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7화인터뷰가 끝나자 석현은 에디터와 스태프들 한 명 한 명에게 악수를 청하며 명함을 건넸다. ‘생각보다 되게 사회적인 사람이네 석현 씨...’ 그런 석현을 바라보며 정호는 마음이 조급해졌다. 나는 아직 사진 촬영도 남았는데 이대로 돌아가버리는 건가 석현씨는. 너무 크리피하게 생각하지 말라니, 그런 말이나 하고. 이렇게 만나기를 내가 얼마나 기다렸는데 대체 이게 뭐란 말인가. 무표정으로 태연함을 가장한 채, 배우 소정호는 속절없이 가슴을 졸이고 있었다. 손바닥에 땀이 배어났다.그런 정호의 속도 모르고 야속하게도 석현이 여전히 그 친절한 웃는 얼굴로 다가와 악수를 청하며 명함을 건넸다.“배우님, 도쿄엔 얼마나 계시나요?”저 놈의 배우님 소리. 석현 씨는 대체 지금 여기서 뭐 하는 거예요, 왜 여기 있어요, 수많은 질문들을 꿀꺽 삼킨 채, 정호는 드디어 석현에게 첫마디를 건넸다.“내일 무대인사가 끝나면 바로 오사카로 이동합니다.”아니, 이런 식으로 말하고 싶은 건 아닌데. 정호는 제 입에서 나온 말이 너무 차갑게 들려 스스로도 놀랐다. 석현씨,라고 지금이라도 부르고 싶은데, 그 이름을 불렀다가는 틀림없이 울 것만 같아 차마 부를 수가 없었다. 안돼, 하지만 뭐라도 말을 해야 되는데. 어떡하지. 정호는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시선을 바닥으로 떨구었다.“연락 주세요.”예상외의 말에 정호는 고개를 들어 석현을 똑바로 보았다. 짙은 갈색 눈동자가 저를 뚫어지게 보고 있었다. ‘아아, 석현 씨다.’‘내가 아는 석현씨다.’ 정호는 순간 정말 눈물이 날 것 같아 연신 목을 가다듬는 흉내를 내며 헛기침을 했다.촬영이 끝나고 밴으로 돌아와 한숨을 돌리고 나서야 주머니에서 꺼내 본 석현의 명함에는 한자로 전석현이라는 이름 세 글자와 메일주소 밖에 인쇄되어 있지 않았다. 놀랄 만큼 심플한 명함에 헛웃음이 났다. 연락하려면 메일을 보내야 하는 건가. ‘아니 이럴 거면 대체 왜 주는 거야 명함을.’ 정호는 고개를 작게 내저으며 명함을 뒤집어 보았
제48화오후부터 이어진 두 건의 다른 인터뷰 현장에는 석현이 없었지만, 집중이 될 리가 없었다. 정신 나간 사람처럼 멍한 상태로 있는 바람에 기어코, ‘소정호 씨 일본까지 오시느라 많이 피곤하신가 봐요’라는 힐난 섞인 말을 듣고 말았다. ‘네, 제가 이 년 동안 생사조차 알 수 없었던 좋아하는 사람을 이제야 겨우 만났는데 그 사람이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당최 알 수가 없어서 마음이 정말 피곤합니다 지금.’입을 꾹 다물고 복잡한 표정으로 미소를 지어 보이는 것밖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꽤 늦은 시각이 되어서야 호텔방에서 혼자가 된 정호는 부리나케 석현에게 건네받은 명함을 꺼냈다. 막상 전화를 하려니 긴장이 되어 손이 떨려왔다. 신호가 가고 금방, 나직하게 하이, 모시모시-하고, 한국어로 말할 때와 톤은 다르지만 석현의 것임이 틀림없는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석현 씨.”그 동안 얼마나 부르고 싶었던 이름인가. 정호는 바보처럼 눈물이 나와 괜히 눈가를 쓱쓱 문질렀다. 정호가 이름을 불렀는데도 잠시 대답이 없던 석현이 불쑥 물었다.“만날래요?”‘아니 이 사람이 지금,’“그걸 말이라고 해요? 석현 씨, 지금 어디예요?”“나는 집이죠. 내가 정호 씨 있는 데로 갈까요?”안돼. 옆 방에는 매니저도 있고, 무엇보다 민정씨도 이 호텔에 묵고 있다. 아깐 타이밍 좋게 엇갈렸지만 민정씨도 통역하는 사람이니까 석현씨를 알지도 몰라. 통번역판에서 그렇게 유명하다는데. “아니, 그, 내가 가는 게 나을 것 같은데요.”근데 나 혼자서 어떻게 가지.“여기 정호 씨 혼자서 찾아오기 힘들 거 같은데.”말끝을 흐리며 잠시 생각하는 듯하던 석현이,“그럼 일단 내가 데리러 갈게요. 호텔 주소 보내줘요.”예의 그 노래하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정호는 새삼 오랜만에 듣는, 제가 아는 석현의 목소리가 너무 좋아서 전화기 속으로 들어갈 수 있다면 들어가고 싶었다.
