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딩 크레딧에서 당신의 이름을 찾아의 모든 챕터: 챕터 41 - 챕터 50

82 챕터

Chapter41

제41화혹시 몰라 병원에서 받아둔 공황장애 약을 떨리는 손으로 정호의 입안에 밀어 넣던 날, 석현은 그날을 떠올렸다.“석현 씨도 공황장애 있어요?”한 치의 의심이라고는 없이 저를 보는 맑은 눈에 석현은 끝없이 절망했다. ‘내가 진짜 이 사람을 속이고 있구나. 기만하고 있구나. 이게 어떻게 정호 씨 좋자고 하는 일일 수가 있어. 왜 그렇게 좋은 사람인 거야 당신은.’‘소정호 씨, 당신은 아직도 내 진심을 믿어주고 있을까.’ 석현은 확신이 없었다. 역시 그렇게 두서없이 편지를 쓰는 게 아니었다.급하게 편지를 써 내려가며 괴롭고 미안한 마음이 앞서 편지를 끝맺을 쯤에는 점점 자신이 없어졌다. ‘이 거짓말을 알고도 정호 씨는 계속 나를 좋아해줄까.’ 경멸하는 눈빛으로 저를 보는 정호를 상상하면 칼로 베는 듯 가슴께가 아파왔다. 정호를 다시 만날 희망이 요원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어떻게든 지금 말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그때는 그렇게 생각했다. 진실을 고하고 마음을 전하고 제대로 안녕을 말하자고. 그래야 그 언젠가 ‘다음'이라는 것이 있을 수 있다고.좀 더 말을 고르고 제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있었더라면, 제 마음을 사무치게 깨달을 여유가 있었더라면.“석현 씨가 한국 오기 힘든 거면,한국 아닌 데서 만나면 되는 거니까.우리 영영 못 보는 거 아니니까.”나직이 말을 잇던 정호의 얼굴이 떠올랐다.‘아아, 제길. 너무 많이 울었다, 꼴사납게.’좋아한다고 몇 번이나 힘을 실어 말해주던 정호에게 지푸라기를 붙잡는 심정으로 제 전화번호를 건넸다. 한국 쪽에 번호가 알려져서 이제 금방 바꾸지 않으면 안되는 시한부 전화번호를.‘편지는 다시는 못 볼 사람처럼 끝맺은 주제에, 결국 전화번호를 건네주고 속절없이 전화를 기다리다니, 참 멋도 없다 전석현.’석현은 한숨과 함께 하얀 연기를 내뱉었다.결국 이렇게 될 거라는 걸 석현은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저는 한국에서 망명하다시피 여기에 온 사람이고 정호는 한국의 이름을 짊어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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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42

제42화정호의 보호자를 자처하며 회사 측에 제 연락처를 넘긴 이후로 정호와 함께 지내는 열흘 남짓한 시간 동안에 한국에서는 빗발치듯 전화가 걸려왔었다. 석현은 잠자코 전화벨 소리를 무음으로 설정해 두고 정호의 소속사에서 걸려오는 전화만을 받았다. 전화가 올 때마다 전화기는 벨소리 대신 램프를 깜박였다. 정호가 떠나고 혼자 돌아온 방에 쉴 새 없이 깜박이는 그 전화 램프가, 그제야 석현은 무섭게 느껴졌다. 꿈에서 깬 것처럼 제가 지금 어디서 뭘 하고 있는지를 갑자기 깨달은 기분이었다.석현은 정호가 한국에 도착하는 시간을 계산해, 나름대로 각오를 다잡고 몇 시간 정도, 한국 번호로 걸려오는 모든 전화를 다 받았다. 하지만 그중에 정호는 없었다.마지막으로 제게 남은 용기를 쥐어짜 정호에게 받은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바짝 긴장했던 마음이 무색하게도 없는 번호라는 안내 메시지가 들려올 뿐이었다.마지막으로 붙잡았던 희망의 실오라기가 툭, 끊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하늘이 무너진다면 이런 기분일까. 아니, 하늘이 무너진다고 해도, 그래도 이것보단 나을 것이다.‘안돼. 더 이상은.나는 그렇게 강한 사람이 아니라고.’떨리는 손으로 수화기를 들고 번호 변경 신청을 하며 석현은 입술을 깨물었다. 제 사랑에 제가 직접 사망선고를 고하는 기분이었다. 참담했다. 당장 한국에 쫓아갈 수 없는 제 처지도, 그저 그런 보통 사람이 아닌 정호의 위치도 원망스러웠다.석현은 괴로움을 느낄 새가 없도록 제게 들어오는 작업 의뢰를 닥치는 대로 수락했다. 자는 시간 이외에는 악착같이 일했다. 무언가를 생각할 여유가 생기는 것이 괴로웠다. 늘 그래왔듯 일에 파묻혀 있으면 시간은 잘 갔다. 석현은 스스로를 깎아내듯 자학적으로 일했다. 그렇게 시간이 뭉텅 잘려나가듯 어느새 일 년이 지났다. 일 년이 지나면 괜찮을 거라고 일 년만 버텨보자고 생각하며 무언가에 실려가듯 하루하루를 보냈지만, 그렇게나 기다리던 아무렇지 않은 날은 결코 오지 않았다. 한국을 떠나고부터, 아니 한국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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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43

