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사라진 아내, 돌아온 나: Chapter 121 - Chapter 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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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1화

“글씨가 있어요!” 정이가 읽어갔다.“오래도록...남은 인생...”소원 팻말의 글씨는 비바람에 다소 희미해져 정이는 글자를 알아볼 수 없었다.강민아는 고개를 들어 정이에게 말했다.“가져와. 엄마가 버릴게.”정이가 살며시 잡아당기자 소원 팻말이 뚝 떼어졌다.강민아는 소원 팻말을 들고 쓰레기통으로 걸어가 망설임 없이 던져버렸다.18살 때 반하준이 그녀를 정광사로 데려와 소원 팻말에 자신의 바램을 적었다.어린 나이에 고생한 강민아에게 평생 기쁘고 행복한 일만 가득하길. 그는 강민아를 불쌍히 여겨 그녀에게 잘해줄 거라고 다짐했다.그런데 나중에 모든 것이 바뀌었다...한때 진심으로 사랑했고 미친 듯이 빠져들었고 아낌없이 주었지만 이젠 모든 걸 내려놓고 이별을 마주하며 절대 뒤돌아보지 않을 거다.반하준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가 이내 풀렸다. 그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면...굳이 생각하고 싶지는 않았다. 강민아에게 사랑을 줬다면 모든 게 달라졌을까.남자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성큼성큼 걸음을 내디디며 단호하게 아들과 함께 떠났다....이틀 후, 많은 네티즌이 인터넷에서 거듭 새로 고치며 ALI 수학 경시대회 공식 사이트를 살펴보았다.오전 10시 정각에 ALI 수학 경시 대회 최종 결과 순위가 발표되었다.ALI 그룹 공식 SNS를 통해 공개한 명단 속 결승 1등은 강민아였다.강민아의 이름이 다시 한번 검색어에 올랐다.ALI 그룹은 강민아의 열기에 힘입어 최종 순위를 발표하는 동시에 상위 20명이 최종 금, 은, 동상을 놓고 경쟁하는 챌린지에 참여할 거라는 소식을 전했다.이번 대회도 역시 인터넷을 통해 생중계되며 JVC 채널 사회자가 직접 나서서 진행한다....부신 그룹.반하준이 회의실에 들어섰다. 고급 맞춤 정장을 입은 그는 반듯한 옷차림에 당당한 걸음걸이가 타고난 리더였다. 회의실에 있던 주주와 임원들의 시선이 전부 반하준에게 집중되었다.회의실 대형 스크린에는 외국계 투자회사 대표들도 여러 명 등장했는데 그들은 카메라를 통해 반하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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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2화

이때 회의장에 꽤 많은 사람이 더 들어왔다.주주들은 들어온 사람들을 보자마자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어르신 오셨어요?”반하준의 부친 반용훈이 들어왔다.대머리 반용훈이 들어오자마자 회의실 전체가 생기를 띠며 눈에 띄게 밝아졌다.불상처럼 생긴 반용훈은 귓불도 크고 두 눈에 미소를 머금은 채 입꼬리를 올리고 누구나 웃는 얼굴로 마주했다.반하준은 부친을 보고도 상석에 가만히 앉아 존경의 의미로 그를 향해 살짝 고개를 끄덕일 뿐이다.그 순간 회의실 밖에 또 다른 사람이 등장했다.비서가 휠체어를 밀며 거기에 앉아있던 반용화가 사람들 시선에 들어왔다.반하준은 멈칫하며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주주들도 서둘러 반용훈을 지나쳐 반용화에게 다가갔고, 반용훈은 고개를 돌려 주주들에게 둘러싸인 반용화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주주들은 반용화 앞에서 두세 발짝 떨어진 곳에 멈춰 서서 늙어서 뻐근한 허리를 굽혔다.“반 연구원님, 안녕하세요.”