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의 단호한 목소리가 귓가에 울려 퍼졌다.“난 사인한 계약서 전부 휴짓조각으로 만들어버릴 수 있어. 그럼 법대로 해보던가. 결혼 7년 동안 너한테 얼마를 줘야 하는지 법원에서 판결받아 보자고.”반하준은 강민아에게 그동안 줬던 돈들이 전부 그의 자비심 덕분이었다는 걸 알려주고 싶었다. 그리고 더 이상 주고 싶지 않을 때 현실이 얼마나 잔혹한지 뼈저리게 느끼게 해주겠다고 마음먹었다.폭풍우가 휘몰아치는 상황 속에서도 강민아는 차분하기만 했다. 왜냐하면 마음이 그 어느 때보다도 굳건했으니까.“하준 씨, 권력과 계급이 영원히 존재한다는 거 알아. 하지만 당신이 영원히 높은 곳에 있을 거라는 착각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대표 사무실 안, 반하준은 순간 멍해졌고 잘못 들은 건 아닌지 의심마저 들었다. 그러다가 기가 막힌 듯 코웃음을 쳤다.“아직 꿈에서 덜 깼나? 강민아, 넌 30년을 죽어라 노력해도 나랑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없어.”넘을 수 없는 신분 차이는 태어날 때부터 정해진 것이었다.반하준은 늘 강민아를 무시했다. 18살에야 서경시로 올라온 촌뜨기 계집애가 아무리 고연대학교 영재반 출신이라는 후광이 있다 한들 무슨 소용인가?매년 부신 그룹에 들어오려고 뼈 빠지게 노력하는 가난한 집 자식들이 부지기수였다. 강민아의 양아버지가 그에게 은혜만 베풀지 않았더라도...그는 결혼으로 은혜를 갚았지만 강민아는 고마운 줄을 전혀 몰랐다.강민아와 놀아줄 만큼 한가하지 않기에 이혼 소동은 하루빨리 끝내야 했다.“강민아, 재벌 사모님 체험은 오늘부로 종료야.”반하준이 빈정거리면서 웃었다.“재산 분할 소송을 하고 싶다면 얼마든지 상대해줄게.”그에게는 전국 최고의 변호사팀이 있었다. 강민아에게 매달 쥐꼬리만한 양육비 60만 원만 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리고 반우정이 학비를 내지 못해서 귀족 어린이집에서 쫓겨나는 꼴을 지켜보게 할 수도 있었다.강민아는 반하준의 품위 있는 가면을 벗기고 냉혹하고 잔인한 본성을 드러내게 했다.반하준이 전화를 툭 끊었다. 강민
강민아는 조수석에 앉아 어찌할 바를 몰랐다.“이 차...”“7년 전에 크리스티 경매에서 샀어요. 이 차를 사려고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최고가를 불렀거든요.”다른 사람들이 얼마를 부르든 이 차를 낙찰받아야 한다는 마음에 최고가만 부를 생각으로 경매에 임했었다.이 스포츠카의 이름이 드림이었는데 7년 전 경매에서 전 세계를 떠들썩하게 만들 정도로 높은 가격에 낙찰되었다.강민아가 웃으며 말했다.“이 차를 산 사람이 은호 씨였군요.”그녀는 과거를 그리워하며 차를 쓰다듬었다.“이 차가...”강민아가 입을 열자마자 심은호가 말을 가로챘다.“알아요. 민아 씨가 드림이의 첫 번째 차주였다는 거.”그뿐만 아니라 강민아가 이 차를 몰고 레이싱 경기장을 휩쓰는 모습까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헬멧을 벗을 때 그녀의 모습은 생기가 넘쳐 흘렀다. 그녀의 웃음보다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게 없는 것 같았다.심은호가 쏟아지는 빗줄기를 보면서 물었다.“민아 씨, 꿈이 아직 남아 있나요?”강민아는 젖은 손가락으로 드림의 차 문을 몇 번이고 쓰다듬었다. 앞으로 다시는 드림이를 볼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고 레이싱 트랙을 질주하는 날도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강민아가 울먹거리면서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이 차를 되찾을 수 있도록 돈을 많이 벌 거예요. 혹시 저한테 팔 마음이 있으신지요?”그러자 심은호가 웃으며 대답했다.“기다릴게요.”심씨 저택으로 들어간 강민아는 몸에 묻은 빗물도 닦을 겨를 없이 책상 앞에 앉아 컴퓨터를 켜고 인터넷에 접속한 후 ALI 수학 경시대회 주최 측에 계속 문제를 풀겠다는 신청을 냈다.주최 측은 공정성을 고려하여 그녀에게 B형 문제를 주었고 남은 시간 동안 B형 문제를 풀고 제출하라고 했다.심은호는 팔짱을 낀 채 느긋하게 문에 기대서서 문제 풀이에 집중하고 있는 강민아를 지켜보았다.그녀는 컴퓨터 화면을 골똘히 들여다보면서 키보드를 두드렸다.이런 강민아의 모습은 아무리 봐도 질리지 않았다....부신 그룹 본사.“대표님, 사모님께