제43화“그 형 연락처 좀 가르쳐줄 수 있어?찾는 사람 많아서 이쪽은 지금 난리 났어.사라진 전석현 소식이 너무 오랜만이라.”촬영 현장에서 오랜만에 만난 민기가 정호를 보고 반갑게 말을 걸어오는가 싶더니 대뜸 그 이름을 꺼냈다. 전석현, 이름 세 글자가 가슴을 때리는 것처럼 아팠다.“천하의 소배우님한테 함부로 막 물어볼 수도 없으니까 다들 나한테 난리야, 좀 물어보라고.”‘나도 연락처 좀 알았으면 좋겠다. 지금 제일 동네방네 물어보고 수소문하고 싶은 사람은 바로 나라고.’ 정호는 버럭 소리라도 지르고 싶은 것을 꾹 참고 묵묵히 민기의 말만 들었다.“전석현 그 형, 연락처 유출되고도 다른 전화는 칼같이 무시하고 너네 회사에서 거는 전화만 딱딱 받았다던데 이젠 전화번호를 아예 바꿔버렸더라고.”민기는 예전과 다름없이 시키지도 않은 말을 곧잘 늘어놓았다. 민기는 정호가 막 아역티를 벗고 해외 영화제에 나가기 시작했을 무렵부터 회사 해외팀에서 일하면서 알게 된 동갑내기 직원이라 아직도 정호를 스스럼없이 친구처럼 대하는 구석이 있었다. 그가 회사를 나가 독립하고는 오랫동안 얼굴을 보지 못했는데, 오늘 같이 촬영하는 외국인 배우의 통역으로 온 모양이다.“그런데 정호 너도 참, 잘도 석현형이랑 같이 있었네. 그 형 완전 예민하잖아. 다른 사람한테 벽 치는 거 장난 아니고. 야 막 고문 같았겠다. 그치?”‘아닌데.’‘석현 씨 그런 사람 아닌데.’정호는 쉽게 입을 열지 못하고 속으로만 중얼거렸다.“너 엄청 불편했겠다 진짜.얼른 한국 오고 싶었지?”‘아닌데.’‘오기 싫었는데.’죽을 만큼 오기 싫었다, 정말.“석현 씨가... 형이야?”정호는 놀랄 만큼 석현에 대해 제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걸 깨달았다. 처음 만나는 사람과 으레 주고받는 나이를 묻는 그 흔한 질문들도 하지 않았다. ‘석현 씨가 몇 살인지조차 모르는구나, 나는.’ 석현 씨는 내가 자기보다 어리다는 걸 알면서도 마지막까지 말을 놓지 않은 채 정호 씨라고 불러줬구나.“정호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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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44

