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엔딩 크레딧에서 당신의 이름을 찾아: Chapter 11 - Chapter 20

82 Chapters

Chapter11

제11화“어? 정호씨 표정이 왜 그래요?왜요, 뭐 필요한 거 있어요?아니면 몸이 또 안 좋아요?”석현은 아무렇지 않게 걱정어린 질문을 쏟아낸다.“그, 지금 문앞에 누가 와서 뭐라고 하는데, 저는 그, 말을 못 알아듣겠는데. 아무래도 석현 씨를 찾는 것 같아서요.”등기 우편인 모양이었다. 석현은 몇 마디 말을 주고받더니 슥슥 사인을 하고 두툼한 서류 봉투를 받았다. 테이블에 서류 봉투를 내려놓은 석현이 커피를 내리기 시작했다.“원래 이렇게 마감 촉박하게 일하는 스타일 아닌데요 나.”멋쩍은 듯 뒷머리를 만지작거리며 석현이 정호를 향해 웃어 보였다. 커피 향기 때문인지 정호는 약간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석현 씨는 번역일 하시는 거예요?다음 날 저녁이 되어서야 피곤한 얼굴로 방에서 나와 이제 제일 급한 일은 끝냈다는 석현과 테이블에 마주앉아 정호가 뱉은 첫 마디였다. 어제 점심과 저녁, 그리고 오늘 아침과 점심. 고작 네 번 혼자 식사를 해결했을 뿐인데 함께 식사를 하는 것이 아주 오랜만인 것처럼 느껴졌다.“아, 저요? 네, 번역도 하고 통역도 하고, 뭐. 할 줄 아는 게 그런 거 밖에 없어서요.”“번역이었구나…….” 정호는 작게 중얼거렸다. 킬러라든지 해커라든지 멋대로 이상한 예상을 했던 스스로가 우스웠다.“아니, 그, 저는, 석현 씨가 말씀을 안 해 주시길래, 뭔가 비밀스러운 일이라도 하시나 하고...”집중해서 빵에 잼을 바르던 석현이 손을 멈추고 고개를 들어 정호를 바라보았다.“물어봤으면 말해줬을 텐데, 궁금했어요? 내가 뭐하는 사람인지.”왠지 신이 난 사람처럼 그는 싱긋 웃는 얼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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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12

제12화“아니, 난 정호씨가 안 물어보니까 관심 없는 줄 알았죠. 어차피 2주일만 같이 있을 사람이고……”여전히 웃는 얼굴이었지만 마지막 문장을 말하는 석현의 눈이 언뜻 슬퍼 보였다. 정호는 시선을 낮춰 제 접시를 골똘히 보며 말했다.“저 석현 씨한테 궁금한 거 되게 많은데.”제 말에 석현이 이렇다 할 반응이 없어 의아해진 정호가 고개를 들어 석현을 보니 석현은 약간 얼이 빠진 듯한 표정으로 저를 보고 있었다. 처음 보는 표정이었다. ‘뭐지, 놀란 건가? 아니면 곤란한 건가?’“그럼 다 물어봐요, 정호 씨 궁금한 거.”이내 다시 웃는 얼굴이 된 석현이 노래하듯 경쾌한 투로 말했다.정호는 제가 심사숙고해서 말을 고르지 않고 누군가와 이렇게 편하게 얘기하는 게 얼마나 오랜만인지를 잠시 생각했다. 아니, 애초에 그런 적이 있기나 했던가.정호의 예상과는 달리 석현은 한국에서 태어나 한국에서 자란 사람이었다. 한국에서도 통번역 일을 한 적이 있다고 했다. 뭐든지 다 알려줄 것처럼 굴던 그는 한국을 떠나 여기에 온 이유를 묻자 ‘그냥’이라고 아주 짧게 대답했다.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는 뜻이구나.’ 정호는 재차 묻지 않았다. ‘또 뭐가 궁금했더라? 아, 이런 분위기 싫은데. 빨리 다른 얘기를 해야 될 것 같은데.’“아, 맞다, 나 그것도 궁금했어요.석현 씨 성이 뭐예요? 무슨 석현이에요?”“아니, 그렇게 궁금한 게 많으면서, 며칠 동안 왜 아무것도 안 물어봤어요? 지금까지 궁금해서 어떻게 참았어요?”저를 놀리는 듯한 석현의 말투에 정호는 괜히 귀끝이 뜨거워져 아무렇지도 않은 척 제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며 시선을 돌렸다.“아, 그, 제가 평소에 이것 저것 질문받는 걸 별로 안 좋아해서. 석현 씨도 그럴까봐.”정호는 다시 고개를 돌려 석현의 반응을 살폈다. 푸스스 웃던 석현이 지긋이 눈을 맞춰왔다.“전석현이에요. 전석현.”‘흔한 이름은 아닌데, 왜 어디선가 들어본 것도 같은 기분이 들지…….’저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석현의 눈에 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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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13

