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화“헙! 한국어 할 줄 아세요?!! 한국 분이세요?!!”정호는 흥분해 연거푸 질문을 던졌다. 천천히 마스크를 벗은 그는 왜인지 웃음을 참는 듯 입에 꾹 힘을 줬다가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결국 푸스스 새어나오는 웃음과 함께 대답했다.“네네, 저 한국 사람이에요. 한국말도 할 줄 알구요.”잿빛 머리칼과 창백한 피부 때문인지 국적을 가늠하기 어려운 묘한 분위기가 있었지만 그래도 마스크를 벗은 얼굴을 보니 한국 사람처럼도 보였다.“그쪽, 거의 일주일 동안 안 깨어난 거 알아요?”담담한 말투와는 달리 기쁨과 걱정이 섞인 듯한 복잡한 눈빛이었다. 좋은 사람…… 인 것 같다고 정호는 생각했다.남자는 이름이 석현이라고 했다. 어째서인지 성은 가르쳐주지 않았다. 처음에는 여기선 다들 SH라고 부르니 그렇게 부르라고 하길래 무심코 한국 이름을 물어봤더니 이름을 가르쳐주기 전에 약간 주저하는 것처럼 보였다. 자기 이름을 싫어하는 걸까 아니면 뭔가 감추는 게 있는 건가. 좋은 이름인데, 석현. 석현은 좋은 사람처럼 보였지만 아무래도 정호는 아직 경계를 완전히 풀 수 없었다. 이 사람이 저를 아직 못 알아봤다고는 해도 과연 소정호라는 이름 석 자를 듣고도 모르려나. 정호는 짐짓 석현을 흉내 내어 제 성을 뺀 이름만을 말했다.“저는 정호라고 합니다.”하지만 그런 은밀한 노력이 무색하게도 지금 한국에 연락을 하기 위해서는 제가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인지, 여기에 어떻게 왜 왔는지, 소속사에 얼른 연락을 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 설명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정호는 곧 깨달았다.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 작게 숨을 들이쉬며 각오를 다졌다.“그, 사실 저는 그, 소정호…… 라고 하는데요.”다른 곳을 보던 석현의 눈동자가 똑바로 정호를 응시했다. ‘역시, 나를, 아는 건가……?’ 석현의 짙은 갈색 눈동자는 지긋이 정호의 눈을 향한 채 움직이지 않았다. 순간이었지만 숨이 막힐 것만 같았다. 방금 그 눈은 뭐였지 싶을 만큼 곧 눈을 깜박거리며 아무렇지 않
제5화정호는 한국에 연락하는 데에 필요한 모든 정보를 석현에게 넘겨주었다. 석현은 노의사 옆에 나란히 서서 약에 대한 설명과 현재 정호의 몸 상태에 대한 설명을 통역해주었다. 아무리 모르는 언어라도 유창함은 느껴지는 법이라 노의사와 이야기를 나눌 때의 석현은 마치 여기서 태어나 자란 사람처럼 보였다. 정호는 약을 먹고 다시 까무룩 잠이 들었다.***“……지금 사람이 죽다 살아났는데 무슨 소릴 하고 있는 겁니까. “여전히 몸이 무거웠다. 문밖으로 한국어가 들려왔다. 석현의 목소리다. 고개를 돌려보니 열린 문틈 너머로 전화를 하고 있는 석현의 뒷모습이 보였다. 자다 일어난 탓인지 눈이 뻑뻑했다.“애초에 이런 상황이 된 것 자체도 아티스트 케어를 제대로 못 한 회사 측 과실 아닙니까.”짧게 한숨을 내뱉은 석현은 한층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하아, 나 참. 현재 상태로는 그런 식으로 혼자서는 한국까지 갈 수 없으니까 그렇게 아세요. 여기서 한국까지 얼마나 걸리는지 모르시는 겁니까.”정호는 아직 뻑뻑한 눈을 연신 비비며 석현의 목소리를 들었다. 문득 화난 장면을 연기할 때를 떠올렸다. 보통 대사보다 말을 약간 빠르게, 그리고 목소리를 한 톤 올려서 대사를 친다. 지금 저 사람처럼.화가 났구나. 근데 왜 화가 났지? 우리 회사가 나한테 이런 대우를 해서? 아니면 원래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성격인 건가. 그것도 아니면…….나를, 걱정해준 건가.왠지 가슴 한켠이 욱신거렸다. 왜 이러지. 이런 상황이라 감상적이 됐나.핸드폰을 들지 않은 반대쪽 손으로 거칠게 머리칼을 헝클며 이쪽으로 돌아선 석현과 눈이 마주쳤다. “네, 네, 그런 건 저도 알고 있습니다.” 차가운 목소리로 대답하던 석현의 눈이 일순 커지더니 입 모양으로 작게 “미안해요”라고 하며 조용히 문을 닫았다.잠시 후 통화를 끝낸 듯한 석현이 문을 빼꼼 열었다.“미안해요. 시끄러워서 깼구나.”“아니에요. 그, 우리 회사랑 전화……하신 거예요?”석현은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제6화석현의 설명을 듣는 동안 정호는 불안감으로 가슴이 죄어오는 것을 느꼈다.