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유

Chapter11

작가: 김흰
제11화

“어? 정호씨 표정이 왜 그래요?

왜요, 뭐 필요한 거 있어요?

아니면 몸이 또 안 좋아요?”

석현은 아무렇지 않게 걱정어린 질문을 쏟아낸다.

“그, 지금 문앞에 누가 와서 뭐라고 하는데,

저는 그, 말을 못 알아듣겠는데.

아무래도 석현 씨를 찾는 것 같아서요.”

등기 우편인 모양이었다. 석현은 몇 마디 말을 주고받더니 슥슥 사인을 하고 두툼한 서류 봉투를 받았다. 테이블에 서류 봉투를 내려놓은 석현이 커피를 내리기 시작했다.

“원래 이렇게 마감 촉박하게 일하는 스타일 아닌데요 나.”

멋쩍은 듯 뒷머리를 만지작거리며 석현이 정호를 향해 웃어 보였다.

커피 향기 때문인지 정호는 약간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

“석현 씨는 번역일 하시는 거예요?

다음 날 저녁이 되어서야 피곤한 얼굴로 방에서 나와 이제 제일 급한 일은 끝냈다는 석현과 테이블에 마주앉아 정호가 뱉은 첫 마디였다.

어제 점심과 저녁, 그리고 오늘 아침과 점심. 고작 네 번 혼자 식사를 해결했을 뿐인데 함께 식사를 하는 것이 아주 오랜만인 것처럼 느껴졌다.

“아, 저요? 네, 번역도 하고 통역도 하고, 뭐.

할 줄 아는 게 그런 거 밖에 없어서요.”

“번역이었구나…….”

정호는 작게 중얼거렸다. 킬러라든지 해커라든지 멋대로 이상한 예상을 했던 스스로가 우스웠다.

“아니, 그, 저는, 석현 씨가 말씀을 안 해 주시길래, 뭔가 비밀스러운 일이라도 하시나 하고...”

집중해서 빵에 잼을 바르던 석현이 손을 멈추고 고개를 들어 정호를 바라보았다.

“물어봤으면 말해줬을 텐데, 궁금했어요? 내가 뭐하는 사람인지.”

왠지 신이 난 사람처럼 그는 싱긋 웃는 얼굴이었다.
잠긴 챕터
GoodNovel에서 계속 읽으려면
QR 코드를 스캔하여 앱을 다운로드하세요

관련 챕터

  • 엔딩 크레딧에서 당신의 이름을 찾아   Chapter12

    제12화“아니, 난 정호씨가 안 물어보니까 관심 없는 줄 알았죠. 어차피 2주일만 같이 있을 사람이고……”여전히 웃는 얼굴이었지만 마지막 문장을 말하는 석현의 눈이 언뜻 슬퍼 보였다. 정호는 시선을 낮춰 제 접시를 골똘히 보며 말했다.“저 석현 씨한테 궁금한 거 되게 많은데.”제 말에 석현이 이렇다 할 반응이 없어 의아해진 정호가 고개를 들어 석현을 보니 석현은 약간 얼이 빠진 듯한 표정으로 저를 보고 있었다. 처음 보는 표정이었다. ‘뭐지, 놀란 건가? 아니면 곤란한 건가?’“그럼 다 물어봐요, 정호 씨 궁금한 거.”이내 다시 웃는 얼굴이 된 석현이 노래하듯 경쾌한 투로 말했다.정호는 제가 심사숙고해서 말을 고르지 않고 누군가와 이렇게 편하게 얘기하는 게 얼마나 오랜만인지를 잠시 생각했다. 아니, 애초에 그런 적이 있기나 했던가.정호의 예상과는 달리 석현은 한국에서 태어나 한국에서 자란 사람이었다. 한국에서도 통번역 일을 한 적이 있다고 했다. 뭐든지 다 알려줄 것처럼 굴던 그는 한국을 떠나 여기에 온 이유를 묻자 ‘그냥’이라고 아주 짧게 대답했다.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는 뜻이구나.’ 정호는 재차 묻지 않았다. ‘또 뭐가 궁금했더라? 아, 이런 분위기 싫은데. 빨리 다른 얘기를 해야 될 것 같은데.’“아, 맞다, 나 그것도 궁금했어요.석현 씨 성이 뭐예요? 무슨 석현이에요?”“아니, 그렇게 궁금한 게 많으면서, 며칠 동안 왜 아무것도 안 물어봤어요? 지금까지 궁금해서 어떻게 참았어요?”저를 놀리는 듯한 석현의 말투에 정호는 괜히 귀끝이 뜨거워져 아무렇지도 않은 척 제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며 시선을 돌렸다.“아, 그, 제가 평소에 이것 저것 질문받는 걸 별로 안 좋아해서. 석현 씨도 그럴까봐.”정호는 다시 고개를 돌려 석현의 반응을 살폈다. 푸스스 웃던 석현이 지긋이 눈을 맞춰왔다.“전석현이에요. 전석현.”‘흔한 이름은 아닌데, 왜 어디선가 들어본 것도 같은 기분이 들지…….’저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석현의 눈에 괜

