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딩 크레딧에서 당신의 이름을 찾아의 모든 챕터: 챕터 51 - 챕터 60

82 챕터

Chapter51

제51화석현을 기다리는 것밖에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고, 줄곧 하고 싶었던 말을 뱉고 나자 걷잡을 수 없이 눈물이 흘러나왔다. 석현과 연락조차 닿지 않던 지난 2년 동안,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도 저는 괜찮지 않았다는 것을, 밀려오는 파도처럼 갑자기 깨달았다. 정호는 예상치 못한 습격과도 같이 북받쳐 오르는 감정에 무력하게 저를 내맡긴 채 소리 내어 울었다.정호를 껴안은 채 손을 움직여 등을 토닥이며 석현이 달래듯이 말했다.“그래서 정호 씨 그만 기다리라고, 내가 올 수 있는 제일 가까운 곳으로 온 거예요.”울지 마요, 정호 씨, 울지 마요. 정호의 어깨에 볼을 부비며 말하는 석현의 목소리가 더할 나위 없이 따뜻하고 다정했다.***“정호 씨 다시 호텔까지 데려다 줄까요? 아니면 여기서 눈 좀 붙이고 아침에 갈래요?”다 마신 커피잔을 정리하며 석현이 물었다.“아침에 가도 돼요. 내일 스케줄 오후부터니까.”그래요, 하는 석현의 목소리가 나긋했다. 정호는 처음 만났던 때가 떠올라 웃음이 났다. 아아, 그 집 진짜 크고 추웠지. 그래도 뭔가 겨울 냄새 같은 게 느껴져서 좋았는데. 해도 되게 늦게 뜨고 엄청 빨리 지고. 석현 씨가 스탠드만 켜놓고 작업하면 나는 소파에 앉아서 음악 들으면서 책 보고, 진짜 좋았는데 그때.추억에 잠겨있는 정호에게 다가온 석현이 뭔가 할 말이 있는 듯 뒷머리를 긁적이며 눈을 굴렸다.“근데 이 집에 그, 침대가 하나밖에 없어서...”침대가 하나뿐이라는 석현의 말에 아무렇지 않은 척 ‘그게 뭐 어때서요’라고 하긴 했지만 이렇게 나란히 누워 잠을 청하는 건 처음이라 정호는 기분이 이상했다. 괜히 석현 쪽을 보기가 부끄러워 똑바로 누워 천장만 바라보았다. 숨소리가 들릴만큼 가까운 거리에, 석현이 누워있다니. 어제까지만 해도 소식도 알 수 없던 기억 속의 사람이었는데. 아니 이게 대체 무슨 급전개란 말인가. 무슨 프랑스 영화도 아니고.“정호 씨.”석현이 나직이 이름을 불러왔다.“응, 왜요?”이름을 부르고
더 보기

Chapter52

제52화진짜, 죽을 만큼 보고 싶었으니까.정호 쪽으로 돌아누운 석현이 거의 들리지 않을 만큼 나직이 울리는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했다. 고개를 돌리니 어둠에 익숙해진 시야로 석현의 짙은 갈색 눈동자가 보였다. 이쪽을 보는 석현이 문득 그 언젠가처럼 금방이라도 사라져 버릴 것처럼 희미하게 느껴져 정호는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석현을 끌어안았다.따뜻한 온기와 비누 냄새와 석현의 체향이 느껴졌다. 저를 물끄러미 보던 석현의 길고 가느다란 손가락이 정호의 얼굴을 쓰다듬는가 싶더니 얼굴을 가까이 대고 이마에 입술을 맞춰왔다. 그대로 석현은 말없이 천천히, 정호의 눈가에, 콧등에, 볼에 입술을 갖다 댔다. 말캉하고 따뜻한 입술이 제게 다가올 때마다 심장이 내려앉을 것처럼 크게 뛰었다. 정호의 턱끝에 입술을 찍어낸 석현이 잠시 고개를 떼고 정호를 지긋이 바라보았다. 정호는 심장이 터질 것 같았지만 눈을 피하지 않고 석현을 마주 바라보았다.자연스레 입술과 입술이 부딪히고 입안으로 들어온 석현의 따뜻한 혀가 제 혀를 쓰다듬듯 움직여오자 정호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약간 거칠어진 석현의 숨결에서는 짙은 체향이 났다. 정호는 껴안은 팔로 석현의 넓고 단단한 등을 쓸어내리듯 어루만졌다. 석현이 낮은 숨을 내뱉으며 껴안은 팔에 힘을 주어 꽉 안아 왔다.입을 맞추는 동안 석현은 쉴 새 없이 정호를 어루만지고 쓰다듬었다. 석현의 손이 닿는 곳마다 간지럽고 황홀해 정호는 낮은 신음을 삼켰다.천천히 입술을 뗀 석현이 숨을 고르며 말했다.“아아, 미안해요. 정호 씨 너무 오랜만에 봐서, 내가...”“...안 미안해도 되는데.”그 말에 석현이 조용히 웃으며 다시 정호를 끌어당겨 품에 안았다. 아까보다 진해진 듯한 체향이 코끝으로 밀려들어와 정호는 아득한 기분이 들었다. 끌어안은 팔에 힘을 주며 석현이 나직이 말했다.“안돼. 정호 씨 내일 무대인사 있잖아요.”석현이 정호의 머리를 쓰다듬어 안으며 정수리에 입을 맞추었다. “오늘은 우리 이렇게 꼭 껴안고 자요.” 나
더 보기