반현민이 불만을 터뜨렸다.“반현민.”그때 강나현의 목소리가 들리자마자 반현민이 쏜살같이 달려갔다.“현이 형, 왜 이제야 와요!”“우리 민이 주려고 이거 사느라 늦었어.”강나현이 뒤에 숨겼던 기계식 석궁을 꺼냈다.“우와.”검은 기계식 석궁을 본 순간 반현민의 눈에서 빛이 날 지경이었다.강나현은 반현민이 이런 걸 좋아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강민아는 기계식 석궁을 만지지도 못하게 했다.“기계식 석궁을 들고 있으니까 엄청 멋있네.”그 말에 반현민은 참지 못하고 활을 쏘는 멋진 자세를 취했다.“현이 형, 화살은요? 화살 줘요.”강나현은 반현민에게 정교하고 날카로운 금속 화살을 건넸다. 반현민은 화살을 보자마자 입이 귀에 걸렸다.“드디어 플라스틱 화살이 아니네요. 난 형이 너무 좋아요.”“남자애라면 그래도 살상력이 있는 진짜 활을 가지고 놀아야지. 그래야 남자답게 커.”반현민은 흥분을 감추지 못하면서 금속 화살을 석궁에 장착하고는 여기저기 조준했다.그때 강나현의 시선이 반우정에게 향했다.“우정아, 엄마가 아직도 데리러 안 왔어?”반우정은 그녀를 쳐다보지도 않았다.“엄마가 바쁜 일 끝내고 금방 데리러 온댔어요.”“너희 엄마도 참. 책임감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어.”강나현은 밖으로 나가 반하준에게 전화를 걸었다.“시간이 벌써 이렇게 늦었는데 민아 언니 아직도 정이를 데리러 안 왔어. 애가 어찌나 배가 고팠으면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다 난다니까. 지금 언니랑 연락도 안 되는데 언니네 오빠 헬스장에 가볼까?”“그럴 필요 없어. 내가 지금 정이 데리러 갈게.”반하준의 목소리는 한겨울의 눈보라처럼 귀를 얼어붙게 할 정도로 차가웠다.사실 강나현이 헬스장에 간다고 해서 강민아를 만날 일은 없었다. 강민아는 심씨 저택에 들어간 후 한 번도 가지 않았다.‘대체 심은호와 뭘 하고 있길래 정이를 데리러 가는 것조차 잊어버린 거야?’...심씨 저택.강민아는 시간이 종료되기 직전에 모든 문제를 풀었다. 다른 수험생들보다 거의 세 시간이나
강민아는 7년 만에 다시 드림의 운전석에 앉았다.혈관 속의 수많은 세포들이 되살아나는 듯 엔진 소리에 맞춰 활발하게 움직였다.강민아는 저도 모르게 몸이 떨렸고 빠르게 뛰는 심장박동 소리가 귓가에 들렸다. 지금 이 순간 마치 다시 살아난 것 같았다.심은호는 조수석에 앉아 스피드와 강렬한 충격을 즐겼다.오늘의 드림은 예전과 달랐다. 강민아의 손에서 새롭게 태어났다.“과속 딱지 끊기면 내 걸로 하면 돼요.”강민아는 흥분한 마음을 애써 눌렀다.“아니에요. 과속으로 찍히면 내가 벌점 받을게요.”드림이 도로를 질주하면서 내는 굉음은 지나가는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방금 뭐가 지나가지 않았어?”“제비인가? 휙 하고 내 앞을 지나갔어.”“이 계절에 무슨 제비야. 귀신을 본 거겠지.”길 양쪽의 행인들이 왁자지껄하게 떠들어댔다.강민아는 도로에서 강나현과 어울려 다니던 부잣집 도련님들을 다시 만났다. 그들의 튜닝 차량, 크게 틀어 놓은 음악, 번쩍이는 네온사인 불빛이 어두운 도로에서 유독 눈에 띄었다.드림은 교통 법규를 무시한 혼란스러운 차량들 속에서도 마음껏 누비고 다니다가 눈 깜짝할 사이에 부잣집 도련님들을 추월했다.“젠장. 뭐야, 저게?”차 안에 있던 사람들이 놀라 소리를 질렀다. 그때 누군가가 차량용 블랙박스 영상을 확인하고는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대박. 드림이야. 살아있는 드림을 봤어. 국내 최초로 국제 랠리 대회에서 3위 안에 든 여성 레이서의 레이싱카가 바로 드림이야.”벌써 흥분해서 전화하는 사람도 있었다.“지금 당장 도로 CCTV를 알아봐. 드림이 어디로 갔는지 알아야 해.”“드림의 원래 차주가 오래전에 차를 팔았다던데. 7년 전에 우리나라 사람이 드림을 1400억에 낙찰받았다고 들었어.”“방금 속도는 프로 레이서가 낸 속도겠지? 일반인이었다면 벌써 사고 났을 거야.”“드림의 차주를 꼭 만나야겠어. 차체라도 만져보면 한이 없겠다.”“여보세요? 나현아, 나 드림을 봤어. 진짜라니까. 제대로 보지는 못했지만 블랙박스에 찍
교실 문 앞, 십여 명의 경호원들이 육성민을 에워쌌고 반하준은 계단 아래에 서서 위압적인 분위기를 풍겼다. 육성민을 쳐다보는 눈빛은 마치 높은 곳에 있는 신이 보잘것없는 개미 새끼 한 마리를 보는 듯했다.“정아, 이리 와. 아빠랑 집에 가자.”반하준의 말투는 무척이나 강압적이었다. 반우정이 육성민에게 다가가는 걸 본 순간 이미 딸에게 인내심을 잃어버린 상태였다.반우정이 반하준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난 외삼촌이랑 집에 갈래요.”그러자 반하준이 차갑게 웃었다.“저 사람이 널 어디 데려갈 수 있는데? 집이나 있대? 정아, 저 사람을 따라가면 길바닥에서 자야 해.”“우정아.”