  • 엔딩 크레딧에서 당신의 이름을 찾아   Chapter13

    제13화“정호 씨, 정호 씨.”석현이 낮고 다정한 목소리로 이름을 부르며 어깨를 부드럽게 흔들었다.“정호 씨, 그만 자고 일어나요.”정호가 석현의 집에 온 지 사흘째 되는 날 아침이었다. 그동안 정호가 일어날 때까지 늘 기다려주던 석현이 처음으로 정호를 깨웠다. 정호는 잘 떠지지 않는 눈을 반쯤 떠 석현을 보았다. 그는 눈썹 끝을 내리고 조금 곤란한 얼굴로 조심스레 정호를 깨우고 있었다.“잘 잤어요? 깨워서 미안해요.”‘괜찮아요’하고 얼른 대답하고 싶은데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는다.“크흠, 흠! ……네.”그 모습을 보던 석현이 웃음을 참으려다가 고개를 돌려 조용히 웃는다.“이제 일어나요. 오늘 정호씨 병원 가야 돼요.”석현의 차를 타고, 처음 여기에 왔을 때 정신을 차렸던 병원까지 다시 왔다. 병원에서 깨어나 석현을 처음 만났던 날이 멀고 먼 옛날처럼 느껴졌다. 고작 사흘 전인데. 그 날은 자세히 볼 겨를이 없어 몰랐는데 주택을 개조한 듯한 아주 아주 작은 병원이었다. 석현의 통역으로 어려움 없이 진찰이 끝나고 침대에 누워 링거를 맞는 동안 석현은 창문 옆 의자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흘끔 책 제목을 봤지만 한국어도 영어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작업실 모니터에서 본 알파벳의 나열도 아닌, 완전히 다른 문자로 된 언어였다. ‘아, 저 글자 어디선가 본적이 있는데……어느 나라 말이었더라?’ ‘그나저나 대체 외국어를 몇 개나 하는 거야. 이 사람은.’“그건 무슨 책이에요?”집중한 석현에게 정호의 질문이 들리지 않은 모양이었다. 여전히 석현의 시선은 책을 향해 있었다. 하지만 이전의 날이 선 표정이 아닌 어딘가 모르게 부드럽게 누그러진 표정이었다.

  • 엔딩 크레딧에서 당신의 이름을 찾아   Chapter14

    제14화“석현 씨?”“석현 씨.”거듭 부르자 석현이 고개를 돌려 정호를 보았다. 침대쪽으로 의자를 당겨 앉으며,“정호 씨 자는 줄 알았는데, 안 잤어요?물 마실래요?”어떻게 사람이 이렇게 따뜻한 목소리로 말할 수 있지. 대체 뭘까, 이 따뜻한 느낌은. 정호는 석현이 나긋한 목소리로 소리를 내어 책을 읽어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아까 하려고 하던 질문을 마저 했다.“그건 무슨 책이에요?”석현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놀란 얼굴을 했다.“이 책이요? 내가 읽고 있는 거요?”“네, 그 책이요.”뭐가 재밌는지 싱글싱글 웃으며 석현이 대답했다.“그냥 소설이에요. 무슨 책인지 궁금했어요?”“아니 그냥, 그건 어느 나라 말인가 해서요.”“아아, 이거요? 이건 러시아어예요.문자가 예쁘게 생겼죠?”석현이 다시 후후, 하고 정호를 보며 웃었다.“왜 자꾸 웃어요.”약간 심통이 난 듯한 정호의 말에, 입술에 힘을 주어 웃음을 누르며 석현이 대답했다.“생각했던 것처럼 말이 없는 사람은 아니구나 싶어서.”“저 원래 친해지면 말 많이 하는 편이에요.”“어? 그럼 우리 친해진 거예요?”“그럼 아니에요?”석현의 장난스런 질문에 정호가 핀잔을 주듯 대답하자 석현은 다시 새어나오는 웃음을 누르며,“맞아요. 맞아요. 우리 이제 친해졌죠.”노래하듯 말끝을 길게 빼며 말한 석현은 웃는 얼굴로 작게 한숨을 내쉬며 두 손에 잠깐 얼굴을 묻었다가 다시 책으로 눈을 돌리고는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나직이 말했다.“……난 더 친해지고 싶은데.”정호는 제가 그의 말을 제대로 들은 건지 확신이 없었지만 어째서인지 ‘뭐라고요’ 하고 되물을 수도 없었다. 똑똑 떨어지는 링거액 방울만 괜히 쳐다보았다.

  • 엔딩 크레딧에서 당신의 이름을 찾아   Chapter15

    제15화진료가 끝나고 돌아가는 길, 석현은 집을 지나쳐 한참 차를 몰더니 작은 건물 앞에 차를 세웠다.“같이 장 볼래요? 아님 차에서 기다릴래요?”정호는 흘끗 차창 밖을 보았다.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 사람들, 커다란 종이봉투를 들고 밖으로 나오는 사람들, 차 트렁크에 박스를 싣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간판의 글자는 여전히 읽을 수 없는 말이었지만 아마도 슈퍼인 듯했다. 붐빈다고 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한적하지도 않았다. 정호는 습관적으로 거울을 보았다. 모자도 마스크도 없이 메이크업도 하지 않은, 며칠 새 조금 야윈 거울 너머의 제 얼굴과 눈이 마주쳤다.“그…… 여기가 좀 멀어서, 자주는 못 나오거든요.”걱정스레 정호를 보던 석현이 느릿한 어조로 입을 뗐다.“그래서 오늘 살 거 되게 많은데…….”정호는 거울에 시선을 둔 채 석현의 말을 듣고 있었다.“정호 씨가 여기 차에 혼자 있으면,”제 이름이 나와 반사적으로 석현을 보니 제 쪽을 보고 있던 짙은 갈색 눈동자가 흔들렸다.“마음 편하게 장을 못 볼 것 같아요, 내가.”왜냐고 묻고 싶었지만 정호는 물음을 꾹, 삼켰다.“그러니까, 같이 가요. 정호 씨.”짙은 갈색 눈동자는 이제 흔들림 없이 정호를 보고 있었다. 뭐라 이유를 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왠지 이 사람이 옆에 있으면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정호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저기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간다, 간다, 간다. 흐읍, 정호는 차에서 내려 숨을 들이쉬며 주먹을 쥔 채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뒤에서 다가온 석현이 왼팔을 뻗어 정호의 어깨를 감싸 잡으며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여기엔 정호씨 아는 사람 정말 아무도 없을 테니까. 안심해도 돼요. 진짜. 걱정 말아요.”대체 이 사람은, 사람 마음까지 읽는 건가. 사람들을 무서워하는 것도 공황장애가 있는 것도 왠지 감추고 싶었는데. 정호는 몰래 쓴 일기장 속의 중요한 문장을 남에게 읽히고 만 기분이었다.밝지 않은 표정의 정호