제13화“정호 씨, 정호 씨.”석현이 낮고 다정한 목소리로 이름을 부르며 어깨를 부드럽게 흔들었다.“정호 씨, 그만 자고 일어나요.”정호가 석현의 집에 온 지 사흘째 되는 날 아침이었다. 그동안 정호가 일어날 때까지 늘 기다려주던 석현이 처음으로 정호를 깨웠다. 정호는 잘 떠지지 않는 눈을 반쯤 떠 석현을 보았다. 그는 눈썹 끝을 내리고 조금 곤란한 얼굴로 조심스레 정호를 깨우고 있었다.“잘 잤어요? 깨워서 미안해요.”‘괜찮아요’하고 얼른 대답하고 싶은데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는다.“크흠, 흠! ……네.”그 모습을 보던 석현이 웃음을 참으려다가 고개를 돌려 조용히 웃는다.“이제 일어나요. 오늘 정호씨 병원 가야 돼요.”석현의 차를 타고, 처음 여기에 왔을 때 정신을 차렸던 병원까지 다시 왔다. 병원에서 깨어나 석현을 처음 만났던 날이 멀고 먼 옛날처럼 느껴졌다. 고작 사흘 전인데. 그 날은 자세히 볼 겨를이 없어 몰랐는데 주택을 개조한 듯한 아주 아주 작은 병원이었다. 석현의 통역으로 어려움 없이 진찰이 끝나고 침대에 누워 링거를 맞는 동안 석현은 창문 옆 의자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흘끔 책 제목을 봤지만 한국어도 영어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작업실 모니터에서 본 알파벳의 나열도 아닌, 완전히 다른 문자로 된 언어였다. ‘아, 저 글자 어디선가 본적이 있는데……어느 나라 말이었더라?’ ‘그나저나 대체 외국어를 몇 개나 하는 거야. 이 사람은.’“그건 무슨 책이에요?”집중한 석현에게 정호의 질문이 들리지 않은 모양이었다. 여전히 석현의 시선은 책을 향해 있었다. 하지만 이전의 날이 선 표정이 아닌 어딘가 모르게 부드럽게 누그러진 표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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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14

