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딩 크레딧에서 당신의 이름을 찾아의 모든 챕터: 챕터 31 - 챕터 40

82 챕터

Chapter31

제31화정호는 석현이 언제나처럼 해사하게 웃어 주기를 바랐다. 석현이 ‘나도요, 나도 정호씨 좋아해요’라고 노래하는 듯한 목소리로 말해 줄 것 같았다. 하지만 정호의 입에서 나온 말을 들은 석현은 눈밭에 커피를 떨군 채 넋이 나간 듯한 얼굴로 말이 없었다.말없이 정호를 바라보는 석현의 눈에서 똑, 눈물이 흘러내렸다. 한 방울, 두 방울, 닦을 새도 없이. 지긋이 석현을 바라보던 정호는 전혀 예상치 못했던 석현의 눈물에 파들짝 놀랐다.“……석현 씨?”석현은 말이 없었다.“석현 씨? 왜…왜 울어요?”석현이 눈을 질끈 감았다. 후드득 눈물이 떨어져내렸다. 그리고 크게 숨을 들이쉬고는 아아,하는 희미한 탄식같은 한숨을 뱉었다. 울음이 묻은 다정한 목소리로,“정호 씨, 진짜 이렇게 무방비하게 낯선 사람을 막 믿어도 괜찮아요? 내가, 내가 이상한 사람이면 어떡하려고 그래요.”“석현 씨 이제 나한테 낯선 사람 아니잖아요.”‘이상한 사람도 아니구요’까지 말하자 석현은 질끈 감았던 눈을 떠 정호를 보았다. 짙은 갈색 눈동자가 여느 때보다도 깊고, 진했다. ‘석현 씨는 내가 어떤가요, 좋은가요’하고 정호는 묻고 싶었다. 하지만 굳이 묻지 않아도 그 답은 이미 알고 있다. 정호는 단지 쉬이 전해지지 않았을 제 불확실했던 마음을 이제 확실하게 전하고 싶을 뿐이었고, 말했으니 됐다고, 그렇게 생각했다.정호는 복잡한 표정의 석현에게 다가가 넓은 어깨를 천천히 끌어안았다. 다 마신 정호의 커피잔에 남아있던 커피 방울이 똑, 똑, 하얀 눈밭으로 떨어졌다. 울음이 섞인 한숨을 내쉬며 석현이 정호를 마주 안아오는 바람에 다시 정호가 석현의 품에 안긴 셈이 되었다. 석현은 정호를 품에 꼭 안은 채 한참을 어깨를 들썩이며 울었다.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입술을 맞추었다. 차갑고 맑은 공기 사이로 석현의 비누 냄새가 희미하게 풍겨왔다. 방금 마신 커피 향과 함께 짭짜름한 눈물 맛이 났다. 어제 저녁에 그랬던 것처럼 석현이 팔에 힘을 주어 정호를 꽉 안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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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32

제32화정호는 창문 틈을 비집고 들어오는 햇살에 눈을 떴다. 퍼뜩 정신을 차려 일어나 앉았다. ‘소파에서 자 버렸구나…….’ 석현이 덮어준 듯한 두꺼운 이불이 찬 바닥으로 스륵 흘러내렸다. 시계는 벌써 열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이 시간이면 테이블에서 무언가를 읽거나 쓰고 있어야 할 석현의 모습은 어째서인지 보이지 않았다.어젯밤 집에 돌아왔을 때는 이미 늦은 시간이었다. 해야 하는 작업이 있다며 테이블에 앉은 석현을 남겨 두고 혼자서 방에 들어가 잠을 청하자니 왠지 아쉬워 소파에 앉아 석현의 작업이 끝나기를 기다렸는데, 기다리다가 그대로 잠이 들어버린 모양이다.문득 어제 석현과의 키스를 떠올린 정호는 귀가 뜨거워져 와 마른 세수를 했다. 붕붕 하늘로 떠오르는 기분이 들면서도 마음 한쪽이 무거웠다. 내일이면 이제 한국에 돌아가는 날이다. 우리는 이제 말 그대로 지구 반대편까지 멀리 떨어져야 하는데, 이 마음은 어떻게 되는 거지. 오늘 하루가 지나기 전에 둘이서 해야 할 이야기가 많겠다는 생각이 들어 정호는 마음을 다잡았다.석현의 방문이 벌컥 열리며 터덜터덜 석현이 걸어나왔다. 어쩐지 안색이 파리하니 안 좋았다. ‘피곤한 건가. 잠은 좀 잔 건가……’ 멍한 얼굴의 석현이 걱정스러워 정호는 저를 보고 가만히 멈춰선 석현에게 다가갔다. 어두운 표정의 석현은 말이 없이 입술을 깨물었다.“석현 씨, 좀 잤어요?”창백한 얼굴로 정호를 바라보던 석현이 입을 열었다.“정호 씨,”이름을 불러오는 석현의 목소리는 버석이는 듯 건조하고 힘이 없었다. 뭐지. 이 불안한 느낌은.“늦어도 한 시간 뒤에는 공항으로 출발해야 되니까,얼른 준비해요.”정호는 무슨 이야기인지 잘 알 수가 없어 되물었다.“공항…… 이요?”석현이 왼손을 들어올려 눈언저리를 감싸 쥐고 고개를 숙이며 말을 이었다.“방금 연락 받았는데, 교통편 갈아타는 시간이 잘 맞아서 예정보다 일찍 도착했다나 봐요. 여기서 공항까지 세 시간 넘게 걸리니까 빨리 출발해야 돼요.”꺼질 것 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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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33