  • 엔딩 크레딧에서 당신의 이름을 찾아   Chapter16

    제16화약을 줄였기 때문인지 전처럼 하루 내내 졸리지는 않았다. 자고 일어나서 밥을 먹고, 약을 먹고 누워있다가 또 잠이 들곤 했던 지난 며칠 간과는 달리 정호는 깨어 있는 시간이 길어졌다. 시간이 더디게 갔다. 테이블에 앉은 석현은 늘 뭔가를 읽거나 쓰고 있었고, 정호는 집중한 석현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고 또 이렇게 소파에 멀뚱멀뚱 앉아있자니 좀이 쑤셨다.‘책이라도 읽을까…….’ 정호는 석현이 전에 책이 있다고 말해줬던 방에 가 보기로 했다. 조심스레 문을 열고 들어가 벽을 더듬어 불을 켰다. 제 시야에 펼쳐진 광경에 정호는 자기도 모르게 와아,하고 작게 탄성을 내뱉었다. 실로 엄청난 양의 책이었다. 하지만 얼핏 봐도 그 중 한국어로 된 책은 한 권도 없어 보였다. 정호는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나왔다. ‘어쩌라는 건지, 나 참. 다 자기 같은 줄 아나.’아무런 수확 없이 서재에서 나온 정호는 다시 소파에 앉아 석현을 관찰했다. 집중한 얼굴. 책장을 넘기는 가늘고 긴 손가락. 정호의 시선을 느꼈는지 석현이 고개를 들어 정호를 보았다. 갈색 눈동자가 말없이 왜요,라고 물어왔다.“근데, 석현 씨는 몇 개 국어를 하는 거예요?”이제는 석현에게 뭔가를 물어보는 데에 정호는 스스럼이 없었다. 제가 먼저 말을 걸면 금방 따뜻하게 색을 바꾸는 석현의 다정한 얼굴이 좋았다.“정호 씨, 막 이번엔 무슨 질문을 할까,미리 막 생각하고 준비하고, 그러는 건 아니죠?”석현이 장난스레 너스레를 떨었다.“아니, 보니깐, 영어랑 여기 말만 하는 건아닌 것 같아서요.”“여기 말……?”석현이 희고 긴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고 웃었다.“여기 말……하하하, 여긴 산골이라 사투리가 좀 심하긴 하지만, 일단은 스웨덴어예요. ““스웨덴어……”석현은 입술에 힘을 주어 웃음을 참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스웨덴어요,라고 말하는 석현의 말꼬리에 다정함이 묻어났다.

  • 엔딩 크레딧에서 당신의 이름을 찾아   Chapter17

    제17화덴마크어였구나. 정호는 드디어 알 수 없는 낯선 언어의 정체를 알게 되어 속이 시원했다.“근데 저번에 병원에선 러시아어로 된 책 읽고 있었잖아요.”“으음…… 러시아어도 어느 정도…….”말끝을 얼버무린 석현이 입술을 꾹 오므리며 약간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그러니깐, 석현 씨 대체 몇 개 국어 하는 거냐구요.”“그, 몇 개 국어, 막 이런 식으로 말하기가 또 좀 애매해서요.”“막, 막, 엄청 많이 하는 거예요?”“사실, 음, 언어는 다섯 개까지가 어렵지, 그다음부터는 다 비슷해요 결국.”“와아, 지금 석현 씨 되게 재수 없는 거 알아요?”정호가 장난스럽게 놀리는 투로 말하자, 석현은 일순 놀란 듯 눈을 크게 뜨고 정호를 보더니 이내 고개를 푹 숙이고 쿡쿡거리며 웃었다. 정호는 석현의 웃음이 멎기를 기다리지 않고 말을 이어나갔다.“그 말은, 그니깐 적어도 5개 국어 이상 한다는 말이잖아요 그거.”“아니 그러니까, 그 몇 개 국어, 이런 식으로 말하기가 좀 그렇다니까요?”“어어, 석현 씨 지금 겸손하게 말하려고 노력하는 거죠 지금?”정호는 이런 쓸데없는 실랑이 같은 대화가 즐거웠다. 이렇게 격 없이 누군가와 웃으며 얘기한 적이 있었던가. 한참을 웃던 석현이 웃음을 추스르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근데 거의 일상 회화 수준이고, 통역할 만큼 하는 건 또 몇 개 안 돼요. 뭐, 어떤 통역이냐에 따라 다르겠지만요.”“아 맞다. 그, 통역하는 사람들 볼 때마다 진짜 대단하다고 생각했어요.”거짓말이었다. 정호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통역하는 사람의 존재를 딱히 의식한 적이 없었다. 통역이 붙을 정도의 일을 할 때면 저도 남을 신경 쓸 겨를이 없기도 했고, 기본적으로 남에게 쉽게 관심을 가지는 성격도 아니었다. 사실은 병원에서 어려운 의료 용어를 망설임 없이 매끄럽게 통역하던 석현이 정말 대단해 보였다고, 그런 말을 하고 싶었지만 그 말을 하기엔 왠지 쑥스러워서, 정호는 ‘통역하는 사람들’이라고 에둘러 말했다.“그래요?

