벽에 부딪혔다.균형을 잃고 바닥에 나뒹구는 그의 머릿속은 새하얗게 비어 있었다.“코치님, 괜찮으세요?”반우정은 얼른 구재성의 곁으로 달려갔다.그는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못한 채 가슴을 부여잡고 기침하기 시작했고 반우정은 그의 등을 두드려주었다.“웩!”아침에 먹었던 음식물이 그의 입에서 쏟아져 나왔다.“쯧.”육성민이 코를 찡그리며 혐오스럽다는 듯 혀를 찼다.강민아는 급히 걸레를 들고 바닥을 정리하기 시작했다.멀지 않은 곳에 강민아를 몰래 촬영하는 사람이 있었다.그는 곧장 촬영한 영상을 강나현에게 보내며 물었다.“이거 당신 언니 맞아?”강나현은 핸드폰 속 영상을 한참 바라보더니 웃음을 터뜨렸다.곧장 룸으로 향한 강나현은 문을 세게 열어젖혔고 안에 있던 남자들의 시선이 그녀에게 쏠렸다.그녀는 검은색 타이트한 운동복 상의와 레깅스를 입고 있어 길고 매끈한 다리가 돋보였다.긴 생머리를 가볍게 넘긴 그녀는 당당하게 반하준 옆에 앉았다.“하준 오빠, 우리 언니 좀 말려봐. 지금 헬스장에서 청소부 노릇하고 있다니까.”그녀는 조금 전 받은 영상을 반하준에게 보여줬다.순간 반하준의 눈빛이 싸늘하게 변했다.강나현은 그 변화를 느끼며 조소했다.“역시 언니는 가난한 집에서 자란 티를 못 숨겨.”청소 도구를 비품실로 가져다 둘 때 강민아의 핸드폰이 울렸다.낯선 번호였지만 구직 중이라 혹시 면접 관련 전화일까 싶어 바로 받았다.“언니, 나야.”강민아는 이미 강나현의 번호를 차단했는데 다른 번호로 걸려 온 전화였다.싸늘한 표정으로 전화를 끊으려던 순간 강나현이 말했다.“요즘 일자리 찾고 있다며? 마침 라이트 클럽에서 매니저 구하더라. 밤 10시 출근에 기본급은 160만 원, 잘하면 월 오륙백도 가능하다던데? 낮에는 정이 돌보고 밤에 정이가 잠들면 일할 수 있잖아. 언니한테 딱 맞는 일 같지 않아?”강민아는 헛웃음을 지었다.
“쯧.”반하준은 핸드폰을 내려놓으며 짜증스럽게 혀를 찼다.‘아직도 날 이겨 먹으려고 하네.’강나현은 대뜸 반하준의 목을 감싸안고 장난스럽게 그의 가슴팍을 두어 번 툭툭 쳤다.그는 그녀의 행동을 거부하지 않았다.강나현은 그렇게 반하준에게 매달린 채 그와 함께 VIP 룸으로 돌아갔다.룸 안에서는 명문가 자제들이 모여 주식 시장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믿을 만한 곳에서 들은 건데 반씨 가문에서 이틀 전에 태화 증권에 120억 투자했다더라.”이들은 정보가 빠른 편이었다.강민아가 태화 증권에 백억 넘게 투자했다는 사실은 이미 퍼진 상태였다.순식간에 수많은 시선이 반하준을 향했다.반하준은 순간적으로 멈칫했지만 이내 무심한 태도로 의자에 기대며 말했다.“그냥 와이프가 운이 좋았던 거야.”사실 그는 강민아가 우연히 내부 정보를 듣고 베팅한 것이 아닌지 의심하고 있었다.‘내부 정보를 몰랐다면 무슨 배짱으로 그 많은 돈을 한 번에 투자했겠어. 하지만 주식 시장은 아무도 모르는 거야. 지금에 보면 돈을 벌고 있는 것처럼 보여도 실제 수익을 낼 수 있을지는 아직 모르는 일이지. 청소부나 하는 여자가 뭘 안다고...’반하준은 속으로 비웃었다.“당신이 준 120억과 부동산 그리고 주식들이 있으니 먹고 살 걱정은 하지 않아도 돼. 그러니 전남편 씨, 괜한 걱정은 그만해.”강민아가 했던 말이 자꾸 반하준의 귓가에 맴돌았다.‘지금 자기가 가진 자산이 온전히 자기 것이라고 착각하는 건가? 돈, 부동산, 주식... 내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회수할 수 있는데...’그때 누군가 조심스럽게 물었다.“근데 두 사람 정말 이혼한 거야?”반하준의 표정이 단숨에 싸늘해졌다.“그 여자가 투정을 부리는 중일 뿐이야. 7년 차 권태기 같은 거지. 돈 좀 쥐여 주고 실컷 놀게 내버려두면 결국 돌아올 거야.”그의 말에 모두 웃음을 터뜨렸다.“우리 하준 도련님, 정말 와이프한테 관대하네. 이렇게까지 챙겨줄 줄 몰랐어.”강나현도 덩달아 말했다.“여자는 참 피곤한 동물
반현민이 신나서 외쳤다.“좋아요. 현이형! 기다릴게요.”전화를 끊은 후 강나현은 반하준을 향해 자랑스럽게 눈웃음을 지었다.“어때? 나 대단하지? 이제 오빠 아들은 내 말을 더 잘 들어.”반하준은 미간을 좁히며 단호하게 말했다.“위험한 일은 하게 하지 마.”“알았어. 나도 선은 넘지 않아. 현민이는 나랑 있어야 진정한 남자가 될 수 있다고.”...강민아가 복싱장으로 돌아왔을 때 반우정은 벌써 30분 넘게 훈련받고 있었다.분홍색 복싱 글러브를 낀 정이는 귀여운 양 갈래머리를 흔들며 규칙적인 리듬으로 샌드백을 강타하고 있었다.샌드백을 붙잡고 있는 구재성은 땀으로 온몸이 흠뻑 젖어 있었는데 마치 물속에서 건져 올린 사람 같았다.구재성은 숨을 헐떡이며 물었다.