제49화차 번호를 알려주며 호텔 후문으로 나오라는 석현의 메시지가 도착하기까지의 시간이 영원처럼 길게 느껴졌다. 모자와 마스크로 얼굴을 감추고 주위를 둘러보며 조심스레 석현의 차에 올라탔다.“왔어요?”석현의 나직하고 다정한 목소리가 가슴을 훅 비집고 들어왔다. 오랜만에 만나서 그런지 처음 만나는 사람처럼 느껴져 정호는 괜히 쑥스러워졌다. 머리색이 바뀐 석현은 전보다 한층 생기 있어 보였다.“석현 씨 왜 여기 있는 거예요?일본엔 언제부터 있었어요?”정호는 오랜만에 배우 소정호가 아닌 인간 소정호가 되어 속으로 말을 고르지 않고 떠오른 질문을 다짜고짜 입 밖으로 내었다. 어두운 차 안에서 물끄러미 정호를 보는 석현의 갈색 눈동자가 따뜻하게 빛났다.“음, 다 정리하고 이쪽으로 온 지 이제... 어, 일 년 정도 됐나.”“그럼 지금 도쿄에 사는 거예요?”“도쿄 시내는 아니고, 사이타마라고, 근처에 살고 있어요.”대답하던 석현이 쿡쿡거리며 웃었다.“아니, 왜 웃는 거예요, 난 지금 심각한데.”석현의 웃음소리에 가슴 한 구석이 간질거려 와 괜히 심각한 척 농담을 던졌다. 정호의 장난기 어린 질타에 석현은 손바닥으로 눈 언저리를 감싸 쥐고 소리 내어 웃었다. 새어나오는 웃음을 누르려는 듯 입꼬리에 힘을 주며 입을 열었다.“미안해요. 정호 씨 질문 공세를 받으니까, 옛날 생각나서요.”그 말을 들으면서, 정호는 이제 마음의 준비가 됐다고 생각했다.“석현 씨,”다시 소리 내어 이름을 부르자, 목이 메어왔다.“보고 싶었어요.”순간 석현이 눈을 질끈 감더니 아아, 하고 한숨 같은 탄식을 내뱉으며 운전대에 얼굴을 묻었다. 원망스런 목소리로.“아아, 진짜. 내가 먼저 말하려고 했는데.”이내 고개를 돌려 지긋이 눈을 맞춰오며,“나도요, 나도 보고 싶었어요, 정호 씨. 진짜.”한 글자 한 글자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진짜 많이요.
제50화이런 동네를 대체 어떻게 잘도 찾아내서 집을 구하는 건지. 하여튼 신기한 사람이라고, 정호는 생각했다. 석현이 지금 사는 동네라며 데려온 곳은 인적이 드문 조용한 마을이었다. 한 시간 조금 넘게 차를 타고 왔을 뿐인데 빌딩과 사람으로 북적이던 도쿄 시내와는 완전히 다른 세상 같았다.석현은 여전히 여기서 나고 자란 사람처럼 익숙하게 차고에 차를 세우고 현관문을 열었다.“정호 씨, 커피 괜찮아요?”신발을 벗으며 석현이 물었다.“이 시간에 마시면 잠 못 자는 건 아니에요?내일 스케줄 괜찮아요?”한결같은 다정한 목소리. 정호는 아직도 제 눈앞에 있는 석현이 실감이 나지 않았다.그 겨울 정호와 석현이 함께 시간을 보냈던 크고 추운 집에 비하면 터무니없이 작은 집이었다. 수납공간이 부족했는지 어디를 봐도 사방이 책장이었다. 늘 석현이 앉아 작업하고 둘이서 함께 식사를 하던 커다란 테이블의 반절밖에 안 되는 크기의 탁상 위로 정리되지 않은 인쇄물들이 두서없이 흩어져 있었다.석현은 착착 탁상 위의 서류들을 겹쳐 들어 뒤편의 책더미 위로 아무렇게나 얹어놓으며 앉으라는 눈짓을 했다. 정호는 쭈뼛쭈뼛 의자를 당겨 앉았다. 앉아서 기다리는 동안 능숙한 손길로 커피를 내리는 석현의 뒷모습이 보였다. 훅 풍겨오는 커피 냄새에 습관적으로 가슴이 아팠다. 정호는 지금 석현이 바로 제 눈앞에 있는데도 깨어보면 그저 꿈일까 봐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커피를 놓고 마주 앉은 석현이 가만히 눈을 맞춰왔다. 깊고 짙은 갈색 눈동자. 무언가 생각하는 듯 잠깐 생각하듯 입술을 깨물더니 작게 한숨을 내쉰 석현이 웃음 띈 얼굴로 입을 열었다.“정호 씨 나한테 화 안 났네요?”“내가 석현 씨한테 왜 화를 내요.”“내 꿈에 나와서 맨날 무섭게 화냈다구요, 정호 씨가.”빙글빙글 웃으며 석현이 정호를 나무라듯 말했다.뭐예요, 그게,라고 되받으며 장난처럼 눈을 흘기며 웃었지만 정호는 마음이 아팠다. 나만큼 불안했구나 석현 씨도.어느새 장난기를 뺀 나직한 목소리로 커피
