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민아가 웃으며 말했다.“버린 쓰레기는 많아. 천천히 주워봐.”강나현이 옷을 다 벗고 반하준의 침대에 누워 있다고 해도 강민아는 아무런 느낌이 들지 않았다.그녀는 그저 미소 지으며 강나현이 몰락하는 모습을 지켜볼 것이다.강나현의 팔찌가 반하준이 준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강성진은 오히려 안심했다.그는 강나현이 여전히 반하준의 마음을 단단히 붙잡고 있다고 생각했다.식탁 위에서 강성진은 강민아를 겨냥해 말을 던졌다.“하준이가 너랑 이혼한 건 분명 네가 뭔가를 잘못했기 때문이겠지. 당장 재혼해! 우리 강씨 가문에 이혼한 여자는 있을 수 없어! 정말 한심하다. 한심해. 창피하지도 않아? 서른 살에 애까지 딸린 이혼녀를 누가 좋아하겠어?”강민아는 느긋하게 식사하며 가끔 반우정이 밥 먹는 모습을 살폈다.“아빠, 제가 왜 반하준이랑 이혼했는지는 안 물어보세요?”“왜긴 왜야! 남자 하나 붙잡지도 못하면서! 반씨 가문과의 혼인은 내가 정말 못 볼꼴까지 보면서 간신히 성사한 거야. 지금까지 너무 쉽게 살았지? 그러니까 지금 이러는 거지!”“아빠.”강민아의 표정이 차가워졌다.그녀가 입을 열기도 전에 도민영이 끼어들었다.“딸, 어서 하준이한테 사과해. 이번만큼은 용서를 빌어야 해. 이렇게 이혼하면 너 하준이보다 더 좋은 남자는 못 만난다?”강성진은 경멸스러운 시선으로 강민아를 보며 말했다.“역시 시골에서 와서 그런지 세상 물정을 몰라!”그는 강민아를 가리키며 도민영에게 말했다.“우리 손에서 자라지 않았다고 이혼도 우리한테 미리 알리지 않은 것 좀 봐.”“미리 알렸다면 이혼도 못 했겠죠.”강성진은 콧방귀를 뀌고 곁눈질로 강나현을 쳐다보더니 강민아에게 물었다.“하준이랑 이혼 협의서 써서 위자료 챙겼다며?”그의 목소리가 점점 강압적으로 변했다.“그 많은 돈을 바보같이 은행에 적금 들어둔 건 아니겠지? 회사 계좌로 이체해라. 매년 배당금도 주마.”“전부 주식에 투자했어요.”“뭐라고?”강성진의 목소리가 한순간에 싸늘해졌다.강민아는 귀가 어두
“아아악!”깜짝 놀란 도민영이 날카로운 비명을 질렀다.테이블이 뒤집히는 순간 강성진은 도민영을 안아 들고 황급히 뒤로 몇 걸음 물러섰다.강민아는 그 모습을 보고 곧바로 달려가 반우정을 품에 안고 가장 가까운 주방으로 뛰어갔다.“흑! 성진 씨, 나 너무 무서워!”도민영은 두 팔로 강성진의 목을 꽉 끌어안았다.강성진은 그녀의 어깨를 다독이며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민영아, 걱정하지 마. 본때를 보여주면 저 둘도 조용해질 거야.”겁에 질린 도민영은 온몸을 움츠렸다.반면 강나현의 얼굴에는 짙은 웃음이 떠올랐다.‘집에 돌아온 뒤로 아빠한테 맞아본 적 없겠지. 딸과 손녀에게 손을 대는 모습, 볼만 하겠어.’“강민아! 당장 나와!”강성진은 주방 쪽으로 걸어가며 허리춤에 손을 가져갔다.그는 허리띠 버클을 풀고 벨트를 빼 들었다.그 모습은 마치 훈련된 조교 같았다.주방에서 나타난 강민아의 손에는 날카로운 칼이 들려 있었다.반우정을 주방 안쪽으로 밀어 넣은 뒤 강민아는 문 앞에 서서 마치 성문을 지키는 장수처럼 버텼다.그녀의 눈에는 핏발이 서 있었다.강성진의 손에 들린 벨트를 보자 그녀는 오히려 모성애가 불타오르며 전투 의지가 강렬하게 치솟았다.강민아는 한때 18년 만에 찾아온 친부모에게서 사랑을 기대한 적이 있었다.하지만 이제는 깨달았다.‘우정이랑 같이 살아가려면 이 얄팍한 혈연도 완전히 끊어내야 해!’“아빠, 한번 제대로 겨뤄볼까요? 아빠의 벨트가 빠를까요? 제 칼이 빠를까요?”강성진은 크고 건장한 체격에 오랫동안 운동으로 단련된 몸을 가지고 있었고 반면 강민아는 매일 살림에 시달리는 가녀린 전업주부일 뿐이었다.그런 상황만 고려한다면 강성진이 그녀를 두려워할 이유는 없었다.하지만 강성진은 그녀의 눈빛에서 절대 물러서지 않겠다는 의지를 느꼈다.그녀는 마치 정글 속에서 사냥꾼을 만나 새끼를 지키려는 암사자처럼 죽음을 불사하는 기세를 풍겼다.강성진은 저도 모르게 등골이 서늘해졌다.“감히 네가 내게 칼을 들이밀어?""강성
