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딩 크레딧에서 당신의 이름을 찾아

엔딩 크레딧에서 당신의 이름을 찾아

에:   김흰  완성
언어: Kor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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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 구석의 작은 시골 마을 병원에서 정신을 차린 국민 배우 소정호. 한국어는 물론이고 영어가 통하는 사람조차 없어 난감한 상황에 정호의 앞에 한 청년이 나타났다. 여기 말도 영어도 한국어도 할 수 있는 그는 대체 어떤 사람이길래 이 깡 시골에서 지내고 있는 건지. 제 이름 석 자를 말해도 전혀 모르는 눈치인 청년. 정말 오랜만에 ‘배우 소정호’가 아닌 ‘인간 소정호’로서 지내게 된 나날들 속에 정호는 점점 그가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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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1

제1화눈을 뜨니 낯선 천장이 보였다. 깜짝 놀라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키려고 하니 누군가가 지긋이 어깨를 누르며 막는다.퍼뜩 고개를 돌려보니 의사 가운을 입은 할아버지가 뭔가 말을 걸어온다. 하지만 정호는 전혀 알아들을 수 없었다. 들어본 적도 없는 언어였다. 정호는 상황이 이해가 잘 되지 않아 영어로 천천히 질문을 던졌다. 당신은 누구인지, 여기는 어디인지. 백발이 성성한 노의사는 다시 알아들을 수 없는 외국어로 무언가 말을 하며 약을 내밀었다. 하지만 무슨 약인지도 모르는데 선뜻 약을 받아먹을 수는 없었다. 영어도 전혀 통하지 않았고 그가 하는 말을 알아들을 수도 없어 한 시간 정도 실랑이를 벌였다. 노의사는 강경하게 버티는 정호를 보며 한숨을 내쉬곤 어딘가에 전화를 걸었다. 아니, 약을 먹으라는 건 알겠는데 그게 무슨 약인지 내가 왜 여기 있는지를 알아야 약을 먹지. 이 답답한 양반아. 약을 먹이기를 포기한 듯 노의사는 고개를 내저으며 혼잣말로 뭔가 중얼거렸다. 대체 뭐라고 하는 거지. 누구 영어 할 줄 아는 사람 없나.정호는 한숨을 쉬며 가만히 제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마지막 기억은 눈 덮인 숲에서였다. 복귀작이 될 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찍기 위해 며칠에 걸쳐 몇 번이나 비행기를 갈아타고, 그리고 나서도 기차를 타고 다시 차를 타고 이름도 제대로 발음할 수 없는 이 북유럽 끄트머리의 산 속까지 이동해왔다. 이동하는 동안 잠들었다 일어나면 또 다시 기차나 비행기나 자동차에 태워지고, 잠이 들었다가 깨면 또 다시 무언가를 타고, 다시 그 안에서 잠들고를 반복하며 정말 짐짝처럼 운반되어왔다. ‘이런 식으로 화물의 기분을 공감하게 되는 것도 앞으로의 연기 생활에 도움이 되려나?’정호는 사뭇 배우다운 생각을 했다. 이곳에 도착하기까지 며칠이 걸렸는지도 정확히 모르겠다. 사흘? 나흘? 아니 더 걸렸던가.촬영을 위해 대기하던 정호는 차에서 내렸다. 한창 촬영 중인 건너편을 잠깐 바라보고는 아직 제 차례가 오려면 여유가 있을 것 같아 반대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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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 챕터
Chapter1