Chapter53

제53화마지막 공항 가는 길을 떠올리던 정호는 일부러 석현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지금 제 눈앞에 있는 석현을. 그때와는 다른, 하지만 여전히 같은, 석현이다.“자꾸 그렇게 보면 나 운전 못해요.”운전하느라 시선은 정면을 향한 채로 석현이 푸스스 웃으며 말했다. 정호는 손을 뻗어 이제 짙은 갈색이 된 석현의 머리칼을 만지작거렸다. 샴푸냄새가 희미하게 풍겨왔다.“어어? 나 운전 못 한다니까요.”석현이 짐짓 으름장을 놓는 듯 말꼬리를 늘이며 말했다. 정호는 석현의 머리에서 손을 떼고 자세를 고쳐 앉았다.“석현 씨.”“네, 말씀하시죠, 소배우님.”장난스레 대답하는 석현의 말에 입가를 비집고 웃음이 새어 나왔다. ‘나 이제 좀 진지한 질문할 건데, 이 사람이 진짜.’“우리 이제 또 언제 만나요?”어느새 차는 호텔 근처를 달리고 있었다. 후문 앞에 차를 세운 석현이 정호 쪽으로 몸을 돌려 정호를 와락 껴안았다. 그리고 노래하는 듯한 목소리로 나직이 말했다.“우리 둘 다 안 바쁠 때.어딘가 중간 지점에서 또 만나요.”그 겨울, 공항 가는 길에 제가 석현에게 했던 말이었다.“우리 이제 진짜 영영 못 보는 거 아니니까.”그 말을 하던 제 참담한 말투와는 정반대의 해사한 석현의 어조가 정호는 너무, 너무 좋았다.자리에 앉자 곧 낭랑한 목소리로 신칸센 출발을 알리는 안내방송이 들려왔다. 창밖으로 보이는 건물들이 빨리 재생한 영상처럼 스쳐 지나가기 시작했다.‘석현 씨랑은 이제 또 언제 만날 수 있는 건지.’도쿄를 뒤로 하고 오사카로 떠나려니 겨우 다시 만난 석현에게서 멀어지는 기분이 들어 괜히 불안했다. 정호는 아직도 석현과의 재회가 실감이 나지 않았다. 정말로 그저 꿈을 꾼 것만 같았다.제가 일본에 올 만한 기회도 좀처럼 없는 데다가, 영화배우라는 것이 생각보다 시간을 자유롭게 쓸 수 있는 직업도 아니라 이제 언제 다시 만날 수 있을지는 정말 기약이 없었다. 한국 가기 전에 잠깐이라도 좋으니까 한 번이라도 더 만날 수 있었으면 좋겠는데
더 보기