  • 엔딩 크레딧에서 당신의 이름을 찾아   Chapter18

    제18화점심을 먹는 석현은 이상하게 정신이 다른 데에 가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여느 때 같았으면 뭔가 정호를 놀리거나, 걱정하거나, 아니면 잔소리를 하거나, 어떤 방향으로든 정호에게 관심을 쏟을 사람인데. 늘 진득하게 눈을 맞춰오던 갈색 눈동자가 자꾸 딴 데를 보는 것이 정호는 기분이 이상했다. 조금 망설이다 석현의 이름을 부르려는 순간, 석현이 잊고 있었던 것을 떠올리기라도 한 듯 파드득 고개를 돌리더니 입을 열었다.“아 맞다. 정호씨, 내가 말하는 걸 깜박했는데, 나 오늘은 중요한 통역이 있어서, 이따 세 시간 정도 방에서 아예 못 나올 거예요.” 왠지 다급한 말투였다.“혹시 무슨 일이 있더라도 오늘은 내가 나오기 전까지는 방에 들어오지 말고 기다려줘요. 정호씨 혼자서 괜찮겠어요?”또, 또 그 걱정스런 눈으로 저를 본다. 정호는 입을 꾹 다물고 괜찮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어, 그런데,“방에서…… 하는 거예요? ……통역을?”“네, 뭐, 말하자면 영상통화 같은 그런 방식이죠.”“아, 근데 석현 씨 머리가……뻗쳤는데.”정호의 말에 석현은 무심코 머리를 더듬어 만져보고는 소리를 내어 웃었다.“아하하, 괜찮아요, 그 사람들한테 내 얼굴이 보이는 게 아니니까. “‘아, 석현 씨는 목소리로만 하는 거구나’ 정호는 멋쩍어져 실없이 웃어보였다.이따가 한다는 통역 때문인지 식사를 마치고 테이블에 앉은 석현은 보통 때보다도 날을 세우고 뭔가를 집중해 읽어 내려갔다. 그러다가 부리나케 메모를 하거나 급하게 다른 뭔가를 찾아 읽거나 했다. 빼곡하게 덧쓴 글씨가 보이는 인쇄물들에서 왠지 모를 중압감이 느껴졌다. 문득 시계를 확인한 석현이 벌떡 일어나 착착 서류들을 챙기고는 소파에 앉아 음악을 듣는 정호에게 다가왔다.“정호 씨, 나, 다녀올게요.”그냥 저쪽 방에 가는 것뿐이면서, 뭘 이렇게 진지하게 인사를 하는 거지. 근데 그것보다, 별것도 아닌 다녀온다는 말인데, 아, 왜 이렇게, 간지러운 기분이 들지.정호는 몸을 일으켜 앉아 석현을

  • 엔딩 크레딧에서 당신의 이름을 찾아   Chapter19

    제19화석현이 없는 오후는 유난히 길게 느껴졌다. 정호는 다시 서재에 들어가 보았다. 다시 봐도 정말 터무니없는 양의 책이었다. 이게 갑자기 쏟아져 내리기라도 하면 여기서 꼼짝없이 죽겠구나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별달리 할 일도 없던 정호는 찬찬히 책들을 살펴보았다. 어떤 발음인지조차 상상이 안 되는 낯선 언어들의 향연 속에 간간이 눈에 띄는 영어 제목들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시간도 많은데 영어로 된 책이라도 읽어볼까.’ ‘모르는 건 석현 씨한테 물어보면서 읽으면 천천히나마 읽을 수 있지 않을까?’ 거기까지 생각이 닿은 정호는 눈을 부릅뜨고 필사적으로 영어로 된 책들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그중에 제일 쉽고 재미있어 보이는 걸 고르겠다는 일념으로. ‘기왕이면 아는 작품이 있었으면 좋겠는데….’“어어?”놀란 나머지 멋대로 당황스러운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구석에 뒤집힌채 꽂혀있던 책을 아무 생각 없이 꺼냈는데 너무나도 잘 읽어지는 제목이었기 때문이다.한국어로 된 책이었다.한국어를 보는 게 너무 오랜만이라 정호는 눈물이 날 것처럼 반가웠다.***석현이 통역을 끝내고 나올 즈음이면 배가 고플 것 같아 정호는 저녁 식사 준비를 시작했다. 오랜만에 하는 요리이기도 하고 제 집이 아닌지라 어디에 뭐가 있는지 몰라 생각보다 시간이 걸렸다. 달칵, 정호가 막 완성된 파스타를 그릇에 옮겨 담고 있을 때, 석현의 방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터덜터덜 거실로 나온 석현은 금방이라도 잠들 것 같은 얼굴이었다.“잘 끝났어요? 이거 다 됐으니까 같이 먹어요.”석현이 멍한 얼굴로 파스타를 바라보았다.“정호씨가…… 만든…… 거예요?”“네, 석현 씨 일하니까, 그리고 그, 저는 할 일이 없기도 하고. 하하.”괜히 멋쩍어진 정호는 석현을 향해 웃어 보였다. 석현은 무슨 엄청난 선물이라도 받은 사람처럼 두 손으로 입을 가리고 한참을 말이 없었다.“자자, 이제 샐러드만 만들면 되니까, 그건 진짜 금방 하니까, 잠깐만 여기 앉아서 기다려요.