“괜찮아? 좀 쉴까?”숨을 몰아쉬며 묻는 구재성과 달리 반우정의 얼굴에는 땀 한 방울도 없었다.“아니요. 아직 100번 더 칠 수 있어요. 하나, 둘, 셋.”반우정의 기합 소리가 울려 퍼졌다.한 시간 후 구재성은 샌드백을 안고 바닥에 드러누웠다.그 모습을 본 강민아는 딸의 상태를 걱정하며 다가갔다.하지만 그녀의 입에서 나온 말은 뜻밖에도 구재성을 향한 걱정이었다.“코치님, 괜찮으세요?”구재성은 초점 없는 눈으로 천장을 바라보며 답했다.“대체 애한테 뭘 먹이는 거예요? 단백질 보충제라도 먹이나요?”“아니요. 평범한 건강식만 먹여요.”강민아가 조심스레 물었다.“정이한테 복싱 배울 자질이 있을까요?”구재성은 천장을 바라보며 떨리는 손으로 두 손가락을 펼쳐 보였다.“20% 정도 적성에 맞다는 건가요?”강민아는 긴장했다.“수업 두 번 더 하고 바로 시 대표팀으로 보내세요. 저는 더 이상 가르칠 게 없어요.”오후, 까맣게 개조된 오토바이가 굉음을 내며 헬스장 앞에 섰다.반현민은 강나현 앞에 앉아 있었고 헬멧을 올리자마자 마침 헬스장에서 나오던 강민아와 반우정을 보게 되었다.복싱 수업이 끝났음에도 여전히 흥이 남아 있었던 반우정은 공중에 주먹을 날리며 신나게 움직였다.그
반하준이 아이 방으로 뛰어 들어갔을 때 반현민은 침대 위에 쓰러져 있었다.그는 온몸이 벌겋게 부어오른 채 거친 숨을 내쉬고 있었다.“주치의한테 연락하세요.”반하준의 미간이 깊게 찌푸려졌다.사용인이 주저하며 말했다.“도련님 상태가 심각합니다. 의사가 올 때까지 기다리기 힘드실 거예요.”반하준은 더 이상 망설이지 않고 반현민을 번쩍 안아 들고 주차장으로 달려갔다.두 사람이 병원에 도착해 차에서 내렸을 때 병원 원장이 직접 병원 입구에서 소아과 의사들과 함께 대기하고 있었다.“대표님.”원장은 극도로 예의를 갖추며 반하준을 맞았다.반하준이 반현민을 내려놓자 간호사들은 서둘러 내부로 이동했고 의사들은 그의 옷깃을 풀어 맥박을 확인했다.“도련님께 약물 알레르기가 있나요?”의사가 묻자 반하준의 시선이 오소정을 향했다.“저는 몰라요.”오소정은 고개를 숙이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하지만 사모님은 아세요.”반하준은 싸늘한 눈빛으로 명령했다.“연락하세요.”하지만 오소정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사모님께서 제 번호를 차단했어요.”반하준은 곧바로 한 간호사를 향해 말했다.“핸드폰 좀 주세요.”그는 오소정에게 강민아의 번호를 묻고 직접 전화를 걸었다.옆에 있던 간호사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어떻게 자기 와이프 전화번호도 모를 수 있지?’오소정이 불러준 번호로 전화를 걸자 핸드폰 너머에서는 기계적인 음성이 들려왔다.“고객님의 전화는 꺼져 있으니...”엘리베이터 안에 무거운 침묵이 감돌았다.결국 오소정은 주치의에게 연락해 반현민의 최근 진료 기록을 가져왔다.의사는 기록을 확인하더니 경악하며 말했다.“10일 동안 4번이나 알레르기 반응이 있었다고요? 대표님, 정말 친아들 맞나요?”반하준의 미간이 더욱 깊어졌다.“최근에도 알레르기 반응을 보였다는 건 몰랐습니다.”반하준도 바쁜 사람이라는 걸 아는 의사는 체념하며 물었다.“약물 알레르기가 있나요?”반하준은 다시 오소정을 보았다.그러나 오소정은 긴장한 모습으로 답했다.“사모님만
반하준이 싸늘하게 말했다.“지금 아이한테까지 신경전을 벌이는 거야? 현민이 지금 목이 부어서 위험한 상태야.”“반 대표님, 당신이 2억을 송금하는 데는 3초밖에 걸리지 않잖아.”반하준의 몸에서 싸늘한 냉기가 새어 나왔다.그는 이렇게 사람에게 휘둘리는 기분이 싫었다.“강민아! 넌 정말 냉혈한이야. 너는 엄마 자격도 없어.”말하며 반하준은 강민아에게 2억을 송금했다.강민아는 입금 알림을 받자마자 핸드폰을 통해 의사에게 반현민의 알레르기 이력을 전달했다.“반하준.”핸드폰 너머로 강민아의 목소리가 들렸다.“뭐야. 2억 받고 마음이 바뀐 거야?”“아니야. 더 귀띔해 주려고 했는데 굳이 그럴 필요 없겠네.”강민아는 그대로 전화를 끊었다.사실 그녀는 반하준에게 반현민은 낯선 환경에서 잠을 잘 자지 못한다고 알려주려 했다.입원하려면 집에서 쓰던 베개, 침대 시트, 이불, 그리고 잠옷까지 가져가야 했다.예전엔 이런 것들을 다 그녀가 직접 챙겼었다.그녀가 직접 운전해 반현민을 병원에 데려갔고 집안의 사용인들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지만 반하준은 그런 걸 전혀 몰랐다.강민아는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았다.