그래서 여기에 머무는 동안 석현이 정호를 도와주기로 회사와 이야기가 됐다는 말을 들었을 때 곧 안도감에 작게 숨을 내쉬었다.“나 무료로 봉사하는 거 아니에요. 정호씨네 회사에서 보수도 받고, 정호씨가 여기에서 쓸 비용도 다 받으면서 하는 거예요.”도움을 주는 사람은 석현인데 어째서인지 석현이 정호를 설득하는 모양새로 말을 이어나갔다.“그러니까 너무 부담스럽게 생각하지 말고 그냥 매니저라고 생각하면서 편하게 지내요. 2주일 정도 금방이니까.”정호는 석현에게 면목이 없기도 하거니와 잘 모르는 사람에게 이렇게까지 도움을 받는다는 것이 아무래도 마음이 불편해 거절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하지만 석현이 없으면 정호는 여기에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이래도 되나 하는 미안한 마음과 처음 보는 사람한테 어떻게 이렇게 잘해줄 수가 있나 하는 고마운 마음이 뒤섞여 무슨 말을 하면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여기에는 정호씨랑 말이 통하는 사람이 없으니까 우선 정호씨가 우리 집에서 지내는 걸로 회사랑 얘기는 했는데, “혼란스런 표정으로 줄곧 대답이 없는 정호를 보며 쉴 새 없이 이야기를 늘어놓던 석현이 시선을 옮겨 창문 쪽을 보며 말을 이었다.“혹시 정호씨가 불편하면, 내가 며칠에 한 번씩 들를 테니까, 여기에 있어도 되구요. “정호는 가라앉아 잘 나오지 않는 목소리로 천천히 말을 시작했다.“저 아직, 큼큼,”왜인지 창문 쪽으로 시선을 돌렸던 석현이 눈을 꾹 감았다. 피곤한걸까.“움직이기, 큼, 흠! 좀 힘든데,”창문 쪽으로 얼굴을 돌린 채 눈을 감은 석현은 미동이 없었다.“오늘부터, 크흠, 가도, 흠, 되는 거예요?”석현이 고개를 돌려 정호를 보았다. 정호는 문득 연기를 시작할 때 배웠던 감정의 구별에 대해 생각했다. 하지만 석현의 짙은 갈색 눈동자에 담긴 감정들은 너무 복잡해서 선뜻 구별이 가지 않았다. 적어도 악의는 아니다. 나쁜 사람은 아니야
제7화지금이 몇 시지? 또 얼마나 잔 거지……?정호는 몸을 일으켜 침대 옆 의자에 걸쳐진 담요를 몸에 둘렀다. 한국집과는 달리 나무 바닥이 차가워 석현이 침대 옆에 놓아준 슬리퍼를 신어야 했다. 석현의 집은 혼자 산다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큰 집이었다. 영화에나 나올 것 같은, 오래되었지만 낡지는 않은 집.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그런 집이었다. 정호는 마치 촬영을 위해 세트장에 온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정호를 위해 석현이 평소보다 온풍기를 세게 틀었다고 했던 것 같은데, 천장이 높아서인지 여기가 워낙 추운 곳이라서 그런 건지 정호에겐 여전히 춥기만 했다.담요를 두른 채 느릿느릿 거실로 나갔다. 숨을 들이마실 때마다 구워진 빵과 데운 수프에서 나는 노릇하고 고소한 냄새가 났다. 냄새를 맡으니 곧 배가 고파왔다.“일어났어요? 거기 앉아서 조금만 기다려요. 다 됐어요.”발소리에 정호를 돌아본 석현이 소파를 가리키며 말했다. 창문 너머로 비치는 아침 햇살에 석현의 잿빛 머리칼이 비현실적으로 빛났다. 토스트기가 ‘띵-’하고 경쾌한 소리를 내며 빵이 다 구워졌음을 알리고, 찹찹찹찹, 석현이 리드미컬하게 수프를 젓는 소리가 들려왔다.살아가면서 누구나 경험할 만한 흔하디흔한 아침 풍경이었다. 정호에게는 아주 어린 시절을 제외하면 주어지지 않았던, 보통 사람의 보통의 휴일 아침 풍경. 그래, 이런 게 사람들의 삶이구나.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숨을 참고 있었던 사람처럼 정호는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가 내쉬었다. 가슴이 벅차오르는 느낌이 들었다. 정호는 행복이라는 단어를 떠올렸다. 우습게도 조금 행복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이 낯선 사람의 집에서.멍하게 서서 어깨가 오르락내리락 할 정도로 크게 숨을 고르고 있는 정호를 보고 석현이 서둘러 다가왔지만, 행복에 대한 고찰에 빠져버린 탓에 정호는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이마를 짚어오는 손에 움찔 놀라며 앞을 보니 석현의 눈동자가 보였다. 짙은 갈색의 깊은 눈.“괜