“엄마, 저 아까 잘못한 거예요? 테이블 엎으면 안 됐어요?”아직 어린 반우정은 자기가 테이블을 엎어서 강씨 가문에서 쫓겨난 거로 생각했다.강민아는 반우정에게 되물었다.“만약 다시 기회가 온다면 또 테이블을 엎을 거야?”반우정은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네. 엄마를 지키고 싶었어요.”강민아는 따뜻하게 미소 지었다.“우정이는 할 수 있는 일을 한 거니 엄마의 영웅이야.”“엄마야말로 우정이의 영웅이에요!”반우정은 강민아 품을 파고들었다.엄마의 칭찬을 들은 반우정은 눈을 반짝이며 부끄러운 듯한 얼굴로 말했다.“하지만 힘을 너무 세게 썼어요. 이러면 여자애 같지 않죠?”“우정이는 원래 여자아이야. 여자아이라도 여러 가지 모습이 될 수 있어. 정해진 모습이라는 건 없어.”강민아는 반우정을 부드럽게 안았다.“우정아, 너는 타고난 힘을 가지고 있어. 자신을 지킬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거란다. 엄마는 네가 그걸 자랑스럽게 여겼으면 해. 여자아이가 너무 약하면 결국 누군가에게 기대야만 하거든. 하지만 엄마는 네가 절대 여자라는 이유로 자신을 부정하길 원하지 않아. 네가 어떤 모습이든 넌 항상 엄마의 예쁜 딸이야.”반우정은 강민아의 말에 용기를 얻었다.“엄마, 예전부터 복싱 배우고 싶었어요. 더 강해지고 싶어요.”반씨 가문에 있을 때 그녀는 반현민과 함께 축구, 격투 수업을 듣고 싶었지만 연진숙이 여자아이는 밖에서 뛰어다니며 소리치는 게 아니라고 강하게 반대했다.“잘됐네. 삼촌이 헬스장을 운영하거든. 엄마가 삼촌한테 얘기해서 좋은 복싱 선생님을 구해달라고 할게.”“엄마, 최고예요!”반우정은 강민아의 품에 기댔다가 문득 고개를 들고 물었다.“우리 지금 어디로 가요?”강민아는 그녀의 부드러운 검은 머리칼을 쓰다듬으며 답했다.“시그니엘로 가고 있단다.”그녀는 반하준과 이혼하면서 현금 외에도 집과 상가를 하나도 놓치지 않고 받았다.그녀가 당연히 받아야 할 몫이었다.물론 지금도 새집을 알아보고 있었다.강민아는 주식 투자로 충분한 돈
그는 얼굴을 찌푸린 채 욕조에 몸을 담그고 뜨거운 물을 견뎌냈다.그는 가정부에게 물 온도는 40.3도로 맞춰달라고 여러 번 당부했었다.욕실의 향은 그가 들어오기 10분 전에 피워야 한다고도 했었다.욕조 가장자리에 있는 가죽 쿠션에 기댄 반하준은 내부 조명도 제대로 맞춰지지 않았다는 것을 발견했다.“쯧.”‘강민아는 7년 동안 단 한 번도 실수한 적이 없는데.’반하준은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조금만 참으면 돼. 강민아는 곧 돌아올 거야.’...다음 날 아침 핸드폰을 집어 든 강민아는 홍민기가 보낸 문자를 발견했다.[강민아 씨, 정말로 120억 모두 주식에 투자하시겠습니까?][네. 확실합니다. 개장하면 바로 전량 매수해 주세요.][알겠습니다.]홍민기는 다시 한번 당부했다.[후회하시면 안 됩니다.]강민아는 컴퓨터를 켜고 자신이 직접 만든 주식 시세 분석 프로그램을 실행했다.그녀가 만든 프로그램은 주식 시장이 바닥을 치고 다시 반등할 때라고 알려주고 있었다.주식 시장이 개장하자 강민아가 홍민기에게 매수하라고 한 주식의 주가가 오르기 시작했다.강민아가 컴퓨터를 끄자마자 핸드폰이 다시 울렸다.모르는 번호였다.최근 이력서를 내고 있었기에 그녀는 인사팀의 연락을 놓치지 않으려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 사모님. 저예요.”전화기 너머에서 오소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혹시 도련님 빨간색 커프스단추 어디에 있는지 아세요?”오소정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강민아는 전화를 끊었다.‘커프스단추가 어디 있는지 내가 알 게 뭐야!’강민아는 아이 방으로 가서 반우정의 숙제를 확인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거실의 유선 전화 벨 소리가 울렸다.벨 소리가 넓은 거실에 울려 퍼지자 조금 섬뜩했다.강민아는 자리에서 일어나 유선 전화의 선을 뽑아버렸다.그녀가 방에 돌아가기도 전에 초인종이 울렸다.문을 연 그녀의 앞에는 단지 관리자가 서 있었다.그는 강민아에게 자신의 핸드폰을 건넸다.강민아는 어쩔 수 없이 전화를 받았고 그녀의 귓가에는 빙하처럼 차가운
“하준 오빠?”강나현은 반하준의 귀가 새빨갛게 달아오른 것을 발견했다.그건 그녀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표정이었다.“언니가 뭐라고 한 거야?”반하준은 한참을 뜸 들이다가 답했다.“아직도 나한테 화내고 있어.”그는 방금 자신을 향해 쏟아낸 말들이 정말로 강민아의 입에서 나온 것이 맞는지 의심스러웠다.“언니 혹시 갱년기 아니야? 애 낳은 여자는 확 늙는다더라.”한바탕 화를 낸 강민아는 전화를 끊고 손에 들고 있던 핸드폰을 아파트 관리자에게 내밀었다.관리자는 그 자리에 얼어붙어 있었다.그녀가 손을 까닥이자 관리자는 그제야 황급히 핸드폰을 받아 들고 도망치듯 뛰어갔다.시그니엘을 당장이라도 벗어나고 싶었던 강민아는 반우정에게 다가가 물었다.“엄마랑 같이 엄마 선생님 보러 갈까?”“좋아요!”심씨 가문으로 출발하기 전 강민아는 심은호에게 미리 연락을 넣었다.그녀는 꽃집에 들러 꽃을 사고 취보헌에 들러 심한기가 평소 즐겨 쓰던 선지를 골랐다.그렇게 준비를 마친 뒤 강민아는 심씨 가문 저택 앞에 도착했다.하지만 그녀를 맞이한 것은 심은호가 아닌 심씨 가문의 가정부였다.