‘반현민에게 시달려 보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의사는 반현민에게 약을 투여했고 아이의 상태는 금방 안정되었다.VIP 병실에서 반현민은 이리저리 뒤척이며 도무지 잠들지 못했다.결국 그는 울기 시작했고 집에 가고 싶다며 떼를 썼다.녹초가 된 반하준은 반현민을 데리고 병원을 나올 수밖에 없었다.검은색 마이마흐가 시그니엘 별장 앞에 멈춰 섰다.반하준은 차창을 통해 저택을 바라보았다.달빛이 비단처럼 그의 날카로운 이목구비 위에 내려앉았다.그는 사람을 시켜 반현민이 하루 동안 먹은 것을 조사했고 강나현이 반현민에게 유제품을 잔뜩 먹였다는 것을 발견했다.만약 강민아가 아이를 데리고 있었다면 이런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여전히 나를 밀어내고 내가 먼저 굽히길 유도하고 있네.’시그니엘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이 한층 차가워졌다.‘여전히
강민아는 즉시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갔다.시간이 없었다.그녀는 최대한 빨리 인터넷과 전기가 있는 곳을 찾아 온라인 수학 경시대회에 참가해야 했다.근처의 카페로 갔지만 거기서도 신호가 잡히지 않았다.급한 마음에 강민아는 긴급 통화 버튼을 눌러 육성민에게 전화를 걸었다.“오빠, 나 체육관에서 인터넷 좀 쓸 수 있을까? 여긴 신호가 전혀 안 잡혀.”수화기 너머로 육성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미안, 민아야. 지금 소방 점검 때문에 체육관 폐쇄됐어.”“뭐라고?”‘어떻게 이렇게 딱 맞아떨어질 수 있지?’육성민도 이상하다고 느꼈다.“우리 집 건물도 오늘 정전됐어. 전력 회사에 전화해서 물어볼게.”“아냐. 됐어. 오빠, 내가 괜한 민폐 끼쳤네.”육성민은 바로 강민아가 사과하는 이유를 눈치챘다.굳은 표정을 한 그의 목소리가 단호해졌다.“반하준 짓이야? 너희 집 신호까지 차단한 거야?”“오빠, 지금은 그럴 시간 없어. 다 잘될 거니까 걱정하지 마.”더 이상 시간을 허비할 수는 없었다.강민아는 전화를 끊고 노트북을 품에 안은 채 빗속으로 뛰어들었다.빗자락이 그녀를 적셨고 그녀는 외투로 노트북을 꽁꽁 감쌌다.무심코 뒤를 돌아본 순간 흰색 차 한 대가 천천히 그녀를 따라오고 있었다.차량의 지붕에는 안테나가 설치되어 있었다.강민아의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그건 신호 차단 차량이었다.그녀가 발걸음을 재촉하면 차량도 속도를 맞춰 따라붙었고 그녀가 멈추면 차량도 멈췄다.반하준은 이런 식으로 그가 얼마나 쉽게 그녀의 생활을 침범할 수 있는지 경고하고 있었다.이미 이혼 서류에 사인했음에도 반하준은 그녀를 좌지우지할 수 있었고 그녀를 완전히 무너뜨릴 수도 있었다.강민아는 숨을 몰아쉬며 2km를 내달려 허름한 편의점에서 공중전화를 발견했다.그녀는 곧바로 심한기에게 전화를 걸어 자신의 상황을 설명했다.전화를 끊은 강민아는 편의점 입구에 앉아 밖에서 내리는 비를 바라보았다.심한기는 차량을 보내겠다고 했다.반하준이라면 택시 기사 하나 매수하는 것쯤은
남자의 단호한 목소리가 귓가에 울려 퍼졌다.“난 사인한 계약서 전부 휴짓조각으로 만들어버릴 수 있어. 그럼 법대로 해보던가. 결혼 7년 동안 너한테 얼마를 줘야 하는지 법원에서 판결받아 보자고.”반하준은 강민아에게 그동안 줬던 돈들이 전부 그의 자비심 덕분이었다는 걸 알려주고 싶었다. 그리고 더 이상 주고 싶지 않을 때 현실이 얼마나 잔혹한지 뼈저리게 느끼게 해주겠다고 마음먹었다.폭풍우가 휘몰아치는 상황 속에서도 강민아는 차분하기만 했다. 왜냐하면 마음이 그 어느 때보다도 굳건했으니까.“하준 씨, 권력과 계급이 영원히 존재한다는 거 알아. 하지만 당신이 영원히 높은 곳에 있을 거라는 착각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대표 사무실 안, 반하준은 순간 멍해졌고 잘못 들은 건 아닌지 의심마저 들었다. 그러다가 기가 막힌 듯 코웃음을 쳤다.“아직 꿈에서 덜 깼나? 강민아, 넌 30년을 죽어라 노력해도 나랑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없어.”넘을 수 없는 신분 차이는 태어날 때부터 정해진 것이었다.반하준은 늘 강민아를 무시했다. 18살에야 서경시로 올라온 촌뜨기 계집애가 아무리 고연대학교 영재반 출신이라는 후광이 있다 한들 무슨 소용인가?매년 부신 그룹에 들어오려고 뼈 빠지게 노력하는 가난한 집 자식들이 부지기수였다. 강민아의 양아버지가 그에게 은혜만 베풀지 않았더라도...그는 결혼으로 은혜를 갚았지만 강민아는 고마운 줄을 전혀 몰랐다.강민아와 놀아줄 만큼 한가하지 않기에 이혼 소동은 하루빨리 끝내야 했다.“강민아, 재벌 사모님 체험은 오늘부로 종료야.”반하준이 빈정거리면서 웃었다.“재산 분할 소송을 하고 싶다면 얼마든지 상대해줄게.”그에게는 전국 최고의 변호사팀이 있었다. 강민아에게 매달 쥐꼬리만한 양육비 60만 원만 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리고 반우정이 학비를 내지 못해서 귀족 어린이집에서 쫓겨나는 꼴을 지켜보게 할 수도 있었다.강민아는 반하준의 품위 있는 가면을 벗기고 냉혹하고 잔인한 본성을 드러내게 했다.반하준이 전화를 툭 끊었다. 강민