제8화“열은 없는데…… 정호 씨, 내 말 들려요?”가까이 다가온 석현은 걱정스런 표정으로 정호를 살폈다. 짙은 갈색 눈동자가 정호의 눈동자 너머의 숨겨진 무언가를 찾기라도 하듯이 뚫어지게 눈을 맞춰왔다. 기껏 한참을 고른 숨이 다시 가빠질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정호는 고개를 숙여 이마에 얹힌 석현의 손을 피하며 아무렇지 않은 듯 대답했다.“괜찮아요. 그냥 무슨 생각 좀 하느라……”눈썹을 내리고 걱정하던 석현이 일순 환하게 불이 켜지는 것처럼 웃는 얼굴이 되었다.“아이, 정말 놀랐잖아요.”말꼬리를 늘이며 놀랐잖아요오 하는 석현의 목소리가 장난스러웠다.“아니 그렇게 가만히 서서 심호흡을 하고 있으니까, 금방이라도 또 쓰러질 것처럼.”어느새 저를 스스럼없이 대하는 석현의 태도에 정호는 한결 마음이 편해짐을 느꼈다. “그런데, 석현 씨는 오늘은 쉬는 날이세요?”마주 앉아 잠자코 식사를 하던 정호가 먼저 입을 열었다. 사실은 무슨 일을 하는지 묻고 싶었다. 하지만 개인적인 정보를 묻는 것처럼 들리는 게 싫어 좀 더 보통의 질문처럼 들리도록 말을 골랐다.“아뇨, 이제 밥 먹고 나면 일 해야죠.”일 하는 게 전혀 싫지 않은 건지, 대답만 하던 정호가 먼저 말을 걸어온 것이 기뻤던 건지, 노래하는 듯 경쾌한 어조였다.“어쩌다보니 2주일 동안은 투잡을 뛰게 생겼네요. 하하하. “문득 고맙고 미안한 마음이 들어 정호도 석현을 보며 마주 웃어보였다. 그리고 석현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이제 자기가 무슨 일 하는지 말해주겠지.“정호씨 그거 다 먹어야 돼요. 병원에서 정호씨 잘 먹어야 된댔어. 천천히 천천히, 다 먹어요. 꼭.”“네? 아, 네……”지금, 일부러 말을 돌린 건가…?
제9화석현 씨는 직접 물어보지 않으면 자기 얘기는 잘 안 하는 사람인 걸까. 좋은 사람인 건 맞는 것 같은데 어딘가 조금 알 수 없는 사람이라고 정호는 생각했다. 먼저 식사를 마친 석현은 커피를 한 잔 내리더니 아직 볼을 부풀린 채 빵을 씹고 있는 정호 앞에 앉았다. 훅 끼쳐오는 커피 냄새가 석현과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듯 초점 없는 눈으로 허공을 바라보는 석현은 아까의 친절한 석현과는 다른 사람이라고 해도 믿을 만큼 냉랭한 얼굴이었다. 약간 찌푸려진 미간과 날 선 눈빛. 석현에게는 여기에 있으면서 동시에 여기에 없는 것 같은 한없이 위태로운 분위기가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자신을 보는 정호와 눈이 마주치자 곧 석현의 표정이 금세 누그러졌다.“커피, 마시고 싶어요?정호 씨는 아직 커피는 안 된댔어요.혼자 마셔서 미안해요.”잠깐 머뭇거리던 석현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정호씨, 근데, 그게, 실은 제가 오늘이랑 내일이 엄청나게 바쁜 날이거든요. 그래서 제가 내일까진 좀 정신이 없을지도 몰라요.”어쩐지 미안한 듯한 말투였다. 어디에 뭐가 있고 몇 시에 뭘 먹으라는 둥 여러 가지 설명과 당부가 이어졌다. 정호는 아직 제가 묵고 있는 방과 거실 이외의 곳은 잘 알 수가 없었지만, 이쪽 방에 책이 많이 있으니 심심하면 읽으라느니, 저쪽 방에 지역 방송밖에 안 나오지만 텔레비전이 있긴 있다느니, 하는 설명을 들으며 정말 크고 복잡한 구조의 집이라는 건 어느 정도 알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약간 주저하는 듯하더니, 정호가 묵고 있는 방과 반대편으로 이어지는 복도를 가리키며,“저 끝에 있는 방에 있을 거예요, 나는.일할 때는 소리를 잘 못 들으니까, 혹시 정호 씨 몸이 힘들다거나 뭐 필요한 게 있으면 편하게 방으로 들어와서 불러요. ““집에서 일하시는 거예요?”“네, 그러니까 정호씰 집으로 데려왔죠.”석현이 웃으며 가볍게 눈을 흘겼다.“지금 정호 씨 환자인데 혼자 있으면 안 되잖아요.”내일까지는
“석현 씨! 석현 씨!”‘설마 이렇게 크게 부르는데 안 들리진 않겠지.’ 정호는 다년간의 연기로 다져진 발성을 백분 활용하여 배에 힘을 꾹 주고 연이어 석현의 이름을 불러보았다. 방문 너머로는 아무런 기척도 없었다. 조심스레 노크를 몇 번 해보았지만 마찬가지였다. 정호는 조금 주저하다가 석현의 작업실 방문을 조용히 열었다. 정호가 생각했던 것보다도 훨씬 더 큰 방이었다. 책이 빼곡하게 꽂힌 벽면을 보고 감탄하며 고개를 돌리자 커다란 모니터가 여러 개 나란히 놓인 책상 앞에 앉아있는 석현의 뒷모습이 보였다. ‘설마…… 진짜로 해커인 건가?’정호는 왠지 봐서는 안 되는 것을 보고 있는 기분이 들어 숨을 죽이고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갔다. 