Chapter54

제54화오사카에 도착해 취재진에게 둘러싸여 인터뷰를 하고, 무대인사를 하는 동안에도 정신은 계속 딴 데에 가 있었다. 정호는 틈만 나면 괜히 자꾸 핸드폰을 확인했다. 석현은 연락이 없었다. ‘바쁜 건가...’시간이 흘러 모든 일정이 끝나고 호텔에 들어왔을 때는 꽤 늦은 시각이었다. 여전히 석현에게서는 연락이 없었다.‘이 시간이 되도록 연락 한 통이 없네.’ 저는 석현을 어떻게든 한 번이라도 더 만나고 싶어서 이렇게 머리를 굴리고 있는데 아무런 연락도 없는 석현에게 섭섭한 마음이 들었다. 2년 만에 만나 놓고서는 짐짓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전석현입니다, 하며 악수를 건네던 석현을 떠올리면 어딘가 속이 꼬여오는 것처럼 심통이 났다. ‘어디서 그런 여유가 나오는 거야 대체.’ 정호는 모든 신경이 석현에게 쏠려 있는 자신이 조금 초라하게 느껴지기까지 했다.외투도 벗지 않은 채로 침대에 털썩 드러누워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았다.‘아니야, 오늘 엄청 바쁠 수도 있지. 석현 씨 바쁜 사람이니까.’ 무작정 도쿄까지 간다고 해도 괜히 바쁜 석현 씨 곤란하게 하는 거 아닐까. 정호는 문득 날 선 얼굴로 집중해서 일하던 그 겨울의 석현을 떠올렸다. 긴 통역이 끝나고 터덜터덜 방에서 걸어 나와 쓰러지듯 잠들었던 모습도.‘그나저나 내일 아침 비행기를 취소할지 어쩔지 얼른 매니저한테 말해줘야 되는데.’정호는 머리가 지끈거렸다. 제 일정을 제가 직접 관리하지 않은지 너무 오래되었기 때문에 어디서부터 어떻게 하면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정호는 벌떡 몸을 일으켜 앉았다.‘아아, 석현 씨 보고 싶다.’그래, 혼자 끙끙댈 게 아니라 우선 내일 석현 씨 뭐하는지 일정은 어떻게 되는지 연락이나 해보자.정호는 메시지를 보낼까 잠시 망설이다가 그냥 전화를 걸었다. 통화버튼을 누르면서, 그 겨울 한국에 돌아와 석현에게 받은 번호로 전화를 걸었을 때 없는 번호라는 메시지가 흘러나왔던 순간이 떠올라 괜히 조바심이 났다. 그런 정호의 불안한 마음은 삼초도 채 되지 않아 사
더 보기

Chapter55

제55화나도 오사카니깐, 하는 석현의 말에 정호는 제가 또 뭘 잘못 들었나 생각했다. ‘도쿄랑 오사카가 그렇게 가깝던가? 아닌데, 나 신칸센, 그거 엄청 빠른 열차잖아, 그거 타고 두 시간 반이나 왔는데? 석현 씨는 도쿄 근처에 사는 게 아니었나? 내가 뭘 놓친 거지?’정호는 뭐가 뭔지 모르는 상태로 일단 매니저에게 전화를 걸어 비행기 취소를 부탁하고 짐을 챙겼다. 부르르, 핸드폰이 울렸다.[이제 내 차 알죠? 얼른 내려와요]여전히 반신반의하는 마음으로 지하 주차장에 내려가니 정말로 석현의 차가 보였다.“아니 여기까지 어떻게 왔어요?”“운전해서 왔죠.”“내일 한국 안 가도 돼요 나.”“내일 아침이면 정호 씨 한국 가니까... 뭐?”정호와 동시에 말을 하던 석현이 고개를 홱 돌려 정호를 보았다. 어안이 벙벙한 얼굴이었다. 입을 벌린 채 연거푸 눈을 깜박이는 석현을 보고 정호는 웃음이 나왔다.“나, 하루 더 있다가 모레 아침에 가도 돼요.”“그래서 내일 아침에 도쿄 가서 연락할까 하다가, 혹시 석현 씨가 내일 바쁠까봐 물어보고 가려고 연락했는데...”열심히 설명하는 정호의 말을 듣는지 마는지 석현은 운전대에 얼굴을 묻은 채 발을 구르며,“아아아아, 집에 있을 걸! 집에서 일하면서 기다릴걸!”다시 고개를 번쩍 들고 정호의 어깨를 붙잡더니,“와...나 다섯 시간 넘게 운전해서 온 거 알아요?”고개를 뒤로 젖히며 ‘아아아’ 하고 탄식을 내뱉었다.석현은 정말로 억울해 보였다.“나는 진짜 오늘 아니면 정호 씨 못 만나는 줄 알고!”석현 씨 혼자만 여유 넘친다고 생각했던 거 취소,라고 정호는 속으로 생각하며 입가를 비집고 나오려는 웃음을 꾹 참았다.“아니, 연락이라도 하고 오지 그랬어요.”“정호 씨 일하는데 집중 안 될까 봐요.”“촬영하는 것도 아니고 그냥 무대인산데요, 뭐.”“그래도요. 그리고,”석현은 잠시 뜸을 들인 후,“어쩌면 만날 상황이 안 될지도 모르는데,내가 연락하면 정호 씨 신경 쓸까 봐요.”아무렇지도 않게
더 보기