저택으로 들어가는 길에 그녀는 응접실에 세워진 화이트보드를 보았다.그 위에는 복잡한 수학 문제가 적혀 있었다.그녀는 가정부의 안내를 받아 복도에서 대기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가정부는 난처한 표정으로 심한기의 방에서 나왔다.“어르신께서 방금 약을 드셔서 컨디션이 좋지 않으십니다. 잠시 기다려주실 수 있으실까요?”강민아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날 만나고 싶어 하지 않으시는 구나.’“알겠습니다.”그녀는 조용히 대답하고 응접실로 향했다.강민아는 반우정과 함께 한참을 앉아 있었다.하지만 그녀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화이트보드로 향했다.그리고 10분 후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화이트보드 앞으로 가 마커를 집어 들고 계산을 시작했다.순간 그녀는 학생 시절로 돌아간 듯했다.창밖으로 더운 바람이 불어왔고 오동 나뭇잎이 사각거렸다.복도에서 학생들의 발소리까지 들려오자 그녀는
마치 보이지 않는 밧줄이 강민아의 목을 조르는 듯 그녀는 숨을 쉴 수 없었다.심한기는 네이비 리넨 홈웨어를 입고 있었고 몸은 마르고 허약해 보였다.그의 머리는 온통 희었고 등은 굽어 있었다.강민아는 본능적으로 선생님이라고 부르려 했지만 자신은 이미 그럴 자격을 잃었다는 것을 깨달았다.순간 그녀의 시야가 흐려졌다.“할아버지, 안녕하세요!”반우정의 어린 목소리가 봄비처럼 상쾌하게 들려왔다.“할아버지가 우리 엄마가 그렇게 자랑하시던 학식이 풍부하고 재능이 뛰어나신 교육자이자 뛰어난 수학자 심한기 할아버지 맞으세요?”심한기는 통통하고 사랑스러운 반우정을 바라보며 굳게 다물었던 입을 열었다.“네 딸이냐?”강민아는 급히 답했다.“네. 반우정이에요.”옆에 있던 누군가가 흥분하며 말했다.“교수님, 교수님께서 내신 문제 이분이 푸셨어요.”잠시 멈칫하던 심한기가 응접실로 향했다.강민아는 심한기의 걸음걸이가 안정적이라는 것을 발견했다.심은호가 말한 것처럼 몸 상태가 예전 같지 않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심한기는 화이트보드 앞에 서서 강민아가 쓴 풀이 공식을 보다가 마른 어깨를 떨었다.“내가 가르친 걸 다 기억하고 있었구나.”그녀가 기억하고 있을수록 심한기는 서글펐고 강민아가 자신의 미래를 포기한 것을 용서할 수 없었다.강민아가 화이트보드를 보며 말했다.“대학에서 배운 지식을 다 잊어버린 줄 알았는데 화이트보드 앞에 서니 예전에 배웠던 공식들이 머릿속에 떠올랐어요.”“정말 교수님의 제자였어?”옆에 서 있던 남학생들이 속삭였다.“아니다!”심한기는 완고하게 부정했다.강민아가 박사 학위를 포기하기로 한 날 그는 강민아에게 누군가 대학에서 지도교수가 누구였는지 물어보면 자신의 이름은 절대 말하지 말라고 선언했었다.그렇게 강민아는 학사 학위만을 취득하고 학교를 떠났고 두 사람의 사제지간은 완전히 끊어졌다.학생들은 즉시 입을 다물었고 심한기는 차가운 눈빛으로 강민아를 바라보며 목소리를 낮췄다.“들어와서 얘기하자.”그는 학생들 앞에서 강민아
심한기의 미간이 잔뜩 찌푸려졌다.패륜이라는 말이 입에서 튀어나오려고 했지만 그는 있는 힘을 다해 참았다.“왜 그 꼴인 거야?”심은호는 분명 옷을 입고 있었지만 차라리 안 입은 것보다 더 요염해 보였다.심한기의 짙은 눈썹이 격렬하게 떨렸다.“비를 맞았어요.”심은호는 무심하게 답하며 젖은 앞머리를 쓸어 올렸다.강민아의 각도에서 보면 그의 옆모습은 완벽한 황금비율을 이루고 있었다.오뚝한 콧날은 미끄럼틀처럼 매끈했고 한쪽 볼의 깊게 팬 보조개는 시선을 끌기에 충분했다.심한기는 심은호의 부축을 받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저도 모르게 손으로 눈을 가렸다.아들의 존재감이 너무나 눈부셔 선글라스가 필요했다.“아버지, 침대에 누워 쉬셔야 해요. 너무 무리하지 마세요.”“내가 뭘 무리한다는 거냐?”‘무리하는 건 너잖아! 색기 넘치는 공작새가 되어버려서는...’심한기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강민아가 걱정 어린 시선을 보냈다.그가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심은호는 그를 침대에 눕혀 버렸다.심은호가 베개를 몇 번 두드리자 먼지가 흩날리며 심한기가 기침하기 시작했다.강민아는 급히 물을 따랐다.“교수님, 물 좀 드세요.”그녀는 물컵을 들고 와서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심한기를 바라보았다.‘조금 전까지만 해도 기운 넘치던 분이 갑자기 이렇게 기침을 멈추지 못하다니.’심한기는 기침하면서도 강민아에게 말하려 했으나 심은호가 그의 손을 눌러 제지하고 강민아의 손에서 물컵을 받아 들었다.