제51화석현을 기다리는 것밖에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고, 줄곧 하고 싶었던 말을 뱉고 나자 걷잡을 수 없이 눈물이 흘러나왔다. 석현과 연락조차 닿지 않던 지난 2년 동안,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도 저는 괜찮지 않았다는 것을, 밀려오는 파도처럼 갑자기 깨달았다. 정호는 예상치 못한 습격과도 같이 북받쳐 오르는 감정에 무력하게 저를 내맡긴 채 소리 내어 울었다.정호를 껴안은 채 손을 움직여 등을 토닥이며 석현이 달래듯이 말했다.“그래서 정호 씨 그만 기다리라고, 내가 올 수 있는 제일 가까운 곳으로 온 거예요.”울지 마요, 정호 씨, 울지 마요. 정호의 어깨에 볼을 부비며 말하는 석현의 목소리가 더할 나위 없이 따뜻하고 다정했다.***“정호 씨 다시 호텔까지 데려다 줄까요? 아니면 여기서 눈 좀 붙이고 아침에 갈래요?”다 마신 커피잔을 정리하며 석현이 물었다.“아침에 가도 돼요. 내일 스케줄 오후부터니까.”그래요, 하는 석현의 목소리가 나긋했다. 정호는 처음 만났던 때가 떠올라 웃음이 났다. 아아, 그 집 진짜 크고 추웠지. 그래도 뭔가 겨울 냄새 같은 게 느껴져서 좋았는데. 해도 되게 늦게 뜨고 엄청 빨리 지고. 석현 씨가 스탠드만 켜놓고 작업하면 나는 소파에 앉아서 음악 들으면서 책 보고, 진짜 좋았는데 그때.추억에 잠겨있는 정호에게 다가온 석현이 뭔가 할 말이 있는 듯 뒷머리를 긁적이며 눈을 굴렸다.“근데 이 집에 그, 침대가 하나밖에 없어서...”침대가 하나뿐이라는 석현의 말에 아무렇지 않은 척 ‘그게 뭐 어때서요’라고 하긴 했지만 이렇게 나란히 누워 잠을 청하는 건 처음이라 정호는 기분이 이상했다. 괜히 석현 쪽을 보기가 부끄러워 똑바로 누워 천장만 바라보았다. 숨소리가 들릴만큼 가까운 거리에, 석현이 누워있다니. 어제까지만 해도 소식도 알 수 없던 기억 속의 사람이었는데. 아니 이게 대체 무슨 급전개란 말인가. 무슨 프랑스 영화도 아니고.“정호 씨.”석현이 나직이 이름을 불러왔다.“응, 왜요?”이름을 부르고
제52화진짜, 죽을 만큼 보고 싶었으니까.정호 쪽으로 돌아누운 석현이 거의 들리지 않을 만큼 나직이 울리는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했다. 고개를 돌리니 어둠에 익숙해진 시야로 석현의 짙은 갈색 눈동자가 보였다. 이쪽을 보는 석현이 문득 그 언젠가처럼 금방이라도 사라져 버릴 것처럼 희미하게 느껴져 정호는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석현을 끌어안았다.따뜻한 온기와 비누 냄새와 석현의 체향이 느껴졌다. 저를 물끄러미 보던 석현의 길고 가느다란 손가락이 정호의 얼굴을 쓰다듬는가 싶더니 얼굴을 가까이 대고 이마에 입술을 맞춰왔다. 그대로 석현은 말없이 천천히, 정호의 눈가에, 콧등에, 볼에 입술을 갖다 댔다. 말캉하고 따뜻한 입술이 제게 다가올 때마다 심장이 내려앉을 것처럼 크게 뛰었다. 정호의 턱끝에 입술을 찍어낸 석현이 잠시 고개를 떼고 정호를 지긋이 바라보았다. 정호는 심장이 터질 것 같았지만 눈을 피하지 않고 석현을 마주 바라보았다.자연스레 입술과 입술이 부딪히고 입안으로 들어온 석현의 따뜻한 혀가 제 혀를 쓰다듬듯 움직여오자 정호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약간 거칠어진 석현의 숨결에서는 짙은 체향이 났다. 정호는 껴안은 팔로 석현의 넓고 단단한 등을 쓸어내리듯 어루만졌다. 석현이 낮은 숨을 내뱉으며 껴안은 팔에 힘을 주어 꽉 안아 왔다.입을 맞추는 동안 석현은 쉴 새 없이 정호를 어루만지고 쓰다듬었다. 석현의 손이 닿는 곳마다 간지럽고 황홀해 정호는 낮은 신음을 삼켰다.천천히 입술을 뗀 석현이 숨을 고르며 말했다.“아아, 미안해요. 정호 씨 너무 오랜만에 봐서, 내가...”“...안 미안해도 되는데.”그 말에 석현이 조용히 웃으며 다시 정호를 끌어당겨 품에 안았다. 아까보다 진해진 듯한 체향이 코끝으로 밀려들어와 정호는 아득한 기분이 들었다. 끌어안은 팔에 힘을 주며 석현이 나직이 말했다.“안돼. 정호 씨 내일 무대인사 있잖아요.”석현이 정호의 머리를 쓰다듬어 안으며 정수리에 입을 맞추었다. “오늘은 우리 이렇게 꼭 껴안고 자요.” 나