강민아는 조수석에 앉아 어찌할 바를 몰랐다.“이 차...”“7년 전에 크리스티 경매에서 샀어요. 이 차를 사려고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최고가를 불렀거든요.”다른 사람들이 얼마를 부르든 이 차를 낙찰받아야 한다는 마음에 최고가만 부를 생각으로 경매에 임했었다.이 스포츠카의 이름이 드림이었는데 7년 전 경매에서 전 세계를 떠들썩하게 만들 정도로 높은 가격에 낙찰되었다.강민아가 웃으며 말했다.“이 차를 산 사람이 은호 씨였군요.”그녀는 과거를 그리워하며 차를 쓰다듬었다.“이 차가...”강민아가 입을 열자마자 심은호가 말을 가로챘다.“알아요. 민아 씨가 드림이의 첫 번째 차주였다는 거.”그뿐만 아니라 강민아가 이 차를 몰고 레이싱 경기장을 휩쓰는 모습까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헬멧을 벗을 때 그녀의 모습은 생기가 넘쳐 흘렀다. 그녀의 웃음보다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게 없는 것 같았다.심은호가 쏟아지는 빗줄기를 보면서 물었다.“민아 씨, 꿈이 아직 남아 있나요?”강민아는 젖은 손가락으로 드림의 차 문을 몇 번이고 쓰다듬었다. 앞으로 다시는 드림이를 볼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고 레이싱 트랙을 질주하는 날도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강민아가 울먹거리면서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이 차를 되찾을 수 있도록 돈을 많이 벌 거예요. 혹시 저한테 팔 마음이 있으신지요?”그러자 심은호가 웃으며 대답했다.“기다릴게요.”심씨 저택으로 들어간 강민아는 몸에 묻은 빗물도 닦을 겨를 없이 책상 앞에 앉아 컴퓨터를 켜고 인터넷에 접속한 후 ALI 수학 경시대회 주최 측에 계속 문제를 풀겠다는 신청을 냈다.주최 측은 공정성을 고려하여 그녀에게 B형 문제를 주었고 남은 시간 동안 B형 문제를 풀고 제출하라고 했다.심은호는 팔짱을 낀 채 느긋하게 문에 기대서서 문제 풀이에 집중하고 있는 강민아를 지켜보았다.그녀는 컴퓨터 화면을 골똘히 들여다보면서 키보드를 두드렸다.이런 강민아의 모습은 아무리 봐도 질리지 않았다....부신 그룹 본사.“대표님, 사모님께
아이는 자신이 한 말이 강민아에게 아픈 가시가 될 거라는 걸 알았다.그래서 일부러 가시 돋친 말로 강민아를 자극했다.말을 마친 민이가 승리자처럼 강민아를 주시하며 그녀가 아프고 고통스러운 기색을 드러내길 기다렸다.가장 가까운 사람일수록 어딜 찔러야 제일 아픈지 잘 알았다.시골에서 태어나 레이싱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강민아 같은 여자는 반씨 가문 도련님의 엄마가 될 자격이 없었다.“민아, 만약 내가 시범 경기에서 1등 하면?”강나현은 눈을 가늘게 뜨고 서늘한 미소를 숨기지 못했다.민이의 말에 기분이 몹시 불쾌했다.민이에게 자신의 마음을 쏟아부었고 많은 공을 들였는데, 아이는 루나의 이름만 들으면 강나현에게 새엄마가 되는 걸 도와주겠다고 한 약속을 잊었다.구름 목장 비탈길에서 보낸 그날 밤 이후, 민이의 마음속 강하고 무적인 강나현의 이미지는 무너진 지 오래였다.그렇게 강한 사람이 왜 아빠에게 엉덩이를 맞겠나.그조차 아빠에게 고작 손바닥 열 대를 맞았을 뿐인데 말이다.강나현이 엉덩이를 맞고 울부짖으며 침까지 질질 흘리면서 사과하는 모습을 민이는 도저히 눈 뜨고 볼 수가 없었다.게다가 다음 날 아침 강나현은 그대로 기절했다.민이가 본 강나현의 얼굴은 벌레에게 물려 돼지처럼 우락부락했고 눈꺼풀은 퉁퉁 부어오른 채 반하준의 부하들 손에 이끌려 비탈길에서 옮겨졌다.민이는 심지어 어디 가서 그녀와 아는 사이라는 걸 말하고 싶지 않았다.더 대단한 엄마를 간절히 원하고 있었다.민이는 강나현의 시선을 피하며 작아진 목소리로 말했다.“현이 형이 1등 해도 생각해 볼게요.”말할수록 목소리는 더더욱 어눌해졌지만 강나현은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었다.“민아 언니, 빨리 나가. 스태프가 아무 상관 없는 사람이 루나 휴게실에 멋대로 들어온 걸 알면 쫓겨날 거야. 그러면 망신인데?”강민아의 시선이 강나현의 허벅지로 향했다.“난 네가 참 대단한 것 같아. 역시 낯짝이 두꺼운 사람은 다른 가죽도 두껍나 봐.”강민아의 말에 강나현은 허벅지와 엉덩이가 다