최신 챕터

  • 엔딩 크레딧에서 당신의 이름을 찾아   Chapter82

    제82화석현은 코 먹는 소리를 내며 연신 소매로 눈물을 닦았다. 정호는 얼른 석현의 허리를 껴안고 달래듯 말했다.“아이, 석현 씨, 나 자주 죽잖아요. 뭘 또 그렇게 울고 그래요.”“아아, 나 이제 이런 건 못 보겠어요. 정호 씨 고생하는 영화는. 진짜.”울음을 멈추지 않고 숨을 몰아쉬며 석현이 말했다.“그러니깐 내가 안 본댔잖아요, 석현 씨가 보자고 해놓고, 으이그.”이 사람이 이렇게 무방비한 얼굴로 우는 모습을 보이는 건 제 앞에서 뿐이라는 걸, 이제 정호는 잘 알고 있다.스크린 안에서 어느 누군가와 만나서 다른 사람 사랑하는 모습을 아무리 진짜처럼 연기해도 소정호의 삶에 존재하는 진짜 사랑하는 사람은 오직 저뿐이라는 걸, 석현도 분명 잘 알고 있으리라.문득 가슴이 벅차올랐다.석현을 만나고부터 지금까지의 많은 날들이 떠올랐다.우리의 이야기는 해피엔딩이다.영원히 간직할 수 있는, 해피엔딩.겨우 진정한 듯한 석현이 정호의 어깨에 팔을 둘러 저를 꼬옥 마주 안아왔다.“정호 씨 나보다 먼저 죽으면 안 돼요.”내내 울어 엉망이 된 목소리로 한다는 말이.정호는 입꼬리를 꾹 누르며 웃음을 찾았다.“석현 씨,”제가 이름을 부르면 곧 으응, 하고 대답하는 다정한 목소리. 내가 좋아하는 사람의, 좋아하는 목소리.“사랑해요.”갑자기 뱉은 제 말에도,“내가 더 사랑하니까.”라고, 안은 팔에 힘을 주며 천연덕스레 대꾸해 오는 이 사람을. 사랑한다는 말로는 부족할 만큼,사랑한다.

  • 엔딩 크레딧에서 당신의 이름을 찾아   Chapter81

    제81화석현이 번역한 ‘푸른 시간의 기억’보다 먼저 세상에 나온 영화 ‘지나간 나날들’에서 정호가 맡았던 ‘한’이라는 이름의 주인공은 원작 소설에서는 제임스라는 이름으로, 오랫동안 소식을 알 수 없었던 어릴 적 친구와 직장에서 재회하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그저 추억으로만 남아있던 어릴 적 몰래 좋아했던 친구를 어른이 되어 현실에서 다시 만나게 되면서 제 감정에 대해 고민하는 과정에서 섬세한 표현을 요하는 장면이 많아 컷 하나하나 고민해 가며 어렵게 촬영했고 그만큼 정호를 많이 자라게 한 작품이었다.“아, 오랜만에 다시 보고 싶다. 정호 씨랑 같이.”불쑥, 그런 말을 내뱉은 석현이 개구쟁이같은 얼굴로 제게 빤히 눈을 맞춰온다.“음? 뭐요? 뭐가요?”“지나간 나날들이요.”부끄러워서 절대 안 된다고, 보고 싶으면 석현 씨 혼자 보라고, 한사코 손을 내두르며 버텼지만 결국 밥 먹는 내내 저를 조르고 설득하는 석현에게 지고 말았다. ‘하긴 이 사람을 내가 무슨 수로 이기나.’ 석현과 나란히 소파에 앉은 정호는 작게 한숨을 쉬며 오프닝 크레딧이 흘러나오는 화면을 노려보았다.정호가 연기한 한이 사랑했던 학창 시절의 현수는 부모의 학대 때문에 치마를 입고 머리를 기른 모습으로 생활하는 소년이다. 한은 현수가 여자애가 아니라는 걸 처음부터 알고 있지만 줄곧 모르는 것처럼 행동한다. 감정은 이유 없이 불시에 찾아온다. 한이 현수에게 반하는 순간의 얼굴이 클로즈업되었다.“와... 정호 씨 나한테 저런 표정 지은 적 한 번도 없는 거 같은데.”“아니 저건 연기잖아요, 연기. 연습해서 만들어낸 표정이라구요.”역시 석현과 함께 보는 게 아니었다고, 불쌍한 얼굴 좀 하고 조른다고 해서 져주는 게 아니었는데, 라고 늦은 후회를 하며 정호는 한숨을 쉬었다. 장면마다 석현의 놀림 아닌 놀림이 이어지는 데다가 몇 년도 더 전의 앳된 얼굴을 한 제가 연기하는 걸 보는 게 쑥스러워 어딘가로 숨고 싶어졌다.어느덧 영화는 클라이맥스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한과 현수