제14화“석현 씨?”“석현 씨.”거듭 부르자 석현이 고개를 돌려 정호를 보았다. 침대쪽으로 의자를 당겨 앉으며,“정호 씨 자는 줄 알았는데, 안 잤어요?물 마실래요?”어떻게 사람이 이렇게 따뜻한 목소리로 말할 수 있지. 대체 뭘까, 이 따뜻한 느낌은. 정호는 석현이 나긋한 목소리로 소리를 내어 책을 읽어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아까 하려고 하던 질문을 마저 했다.“그건 무슨 책이에요?”석현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놀란 얼굴을 했다.“이 책이요? 내가 읽고 있는 거요?”“네, 그 책이요.”뭐가 재밌는지 싱글싱글 웃으며 석현이 대답했다.“그냥 소설이에요. 무슨 책인지 궁금했어요?”“아니 그냥, 그건 어느 나라 말인가 해서요.”“아아, 이거요? 이건 러시아어예요.문자가 예쁘게 생겼죠?”석현이 다시 후후, 하고 정호를 보며 웃었다.“왜 자꾸 웃어요.”약간 심통이 난 듯한 정호의 말에, 입술에 힘을 주어 웃음을 누르며 석현이 대답했다.“생각했던 것처럼 말이 없는 사람은 아니구나 싶어서.”“저 원래 친해지면 말 많이 하는 편이에요.”“어? 그럼 우리 친해진 거예요?”“그럼 아니에요?”석현의 장난스런 질문에 정호가 핀잔을 주듯 대답하자 석현은 다시 새어나오는 웃음을 누르며,“맞아요. 맞아요. 우리 이제 친해졌죠.”노래하듯 말끝을 길게 빼며 말한 석현은 웃는 얼굴로 작게 한숨을 내쉬며 두 손에 잠깐 얼굴을 묻었다가 다시 책으로 눈을 돌리고는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나직이 말했다.“……난 더 친해지고 싶은데.”정호는 제가 그의 말을 제대로 들은 건지 확신이 없었지만 어째서인지 ‘뭐라고요’ 하고 되물을 수도 없었다. 똑똑 떨어지는 링거액 방울만 괜히 쳐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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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15

제15화진료가 끝나고 돌아가는 길, 석현은 집을 지나쳐 한참 차를 몰더니 작은 건물 앞에 차를 세웠다.“같이 장 볼래요? 아님 차에서 기다릴래요?”정호는 흘끗 차창 밖을 보았다.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 사람들, 커다란 종이봉투를 들고 밖으로 나오는 사람들, 차 트렁크에 박스를 싣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간판의 글자는 여전히 읽을 수 없는 말이었지만 아마도 슈퍼인 듯했다. 붐빈다고 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한적하지도 않았다. 정호는 습관적으로 거울을 보았다. 모자도 마스크도 없이 메이크업도 하지 않은, 며칠 새 조금 야윈 거울 너머의 제 얼굴과 눈이 마주쳤다.“그…… 여기가 좀 멀어서, 자주는 못 나오거든요.”걱정스레 정호를 보던 석현이 느릿한 어조로 입을 뗐다.“그래서 오늘 살 거 되게 많은데…….”정호는 거울에 시선을 둔 채 석현의 말을 듣고 있었다.“정호 씨가 여기 차에 혼자 있으면,”제 이름이 나와 반사적으로 석현을 보니 제 쪽을 보고 있던 짙은 갈색 눈동자가 흔들렸다.“마음 편하게 장을 못 볼 것 같아요, 내가.”왜냐고 묻고 싶었지만 정호는 물음을 꾹, 삼켰다.“그러니까, 같이 가요. 정호 씨.”짙은 갈색 눈동자는 이제 흔들림 없이 정호를 보고 있었다. 뭐라 이유를 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왠지 이 사람이 옆에 있으면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정호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저기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간다, 간다, 간다. 흐읍, 정호는 차에서 내려 숨을 들이쉬며 주먹을 쥔 채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뒤에서 다가온 석현이 왼팔을 뻗어 정호의 어깨를 감싸 잡으며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여기엔 정호씨 아는 사람 정말 아무도 없을 테니까. 안심해도 돼요. 진짜. 걱정 말아요.”대체 이 사람은, 사람 마음까지 읽는 건가. 사람들을 무서워하는 것도 공황장애가 있는 것도 왠지 감추고 싶었는데. 정호는 몰래 쓴 일기장 속의 중요한 문장을 남에게 읽히고 만 기분이었다.밝지 않은 표정의 정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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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16