제1화눈을 뜨니 낯선 천장이 보였다. 깜짝 놀라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키려고 하니 누군가가 지긋이 어깨를 누르며 막는다.퍼뜩 고개를 돌려보니 의사 가운을 입은 할아버지가 뭔가 말을 걸어온다. 하지만 정호는 전혀 알아들을 수 없었다. 들어본 적도 없는 언어였다. 정호는 상황이 이해가 잘 되지 않아 영어로 천천히 질문을 던졌다. 당신은 누구인지, 여기는 어디인지. 백발이 성성한 노의사는 다시 알아들을 수 없는 외국어로 무언가 말을 하며 약을 내밀었다. 하지만 무슨 약인지도 모르는데 선뜻 약을 받아먹을 수는 없었다. 영어도 전혀 통하지 않았고 그가 하는 말을 알아들을 수도 없어 한 시간 정도 실랑이를 벌였다. 노의사는 강경하게 버티는 정호를 보며 한숨을 내쉬곤 어딘가에 전화를 걸었다. 아니, 약을 먹으라는 건 알겠는데 그게 무슨 약인지 내가 왜 여기 있는지를 알아야 약을 먹지. 이 답답한 양반아. 약을 먹이기를 포기한 듯 노의사는 고개를 내저으며 혼잣말로 뭔가 중얼거렸다. 대체 뭐라고 하는 거지. 누구 영어 할 줄 아는 사람 없나.정호는 한숨을 쉬며 가만히 제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마지막 기억은 눈 덮인 숲에서였다. 복귀작이 될 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찍기 위해 며칠에 걸쳐 몇 번이나 비행기를 갈아타고, 그리고 나서도 기차를 타고 다시 차를 타고 이름도 제대로 발음할 수 없는 이 북유럽 끄트머리의 산 속까지 이동해왔다. 이동하는 동안 잠들었다 일어나면 또 다시 기차나 비행기나 자동차에 태워지고, 잠이 들었다가 깨면 또 다시 무언가를 타고, 다시 그 안에서 잠들고를 반복하며 정말 짐짝처럼 운반되어왔다. ‘이런 식으로 화물의 기분을 공감하게 되는 것도 앞으로의 연기 생활에 도움이 되려나?’정호는 사뭇 배우다운 생각을 했다. 이곳에 도착하기까지 며칠이 걸렸는지도 정확히 모르겠다. 사흘? 나흘? 아니 더 걸렸던가.촬영을 위해 대기하던 정호는 차에서 내렸다. 한창 촬영 중인 건너편을 잠깐 바라보고는 아직 제 차례가 오려면 여유가 있을 것 같아 반대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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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2
제2화인적 없는 숲을 걸으며 정호는 생각했다.제가 이렇게 자유롭게 혼자서 걸었던 적이 있었던가. 영화가 좋아 배우가 되긴 했지만 이렇게까지 유명해질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인기라는 것은 노력해서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원하지 않는다 해서 오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아역으로 연기를 시작한 어렸을 때부터 영화가, 그리고 연기가 좋았다. 제 세계의 전부였다. 잠시 다른 사람이 되어보는 것, 잠깐이나마 다른 삶을 살아본다는 것은 매력적인 작업이었다. 신들린 듯 연기하는 아역배우, 소정호는 작품을 찍으면 찍을수록 천천히 유명해졌다. 딱히 상업성 영화에 자주 나오는 것도 아니고 별달리 방송 출연이 잦은 것도 아닌데도 저를 아는 사람들은 멋대로 늘어났다. 해외 영화제에서 몇 번인가 수상을 하고 나서부터는 어느 나라에 가도 정호가 가는 곳에는 인파가 몰렸다. 더이상 아역 배우가 아닌, 아역 출신 배우가 되었을 때는 이미 배우 소정호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적어도 국내에는 거의 없을 정도가 되었다. 처음 만나는 사람들이 늘 자신을 알고 있는 상황, 어떻게 해도 그것이 익숙해지지가 않았다. 정호는 점점 사람들이 무서워졌다.급기야 무대 인사 중 발작을 일으켜 공황장애 진단을 받았다. 활동을 중단하고 치료를 받으며 일 년 정도 쉬었다. 쉬는 것도 괴로웠다. 밖에 나갈 수가 없으니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사람들은 저에 대한 관심을 버리지 않았다. 뭐든지 알려고 했다. 