그때 강민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반우정은 강민아를 보자마자 신난 얼굴로 손을 흔들었다.하지만 반하준이 데려온 경호원들에게 둘러싸여 있어 강민아의 옆으로 갈 수 없었다.“엄마.”강민아는 안쓰러우면서도 미안했다.“엄마가 일이 있어서 늦었어. 정아, 미안해. 엄마가 약속할게. 앞으로 절대 너 혼자 어린이집에서 기다리게 하는 일은 없을 거야.”반우정은 그런 그녀를 이해했다.“알아요. 엄마가 해야 할 중요한 일이 있다는 거. 그 일은 엄마의 인생을 바꿀 수 있잖아요. 우정이는 엄마한테 짐이 되지 않을 거예요.”반하준은 그 말을 왜곡해서 들은 듯했다.‘딸을 데리러 오는 것보다 중요한 일이 뭐가 있어? 딸을 떼어놔야만 할 수 있는 일인 건가? 게다가 강민아의 인생까지 바꿀 수 있다고?’반하준의 시선이 강민아의 뒤에 있는 사람에게 멈췄다.‘심은호는 왜 온 거야?’반하준의 두 눈에 분노가 걷잡을 수 없이 번졌다. 심은호가 강민아를 데려간 후 이렇게 늦은 시간에 두 사람이 허둥지둥 유치원에 달려왔다는 건...“강민아, 우리 아직 이혼 도장 안 찍었어.”반하준의 가슴속에 분노가 들끓었다.“어떻게 그새를 못 참고.”“난 당신이 하루빨리 내 삶에서 꺼져버렸으면 좋겠어. 반하준 씨, 우린 이미 이혼했어. 제발 좀 조용히 지낼 수 없어?”이 남자 때문에 하마터면 수학 경시대회에
“심은호 씨!”깜짝 놀란 강민아가 소리를 질렀다.심은호의 품에 안긴 반우정은 아직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지 못했다. 그가 걱정스럽게 물었다.“정아, 다친 데 없지?”반우정이 까만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고개를 저었다. 바닥에서 일어나서야 심은호의 등에 금속 화살이 꽂힌 걸 보았다.반우정의 눈동자가 급격하게 흔들렸고 저도 모르게 숨을 들이켰다. 그러다가 고개를 들었는데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반현민이 기계식 석궁을 뒤로 숨기는 걸 보았다.‘저 화살은 나현 이모가 현민이한테 준 건데.’반현민이 이런 짓을 할 줄은 예상하지 못한 반하준의 얼굴이 차갑게 얼어붙었다. 아들이 사람을 다치게 한 것보다 심은호의 몸을 사리지 않는 행동이 더 신경이 쓰였다.반하준이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반현민, 너 이리 와.”겁에 질린 반현민이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아빠를 도와주고 싶었을 뿐이에요. 정이 말을 안 들어서.”반현민을 쳐다보던 반우정은 순간 움찔했다. 지금의 반현민이 너무도 낯설게 느껴졌다.반하준은 반현민이 들고 있는 기계식 석궁을 빼앗아 바닥에 내팽개쳤다.“어떻게 정이한테 화살을 쏠 수 있어? 이런 거 다시는 만지지도 마.”고개를 들자 강민아가 심은호를 부축하고 있었고 키가 훤칠한 심은호는 가냘픈 몸의 강민아에게 기대어 있었다.“심은호 씨, 괜찮아요? 구급차 부를게요.”“괜찮아요. 걸을 수 있으니까 병원에 데려다줘요.”육성민이 성큼성큼 다가와 강민아에게 말했다.“내가 부축할게.”그러자 심은호가 말했다.“민아 씨가 나보다 키가 작아서 기대고 있으면 등에 있는 상처가 땅기지 않아서요.”심은호가 반우정을 지키려다가 다친 것이었기에 강민아는 육성민에게 이렇게 말했다.“내가 부축할게.”반우정은 심은호의 옆에 바싹 붙어 다른 손을 잡았다.“아저씨, 괜찮아요? 많이 아파요?”심은호가 다정하게 말했다.“정이가 손을 잡아주니까 하나도 안 아파.”반우정은 심은호의 손을 꽉 잡고 한시도 놓지 않았다.그때 굉음이 들리더니 강나현이 오토바이를 타고
심은호가 한숨을 내쉬었다.“구급차 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피가 다 말라버리겠어. 날 죽게 내버려 두겠다는 거야?”급박한 상황이라 강민아는 더 이상 강나현과 실랑이를 벌이고 싶지 않았다.“내려. 우물쭈물하지 말고 쓸데없는 소리도 그만해.”“혹시 사고라도 나면...”강나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갑자기 보이지 않는 압력이 그녀의 온몸을 덮치는 것 같았다. 강민아와 두 눈이 마주친 순간 소름이 돋아 오토바이에 앉아 있다가 하마터면 중심을 잃을 뻔했다.강민아에게서 이렇게 섬뜩하고 소름 끼치는 분위기를 느낀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강나현은 저도 모르게 마음이 불안했다.“언니, 무리하면 안 돼.”“왜 이렇게 우물쭈물해? 너답지 않은데?”강나현이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그렇게 죽고 싶다면 말릴 이유가 없지. 차라리 얼굴부터 땅에 처박아서 콧대랑 이가 싹 다 부서져 버려.’