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5화나도 오사카니깐, 하는 석현의 말에 정호는 제가 또 뭘 잘못 들었나 생각했다. ‘도쿄랑 오사카가 그렇게 가깝던가? 아닌데, 나 신칸센, 그거 엄청 빠른 열차잖아, 그거 타고 두 시간 반이나 왔는데? 석현 씨는 도쿄 근처에 사는 게 아니었나? 내가 뭘 놓친 거지?’정호는 뭐가 뭔지 모르는 상태로 일단 매니저에게 전화를 걸어 비행기 취소를 부탁하고 짐을 챙겼다. 부르르, 핸드폰이 울렸다.[이제 내 차 알죠? 얼른 내려와요]여전히 반신반의하는 마음으로 지하 주차장에 내려가니 정말로 석현의 차가 보였다.“아니 여기까지 어떻게 왔어요?”“운전해서 왔죠.”“내일 한국 안 가도 돼요 나.”“내일 아침이면 정호 씨 한국 가니까... 뭐?”정호와 동시에 말을 하던 석현이 고개를 홱 돌려 정호를 보았다. 어안이 벙벙한 얼굴이었다. 입을 벌린 채 연거푸 눈을 깜박이는 석현을 보고 정호는 웃음이 나왔다.“나, 하루 더 있다가 모레 아침에 가도 돼요.”“그래서 내일 아침에 도쿄 가서 연락할까 하다가, 혹시 석현 씨가 내일 바쁠까봐 물어보고 가려고 연락했는데...”열심히 설명하는 정호의 말을 듣는지 마는지 석현은 운전대에 얼굴을 묻은 채 발을 구르며,“아아아아, 집에 있을 걸! 집에서 일하면서 기다릴걸!”다시 고개를 번쩍 들고 정호의 어깨를 붙잡더니,“와...나 다섯 시간 넘게 운전해서 온 거 알아요?”고개를 뒤로 젖히며 ‘아아아’ 하고 탄식을 내뱉었다.석현은 정말로 억울해 보였다.“나는 진짜 오늘 아니면 정호 씨 못 만나는 줄 알고!”석현 씨 혼자만 여유 넘친다고 생각했던 거 취소,라고 정호는 속으로 생각하며 입가를 비집고 나오려는 웃음을 꾹 참았다.“아니, 연락이라도 하고 오지 그랬어요.”“정호 씨 일하는데 집중 안 될까 봐요.”“촬영하는 것도 아니고 그냥 무대인산데요, 뭐.”“그래도요. 그리고,”석현은 잠시 뜸을 들인 후,“어쩌면 만날 상황이 안 될지도 모르는데,내가 연락하면 정호 씨 신경 쓸까 봐요.”아무렇지도 않게
제56화정호가 눈을 뜨자 운전에 집중한 석현의 옆얼굴이 보였다. 어느새 차창 밖이 밝아져 오고 있었다. 제 몸에 덮인 석현의 외투가 따뜻했다.“일어났어요?”아, 저 대사. 나도 좀 말해보고 싶다. 난 또 언제 잠든 거야. 분명 석현 씨 자는 거 보고 있었는데.“석현 씨 안 피곤해요?”“응, 좀 잤더니 괜찮아요.”고속도로에서 벗어나면서 가벼운 말투로 ‘우리 커피 마시러 갈까요’라고 하더니 석현은 점점 좁아지는 산길로 이리저리 차를 몰아 깜짝 놀랄 만큼 사람이 없는 곳에 차를 세웠다.“정호 씨 여기에 버리려고 하는 거 아니니까 걱정 말구요.”어리둥절한 얼굴로 주위를 이리저리 둘러보는 정호를 보며 석현이 짓궂게 웃으며 말했다.“내려요 정호 씨, 조금 걸어야 돼요.”‘여기서부터는 길이 너무 좁아서’라고 덧붙이며 차에서 내린 석현이 길게 기지개를 켰다. 아무도 없는 산길을 나란히 걸었다. 이른 봄의 산 공기가 차가웠다. 연한 초록빛을 띤 새로 돋은 이파리들이 아침 햇살을 받아 반짝이며 빛을 튕겨냈다. 풀과 흙냄새가 났다.“손, 잡아도 돼요?”불쑥, 들려온 말에 정호는 고개를 돌려 석현을 보았다. 막상 질문을 던진 석현은 정호에게 시선을 주지 않은 채 앞만 보고 천천히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발갛게 상기된 석현의 귀가 보여 정호도 덩달아 괜히 부끄러워졌다.“뭘 그런 걸 일일이 물어봐요.”정호는 붉어져오는 얼굴을 느끼며 손을 뻗어 석현의 희고 긴 손을 그러쥐었다. 석현이 곧 다시 정호의 손을 부드럽게 고쳐 잡으며 천천히 깍지를 끼어왔다. 가슴이 간질간질해 석현쪽을 볼 수가 없었다. 한참을 말없이 걷던 석현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우리 이렇게 손잡고 걷는 건 처음이죠.”정호는 가슴이 빠르게 뛰어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이 사람이랑 몇 번을 껴안고 진한 키스도 했는데 고작 손 하나 잡는 걸로 왜 이렇게 떨리는 거야.’ 누군가와 손을 잡고 나란히 걷는 장면을 여러 번 연기해 봤는데도 불구하고 전혀 다른 느낌이 생경했다.