“루나, 만나서 반가워요!”민이의 또렷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지만 휴게실에 앉아있는 상대를 보는 순간 굳어버렸다.드레스룸으로 들어가려던 강민아는 민이와 두 눈이 마주쳤다.민이의 들뜬 표정은 순식간에 굳어버리고 단호한 표정으로 가만히 강민아를 바라보았다.“왜 여기 있어요?”강나현과 민이 뒤에는 사람들로 우글거렸고 카메라맨이 강민아와 윤세현을 향해 카메라를 들이댔다.윤세현은 많은 사람들이 출입구를 막고 있는 것을 보고 순간적으로 당황해서 강민아와 몸을 바짝 붙였다.“강민아, 네가 왜 루나 휴게실에 있어?”강나현은 너무 놀라서 말투까지 바뀌었고, 민이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윤세현을 바라보았다.“그쪽이 루나에요?”말하며 민이는 머리를 긁적였다.윤세현은 헐렁한 그레이 트레이닝복을 입고 있었고, 키가 큰 데다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머리를 아주 짧게 깎았기 때문에 처음 본 사람은 누구나 성별을 오해할 수 있었다.사람들은 그저 앳되게 생긴 미소년이라고만 생각했다.윤세현은 강민아의 소매를 붙잡으며 고개를 저었다.“난 루나가 아니야.”강나현이 눈을 가늘게 뜨고 강민아와 붙어있는 윤세현을 훑어보았다.눈앞에 있는 사람이 어딘가 낯이 익었다.그러다 강나현은 문득 7년 전에 이 ‘남자'를 본 적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 냈다.강민아가 그녀의 언니라는 걸 알게 된 후 그녀는 직접 미행에 나섰고 여러 번 강민아를 미행할 사람을 보내기도 했다.어쩌다 강민아에게 소꿉친구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 ‘남자'는 운 좋게도 루나의 내비게이터가 되었다.윤세현이 유명해진 후 바로 강민아를 버리고 해외로 떠나버려 강나현은 오랫동안 행복해했다.이후 반하준으로부터 윤세현을 자신의 레이싱 코치로 영입하려 한다는 말을 듣게 된 강나현은 비천한 강민아의 ‘소꿉친구’에게 경멸과 호기심을 동시에 느꼈다.강나현은 팔짱을 낀 채 아니꼬운 시선으로 강민아와 윤세현을 훑어보았다.“민아 언니, 이건 너무 심하잖아. 여긴 루나의 휴게실이야. 멋대로 들어와서 루나의
강나현의 요란한 등장에 주변을 지나가던 스태프들이 옆으로 흘깃 쳐다보았다.“저 여자는 누구야? 등장 한번 요란하네. 연예인 같지도 않은데.”스태프들은 목을 쭉 빼서 강나현의 얼굴을 보고는 실망스러운 표정을 지었다.또 다른 스태프는 팔짱을 낀 채 무시하듯 말했다.“대단하신 스폰서가 대회 시범 경기에 억지로 끼워 넣은 아마추어, 강나현이지.”국제 레이싱 대회의 시범 경기는 공식 레이스가 아니지만, 개막식에 등장하는 레이서들은 국제적으로 유명한 현역 선수거나 은퇴했지만 한때 큰 상을 받은 레이서, 또는 레이싱 업계에 큰 공헌을 한 매니저나 대표였다.이런 사람만이 시범 경기에 출전할 자격이 주어지는 이유는 레이스의 분위기를 고조시키기 위해서였다.수상 경력도, 유명세도 없는 강나현이 대결 명단에 떡하니 이름을 올리니 다른 선수들은 하나같이 누구냐고 물었다.그러다 정체를 알아내고는 다들 깜짝 놀란다.강나현은 최근 다섯 살배기 남자아이와 오토바이를 타는 영상으로 큰 관심과 화젯거리를 모은 인플루언서였다.물론 그녀의 영상을 보고 욕설을 퍼붓고 신고하는 사람들도 많았다.하지만 그녀가 계약한 소속사가 부신 그룹 소속이고, 부신 그룹 대표의 처제인 만큼 부신 그룹에서도 많은 신경을 쓰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네티즌들이 아무리 강나현을 신고해도 소용이 없었다.지난주에는 레이싱계를 뒤흔든 또 하나의 큰 소식이 있었다.부신 그룹 대표가 거액을 쏟아부어 문라이트 레이싱 클럽을 위해 일하던 엔지니어, 기술자들을 모두 빼돌려 그들이 강나현만을 위해 일하게 만든 것이었다.레이싱 업계 사람들은 부신 그룹의 비겁한 행위에 경악했다.강나현은 전문가 촬영팀과 메이크업 스타일링 팀을 고용해 자신을 꾸몄다.레이서의 신분으로 국제 레이싱 대회에 참가하는 모습을 브이로그로 찍어 인터넷에 올릴 생각이었다.이런 영상이 공개되면 폭발적인 인기를 끌 것이 분명했다.그녀가 대회에 참가하는 게 많은 논란을 일으켰지만 전부 그녀를 질투한다고 치부하며 강나현은 사람들의 질투를 즐겼다.