저를 포기하지 않는 소속사의 닥달을 견디지 못하고 복귀작을 촬영하러 여기까지 왔지만, 과연 다시 그 세계로 돌아갈 수 있을까. 아직 자신이 없었다.정호는 맑고 찬 공기를 들이쉬며 고개를 좌우로 흔들고는 두 손으로 제 볼을 가볍게 두드렸다. ‘소정호, 정신 차리자. 잘 하자.’ 다짐하는 순간, 눈앞으로 나풀거리는 눈송이가 떨어졌다. 하늘을 올려다보자 일순 눈발이 굵어지며 스노우볼에 들어온 듯한 풍경이 펼쳐졌다. 정호는 넋을 잃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꿈이라도 꾸고 있는 것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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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3
제3화그게 정호의 마지막 기억이었다.그리고 지금 여기.어째서인지 거의 가정집처럼 보이는 작은 병원의 침대에 누워있는 것이다. 말이 통하는 사람 하나 없는 여기에. 우주의 미아라도 된 듯 끝도 없는 두려움이 몰려왔지만, 발작으로 이어지기에는 몸이 무겁고 노곤했다. 긴장을 할 만한 에너지도 남아있지 않은 상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안함을 느끼자 금세 손바닥에 식은땀이 차올라 눅눅해졌다. 그 때, 문이 열리며 한 청년이 들어왔다. 마스크를 쓰고 있어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다. 회색빛 머리칼 위로 쌓인 눈을 선이 고운 하얀 손으로 툭툭 털어냈다. 이 쪽을 본 그의 눈빛이 잠깐 흔들린 듯해 정호는 순간적으로 목 뒤에 바짝 힘이 들어갔다.‘나를…… 아는 건가?’긴장한 것이 무색하게도 곧 시선을 돌려 의사를 향해 그가 내뱉은 문장들은 이곳에 온 이후 줄곧 들어온 알 수 없는 외국어였다. 할아버지와 몇 마디를 주고받은 후 그가 성큼성큼 정호쪽으로 다가왔다.“Hey, Do you speak English?”침대 옆에 앉아 눈을 맞춘 그가 말한 첫 마디였다. 한 줄기 빛처럼 드디어 알아들을 수 있는 문장을 만난 기쁨에 잘 나오지도 않는 목소리를 쥐어짜 몇 번이고 “예쓰! 예쓰!”라고 대답했다. 표정이 없던 그가 쿡쿡 웃었다.영어권 사람이었구나. 정호가 예전에 몇 년 동안 개인 수업을 받았던 원어민 선생님과 같은 억양의 익숙한 미국식 영어였다. 정호는 떨리는 목소리로 멍한 머리를 쥐어짜며 영어로 상황 설명을 시작했다. 한국에서 왔다고 얘기한 순간, 그가 말을 자르며 끼어들었고 정호는 제 귀를 의심했다.“아, 한국 사람이에요?”너무나도 한국 사람의 한국어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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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4
제4화“헙! 한국어 할 줄 아세요?!! 한국 분이세요?!!”정호는 흥분해 연거푸 질문을 던졌다. 천천히 마스크를 벗은 그는 왜인지 웃음을 참는 듯 입에 꾹 힘을 줬다가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결국 푸스스 새어나오는 웃음과 함께 대답했다.“네네, 저 한국 사람이에요. 한국말도 할 줄 알구요.”잿빛 머리칼과 창백한 피부 때문인지 국적을 가늠하기 어려운 묘한 분위기가 있었지만 그래도 마스크를 벗은 얼굴을 보니 한국 사람처럼도 보였다.“그쪽, 거의 일주일 동안 안 깨어난 거 알아요?”담담한 말투와는 달리 기쁨과 걱정이 섞인 듯한 복잡한 눈빛이었다. 좋은 사람…… 인 것 같다고 정호는 생각했다.남자는 이름이 석현이라고 했다. 어째서인지 성은 가르쳐주지 않았다. 처음에는 여기선 다들 SH라고 부르니 그렇게 부르라고 하길래 무심코 한국 이름을 물어봤더니 이름을 가르쳐주기 전에 약간 주저하는 것처럼 보였다. 자기 이름을 싫어하는 걸까 아니면 뭔가 감추는 게 있는 건가. 좋은 이름인데, 석현. 석현은 좋은 사람처럼 보였지만 아무래도 정호는 아직 경계를 완전히 풀 수 없었다. 