제57화어느새 차창 밖의 풍경이 어둑어둑 색깔을 바꾸고 있었다. 석현은 작정이라도 한 사람처럼 하루 종일 여기저기로 정호를 안내했다. 하나같이 인적이 드물고 조용한 곳이었다. 정호는 제가 아는 석현의 집 두 채를 떠올리고는 참 취향도 한결같다 생각하며 속으로 몰래 웃음 지었다. 한편으로는 저를 향한 석현의 자연스러운 배려가 느껴져 괜히 가슴 한 구석이 간질거리듯 기분이 좋았다.오랜만에 하루 종일 함께 있으면서 이런저런 얘기를 많이 했다. 주로 그 겨울에 대한 이야기였다. 정호는 제가 몰랐던 것들을 여러 가지 알게 되었다. 예를 들면 제가 구조되어 깨어나지 않았던 일주일 동안 혹시라도 그대로 잠들어 깨어나지 않을까 봐 석현이 엄청나게 마음을 졸이며 매일같이 의사를 닦달했다는 것이라든지 말이다. 거의 날마다 정호의 상태를 확인하러 병원에 들렀던 석현을, 저는 잠만 자느라 몰랐구나 싶어서 고마움과 미안함과 애틋함이 뒤섞인 복잡한 기분이 들었다.문득 생각해 보니 정호는 그 겨울의 석현과 지금의 석현이 거의 다른 사람처럼 느껴졌다. 그때의 석현은, 뭐라고 해야 할까,“뭔가 그, 석현 씨가 분명히 여기 있는데,여기 없는 것 같은, 그런 느낌이 있었어요.잘 설명은 못 하겠는데.”“홀로그램?”“아이, 아니이, 그런 거 말구요.”제 나름대로 진지하게 이야기하고 있는데 농담으로 받는 석현에게 정호는 가볍게 눈을 흘겼다. 자기 얘기하니까 쑥스러워서 그러는 건 알겠지만, 사람이 진지하게 이야기를 하는데 지금 뭐라는 거야, 나 참. 말을 말아야지.날이 어두워지고 밤이 가까워 올수록 남겨진 시간이 줄어든다는 생각에 잠시도 쉬지 않고 움직이는 시곗바늘이 야속하게 느껴졌다.기어코 밤은 찾아와 정호는 이틀 만에 다시 석현의 침대에 누웠다. 커튼 사이로 밤하늘이 얼핏 보였다. 석현의 침대에서는 어렴풋이 석현의 비누 냄새와 체향이 나는 것 같았다. 방문 너머로 샤워를 마친 석현이 드라이기로 머리를 말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내 드라이기를 정리하는 소리가
제58화정호가 잠든 줄 알았는지 석현은 발소리를 죽여 가만히 침대 위에 누웠다. 소리 나지 않게 천천히 이불을 끌어 덮는 석현의 조심스러운 움직임이 느껴졌다. 그러고는 한참 동안 더 이상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새 잠이 들었나 싶어 정호는 조심스럽게 눈을 떠 석현을 보았다. 석현은 이쪽을 향해 누워 눈을 뜨고 물끄러미 정호를 보고 있었다. 어둠에 익숙해진 시야에 평소보다도 짙은 갈색 눈동자가 보였다.“깼어요?”속삭이는 듯한 목소리였다.“...안 잤어요, 나.”‘아, 뭐예요’라며 석현이 웃는 바람에 정호도 웃음이 터졌다. “아니, 내가 자는 척을 하려고 한 게 아니고 그냥 눈만 감고 있었던 건데 마음대로 잔다고 생각한 건 석현 씨잖아요.”투덜거리는 정호의 말에 웃던 석현이 갑자기 가까이 오더니 두 팔로 꽉 안아오는 바람에 정호는 일순 숨이 턱 막히는 것 같았다.“정호 씨, 나. 여기 있어요.”나직한 목소리에 정호의 심장이 빨리 뛰었다.그 겨울, 석현이 제 옆에 있으면서도 없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는 정호의 말에 마음이 쓰인 모양이다.“나 이렇게 지금 여기 있다구요.”석현은 더 힘을 주어 세게 정호를 껴안았다. 샴푸 냄새와 비누 냄새에 섞인 석현의 체향이 코를 간질여와 기분이 이상해졌다. 정호는 지금 제가 숨을 쉬기 어려운 게 석현이 저를 너무 꼭 안아와서인지 심장이 지나치게 빨리 뛰어서인지 알 수가 없었다.정호는 석현의 팔을 가만히 풀어내고 몸을 조금 떼어낸 채 얼굴을 마주 보았다. 이제는 석현을 봐도 금방이라도 어디론가 사라져 버릴 것 같은 아스라한 분위기는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다. 정호는 말없이 지난밤 석현이 제게 했던 것처럼 이마에, 눈에, 코에, 볼에 천천히 입술을 가져갔다. 마지막으로 턱에 입을 맞추려고 얼굴을 가까이 댔을 때, 아이처럼 잠자코 있던 석현이 정호의 볼을 감싸 쥐고 부드럽게 입술을 맞춰왔다.