  • 엔딩 크레딧에서 당신의 이름을 찾아   Chapter80

    제80화커피머신이 우우웅 소리를 내며 돌아가고 쌉싸름한 커피 향이 금세 코끝으로 밀려들어왔다. 정호는 모처럼 내린 커피를 쏟을까 조심조심 걸음을 옮겨 건너편 방문을 열었다.벽면이 모두 책장인 석현의 작업실에 들어가면 늘 오래된 책과 종이와 잉크 냄새가 난다. 여러 개의 모니터를 앞에 두고 앉은 석현이 두들기는 키보드 소리가 타닥타닥 하고 경쾌하게 들려온다. 여전히 정호가 들어온 줄도 모르고 집중한 뒷모습. 코 앞에 커피를 내려놓자 그제야 손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저를 본다.“아니 소정호 씨가 이런 특별 서비스를 다 해주시고.”석현이 웃는다. 꽃이 피는 것 같은 웃음이다. 몇 번을 봐도 익숙해지지가 않고, 매번 어김없이 가슴이 뛰고 그저 좋기만 한 이 사람의 웃는 얼굴.“쉬엄쉬엄 해요. 마감 아직 여유 있잖아요.”“응 그래서 알레그로 아니고 모데라토 정도로 작업하고 있는데요.”번역 작업할 때 옆에서 보면 피아노를 연주하는 것 같다고 제가 지나가듯 말했던 걸 잘도 기억하고 이런 농담을 해온다.“뭐예요 그게, 그럼 마감 임박하면 알레그로로 하는 거예요?”“마감 전엔 프레스토!”“프레스토? 그게 젤 빠른 건가?”“아마도요.”“석현 씬 대체 모르는 게 뭐예요?”앉은자리에서 부스스 일어나 어깨를 꼭 끌어안더니,“정호 씨가 왜 이렇게 좋은지,그걸 모르겠어요. 정말.”장난스럽게 대꾸하고 금방 얼굴을 부벼온다. 좋은 냄새가 난다. 석현 씨 냄새.다음 달이면 같이 산 지도 일 년이 된다. 시간은 언제나 그렇듯 우리를 기다려주지 않고 무심하게 꾸준히 흘러간다. 절대로 멈추는 법이 없다.“어, 지나간 나날들, 대본 이제 온 거예요?”아니 당장 모레부터 연습이라면서요, 그걸 오늘이 돼서야 보내나, 거참 되게 일 못하네, 한 번 읽었던 대본을 다시 훑어보는 중인 정호의 옆에 앉아서 석현이 못마땅한 듯 중얼거렸다. '지나간 나날들'은 한국에서 영화화가 되고 난 후에야 원작이 주목을 받는 바람에 한국어판 소설은 영화보다 나중에 나왔다. 그 소설의

  • 엔딩 크레딧에서 당신의 이름을 찾아   Chapter79

    제79화정호에게 오점이 될까 두렵다는 석현의 말을 듣던 정호는 석현의 품에 안긴 채로,“오점이라니요. 석현 씨가 왜 오점이 돼요 나한테.그 말 취소해요.”괜히 장난처럼 시비를 걸었다.“알았어요. 취소.”석현이 웃음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아 뭔가 좀 더 투정을 부리고 싶은데.’정호는 왠지 무언가 덜 풀린 기분이 들었다.“석현씬 맨날 자기 마음도 말 잘 안 해주고.”“아니 그걸 꼭 말로 해야 알아요?”“말을 안 하면 어떻게 알아요? 내가 좋아한다고 말하기 전에 내가 좋아하는 거 알았어요?”“아니, 그때랑 지금이랑은...”말문이 막힌 듯 석현이 흐읍, 숨을 고쳐 쉬었다.갑자기 안았던 팔을 풀어낸 석현이 정호의 어깨를 붙잡아 저를 보게 했다. 정호는 왠지 부끄러워져 눈을 맞출 수가 없었다. 아까 다툰 것의 여파인지 속얘기를 다 털어놓아서인지 석현을 바로 쳐다보기가 열쩍었다.“정호 씨, 나 좀 봐요.”뭘 또 굳이 자기를 보래. 가슴 떨리게 왜 이래 이 사람.“사랑해요.”갑작스러운 고백에 놀라 정호는 석현을 보았다. 흔들림 없이 저를 향한 짙은 갈색 눈동자.“나 정호 씨 사랑한다구요.”정호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석현은 나직하고 힘있는 목소리로 몇 번이나 말했다.“나 전석현은, 소정호를, 사랑한다구요.”좀 알아 줘요, 라는 석현의 말에 정호는 아무런 대답도 못하고 바보처럼 그만 울고 말았다.“생각보다 대사가 바뀐 데가 많네...”대본을 덮고 작게 혼잣말을 한 정호는 소파에서 몸을 일으켜 크게 기지개를 켰다. 한 시간이 넘도록 집중해서 대본을 읽었더니 눈과 어깨가 뻐근했다. 몇 년 만에 받은 사흘 휴가의 가운뎃날이다. 이틀 이상을 연속으로 쉬는 게 대체 얼마만인지 내일도 쉴 수 있다는 게 실감이 나지 않을 정도다. 얼른 주차장으로 내려오라고 지금 당장이라도 매니저한테 전화가 걸려올 것만 같다.예전에 정호가 출연했던 영화가 연극으로 상연되기로 결정되면서 결국 제가 했던 역할이 다시 제게 돌아왔다. 아역 시절에 작은 역