강나현이 오토바이에서 내리자 강민아가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키 줘.”강민아는 그녀가 아무렇게나 던진 키를 안정적으로 받고는 육성민에게 말했다.“오빠, 정이를 호텔에 데려다줘.”반우정이 말했다.“나도 병원에 가고 싶어요. 아저씨가 걱정된단 말이에요. 별로 도움이 되진 않겠지만...”심은호가 다정하게 말했다.“정이만 아저씨 옆에 있으면 아저씨는 하나도 안 아파.”강민아가 육성민에게 말했다.“그럼 정이를 서경 병원으로 데리고 와.”육성민은 고개를 끄덕인 후 반우정을 데리고 자신의 SUV로 향했다.“반우정.”반하준이 아이를 불러 세웠다.“아빠한테 와.”반우정은 무서운 눈빛으로 반하준을 쏘아보면서 잔뜩 경계하더니 고개를 내저었다.“아빠, 내가 어떻게 해야 아빠한테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는 거예요?”반하준은 마치 자이로드롭을 타고 있는 듯 중력이 그를 아래로 잡아당기는 것만 같았다.“정아, 왜 그런 소리를 해?”반우정이 침울한 표정을 지었다. 심은호는 반우정을 구하려다가 다쳤고 화살을 쏜 사람은 또 반우정과 피를 나눈 반현민이었다.수많은 감정들이 덮쳐왔지만 아직
반하준의 무서운 기운에 겁에 질린 반현민이 눈물을 뚝뚝 떨구었다. 그 모습을 본 강나현이 서둘러 달랬다.“민이는 정이랑 친남매라서 정이가 무조건 용서해줄 거야.”그러고는 또 반하준을 보면서 농담을 던지듯 가볍게 말했다.“심은호가 생긴 건 친근하게 생겼어도 성격이 오빠보다 차갑잖아. 그런 심은호가 자기 몸까지 희생하면서 사람을 구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어. 정말 오래 살고 볼 일이야.”그녀는 말끝을 길게 늘이다가 이어 말했다.“아까 민아 언니가 심은호 차에서 내리던데 둘이 언제 그렇게 친해진 거야?”“하준 오빠, 잠깐만.”반하준이 그녀의 말을 전혀 듣지 않고 휙 가버리는 걸 보고는 재빨리 쫓아갔다....병원, 심은호는 결국 수술대에 올랐다. 그는 수술대에 엎드려 주치의에게 말했다.“수술비에 0을 두 개 더 붙여줘. 반하준한테 청구해야 하거든.”심은호와 아는 사이인 주치의는 수술칼로 그의 옷을 찢으면서 농담을 건넸다.“그럼 네가 심하게 다쳤다고 말해줄까? 널 병원에 데려온 그 여자가 아주 엉엉 울게?”심은호는 두 손을 포개어 턱을 손등에 괴었다.“그럴 필요까진 없어. 눈물이 아니라 그 사람이 미안해하는 것도 싫어.”“세상에나. 입에 꿀 발랐어? 독사의 피가 어떤지 좀 만져보자. 뭐야? 뜨겁잖아.”심은호는 고개를 돌리고 실눈을 뜬 채 주치의에게 경고했다.“고발당하고 싶어? 의사 면허 정지 3년이랑 과실 전체 정비, 둘 중에 뭐 고를래?”그러자 주치의가 콧방귀를 뀌었다.“조심해. 화살 구멍을 똥구멍처럼 꿰매버릴 수 있어.”그 시각 강민아는 수술실 밖에 서 있었다. 반우정은 그렁그렁한 두 눈으로 굳게 닫힌 수술실 문을 쳐다보았다. 아이는 강민아의 손을 잡고 어찌할 바를 몰랐다.강민아가 딸을 위로하려던 그때 반하준이 반현민을 데리고 다가왔다. 반하준은 뒤에 숨어 있는 아들에게 명령했다.“정이한테 사과해.”하지만 반현민은 뒤에서 나오려 하지 않았다.‘사과해서 무슨 소용이야? 엄마는 또 날 꾸짖고 기계식 석궁을 압수할 뿐만 아니라 엉
아이는 자신이 한 말이 강민아에게 아픈 가시가 될 거라는 걸 알았다.그래서 일부러 가시 돋친 말로 강민아를 자극했다.말을 마친 민이가 승리자처럼 강민아를 주시하며 그녀가 아프고 고통스러운 기색을 드러내길 기다렸다.가장 가까운 사람일수록 어딜 찔러야 제일 아픈지 잘 알았다.시골에서 태어나 레이싱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강민아 같은 여자는 반씨 가문 도련님의 엄마가 될 자격이 없었다.“민아, 만약 내가 시범 경기에서 1등 하면?”강나현은 눈을 가늘게 뜨고 서늘한 미소를 숨기지 못했다.민이의 말에 기분이 몹시 불쾌했다.민이에게 자신의 마음을 쏟아부었고 많은 공을 들였는데, 아이는 루나의 이름만 들으면 강나현에게 새엄마가 되는 걸 도와주겠다고 한 약속을 잊었다.구름 목장 비탈길에서 보낸 그날 밤 이후, 민이의 마음속 강하고 무적인 강나현의 이미지는 무너진 지 오래였다.그렇게 강한 사람이 왜 아빠에게 엉덩이를 맞겠나.그조차 아빠에게 고작 손바닥 열 대를 맞았을 뿐인데 말이다.강나현이 엉덩이를 맞고 울부짖으며 침까지 질질 흘리면서 사과하는 모습을 민이는 도저히 눈 뜨고 볼 수가 없었다.게다가 다음 날 아침 강나현은 그대로 기절했다.민이가 본 강나현의 얼굴은 벌레에게 물려 돼지처럼 우락부락했고 눈꺼풀은 퉁퉁 부어오른 채 반하준의 부하들 손에 이끌려 비탈길에서 옮겨졌다.민이는 심지어 어디 가서 그녀와 아는 사이라는 걸 말하고 싶지 않았다.더 대단한 엄마를 간절히 원하고 있었다.민이는 강나현의 시선을 피하며 작아진 목소리로 말했다.“현이 형이 1등 해도 생각해 볼게요.”말할수록 목소리는 더더욱 어눌해졌지만 강나현은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었다.“민아 언니, 빨리 나가. 스태프가 아무 상관 없는 사람이 루나 휴게실에 멋대로 들어온 걸 알면 쫓겨날 거야. 그러면 망신인데?”강민아의 시선이 강나현의 허벅지로 향했다.“난 네가 참 대단한 것 같아. 역시 낯짝이 두꺼운 사람은 다른 가죽도 두껍나 봐.”강민아의 말에 강나현은 허벅지와 엉덩이가 다