제59화뜨거우면서도 달콤한 키스였다. 벌어진 입술 사이로 따뜻한 혀와 혀가 몇 번이고 얽혀 들어 서로를 감았다.석현의 가늘고 긴 손끝이 정호의 귀를, 목을, 머리를, 등언저리를 쉴 새 없이 쓰다듬듯 매만져왔다. 정호는 석현의 손이 닿는 곳마다 홧홧하게 달아오르는 느낌이 들어 몸을 이리저리 틀었다. 석현의 어깨에 두른 제 손끝으로 자잘한 근육들의 움직임이 느껴졌다. 정호의 손이 움직일 때마다 석현이 낮은 신음을 삼켰다.잠시 입술을 떼고 작게 한숨을 내쉰 석현이 말했다.“아아, 안 되겠다... 오늘은 못 참겠어요, 나.”갈색 눈동자가 정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정호는 빙긋이 웃었다.“참지 말아요, 그럼.”나직한 대답과 동시에 다시 석현의 입술에 제 입술을 포개었다. 석현의 숨에서 진한 체향이 느껴졌다.“정호 씨, 그...내가 이러는 거 싫으면 언제든지 말해요.”‘내가 그렇게 당신을 좋아한다고 몇 번을 말해도 이 사람은 정말.’석현이 정호의 몸 여기저기에 도장이라도 찍어두려는 듯 부드럽게 입술을 찍어나갔다. 목덜미에, 쇄골에, 가슴에, 옆구리에, 배 언저리에. 간지럽고 기분이 이상해 정호는 정신이 아득해지고 머리가 빙빙 도는 것만 같았다.석현은 천천히 공들여 정호의 몸 이곳저곳을 어루만졌다. 정호는 제 몸이 악기가 되어 석현의 입술과 손끝으로 연주되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점점 머릿속이 하얘지는 것 같았다. 못 참겠다던 말과는 달리 석현의 손길은 진득하고 부드럽게, 서두르는 법 없이 정호를 매만지며 자극했다.속옷을 벗겨 하얗고 긴 손으로 제 아래를 감싸 쥐기 전에도, 길고 긴 전희 끝에 제 안으로 밀고 들어오기 전에도 몇 번이나 다정하고 나직한 목소리로 괜찮은지 물어왔다. 무서우면 말해요 정호 씨, 싫으면 말해요 정호 씨, 아프면 참지 말고 얘기해요. 숨을 고르며 묻는 석현의 낮게 울리는 목소리가 더할 나위 없이 관능적이었다.석현은 천천히 부드럽게 정호를 안으며 몇 번이나 좋아한다고 말해주었다. 끊임없이 제 이마에,
제60화간밤에 저도 모르는 사이에 이곳저곳에 힘을 줬던 건지 일어나 보니 근육통처럼 몸 여기저기가 뻐근했다. 아니나 다를까 석현은 먼저 일어난 모양인지 방문 밖 부엌 쪽에서 도마와 칼이 탁탁탁탁, 리드미컬하게 부딪히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분명 옷을 다 벗은 채로 잠들어 버렸는데 속옷도 바지도 티셔츠도 멀쩡하게 입고 있다. ‘석현 씨가 입혀줬구나...’ 정호는 문득 어젯밤의 일이 떠올라 가슴이 터질 것처럼 꽉 차오르는 기분이 들었다. 이렇게 행복해도 되는 건가.방문을 열자 요리를 하는 석현의 뒷모습이 보였다.“일어났어요?”나긋한 목소리. 아아, 이번에도 어김없이 저 대사를 놓치고 말았다.“앉아서 잠깐만 기다려요, 금방 다 되니깐.” 서두르는 석현의 뒷모습을 보면서 정호는 문득 그 겨울의 아침 풍경이 떠올랐다. 여기보다 훨씬 넓고 천장이 높아 휑하게까지 느껴지던 커다랗고 추운 집에서, 늦은 해가 뜰 때쯤 느지막이 잠에서 깨어 담요를 두르고 슬리퍼를 끌며 거실로 나가면 빵과 수프 냄새가 나던 날들. 창문을 비집고 들어오던 햇살을 등지고 선 석현의 웃는 얼굴과 분주한 손, 반짝이는 머리칼. 내내 함께 있었는데.그때는 몰랐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너무나도 찬란한 나날들이라는 걸. 언제 다시 그런 날이 올까. 눈을 뜨면 아무렇지 않게 서로를 볼 수 있는 그런 날이.“정호 씨?”석현의 목소리에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손 쓸 사이도 없이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한 손에 국자를 든 채로 서둘러 다가온 석현이 정호를 품에 안았다. 왜 우는지도 묻지 않고, 울지 말라는 말도 없이, 한참을 그렇게 있었다.