제53화마지막 공항 가는 길을 떠올리던 정호는 일부러 석현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지금 제 눈앞에 있는 석현을. 그때와는 다른, 하지만 여전히 같은, 석현이다.“자꾸 그렇게 보면 나 운전 못해요.”운전하느라 시선은 정면을 향한 채로 석현이 푸스스 웃으며 말했다. 정호는 손을 뻗어 이제 짙은 갈색이 된 석현의 머리칼을 만지작거렸다. 샴푸냄새가 희미하게 풍겨왔다.“어어? 나 운전 못 한다니까요.”석현이 짐짓 으름장을 놓는 듯 말꼬리를 늘이며 말했다. 정호는 석현의 머리에서 손을 떼고 자세를 고쳐 앉았다.“석현 씨.”“네, 말씀하시죠, 소배우님.”장난스레 대답하는 석현의 말에 입가를 비집고 웃음이 새어 나왔다. ‘나 이제 좀 진지한 질문할 건데, 이 사람이 진짜.’“우리 이제 또 언제 만나요?”어느새 차는 호텔 근처를 달리고 있었다. 후문 앞에 차를 세운 석현이 정호 쪽으로 몸을 돌려 정호를 와락 껴안았다. 그리고 노래하는 듯한 목소리로 나직이 말했다.“우리 둘 다 안 바쁠 때.어딘가 중간 지점에서 또 만나요.”그 겨울, 공항 가는 길에 제가 석현에게 했던 말이었다.“우리 이제 진짜 영영 못 보는 거 아니니까.”그 말을 하던 제 참담한 말투와는 정반대의 해사한 석현의 어조가 정호는 너무, 너무 좋았다.자리에 앉자 곧 낭랑한 목소리로 신칸센 출발을 알리는 안내방송이 들려왔다. 창밖으로 보이는 건물들이 빨리 재생한 영상처럼 스쳐 지나가기 시작했다.‘석현 씨랑은 이제 또 언제 만날 수 있는 건지.’도쿄를 뒤로 하고 오사카로 떠나려니 겨우 다시 만난 석현에게서 멀어지는 기분이 들어 괜히 불안했다. 정호는 아직도 석현과의 재회가 실감이 나지 않았다. 정말로 그저 꿈을 꾼 것만 같았다.제가 일본에 올 만한 기회도 좀처럼 없는 데다가, 영화배우라는 것이 생각보다 시간을 자유롭게 쓸 수 있는 직업도 아니라 이제 언제 다시 만날 수 있을지는 정말 기약이 없었다. 한국 가기 전에 잠깐이라도 좋으니까 한 번이라도 더 만날 수 있었으면 좋겠는데
제54화오사카에 도착해 취재진에게 둘러싸여 인터뷰를 하고, 무대인사를 하는 동안에도 정신은 계속 딴 데에 가 있었다. 정호는 틈만 나면 괜히 자꾸 핸드폰을 확인했다. 석현은 연락이 없었다. ‘바쁜 건가...’시간이 흘러 모든 일정이 끝나고 호텔에 들어왔을 때는 꽤 늦은 시각이었다. 여전히 석현에게서는 연락이 없었다.‘이 시간이 되도록 연락 한 통이 없네.’ 저는 석현을 어떻게든 한 번이라도 더 만나고 싶어서 이렇게 머리를 굴리고 있는데 아무런 연락도 없는 석현에게 섭섭한 마음이 들었다. 2년 만에 만나 놓고서는 짐짓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전석현입니다, 하며 악수를 건네던 석현을 떠올리면 어딘가 속이 꼬여오는 것처럼 심통이 났다. ‘어디서 그런 여유가 나오는 거야 대체.’ 정호는 모든 신경이 석현에게 쏠려 있는 자신이 조금 초라하게 느껴지기까지 했다.외투도 벗지 않은 채로 침대에 털썩 드러누워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았다.‘아니야, 오늘 엄청 바쁠 수도 있지. 석현 씨 바쁜 사람이니까.’ 무작정 도쿄까지 간다고 해도 괜히 바쁜 석현 씨 곤란하게 하는 거 아닐까. 정호는 문득 날 선 얼굴로 집중해서 일하던 그 겨울의 석현을 떠올렸다. 긴 통역이 끝나고 터덜터덜 방에서 걸어 나와 쓰러지듯 잠들었던 모습도.‘그나저나 내일 아침 비행기를 취소할지 어쩔지 얼른 매니저한테 말해줘야 되는데.’정호는 머리가 지끈거렸다. 제 일정을 제가 직접 관리하지 않은지 너무 오래되었기 때문에 어디서부터 어떻게 하면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정호는 벌떡 몸을 일으켜 앉았다.‘아아, 석현 씨 보고 싶다.’그래, 혼자 끙끙댈 게 아니라 우선 내일 석현 씨 뭐하는지 일정은 어떻게 되는지 연락이나 해보자.정호는 메시지를 보낼까 잠시 망설이다가 그냥 전화를 걸었다. 통화버튼을 누르면서, 그 겨울 한국에 돌아와 석현에게 받은 번호로 전화를 걸었을 때 없는 번호라는 메시지가 흘러나왔던 순간이 떠올라 괜히 조바심이 났다. 그런 정호의 불안한 마음은 삼초도 채 되지 않아 사