“반 연구원님,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큰 화면으로 부신 그룹 경영진과 온라인 미팅을 하고 있던 외국 대표들도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와우, 닥터 반! 세상에, 내가 저 사람을 만나다니!”“놀랍군요. 반 연구원이 회의에 참석한다는 걸 미리 알았다면 오늘 모든 일정을 미루고 8시간 비행기로 서경에 날아갔을 텐데.”반용화는 검은색 캐주얼한 정장을 입고 셔츠 단추를 목 아래까지 풀었다. 매끈한 얼굴선을 지닌 그는 태연하고 차분한 모습을 보였다.반용화의 얼굴은 신의 은총을 한 몸에 받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지만 애석하게도 5년 전 사고로 인해 장애를 갖게 되었다.하지만 그는 휠체어에 앉아서도 남다른 분위기를 자아냈다.반용화가 반하준을 바라보는 서늘한 시선은 넓고 푸른 들판에서 불어오는 바람 같았다.그렇게까지 싸늘하진 않았지만 어딘지 모르게 아득히 벽이 느껴진달까.반하준은 직접 반용화 앞으로 다가와 정중하게 인사를 건넸다.“작은아버지.”반용화는 고개를 끄덕였고 비서는 휠체어를 밀고 그를 반하준 옆자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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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3화

반하준은 강민아의 얼굴을 다시 보고 나서야 예선 1등이 단순히 강민아의 운이 아니었음을 깨달았다.그녀는 결승전에서도 1위를 차지했다.이번 챌린지에서는 20위권 참가자들이 각자 도전하고 싶은 사람을 선택한다.참가자는 도전자의 출제에 답해야 하지만 도전자 역시 자신의 질문에 답해야 한다.참가자가 문제에 답을 하지 못하거나 논리적인 사고를 보여주지 못하면 바로 탈락이다.20위, 19위, 18위 참가자는 모두 강민아에게 도전장을 내밀었고 강민아가 문제를 풀자 그들은 탈락했다.다음으로 17, 16, 15위 참가자도 강민아에게 도전장을 내밀었다.계속해서 도전자에게 지목당하는 강민아의 모습을 보며 네티즌들은 모두 강민아를 응원하는 댓글을 남겼다.[왜 다 강민아한테만 도전해? 가정주부라고 무시해?][다 같이 덤벼서 공격한다는 거지?][그러기엔 너무 상대가 안 되는걸?]생방송에 참여한 참가자들은 네티즌들의 댓글을 보지 못했고, 강민아에게 도전장을 내민 그들은 하나둘씩 자리를 떠났다.강민아는 도전 무대에 오른 이후 한 번도 내려오지 않았다.반하준은 스크린 속 밝은 표정의 강민아를 바라보며 무아지경에 빠진 듯했다.어쩐지 그녀가 전보다 더 아름다워진 것 같았다.‘저걸 다 알고 있다고?’하지만 그녀는 고작 학사 학위만 따냈을 뿐이다.7년 동안 반씨 가문에서 남편과 아이들을 위해서만 살았는데 혹시 남몰래 공부라도 한 걸까.한 주주가 말했다.“강민아 씨를 부신 그룹 CTO로 데려오죠. 능력도 뛰어난데 반 대표님 아내이니 제일 적합한 사람인 것 같네요.”반하준의 표정이 굳어졌다.“저희는 이미 이혼했습니다.”하지만 주주들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이혼했어도 다시 데려와요.”“하준이 네 지위와 외모를 보고 어느 여자가 마다하겠어?”“여자는 원래 그래요. 몇 마디 구슬리면 바로 넘어온다니까요.”...결승전에서 2위를 차지한 참가자가 도전 무대에 올라 강민아에게 도전장을 내밀 수밖에 없었다.반하준은 숨이 멎었다.정말 강민아를 부신 그룹에 데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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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4화