제61화한참을 석현의 품에서 울던 정호는 아이처럼 들릴 거라는 걸 알면서도, 울음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말했다.“나 진짜, 다 그만두고 아무도 모르는 데로 도망가서, 석현 씨랑 같이 살고 싶어요.”정호의 말에 석현이 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나도 그래요, 나도. 근데 난 정호 씨 연기가 너무 좋은데?”이마에 꾹 입을 맞추고는,“정호 씨도 좋아하잖아요, 연기도, 영화도.”안은 팔로 등을 토닥이며 조곤조곤 말했다.“언젠가 정호 씨가 너무 힘들고 지쳐서, 막 연기가 너무 싫어지고 정말로 그만두고 싶어지면, 그때는 꼭, 꼭 다 그만두고 나한테 와요.” “하지만 단지 나랑 같이 있기 위해서 정호 씨 인생에 중요한 뭔가를 포기하진 말아요. 정호씨 정말 내가 존경하는 대단한 사람이니까.”석현의 말이 너무 어른 같아서 정호는 제가 정말 떼쓰는 아이처럼 느껴졌다.“정호 씨, 길게 봐요 길게.나는 길게 보고 여기까지 왔어요.”이제 몇 시간 후면 다시 떨어져야 하는데, 이 사람은 왜 이렇게 침착하고 여유로운 건지. 2년 전에 헤어질 땐 눈이 빨개질 때까지 울었으면서.“나는 괜찮으니까. 언제든 정호 씰 기다릴테니까.”정호의 속도 모르고 석현의 말은 이어졌다.“내가 정호 씨에게 갈 테니까.”다정하고 나직하게 한 마디씩, 자꾸 마음을 두드려,“봐요, 시간은 좀 걸렸지만 결국 내가 왔잖아요.”겨우 멎었던 눈물을 기어코 다시 흐르게 만들었다.“그러니까 어디 너도 한 번 죽어 보라구.”정호는 낮은 목소리로 싸늘하게 말했다. 손에 쥔 나이프가 조용히 빛났다. 한 번, 두 번, 세 번... 나이프를 휘두를 때마다 점점 가슴속이 끓어올라왔다. 정호는 서서히 냉정을 잃고 제 감정을 가두어두었던 문을 열어젖혔다. 낮은 신음과도 같은 욕지거리를 내뱉고 눈을 희번덕거리며 목이 터져라 소리를 질러댔다. 그래도 속이 시원해지지 않았다.“컷!”감독님의 목소리에 현실로 돌아온 정호는 온몸의 힘이 풀려 천천히 주저앉았다. 제 것이 아닌 분노가 채 가시지 않아
제62화떨어져 있다는 느낌이 없다고 해도 보고 싶은 기분이 들지 않는 건 아니다. 단지 영영 다시는 볼 수 없는 사람이라고 여겼던 때의 보고 싶다는 감정과 지금 이렇게 서로의 일상을 공유하며 물리적으로만 떨어져 있으면서 느끼는 보고 싶다는 감정은 확연히 달랐다. 전자가 가슴이 에이는 듯한 추운 겨울 같은 느낌이라면 후자는 가슴 한 구석에 따스한 바람이 불어오는 듯한 설렘이 섞인 봄날 같은 기분이었다. 석현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정호는 기분 좋게 가슴이 뛰었다.프리랜서 통번역가와 영화배우의 스케줄은 어느 쪽 할 것 없이 양쪽 다 들쑥날쑥 제멋대로 깎아 만든 톱니바퀴처럼, 제대로 맞물리는 일이 없어 수화기 너머로라도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날조차 드문드문했다. 