차가운 손끝이 스치는 순간 그녀의 부드러운 살결이 느껴졌다.스치는 봄바람처럼 아무런 흔적조차 남기지 않았다.“아버지, 지금은 물 마시면 안 돼요. 잠시 쉬면 괜찮아질 거예요.”말을 마친 심은호는 강민아가 직접 따라준 따뜻한 물을 자신의 입으로 가져갔다.그 모습을 본 심한기는 말문이 턱 막혔다.심은호는 몸을 앞으로 숙이며 강민아의 시야를 가렸다.덕분에 강민아는 심한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 듣지 못했다.심은호는 심한기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네. 알겠어요.”‘알긴 뭘
“아버지, 살살 좀 하세요.”심은호는 피하지 않고 심한기가 휘두른 지팡이를 맞았다.심한기는 지팡이 끝으로 심은호의 허리에 달라붙은 옷을 툭툭 쳤다.“좀 점잖게 굴 수 없어? 완전히 체면을 구기는구나. 여우한테 홀린 거야, 뭐야? 너! 너! 너! 도대체 왜 사람을 유혹하고 다녀?”“쉿! 목소리 좀 낮추세요.”심은호가 황급히 타이르며 말했다.“조용히 하라고? 이게 자랑스러운 일이냐?”심한기는 아들의 모습에 얼굴이 화끈거렸다.그러나 심은호는 태연하게 말했다.“계속 유혹해야 하는데 들리면 안 되죠.”심은호를 향해 눈을 흘긴 심한기는 기가 막혔다.강민아는 반우정에게 만화책 몇 권을 가져다주고 가정부에게 종이와 색연필도 빌려왔다.반우정은 집중력이 좋아 조용히 앉아 몇 시간 동안 책을 읽고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안녕하세요. 교수님께서 새로 출제하신 문제 좀 풀어보라고 하셔서요.”반우정에게 놀만한 것들을 쥐여준 뒤 강민아는 심한기의 학생에게 문제지를 한 장 달라고 했다.“서경 대학 학생이세요?”남학생은 다섯 살짜리 반우정을 흘깃 쳐다보며 물었다.“아니요. 저는 고연 대학 졸업했어요.”남학생이 다시 물었다.“석사생인가요? 아니면 박사생이세요?”강민아는 웃으며 답했다.“학부 졸업 후 공부를 계속하진 않았어요.”테이블 주변에 앉아 있던 몇몇 학생들이 고개를 들고 그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문제지를 건넨 남학생이 말했다.“그럼 이 문제 못 푸실 텐데요. 심 교수님이 내주신 문제는 최소 석사 2년 차 정도는 되어야 풀 수 있어요.”검은 뿔테 안경을 쓴 남학생이 조소하며 중얼거렸다.“학부생이 올림피아드 문제를 푼다고?”“아이도 저렇게 큰데 올림피아드를 전문으로 하는 사람은 아닌 것 같은데...”다른 학생이 팔꿈치로 그를 살짝 밀며 말했다.“하지만 교수님이 화이트보드에 적은 문제를 풀었잖아. 우리는 일주일 동안 연구했는데도 못 풀어서 교수님한테 엄청나게 혼났거든...”검은 뿔테 안경을 쓴 남학생은 강민아를 의심스럽게 바라보며 말
심은호는 소파 주위를 두 번 돌아다니다가 육성민에게 전화를 걸었다.“여보세요.”육성민이 퉁명스럽게 전화를 받는데 다급하면서도 우렁찬 심은호의 목소리가 귓전을 울렸다.“삼촌이 빨리 가서 정이 데려와요. 민아 씨가 힘들게 오랜만에 옛사랑과 재회하는데 아무도 방해하면 안 되죠! 다음 주에 민아 씨 시범경기에 참가하니까 난 건강만 신경 쓸 거예요. 윤세현과 하룻밤 보내고 나면 기운을 차리지 못한다고요!”말하면서 심은호는 심장이 거듭 욱신거리는 것을 느꼈다.전화기 너머 헬스장에 있던 육성민은 짙은 파란색 트레이닝 복을 입고 있었는데 이미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축축하게 젖은 머리카락도 고슴도치 가시처럼 하나씩 솟아 있었다.육성민은 얇은 입술을 달싹였다. 가슴이 들썩이면서 젖은 옷 아래에 감춰진 근육이 이따금 굴곡진 선을 자랑했다.그는 한 손에는 휴대폰을, 다른 한 손에는 20㎏짜리 아령을 들고 있었다.지금 당장 심은호가 앞에 서 있다면 육성민은 아령을 손에 들고 거침없이 그의 머리를 내리쳤을 것이다.“누가 그쪽 삼촌입니까?”육성민이 욕설을 퍼부으려는데 심은호가 진지하게 물었다.“내가 삼촌이라고 부르는 게 거슬리죠? 낯설어서 그래요. 내가 몇 번 부르면 익숙해질 거예요.”육성민이 차갑게 쏘아붙였다.“죽고 싶습니까?”전화기 너머 심은호가 다시 본론으로 돌아왔다.“그쪽이 정이 안 데려가면 내가 가요. 하지만 내 주먹을 통제할 수 있을지는 장담할 수 없네요. 윤세현을 감옥에 보내고 싶지만 민아 씨가 슬퍼할 테니 그러진 못하겠죠.”육성민은 심은호의 슬픈 독백을 들으며 머릿속에서 지끈거리는 통증만 느꼈다.그는 도저히 참을 수 없어 솔직하게 다 얘기했다.“윤세현 씨는 여자고 민아 절친이에요. 당신 바보예요? 그쪽 클럽과 계약까지 했는데 아랫도리가 달려있는지 아닌지도 몰라요?”육성민의 꾸지람이 귀를 찔렀고, 심은호의 가느다란 속눈썹이 위로 쭉 뻗으며 2초 동안 머릿속이 하얘졌다.정신을 차린 그가 전화기 너머로 물었다.“윤세현이 여자라고요?”