이 사람이 저를 아직 못 알아봤다고는 해도 과연 소정호라는 이름 석 자를 듣고도 모르려나. 정호는 짐짓 석현을 흉내 내어 제 성을 뺀 이름만을 말했다.“저는 정호라고 합니다.”하지만 그런 은밀한 노력이 무색하게도 지금 한국에 연락을 하기 위해서는 제가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인지, 여기에 어떻게 왜 왔는지, 소속사에 얼른 연락을 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 설명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정호는 곧 깨달았다.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 작게 숨을 들이쉬며 각오를 다졌다.“그, 사실 저는 그, 소정호…… 라고 하는데요.”다른 곳을 보던 석현의 눈동자가 똑바로 정호를 응시했다. ‘역시, 나를, 아는 건가……?’ 석현의 짙은 갈색 눈동자는 지긋이 정호의 눈을 향한 채 움직이지 않았다. 순간이었지만 숨이 막힐 것만 같았다. 방금 그 눈은 뭐였지 싶을 만큼 곧 눈을 깜박거리며 아무렇지 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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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5
제5화정호는 한국에 연락하는 데에 필요한 모든 정보를 석현에게 넘겨주었다. 석현은 노의사 옆에 나란히 서서 약에 대한 설명과 현재 정호의 몸 상태에 대한 설명을 통역해주었다. 아무리 모르는 언어라도 유창함은 느껴지는 법이라 노의사와 이야기를 나눌 때의 석현은 마치 여기서 태어나 자란 사람처럼 보였다. 정호는 약을 먹고 다시 까무룩 잠이 들었다.***“……지금 사람이 죽다 살아났는데 무슨 소릴 하고 있는 겁니까. “여전히 몸이 무거웠다. 문밖으로 한국어가 들려왔다. 석현의 목소리다. 고개를 돌려보니 열린 문틈 너머로 전화를 하고 있는 석현의 뒷모습이 보였다. 자다 일어난 탓인지 눈이 뻑뻑했다.“애초에 이런 상황이 된 것 자체도 아티스트 케어를 제대로 못 한 회사 측 과실 아닙니까.”짧게 한숨을 내뱉은 석현은 한층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하아, 나 참. 현재 상태로는 그런 식으로 혼자서는 한국까지 갈 수 없으니까 그렇게 아세요. 여기서 한국까지 얼마나 걸리는지 모르시는 겁니까.”정호는 아직 뻑뻑한 눈을 연신 비비며 석현의 목소리를 들었다. 문득 화난 장면을 연기할 때를 떠올렸다. 보통 대사보다 말을 약간 빠르게, 그리고 목소리를 한 톤 올려서 대사를 친다. 지금 저 사람처럼.화가 났구나. 근데 왜 화가 났지? 우리 회사가 나한테 이런 대우를 해서? 아니면 원래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성격인 건가. 그것도 아니면…….나를, 걱정해준 건가.왠지 가슴 한켠이 욱신거렸다. 왜 이러지. 이런 상황이라 감상적이 됐나.핸드폰을 들지 않은 반대쪽 손으로 거칠게 머리칼을 헝클며 이쪽으로 돌아선 석현과 눈이 마주쳤다. “네, 네, 그런 건 저도 알고 있습니다.” 차가운 목소리로 대답하던 석현의 눈이 일순 커지더니 입 모양으로 작게 “미안해요”라고 하며 조용히 문을 닫았다.잠시 후 통화를 끝낸 듯한 석현이 문을 빼꼼 열었다.“미안해요. 시끄러워서 깼구나.”“아니에요. 그, 우리 회사랑 전화……하신 거예요?”석현은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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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6