석현은 촬영이 시작되어 배역에 몰입하느라 감정적으로 피곤한 정호를 배려하는 건지 이전처럼 갑자기 전화를 걸어오는 일도 없었다. 집중한 석현을 방해하고 싶지 않은 마음은 정호도 마찬가지라 석현이 작업하고 있을 시간대에는 메시지를 보내는 것조차 조심스러웠다.그런 석현에게서 오랜만에 갑자기 전화가 걸려온 것은 정호가 잠을 깨려 커피를 마시며 텔레비전에서 흘러나오는 뉴스를 흘려듣던 어느 이른 아침이었다. 화면 속 아나운서는 특유의 감정 없는 어조로 한국 삼대 대기업 중 하나인 은강전자 회장이 지난밤 숨을 거두었다는 이야기를 보도하고 있었다. 은강은 전자업계뿐만 아니라 다방면으로 가지를 뻗어 사회전체적으로 꽤나 영향력이 있는 기업이다. 저렇게 거대한 기업의 총수도 죽음 앞에서는 무력하구나. 영화 산업에도 적지 않게 관여했던 기업이라서 정호는 앞으로 제게 불어올 바람들을 이리저리 예측해 보고 있던 참이었다.“정호 씨, 나 이제 한국 갈 거예요.”아니, 이런 걸 예상한 건 아닌데?석현의 목소리를 들으며 정호는 ‘그게 무슨 소리예요, 아침부터 농담하지 말구요’라고 하고 싶었지만 장난기라곤 전혀 느껴지지 않는 석현의 말투에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정호 씨? 듣고 있어요? 나 한국 갈 거라구요
제82화석현은 코 먹는 소리를 내며 연신 소매로 눈물을 닦았다. 정호는 얼른 석현의 허리를 껴안고 달래듯 말했다.“아이, 석현 씨, 나 자주 죽잖아요. 뭘 또 그렇게 울고 그래요.”“아아, 나 이제 이런 건 못 보겠어요. 정호 씨 고생하는 영화는. 진짜.”울음을 멈추지 않고 숨을 몰아쉬며 석현이 말했다.“그러니깐 내가 안 본댔잖아요, 석현 씨가 보자고 해놓고, 으이그.”이 사람이 이렇게 무방비한 얼굴로 우는 모습을 보이는 건 제 앞에서 뿐이라는 걸, 이제 정호는 잘 알고 있다.스크린 안에서 어느 누군가와 만나서 다른 사람 사랑하는 모습을 아무리 진짜처럼 연기해도 소정호의 삶에 존재하는 진짜 사랑하는 사람은 오직 저뿐이라는 걸, 석현도 분명 잘 알고 있으리라.문득 가슴이 벅차올랐다.석현을 만나고부터 지금까지의 많은 날들이 떠올랐다.우리의 이야기는 해피엔딩이다.영원히 간직할 수 있는, 해피엔딩.겨우 진정한 듯한 석현이 정호의 어깨에 팔을 둘러 저를 꼬옥 마주 안아왔다.“정호 씨 나보다 먼저 죽으면 안 돼요.”내내 울어 엉망이 된 목소리로 한다는 말이.정호는 입꼬리를 꾹 누르며 웃음을 찾았다.“석현 씨,”제가 이름을 부르면 곧 으응, 하고 대답하는 다정한 목소리. 내가 좋아하는 사람의, 좋아하는 목소리.“사랑해요.”갑자기 뱉은 제 말에도,“내가 더 사랑하니까.”라고, 안은 팔에 힘을 주며 천연덕스레 대꾸해 오는 이 사람을. 사랑한다는 말로는 부족할 만큼,사랑한다.