변호사는 영상을 올린 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반 대표님, 강나현 씨 사과 영상을 올렸습니다.”변호사가 강나현의 SNS를 새로 고침하자, 반하준이 가장 먼저 ‘좋아요'를 누른 것을 확인했다.반하준은 강나현의 SNS를 강민아에게 보여줬고 강민아는 자신의 휴대폰에서 스톱워치를 종료했다.반하준이 말하지 않아도 그녀는 알아서 합의서에 사인하고는 경찰에게 건넨 뒤 웃으며 반하준에게 말했다.“하루빨리 ‘좋아요’ 999개를 모으길 바라.”반하준이 말하려는데 강민아가 덧붙였다.“빈센트 일행이 강나현을 데리고 시범 경기에 등장하는 날만 기다릴게. 당신이랑 강나현이 제대로 망신당하려면 아직 멀었어.”남자는 그녀를 오만하게 내려다보며 비웃었다.“빈센트도 알아?”윤세현을 돌아보는 그의 눈빛에는 짙은 적대감이 가득했다.강민아가 어떻게 레이싱에 대해 알겠나. 분명 윤세현이 그가 강나현을 위해 거금을 들여 문라이트 레이싱 클럽 엔지니어 팀을 데려갔다는 걸 말했을 거다.강민아는 두 경찰에게 말했다.“두 분은 빨리 반 대표님 데리고 나가주세요. 전처로서 제 생할 구역에 이 사람이 나타나는 게 반갑지 않거든요.”두 경찰 역시 반하준이 강민아의 집에서 더 이상 문제를 일으키는 것을 원치 않았다.“반 대표님, 가시죠.”“강민아 씨, 합의서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더 귀찮게 하지 않겠습니다.”강민아가 분명하게 말했다.“합의서를 제출했다고 용서한 건 아니에요. 강나현이 두 번이나 사과했어도 진심으로 뉘우치지 않은 것처럼요.”그러고는 웃으며 반하준에게 말했다.“우린 대회에서 봐.”강민아의 얼굴에 번진 미소가 너무도 싱그러워 반하준은 알 수 없는 무아지경에 빠졌다.그녀의 이런 표정은 평소 강민아가 그를 위해 특별히 깜짝선물을 준비했을 때 보이던 것이었다.하지만 두 사람은 이미 이혼했는데 이 여자는 대체 그를 위해 어떤 서프라이즈를 준비했을까?...레이싱 대회 당일.국제 레이싱 대회 개막 1시간 전, 관중석은 이미 사람들로 가득 찼다.평소 강나현과
만약 반하준이 지금 강나현 앞에 있었다면 그녀의 수상한 감정 변화를 알아차렸을 거다.“반 대표님, 사과문 다 작성했습니다.”휴대폰에서 변호사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반하준은 강민아의 휴대폰에 속 시간을 슬쩍 보고는 강나현 측 변호사에게 명령했다.“그대로 읽게 하고 영상 찍어.”변호사는 삼각대를 가져와 휴대폰을 고정한 뒤 강나현이 카메라를 마주하고 종이에 적힌 내용을 읽을 수 있도록 종이를 휴대폰 옆에 놓았다.강나현은 혀를 깨물고 죽고 싶은 마음이었다.‘강민아, 사람 괴롭히는 것도 정도가 있지!’하지만 국제 레이싱 대회 시범경기에 출전하면 반하준은 그녀가 반유하의 소원을 대신 이루어주었다고 생각할 것이고, 그때부터 그녀는 반하준 옆에서 가장 특별한 여자가 될 것이라는 생각이 금세 떠올랐다.대회에 나가기만 하면 지금 잃어버린 명예도, 자신과 형제라 칭하던 남자들도 모두 돌아올 것이다!코를 훌쩍이자 비릿한 피 냄새가 느껴졌지만 강나현은 변호사가 대신 써 준 사과문 내용을 한 글자 한 글자 읽어 내려갔다.“여, 여러분, 안녕하세요. 저는 강나현이라고 합니다. 제... 제가 구름 목장에서...”강나현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한 채 혀를 깨물었다.눈꺼풀의 부기가 가라앉자마자 휴대폰을 꺼내 ‘서경팸' 단톡방을 확인했지만 그곳엔 강나현 혼자 남아 있었다.반하준이 단톡방을 나가니 다른 사람들도 그 뒤를 따랐다.그러다 강성진에게 죽도로 엉덩이를 맞으며 사과하는 영상을 반하준이 단톡방에 보내자 그곳에 있는 사람들이 전부 보고 그녀를 비난했다.강나현은 바로 친한 친구라고 생각했던 이들에게 문자를 몇 통이나 보냈지만 재벌 2세들은 진작 그녀를 삭제한 지 오래였다.화가 나서 피까지 토한 강나현은 강민아에 대한 살기가 최고조에 달했다.절친한 친구들에게 다시 전화를 걸려고 할 때쯤 경찰이 강나현의 휴대전화를 압수해 갔다.이제 또다시 사과 영상을 찍고 SNS에 올려 창피를 당해야 하는데 도저히 내키지 않았다.“1분 남았어.”강민아의 맑고 청아한 목소리가