제33화한 시간 후면 출발해야 한다던 석현은 무슨 준비할 게 그렇게 많은지 거의 한 시간이 다 지나서야 급하게 방에서 나왔다. 의아하게도 아까와 전혀 다름없는 모습이었다. 손도 대지 않은 듯한 뒷머리가 여기저기 뻗쳐있었다. 옷도 갈아입지 않고 집에서 늘 입는 편한 옷을 입은 채로 서둘러 두꺼운 패딩 점퍼에 팔을 꿰었다. 나갈 준비를 한다더니. 뭐 급하게 해야 할 다른 일이라도 있었던 건가.정말 멀리까지 가야 하는 모양인지 석현은 지도를 확인해가며 집중해서 차를 몰았다. 중간에 주유소에 들러 기름을 넣는 동안 나란히 서서 커피와 빵을 사 먹었다. 입이 깔깔해 잘 넘어가지 않았다. 석현은 줄곧 이렇다할 말도 없이 눈도 잘 맞춰주지 않았다. 그런 석현이 야속하면서도, 이런 상황에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는 그 마음을 저도 왠지 알 것 같아서 정호는 마음이 쓰렸다.조용히 운전하는 석현을 하릴없이 바라보았다. 석현은 여기에 있지만 없는 사람처럼 희미하고 위태로워 보였다. 늘 금방이라도 연기처럼 사라질 것 같은 아스라한 분위기가 있었다. 석현을 향한 제 마음을 깨닫기 전부터 정호는 석현을 보면 어딘가 허무하게 마음이 아팠다. 정호는 이제야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다시는 만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예감 때문이었다.정호는 마음이 조급해졌다.“석현 씨,”정호가 입을 열었다.“나 석현 씨 진짜 좋아해요. 많이 좋아해요.”서둘러 이 마음을 몇 번이고 말해 두고 싶었다.잊지 않도록. 잊을 수 없도록.“한국 가서도 연락 자주 할게요.우리 둘 다 바쁘지 않은 시기에 어디라도 괜찮으니까, 어딘가 중간 지점에서 만나요. 아무래도 여기까지 나 혼자서는 못 올 것 같으니깐.”말없이 입술을 꼭 깨문 석현의 옆모습을 보며 정호는 독백처럼 말을 이어나갔다.“석현 씨가 한국 오기 힘든 거면,한국 아닌 데서 만나면 되는 거니까.우리 영영 못 보는 거 아니니까.”말 한 마디 한 마디에 힘을 주어 말했다.눈물이 날 것 같았다.“그러니까 나 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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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34