제81화석현이 번역한 ‘푸른 시간의 기억’보다 먼저 세상에 나온 영화 ‘지나간 나날들’에서 정호가 맡았던 ‘한’이라는 이름의 주인공은 원작 소설에서는 제임스라는 이름으로, 오랫동안 소식을 알 수 없었던 어릴 적 친구와 직장에서 재회하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그저 추억으로만 남아있던 어릴 적 몰래 좋아했던 친구를 어른이 되어 현실에서 다시 만나게 되면서 제 감정에 대해 고민하는 과정에서 섬세한 표현을 요하는 장면이 많아 컷 하나하나 고민해 가며 어렵게 촬영했고 그만큼 정호를 많이 자라게 한 작품이었다.“아, 오랜만에 다시 보고 싶다. 정호 씨랑 같이.”불쑥, 그런 말을 내뱉은 석현이 개구쟁이같은 얼굴로 제게 빤히 눈을 맞춰온다.“음? 뭐요? 뭐가요?”“지나간 나날들이요.”부끄러워서 절대 안 된다고, 보고 싶으면 석현 씨 혼자 보라고, 한사코 손을 내두르며 버텼지만 결국 밥 먹는 내내 저를 조르고 설득하는 석현에게 지고 말았다. ‘하긴 이 사람을 내가 무슨 수로 이기나.’ 석현과 나란히 소파에 앉은 정호는 작게 한숨을 쉬며 오프닝 크레딧이 흘러나오는 화면을 노려보았다.정호가 연기한 한이 사랑했던 학창 시절의 현수는 부모의 학대 때문에 치마를 입고 머리를 기른 모습으로 생활하는 소년이다. 한은 현수가 여자애가 아니라는 걸 처음부터 알고 있지만 줄곧 모르는 것처럼 행동한다. 감정은 이유 없이 불시에 찾아온다. 한이 현수에게 반하는 순간의 얼굴이 클로즈업되었다.“와... 정호 씨 나한테 저런 표정 지은 적 한 번도 없는 거 같은데.”“아니 저건 연기잖아요, 연기. 연습해서 만들어낸 표정이라구요.”역시 석현과 함께 보는 게 아니었다고, 불쌍한 얼굴 좀 하고 조른다고 해서 져주는 게 아니었는데, 라고 늦은 후회를 하며 정호는 한숨을 쉬었다. 장면마다 석현의 놀림 아닌 놀림이 이어지는 데다가 몇 년도 더 전의 앳된 얼굴을 한 제가 연기하는 걸 보는 게 쑥스러워 어딘가로 숨고 싶어졌다.어느덧 영화는 클라이맥스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한과 현수
제80화커피머신이 우우웅 소리를 내며 돌아가고 쌉싸름한 커피 향이 금세 코끝으로 밀려들어왔다. 정호는 모처럼 내린 커피를 쏟을까 조심조심 걸음을 옮겨 건너편 방문을 열었다.벽면이 모두 책장인 석현의 작업실에 들어가면 늘 오래된 책과 종이와 잉크 냄새가 난다. 여러 개의 모니터를 앞에 두고 앉은 석현이 두들기는 키보드 소리가 타닥타닥 하고 경쾌하게 들려온다. 여전히 정호가 들어온 줄도 모르고 집중한 뒷모습. 코 앞에 커피를 내려놓자 그제야 손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저를 본다.“아니 소정호 씨가 이런 특별 서비스를 다 해주시고.”석현이 웃는다. 꽃이 피는 것 같은 웃음이다. 몇 번을 봐도 익숙해지지가 않고, 매번 어김없이 가슴이 뛰고 그저 좋기만 한 이 사람의 웃는 얼굴.“쉬엄쉬엄 해요. 마감 아직 여유 있잖아요.”“응 그래서 알레그로 아니고 모데라토 정도로 작업하고 있는데요.”번역 작업할 때 옆에서 보면 피아노를 연주하는 것 같다고 제가 지나가듯 말했던 걸 잘도 기억하고 이런 농담을 해온다.“뭐예요 그게, 그럼 마감 임박하면 알레그로로 하는 거예요?”“마감 전엔 프레스토!”“프레스토? 그게 젤 빠른 건가?”“아마도요.”“석현 씬 대체 모르는 게 뭐예요?”앉은자리에서 부스스 일어나 어깨를 꼭 끌어안더니,“정호 씨가 왜 이렇게 좋은지,그걸 모르겠어요. 정말.”장난스럽게 대꾸하고 금방 얼굴을 부벼온다. 좋은 냄새가 난다. 석현 씨 냄새.다음 달이면 같이 산 지도 일 년이 된다. 시간은 언제나 그렇듯 우리를 기다려주지 않고 무심하게 꾸준히 흘러간다. 절대로 멈추는 법이 없다.“어, 지나간 나날들, 대본 이제 온 거예요?”아니 당장 모레부터 연습이라면서요, 그걸 오늘이 돼서야 보내나, 거참 되게 일 못하네, 한 번 읽었던 대본을 다시 훑어보는 중인 정호의 옆에 앉아서 석현이 못마땅한 듯 중얼거렸다. '지나간 나날들'은 한국에서 영화화가 되고 난 후에야 원작이 주목을 받는 바람에 한국어판 소설은 영화보다 나중에 나왔다. 그 소설의