강민아는 시상대에 올라 조직위원장이 건네준 금상 트로피를 받았다.그녀가 마이크 앞에 서자 진행자가 물었다.“강민아 씨, 7년 동안 전업주부로 살아왔는데 어떻게 금상을 받을 수 있었는지 다들 궁금해합니다.”강민아는 녹아내릴 듯한 스포트라이트 아래에서 시선을 들어 올렸다. 카메라 앞에서 하얀 얼굴이 더욱 찬란하게 빛났다.심호흡한 그녀는 단상 아래 18살 자신이 앉아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검은 눈동자 속에는 별처럼 빛나는 광채가 반짝이고 있었다.“제가 트로피를 받고 이 자리에 설 수 있었던 비결은 저 자신을 사랑하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삶을 맞이하며 타인의 반응에 겁내거나 외부의 평가에 자책하지 않기 위해서 저는 커다란 용기가 필요했습니다. 저를 부정하는 말들도 있겠지만 애초에 저 자신 말고 누구의 인정도 갈구할 생각이 없습니다. 제 인생의 주인공은 저니까요.”강민아가 봄바람처럼 따스한 미소를 지으며 수많은 카메라를 향해 말했다.“제가 살아온 인생을 자주 되돌아볼 순 있겠지만 절대 그때로 돌아가지는 않을 겁니다.”강민아가 ALI 수학 경시대회에서 금상을 차지하자 온 인터넷이 들썩였다.[국내 최고의 대회에서 금상을 획득한 강민아에게 축하를 보냅니다! 그녀의 앞날에 희망이 가득하길 기원하겠습니다!][강민아 씨에겐 더 넓은 세상이 기다리고 있어요!][내가 말했지. 여자는 남자를 버린 순간부터 더 넓은 세상으로 날아갈 거라고.]인터넷에서는 국내 10여개의 명문 대학에서 강민아에게 축하 메시지를 보냈다.30분도 채 되지 않아 해외 유명 대학들이 SNS를 개설하고 강민아에게 축하와 초대를 보냈다.네티즌들은 이번 ALI 대회가 얼마나 큰 관심을 받고 있는지 실감했다.세계 유수의 대학들이 강민아를 열심히 초청하는 상황 속에 국내 주요 기업들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심지어 국가 자본이 탄탄한 군사 관련 기업들도 강민아에게 연락을 보냈다.그리고 몇몇 재벌가 사모님들의 계정에 찾아가 보복성 메시지를 남기는 네티즌도 꽤 많았다.얼마 전 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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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5화

훤칠한 키를 자랑하는 남자는 소나무처럼 반듯하고 늠름하게 서 있었다.강민아를 향해 쏟아지는 꽃과 박수를 바라보며 심은호의 눈동자는 웃음으로 빛났다.여러 교수가 강민아 앞으로 다가와 인사를 건넸고, 강민아는 정신을 차리고 학계 거물들을 맞느라 분주하게 움직였다.그녀는 이들과 반가운 인사를 주고받으면서 인파를 헤치고 심은호를 향해 걸어갔다.심한기도 거기 있었다.강민아는 심한기 앞에 가만히 서서 심호흡한 뒤 심한기에게 말했다.“교수님, 저 돌아왔어요!”심한기가 두 손으로 뒷짐을 진 채 숨을 참는 걸 보니 표정 관리를 하는 게 분명했다.“쳇, 난 너 필요 없다!”심한기가 입을 삐죽거리자 강민아는 아직 장기명에게 성과를 빼앗긴 것을 마음에 담아두고 있다는 걸 알았다.“교수님...”강민아가 해명하려고 입을 열려고 할 때 심한기가 말했다.“그냥 담대하게 앞으로 나아가. 네가 여전히 빛나는 존재인지 나도 지켜볼 테니까.”심한기의 말에 강민아는 마음이 따스해졌다. 그녀를 원망하면서도 그는 여전히 그녀가 잘되길 바라고 있었다.몇 명의 교수들이 더 모여들었다.“강민아 양, 제17회 이노베이션 서밋 포럼의 추천서인데 서경대를 대표해서 포럼에 초대하고 싶습니다.”강민아의 눈이 살짝 커졌다. 특허받은 것을 좋은 가격에 팔고 싶었는데 그러기엔 이노베이션 포럼에 참석하는 것이 최적의 선택이었다.그러자 옆에 있던 다른 교수들이 투덜거렸다.“하여튼 권 교수 빠르다니까.”또 다른 교수는 같은 추천서를 꺼내더니 이렇게 말했다.“강민아 양, 고연대를 대표해서 과학기술 서밋 포럼에 초대하고 싶습니다. 고연대에서 보내드리는 추천서이니 이걸로 꼭 포럼에 오시길 바랍니다.”서경대 교수는 즉시 고연대 교수의 손을 제지했다.“이봐, 내가 먼저 추천서를 줬어. 받아도 우리 서경대 추천서로 포럼에 가야지.”두 교수가 논쟁을 벌이는 동안 다른 대학의 여러 교수가 강민아에게 추천서를 전달했다.수십 장이 넘는 추천서가 눈앞에 다가오자 강민아는 어떤 추천서를 받아들여야 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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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6화