강민아가 휴대폰의 스톱워치를 누른 뒤 반하준에게 밝은 화면을 보여주었다.쉴 새 없이 바뀌는 타이머 숫자를 보니 반하준의 가슴에 총알이 박히는 것 같았다.한때 그도 강민아를 이런 식으로 대했다.그리고 지금, 오만하고 안하무인인 부신 그룹 대표가 시한폭탄에 묶여 있었다.경찰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강민아 씨가 아주 좋은 제안을 했어요. 반 대표님, 강나현 씨가 사과 영상을 찍도록 설득해 주세요. SNS에서 좋아요 999개를 모으면 저희도 그 영상으로 윗선에 보고하기 편하니까요.”반하준은 처음으로 불판 위에 올라가 구워지는 느낌을 받았다.그 느낌은 무척이나 불쾌했다.그는 얼굴을 찡그리며 마지못해 휴대전화를 꺼냈고, 강민아가 켜놓은 타이머 앞에서 어쩔 수 없이 전화를 걸었다.언젠가 그가 강민아의 협박을 받게 될 거라고 생각이나 했을까.하지만 강민아에게 이토록 짓밟히면서도 반하준은 오히려 심장이 세차게 뛰는 것을 느꼈다.강나현은 현재 구치소에 수감되어 휴대폰을 사용할 수 없었지만 반하준은 강나현의 곁을 지킬 변호사를 불렀다.변호사는 전화를 받은 후 반하준의 지시에 따라 스피커 모드로 돌려 양손에 수갑이 채워진 채 금속 의자에 앉아있는 강나현이 반하준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했다.“나현아, 지금 당장 경찰의 지시에 따라 사과 영상을 찍고 그 영상을 SNS에 올려서 좋아요 999개를 받아.”강나현은 어리둥절했다.“하준 씨, 내가 왜 그래야 하는데?”벌거벗고 사람들 앞에서 돌아다니며 망신을 당하는 것과 뭐가 다른가.“좋아요 999개를 받아야 네가 풀려나.”강나현은 울기 직전이었다.“싫어! 그건 너무 창피해!”강민아는 손톱으로 휴대폰 화면 속 시간을 살며시 두드렸다.반하준에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상기시키며 하품하더니 나른한 목소리로 말했다.“3분이 지나도 강나현이 영상을 녹화하지 않으면 난 절대 합의서에 사인 안 해.”강민아의 목소리를 들은 강나현은 불이 달린 폭죽처럼 발끈했다.“강민아, 또 네가 꾸며낸 수작이지?”강
강민아가 직접 서명한 합의서를 받아내고 말 거다.강민아는 미소를 지으며 되물었다.“내가 합의서에 사인할 것 같아?”남자는 짜증스럽게 말했다.“딱 한 번 기회 줄게. 얼마를 원하는지 말해.”반하준은 바로 백지 수표를 직접 건네주었고 강민아는 수표를 받아 들고 입꼬리를 올렸다.“펜.”제 발로 찾아온 돈인데 마다할 리가 없다.반하준은 변호사를 힐끗 쳐다봤고, 변호사는 곧바로 펜을 건넸다.강민아는 흔쾌히 수표에 숫자를 적고 반하준에게 다시 건넸다.“당신부터 사인해.”반하준은 강민아가 수표에 적은 숫자를 보며 숨이 턱 멎었다.“200억?”남자의 동공에 어두운 기운이 먹물처럼 퍼져나가며 그가 경멸 섞인 조롱을 뱉었다.“이건 사기지.”강민아가 대꾸했다.“형사님, 보시다시피 반하준이 먼저 백지 수표를 건네면서 적으라고 했어요.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인데 사기라고 모함하네요? 일부러 법을 무시하는 행위 아닌가요?”두 경찰과 변호사는 동시에 고개를 숙이고 기침을 두 번이나 했다.경찰이 조언했다.“반 대표님께서 금액을 말씀하시고 강민아 씨 의사를 묻는 게 어떻습니까?”변호사도 말렸다.“네, 저희는 진심으로 합의하기 위해서 여기까지 찾아온 거니까요.”“2억.”반하준의 말에 강민아는 헛웃음을 터뜨렸다.“당신한테는 강나현이 고작 2억밖에 안 돼?”남자의 호흡이 흐트러지며 강민아에게 경고를 날렸다.“넌 고작 보상금 2억밖에 못 받는다는 뜻이야.”강민아의 부드러운 눈매가 가늘어졌다.“반 대표님께서는 합의하러 온 게 아닌 것 같네요. 이만 가세요.”강민아가 문을 닫으려 하자 반하준의 큰 손이 문을 단단히 잡았다.“6억.”강민아는 반하준의 말투를 그대로 흉내를 내며 말했다.“여기가 시장도 아니고 왜 흥정을 하지? 반하준, 잘 들어. 기회는 딱 한 번 줄게.”반하준이 했던 말을 고스란히 돌려주었다.“200억,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200이야. 안 줄 거면 꺼져.”이내 강미아가 덧붙였다.“그 200억은 강나현 계좌에서 가져와.”