제82화석현은 코 먹는 소리를 내며 연신 소매로 눈물을 닦았다. 정호는 얼른 석현의 허리를 껴안고 달래듯 말했다.“아이, 석현 씨, 나 자주 죽잖아요. 뭘 또 그렇게 울고 그래요.”“아아, 나 이제 이런 건 못 보겠어요. 정호 씨 고생하는 영화는. 진짜.”울음을 멈추지 않고 숨을 몰아쉬며 석현이 말했다.“그러니깐 내가 안 본댔잖아요, 석현 씨가 보자고 해놓고, 으이그.”이 사람이 이렇게 무방비한 얼굴로 우는 모습을 보이는 건 제 앞에서 뿐이라는 걸, 이제 정호는 잘 알고 있다.스크린 안에서 어느 누군가와 만나서 다른 사람 사랑하는 모습을 아무리 진짜처럼 연기해도 소정호의 삶에 존재하는 진짜 사랑하는 사람은 오직 저뿐이라는 걸, 석현도 분명 잘 알고 있으리라.문득 가슴이 벅차올랐다.석현을 만나고부터 지금까지의 많은 날들이 떠올랐다.우리의 이야기는 해피엔딩이다.영원히 간직할 수 있는, 해피엔딩.겨우 진정한 듯한 석현이 정호의 어깨에 팔을 둘러 저를 꼬옥 마주 안아왔다.“정호 씨 나보다 먼저 죽으면 안 돼요.”내내 울어 엉망이 된 목소리로 한다는 말이.정호는 입꼬리를 꾹 누르며 웃음을 찾았다.“석현 씨,”제가 이름을 부르면 곧 으응, 하고 대답하는 다정한 목소리. 내가 좋아하는 사람의, 좋아하는 목소리.“사랑해요.”갑자기 뱉은 제 말에도,“내가 더 사랑하니까.”라고, 안은 팔에 힘을 주며 천연덕스레 대꾸해 오는 이 사람을. 사랑한다는 말로는 부족할 만큼,사랑한다.
제81화석현이 번역한 ‘푸른 시간의 기억’보다 먼저 세상에 나온 영화 ‘지나간 나날들’에서 정호가 맡았던 ‘한’이라는 이름의 주인공은 원작 소설에서는 제임스라는 이름으로, 오랫동안 소식을 알 수 없었던 어릴 적 친구와 직장에서 재회하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그저 추억으로만 남아있던 어릴 적 몰래 좋아했던 친구를 어른이 되어 현실에서 다시 만나게 되면서 제 감정에 대해 고민하는 과정에서 섬세한 표현을 요하는 장면이 많아 컷 하나하나 고민해 가며 어렵게 촬영했고 그만큼 정호를 많이 자라게 한 작품이었다.“아, 오랜만에 다시 보고 싶다. 정호 씨랑 같이.”불쑥, 그런 말을 내뱉은 석현이 개구쟁이같은 얼굴로 제게 빤히 눈을 맞춰온다.“음? 뭐요? 뭐가요?”“지나간 나날들이요.”부끄러워서 절대 안 된다고, 보고 싶으면 석현 씨 혼자 보라고, 한사코 손을 내두르며 버텼지만 결국 밥 먹는 내내 저를 조르고 설득하는 석현에게 지고 말았다. ‘하긴 이 사람을 내가 무슨 수로 이기나.’ 석현과 나란히 소파에 앉은 정호는 작게 한숨을 쉬며 오프닝 크레딧이 흘러나오는 화면을 노려보았다.정호가 연기한 한이 사랑했던 학창 시절의 현수는 부모의 학대 때문에 치마를 입고 머리를 기른 모습으로 생활하는 소년이다. 한은 현수가 여자애가 아니라는 걸 처음부터 알고 있지만 줄곧 모르는 것처럼 행동한다. 감정은 이유 없이 불시에 찾아온다. 한이 현수에게 반하는 순간의 얼굴이 클로즈업되었다.“와... 정호 씨 나한테 저런 표정 지은 적 한 번도 없는 거 같은데.”“아니 저건 연기잖아요, 연기. 연습해서 만들어낸 표정이라구요.”역시 석현과 함께 보는 게 아니었다고, 불쌍한 얼굴 좀 하고 조른다고 해서 져주는 게 아니었는데, 라고 늦은 후회를 하며 정호는 한숨을 쉬었다. 장면마다 석현의 놀림 아닌 놀림이 이어지는 데다가 몇 년도 더 전의 앳된 얼굴을 한 제가 연기하는 걸 보는 게 쑥스러워 어딘가로 숨고 싶어졌다.어느덧 영화는 클라이맥스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한과 현수
제80화커피머신이 우우웅 소리를 내며 돌아가고 쌉싸름한 커피 향이 금세 코끝으로 밀려들어왔다. 정호는 모처럼 내린 커피를 쏟을까 조심조심 걸음을 옮겨 건너편 방문을 열었다.벽면이 모두 책장인 석현의 작업실에 들어가면 늘 오래된 책과 종이와 잉크 냄새가 난다. 여러 개의 모니터를 앞에 두고 앉은 석현이 두들기는 키보드 소리가 타닥타닥 하고 경쾌하게 들려온다. 여전히 정호가 들어온 줄도 모르고 집중한 뒷모습. 코 앞에 커피를 내려놓자 그제야 손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저를 본다.“아니 소정호 씨가 이런 특별 서비스를 다 해주시고.”석현이 웃는다. 꽃이 피는 것 같은 웃음이다. 몇 번을 봐도 익숙해지지가 않고, 매번 어김없이 가슴이 뛰고 그저 좋기만 한 이 사람의 웃는 얼굴.“쉬엄쉬엄 해요. 마감 아직 여유 있잖아요.”“응 그래서 알레그로 아니고 모데라토 정도로 작업하고 있는데요.”번역 작업할 때 옆에서 보면 피아노를 연주하는 것 같다고 제가 지나가듯 말했던 걸 잘도 기억하고 이런 농담을 해온다.“뭐예요 그게, 그럼 마감 임박하면 알레그로로 하는 거예요?”“마감 전엔 프레스토!”“프레스토? 그게 젤 빠른 건가?”“아마도요.”