그런 그녀를 끌어당겨 서경으로 데려간 건 강민아였다.강민아에 비하면 그녀는 평범하기 그지없었다.윤세현이 서경에 온 첫해에 강민아가 장학금으로 그녀를 먹여 살렸다.문라이트 클럽에 영입된 그녀가 매니저에게 윤세현을 소개해 그녀의 내비게이터가 된 것이었다.빈센트와 다른 멤버들은 거금을 들여 데려온 해외 엔지니어라 처음에는 윤세현과 말도 하지 않았다.그런데 강민아가 그녀의 손을 잡고 계속해서 앞으로 달릴 수 있게 도왔다.두 사람이 각자의 길을 가게 됐을 때 강민아는 거의 전 재산을 털어 윤세현이 유학하는 데 보태주었다.[14살 때 반 선생님은 날 서경으로 데려와 가장 비싼 옷을 입히고, 가장 비싼 수입 문구류를 쓰게 하고, 차를 배정해 주고, 개인 아파트에 살게 해줬어. 나를 타락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과중한 노동과 불필요한 사교 활동을 멀리하고 공부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도와주신 거야. 이제 스무 살이 된 나는 너에게도 같은 삶을 주고 싶어. 뉴욕에서 제일 좋은 아파트에 살고, 제일 좋은 학교에 다니고, 의식주 모두 최고급으로 마련해주고 싶어.세현아, 난 네가 더 높이, 더 멀리 날아가는 모습을 보고 싶어.]과거 강민아가 한 말을 윤세현은 항상 기억하고 있었다.윤세현은 강민아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며 말했다.“네 말대로 여러 학과를 공부하다가 연구와는 적성이 맞지 않는다는 걸 깨닫고 미술, 디자인, 감상을 전공하게 됐어. 네가 내 비싼 학비를 지원해 주고 내가 용감하게 꿈을 이룰 수 있는 자본과 뒷심이 되어주었어. 민아야, 내가 만든 패션 브랜드는 밀란 패션쇼에 올랐고, 내가 디자인한 주얼리는 헐리워드에서 서로 뺏느라 바빠. 네 도움이 없었다면 난 정상에 오르지 못했을 거야. 네가 날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어줬어. 이젠 내가 돌아왔으니까 나도 널 돕고 싶어. 더 나은 네가 될 수 있게!”윤세현은 귓불이 붉게 물들면서도 오랫동안 마음에 간직했던 말을 용기 내어 강민아에게 전했다.강민아는 가슴에 뜨거운 열기가 소용돌이치는 것 같았다.그녀는 연분홍빛
“...”할 말이 없다....저녁이 되자 강민아는 한 상 가득 차렸고 윤세현은 전부 자신이 좋아하던 음식인 것을 보고 순식간에 눈시울이 뜨거워졌다.그녀는 강민아 옆에 앉아 혀까지 삼켜버릴 기세로 고기찜을 먹기 시작했다.정신없이 허겁지겁 먹는 그녀를 정이가 빤히 바라보자 윤세현은 순간 부끄러움에 얼굴이 붉어졌다.“정아, 미안해.”정이가 고개를 가로저었다.“엄마 요리가 맛있다고 생각하는 건 나뿐만이 아니었네요. 현이 씨, 많이 먹어요!”과거 반씨 가문에서 연진숙은 강민아에게 반하준과 아이들의 하루 세 끼를 책임지라고 했는데, 강민아가 요리할 때마다 반하준과 민이는 늘 트집을 잡았다.매번 강민아가 하는 요리만 먹으면서도 민이는 그녀가 한 요리를 마지못해 먹는다며 둘러대곤 했다.“민아, 그렇게 먹기 싫으면 먹지 마.”정이가 말해봤지만 민이는 이렇게 대꾸했다.“엄마 체면 때문에 먹어주는 거야!”할머니에게 배운 버릇이라는 걸 안다. 반씨 가문 미래 후계자로서 자신이 뭘 좋아하는지 절대 남에게 드러내지 말라고 가르쳤으니까.그것도 모자라 강민아에게 더 훌륭한 재벌가 사모님이 되도록 노력하라고 했다.하지만 사람 마음에 가시가 박히면 그 가시를 빼버려도 아물지 않는 상처가 남기 마련이다.설령 엄마가 정말 부족한 게 있어도 정이는 강민아가 속상해하는 게 싫었다.게다가 정이 눈에 매일 엄마가 해준 요리를 먹는 건 무척이나 행복한 일이었다.강민아는 맛있게 먹는 윤세현을 흐뭇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그녀는 요리를 잘했지만 반씨 가문에서 7년 동안 지내면서 점차 자신의 요리 솜씨에 자신감을 잃어갔다.윤세현은 한 그릇을 뚝딱 비우고 또 한 그릇을 떠 왔다.강민아가 반찬 네 가지와 국물을 끓였는데 접시가 전부 텅텅 비어버렸다.세 사람이 식사를 마치고 윤세현과 정이는 설거지를 도맡았다. 아이는 윤세현을 데리고 아래층으로 내려가 음식물 쓰레기도 척척 버렸다.강민아가 따뜻한 물 석 잔을 따라 주방에서 나왔을 때 윤세현은 캐리어에서 접힌 서류를 꺼내 테이블