석현은 쇼팽의 즉흥환상곡이라도 연주하는 듯이 엄청난 속도로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었다. 오른쪽에 놓인 모니터의 내용을 보며 입력하고 있었지만 석현이 입력하는 내용들은 왼쪽 모니터에 출력되고 있었다. 석현이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는 오른쪽 모니터의 문장들은 알파벳의 연속으로 이루어져 있었지만 영어는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서 컴퓨터 코드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단지 정호가 모르는 어떤 외국어로 된 문장들이었다. 아차 하는 생각이 들어 정호는 왼쪽 모니터를 자세히 보았다. 석현이 미친듯이 입력하고 있는 것은 영어로 된 문장들이었다. 이상할 만큼, 정말 이상할 만큼 속도가 빠를 뿐, 석현이 하고 있는 것은 해킹이 아닌 번역 작업이었다. 정호는 헛웃음이 나왔다.석현은 정호가 바로 등 뒤까지 왔는데도 모른 채로 정말 연주라도 하듯 끊임없이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었다. 어깨 너머로 보이는 희고 긴 손가락이 유연하게 움직였다. 오른쪽 모니터로 빨려들어가기라도 할 것처럼 집중한 옆얼굴이 언뜻 보였다. 커피를 마시며 생각에 잠겼을 때와 똑같은 날이 선 눈이었다. ‘무언가에 집중을 하면 저런 얼굴을 하는구나, 석현 씨는.’잠자코 석현의 옆얼굴을 보던 정호는 작게 숨을 들이쉬고는 석현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석현의 이름을 불렀
제11화“어? 정호씨 표정이 왜 그래요?왜요, 뭐 필요한 거 있어요?아니면 몸이 또 안 좋아요?”석현은 아무렇지 않게 걱정어린 질문을 쏟아낸다.“그, 지금 문앞에 누가 와서 뭐라고 하는데, 저는 그, 말을 못 알아듣겠는데. 아무래도 석현 씨를 찾는 것 같아서요.”등기 우편인 모양이었다. 석현은 몇 마디 말을 주고받더니 슥슥 사인을 하고 두툼한 서류 봉투를 받았다. 테이블에 서류 봉투를 내려놓은 석현이 커피를 내리기 시작했다.“원래 이렇게 마감 촉박하게 일하는 스타일 아닌데요 나.”멋쩍은 듯 뒷머리를 만지작거리며 석현이 정호를 향해 웃어 보였다. 커피 향기 때문인지 정호는 약간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석현 씨는 번역일 하시는 거예요?다음 날 저녁이 되어서야 피곤한 얼굴로 방에서 나와 이제 제일 급한 일은 끝냈다는 석현과 테이블에 마주앉아 정호가 뱉은 첫 마디였다. 어제 점심과 저녁, 그리고 오늘 아침과 점심. 고작 네 번 혼자 식사를 해결했을 뿐인데 함께 식사를 하는 것이 아주 오랜만인 것처럼 느껴졌다.“아, 저요? 네, 번역도 하고 통역도 하고, 뭐. 할 줄 아는 게 그런 거 밖에 없어서요.”“번역이었구나…….” 정호는 작게 중얼거렸다. 킬러라든지 해커라든지 멋대로 이상한 예상을 했던 스스로가 우스웠다.“아니, 그, 저는, 석현 씨가 말씀을 안 해 주시길래, 뭔가 비밀스러운 일이라도 하시나 하고...”집중해서 빵에 잼을 바르던 석현이 손을 멈추고 고개를 들어 정호를 바라보았다.“물어봤으면 말해줬을 텐데, 궁금했어요? 내가 뭐하는 사람인지.”왠지 신이 난 사람처럼 그는 싱긋 웃는 얼굴이었다.
제82화석현은 코 먹는 소리를 내며 연신 소매로 눈물을 닦았다. 정호는 얼른 석현의 허리를 껴안고 달래듯 말했다.“아이, 석현 씨, 나 자주 죽잖아요. 뭘 또 그렇게 울고 그래요.”“아아, 나 이제 이런 건 못 보겠어요. 정호 씨 고생하는 영화는. 진짜.”울음을 멈추지 않고 숨을 몰아쉬며 석현이 말했다.“그러니깐 내가 안 본댔잖아요, 석현 씨가 보자고 해놓고, 으이그.”이 사람이 이렇게 무방비한 얼굴로 우는 모습을 보이는 건 제 앞에서 뿐이라는 걸, 이제 정호는 잘 알고 있다.스크린 안에서 어느 누군가와 만나서 다른 사람 사랑하는 모습을 아무리 진짜처럼 연기해도 소정호의 삶에 존재하는 진짜 사랑하는 사람은 오직 저뿐이라는 걸, 석현도 분명 잘 알고 있으리라.문득 가슴이 벅차올랐다.석현을 만나고부터 지금까지의 많은 날들이 떠올랐다.우리의 이야기는 해피엔딩이다.영원히 간직할 수 있는, 해피엔딩.겨우 진정한 듯한 석현이 정호의 어깨에 팔을 둘러 저를 꼬옥 마주 안아왔다.“정호 씨 나보다 먼저 죽으면 안 돼요.”내내 울어 엉망이 된 목소리로 한다는 말이.정호는 입꼬리를 꾹 누르며 웃음을 찾았다.“석현 씨,”제가 이름을 부르면 곧 으응, 하고 대답하는 다정한 목소리. 내가 좋아하는 사람의, 좋아하는 목소리.“사랑해요.”갑자기 뱉은 제 말에도,“내가 더 사랑하니까.”라고, 안은 팔에 힘을 주며 천연덕스레 대꾸해 오는 이 사람을. 사랑한다는 말로는 부족할 만큼,사랑한다.