“석현 씬 대체 모르는 게 뭐예요?”앉은자리에서 부스스 일어나 어깨를 꼭 끌어안더니,“정호 씨가 왜 이렇게 좋은지,그걸 모르겠어요. 정말.”장난스럽게 대꾸하고 금방 얼굴을 부벼온다. 좋은 냄새가 난다. 석현 씨 냄새.다음 달이면 같이 산 지도 일 년이 된다. 시간은 언제나 그렇듯 우리를 기다려주지 않고 무심하게 꾸준히 흘러간다. 절대로 멈추는 법이 없다.“어, 지나간 나날들, 대본 이제 온 거예요?”아니 당장 모레부터 연습이라면서요, 그걸 오늘이 돼서야 보내나, 거참 되게 일 못하네, 한 번 읽었던 대본을 다시 훑어보는 중인 정호의 옆에 앉아서 석현이 못마땅한 듯 중얼거렸다. '지나간 나날들'은 한국에서 영화화가 되고 난 후에야 원작이 주목을 받는 바람에 한국어판 소설은 영화보다 나중에 나왔다. 그 소설의
제79화정호에게 오점이 될까 두렵다는 석현의 말을 듣던 정호는 석현의 품에 안긴 채로,“오점이라니요. 석현 씨가 왜 오점이 돼요 나한테.그 말 취소해요.”괜히 장난처럼 시비를 걸었다.“알았어요. 취소.”석현이 웃음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아 뭔가 좀 더 투정을 부리고 싶은데.’정호는 왠지 무언가 덜 풀린 기분이 들었다.“석현씬 맨날 자기 마음도 말 잘 안 해주고.”“아니 그걸 꼭 말로 해야 알아요?”“말을 안 하면 어떻게 알아요? 내가 좋아한다고 말하기 전에 내가 좋아하는 거 알았어요?”“아니, 그때랑 지금이랑은...”말문이 막힌 듯 석현이 흐읍, 숨을 고쳐 쉬었다.갑자기 안았던 팔을 풀어낸 석현이 정호의 어깨를 붙잡아 저를 보게 했다. 정호는 왠지 부끄러워져 눈을 맞출 수가 없었다. 아까 다툰 것의 여파인지 속얘기를 다 털어놓아서인지 석현을 바로 쳐다보기가 열쩍었다.“정호 씨, 나 좀 봐요.”뭘 또 굳이 자기를 보래. 가슴 떨리게 왜 이래 이 사람.“사랑해요.”갑작스러운 고백에 놀라 정호는 석현을 보았다. 흔들림 없이 저를 향한 짙은 갈색 눈동자.“나 정호 씨 사랑한다구요.”정호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석현은 나직하고 힘있는 목소리로 몇 번이나 말했다.“나 전석현은, 소정호를, 사랑한다구요.”좀 알아 줘요, 라는 석현의 말에 정호는 아무런 대답도 못하고 바보처럼 그만 울고 말았다.“생각보다 대사가 바뀐 데가 많네...”대본을 덮고 작게 혼잣말을 한 정호는 소파에서 몸을 일으켜 크게 기지개를 켰다. 한 시간이 넘도록 집중해서 대본을 읽었더니 눈과 어깨가 뻐근했다. 몇 년 만에 받은 사흘 휴가의 가운뎃날이다. 이틀 이상을 연속으로 쉬는 게 대체 얼마만인지 내일도 쉴 수 있다는 게 실감이 나지 않을 정도다. 얼른 주차장으로 내려오라고 지금 당장이라도 매니저한테 전화가 걸려올 것만 같다.예전에 정호가 출연했던 영화가 연극으로 상연되기로 결정되면서 결국 제가 했던 역할이 다시 제게 돌아왔다. 아역 시절에 작은 역
제78화정호는 소리 내어 울었다. 이제 석현 없이는 살 수 없다고, 겨우 입 밖으로 내뱉은 깊은 속마음이 서러웠다.정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석현이 양손으로 정호의 어깨를 세게 붙들어왔다. 짙은 갈색의 눈동자로 제 눈을 뚫어지게 응시한 채,“나는요? 나는 정호 씨 없이 살 수 있을 것 같아?”처음 듣는 석현의 격앙된 목소리. 눈물이 고여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상처받은 눈. 이제 정호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석현 씨 지금 화났구나.생각해 보니 석현이 화난 목소리로 말하는 걸 처음 듣는 건 아니다. 병원에서 처음 만났던 날, 소속사 사람과 통화하던 석현의 목소리가 문틈을 비집고 들려왔을 때도 석현은 저를 위해 화를 내주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의 석현은 그때와는 또 다르다. 그때보다 훨씬, 날것의 감정이 느껴졌다. 어깨를 잡은 석현의 손이 떨려왔다.석현은 아무런 기약도 없이 스웨덴에서 하던 일을 다 정리하고 일본으로 거점을 옮기며 얼마나 참담하고 불안했는지, 어떻게든 정호를 만나기 위해 혼자서 이런 저런 방법을 강구하며 느낀 자괴감에 제가 음습한 스토커가 된 기분이었다는 이야기를, 중간중간 북받쳐 오는 감정을 추스르느라 말을 멈추어가며 힘겹게 쏟아냈다. 