제34화공항에 도착하자 회사 통역 및 해외 업무를 담당해주는 선재의 낯익은 모습이 멀리 보였다. 아, 선재 씨가 이 먼 데까지 데리러 와줬구나. 너무 고맙고 미안하네. 그런데 나는 이렇게 가기가 싫어서, 어떡하지. 어떡하면 좋지.차에서 내리기 전, 석현이 불쑥 정호의 손을 붙잡았다. 울고 난 처연한 얼굴이 창백했다. 무언가를 말하고 싶은 듯한 얼굴로 석현은 자꾸 애꿎은 입술만 깨물었다. 정호는 석현의 어깨를 끌어안고 등을 토닥였다.“괜찮아요, 말 안 해도. 괜찮아요, 석현 씨.”정호의 말에 다시 흘러나오는 눈물을 서둘러 훔치며, 석현이 정호의 주머니에 무언가를 넣어주었다. 오른쪽에도, 왼쪽에도.“편지 썼어요.”너무 울어서 맹맹한 목소리로 석현이 말했다.“한국 도착해서 읽어줘요.”“그건 너무 오래 걸리잖아요.”애써 아무렇지 않게 엄살을 떠는 정호의 말에 석현이 풋 웃는가 싶더니 이내 다시 우는 얼굴이 되어,“그럼, 그러면, 출발하고 나서 읽어요.”석현은 급하게 쪽지에 전화번호를 쓰더니 그것도 정호의 주머니에 집어넣어주었다. 금방이라도 죽을 것 같은 목소리로,“정호 씨,”석현은 몇 번이나 정호의 이름을 불렀다.“정호 씨, 연락 기다릴게요. 연락해요.”그 말을 하는 석현의 눈이 무섭도록 짙고 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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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35

제35화“이선재입니다. 전석현 선생님, 이렇게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석현에게 악수를 청하는 선재의 말에 정호는 의아해져 석현을 바라보았다. 언제 울었냐는 듯, 말끔한 웃는 낯으로 선재가 내민 손을 가볍게 마주 잡으며 석현이 작게 고개를 숙였다. 분명 친절하게 웃고 있는데도 어딘가 차가워 보이는 석현이 낯설었다. 정호가 2주 동안 함께한 사람과는 마치 다른 사람 같았다.“그럼 가시는 길 모쪼록 조심해서 가십시오.”사무적인 말투로 선재에게 인사를 건넨 석현이 정호에게도 가볍게 목례를 하고는 등을 돌려 주저없는 걸음으로 멀어져갔다. 정호는 석현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그 자리에 서 있었다.“와…… 진짜 전석현이잖아…… 와…… 미친…… 이거 진짜.”정호의 뒤에서는 선재가 석현과 악수를 나눴던 손을 만지작거리며 실감이 나지 않는다는 듯 중얼거리고 있었다.“석현씨를, 알아요?”정신을 차린 듯 퍼뜩 정호를 본 선재가 흥분해서 대답했다.“그럼요! 이쪽 통번역 판에선 완전 유명하죠!”선재의 이야기로는 몇 년 전 홀연히 한국을 등지고 떠나 자취를 감춘 석현을 집요하게 찾는 사람들도 많다고 한다. 항간에는 석현이 죽었다는 소문도 있었지만 한국어가 아닌 외국어를 다시 다른 외국어로 번역한 작업물들에 간간이 이름이 올라와 석현이 살아있음을 알 수 있었다고. 그마저도 어딘가에 살아있다는 게 겨우 확인이 되었을 뿐, 그가 어디에 있는지, 구체적인 소재지를 알게 된 건 이번이 처음이라고 했다. 선재는 이름만 듣던 전석현을 만났다는 기쁨 때문인지 정호의 안색은 신경도 쓰지 않는 것 같았다.더, 더 제가 모르는 석현의 이야기를 캐묻고 싶었지만 오랜만에 다시 '배우 소정호'의 얼굴을 하게 된 정호는 마음속에 떠오르는 수많은 질문들을 속으로 삼켜야 했다.탑승 수속을 마치고 비행기에 탄 정호는 그저 멍했다. 막상 한국에 돌아갈 생각을 하니 막막했다. 결국 한 씬도 촬영 못 했는데 그건 어떻게 되는 거지. 나 때문에 영화 엎어지는 건 아니겠지. 비행기 좌석에 눕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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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36