제81화석현이 번역한 ‘푸른 시간의 기억’보다 먼저 세상에 나온 영화 ‘지나간 나날들’에서 정호가 맡았던 ‘한’이라는 이름의 주인공은 원작 소설에서는 제임스라는 이름으로, 오랫동안 소식을 알 수 없었던 어릴 적 친구와 직장에서 재회하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그저 추억으로만 남아있던 어릴 적 몰래 좋아했던 친구를 어른이 되어 현실에서 다시 만나게 되면서 제 감정에 대해 고민하는 과정에서 섬세한 표현을 요하는 장면이 많아 컷 하나하나 고민해 가며 어렵게 촬영했고 그만큼 정호를 많이 자라게 한 작품이었다.“아, 오랜만에 다시 보고 싶다. 정호 씨랑 같이.”불쑥, 그런 말을 내뱉은 석현이 개구쟁이같은 얼굴로 제게 빤히 눈을 맞춰온다.“음? 뭐요? 뭐가요?”“지나간 나날들이요.”부끄러워서 절대 안 된다고, 보고 싶으면 석현 씨 혼자 보라고, 한사코 손을 내두르며 버텼지만 결국 밥 먹는 내내 저를 조르고 설득하는 석현에게 지고 말았다. ‘하긴 이 사람을 내가 무슨 수로 이기나.’ 석현과 나란히 소파에 앉은 정호는 작게 한숨을 쉬며 오프닝 크레딧이 흘러나오는 화면을 노려보았다.정호가 연기한 한이 사랑했던 학창 시절의 현수는 부모의 학대 때문에 치마를 입고 머리를 기른 모습으로 생활하는 소년이다. 한은 현수가 여자애가 아니라는 걸 처음부터 알고 있지만 줄곧 모르는 것처럼 행동한다. 감정은 이유 없이 불시에 찾아온다. 한이 현수에게 반하는 순간의 얼굴이 클로즈업되었다.“와... 정호 씨 나한테 저런 표정 지은 적 한 번도 없는 거 같은데.”“아니 저건 연기잖아요, 연기. 연습해서 만들어낸 표정이라구요.”역시 석현과 함께 보는 게 아니었다고, 불쌍한 얼굴 좀 하고 조른다고 해서 져주는 게 아니었는데, 라고 늦은 후회를 하며 정호는 한숨을 쉬었다. 장면마다 석현의 놀림 아닌 놀림이 이어지는 데다가 몇 년도 더 전의 앳된 얼굴을 한 제가 연기하는 걸 보는 게 쑥스러워 어딘가로 숨고 싶어졌다.어느덧 영화는 클라이맥스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한과 현수
제80화커피머신이 우우웅 소리를 내며 돌아가고 쌉싸름한 커피 향이 금세 코끝으로 밀려들어왔다. 정호는 모처럼 내린 커피를 쏟을까 조심조심 걸음을 옮겨 건너편 방문을 열었다.벽면이 모두 책장인 석현의 작업실에 들어가면 늘 오래된 책과 종이와 잉크 냄새가 난다. 여러 개의 모니터를 앞에 두고 앉은 석현이 두들기는 키보드 소리가 타닥타닥 하고 경쾌하게 들려온다. 여전히 정호가 들어온 줄도 모르고 집중한 뒷모습. 코 앞에 커피를 내려놓자 그제야 손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저를 본다.“아니 소정호 씨가 이런 특별 서비스를 다 해주시고.”석현이 웃는다. 꽃이 피는 것 같은 웃음이다. 몇 번을 봐도 익숙해지지가 않고, 매번 어김없이 가슴이 뛰고 그저 좋기만 한 이 사람의 웃는 얼굴.“쉬엄쉬엄 해요. 마감 아직 여유 있잖아요.”“응 그래서 알레그로 아니고 모데라토 정도로 작업하고 있는데요.”번역 작업할 때 옆에서 보면 피아노를 연주하는 것 같다고 제가 지나가듯 말했던 걸 잘도 기억하고 이런 농담을 해온다.“뭐예요 그게, 그럼 마감 임박하면 알레그로로 하는 거예요?”“마감 전엔 프레스토!”“프레스토? 그게 젤 빠른 건가?”“아마도요.”“석현 씬 대체 모르는 게 뭐예요?”앉은자리에서 부스스 일어나 어깨를 꼭 끌어안더니,“정호 씨가 왜 이렇게 좋은지,그걸 모르겠어요. 정말.”장난스럽게 대꾸하고 금방 얼굴을 부벼온다. 좋은 냄새가 난다. 석현 씨 냄새.다음 달이면 같이 산 지도 일 년이 된다. 시간은 언제나 그렇듯 우리를 기다려주지 않고 무심하게 꾸준히 흘러간다. 절대로 멈추는 법이 없다.“어, 지나간 나날들, 대본 이제 온 거예요?”아니 당장 모레부터 연습이라면서요, 그걸 오늘이 돼서야 보내나, 거참 되게 일 못하네, 한 번 읽었던 대본을 다시 훑어보는 중인 정호의 옆에 앉아서 석현이 못마땅한 듯 중얼거렸다. '지나간 나날들'은 한국에서 영화화가 되고 난 후에야 원작이 주목을 받는 바람에 한국어판 소설은 영화보다 나중에 나왔다. 그 소설의