제44화그렇게 유명한 사람이란 말이지. 촬영을 마치고 집에 돌아온 정호는 조금 고민하다가 검색창에 '전석현'이라는 세 글자를 두드려 넣었다. 적지 않은 자료들이 나왔다. 그중 반 이상은 통번역자 지망생들의 카페 게시글이었다. 가입하면 형식적으로 써야 하는 자기소개 프로필의 존경하는 통번역가란에 전석현, 전석현 님, 이라고 써넣은 사람이 셀 수 없이 많았다.[통역영상] 전석현 통역사님 레전드 ㄷㄷㄷ정호는 무심코 영상을 클릭했다.뉴스에서나 보던 중요한 사람들이 모인 듯한 회장에 반듯한 수트를 입은 검은 머리칼의 석현이 날이 선 얼굴로 한 의원의 뒤에 서 있었다. 싸늘한 얼굴이 낯설었다. 여러 나라의 의원들이 모인 자리인지 각 의원들의 뒤에 통역인 듯한 사람들이 한 명씩 붙어있었다. 통역들이 하는 말은 뭐라는지 잘 들리지도 않았다. ‘아니 들려봤자 뭐라는지 못 알아들으니까, 어차피 나는 뭐가 대단한지 잘 모르겠...’정호가 재생정지 버튼을 누르려는 찰나, 석현의 옆에 서 있던 외국인 통역자가 돌연 배를 감싸 쥐더니 주저앉았다. 석현이 표정 없는 얼굴로 재빠르게 그 통역자가 들고 있던 자료를 낚아채듯 빼앗더니 그 사람을 대신해서 통역을 하기 시작했다. 회의인지 회담인지가 끝날 때까지 석현은 몇 번이나 두 의원의 뒤를 오가며 통역했다. 소리는 잘 들리지 않았지만 무섭게 집중한 석현의 얼굴에서는 어떠한 주저함이나 막힘도 느껴지지 않았다.정호는 낯선 차림에 검은 머리칼을 하고 감정이 없는 사람처럼 무표정으로 쉴 새 없이 통역을 하는 석현이 마치 모르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문득 석현의 웃는 얼굴과 다정한 눈동자가 사무치게 보고 싶어졌다.석현에 대한 선망이 많은 만큼, 그가 사라진 지금 그에 대한 소문과 뒷얘기도 가볍게 떠드는 익명의 사람들이 써 내려간 글들을 주욱 훑어보면서, 정호는 석현이 단 2주일 동안 저를 선뜻 떠맡기 위해 그가 그때까지 지켜온 얼마나 많은 것들을 포기했는지, 어떤 위험들을 감수했는지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정호는 마지막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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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45

제45화밴에서 내린 정호는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오는 동안 멀미를 한 모양인지 머리가 멍했다. 인터뷰를 하기로 한 건물 앞에는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아직 초봄이라 불어오는 바람이 쌀쌀했다.“야, 도쿄가 서울보다 추운 것 같다. 그치?”매니저가 정호에게 카디건을 건네주며 담배를 물었다.“그래요? 근데 꽃은 더 빨리 피는 것 같은데요.”정호는 짙은 남색 카디건 소매에 팔을 넣으며 대답했다. 일본에서 개봉하는 영화 홍보차 어제부터 도쿄에 와 있었다. 영화 잡지 세 군데 정도에서 연락이 와서 인터뷰를 겸한 지면 화보 촬영 스케줄이 잡혀 있었다. 오늘은 하루 내내 여기저기 촬영 스튜디오를 전전하며 인터뷰를 하고 사진을 찍고 해야 한다.정호는 대본이 짜여진 연기가 아닌 이런 종류의 일은 좀 어려웠다. 대사가 정해진 게 아니니까 제가 뭔가 이야기를 해야 하는데 하고 싶은 말이 빨리 떠오르지 않을 때가 많았다. 늘 인터뷰어에게 미안해져 연신 사과를 하곤 했다. 게다가 화보 촬영을 겸하는 잡지 인터뷰 같은 경우에는, 지켜보고 있는 스태프들도 꽤 많은데,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인터뷰어와 함께 제가 말을 고르는 침묵의 시간을 견뎌주는 그 풍경이, 정호는 약간 고역스럽기까지 했다.매니저와 함께 담배를 피우던 통역 담당자 민정이 다시 밴에 오르는 걸 본 정호가 의아한 듯이 물었다.“민정 씨는 같이 안 가시는 거예요?”“어? 얘기 못 들으셨어요? 여기는 에디터님이랑 같이 일하는 통역분 있다고 해서요. 저는 이따가 오후에 있는 거 두 건만 들어가요.”민정의 대답을 들은 매니저가 불쑥 끼어들었다.“아니지 아니지, 인터뷰 통역만 그분이 하는 거고. 민정 씨는 같이 가서 우리가 스탭들이랑 얘기하고 하는 거 통역해 줘야지.”민정을 가볍게 나무라고는 얼른 내려서 따라오라고 손짓을 했다.통역. 예전에는 정호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던 두 글자가 이제는 자꾸 가슴을 두드리는 단어가 되었다. 연락이 끊긴 지 이제 2년이 넘었는데도 정호는 아직도 문득문득 석현을 떠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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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46