“루나, 만나서 반가워요!”민이의 또렷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지만 휴게실에 앉아있는 상대를 보는 순간 굳어버렸다.드레스룸으로 들어가려던 강민아는 민이와 두 눈이 마주쳤다.민이의 들뜬 표정은 순식간에 굳어버리고 단호한 표정으로 가만히 강민아를 바라보았다.“왜 여기 있어요?”강나현과 민이 뒤에는 사람들로 우글거렸고 카메라맨이 강민아와 윤세현을 향해 카메라를 들이댔다.윤세현은 많은 사람들이 출입구를 막고 있는 것을 보고 순간적으로 당황해서 강민아와 몸을 바짝 붙였다.“강민아, 네가 왜 루나 휴게실에 있어?”강나현은 너무 놀라서 말투까지 바뀌었고, 민이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윤세현을 바라보았다.“그쪽이 루나에요?”말하며 민이는 머리를 긁적였다.윤세현은 헐렁한 그레이 트레이닝복을 입고 있었고, 키가 큰 데다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머리를 아주 짧게 깎았기 때문에 처음 본 사람은 누구나 성별을 오해할 수 있었다.사람들은 그저 앳되게 생긴 미소년이라고만 생각했다.윤세현은 강민아의 소매를 붙잡으며 고개를 저었다.“난 루나가 아니야.”강나현이 눈을 가늘게 뜨고 강민아와 붙어있는 윤세현을 훑어보았다.눈앞에 있는 사람이 어딘가 낯이 익었다.그러다 강나현은 문득 7년 전에 이 ‘남자'를 본 적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 냈다.강민아가 그녀의 언니라는 걸 알게 된 후 그녀는 직접 미행에 나섰고 여러 번 강민아를 미행할 사람을 보내기도 했다.어쩌다 강민아에게 소꿉친구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 ‘남자'는 운 좋게도 루나의 내비게이터가 되었다.윤세현이 유명해진 후 바로 강민아를 버리고 해외로 떠나버려 강나현은 오랫동안 행복해했다.이후 반하준으로부터 윤세현을 자신의 레이싱 코치로 영입하려 한다는 말을 듣게 된 강나현은 비천한 강민아의 ‘소꿉친구’에게 경멸과 호기심을 동시에 느꼈다.강나현은 팔짱을 낀 채 아니꼬운 시선으로 강민아와 윤세현을 훑어보았다.“민아 언니, 이건 너무 심하잖아. 여긴 루나의 휴게실이야. 멋대로 들어와서 루나의
강나현의 요란한 등장에 주변을 지나가던 스태프들이 옆으로 흘깃 쳐다보았다.“저 여자는 누구야? 등장 한번 요란하네. 연예인 같지도 않은데.”스태프들은 목을 쭉 빼서 강나현의 얼굴을 보고는 실망스러운 표정을 지었다.또 다른 스태프는 팔짱을 낀 채 무시하듯 말했다.“대단하신 스폰서가 대회 시범 경기에 억지로 끼워 넣은 아마추어, 강나현이지.”국제 레이싱 대회의 시범 경기는 공식 레이스가 아니지만, 개막식에 등장하는 레이서들은 국제적으로 유명한 현역 선수거나 은퇴했지만 한때 큰 상을 받은 레이서, 또는 레이싱 업계에 큰 공헌을 한 매니저나 대표였다.이런 사람만이 시범 경기에 출전할 자격이 주어지는 이유는 레이스의 분위기를 고조시키기 위해서였다.수상 경력도, 유명세도 없는 강나현이 대결 명단에 떡하니 이름을 올리니 다른 선수들은 하나같이 누구냐고 물었다.그러다 정체를 알아내고는 다들 깜짝 놀란다.강나현은 최근 다섯 살배기 남자아이와 오토바이를 타는 영상으로 큰 관심과 화젯거리를 모은 인플루언서였다.물론 그녀의 영상을 보고 욕설을 퍼붓고 신고하는 사람들도 많았다.하지만 그녀가 계약한 소속사가 부신 그룹 소속이고, 부신 그룹 대표의 처제인 만큼 부신 그룹에서도 많은 신경을 쓰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네티즌들이 아무리 강나현을 신고해도 소용이 없었다.지난주에는 레이싱계를 뒤흔든 또 하나의 큰 소식이 있었다.부신 그룹 대표가 거액을 쏟아부어 문라이트 레이싱 클럽을 위해 일하던 엔지니어, 기술자들을 모두 빼돌려 그들이 강나현만을 위해 일하게 만든 것이었다.레이싱 업계 사람들은 부신 그룹의 비겁한 행위에 경악했다.강나현은 전문가 촬영팀과 메이크업 스타일링 팀을 고용해 자신을 꾸몄다.레이서의 신분으로 국제 레이싱 대회에 참가하는 모습을 브이로그로 찍어 인터넷에 올릴 생각이었다.이런 영상이 공개되면 폭발적인 인기를 끌 것이 분명했다.그녀가 대회에 참가하는 게 많은 논란을 일으켰지만 전부 그녀를 질투한다고 치부하며 강나현은 사람들의 질투를 즐겼다.