심은호가 손을 들어 심한기의 침이 강민아에게 튀는 것을 막았다.심한기는 코를 훌쩍거리며 중얼거렸다.“어디서 구린내가 나.”다른 교수들은 그의 말에 코를 킁킁거렸다.“구린내? 난 모르겠는데?”정신을 차린 강민아가 서둘러 손에 들고 있던 초대장을 몇몇 교수들에게 보여주었다.“이미 공식 초대장을 받았어요. 챙겨주셔서 감사합니다.”말하는 순간 귀신처럼 하얗게 질린 얼굴이 보였다.방연석이 사람들 틈에서 그녀를 보고 있었다.강민아와 눈이 마주친 방연석은 고양이를 본 쥐처럼 뒤돌아 도망치듯 달려갔다.방연석은 본선에서 100위 밖에 안착해 자격 미달로 강민아에게 도전장을 내밀지 못했다.결선에서 2위를 차지한 참가자가 강민아에게 도전장을 내밀 때까지도 방연석은 조직위원회가 결선 2위를 차지한 참가자에게 금상을 수여해 주기를 기도하고 있었다.그에겐 그 참가자가 강민아도 훨씬 뛰어나 보였으니까.강민아가 금상 트로피를 쥐는 순간 방연석은 당황했다.자신과 강민아의 내기가 떠올라 두 다리가 덜덜 떨렸다.황급히 현장을 벗어나 그는 어디든 숨을 곳을 찾으려 했다. 이 열기가 지나가면 아무도 그와 강민아의 내기를 기억하지 못할 테니까.“악!”그러다 복도에서 누군가 부딪혔다.덩치가 크고 돌처럼 단단한 상대와 부딪힌 방연석은 그대로 튕겨 나가면서 엉덩방아를 찧었다.정작 당사자는 아무 말 없이 그의 곁을 스쳐 지나갔다.방연석은 욕설을 중얼거리면서도 비틀비틀 일어나 부딪힌 사람을 미처 살펴보지도 못했다. 어깨를 부딪쳐 그를 넘어뜨린 사람이라면 분명 자신이 상대할 수 없다는 걸 알았다.벽을 붙잡고 건물 밖으로 걸어 나온 방연석은 신선한 공기를 들이마신 뒤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주머니에 손을 넣는데 어느새 거기에 약봉지 하나가 들어있는 것을 발견했다.당황한 방연석이 약을 꺼내 뒷면에 적힌 설명을 확인했다.변비 해결...‘설마 설사약?’그의 주머니에 대체 언제 이런 약이 들어가 있었던 걸까.방연석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이런 젠장!”그는 바닥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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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7화

반하준의 전화가 뚝 끊어지고 회의실 전체에 죽음의 침묵이 감돌았다.반하준의 주위로 겹겹이 두꺼운 얼음이 쌓여갔다.강민아가 또다시 그와 대치하고 있다. 대체 언제까지 소란을 피울 작정인지!반하준의 차가운 얼굴과 어두운 동공엔 억눌린 격한 감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그는 다시 강민아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돌아오는 건 기계적인 음성이었다.“고객님의 전화가 꺼져 있어...”강민아가 또 그를 차단했다.반하준이 깊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드는데 주주들이 서로 눈치 보며 수군거리고 있었다.“내가 민아한테 연락해 볼게.”반용화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자 모든 시선이 그를 향했다.반용화가 휴대폰을 꺼내 번호를 누르고 스피커 모드로 돌리자 주주들은 무의식적으로 숨을 죽이며 전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이윽고 통화가 연결되었다.“연구원님, 저 상 받은 거 알고 전화하셨어요?”기쁨에 가득 찬 강민아의 기분 좋은 목소리가 들려왔다.반하준은 그대로 굳어버렸다. 이렇듯 들뜬 강민아의 목소리는 처음 듣는다.“축하해.” 반용화는 어떠한 감정도 담겨있지 않은 목소리로 대답했다.“강민아!”반하준이 살벌한 목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외쳤다.“너 방금 내 전화 끊었어?”