제46화사람이 너무 놀라면 목소리도 나오지 않는다는 걸 정호는 처음으로 직접 몸으로 느꼈다.놀란 정호를 보고도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을 한 석현은 허리를 숙여 정호가 떨군 종이를 주워 건네왔다.“이런 식으로는 처음 뵙네요.저는 오늘 통역을 담당할,”다음 순간 석현은 정호에게만 들리도록 목소리를 낮췄다.“전석현입니다.”석현이 싱긋 웃으며 악수를 청해왔다. 엉겁결에 맞잡은 정호의 손이 대책 없이 떨렸다. 정신을 다잡고 석현의 이름을 부르려는 찰나 석현을 발견한 일본인 에디터가 반갑게 석현에게 다가오며 인사를 해오는 바람에 무심코 ‘석현 씨’하고 부르려던 정호의 목소리는 미처 입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입안에서 맴돌았다. 에디터와 석현은 오랜만에 만난 친구처럼 한참을 이야기를 나누었다. 일본어로 얘기하는 석현은 평범한 일본 청년처럼 보였다. ‘참 나, 알고는 있었지만 정말 괴물 같은 사람이네.’정호는 이렇게 일본에서 누군가와 일본어로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제 눈앞의 석현을 보고 있노라니 당최 현실감이 느껴지질 않았다. 아무도 모르게 슬쩍 제 손등을 꼬집어 보았다. 아팠다. ‘꿈은 아닌데.’석현은 이 년 사이에 조금 야윈 것 같았다. 청바지에 카키색 스웨터를 입은 몸이 낭창했다. 은빛에 가깝던 잿빛 머리는 짙은 밤색으로 바뀌어 있었다. 이번에도 튀지 않으려고 염색한 걸까.정호는 언젠가는 이런 식으로 석현과 재회하게 될 거라는 걸 어느 정도는 예상하고 있었다. 지난 이 년 동안 수도 없이 머릿속으로 이리 저리 생각해 본 결과, 석현과 다시 만나는 길은 어디선가 통역자와 배우로 우연히 마주치는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은 지 오래였다. 하지만 그게 오늘이 될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여기는 일본이 아닌가.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지. 왜 석현 씨가 여기에 있는 거야.지난 이 년 동안 국제 영화제나 해외 로케 촬영으로 유럽에 갈 일이 있을 때마다 정호는 바보 같은 기대를 품었다. 통역으로 와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매번 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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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47

제47화인터뷰가 끝나자 석현은 에디터와 스태프들 한 명 한 명에게 악수를 청하며 명함을 건넸다. ‘생각보다 되게 사회적인 사람이네 석현 씨...’ 그런 석현을 바라보며 정호는 마음이 조급해졌다. 나는 아직 사진 촬영도 남았는데 이대로 돌아가버리는 건가 석현씨는. 너무 크리피하게 생각하지 말라니, 그런 말이나 하고. 이렇게 만나기를 내가 얼마나 기다렸는데 대체 이게 뭐란 말인가. 무표정으로 태연함을 가장한 채, 배우 소정호는 속절없이 가슴을 졸이고 있었다. 손바닥에 땀이 배어났다.그런 정호의 속도 모르고 야속하게도 석현이 여전히 그 친절한 웃는 얼굴로 다가와 악수를 청하며 명함을 건넸다.“배우님, 도쿄엔 얼마나 계시나요?”저 놈의 배우님 소리. 석현 씨는 대체 지금 여기서 뭐 하는 거예요, 왜 여기 있어요, 수많은 질문들을 꿀꺽 삼킨 채, 정호는 드디어 석현에게 첫마디를 건넸다.“내일 무대인사가 끝나면 바로 오사카로 이동합니다.”아니, 이런 식으로 말하고 싶은 건 아닌데. 정호는 제 입에서 나온 말이 너무 차갑게 들려 스스로도 놀랐다. 석현씨,라고 지금이라도 부르고 싶은데, 그 이름을 불렀다가는 틀림없이 울 것만 같아 차마 부를 수가 없었다. 안돼, 하지만 뭐라도 말을 해야 되는데. 어떡하지. 정호는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시선을 바닥으로 떨구었다.“연락 주세요.”예상외의 말에 정호는 고개를 들어 석현을 똑바로 보았다. 짙은 갈색 눈동자가 저를 뚫어지게 보고 있었다. ‘아아, 석현 씨다.’‘내가 아는 석현씨다.’ 정호는 순간 정말 눈물이 날 것 같아 연신 목을 가다듬는 흉내를 내며 헛기침을 했다.촬영이 끝나고 밴으로 돌아와 한숨을 돌리고 나서야 주머니에서 꺼내 본 석현의 명함에는 한자로 전석현이라는 이름 세 글자와 메일주소 밖에 인쇄되어 있지 않았다. 놀랄 만큼 심플한 명함에 헛웃음이 났다. 연락하려면 메일을 보내야 하는 건가. ‘아니 이럴 거면 대체 왜 주는 거야 명함을.’ 정호는 고개를 작게 내저으며 명함을 뒤집어 보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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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48