변호사는 영상을 올린 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반 대표님, 강나현 씨 사과 영상을 올렸습니다.”변호사가 강나현의 SNS를 새로 고침하자, 반하준이 가장 먼저 ‘좋아요'를 누른 것을 확인했다.반하준은 강나현의 SNS를 강민아에게 보여줬고 강민아는 자신의 휴대폰에서 스톱워치를 종료했다.반하준이 말하지 않아도 그녀는 알아서 합의서에 사인하고는 경찰에게 건넨 뒤 웃으며 반하준에게 말했다.“하루빨리 ‘좋아요’ 999개를 모으길 바라.”반하준이 말하려는데 강민아가 덧붙였다.“빈센트 일행이 강나현을 데리고 시범 경기에 등장하는 날만 기다릴게. 당신이랑 강나현이 제대로 망신당하려면 아직 멀었어.”남자는 그녀를 오만하게 내려다보며 비웃었다.“빈센트도 알아?”윤세현을 돌아보는 그의 눈빛에는 짙은 적대감이 가득했다.강민아가 어떻게 레이싱에 대해 알겠나. 분명 윤세현이 그가 강나현을 위해 거금을 들여 문라이트 레이싱 클럽 엔지니어 팀을 데려갔다는 걸 말했을 거다.강민아는 두 경찰에게 말했다.“두 분은 빨리 반 대표님 데리고 나가주세요. 전처로서 제 생할 구역에 이 사람이 나타나는 게 반갑지 않거든요.”두 경찰 역시 반하준이 강민아의 집에서 더 이상 문제를 일으키는 것을 원치 않았다.“반 대표님, 가시죠.”“강민아 씨, 합의서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더 귀찮게 하지 않겠습니다.”강민아가 분명하게 말했다.“합의서를 제출했다고 용서한 건 아니에요. 강나현이 두 번이나 사과했어도 진심으로 뉘우치지 않은 것처럼요.”그러고는 웃으며 반하준에게 말했다.“우린 대회에서 봐.”강민아의 얼굴에 번진 미소가 너무도 싱그러워 반하준은 알 수 없는 무아지경에 빠졌다.그녀의 이런 표정은 평소 강민아가 그를 위해 특별히 깜짝선물을 준비했을 때 보이던 것이었다.하지만 두 사람은 이미 이혼했는데 이 여자는 대체 그를 위해 어떤 서프라이즈를 준비했을까?...레이싱 대회 당일.국제 레이싱 대회 개막 1시간 전, 관중석은 이미 사람들로 가득 찼다.평소 강나현과
만약 반하준이 지금 강나현 앞에 있었다면 그녀의 수상한 감정 변화를 알아차렸을 거다.“반 대표님, 사과문 다 작성했습니다.”휴대폰에서 변호사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반하준은 강민아의 휴대폰에 속 시간을 슬쩍 보고는 강나현 측 변호사에게 명령했다.“그대로 읽게 하고 영상 찍어.”변호사는 삼각대를 가져와 휴대폰을 고정한 뒤 강나현이 카메라를 마주하고 종이에 적힌 내용을 읽을 수 있도록 종이를 휴대폰 옆에 놓았다.강나현은 혀를 깨물고 죽고 싶은 마음이었다.‘강민아, 사람 괴롭히는 것도 정도가 있지!’하지만 국제 레이싱 대회 시범경기에 출전하면 반하준은 그녀가 반유하의 소원을 대신 이루어주었다고 생각할 것이고, 그때부터 그녀는 반하준 옆에서 가장 특별한 여자가 될 것이라는 생각이 금세 떠올랐다.대회에 나가기만 하면 지금 잃어버린 명예도, 자신과 형제라 칭하던 남자들도 모두 돌아올 것이다!코를 훌쩍이자 비릿한 피 냄새가 느껴졌지만 강나현은 변호사가 대신 써 준 사과문 내용을 한 글자 한 글자 읽어 내려갔다.“여, 여러분, 안녕하세요. 저는 강나현이라고 합니다. 제... 제가 구름 목장에서...”강나현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한 채 혀를 깨물었다.눈꺼풀의 부기가 가라앉자마자 휴대폰을 꺼내 ‘서경팸' 단톡방을 확인했지만 그곳엔 강나현 혼자 남아 있었다.반하준이 단톡방을 나가니 다른 사람들도 그 뒤를 따랐다.그러다 강성진에게 죽도로 엉덩이를 맞으며 사과하는 영상을 반하준이 단톡방에 보내자 그곳에 있는 사람들이 전부 보고 그녀를 비난했다.강나현은 바로 친한 친구라고 생각했던 이들에게 문자를 몇 통이나 보냈지만 재벌 2세들은 진작 그녀를 삭제한 지 오래였다.화가 나서 피까지 토한 강나현은 강민아에 대한 살기가 최고조에 달했다.절친한 친구들에게 다시 전화를 걸려고 할 때쯤 경찰이 강나현의 휴대전화를 압수해 갔다.이제 또다시 사과 영상을 찍고 SNS에 올려 창피를 당해야 하는데 도저히 내키지 않았다.“1분 남았어.”강민아의 맑고 청아한 목소리가