제16화약을 줄였기 때문인지 전처럼 하루 내내 졸리지는 않았다. 자고 일어나서 밥을 먹고, 약을 먹고 누워있다가 또 잠이 들곤 했던 지난 며칠 간과는 달리 정호는 깨어 있는 시간이 길어졌다. 시간이 더디게 갔다. 테이블에 앉은 석현은 늘 뭔가를 읽거나 쓰고 있었고, 정호는 집중한 석현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고 또 이렇게 소파에 멀뚱멀뚱 앉아있자니 좀이 쑤셨다.‘책이라도 읽을까…….’ 정호는 석현이 전에 책이 있다고 말해줬던 방에 가 보기로 했다. 조심스레 문을 열고 들어가 벽을 더듬어 불을 켰다. 제 시야에 펼쳐진 광경에 정호는 자기도 모르게 와아,하고 작게 탄성을 내뱉었다. 실로 엄청난 양의 책이었다. 하지만 얼핏 봐도 그 중 한국어로 된 책은 한 권도 없어 보였다. 정호는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나왔다. ‘어쩌라는 건지, 나 참. 다 자기 같은 줄 아나.’아무런 수확 없이 서재에서 나온 정호는 다시 소파에 앉아 석현을 관찰했다. 집중한 얼굴. 책장을 넘기는 가늘고 긴 손가락. 정호의 시선을 느꼈는지 석현이 고개를 들어 정호를 보았다. 갈색 눈동자가 말없이 왜요,라고 물어왔다.“근데, 석현 씨는 몇 개 국어를 하는 거예요?”이제는 석현에게 뭔가를 물어보는 데에 정호는 스스럼이 없었다. 제가 먼저 말을 걸면 금방 따뜻하게 색을 바꾸는 석현의 다정한 얼굴이 좋았다.“정호 씨, 막 이번엔 무슨 질문을 할까,미리 막 생각하고 준비하고, 그러는 건 아니죠?”석현이 장난스레 너스레를 떨었다.“아니, 보니깐, 영어랑 여기 말만 하는 건아닌 것 같아서요.”“여기 말……?”석현이 희고 긴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고 웃었다.“여기 말……하하하, 여긴 산골이라 사투리가 좀 심하긴 하지만, 일단은 스웨덴어예요. ““스웨덴어……”석현은 입술에 힘을 주어 웃음을 참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스웨덴어요,라고 말하는 석현의 말꼬리에 다정함이 묻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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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17

제17화덴마크어였구나. 정호는 드디어 알 수 없는 낯선 언어의 정체를 알게 되어 속이 시원했다.“근데 저번에 병원에선 러시아어로 된 책 읽고 있었잖아요.”“으음…… 러시아어도 어느 정도…….”말끝을 얼버무린 석현이 입술을 꾹 오므리며 약간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그러니깐, 석현 씨 대체 몇 개 국어 하는 거냐구요.”“그, 몇 개 국어, 막 이런 식으로 말하기가 또 좀 애매해서요.”“막, 막, 엄청 많이 하는 거예요?”“사실, 음, 언어는 다섯 개까지가 어렵지, 그다음부터는 다 비슷해요 결국.”“와아, 지금 석현 씨 되게 재수 없는 거 알아요?”정호가 장난스럽게 놀리는 투로 말하자, 석현은 일순 놀란 듯 눈을 크게 뜨고 정호를 보더니 이내 고개를 푹 숙이고 쿡쿡거리며 웃었다. 정호는 석현의 웃음이 멎기를 기다리지 않고 말을 이어나갔다.“그 말은, 그니깐 적어도 5개 국어 이상 한다는 말이잖아요 그거.”“아니 그러니까, 그 몇 개 국어, 이런 식으로 말하기가 좀 그렇다니까요?”“어어, 석현 씨 지금 겸손하게 말하려고 노력하는 거죠 지금?”정호는 이런 쓸데없는 실랑이 같은 대화가 즐거웠다. 이렇게 격 없이 누군가와 웃으며 얘기한 적이 있었던가. 한참을 웃던 석현이 웃음을 추스르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근데 거의 일상 회화 수준이고, 통역할 만큼 하는 건 또 몇 개 안 돼요. 뭐, 어떤 통역이냐에 따라 다르겠지만요.”“아 맞다. 그, 통역하는 사람들 볼 때마다 진짜 대단하다고 생각했어요.”거짓말이었다. 정호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통역하는 사람의 존재를 딱히 의식한 적이 없었다. 통역이 붙을 정도의 일을 할 때면 저도 남을 신경 쓸 겨를이 없기도 했고, 기본적으로 남에게 쉽게 관심을 가지는 성격도 아니었다. 사실은 병원에서 어려운 의료 용어를 망설임 없이 매끄럽게 통역하던 석현이 정말 대단해 보였다고, 그런 말을 하고 싶었지만 그 말을 하기엔 왠지 쑥스러워서, 정호는 ‘통역하는 사람들’이라고 에둘러 말했다.“그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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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18