제6화석현의 설명을 듣는 동안 정호는 불안감으로 가슴이 죄어오는 것을 느꼈다.그래서 여기에 머무는 동안 석현이 정호를 도와주기로 회사와 이야기가 됐다는 말을 들었을 때 곧 안도감에 작게 숨을 내쉬었다.“나 무료로 봉사하는 거 아니에요. 정호씨네 회사에서 보수도 받고, 정호씨가 여기에서 쓸 비용도 다 받으면서 하는 거예요.”도움을 주는 사람은 석현인데 어째서인지 석현이 정호를 설득하는 모양새로 말을 이어나갔다.“그러니까 너무 부담스럽게 생각하지 말고 그냥 매니저라고 생각하면서 편하게 지내요. 2주일 정도 금방이니까.”정호는 석현에게 면목이 없기도 하거니와 잘 모르는 사람에게 이렇게까지 도움을 받는다는 것이 아무래도 마음이 불편해 거절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하지만 석현이 없으면 정호는 여기에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이래도 되나 하는 미안한 마음과 처음 보는 사람한테 어떻게 이렇게 잘해줄 수가 있나 하는 고마운 마음이 뒤섞여 무슨 말을 하면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여기에는 정호씨랑 말이 통하는 사람이 없으니까 우선 정호씨가 우리 집에서 지내는 걸로 회사랑 얘기는 했는데, “혼란스런 표정으로 줄곧 대답이 없는 정호를 보며 쉴 새 없이 이야기를 늘어놓던 석현이 시선을 옮겨 창문 쪽을 보며 말을 이었다.“혹시 정호씨가 불편하면, 내가 며칠에 한 번씩 들를 테니까, 여기에 있어도 되구요. “정호는 가라앉아 잘 나오지 않는 목소리로 천천히 말을 시작했다.“저 아직, 큼큼,”왜인지 창문 쪽으로 시선을 돌렸던 석현이 눈을 꾹 감았다. 피곤한걸까.“움직이기, 큼, 흠! 좀 힘든데,”창문 쪽으로 얼굴을 돌린 채 눈을 감은 석현은 미동이 없었다.“오늘부터, 크흠, 가도, 흠, 되는 거예요?”석현이 고개를 돌려 정호를 보았다. 정호는 문득 연기를 시작할 때 배웠던 감정의 구별에 대해 생각했다. 하지만 석현의 짙은 갈색 눈동자에 담긴 감정들은 너무 복잡해서 선뜻 구별이 가지 않았다. 적어도 악의는 아니다. 나쁜 사람은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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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7
제7화지금이 몇 시지? 또 얼마나 잔 거지……?정호는 몸을 일으켜 침대 옆 의자에 걸쳐진 담요를 몸에 둘렀다. 한국집과는 달리 나무 바닥이 차가워 석현이 침대 옆에 놓아준 슬리퍼를 신어야 했다. 석현의 집은 혼자 산다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큰 집이었다. 영화에나 나올 것 같은, 오래되었지만 낡지는 않은 집.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그런 집이었다. 정호는 마치 촬영을 위해 세트장에 온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정호를 위해 석현이 평소보다 온풍기를 세게 틀었다고 했던 것 같은데, 천장이 높아서인지 여기가 워낙 추운 곳이라서 그런 건지 정호에겐 여전히 춥기만 했다.담요를 두른 채 느릿느릿 거실로 나갔다. 숨을 들이마실 때마다 구워진 빵과 데운 수프에서 나는 노릇하고 고소한 냄새가 났다. 냄새를 맡으니 곧 배가 고파왔다.“일어났어요? 거기 앉아서 조금만 기다려요. 다 됐어요.”발소리에 정호를 돌아본 석현이 소파를 가리키며 말했다. 창문 너머로 비치는 아침 햇살에 석현의 잿빛 머리칼이 비현실적으로 빛났다. 토스트기가 ‘띵-’하고 경쾌한 소리를 내며 빵이 다 구워졌음을 알리고, 찹찹찹찹, 석현이 리드미컬하게 수프를 젓는 소리가 들려왔다.살아가면서 누구나 경험할 만한 흔하디흔한 아침 풍경이었다. 정호에게는 아주 어린 시절을 제외하면 주어지지 않았던, 보통 사람의 보통의 휴일 아침 풍경. 그래, 이런 게 사람들의 삶이구나.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숨을 참고 있었던 사람처럼 정호는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가 내쉬었다. 가슴이 벅차오르는 느낌이 들었다. 