제79화정호에게 오점이 될까 두렵다는 석현의 말을 듣던 정호는 석현의 품에 안긴 채로,“오점이라니요. 석현 씨가 왜 오점이 돼요 나한테.그 말 취소해요.”괜히 장난처럼 시비를 걸었다.“알았어요. 취소.”석현이 웃음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아 뭔가 좀 더 투정을 부리고 싶은데.’정호는 왠지 무언가 덜 풀린 기분이 들었다.“석현씬 맨날 자기 마음도 말 잘 안 해주고.”“아니 그걸 꼭 말로 해야 알아요?”“말을 안 하면 어떻게 알아요? 내가 좋아한다고 말하기 전에 내가 좋아하는 거 알았어요?”“아니, 그때랑 지금이랑은...”말문이 막힌 듯 석현이 흐읍, 숨을 고쳐 쉬었다.갑자기 안았던 팔을 풀어낸 석현이 정호의 어깨를 붙잡아 저를 보게 했다. 정호는 왠지 부끄러워져 눈을 맞출 수가 없었다. 아까 다툰 것의 여파인지 속얘기를 다 털어놓아서인지 석현을 바로 쳐다보기가 열쩍었다.“정호 씨, 나 좀 봐요.”뭘 또 굳이 자기를 보래. 가슴 떨리게 왜 이래 이 사람.“사랑해요.”갑작스러운 고백에 놀라 정호는 석현을 보았다. 흔들림 없이 저를 향한 짙은 갈색 눈동자.“나 정호 씨 사랑한다구요.”정호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석현은 나직하고 힘있는 목소리로 몇 번이나 말했다.“나 전석현은, 소정호를, 사랑한다구요.”좀 알아 줘요, 라는 석현의 말에 정호는 아무런 대답도 못하고 바보처럼 그만 울고 말았다.“생각보다 대사가 바뀐 데가 많네...”대본을 덮고 작게 혼잣말을 한 정호는 소파에서 몸을 일으켜 크게 기지개를 켰다. 한 시간이 넘도록 집중해서 대본을 읽었더니 눈과 어깨가 뻐근했다. 몇 년 만에 받은 사흘 휴가의 가운뎃날이다. 이틀 이상을 연속으로 쉬는 게 대체 얼마만인지 내일도 쉴 수 있다는 게 실감이 나지 않을 정도다. 얼른 주차장으로 내려오라고 지금 당장이라도 매니저한테 전화가 걸려올 것만 같다.예전에 정호가 출연했던 영화가 연극으로 상연되기로 결정되면서 결국 제가 했던 역할이 다시 제게 돌아왔다. 아역 시절에 작은 역
제78화정호는 소리 내어 울었다. 이제 석현 없이는 살 수 없다고, 겨우 입 밖으로 내뱉은 깊은 속마음이 서러웠다.정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석현이 양손으로 정호의 어깨를 세게 붙들어왔다. 짙은 갈색의 눈동자로 제 눈을 뚫어지게 응시한 채,“나는요? 나는 정호 씨 없이 살 수 있을 것 같아?”처음 듣는 석현의 격앙된 목소리. 눈물이 고여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상처받은 눈. 이제 정호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석현 씨 지금 화났구나.생각해 보니 석현이 화난 목소리로 말하는 걸 처음 듣는 건 아니다. 병원에서 처음 만났던 날, 소속사 사람과 통화하던 석현의 목소리가 문틈을 비집고 들려왔을 때도 석현은 저를 위해 화를 내주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의 석현은 그때와는 또 다르다. 그때보다 훨씬, 날것의 감정이 느껴졌다. 어깨를 잡은 석현의 손이 떨려왔다.석현은 아무런 기약도 없이 스웨덴에서 하던 일을 다 정리하고 일본으로 거점을 옮기며 얼마나 참담하고 불안했는지, 어떻게든 정호를 만나기 위해 혼자서 이런 저런 방법을 강구하며 느낀 자괴감에 제가 음습한 스토커가 된 기분이었다는 이야기를, 중간중간 북받쳐 오는 감정을 추스르느라 말을 멈추어가며 힘겹게 쏟아냈다. 석현은 이야기를 듣는 내내 울음이 멎지 않아 눈물만 흘리는 정호를, 어깨를 잡고 있던 손을 그대로 끌어당겨 품에 꽉 안았다. 복잡한 감정이 뒤엉킨 눈동자가 무섭도록 깊고 짙었다.“석현 씨 그런 이야기 나한텐 한 번도 안 했잖아요.”‘참 못났다 소정호, 이런 말이나 하고.’정호는 석현에게 이루 말할 수 없이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그 마음이 너무 커서인지 미안하다는 말조차 입 밖으로 쉽게 나오지 않았다. 미안하다는 말보다 더 미안한 단어가 있다면 그걸 쓰고 싶었다.“이런 얘길 왜 해야 돼요, 정호 씨 마음 아프게.”저를 꼭 안은 채 여전히 화가 난 것 같은 목소리로 석현이 말했다.폭풍이 지나간 듯 감정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엔 왠지 어색한 공기가 감돌았다. 샤워를 마친 후 자려고 나