강민아는 3초 동안 전화기 너머로 침묵을 지켰다.“연구원님, 전에 제가 말씀드린 것 다시 한번 생각해 주셨으면 좋겠어요.”반하준의 날카로운 턱이 굳게 다물리며 그의 얼굴은 그을린 냄비보다 더 어둡게 변해갔다.강민아는 지금 그를 완전히 무시하고 있다.그것도 일부러!‘그래, 꼭 내가 먼저 달래는 말을 듣고 싶다는 거지?’반하준이 숨을 고르며 말했다.“강민아, 밥 한번 먹자.”한 번도 자신이 먼저 한발 물러날 거라곤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이는 강민아와 이혼한 후 그가 베푸는 최대한의 용서와 친절이었다.반용화의 휴대폰에서 강민아의 목소리가 들린다.“연구원님, 저랑 같이 식사 한번 하실래요?”반하준은 강민아가 부끄럼을 타서 굳이 다른 사람까지 부른다는 생각에 우스웠다.그와 단둘이 만나는 게 두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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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8화

처음에야 아이들도 신기해하지만 며칠 동안 계속 얘기하니 무척 지겨웠다.게다가 지난주부터 민이는 루나가 자기 집에 온다고 말했지만 지금까지도 기다리기만 하니 민이를 대하는 다른 아이들의 태도도 시큰둥해졌다.민이는 정이에게 다가가는 아이를 보고는 바로 소리를 질렀다.“강윤정이랑 한 팀인 애들은 수업 끝나고 남아서 장비 정리하고 장비실 청소할 거야!”민이의 말을 들은 아이들은 아무도 감히 강윤정에게 다가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체육 선생님은 늘 민이에게만 관대하게 대하며 체육 반장을 시켜서 매번 수업이 끝날 때마다 남아서 청소하는 아이들을 정하게 했다.체육 선생님은 민설윤과 강윤정만 한 팀을 이룬 것을 보고는 바로 소리쳤다.“5인 1조로 배구 경기할 거야. 너희 둘은 다른 팀으로 들어가.”그가 두 아이를 각기 다른 팀으로 들여보내니 민설윤은 어쩔 수 없이 새로운 팀으로 갔다.“선생님, 저희는 강윤정이랑 팀 안 할래요!”정이가 새 팀에 들어가려는 순간 팀에 있던 아이들이 손을 들고 외쳤다.체육 선생님은 다른 팀들을 바라보았다. “그러면 강윤정은...”“선생님, 우리 팀에는 사람 다 찼어요.”“우리도 강윤정이랑 같은 팀 하기 싫어요!”“강윤정은 자기 엄마처럼 반칙할 텐데 같이 놀기 싫어요.”상대적으로 정보에 뒤처진 아이들은 부모님으로부터 강윤정 엄마에 대해 어렴풋이 들었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듣지는 못했다.학교에 와서 서로 집에서 들은 이야기를 공유하고 민이의 영향까지 받으니 당연히 아이들은 정이를 따돌리며 아무도 한 팀이 되고 싶어 하지 않았다.교실에서도 쉬는 시간이 되면 민설윤과 반연주 외에 아무도 정이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체육 시간에 선생님은 몸이 약한 반연주를 옆에서 쉬게만 하면서 체육활동에 참여하지 못하게 했다.정이는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강윤정이 된 후부터 아이들에게 따돌림을 당했다.여린 분홍빛 입술을 깨물며 주먹을 꽉 쥐었다.엄마와 약속했다.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용감하게 앞으로 나아가기로.정이는 체육 선생님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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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9화