제18화점심을 먹는 석현은 이상하게 정신이 다른 데에 가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여느 때 같았으면 뭔가 정호를 놀리거나, 걱정하거나, 아니면 잔소리를 하거나, 어떤 방향으로든 정호에게 관심을 쏟을 사람인데. 늘 진득하게 눈을 맞춰오던 갈색 눈동자가 자꾸 딴 데를 보는 것이 정호는 기분이 이상했다. 조금 망설이다 석현의 이름을 부르려는 순간, 석현이 잊고 있었던 것을 떠올리기라도 한 듯 파드득 고개를 돌리더니 입을 열었다.“아 맞다. 정호씨, 내가 말하는 걸 깜박했는데, 나 오늘은 중요한 통역이 있어서, 이따 세 시간 정도 방에서 아예 못 나올 거예요.” 왠지 다급한 말투였다.“혹시 무슨 일이 있더라도 오늘은 내가 나오기 전까지는 방에 들어오지 말고 기다려줘요. 정호씨 혼자서 괜찮겠어요?”또, 또 그 걱정스런 눈으로 저를 본다. 정호는 입을 꾹 다물고 괜찮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어, 그런데,“방에서…… 하는 거예요? ……통역을?”“네, 뭐, 말하자면 영상통화 같은 그런 방식이죠.”“아, 근데 석현 씨 머리가……뻗쳤는데.”정호의 말에 석현은 무심코 머리를 더듬어 만져보고는 소리를 내어 웃었다.“아하하, 괜찮아요, 그 사람들한테 내 얼굴이 보이는 게 아니니까. “‘아, 석현 씨는 목소리로만 하는 거구나’ 정호는 멋쩍어져 실없이 웃어보였다.이따가 한다는 통역 때문인지 식사를 마치고 테이블에 앉은 석현은 보통 때보다도 날을 세우고 뭔가를 집중해 읽어 내려갔다. 그러다가 부리나케 메모를 하거나 급하게 다른 뭔가를 찾아 읽거나 했다. 빼곡하게 덧쓴 글씨가 보이는 인쇄물들에서 왠지 모를 중압감이 느껴졌다. 문득 시계를 확인한 석현이 벌떡 일어나 착착 서류들을 챙기고는 소파에 앉아 음악을 듣는 정호에게 다가왔다.“정호 씨, 나, 다녀올게요.”그냥 저쪽 방에 가는 것뿐이면서, 뭘 이렇게 진지하게 인사를 하는 거지. 근데 그것보다, 별것도 아닌 다녀온다는 말인데, 아, 왜 이렇게, 간지러운 기분이 들지.정호는 몸을 일으켜 앉아 석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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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19