제48화오후부터 이어진 두 건의 다른 인터뷰 현장에는 석현이 없었지만, 집중이 될 리가 없었다. 정신 나간 사람처럼 멍한 상태로 있는 바람에 기어코, ‘소정호 씨 일본까지 오시느라 많이 피곤하신가 봐요’라는 힐난 섞인 말을 듣고 말았다. ‘네, 제가 이 년 동안 생사조차 알 수 없었던 좋아하는 사람을 이제야 겨우 만났는데 그 사람이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당최 알 수가 없어서 마음이 정말 피곤합니다 지금.’입을 꾹 다물고 복잡한 표정으로 미소를 지어 보이는 것밖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꽤 늦은 시각이 되어서야 호텔방에서 혼자가 된 정호는 부리나케 석현에게 건네받은 명함을 꺼냈다. 막상 전화를 하려니 긴장이 되어 손이 떨려왔다. 신호가 가고 금방, 나직하게 하이, 모시모시-하고, 한국어로 말할 때와 톤은 다르지만 석현의 것임이 틀림없는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석현 씨.”그 동안 얼마나 부르고 싶었던 이름인가. 정호는 바보처럼 눈물이 나와 괜히 눈가를 쓱쓱 문질렀다. 정호가 이름을 불렀는데도 잠시 대답이 없던 석현이 불쑥 물었다.“만날래요?”‘아니 이 사람이 지금,’“그걸 말이라고 해요? 석현 씨, 지금 어디예요?”“나는 집이죠. 내가 정호 씨 있는 데로 갈까요?”안돼. 옆 방에는 매니저도 있고, 무엇보다 민정씨도 이 호텔에 묵고 있다. 아깐 타이밍 좋게 엇갈렸지만 민정씨도 통역하는 사람이니까 석현씨를 알지도 몰라. 통번역판에서 그렇게 유명하다는데. “아니, 그, 내가 가는 게 나을 것 같은데요.”근데 나 혼자서 어떻게 가지.“여기 정호 씨 혼자서 찾아오기 힘들 거 같은데.”말끝을 흐리며 잠시 생각하는 듯하던 석현이,“그럼 일단 내가 데리러 갈게요. 호텔 주소 보내줘요.”예의 그 노래하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정호는 새삼 오랜만에 듣는, 제가 아는 석현의 목소리가 너무 좋아서 전화기 속으로 들어갈 수 있다면 들어가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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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49