Chapter56

제56화정호가 눈을 뜨자 운전에 집중한 석현의 옆얼굴이 보였다. 어느새 차창 밖이 밝아져 오고 있었다. 제 몸에 덮인 석현의 외투가 따뜻했다.“일어났어요?”아, 저 대사. 나도 좀 말해보고 싶다. 난 또 언제 잠든 거야. 분명 석현 씨 자는 거 보고 있었는데.“석현 씨 안 피곤해요?”“응, 좀 잤더니 괜찮아요.”고속도로에서 벗어나면서 가벼운 말투로 ‘우리 커피 마시러 갈까요’라고 하더니 석현은 점점 좁아지는 산길로 이리저리 차를 몰아 깜짝 놀랄 만큼 사람이 없는 곳에 차를 세웠다.“정호 씨 여기에 버리려고 하는 거 아니니까 걱정 말구요.”어리둥절한 얼굴로 주위를 이리저리 둘러보는 정호를 보며 석현이 짓궂게 웃으며 말했다.“내려요 정호 씨, 조금 걸어야 돼요.”‘여기서부터는 길이 너무 좁아서’라고 덧붙이며 차에서 내린 석현이 길게 기지개를 켰다. 아무도 없는 산길을 나란히 걸었다. 이른 봄의 산 공기가 차가웠다. 연한 초록빛을 띤 새로 돋은 이파리들이 아침 햇살을 받아 반짝이며 빛을 튕겨냈다. 풀과 흙냄새가 났다.“손, 잡아도 돼요?”불쑥, 들려온 말에 정호는 고개를 돌려 석현을 보았다. 막상 질문을 던진 석현은 정호에게 시선을 주지 않은 채 앞만 보고 천천히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발갛게 상기된 석현의 귀가 보여 정호도 덩달아 괜히 부끄러워졌다.“뭘 그런 걸 일일이 물어봐요.”정호는 붉어져오는 얼굴을 느끼며 손을 뻗어 석현의 희고 긴 손을 그러쥐었다. 석현이 곧 다시 정호의 손을 부드럽게 고쳐 잡으며 천천히 깍지를 끼어왔다. 가슴이 간질간질해 석현쪽을 볼 수가 없었다. 한참을 말없이 걷던 석현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우리 이렇게 손잡고 걷는 건 처음이죠.”정호는 가슴이 빠르게 뛰어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이 사람이랑 몇 번을 껴안고 진한 키스도 했는데 고작 손 하나 잡는 걸로 왜 이렇게 떨리는 거야.’ 누군가와 손을 잡고 나란히 걷는 장면을 여러 번 연기해 봤는데도 불구하고 전혀 다른 느낌이 생경했다.
더 보기