제19화석현이 없는 오후는 유난히 길게 느껴졌다. 정호는 다시 서재에 들어가 보았다. 다시 봐도 정말 터무니없는 양의 책이었다. 이게 갑자기 쏟아져 내리기라도 하면 여기서 꼼짝없이 죽겠구나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별달리 할 일도 없던 정호는 찬찬히 책들을 살펴보았다. 어떤 발음인지조차 상상이 안 되는 낯선 언어들의 향연 속에 간간이 눈에 띄는 영어 제목들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시간도 많은데 영어로 된 책이라도 읽어볼까.’ ‘모르는 건 석현 씨한테 물어보면서 읽으면 천천히나마 읽을 수 있지 않을까?’ 거기까지 생각이 닿은 정호는 눈을 부릅뜨고 필사적으로 영어로 된 책들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그중에 제일 쉽고 재미있어 보이는 걸 고르겠다는 일념으로. ‘기왕이면 아는 작품이 있었으면 좋겠는데….’“어어?”놀란 나머지 멋대로 당황스러운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구석에 뒤집힌채 꽂혀있던 책을 아무 생각 없이 꺼냈는데 너무나도 잘 읽어지는 제목이었기 때문이다.한국어로 된 책이었다.한국어를 보는 게 너무 오랜만이라 정호는 눈물이 날 것처럼 반가웠다.***석현이 통역을 끝내고 나올 즈음이면 배가 고플 것 같아 정호는 저녁 식사 준비를 시작했다. 오랜만에 하는 요리이기도 하고 제 집이 아닌지라 어디에 뭐가 있는지 몰라 생각보다 시간이 걸렸다. 달칵, 정호가 막 완성된 파스타를 그릇에 옮겨 담고 있을 때, 석현의 방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터덜터덜 거실로 나온 석현은 금방이라도 잠들 것 같은 얼굴이었다.“잘 끝났어요? 이거 다 됐으니까 같이 먹어요.”석현이 멍한 얼굴로 파스타를 바라보았다.“정호씨가…… 만든…… 거예요?”“네, 석현 씨 일하니까, 그리고 그, 저는 할 일이 없기도 하고. 하하.”괜히 멋쩍어진 정호는 석현을 향해 웃어 보였다. 석현은 무슨 엄청난 선물이라도 받은 사람처럼 두 손으로 입을 가리고 한참을 말이 없었다.“자자, 이제 샐러드만 만들면 되니까, 그건 진짜 금방 하니까, 잠깐만 여기 앉아서 기다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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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20

제20화정호는 서둘러 야채들을 썰고 드레싱을 만들었다.“석현 씨, 이제 다 됐…….”십 분도 채 지나지 않았는데 석현은 소파에 앉은 자세 그대로 팔걸이에 비스듬히 기대어 잠들어 있었다. 정호는 발소리를 죽여 가며 얼른 두꺼운 담요를 들고 와 덮어주었다. 담요를 덮어줘도 석현은 미동도 없이 죽은 듯이 자고 있었다. 색색 작게 들리는 숨소리와 규칙적으로 오르내리는 어깻죽지. 정호는 잠든 석현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깎아서 만들기라도 한 듯 아름다운 얼굴이었다. 이렇게 마음 놓고 오랫동안 석현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석현이 깨어있을 때는 석현의 눈이 저를 향하면 어째서인지 오랫동안 마주 바라볼 수가 없었다. 석현이 불편한가 하면 그것도 아니고, 이제 스스럼없이 장난도 치고 농담도 할 수 있을 만큼 편해졌는데도, 이따금 제가 어째야 좋을지 모르겠는 순간들이 있었다. 연기를 하는 것도 아니고, 일로 관련된 사람도 아닌, 그냥 사람 대 사람으로 누군가를 대하는 게 너무 오랜만이라서 제가 이상한 건지, 아니면…….정호는 생각하는 것을 그만두었다. 조금 혼란스러워졌기 때문이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 정호는 한 번 심호흡을 하고는, 주섬주섬 조용히 테이블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혹시라도 석현이 깰까 봐 작은 소리에도 조심스러웠다. 랩을 씌운 접시들을 한쪽으로 가지런히 밀어두고 소파에서 잠든 석현이 가장 잘 보이는 자리에 앉았다. 늘 석현이 앉아 뭔가를 하는 자리였다. ‘이 자리에서 소파가 제일 잘 보이는구나.’‘그래서 석현 씨도 늘 여기에 앉는 건가.’‘……내가 잘 보이기 때문에?’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정호는 다시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풀릴 듯 말 듯한 엉킨 실타래처럼 답을 알 것 같으면서도 답을 알 수 없는 복잡함이었다.정호는 이번에도 역시 생각하기를 멈추고, 우선 책을 펼쳤다. 오후에 서재에서 발견한 한국어로 된 소설이었다.***한참을 미동도 없이 죽은 듯이 자던 석현이 부스스 눈을 떴다. 잘 떠지지 않는 눈으로 정호 쪽을 확인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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