제36화눕듯이 몸을 누이고 있던 정호는 퍼뜩 몸을 일으켜 앉아 외투 주머니를 뒤졌다. 왼쪽 주머니에서 석현이 적어준 전화번호가 적힌 쪽지와 함께 네모 반듯하게 접힌 인쇄용지, 그리고 오른쪽 주머니에서는 작은 약 봉지가 나왔다. ‘어? 이 약봉지는...’겉면에 쓰인 날짜를 보니 마지막으로 함께 병원에 갔던 날 석현이 건네받았던 그 약봉지인 모양이다.“이건, 그...정호씨 약 아니에요.”분명 석현은 정호의 약이 아니라고 했었다. 굳이 꼬치꼬치 캐묻진 않았지만 정호는 자연스레 석현의 약이겠거니 했다. 하지만 이렇게 잘 보니 약봉지에는 흘려 쓴 글씨로,J.H SO제 이름이 확실하게 쓰여 있었다. ‘뭐지...?’ 정호는 서둘러 내용물을 확인했다. 봉투를 뒤집으니 손바닥에 툭, 떨어지는 투명한 약 껍질 안에 나란히 늘어선 익숙한 황갈색의 동그란 알약이 보였다. 여덟 알 짜리였고 그 중 한 알이 비어 있었다.“한 알, 한 알이면 돼요? 응? 정호씨!내 말 들려? 정호씨! 한 알이면 되는 거야?” 제가 발작을 일으켰던 순간의 석현의 다급한 목소리를 떠올렸다. 정호는 몹시 혼란스러웠다. ‘그래, 석현씨도 공황장애가 있다고 했지...그런데 왜 내 이름으로 약을 받은 거지? 애초에 이 약을 나한테 왜 준 거야, 자기는 어쩌려구. 한국에 가는 동안 내가 발작이라도 일으킬까 걱정이 돼서 그런 건가?’참 알다가도 모를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조금 아연한 심정으로 석현이 편지라고 했던 아무렇게나 접힌 종이를 부스럭 부스럭 펼쳤다.편지는 그 흔한 누구누구에게, 혹은 이름을 부르는 말도 없이 갑자기 시작되었다. 급하게 휘갈겨 쓴 듯한 글씨가 빼곡히 종이를 채우고 있었다.먼저 이런 식으로 중요한 이야기를 전하는 나를 용서해줘요. 사실 아직도 이게 중요한 이야기인지 별것 아닌 이야기인지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얼굴을 마주 보고 말할 자신이 없어서 내내 말을 못 한 걸 보면 아주 중요한 이야기인 것 같기도 하네요. 이 이야기를 들은 정호 씨 얼굴을 볼 자신이 없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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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37

제37화정호는 얻어맞은 듯 멍한 머리로 창밖을 보았다. 비행기에서 늘 보이는 익숙한 구름 가득한 하늘이 펼쳐져 있었다. 눈 덮인 평원과도 같은 풍경이었다. 석현과 함께 지냈던 이국의 풍경이 떠올라 가슴이 답답해졌다. 정호는 한숨을 내쉬며 제 손에 든 종이를 하릴없이 바라보았다. 끝났다고 생각한 편지의 뒷장에 이어지는 문장이 얼핏 보였다. 시트에 기대어 있던 몸을 일으켜 앉아 뒷장을 확인했다.정호 씨, 좋아해요.정말, 좋아해요.꾹 눌러 쓴 글씨였다. ‘좋아해요’, 석현에게 듣고 싶었던 말이었다. 노래하는 듯한 그 목소리로 직접. 정호는 가슴이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았다. 이런 식으로 전해 듣고 싶은 건 아니었다. 속에서 뭔가가 끓어오르는 것 같았다. 이상하게도 자꾸만 눈물이 나려고 해 입술을 연신 깨물었다.수많은 석현의 표정들이 떠올랐다. 저를 지긋이 보던 짙은 갈색의 눈동자, 해사한 웃는 얼굴, 제가 발작을 일으켰던 날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로 자기 탓을 하던 모습, 저를 꼭 껴안고 놓지 않던 저녁. 정호는 그것들이 모두 거짓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만약 석현 씨가 거짓말을 하지 않았더라면, 처음 만난 날 대뜸 ‘소정호 씨, 팬입니다’라고 했더라면, 나는 과연 마음 편하게 석현 씨 집에서 지낼 수 있었을까. 편하게 지내기는커녕 안심하고 내 정보를 건네주고 회사에 연락이나 할 수 있었을까.’거기까지 생각하자 정호는 문득 어느 정도는 납득이 되는 것 같았다. 적어도 제가 아는 석현이라면, 분명 저를 위해 거짓말을 하기 시작했을 것이라고. 거짓말을 하면서 가장 괴로운 건 아마도 석현이었을 것이라고. 눈가가 빨개지도록 울던 석현이 떠올라 정호는 얻어맞은 것처럼 가슴이 아팠다.그런데 정호 씨, 나는요, 우리가 언제 다시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드문드문 연락을 주고받다가 아무렇지 않게 멀어져 그저 알던 사람 중의 한 명이 되고 싶지는 않아요. 부디 내 욕심을 이해해주길. 이게 내가 나를 지키는 방법이에요. 끝까지 비겁해서 미안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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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38