정호는 행복이라는 단어를 떠올렸다. 우습게도 조금 행복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이 낯선 사람의 집에서.멍하게 서서 어깨가 오르락내리락 할 정도로 크게 숨을 고르고 있는 정호를 보고 석현이 서둘러 다가왔지만, 행복에 대한 고찰에 빠져버린 탓에 정호는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이마를 짚어오는 손에 움찔 놀라며 앞을 보니 석현의 눈동자가 보였다. 짙은 갈색의 깊은 눈.“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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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8
제8화“열은 없는데…… 정호 씨, 내 말 들려요?”가까이 다가온 석현은 걱정스런 표정으로 정호를 살폈다. 짙은 갈색 눈동자가 정호의 눈동자 너머의 숨겨진 무언가를 찾기라도 하듯이 뚫어지게 눈을 맞춰왔다. 기껏 한참을 고른 숨이 다시 가빠질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정호는 고개를 숙여 이마에 얹힌 석현의 손을 피하며 아무렇지 않은 듯 대답했다.“괜찮아요. 그냥 무슨 생각 좀 하느라……”눈썹을 내리고 걱정하던 석현이 일순 환하게 불이 켜지는 것처럼 웃는 얼굴이 되었다.“아이, 정말 놀랐잖아요.”말꼬리를 늘이며 놀랐잖아요오 하는 석현의 목소리가 장난스러웠다.“아니 그렇게 가만히 서서 심호흡을 하고 있으니까, 금방이라도 또 쓰러질 것처럼.”어느새 저를 스스럼없이 대하는 석현의 태도에 정호는 한결 마음이 편해짐을 느꼈다. “그런데, 석현 씨는 오늘은 쉬는 날이세요?”마주 앉아 잠자코 식사를 하던 정호가 먼저 입을 열었다. 사실은 무슨 일을 하는지 묻고 싶었다. 하지만 개인적인 정보를 묻는 것처럼 들리는 게 싫어 좀 더 보통의 질문처럼 들리도록 말을 골랐다.“아뇨, 이제 밥 먹고 나면 일 해야죠.”일 하는 게 전혀 싫지 않은 건지, 대답만 하던 정호가 먼저 말을 걸어온 것이 기뻤던 건지, 노래하는 듯 경쾌한 어조였다.“어쩌다보니 2주일 동안은 투잡을 뛰게 생겼네요. 하하하. “문득 고맙고 미안한 마음이 들어 정호도 석현을 보며 마주 웃어보였다. 그리고 석현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이제 자기가 무슨 일 하는지 말해주겠지.“정호씨 그거 다 먹어야 돼요. 병원에서 정호씨 잘 먹어야 된댔어. 천천히 천천히, 다 먹어요. 꼭.”“네? 아, 네……”지금, 일부러 말을 돌린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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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9
제9화석현 씨는 직접 물어보지 않으면 자기 얘기는 잘 안 하는 사람인 걸까. 좋은 사람인 건 맞는 것 같은데 어딘가 조금 알 수 없는 사람이라고 정호는 생각했다. 먼저 식사를 마친 석현은 커피를 한 잔 내리더니 아직 볼을 부풀린 채 빵을 씹고 있는 정호 앞에 앉았다. 훅 끼쳐오는 커피 냄새가 석현과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듯 초점 없는 눈으로 허공을 바라보는 석현은 아까의 친절한 석현과는 다른 사람이라고 해도 믿을 만큼 냉랭한 얼굴이었다. 약간 찌푸려진 미간과 날 선 눈빛. 석현에게는 여기에 있으면서 동시에 여기에 없는 것 같은 한없이 위태로운 분위기가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자신을 보는 정호와 눈이 마주치자 곧 석현의 표정이 금세 누그러졌다.“커피, 마시고 싶어요?정호 씨는 아직 커피는 안 된댔어요.혼자 마셔서 미안해요.”잠깐 머뭇거리던 석현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정호씨, 근데, 그게, 실은 제가 오늘이랑 내일이 엄청나게 바쁜 날이거든요. 