  • 엔딩 크레딧에서 당신의 이름을 찾아   Chapter78

    제78화정호는 소리 내어 울었다. 이제 석현 없이는 살 수 없다고, 겨우 입 밖으로 내뱉은 깊은 속마음이 서러웠다.정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석현이 양손으로 정호의 어깨를 세게 붙들어왔다. 짙은 갈색의 눈동자로 제 눈을 뚫어지게 응시한 채,“나는요? 나는 정호 씨 없이 살 수 있을 것 같아?”처음 듣는 석현의 격앙된 목소리. 눈물이 고여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상처받은 눈. 이제 정호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석현 씨 지금 화났구나.생각해 보니 석현이 화난 목소리로 말하는 걸 처음 듣는 건 아니다. 병원에서 처음 만났던 날, 소속사 사람과 통화하던 석현의 목소리가 문틈을 비집고 들려왔을 때도 석현은 저를 위해 화를 내주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의 석현은 그때와는 또 다르다. 그때보다 훨씬, 날것의 감정이 느껴졌다. 어깨를 잡은 석현의 손이 떨려왔다.석현은 아무런 기약도 없이 스웨덴에서 하던 일을 다 정리하고 일본으로 거점을 옮기며 얼마나 참담하고 불안했는지, 어떻게든 정호를 만나기 위해 혼자서 이런 저런 방법을 강구하며 느낀 자괴감에 제가 음습한 스토커가 된 기분이었다는 이야기를, 중간중간 북받쳐 오는 감정을 추스르느라 말을 멈추어가며 힘겹게 쏟아냈다. 석현은 이야기를 듣는 내내 울음이 멎지 않아 눈물만 흘리는 정호를, 어깨를 잡고 있던 손을 그대로 끌어당겨 품에 꽉 안았다. 복잡한 감정이 뒤엉킨 눈동자가 무섭도록 깊고 짙었다.“석현 씨 그런 이야기 나한텐 한 번도 안 했잖아요.”‘참 못났다 소정호, 이런 말이나 하고.’정호는 석현에게 이루 말할 수 없이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그 마음이 너무 커서인지 미안하다는 말조차 입 밖으로 쉽게 나오지 않았다. 미안하다는 말보다 더 미안한 단어가 있다면 그걸 쓰고 싶었다.“이런 얘길 왜 해야 돼요, 정호 씨 마음 아프게.”저를 꼭 안은 채 여전히 화가 난 것 같은 목소리로 석현이 말했다.폭풍이 지나간 듯 감정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엔 왠지 어색한 공기가 감돌았다. 샤워를 마친 후 자려고 나

  • 엔딩 크레딧에서 당신의 이름을 찾아   Chapter77

    제77화“석현씨, 무슨 사이죠, 우린?”“뭐... 뭐라구요?”귀국하자마자 집에 짐만 두고 곧장 정호에게 온 석현이 한숨을 돌리기가 무섭게, 정호는 줄곧 생각했던 질문을 던졌다. 어이가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쉰 석현이 입을 열었다.“그게 또 무슨 말이에요, 정호 씨는 그렇게 막 불안해요? 내가?”정호는 잠자코 석현의 대답을 기다렸다.“아니, 내가... 왜, 어떻게 다시 한국까지 왔는데... 내가 어떤 마음인지, 전혀 모르겠어요?”석현은 대답이 아닌 질문만을 던져왔다.“안 되겠네, 이참에 서로 솔직히 얘기 좀 해요. 이런 게 다 쌓이면 독이 되는 거고. 정호 씨가 이렇게까지 불안해하는 걸 내내 몰랐다는 게, ...솔직히 나도 속상하니까.”속상하니까, 라고 말하는 석현의 말끝이 떨려왔다. 곧 차분한 어조로 어디 한 번 얘기 좀 해봐요, 하면서 석현이 자세를 고쳐 앉았다.어디서부터 무슨 얘기를 해야 하나. 이 불안은 어디에서 시작된 걸까. 석현을 다시 만날 수 있을지 실낱같은 희망만을 붙들고, 없는 번호라는 알아듣지도 못할 언어로 흘러나오는 메시지를 몇 번이나 확인했던 그때부터인가. 상상도 못 했던 곳에서 갑자기 만나 이게 꿈인가 싶어 번듯한 말 한마디도 못하는 저와는 달리 너무나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웃어 보이던 석현 앞에서 작아지는 기분을 느꼈던 그때부터인가. 나는 이제 정말,“나는 이제 정말, 석현 씨가 없으면, 살 수가 없는데.”이야기를 하다 보니 역시나 저도 모르게 울고 있었다.

  • 엔딩 크레딧에서 당신의 이름을 찾아   Chapter76

    제76화아무래도 신경이 쓰였던 모양인지 석현답지 않게 출장 중인데도 빈번하게 연락을 해왔다. 제가 스케줄 중이라 받지 못한 부재중 전화에 석현이 걸었을 법한 번호가 보이면 마음이 놓이면서도 속이 상했다. 석현의 연락처가 없어서 걸려오는 전화를 기다릴 뿐 제가 연락을 할 수가 없으니 이상하게 불안했다. 지면에 발을 딛지 않은 채 붕 떠 있는 것 같은 기묘한 부유감이 정호를 괴롭혔다.“근데 정호 씨는 정말, 내가 미덥지 못한가 봐요.”제 불안한 마음을 토로하자 핸드폰 건은 정말로 미안하다고 벌써 몇 번째인지 알 수 없는 사과를 하고는 전화기 너머로 희미하게 한숨을 쉰 석현이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대체 뭐가 그렇게 불안해요, 정호 씨는.” 내가 어떻게 겨우 정호 씨한테 닿았는데, 막 그렇게 금방이라도 사라질 것 같고 그래요?”순간 석현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순순히 미안하다는 말은 나오지를 않고,“석현 씨는 왜 그렇게 항상 여유로운 건데요?”오히려 원망하는 어조로 말하고 말았다.“... 내가, 여유로운 것 같아요?”전화기 저편에서 들려오는 석현의 목소리가 약간, 화가 난 것 같았지만 석현이 제게 화낸 적이 한 번도 없어서인지 목소리만으로는 확신이 서지 않았다. ‘지금 석현 씨 화난... 건가?’ 곧 크게 한숨을 쉰 석현이 다시 나직한 목소리로.“이러다 싸우겠어요. 내일 한국 가서 얘기해요.”정호는 전화를 끊고 침대에 털썩 드러누워 멍하니 천장을 보았다.나는 이제 석현 씨가 없이는 살 수 없다.석현 씨는 알고 있을까.석현 씨, 나는 석현 씨에게 어떤 의미인가요.