강민아가 휴대폰의 스톱워치를 누른 뒤 반하준에게 밝은 화면을 보여주었다.쉴 새 없이 바뀌는 타이머 숫자를 보니 반하준의 가슴에 총알이 박히는 것 같았다.한때 그도 강민아를 이런 식으로 대했다.그리고 지금, 오만하고 안하무인인 부신 그룹 대표가 시한폭탄에 묶여 있었다.경찰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강민아 씨가 아주 좋은 제안을 했어요. 반 대표님, 강나현 씨가 사과 영상을 찍도록 설득해 주세요. SNS에서 좋아요 999개를 모으면 저희도 그 영상으로 윗선에 보고하기 편하니까요.”반하준은 처음으로 불판 위에 올라가 구워지는 느낌을 받았다.그 느낌은 무척이나 불쾌했다.그는 얼굴을 찡그리며 마지못해 휴대전화를 꺼냈고, 강민아가 켜놓은 타이머 앞에서 어쩔 수 없이 전화를 걸었다.언젠가 그가 강민아의 협박을 받게 될 거라고 생각이나 했을까.하지만 강민아에게 이토록 짓밟히면서도 반하준은 오히려 심장이 세차게 뛰는 것을 느꼈다.강나현은 현재 구치소에 수감되어 휴대폰을 사용할 수 없었지만 반하준은 강나현의 곁을 지킬 변호사를 불렀다.변호사는 전화를 받은 후 반하준의 지시에 따라 스피커 모드로 돌려 양손에 수갑이 채워진 채 금속 의자에 앉아있는 강나현이 반하준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했다.“나현아, 지금 당장 경찰의 지시에 따라 사과 영상을 찍고 그 영상을 SNS에 올려서 좋아요 999개를 받아.”강나현은 어리둥절했다.“하준 씨, 내가 왜 그래야 하는데?”벌거벗고 사람들 앞에서 돌아다니며 망신을 당하는 것과 뭐가 다른가.“좋아요 999개를 받아야 네가 풀려나.”강나현은 울기 직전이었다.“싫어! 그건 너무 창피해!”강민아는 손톱으로 휴대폰 화면 속 시간을 살며시 두드렸다.반하준에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상기시키며 하품하더니 나른한 목소리로 말했다.“3분이 지나도 강나현이 영상을 녹화하지 않으면 난 절대 합의서에 사인 안 해.”강민아의 목소리를 들은 강나현은 불이 달린 폭죽처럼 발끈했다.“강민아, 또 네가 꾸며낸 수작이지?”강
강민아가 직접 서명한 합의서를 받아내고 말 거다.강민아는 미소를 지으며 되물었다.“내가 합의서에 사인할 것 같아?”남자는 짜증스럽게 말했다.“딱 한 번 기회 줄게. 얼마를 원하는지 말해.”반하준은 바로 백지 수표를 직접 건네주었고 강민아는 수표를 받아 들고 입꼬리를 올렸다.“펜.”제 발로 찾아온 돈인데 마다할 리가 없다.반하준은 변호사를 힐끗 쳐다봤고, 변호사는 곧바로 펜을 건넸다.강민아는 흔쾌히 수표에 숫자를 적고 반하준에게 다시 건넸다.“당신부터 사인해.”반하준은 강민아가 수표에 적은 숫자를 보며 숨이 턱 멎었다.“200억?”남자의 동공에 어두운 기운이 먹물처럼 퍼져나가며 그가 경멸 섞인 조롱을 뱉었다.“이건 사기지.”강민아가 대꾸했다.“형사님, 보시다시피 반하준이 먼저 백지 수표를 건네면서 적으라고 했어요.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인데 사기라고 모함하네요? 일부러 법을 무시하는 행위 아닌가요?”두 경찰과 변호사는 동시에 고개를 숙이고 기침을 두 번이나 했다.경찰이 조언했다.“반 대표님께서 금액을 말씀하시고 강민아 씨 의사를 묻는 게 어떻습니까?”변호사도 말렸다.“네, 저희는 진심으로 합의하기 위해서 여기까지 찾아온 거니까요.”“2억.”반하준의 말에 강민아는 헛웃음을 터뜨렸다.“당신한테는 강나현이 고작 2억밖에 안 돼?”남자의 호흡이 흐트러지며 강민아에게 경고를 날렸다.“넌 고작 보상금 2억밖에 못 받는다는 뜻이야.”강민아의 부드러운 눈매가 가늘어졌다.“반 대표님께서는 합의하러 온 게 아닌 것 같네요. 이만 가세요.”강민아가 문을 닫으려 하자 반하준의 큰 손이 문을 단단히 잡았다.“6억.”강민아는 반하준의 말투를 그대로 흉내를 내며 말했다.“여기가 시장도 아니고 왜 흥정을 하지? 반하준, 잘 들어. 기회는 딱 한 번 줄게.”반하준이 했던 말을 고스란히 돌려주었다.“200억,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200이야. 안 줄 거면 꺼져.”이내 강미아가 덧붙였다.“그 200억은 강나현 계좌에서 가져와.”