Chapter57

제57화어느새 차창 밖의 풍경이 어둑어둑 색깔을 바꾸고 있었다. 석현은 작정이라도 한 사람처럼 하루 종일 여기저기로 정호를 안내했다. 하나같이 인적이 드물고 조용한 곳이었다. 정호는 제가 아는 석현의 집 두 채를 떠올리고는 참 취향도 한결같다 생각하며 속으로 몰래 웃음 지었다. 한편으로는 저를 향한 석현의 자연스러운 배려가 느껴져 괜히 가슴 한 구석이 간질거리듯 기분이 좋았다.오랜만에 하루 종일 함께 있으면서 이런저런 얘기를 많이 했다. 주로 그 겨울에 대한 이야기였다. 정호는 제가 몰랐던 것들을 여러 가지 알게 되었다. 예를 들면 제가 구조되어 깨어나지 않았던 일주일 동안 혹시라도 그대로 잠들어 깨어나지 않을까 봐 석현이 엄청나게 마음을 졸이며 매일같이 의사를 닦달했다는 것이라든지 말이다. 거의 날마다 정호의 상태를 확인하러 병원에 들렀던 석현을, 저는 잠만 자느라 몰랐구나 싶어서 고마움과 미안함과 애틋함이 뒤섞인 복잡한 기분이 들었다.문득 생각해 보니 정호는 그 겨울의 석현과 지금의 석현이 거의 다른 사람처럼 느껴졌다. 그때의 석현은, 뭐라고 해야 할까,“뭔가 그, 석현 씨가 분명히 여기 있는데,여기 없는 것 같은, 그런 느낌이 있었어요.잘 설명은 못 하겠는데.”“홀로그램?”“아이, 아니이, 그런 거 말구요.”제 나름대로 진지하게 이야기하고 있는데 농담으로 받는 석현에게 정호는 가볍게 눈을 흘겼다. 자기 얘기하니까 쑥스러워서 그러는 건 알겠지만, 사람이 진지하게 이야기를 하는데 지금 뭐라는 거야, 나 참. 말을 말아야지.날이 어두워지고 밤이 가까워 올수록 남겨진 시간이 줄어든다는 생각에 잠시도 쉬지 않고 움직이는 시곗바늘이 야속하게 느껴졌다.기어코 밤은 찾아와 정호는 이틀 만에 다시 석현의 침대에 누웠다. 커튼 사이로 밤하늘이 얼핏 보였다. 석현의 침대에서는 어렴풋이 석현의 비누 냄새와 체향이 나는 것 같았다. 방문 너머로 샤워를 마친 석현이 드라이기로 머리를 말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내 드라이기를 정리하는 소리가
더 보기

Chapter58

제58화정호가 잠든 줄 알았는지 석현은 발소리를 죽여 가만히 침대 위에 누웠다. 소리 나지 않게 천천히 이불을 끌어 덮는 석현의 조심스러운 움직임이 느껴졌다. 그러고는 한참 동안 더 이상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새 잠이 들었나 싶어 정호는 조심스럽게 눈을 떠 석현을 보았다. 석현은 이쪽을 향해 누워 눈을 뜨고 물끄러미 정호를 보고 있었다. 어둠에 익숙해진 시야에 평소보다도 짙은 갈색 눈동자가 보였다.“깼어요?”속삭이는 듯한 목소리였다.“...안 잤어요, 나.”‘아, 뭐예요’라며 석현이 웃는 바람에 정호도 웃음이 터졌다. “아니, 내가 자는 척을 하려고 한 게 아니고 그냥 눈만 감고 있었던 건데 마음대로 잔다고 생각한 건 석현 씨잖아요.”투덜거리는 정호의 말에 웃던 석현이 갑자기 가까이 오더니 두 팔로 꽉 안아오는 바람에 정호는 일순 숨이 턱 막히는 것 같았다.“정호 씨, 나. 여기 있어요.”나직한 목소리에 정호의 심장이 빨리 뛰었다.그 겨울, 석현이 제 옆에 있으면서도 없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는 정호의 말에 마음이 쓰인 모양이다.“나 이렇게 지금 여기 있다구요.”석현은 더 힘을 주어 세게 정호를 껴안았다. 샴푸 냄새와 비누 냄새에 섞인 석현의 체향이 코를 간질여와 기분이 이상해졌다. 정호는 지금 제가 숨을 쉬기 어려운 게 석현이 저를 너무 꼭 안아와서인지 심장이 지나치게 빨리 뛰어서인지 알 수가 없었다.정호는 석현의 팔을 가만히 풀어내고 몸을 조금 떼어낸 채 얼굴을 마주 보았다. 이제는 석현을 봐도 금방이라도 어디론가 사라져 버릴 것 같은 아스라한 분위기는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다. 정호는 말없이 지난밤 석현이 제게 했던 것처럼 이마에, 눈에, 코에, 볼에 천천히 입술을 가져갔다. 마지막으로 턱에 입을 맞추려고 얼굴을 가까이 댔을 때, 아이처럼 잠자코 있던 석현이 정호의 볼을 감싸 쥐고 부드럽게 입술을 맞춰왔다.
더 보기