제49화차 번호를 알려주며 호텔 후문으로 나오라는 석현의 메시지가 도착하기까지의 시간이 영원처럼 길게 느껴졌다. 모자와 마스크로 얼굴을 감추고 주위를 둘러보며 조심스레 석현의 차에 올라탔다.“왔어요?”석현의 나직하고 다정한 목소리가 가슴을 훅 비집고 들어왔다. 오랜만에 만나서 그런지 처음 만나는 사람처럼 느껴져 정호는 괜히 쑥스러워졌다. 머리색이 바뀐 석현은 전보다 한층 생기 있어 보였다.“석현 씨 왜 여기 있는 거예요?일본엔 언제부터 있었어요?”정호는 오랜만에 배우 소정호가 아닌 인간 소정호가 되어 속으로 말을 고르지 않고 떠오른 질문을 다짜고짜 입 밖으로 내었다. 어두운 차 안에서 물끄러미 정호를 보는 석현의 갈색 눈동자가 따뜻하게 빛났다.“음, 다 정리하고 이쪽으로 온 지 이제... 어, 일 년 정도 됐나.”“그럼 지금 도쿄에 사는 거예요?”“도쿄 시내는 아니고, 사이타마라고, 근처에 살고 있어요.”대답하던 석현이 쿡쿡거리며 웃었다.“아니, 왜 웃는 거예요, 난 지금 심각한데.”석현의 웃음소리에 가슴 한 구석이 간질거려 와 괜히 심각한 척 농담을 던졌다. 정호의 장난기 어린 질타에 석현은 손바닥으로 눈 언저리를 감싸 쥐고 소리 내어 웃었다. 새어나오는 웃음을 누르려는 듯 입꼬리에 힘을 주며 입을 열었다.“미안해요. 정호 씨 질문 공세를 받으니까, 옛날 생각나서요.”그 말을 들으면서, 정호는 이제 마음의 준비가 됐다고 생각했다.“석현 씨,”다시 소리 내어 이름을 부르자, 목이 메어왔다.“보고 싶었어요.”순간 석현이 눈을 질끈 감더니 아아, 하고 한숨 같은 탄식을 내뱉으며 운전대에 얼굴을 묻었다. 원망스런 목소리로.“아아, 진짜. 내가 먼저 말하려고 했는데.”이내 고개를 돌려 지긋이 눈을 맞춰오며,“나도요, 나도 보고 싶었어요, 정호 씨. 진짜.”한 글자 한 글자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진짜 많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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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50

제50화이런 동네를 대체 어떻게 잘도 찾아내서 집을 구하는 건지. 하여튼 신기한 사람이라고, 정호는 생각했다. 석현이 지금 사는 동네라며 데려온 곳은 인적이 드문 조용한 마을이었다. 한 시간 조금 넘게 차를 타고 왔을 뿐인데 빌딩과 사람으로 북적이던 도쿄 시내와는 완전히 다른 세상 같았다.석현은 여전히 여기서 나고 자란 사람처럼 익숙하게 차고에 차를 세우고 현관문을 열었다.“정호 씨, 커피 괜찮아요?”신발을 벗으며 석현이 물었다.“이 시간에 마시면 잠 못 자는 건 아니에요?내일 스케줄 괜찮아요?”한결같은 다정한 목소리. 정호는 아직도 제 눈앞에 있는 석현이 실감이 나지 않았다.그 겨울 정호와 석현이 함께 시간을 보냈던 크고 추운 집에 비하면 터무니없이 작은 집이었다. 수납공간이 부족했는지 어디를 봐도 사방이 책장이었다. 늘 석현이 앉아 작업하고 둘이서 함께 식사를 하던 커다란 테이블의 반절밖에 안 되는 크기의 탁상 위로 정리되지 않은 인쇄물들이 두서없이 흩어져 있었다.석현은 착착 탁상 위의 서류들을 겹쳐 들어 뒤편의 책더미 위로 아무렇게나 얹어놓으며 앉으라는 눈짓을 했다. 정호는 쭈뼛쭈뼛 의자를 당겨 앉았다. 앉아서 기다리는 동안 능숙한 손길로 커피를 내리는 석현의 뒷모습이 보였다. 훅 풍겨오는 커피 냄새에 습관적으로 가슴이 아팠다. 정호는 지금 석현이 바로 제 눈앞에 있는데도 깨어보면 그저 꿈일까 봐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커피를 놓고 마주 앉은 석현이 가만히 눈을 맞춰왔다. 깊고 짙은 갈색 눈동자. 무언가 생각하는 듯 잠깐 생각하듯 입술을 깨물더니 작게 한숨을 내쉰 석현이 웃음 띈 얼굴로 입을 열었다.“정호 씨 나한테 화 안 났네요?”“내가 석현 씨한테 왜 화를 내요.”“내 꿈에 나와서 맨날 무섭게 화냈다구요, 정호 씨가.”빙글빙글 웃으며 석현이 정호를 나무라듯 말했다.뭐예요, 그게,라고 되받으며 장난처럼 눈을 흘기며 웃었지만 정호는 마음이 아팠다. 나만큼 불안했구나 석현 씨도.어느새 장난기를 뺀 나직한 목소리로 커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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