그래서 제가 내일까진 좀 정신이 없을지도 몰라요.”어쩐지 미안한 듯한 말투였다. 어디에 뭐가 있고 몇 시에 뭘 먹으라는 둥 여러 가지 설명과 당부가 이어졌다. 정호는 아직 제가 묵고 있는 방과 거실 이외의 곳은 잘 알 수가 없었지만, 이쪽 방에 책이 많이 있으니 심심하면 읽으라느니, 저쪽 방에 지역 방송밖에 안 나오지만 텔레비전이 있긴 있다느니, 하는 설명을 들으며 정말 크고 복잡한 구조의 집이라는 건 어느 정도 알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약간 주저하는 듯하더니, 정호가 묵고 있는 방과 반대편으로 이어지는 복도를 가리키며,“저 끝에 있는 방에 있을 거예요, 나는.일할 때는 소리를 잘 못 들으니까, 혹시 정호 씨 몸이 힘들다거나 뭐 필요한 게 있으면 편하게 방으로 들어와서 불러요. ““집에서 일하시는 거예요?”“네, 그러니까 정호씰 집으로 데려왔죠.”석현이 웃으며 가볍게 눈을 흘겼다.“지금 정호 씨 환자인데 혼자 있으면 안 되잖아요.”내일까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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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10
“석현 씨! 석현 씨!”‘설마 이렇게 크게 부르는데 안 들리진 않겠지.’ 정호는 다년간의 연기로 다져진 발성을 백분 활용하여 배에 힘을 꾹 주고 연이어 석현의 이름을 불러보았다. 방문 너머로는 아무런 기척도 없었다. 조심스레 노크를 몇 번 해보았지만 마찬가지였다. 정호는 조금 주저하다가 석현의 작업실 방문을 조용히 열었다. 정호가 생각했던 것보다도 훨씬 더 큰 방이었다. 책이 빼곡하게 꽂힌 벽면을 보고 감탄하며 고개를 돌리자 커다란 모니터가 여러 개 나란히 놓인 책상 앞에 앉아있는 석현의 뒷모습이 보였다. ‘설마…… 진짜로 해커인 건가?’정호는 왠지 봐서는 안 되는 것을 보고 있는 기분이 들어 숨을 죽이고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갔다. 석현은 쇼팽의 즉흥환상곡이라도 연주하는 듯이 엄청난 속도로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었다. 오른쪽에 놓인 모니터의 내용을 보며 입력하고 있었지만 석현이 입력하는 내용들은 왼쪽 모니터에 출력되고 있었다. 석현이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는 오른쪽 모니터의 문장들은 알파벳의 연속으로 이루어져 있었지만 영어는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서 컴퓨터 코드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단지 정호가 모르는 어떤 외국어로 된 문장들이었다. 아차 하는 생각이 들어 정호는 왼쪽 모니터를 자세히 보았다. 석현이 미친듯이 입력하고 있는 것은 영어로 된 문장들이었다. 이상할 만큼, 정말 이상할 만큼 속도가 빠를 뿐, 석현이 하고 있는 것은 해킹이 아닌 번역 작업이었다. 정호는 헛웃음이 나왔다.석현은 정호가 바로 등 뒤까지 왔는데도 모른 채로 정말 연주라도 하듯 끊임없이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었다. 어깨 너머로 보이는 희고 긴 손가락이 유연하게 움직였다. 오른쪽 모니터로 빨려들어가기라도 할 것처럼 집중한 옆얼굴이 언뜻 보였다. 커피를 마시며 생각에 잠겼을 때와 똑같은 날이 선 눈이었다. ‘무언가에 집중을 하면 저런 얼굴을 하는구나, 석현 씨는.’잠자코 석현의 옆얼굴을 보던 정호는 작게 숨을 들이쉬고는 석현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석현의 이름을 불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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