Chapter59

제59화뜨거우면서도 달콤한 키스였다. 벌어진 입술 사이로 따뜻한 혀와 혀가 몇 번이고 얽혀 들어 서로를 감았다.석현의 가늘고 긴 손끝이 정호의 귀를, 목을, 머리를, 등언저리를 쉴 새 없이 쓰다듬듯 매만져왔다. 정호는 석현의 손이 닿는 곳마다 홧홧하게 달아오르는 느낌이 들어 몸을 이리저리 틀었다. 석현의 어깨에 두른 제 손끝으로 자잘한 근육들의 움직임이 느껴졌다. 정호의 손이 움직일 때마다 석현이 낮은 신음을 삼켰다.잠시 입술을 떼고 작게 한숨을 내쉰 석현이 말했다.“아아, 안 되겠다... 오늘은 못 참겠어요, 나.”갈색 눈동자가 정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정호는 빙긋이 웃었다.“참지 말아요, 그럼.”나직한 대답과 동시에 다시 석현의 입술에 제 입술을 포개었다. 석현의 숨에서 진한 체향이 느껴졌다.“정호 씨, 그...내가 이러는 거 싫으면 언제든지 말해요.”‘내가 그렇게 당신을 좋아한다고 몇 번을 말해도 이 사람은 정말.’석현이 정호의 몸 여기저기에 도장이라도 찍어두려는 듯 부드럽게 입술을 찍어나갔다. 목덜미에, 쇄골에, 가슴에, 옆구리에, 배 언저리에. 간지럽고 기분이 이상해 정호는 정신이 아득해지고 머리가 빙빙 도는 것만 같았다.석현은 천천히 공들여 정호의 몸 이곳저곳을 어루만졌다. 정호는 제 몸이 악기가 되어 석현의 입술과 손끝으로 연주되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점점 머릿속이 하얘지는 것 같았다. 못 참겠다던 말과는 달리 석현의 손길은 진득하고 부드럽게, 서두르는 법 없이 정호를 매만지며 자극했다.속옷을 벗겨 하얗고 긴 손으로 제 아래를 감싸 쥐기 전에도, 길고 긴 전희 끝에 제 안으로 밀고 들어오기 전에도 몇 번이나 다정하고 나직한 목소리로 괜찮은지 물어왔다. 무서우면 말해요 정호 씨, 싫으면 말해요 정호 씨, 아프면 참지 말고 얘기해요. 숨을 고르며 묻는 석현의 낮게 울리는 목소리가 더할 나위 없이 관능적이었다.석현은 천천히 부드럽게 정호를 안으며 몇 번이나 좋아한다고 말해주었다. 끊임없이 제 이마에,
더 보기

Chapter 60

제60화간밤에 저도 모르는 사이에 이곳저곳에 힘을 줬던 건지 일어나 보니 근육통처럼 몸 여기저기가 뻐근했다. 아니나 다를까 석현은 먼저 일어난 모양인지 방문 밖 부엌 쪽에서 도마와 칼이 탁탁탁탁, 리드미컬하게 부딪히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분명 옷을 다 벗은 채로 잠들어 버렸는데 속옷도 바지도 티셔츠도 멀쩡하게 입고 있다. ‘석현 씨가 입혀줬구나...’ 정호는 문득 어젯밤의 일이 떠올라 가슴이 터질 것처럼 꽉 차오르는 기분이 들었다. 이렇게 행복해도 되는 건가.방문을 열자 요리를 하는 석현의 뒷모습이 보였다.“일어났어요?”나긋한 목소리. 아아, 이번에도 어김없이 저 대사를 놓치고 말았다.“앉아서 잠깐만 기다려요, 금방 다 되니깐.” 서두르는 석현의 뒷모습을 보면서 정호는 문득 그 겨울의 아침 풍경이 떠올랐다. 여기보다 훨씬 넓고 천장이 높아 휑하게까지 느껴지던 커다랗고 추운 집에서, 늦은 해가 뜰 때쯤 느지막이 잠에서 깨어 담요를 두르고 슬리퍼를 끌며 거실로 나가면 빵과 수프 냄새가 나던 날들. 창문을 비집고 들어오던 햇살을 등지고 선 석현의 웃는 얼굴과 분주한 손, 반짝이는 머리칼. 내내 함께 있었는데.그때는 몰랐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너무나도 찬란한 나날들이라는 걸. 언제 다시 그런 날이 올까. 눈을 뜨면 아무렇지 않게 서로를 볼 수 있는 그런 날이.“정호 씨?”석현의 목소리에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손 쓸 사이도 없이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한 손에 국자를 든 채로 서둘러 다가온 석현이 정호를 품에 안았다. 왜 우는지도 묻지 않고, 울지 말라는 말도 없이, 한참을 그렇게 있었다.
더 보기
이전
1
...
456789
앱에서 읽으려면 QR 코드를 스캔하세요.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