반하준의 조롱하던 표정이 완전히 굳어졌다.강민아는 방금 샤워를 끝내고 머리를 말릴 겨를도 없이 서둘러 욕실을 빠져나왔다.젖은 머리카락이 어깨의 옷감을 적시고 긴 머리카락 몇 가닥이 가느다란 목에 달라붙어 있었는데, 희고 투명한 피부에 쇄골은 옷깃 위로 깊게 패 있었다.반하준은 그런 그녀를 바라보면서 목울대가 꿈틀거리며 저도 모르게 숨을 참고 있었다.두 경찰이 의미심장하게 반하준을 돌아보자 그는 기가 막힌다는 듯 웃었다.“강민아, 일부러 나 열받게 하는 거야? 나랑 나현이가 너랑 이 자식과 같아?”“반 대표님, 손부터 놓으세요.”한 경찰이 반하준을 다그쳤다.“이러면 일만 커집니다.”강민아는 손에 들고 있던 대걸레를 내려놓았고 반하준은 윤세현의 옷깃을 풀어주었다.강민아는 곧바로 윤세현의 손을 잡고 윤세현을 자신의 뒤로 보내 보호했다.윤세현의 얼굴은 창백했다. 조금 전 반하준이 옷깃을 잡자 오래전에 묻어두었던 과거의 기억들이 덩달아 튀어나왔다.반하준은 한사코 윤세현을 싸고도는 강민아의 모습에 경멸하며 콧방귀를 뀌었다.“나랑 세현이는 어렸을 때부터 같이 자라서 늘 가깝게 지냈어. 하지만 그냥 순수한 친구야. 우리 둘 사이에 정말 뭐가 있었으면 7년 전에 내가 당신을 만났겠어?”해명이 아닌 조롱이었다.[나현이랑 나는 20년 넘게 알고 지냈는데, 우리 둘 사이에 정말 뭐가 있었다면 널 만났겠어?]“반하준, 당신은 결혼생활 내내 강나현을 친구라고 곁에 뒀지만 난 당신과 결혼하고 몇 년 동안 한 번도 친구에게 연락한 적 없어. 난 당당한데 당신은 나한테 떳떳해?”반하준의 표정이 굳어지며 턱이 굳게 다물렸다.“세현이가 당신 전처 집에서 하룻밤 보내는 게 뭐가 문제야? 당신은 강나현이랑 호텔까지 가서 성인 남녀 단둘이 하룻밤을 보냈잖아. 안 그래?”반하준은 미간을 찌푸렸다.“나랑 나현이는 결백해!”강미나가 콧방귀를 뀌며 윤세현의 팔짱을 꼈다.“그래, 당신과 강나현은 세상에서 제일 깨끗하지. 그 더러운 속내로 나와 세현이 사이 모욕하지 마.
반하준은 고개를 들어 팻말을 확인했다.번호가 맞다. 강민아가 정이와 함께 세를 얻어 사는 그 아파트였다.윤세현은 무채색 계열의 회색 체크무늬 잠옷을 입고 있었고, 잠옷 위에는 헐렁한 재킷을 걸치고 있었다.이제 막 스킨케어를 시작하려던 그녀는 스포츠 헤어밴드로 앞머리를 올린 상태였는데 그게 오히려 더욱 앳된 10대 소년처럼 보이게 했다.“반하준.”윤세현은 순간 얼굴을 찡그렸다.반하준과 정식으로 만난 적도 없었고, 5년 전 우연히 만난 몇 번의 만남에서도 윤세현은 그를 멀리서 바라보기만 했었다.하지만 나중에 반하준에 대한 정보를 수집했고, 강민아의 이혼 소식을 알게 된 후 반하준의 사진은 윤세현의 다트판이 되었다.어두운 시선으로 윤세현의 얼굴을 살펴보는 반하준에게서 갑갑한 압박감이 뿜어져 나왔다.“윤세현 씨?”남자는 군림하는 황제라도 되는 듯 오만하게 명령했다.“죽고 싶지 않으면 꺼지세요.”그러자 반하준을 뒤따르던 두 경찰이 동시에 헛기침했다.“반 대표님, 진정하세요!”경찰은 안중에도 없는 행위였다.“세현아.”강민아의 목소리가 욕실 유리문 너머로 들려왔다.“새 바디로션 가져오는 걸 깜빡했어.”윤세현이 곧장 답했다.“내가 갖다줄게!”조금 전 욕실에서 흐르는 물소리가 초인종 소리를 감췄다.강민아는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됐어. 나가면 그냥 네가 발라줘.”“민아야, 아직 나오지 마.”욕실에서 강민아는 의아한 듯 멈춰 섰다.윤세현은 손잡이에 손을 올려놓은 채 원수라도 되는 듯 반하준을 노려보고 있었다.“꺼져야 할 사람은 그쪽이죠.”7년 동안 반하준을 향해 쌓아왔던 분노가 이 순간 완전히 폭발했다.원수를 만났는데 눈이 뒤집힐 수밖에.엄규민이 공항에서 강민아가 다른 남자와 팔짱을 끼고 걷는 사진을 반하준에게 보냈을 때 그는 매우 불쾌했다.그러다 지금 두 눈으로 직접 낯선 남자가 잠옷 차림으로 강민아의 집에 나타난 것을 보았고, 게다가 강민아는 이 남자에게 바디로션을 발라달라고 한다.뜨거운 용암이 그의 이성을 집어삼키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