그는 루나가 일부러 자신을 꼬드긴다고 생각했다.여자들이 이런 식으로 밀고 당기는 걸 수없이 봐왔으니까.하지만 루나가 원하는 스포츠카를 경매에 부쳤는데도 루나가 나타나도록 유인하는 데 실패했다.이에 반하준은 종주산에서의 레이스가 빠르고 격정적인 하룻밤 단꿈이 아니었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그런데 이번에 루나가 다시 나타난다는 말에 반하준은 엄규민에게 음성 메시지를 보냈다.“국제 레이싱 대회에서 루나가 나타나면 잘 지켜봐!”그는 루나의 헬멧을 벗기고 그녀의 진짜 모습을 보고 싶다는 강한 충동이 들었다....검은색 드림이 도로 위를 달리고 조수석에 윤세현이 앉았다.그녀는 고개를 돌려 운전하는 강민아를 바라보며 달콤한 미소를 지었다.마치 5년 전, 아니, 그보다 훨씬 더 이전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5년 동안 연락이 끊겼다가 다시 만났어도 마치 서로의 마음이 한 번도 떨어지지 않은 것처럼 조금의 어색함도 느껴지지 않았다.“발동기가 소음이 좀 심하네. 오늘 밤에 정비소로 보내서 제대로 고쳐야겠어.”강민아가 대답했다.“그래, 같이 가자.”그녀와 단둘이 있으니 윤세현은 부쩍 말수가 늘었다.“내가 돌아와서 시범경기에 참여하는 거야?”강민아는 흑백이 분명한 눈동자로 앞만 주시했다.“세현아, 난 언제 시작해도 늦지 않다고 생각해. 내가 다시 레이서의 길을 걷게 된다면 가장 먼저 함께하고 싶은 사람은 너야.”그녀의 말에 윤세현의 귀가 붉게 물들었다.“다시 레이서의 길을 가려고?”“응.”강민아는 핸들을 꽉 잡았다.“이번에는 더 이상 루나라는 이름에 숨지 않고 전 세계에 루나의 본명이 강민아라는 걸 알릴 거야.”육성민이 운전하는 SUV 뒷좌석엔 심은호와 정이가 앉아 있었다.심은호는 두 손을 운전석과 조수석 뒤편에 올려놓은 채 시선은 줄곧 이미 차들 사이로 사라진 드림을 노려보고 있었다.“쫓아가요. 바짝 붙어요. 기사님, 제 아내와 바람난 남자가 저 차 안에 있어요!”육성민의 이마가 들썩이며 푸른 핏줄이 툭 튀어나왔다.“당장 차 밖으로
“루나도 시범경기에 참가한다고요?”이 소식을 처음 들은 엄규민은 강민아에게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그걸 어떻게 알아요?”하지만 이내 알 것 같았다. 윤세현이 강민아에게 말했겠지.강민아와 윤세현은 워낙 친한 사이였기 때문에 그녀가 레이싱에 대해 전혀 몰라도 윤세현으로부터 루나에 대해 들었을 것이다.루나가 시범 경기에 출전한다는 소식을 접한 빈센트는 승부욕에 불이 붙었다.“루나가 복귀한다고요?”그는 다른 동료들에게 이 소식을 전했다.“루나의 성공은 우리 덕분이라는 걸 보여줄 거예요. 우리의 도움 없이 루나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걸!”빈센트가 윤세현에게 흥분하며 말했다.“루나가 문라이트 클럽 대표의 챙김을 받아 우리보다 더 대단한 팀을 만들어야만 시범경기에서 좋은 성적을 따낼 수 있을 거야.”또 다른 엔지니어도 이렇게 말했다.“현재 전 세계에서 우리보다 더 강한 레이싱 팀은 없어. 우리는 아마추어 선수로 루나를 이길 거야. 윤세현, 똑똑히 지켜봐!”윤세현의 눈은 빨갛게 달아올랐고 얼굴은 피가 거꾸로 솟아올라 연분홍빛으로 물들었다.오만한 외국인들에게 너무 화가 나서 말도 잇지 못했다.그때 시원한 물처럼 차가운 강민아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그러면 어디 한번 두고 보죠. 너무 비참하게 지지는 않길 바라요.”강민아는 그들을 향해 담담한 미소를 짓고는 차가운 손을 윤세현의 뜨거운 볼에 갖다 댔다.“열 좀 식히고 집에 가자.”심은호는 강민아와 윤세현의 다정한 모습에 입에서 쓴맛이 느껴졌다.그는 팔짱을 낀 채 엔지니어라는 사람들을 쳐다보지도 않았다.문라이트 레이싱 클럽이 해체된 후 루나를 위해 일하던 팀원들은 여러 회사에 스카우트되어 높은 연봉을 받으며 일하게 됐다.빈센트는 문라이트 레이싱 팀에서 총괄 엔지니어로 있다가 클럽에서 일하던 경험으로 자서전까지 썼다.루나 곁에서 일했다는 경험만으로 여러 명문대에 객원 교수로 초빙되기도 했다.심은호가 일을 맡긴 매니저의 눈에 띄어 영입되었고 루나 덕에 유명세를 치렀으면서 이제 저만치 콧