제79화정호에게 오점이 될까 두렵다는 석현의 말을 듣던 정호는 석현의 품에 안긴 채로,“오점이라니요. 석현 씨가 왜 오점이 돼요 나한테.그 말 취소해요.”괜히 장난처럼 시비를 걸었다.“알았어요. 취소.”석현이 웃음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아 뭔가 좀 더 투정을 부리고 싶은데.’정호는 왠지 무언가 덜 풀린 기분이 들었다.“석현씬 맨날 자기 마음도 말 잘 안 해주고.”“아니 그걸 꼭 말로 해야 알아요?”“말을 안 하면 어떻게 알아요? 내가 좋아한다고 말하기 전에 내가 좋아하는 거 알았어요?”“아니, 그때랑 지금이랑은...”말문이 막힌 듯 석현이 흐읍, 숨을 고쳐 쉬었다.갑자기 안았던 팔을 풀어낸 석현이 정호의 어깨를 붙잡아 저를 보게 했다. 정호는 왠지 부끄러워져 눈을 맞출 수가 없었다. 아까 다툰 것의 여파인지 속얘기를 다 털어놓아서인지 석현을 바로 쳐다보기가 열쩍었다.“정호 씨, 나 좀 봐요.”뭘 또 굳이 자기를 보래. 가슴 떨리게 왜 이래 이 사람.“사랑해요.”갑작스러운 고백에 놀라 정호는 석현을 보았다. 흔들림 없이 저를 향한 짙은 갈색 눈동자.“나 정호 씨 사랑한다구요.”정호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석현은 나직하고 힘있는 목소리로 몇 번이나 말했다.“나 전석현은, 소정호를, 사랑한다구요.”좀 알아 줘요, 라는 석현의 말에 정호는 아무런 대답도 못하고 바보처럼 그만 울고 말았다.“생각보다 대사가 바뀐 데가 많네...”대본을 덮고 작게 혼잣말을 한 정호는 소파에서 몸을 일으켜 크게 기지개를 켰다. 한 시간이 넘도록 집중해서 대본을 읽었더니 눈과 어깨가 뻐근했다. 몇 년 만에 받은 사흘 휴가의 가운뎃날이다. 이틀 이상을 연속으로 쉬는 게 대체 얼마만인지 내일도 쉴 수 있다는 게 실감이 나지 않을 정도다. 얼른 주차장으로 내려오라고 지금 당장이라도 매니저한테 전화가 걸려올 것만 같다.예전에 정호가 출연했던 영화가 연극으로 상연되기로 결정되면서 결국 제가 했던 역할이 다시 제게 돌아왔다. 아역 시절에 작은 역
제78화정호는 소리 내어 울었다. 이제 석현 없이는 살 수 없다고, 겨우 입 밖으로 내뱉은 깊은 속마음이 서러웠다.정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석현이 양손으로 정호의 어깨를 세게 붙들어왔다. 짙은 갈색의 눈동자로 제 눈을 뚫어지게 응시한 채,“나는요? 나는 정호 씨 없이 살 수 있을 것 같아?”처음 듣는 석현의 격앙된 목소리. 눈물이 고여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상처받은 눈. 이제 정호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석현 씨 지금 화났구나.생각해 보니 석현이 화난 목소리로 말하는 걸 처음 듣는 건 아니다. 병원에서 처음 만났던 날, 소속사 사람과 통화하던 석현의 목소리가 문틈을 비집고 들려왔을 때도 석현은 저를 위해 화를 내주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의 석현은 그때와는 또 다르다. 그때보다 훨씬, 날것의 감정이 느껴졌다. 어깨를 잡은 석현의 손이 떨려왔다.석현은 아무런 기약도 없이 스웨덴에서 하던 일을 다 정리하고 일본으로 거점을 옮기며 얼마나 참담하고 불안했는지, 어떻게든 정호를 만나기 위해 혼자서 이런 저런 방법을 강구하며 느낀 자괴감에 제가 음습한 스토커가 된 기분이었다는 이야기를, 중간중간 북받쳐 오는 감정을 추스르느라 말을 멈추어가며 힘겹게 쏟아냈다. 석현은 이야기를 듣는 내내 울음이 멎지 않아 눈물만 흘리는 정호를, 어깨를 잡고 있던 손을 그대로 끌어당겨 품에 꽉 안았다. 복잡한 감정이 뒤엉킨 눈동자가 무섭도록 깊고 짙었다.“석현 씨 그런 이야기 나한텐 한 번도 안 했잖아요.”