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화점심을 먹는 석현은 이상하게 정신이 다른 데에 가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여느 때 같았으면 뭔가 정호를 놀리거나, 걱정하거나, 아니면 잔소리를 하거나, 어떤 방향으로든 정호에게 관심을 쏟을 사람인데. 늘 진득하게 눈을 맞춰오던 갈색 눈동자가 자꾸 딴 데를 보는 것이 정호는 기분이 이상했다. 조금 망설이다 석현의 이름을 부르려는 순간, 석현이 잊고 있었던 것을 떠올리기라도 한 듯 파드득 고개를 돌리더니 입을 열었다.“아 맞다. 정호씨, 내가 말하는 걸 깜박했는데, 나 오늘은 중요한 통역이 있어서, 이따 세 시간 정도 방에서 아예 못 나올 거예요.” 왠지 다급한 말투였다.“혹시 무슨 일이 있더라도 오늘은 내가 나오기 전까지는 방에 들어오지 말고 기다려줘요. 정호씨 혼자서 괜찮겠어요?”또, 또 그 걱정스런 눈으로 저를 본다. 정호는 입을 꾹 다물고 괜찮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어, 그런데,“방에서…… 하는 거예요? ……통역을?”“네, 뭐, 말하자면 영상통화 같은 그런 방식이죠.”“아, 근데 석현 씨 머리가……뻗쳤는데.”정호의 말에 석현은 무심코 머리를 더듬어 만져보고는 소리를 내어 웃었다.“아하하, 괜찮아요, 그 사람들한테 내 얼굴이 보이는 게 아니니까. “‘아, 석현 씨는 목소리로만 하는 거구나’ 정호는 멋쩍어져 실없이 웃어보였다.이따가 한다는 통역 때문인지 식사를 마치고 테이블에 앉은 석현은 보통 때보다도 날을 세우고 뭔가를 집중해 읽어 내려갔다. 그러다가 부리나케 메모를 하거나 급하게 다른 뭔가를 찾아 읽거나 했다. 빼곡하게 덧쓴 글씨가 보이는 인쇄물들에서 왠지 모를 중압감이 느껴졌다. 문득 시계를 확인한 석현이 벌떡 일어나 착착 서류들을 챙기고는 소파에 앉아 음악을 듣는 정호에게 다가왔다.“정호 씨, 나, 다녀올게요.”그냥 저쪽 방에 가는 것뿐이면서, 뭘 이렇게 진지하게 인사를 하는 거지. 근데 그것보다, 별것도 아닌 다녀온다는 말인데, 아, 왜 이렇게, 간지러운 기분이 들지.정호는 몸을 일으켜 앉아 석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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