함께 팀을 이룬 아이 중 누구는 손으로 땅을 지탱한 채 혀를 내밀었고 누구는 바닥에 앉아서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반현민, 우린 일어나지도 못하겠는데 재경기?”민이는 옆에서 체육 선생님이 정이에게 꽃 스티커를 주는 모습을 지켜보았다.체육 선생님이 스티커 다섯개를 가져왔고 정이가 혼자 5인 팀을 상대해 1등 했으니 꽃 다섯개는 전부 정이 몫이었다.민이는 심술 가득한 얼굴로 정이에게 삿대질하며 명령했다.“1등 한 사람이 도구 정리해!”“대체 왜?”민설윤이 정이 대신 나서자 반연주도 물었다.“왜 1등 한 사람이 도구 정리해야 하는데?”민이가 말했다.“다른 애들은 다 쟤 때문에 지쳤는데 쟤는 땀도 안 흘리잖아. 쟤가 안 하면 누가 해?”민설윤이 중얼거렸다.“반현민 너도 힘이 넘치는구먼.”민이는 친구의 팔을 어깨에 둘렀다.“난 반장이니까 지친 친구들을 데려다줘야지.”민이가 친구를 부축하며 가려고 했지만 움직일 수가 없었다.붉어진 얼굴로 아이는 이를 갈며 조용히 윽박질렀다.“걸어. 내가 널 부축해 줘야 해?”다른 친구들은 전부 교실로 돌아가고 민설윤과 반연주만 남아서 정이와 함께 체육 도구를 정리했다.“꺄아악, 살려줘!”갑작스러운 비명에 민설윤과 반연주는 깜짝 놀라고 정이는 소리가 들리는 쪽을 돌아보았다.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어린아이들이 운동장에서 마구 뛰어다녔다.검은 운동복에 마스크를 쓴 성인 남자가 손에 나무 막대기를 들고 아이들을 쫓고 있었다.민설윤과 반연주는 제자리에 굳어 있는데 정이가 뛰어갔다.“정아, 돌아와!”“정아, 저쪽으로 가지 마!”두 소녀는 목이 터져라 소리를 질렀다.정이는 손에 쥔 배구공을 힘껏 던졌고 날아간 배구공은 가면남의 등을 제대로 가격했다.“윽!”가면남은 비참한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쓰러졌다.그 가면남이 일어나려 하자 정이는 가면남의 등을 밟고 한 손으로 나무 막대기를 잡고 있던 가면남의 손을 꽉 잡았다.손을 뒤로 꺾자 두둑 소리가 들렸다.“끄아악!”비참한 비명이 운동장 하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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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0화

한 학부모가 그녀에게 속삭였다.“강민아 씨, 유교장 쫓아줘서 감사해요. 지금 원래 있던 교감이 교장이 되고 나서 많은 변화가 생겼어요. 올해 우수 학생 평가는 공정하게 진행될 것 같아요.”강민아는 겸손하게 말했다.“그건 제가 한 일이 아니에요. 그날 유영호 씨가 정이를 퇴학시키겠다고 난리를 부리지 않았어도 언젠가 이렇게 됐을 거예요.”오랫동안 유영호에게 불만이 많았던 학부모와 교사들은 강민아에게 고마워했다.“민아야.”반진경이 반연주의 손을 잡은 채 웃으며 다가왔고 그녀의 옆엔 장기명도 있었다.반진경은 얼굴을 허옇게 칠하고 가는 눈썹을 날렵하게 세웠으며 꽤 넉넉한 핏의 캐시미어 코트를 입은 채 손에는 은색 에르메스 가방을 들고 10억이 넘는 옥 펜던트를 차고 있었다.과거 반씨 가문에 있을 때도 반진경은 일부러 그 펜던트를 꺼내 강민아에게 과시하곤 했다.장기명은 배운 사람이기에 굳이 옆에 있는 사람처럼 화려하게 차려입지는 않았다.“민아야, 큰일 났어! 정이가 또 사람을 때렸대!”반진경의 목소리는 날카로워 주변 학부모들의 주의를 끌기에 충분했다.반진경은 강민아에게 다가와 눈썹을 치켜세우고 흥분한 표정으로 수다를 떨었다.“연주가 그러는데 네 딸 강윤정이 수업 시간에 또 사람을 때려서 골절시켰대.”이 말을 들은 주변 학부모들은 긴장한 채 서둘러 강민아에게서 아이들을 떼어놓았다.몇몇은 이렇게 당부하기도 했다.“앞으로 강윤정 보면 멀리해. 알았지?”“엄마, 난 강윤정이 부러워요!”강윤정의 이름만 나와도 아이들은 신이 나서 부모에게 이렇게 말했다.“강윤정 엄청 멋져요! 나도 그렇게 되고 싶어요!”학부모는 아이의 말에 미쳐버릴 지경이었다.“왜 강윤정을 따라 해? 하지 마!”그런데 아이들은 여전히 떠들어댔다.“강윤정 혼자 반 애들 다 이겼어요. 혼자서 애들 다 쓰러뜨렸어요.”부모들은 자녀의 설명을 들으며 보디빌더와 비슷한 근육을 가진 소녀를 상상했다.반 아이들이 전부 대자로 바닥에 엎드려 통곡하는 모습이 떠올랐다.그들은 문득 현기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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