  • 엔딩 크레딧에서 당신의 이름을 찾아   Chapter75

    제75화지금 거신 번호는 없는 번호입니다. 다시 한번 확인하시고 걸어주시기 바랍니다.정호는 제 귀를 의심했다. ‘지금 거신... 뭐라고?’머리를 세게 얻어맞은 것처럼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뭔가 통신 오류가 난 건가, 무슨 시스템에 문제라도 생겼나. 그럴 리가 없는데. 그럴 리가. 정호는 다시 통화버튼을 눌렀다. 손이 제멋대로 떨려왔다.지금 거신 번호는 없는...안내멘트를 마지막까지 듣지 못하고 정호는 전화를 끊었다.이게 지금 무슨 상황인지 전혀 알 수가 없어 머릿속은 혼란스러울 뿐인데도 몸이 먼저 반응해 걷잡을 수 없이 눈물이 흘렀다. 다리에 힘이 풀려 그대로 주저앉았다. 심장이 무섭게도 빠르게 뛰어왔다. 아니 이건 좀 너무, 빠르게 뛴다. 정호는 정말 오랜만에 덜덜 떨리는 손으로 가방을 더듬어 황갈색 알약을 찾아 삼켰다.석현은 지금 출장으로 일주일 동안 스위스에 가 있다. 바로 이틀 전까지만 해도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로 통화를 했다. 출장이 끝나고 돌아오면 여유가 있으니까 어디 조용한 데로 놀러 가자고, 그런 이야기를 했었다. 마지막으로 통화했을 때 내가 눈치채지 못한 뭔가 이상한 낌새가 있었나? 석현 씨 목소리가 어땠지? 분명 우는 목소리는 아니었는데.‘그런데 왜 없는 번호가 된 거지, 석현 씨 전화가.’정호는 불시에 모든 사고회로가 정지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정말 아무런 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지금 이 상황이 뭐가 어떻게 된 건지를 전혀 파악할 수 없었다. 이대로 다시는 석현을 만날 수 없을 것만 같은 예감이 파도처럼 저를 덮쳐왔다.나는 이제 석현 씨가 없이는 살 수 없다.이성적으로 상황을 판단할 여력 따윈 없었다. 사무치게 제 마음을 깨달았을 뿐이었다. 가파른 절벽 위에 선 기분이었다. 끝없는 절망 속에서도 약기운이 도는지 가빠졌던 호흡이 진정되어 왔다. 기분 탓인지 심장이 여전히 방망이질 치는 것처럼 느껴졌다.바닥에 드러누운 정호의 귀에 부우웅 진동소리가 들려왔다. 플러스 사, 일로 시작되는 번호였다.

  • 엔딩 크레딧에서 당신의 이름을 찾아   Chapter74

    제74화정호가 다른 사람처럼 멋있어 보였다는 말에 정호도 서둘러 오늘 하루 내내 생각하던 말을 했다.“나는 오늘 석현 씨가 너무 멋있었는데요. 그, 진짜 다른 사람 된 것처럼요. 되게, 멋있었어요.”정호의 말에 눈빛이 짙어진 석현이 답답한 듯 한숨을 내쉬더니,“역시 안 되겠죠? 여기서 껴안으면.”“음, 축하의 포옹으로 보이지 않을까요?“아니야, 역시 안 되겠어요. 껴안는 데서 못 멈출 것 같아요, 나.”팀장님을 목놓아 부르짖으며 석현을 찾는 선재의 목소리에 이따 집에서 봐요, 하고 석현이 먼저 시끌벅적한 공간으로 돌아갔다. 정호는 석현에게 건네받은 커피를 마저 마시고 나서도 한참을 밖에 서서 창문 너머로 보이는 석현을 바라보았다. 제가 아까 창문 밖을 보기 전까지 석현이 그랬던 것처럼.영화팀 회식과 통역팀 회식은 분명 동시에 끝났는데 집에서 보자던 석현은 여태 소식이 없다. 빨리 샤워를 해서 제 몸에 배인 고기냄새와 술 냄새를 씻어내고 싶은데. ‘석현 씨 오기 전에 우선 먼저 샤워를 할까?’ 그러기에는 주인 없는 집에서 너무 맘대로 구는 것 같기도 하고.참지 못한 정호는 결국 석현에게 전화를 걸었다.“석현 씨, 왜 안 와요, 어디예요?”“정호 씬 어딘데요?”“석현 씨 집이죠.”“네? 난 정호 씨 집인데?”정호는 샤워를 하면서도 이 상황이 너무 웃겨서 이상한 사람처럼 자꾸 혼자 소리 내어 웃었다. 석현의 집에서 제가 혼자서 샤워를 하고 있고 석현은 아마도 제 집에서 샤워를 마치고 올 것이다. 집에서 보자는 말에 서로 다른 집을 떠올린 두 사람 다 어느 쪽 할 것 없이 너무 바보 같다는 생각이 들어 계속 웃음이 나왔다. 제 몸을 휘감는 석현의 비누 냄새에 기분이 좋아졌다. 머리를 다 말리고 소파에 앉으려는 순간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아아, 겨우 만났네요.” 라고 말하며, 머리끝이 아직 약간 젖은 채 저를 껴안아오는 석현에게서 제가 쓰는 익숙한 비누 냄새가 났다. 행복에 냄새가 있다면 분명 이런 냄새일 것이라고

앱에서 읽으려면 QR 코드를 스캔하세요.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