엄규민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윤세현이 말했다.“전 부신 그룹이 싫어요. 제가 소유한 회사 전부 부신 그룹과 협업하지 않을 거예요.”엄규민은 의아했다.“혹시 부신 그룹에 대해 어떤 오해가 있으신가요?”그가 강민아를 돌아보더니 알겠다는 듯 윤세현에게 물었다.“혹시 강민아 씨가 부신 그룹에 대해 좋지 않은 얘기를 했나요? 윤 선생님, 오해하지 마세요. 강민아 씨는 부신 그룹에 대해 모릅니다. 게다가 저희 대표님과 사이도 좋지 않습니다. 반 대표님께선 거금을 들여서 강나현 씨 레이싱 코치로 모시고 싶어 합니다. 신중하게 생각을...”“됐어요.”윤세현은 엄규민을 경계하는 표정으로 바라보더니 강민아에게 딱 붙어 그녀의 어깨에 턱을 올려놓았다.“난 루나만 위해서 일해요.”“윤세현, 하늘에서 떨어지는 돈을 왜 안 받아?”한 중년 남자가 다가왔다. 그의 이름은 빈센트, 문라이트 레이싱 클럽 엔지니어 중 한 명이었다.윤세현의 얼굴이 굳어졌다.“반하준이 세계적인 대회에서 프로 레이서가 아닌 아마추어 선수를 도와달라는데 부끄럽지 않아요?”빈센트는 대수롭지 않은 듯 두 손을 벌리며 말했다.“그냥 시범 경기잖아.”강민아는 엄규민과 윤세현의 말에서 대충 상황을 파악했다.“강나현이 국제 레이싱 대회에 출전한다고요?” 엄규민은 강민아에게 자랑스럽게 말했다.“저희 부신 그룹이 이번 서경에서 열리는 국제 레이싱 대회의 스폰서 중 하나라 강나현 씨가 레이서로 시범 경기에 출전할 예정입니다.”그러면서 웃으며 덧붙였다.“강민아 씨는 잘 모르겠지만 윤 선생님과 친구시죠? 윤 선생님은 최고의 여자 레이서 루나 선수 곁을 지켰어요. 훌륭한 내비게이터라 반 대표님께서 거액을 들여 데려가려는 거니까 강민아 씨는 윤 선생님 돈 버는 데 방해하지 마세요.”“호박에 줄 긋는다고 수박 되는 줄 아네.”강민아의 말에 엄규민의 잘난 척하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졌고, 옆에서는 윤세현이 빈센트에게 말했다.“아마추어 레이서가 시범 경기에 출전했다는 건 시범 경기에 출전할 수 있었던
심은호는 온몸의 피가 싸늘하게 식어가며 손발이 차가워지고 속에선 열불이 들끓었다.세상이 미쳐 돌아가고 있다.강민아의 침대가 그렇게 크다면 셋이 같이 자는 건 안 될 게 뭐가 있나!말문이 막힌 심은호의 목울대가 요동쳤다.강민아는 심은호의 붉어진 눈가를 보고 물었다.“심은호 씨, 왜 그래요?”남자가 고개를 저으며 울먹이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아니에요. 민아 씨가 행복하면 됐어요.”강민아는 어리둥절했고, 두 손으로 그녀의 허리를 감고 있던 윤세현이 턱을 그녀의 어깨 위로 올려놓으며 작게 말했다.“저 사람 이상해.”심은호는 두 손으로 주먹을 불끈 쥐었다. 살면서 이런 서러움을 당해본 적이 없었다.저 기생오라비가 강민아의 애정을 믿고 이 틈에 그를 모함하고 있다.심은호가 입을 열어 조롱하려는데...강민아가 다정하게 윤세현의 얼굴을 쓰다듬었다.“우선 집에 가자. 10시간 동안 비행기 타느라 힘들었지? 집에 가서 씻고 푹 쉬어.”심은호는 벼락을 맞은 기분이었다.물에 빠진 강아지 같은 표정을 짓는 그의 머리 위로 만약 귀가 있었다면 축 늘어졌을 거다.‘그래, 윤세현만 챙기지.’그는 그냥 어두운 구석에 숨어서 혼자 상처를 핥으며 질투심에 미쳐버릴 수밖에. 잔뜩 뒤틀리고 벌레가 되어서 기어다니기나 하겠지.심은호에게서 원망 섞인 기운이 끊임없이 흘러나오자 윤세현은 자신과 강민아의 등을 완전히 밀착시켰다.“응!”그러면서 강민아의 코트에 비비적거렸다.5년 동안 떨어져 지냈지만 두 사람은 한 번도 헤어진 적 없었던 것처럼 가까웠다.두 사람이 서로에게 기대고 나서야 윤세현은 5년 동안 비어 있던 자신의 마음이 비로소 채워졌음을 느꼈다.“저 사람 윤세현 아닌가?”“우리랑 같은 비행기 타고 왔는데 몰랐어?”입국장에서 멀지 않은 곳에 커다란 짐을 카트에 가득 싣고 온 외국인들이 여러 명 있었다.그들은 한참 동안 윤세현을 관찰하면서 윤세현의 품에 안겨 있는 강민아를 살펴보았다.윤세현이 누구와 이토록 가깝게 지내는 건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윤세현은 칼날 같은 심은호의 눈빛을 보고 작은 심장이 몇 번이나 놀랐는지 모른다.‘누구지? 낯이 익은데.’이제 막 비행기에서 내렸는데 원수라도 만난 걸까.정이는 가볍게 캐리어를 끌며 매끄러운 타일 위를 날아다녔다.