석현은 이야기를 듣는 내내 울음이 멎지 않아 눈물만 흘리는 정호를, 어깨를 잡고 있던 손을 그대로 끌어당겨 품에 꽉 안았다. 복잡한 감정이 뒤엉킨 눈동자가 무섭도록 깊고 짙었다.“석현 씨 그런 이야기 나한텐 한 번도 안 했잖아요.”‘참 못났다 소정호, 이런 말이나 하고.’정호는 석현에게 이루 말할 수 없이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그 마음이 너무 커서인지 미안하다는 말조차 입 밖으로 쉽게 나오지 않았다. 미안하다는 말보다 더 미안한 단어가 있다면 그걸 쓰고 싶었다.“이런 얘길 왜 해야 돼요, 정호 씨 마음 아프게.”저를 꼭 안은 채 여전히 화가 난 것 같은 목소리로 석현이 말했다.폭풍이 지나간 듯 감정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엔 왠지 어색한 공기가 감돌았다. 샤워를 마친 후 자려고 나
제77화“석현씨, 무슨 사이죠, 우린?”“뭐... 뭐라구요?”귀국하자마자 집에 짐만 두고 곧장 정호에게 온 석현이 한숨을 돌리기가 무섭게, 정호는 줄곧 생각했던 질문을 던졌다. 어이가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쉰 석현이 입을 열었다.“그게 또 무슨 말이에요, 정호 씨는 그렇게 막 불안해요? 내가?”정호는 잠자코 석현의 대답을 기다렸다.“아니, 내가... 왜, 어떻게 다시 한국까지 왔는데... 내가 어떤 마음인지, 전혀 모르겠어요?”석현은 대답이 아닌 질문만을 던져왔다.“안 되겠네, 이참에 서로 솔직히 얘기 좀 해요. 이런 게 다 쌓이면 독이 되는 거고. 정호 씨가 이렇게까지 불안해하는 걸 내내 몰랐다는 게, ...솔직히 나도 속상하니까.”속상하니까, 라고 말하는 석현의 말끝이 떨려왔다. 곧 차분한 어조로 어디 한 번 얘기 좀 해봐요, 하면서 석현이 자세를 고쳐 앉았다.어디서부터 무슨 얘기를 해야 하나. 이 불안은 어디에서 시작된 걸까. 석현을 다시 만날 수 있을지 실낱같은 희망만을 붙들고, 없는 번호라는 알아듣지도 못할 언어로 흘러나오는 메시지를 몇 번이나 확인했던 그때부터인가. 상상도 못 했던 곳에서 갑자기 만나 이게 꿈인가 싶어 번듯한 말 한마디도 못하는 저와는 달리 너무나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웃어 보이던 석현 앞에서 작아지는 기분을 느꼈던 그때부터인가. 나는 이제 정말,“나는 이제 정말, 석현 씨가 없으면, 살 수가 없는데.”이야기를 하다 보니 역시나 저도 모르게 울고 있었다.
제76화아무래도 신경이 쓰였던 모양인지 석현답지 않게 출장 중인데도 빈번하게 연락을 해왔다. 제가 스케줄 중이라 받지 못한 부재중 전화에 석현이 걸었을 법한 번호가 보이면 마음이 놓이면서도 속이 상했다. 석현의 연락처가 없어서 걸려오는 전화를 기다릴 뿐 제가 연락을 할 수가 없으니 이상하게 불안했다. 지면에 발을 딛지 않은 채 붕 떠 있는 것 같은 기묘한 부유감이 정호를 괴롭혔다.“근데 정호 씨는 정말, 내가 미덥지 못한가 봐요.”제 불안한 마음을 토로하자 핸드폰 건은 정말로 미안하다고 벌써 몇 번째인지 알 수 없는 사과를 하고는 전화기 너머로 희미하게 한숨을 쉰 석현이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대체 뭐가 그렇게 불안해요, 정호 씨는.” 내가 어떻게 겨우 정호 씨한테 닿았는데, 막 그렇게 금방이라도 사라질 것 같고 그래요?”순간 석현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순순히 미안하다는 말은 나오지를 않고,“석현 씨는 왜 그렇게 항상 여유로운 건데요?”오히려 원망하는 어조로 말하고 말았다.“... 내가, 여유로운 것 같아요?”전화기 저편에서 들려오는 석현의 목소리가 약간, 화가 난 것 같았지만 석현이 제게 화낸 적이 한 번도 없어서인지 목소리만으로는 확신이 서지 않았다. ‘지금 석현 씨 화난... 건가?’ 곧 크게 한숨을 쉰 석현이 다시 나직한 목소리로.“이러다 싸우겠어요. 내일 한국 가서 얘기해요.”정호는 전화를 끊고 침대에 털썩 드러누워 멍하니 천장을 보았다.나는 이제 석현 씨가 없이는 살 수 없다.석현 씨는 알고 있을까.석현 씨, 나는 석현 씨에게 어떤 의미인가요.