제38화정호는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쏟아지는 플래시 세례를 받으며 돌아왔다는 것을 사무치게 실감했다.“많은 분들께 걱정을 끼쳐드려 죄송하구요, 앞으로 더 건강하게, 많은 작품에서 찾아뵐 수 있게 노력하는 소정호가 되겠습니다. 감사합니다.”소속사에서는 정호가 조난당한 것조차도 화제성이 있다고 생각했는지 적극적으로 뉴스를 흘린 모양이었다. 이런 식으로 활동을 재개하게 되다니. 최악이다. 오랜만에 서는 카메라 앞에서 정호는 담담한 목소리로 사과와 감사의 마음을 준비된 대사처럼 읊고 고개를 숙였다.서둘러 밴으로 이동한 정호는 오랜만에 만난 매니저에게 인사도 건네지 않고 황급히 물었다.“형, 내 핸드폰 가지고 왔어요?”하지만 매니저가 건네준 핸드폰은 정호가 쓰던 것이 아니라 보호필름도 떼어내지 않은 새것이었다. 정호의 물건들이 한국까지 옮겨지는 와중에 어디에선가 핸드폰이 없어지는 바람에 유출 위험성이 있어 번호도 바꾸고 새로 만들었다고 했다. 정호는 머릿속이 새하얘지는 것 같았다. ‘그럼 석현 씨가 나한테 전화를 못 할 텐데? 걸어도 없는 번호라고 나올 텐데?’공항으로 향하는 길에 몇 번이나 길가에 차를 세우며 울던 석현의 얼굴이 떠올라 마음이 불안해졌다.제가 얼른 전화를 걸어야겠다고 생각은 했지만 이제 막 복귀한 배우 소정호의 스케줄은 한가하게 전화를 걸고 있을 만큼 그렇게 녹록지 않았다. 옷을 갈아입을 시간도 없이 촬영하던 영화팀과의 미팅이 있었고, 새로 촬영에 들어갈 다음 작품을 오늘까지는 결정해야 한다며 예닐곱 개의 시나리오를 건네받았다. ‘이봐요, 나 죽다가 살아 돌아온 사람이라고요. 거의 이틀을 꼬박 비행기 타고 온 사람이라고.’살인적인 스케줄로 움직이는 데에는 익숙할 대로 익숙해진 정호였지만 워낙 오랜만이기도 하고, 2주일 동안 석현의 다정함에 기대어 지내고 와서 그런지 몰려오는 일들이 유독 팍팍하게 느껴졌다.서너 개의 미팅이 끝나고 늦은 밤 회사 휴게실에서 겨우 혼자가 된 정호는 마음을 다잡고 석현이 적어준 전화번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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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39