심은호의 눈빛에 놀란 윤세현은 강민아의 뒤로 숨었다.낯을 가리는 그녀에겐 사람들과 어울리는 게 무척 힘들었는데 빤히 쳐다보는 이성의 눈빛은 더더욱 불편했다.늘 머리를 짧게 자르고 옷도 중성적으로 입어서 이성의 시선이 그녀에게 향하는 일이 드물었다.본다고 해도 잘생긴 외모에 대부분은 우호적인 시선을 보냈다.육성민이 덤덤하게 윤세현을 향해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했다.“오랜만이네요.”윤세현도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했다.강민아의 오빠에 대해서는 키 크고 가슴도 크다는 것 외엔 별다른 기억이 없었다.강민아가 윤세현에게 소개했다.“이쪽은 심은호 씨, 문라이트 클럽 대표야.”윤세현은 제법 놀라며 고개를 돌려 강민아의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난 줄곧 문라이트 대표가 느끼한 아저씨인 줄 알았어.”심은호는 빠득 이가 갈렸다.‘저 기생오라비가!’감히 그가 보는 앞에서 강민아와 귓속말을 주고받는 건 기선제압이 아니고 뭘까.심은호는 서늘한 시선으로 윤세현을 뚫어져라 보며 손을 내밀고 차갑게 말했다.“안녕하세요.”윤세현은 강민아의 팔짱을 낀 채 심은호와 악수할 생각이 없는 듯 고개만 끄덕였다.심은호의 어두운 눈동자엔 두꺼운 얼음이 한층 더 쌓였다.강민아가 설명했다.“세현이가 낯을 가려서 남자와 신체적 접촉하는 게 익숙하지 않아요.”강민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심은호가 강한 적대감을 드러낸 탓인지 윤세현이 목을 움츠리며 강민아 뒤로 숨었다.그녀의 두 손이 자연스럽게 강민아의 허리를 감쌌다.이렇게 강민아를 안으면 안정감이 느껴졌다.심은호의 눈동자에 드리웠던 차가운 얼음이 쩍쩍 갈라졌다.자주 사람을 죽이는 친구에게 먼저 오른손을 자를지, 왼손을 자를지 물어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다.그런데 강민아는 윤세현의 스킨십에
심은호는 경멸 섞인 야유를 내뱉었다.“허, 누구 심장 부서지는 소리가 들리네요.”그가 딱딱하고 차가운 목소리로 오만하게 비아냥거린 뒤 육성민의 얼굴을 바라보았다.육성민의 표정도 굳어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는 팔짱을 낀 채 다정하게 안고 있는 두 사람을 바라볼 뿐, 깊고 어두운 눈가엔 흐뭇한 감정까지 담겨 있었다.‘나만 한심한 놈이야?’부서진다는 심장은 심은호 것이었나보다.‘역시 육 소위, 흐트러짐이 없네.’사실은 그도 당장 달려가 윤세현에게 주먹을 날리고 싶지만 강민아 때문에 억지로 참는 게 분명하다.심은호는 깊게 심호흡하며 육성민을 따라 배우기로 했다. ‘이 정도 아량도 없이 어떻게 첩 노릇을 해?’“나도 뽀뽀할래요!”윤세현에게 다정하게 입 맞추는 강민아를 본 정이도 기회가 오자마자 달려들었다.강민아가 정이를 안아들자 정이는 윤세현의 볼에 여러 번 뽀뽀했다.윤세현의 눈가는 촉촉했고 목까지 빨개진 그녀가 수줍게 말했다.“네 딸이야?”강민아는 고개를 끄덕였다.“응, 이름은 강윤정, 그냥 정이라고 불러.”윤세현은 다정하게 정이를 안아주었고 강민아는 그녀와 정이를 동시에 품에 가두었다.심은호는 숨을 제대로 쉴 수 없었다. 옛말에 하늘에서 떨어져 다친 학처럼 잘생긴 얼굴이 창백해졌다.“그쪽은 왜 안 가요?”심은호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내가 왜 가요?”육성민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그쪽이 죽이고 시체는 내가 처리할게요.”심은호는 육성민의 감옥생활까지 생각해 둔 상태였다.한꺼번에 두 라이벌을 제거할 수 있으니 일석이조였다.육성민이 한심하다는 눈빛을 보내며 윤세현에 대한 심은호의 적대감을 알아차리고 경고했다.“오랜만에 만났는데 방해하지 마세요.”심은호는 경악했다.“오빠가 돼서 둘이 공공장소에서 뽀뽀하고 껴안는 걸 그냥 놔둘 거예요?”육성민은 크게 이상해할 것도 없다고 생각했다.“그게 뭐 어때서요? 민아가 얼마 만에 윤세현을 만난 건데요.”심은호는 다시 봤다는 눈빛으로 육성민을 바라보았다.“육 소위님은 진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