‘참 못났다 소정호, 이런 말이나 하고.’정호는 석현에게 이루 말할 수 없이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그 마음이 너무 커서인지 미안하다는 말조차 입 밖으로 쉽게 나오지 않았다. 미안하다는 말보다 더 미안한 단어가 있다면 그걸 쓰고 싶었다.“이런 얘길 왜 해야 돼요, 정호 씨 마음 아프게.”저를 꼭 안은 채 여전히 화가 난 것 같은 목소리로 석현이 말했다.폭풍이 지나간 듯 감정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엔 왠지 어색한 공기가 감돌았다. 샤워를 마친 후 자려고 나
제77화“석현씨, 무슨 사이죠, 우린?”“뭐... 뭐라구요?”귀국하자마자 집에 짐만 두고 곧장 정호에게 온 석현이 한숨을 돌리기가 무섭게, 정호는 줄곧 생각했던 질문을 던졌다. 어이가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쉰 석현이 입을 열었다.“그게 또 무슨 말이에요, 정호 씨는 그렇게 막 불안해요? 내가?”정호는 잠자코 석현의 대답을 기다렸다.“아니, 내가... 왜, 어떻게 다시 한국까지 왔는데... 내가 어떤 마음인지, 전혀 모르겠어요?”석현은 대답이 아닌 질문만을 던져왔다.“안 되겠네, 이참에 서로 솔직히 얘기 좀 해요. 이런 게 다 쌓이면 독이 되는 거고. 정호 씨가 이렇게까지 불안해하는 걸 내내 몰랐다는 게, ...솔직히 나도 속상하니까.”속상하니까, 라고 말하는 석현의 말끝이 떨려왔다. 곧 차분한 어조로 어디 한 번 얘기 좀 해봐요, 하면서 석현이 자세를 고쳐 앉았다.어디서부터 무슨 얘기를 해야 하나. 이 불안은 어디에서 시작된 걸까. 석현을 다시 만날 수 있을지 실낱같은 희망만을 붙들고, 없는 번호라는 알아듣지도 못할 언어로 흘러나오는 메시지를 몇 번이나 확인했던 그때부터인가. 상상도 못 했던 곳에서 갑자기 만나 이게 꿈인가 싶어 번듯한 말 한마디도 못하는 저와는 달리 너무나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웃어 보이던 석현 앞에서 작아지는 기분을 느꼈던 그때부터인가. 나는 이제 정말,“나는 이제 정말, 석현 씨가 없으면, 살 수가 없는데.”이야기를 하다 보니 역시나 저도 모르게 울고 있었다.
제76화아무래도 신경이 쓰였던 모양인지 석현답지 않게 출장 중인데도 빈번하게 연락을 해왔다. 제가 스케줄 중이라 받지 못한 부재중 전화에 석현이 걸었을 법한 번호가 보이면 마음이 놓이면서도 속이 상했다. 석현의 연락처가 없어서 걸려오는 전화를 기다릴 뿐 제가 연락을 할 수가 없으니 이상하게 불안했다. 지면에 발을 딛지 않은 채 붕 떠 있는 것 같은 기묘한 부유감이 정호를 괴롭혔다.“근데 정호 씨는 정말, 내가 미덥지 못한가 봐요.”제 불안한 마음을 토로하자 핸드폰 건은 정말로 미안하다고 벌써 몇 번째인지 알 수 없는 사과를 하고는 전화기 너머로 희미하게 한숨을 쉰 석현이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대체 뭐가 그렇게 불안해요, 정호 씨는.” 내가 어떻게 겨우 정호 씨한테 닿았는데, 막 그렇게 금방이라도 사라질 것 같고 그래요?”순간 석현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순순히 미안하다는 말은 나오지를 않고,“석현 씨는 왜 그렇게 항상 여유로운 건데요?”오히려 원망하는 어조로 말하고 말았다.“... 내가, 여유로운 것 같아요?”전화기 저편에서 들려오는 석현의 목소리가 약간, 화가 난 것 같았지만 석현이 제게 화낸 적이 한 번도 없어서인지 목소리만으로는 확신이 서지 않았다. ‘지금 석현 씨 화난... 건가?’ 곧 크게 한숨을 쉰 석현이 다시 나직한 목소리로.“이러다 싸우겠어요. 내일 한국 가서 얘기해요.”정호는 전화를 끊고 침대에 털썩 드러누워 멍하니 천장을 보았다.나는 이제 석현 씨가 없이는 살 수 없다.석현 씨는 알고 있을까.석현 씨, 나는 석현 씨에게 어떤 의미인가요.