제39화“저 찾으셨어요?”노크 소리와 함께 선재가 들어왔다. 다행히 이 시간까지 회사에 남아있었던 모양이다.“선재 씨 스웨덴어 할 줄 알죠?”“네? 스웨덴어요? 아뇨. 전 영어랑 중국어만.”“그럼 누구 스웨덴어 할 줄 아는 사람 없어요?”“스웨덴어요……? 없을 것 같은데.”선재는 당황한 듯했지만, 곧 정호에게 받은 번호로 전화를 걸어보더니,“이거 별거 아니고, 그냥 없는 번호라는 안내 메시지 같은데요?”가볍게 대답하는 목소리가 야속했다. 선재가 나가자마자 정호는 바닥에 주저앉았다.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한참을 그대로 있던 정호는 벌떡 일어나 제 가방을 뒤졌다. 석현이 준 편지의 마지막 부분을 천천히 다시 읽었다.우리가 언제 다시 만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드문드문 연락을 주고받다가 아무렇지 않게 멀어져 그저 알던 사람 중의 한 명이 되고 싶지는 않아요. 부디 내 욕심을 이해해주길. 이게 내가 나를 지키는 방법이에요. 끝까지 비겁해서 미안해요.정호는 머릿속이 하얘지는 것 같았다. 결코 짧지 않은 편지는 담백한 사랑 고백임과 동시에 담담하게 안녕을 고하고 있었다.그러니까, 이 바닥에서 일을 못하게 만들겠다,이런 말씀이신 거네요.못 하게 되기 전에,안 하겠습니다, 일.저도 이런 썩어빠지고 좁아터진 한국 통역판,더이상 못 참겠습니다.한국을 떠나오기 전, 악에 받쳐 낮은 목소리로 뱉었던 그 말을, 다시 내뱉는 꿈을 꾸었다. 몇 번이고 반복된다, 이 장면은. 제가 한국을, 버리고 떠나기로 마음을 먹었던 순간.난방을 켜지 않은 거실의 공기가 싸늘했다. 석현은 어깨를 움츠리고 몸을 떨며 부스스 담요를 둘렀다. 힘없는 손으로 담배에 불을 붙였다. 해가 뜨지 않아 어둡고 고요한 겨울 아침, 담배 끝이 타들어 가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석현은 허망한 얼굴로 흰 연기를 내뱉었다.‘겨울, 그래. 다시 겨울이구나.’석현은 이 계절이 오는 게 죽을 만큼 두려웠다.일 년 정도 지나면 괜찮을 줄 알았다.석현은 그 언젠가 '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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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40

제40화석현은 그저 소정호의 연기가 좋았다. 대학을 졸업하고 제대로 통번역계에 발을 내딛자 휘몰아치듯 바쁜 생활이 계속되었다. 휩쓸리듯 하루하루를 보내느라 이렇다 할만한 번듯한 취미도 없었지만 소정호가 나오는 영화만은 나중에라도 찾아서 꼬박꼬박 보았다. 매번 훌륭하게 다른 사람으로 변해 눈빛을, 표정을, 말투와 목소리를 바꾸는 소정호를 지켜보는 것은 쉴 틈 없이 달려야 하는 나날들 사이에서 어딘가 위로가 되었다.‘그래,’‘이런 깡시골까지 와서도 어떻게든 찾아서 봤었지.’석현은 쓴웃음을 지으며 담배를 고쳐 물었다.석현이 마지막으로 한국어로 번역한 책, 어느 날 잠에서 깨어보니 정호가 읽고 있었던 그 책은, 정호가 출연했던 영화의 원작 소설이었다. 소설 번역은 일반 문서 번역보다 훨씬 시간과 노력을 요하는 작업이라 의뢰를 거절하려고 했지만 제목을 보고 승낙해버렸다. ‘그래, 그때도 생각했었지. 내가 지금 뭐하는 거냐고.’‘내가 지금 대체 뭐하는 거지.’정호의 보호자 역할을 위임하기 위해서는 신원확인이 필요하다는 말에 꽁꽁 감춰왔던 제 정보를 수화기 너머의 보이지 않는 상대에게 술술 뱉으며 몇 번이나 생각했었다.‘전석현 너 지금 대체 뭐하고 있는 거야.’일 주일을 내리 잠만 자던 소정호가 겨우 깨어나 다른 별에 떨어지기라도 한 듯 불안한 표정을 짓는 게 그렇게 신경이 쓰였나.“그, 사실 저는 그, 소정호...라고 하는데요.”알아요, 알아. 알고 있다고. 소정호를 모르는 사람이 어딨어. 왜 이렇게 허술한 거짓말을 믿는 거야 당신은. 왜 그렇게 순식간에 경계를 풀고 아이 같은 얼굴을 하는 거야.역시 그 때 말했더라면 좋았을까. 장난이에요, 소정호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하면서 가볍게. 그다음 날이라도. 아니면 그다음 다음 날이라도.장난이었다고. 아무렇지 않게. 정호 씨가 너무 겁먹은 얼굴이라 어떻게든 안심시키고 싶었다고. 그렇게 말했더라면 차라리 좋았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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