제75화지금 거신 번호는 없는 번호입니다. 다시 한번 확인하시고 걸어주시기 바랍니다.정호는 제 귀를 의심했다. ‘지금 거신... 뭐라고?’머리를 세게 얻어맞은 것처럼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뭔가 통신 오류가 난 건가, 무슨 시스템에 문제라도 생겼나. 그럴 리가 없는데. 그럴 리가. 정호는 다시 통화버튼을 눌렀다. 손이 제멋대로 떨려왔다.지금 거신 번호는 없는...안내멘트를 마지막까지 듣지 못하고 정호는 전화를 끊었다.이게 지금 무슨 상황인지 전혀 알 수가 없어 머릿속은 혼란스러울 뿐인데도 몸이 먼저 반응해 걷잡을 수 없이 눈물이 흘렀다. 다리에 힘이 풀려 그대로 주저앉았다. 심장이 무섭게도 빠르게 뛰어왔다. 아니 이건 좀 너무, 빠르게 뛴다. 정호는 정말 오랜만에 덜덜 떨리는 손으로 가방을 더듬어 황갈색 알약을 찾아 삼켰다.석현은 지금 출장으로 일주일 동안 스위스에 가 있다. 바로 이틀 전까지만 해도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로 통화를 했다. 출장이 끝나고 돌아오면 여유가 있으니까 어디 조용한 데로 놀러 가자고, 그런 이야기를 했었다. 마지막으로 통화했을 때 내가 눈치채지 못한 뭔가 이상한 낌새가 있었나? 석현 씨 목소리가 어땠지? 분명 우는 목소리는 아니었는데.‘그런데 왜 없는 번호가 된 거지, 석현 씨 전화가.’정호는 불시에 모든 사고회로가 정지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정말 아무런 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지금 이 상황이 뭐가 어떻게 된 건지를 전혀 파악할 수 없었다. 이대로 다시는 석현을 만날 수 없을 것만 같은 예감이 파도처럼 저를 덮쳐왔다.나는 이제 석현 씨가 없이는 살 수 없다.이성적으로 상황을 판단할 여력 따윈 없었다. 사무치게 제 마음을 깨달았을 뿐이었다. 가파른 절벽 위에 선 기분이었다. 끝없는 절망 속에서도 약기운이 도는지 가빠졌던 호흡이 진정되어 왔다. 기분 탓인지 심장이 여전히 방망이질 치는 것처럼 느껴졌다.바닥에 드러누운 정호의 귀에 부우웅 진동소리가 들려왔다. 플러스 사, 일로 시작되는 번호였다.
제74화정호가 다른 사람처럼 멋있어 보였다는 말에 정호도 서둘러 오늘 하루 내내 생각하던 말을 했다.“나는 오늘 석현 씨가 너무 멋있었는데요. 그, 진짜 다른 사람 된 것처럼요. 되게, 멋있었어요.”정호의 말에 눈빛이 짙어진 석현이 답답한 듯 한숨을 내쉬더니,“역시 안 되겠죠? 여기서 껴안으면.”“음, 축하의 포옹으로 보이지 않을까요?“아니야, 역시 안 되겠어요. 껴안는 데서 못 멈출 것 같아요, 나.”팀장님을 목놓아 부르짖으며 석현을 찾는 선재의 목소리에 이따 집에서 봐요, 하고 석현이 먼저 시끌벅적한 공간으로 돌아갔다. 정호는 석현에게 건네받은 커피를 마저 마시고 나서도 한참을 밖에 서서 창문 너머로 보이는 석현을 바라보았다. 제가 아까 창문 밖을 보기 전까지 석현이 그랬던 것처럼.영화팀 회식과 통역팀 회식은 분명 동시에 끝났는데 집에서 보자던 석현은 여태 소식이 없다. 빨리 샤워를 해서 제 몸에 배인 고기냄새와 술 냄새를 씻어내고 싶은데. ‘석현 씨 오기 전에 우선 먼저 샤워를 할까?’ 그러기에는 주인 없는 집에서 너무 맘대로 구는 것 같기도 하고.참지 못한 정호는 결국 석현에게 전화를 걸었다.“석현 씨, 왜 안 와요, 어디예요?”“정호 씬 어딘데요?”“석현 씨 집이죠.”“네? 난 정호 씨 집인데?”정호는 샤워를 하면서도 이 상황이 너무 웃겨서 이상한 사람처럼 자꾸 혼자 소리 내어 웃었다. 석현의 집에서 제가 혼자서 샤워를 하고 있고 석현은 아마도 제 집에서 샤워를 마치고 올 것이다. 집에서 보자는 말에 서로 다른 집을 떠올린 두 사람 다 어느 쪽 할 것 없이 너무 바보 같다는 생각이 들어 계속 웃음이 나왔다. 제 몸을 휘감는 석현의 비누 냄새에 기분이 좋아졌다. 머리를 다 말리고 소파에 앉으려는 순간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아아, 겨우 만났네요.” 라고 말하며, 머리끝이 아직 약간 젖은 채 저를 껴안아오는 석현에게서 제가 쓰는 익숙한 비누 냄새가 났다. 행복에 냄새가 있다면 분명 이런 냄새일 것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