제75화지금 거신 번호는 없는 번호입니다. 다시 한번 확인하시고 걸어주시기 바랍니다.정호는 제 귀를 의심했다. ‘지금 거신... 뭐라고?’머리를 세게 얻어맞은 것처럼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뭔가 통신 오류가 난 건가, 무슨 시스템에 문제라도 생겼나. 그럴 리가 없는데. 그럴 리가. 정호는 다시 통화버튼을 눌렀다. 손이 제멋대로 떨려왔다.지금 거신 번호는 없는...안내멘트를 마지막까지 듣지 못하고 정호는 전화를 끊었다.이게 지금 무슨 상황인지 전혀 알 수가 없어 머릿속은 혼란스러울 뿐인데도 몸이 먼저 반응해 걷잡을 수 없이 눈물이 흘렀다. 다리에 힘이 풀려 그대로 주저앉았다. 심장이 무섭게도 빠르게 뛰어왔다. 아니 이건 좀 너무, 빠르게 뛴다. 정호는 정말 오랜만에 덜덜 떨리는 손으로 가방을 더듬어 황갈색 알약을 찾아 삼켰다.석현은 지금 출장으로 일주일 동안 스위스에 가 있다. 바로 이틀 전까지만 해도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로 통화를 했다. 출장이 끝나고 돌아오면 여유가 있으니까 어디 조용한 데로 놀러 가자고, 그런 이야기를 했었다. 마지막으로 통화했을 때 내가 눈치채지 못한 뭔가 이상한 낌새가 있었나? 석현 씨 목소리가 어땠지? 분명 우는 목소리는 아니었는데.‘그런데 왜 없는 번호가 된 거지, 석현 씨 전화가.’정호는 불시에 모든 사고회로가 정지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정말 아무런 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지금 이 상황이 뭐가 어떻게 된 건지를 전혀 파악할 수 없었다. 이대로 다시는 석현을 만날 수 없을 것만 같은 예감이 파도처럼 저를 덮쳐왔다.나는 이제 석현 씨가 없이는 살 수 없다.이성적으로 상황을 판단할 여력 따윈 없었다. 사무치게 제 마음을 깨달았을 뿐이었다. 가파른 절벽 위에 선 기분이었다. 끝없는 절망 속에서도 약기운이 도는지 가빠졌던 호흡이 진정되어 왔다. 기분 탓인지 심장이 여전히 방망이질 치는 것처럼 느껴졌다.바닥에 드러누운 정호의 귀에 부우웅 진동소리가 들려왔다. 플러스 사, 일로 시작되는 번호였다.
제74화정호가 다른 사람처럼 멋있어 보였다는 말에 정호도 서둘러 오늘 하루 내내 생각하던 말을 했다.“나는 오늘 석현 씨가 너무 멋있었는데요. 그, 진짜 다른 사람 된 것처럼요. 되게, 멋있었어요.”정호의 말에 눈빛이 짙어진 석현이 답답한 듯 한숨을 내쉬더니,“역시 안 되겠죠? 여기서 껴안으면.”“음, 축하의 포옹으로 보이지 않을까요?“아니야, 역시 안 되겠어요. 껴안는 데서 못 멈출 것 같아요, 나.”팀장님을 목놓아 부르짖으며 석현을 찾는 선재의 목소리에 이따 집에서 봐요, 하고 석현이 먼저 시끌벅적한 공간으로 돌아갔다. 정호는 석현에게 건네받은 커피를 마저 마시고 나서도 한참을 밖에 서서 창문 너머로 보이는 석현을 바라보았다. 제가 아까 창문 밖을 보기 전까지 석현이 그랬던 것처럼.영화팀 회식과 통역팀 회식은 분명 동시에 끝났는데 집에서 보자던 석현은 여태 소식이 없다. 빨리 샤워를 해서 제 몸에 배인 고기냄새와 술 냄새를 씻어내고 싶은데. ‘석현 씨 오기 전에 우선 먼저 샤워를 할까?’ 그러기에는 주인 없는 집에서 너무 맘대로 구는 것 같기도 하고.참지 못한 정호는 결국 석현에게 전화를 걸었다.“석현 씨, 왜 안 와요, 어디예요?”“정호 씬 어딘데요?”“석현 씨 집이죠.”“네? 난 정호 씨 집인데?”정호는 샤워를 하면서도 이 상황이 너무 웃겨서 이상한 사람처럼 자꾸 혼자 소리 내어 웃었다. 석현의 집에서 제가 혼자서 샤워를 하고 있고 석현은 아마도 제 집에서 샤워를 마치고 올 것이다. 집에서 보자는 말에 서로 다른 집을 떠올린 두 사람 다 어느 쪽 할 것 없이 너무 바보 같다는 생각이 들어 계속 웃음이 나왔다. 제 몸을 휘감는 석현의 비누 냄새에 기분이 좋아졌다. 머리를 다 말리고 소파에 앉으려는 순간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아아, 겨우 만났네요.” 라고 말하며, 머리끝이 아직 약간 젖은 채 저를 껴안아오는 석현에게서 제가 쓰는 익숙한 비누 냄새가 났다. 행복에 냄새가 있다면 분명 이런 냄새일 것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