반하준의 조롱하던 표정이 완전히 굳어졌다.강민아는 방금 샤워를 끝내고 머리를 말릴 겨를도 없이 서둘러 욕실을 빠져나왔다.젖은 머리카락이 어깨의 옷감을 적시고 긴 머리카락 몇 가닥이 가느다란 목에 달라붙어 있었는데, 희고 투명한 피부에 쇄골은 옷깃 위로 깊게 패 있었다.반하준은 그런 그녀를 바라보면서 목울대가 꿈틀거리며 저도 모르게 숨을 참고 있었다.두 경찰이 의미심장하게 반하준을 돌아보자 그는 기가 막힌다는 듯 웃었다.“강민아, 일부러 나 열받게 하는 거야? 나랑 나현이가 너랑 이 자식과 같아?”“반 대표님, 손부터 놓으세요.”한 경찰이 반하준을 다그쳤다.“이러면 일만 커집니다.”강민아는 손에 들고 있던 대걸레를 내려놓았고 반하준은 윤세현의 옷깃을 풀어주었다.강민아는 곧바로 윤세현의 손을 잡고 윤세현을 자신의 뒤로 보내 보호했다.윤세현의 얼굴은 창백했다. 조금 전 반하준이 옷깃을 잡자 오래전에 묻어두었던 과거의 기억들이 덩달아 튀어나왔다.반하준은 한사코 윤세현을 싸고도는 강민아의 모습에 경멸하며 콧방귀를 뀌었다.“나랑 세현이는 어렸을 때부터 같이 자라서 늘 가깝게 지냈어. 하지만 그냥 순수한 친구야. 우리 둘 사이에 정말 뭐가 있었으면 7년 전에 내가 당신을 만났겠어?”해명이 아닌 조롱이었다.[나현이랑 나는 20년 넘게 알고 지냈는데, 우리 둘 사이에 정말 뭐가 있었다면 널 만났겠어?]“반하준, 당신은 결혼생활 내내 강나현을 친구라고 곁에 뒀지만 난 당신과 결혼하고 몇 년 동안 한 번도 친구에게 연락한 적 없어. 난 당당한데 당신은 나한테 떳떳해?”반하준의 표정이 굳어지며 턱이 굳게 다물렸다.“세현이가 당신 전처 집에서 하룻밤 보내는 게 뭐가 문제야? 당신은 강나현이랑 호텔까지 가서 성인 남녀 단둘이 하룻밤을 보냈잖아. 안 그래?”반하준은 미간을 찌푸렸다.“나랑 나현이는 결백해!”강미나가 콧방귀를 뀌며 윤세현의 팔짱을 꼈다.“그래, 당신과 강나현은 세상에서 제일 깨끗하지. 그 더러운 속내로 나와 세현이 사이 모욕하지 마.
반하준은 고개를 들어 팻말을 확인했다.번호가 맞다. 강민아가 정이와 함께 세를 얻어 사는 그 아파트였다.윤세현은 무채색 계열의 회색 체크무늬 잠옷을 입고 있었고, 잠옷 위에는 헐렁한 재킷을 걸치고 있었다.이제 막 스킨케어를 시작하려던 그녀는 스포츠 헤어밴드로 앞머리를 올린 상태였는데 그게 오히려 더욱 앳된 10대 소년처럼 보이게 했다.“반하준.”윤세현은 순간 얼굴을 찡그렸다.반하준과 정식으로 만난 적도 없었고, 5년 전 우연히 만난 몇 번의 만남에서도 윤세현은 그를 멀리서 바라보기만 했었다.하지만 나중에 반하준에 대한 정보를 수집했고, 강민아의 이혼 소식을 알게 된 후 반하준의 사진은 윤세현의 다트판이 되었다.어두운 시선으로 윤세현의 얼굴을 살펴보는 반하준에게서 갑갑한 압박감이 뿜어져 나왔다.“윤세현 씨?”남자는 군림하는 황제라도 되는 듯 오만하게 명령했다.“죽고 싶지 않으면 꺼지세요.”그러자 반하준을 뒤따르던 두 경찰이 동시에 헛기침했다.“반 대표님, 진정하세요!”경찰은 안중에도 없는 행위였다.“세현아.”강민아의 목소리가 욕실 유리문 너머로 들려왔다.“새 바디로션 가져오는 걸 깜빡했어.”윤세현이 곧장 답했다.“내가 갖다줄게!”조금 전 욕실에서 흐르는 물소리가 초인종 소리를 감췄다.강민아는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됐어. 나가면 그냥 네가 발라줘.”“민아야, 아직 나오지 마.”욕실에서 강민아는 의아한 듯 멈춰 섰다.윤세현은 손잡이에 손을 올려놓은 채 원수라도 되는 듯 반하준을 노려보고 있었다.“꺼져야 할 사람은 그쪽이죠.”7년 동안 반하준을 향해 쌓아왔던 분노가 이 순간 완전히 폭발했다.원수를 만났는데 눈이 뒤집힐 수밖에.엄규민이 공항에서 강민아가 다른 남자와 팔짱을 끼고 걷는 사진을 반하준에게 보냈을 때 그는 매우 불쾌했다.그러다 지금 두 눈으로 직접 낯선 남자가 잠옷 차림으로 강민아의 집에 나타난 것을 보았고, 게다가 강민아는 이 남자에게 바디로션을 발라달라고 한다.뜨거운 용암이 그의 이성을 집어삼키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