제77화“석현씨, 무슨 사이죠, 우린?”“뭐... 뭐라구요?”귀국하자마자 집에 짐만 두고 곧장 정호에게 온 석현이 한숨을 돌리기가 무섭게, 정호는 줄곧 생각했던 질문을 던졌다. 어이가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쉰 석현이 입을 열었다.“그게 또 무슨 말이에요, 정호 씨는 그렇게 막 불안해요? 내가?”정호는 잠자코 석현의 대답을 기다렸다.“아니, 내가... 왜, 어떻게 다시 한국까지 왔는데... 내가 어떤 마음인지, 전혀 모르겠어요?”석현은 대답이 아닌 질문만을 던져왔다.“안 되겠네, 이참에 서로 솔직히 얘기 좀 해요. 이런 게 다 쌓이면 독이 되는 거고. 정호 씨가 이렇게까지 불안해하는 걸 내내 몰랐다는 게, ...솔직히 나도 속상하니까.”속상하니까, 라고 말하는 석현의 말끝이 떨려왔다. 곧 차분한 어조로 어디 한 번 얘기 좀 해봐요, 하면서 석현이 자세를 고쳐 앉았다.어디서부터 무슨 얘기를 해야 하나. 이 불안은 어디에서 시작된 걸까. 석현을 다시 만날 수 있을지 실낱같은 희망만을 붙들고, 없는 번호라는 알아듣지도 못할 언어로 흘러나오는 메시지를 몇 번이나 확인했던 그때부터인가. 상상도 못 했던 곳에서 갑자기 만나 이게 꿈인가 싶어 번듯한 말 한마디도 못하는 저와는 달리 너무나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웃어 보이던 석현 앞에서 작아지는 기분을 느꼈던 그때부터인가. 나는 이제 정말,“나는 이제 정말, 석현 씨가 없으면, 살 수가 없는데.”이야기를 하다 보니 역시나 저도 모르게 울고 있었다.
제76화아무래도 신경이 쓰였던 모양인지 석현답지 않게 출장 중인데도 빈번하게 연락을 해왔다. 제가 스케줄 중이라 받지 못한 부재중 전화에 석현이 걸었을 법한 번호가 보이면 마음이 놓이면서도 속이 상했다. 석현의 연락처가 없어서 걸려오는 전화를 기다릴 뿐 제가 연락을 할 수가 없으니 이상하게 불안했다. 지면에 발을 딛지 않은 채 붕 떠 있는 것 같은 기묘한 부유감이 정호를 괴롭혔다.“근데 정호 씨는 정말, 내가 미덥지 못한가 봐요.”제 불안한 마음을 토로하자 핸드폰 건은 정말로 미안하다고 벌써 몇 번째인지 알 수 없는 사과를 하고는 전화기 너머로 희미하게 한숨을 쉰 석현이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대체 뭐가 그렇게 불안해요, 정호 씨는.” 내가 어떻게 겨우 정호 씨한테 닿았는데, 막 그렇게 금방이라도 사라질 것 같고 그래요?”순간 석현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순순히 미안하다는 말은 나오지를 않고,“석현 씨는 왜 그렇게 항상 여유로운 건데요?”오히려 원망하는 어조로 말하고 말았다.“... 내가, 여유로운 것 같아요?”전화기 저편에서 들려오는 석현의 목소리가 약간, 화가 난 것 같았지만 석현이 제게 화낸 적이 한 번도 없어서인지 목소리만으로는 확신이 서지 않았다. ‘지금 석현 씨 화난... 건가?’ 곧 크게 한숨을 쉰 석현이 다시 나직한 목소리로.“이러다 싸우겠어요. 내일 한국 가서 얘기해요.”정호는 전화를 끊고 침대에 털썩 드러누워 멍하니 천장을 보았다.나는 이제 석현 씨가 없이는 살 수 없다.석현 씨는 알고 있을까.석현 씨, 나는 석현 씨에게 어떤 의미인가요.
제75화지금 거신 번호는 없는 번호입니다. 다시 한번 확인하시고 걸어주시기 바랍니다.정호는 제 귀를 의심했다. ‘지금 거신... 뭐라고?’머리를 세게 얻어맞은 것처럼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뭔가 통신 오류가 난 건가, 무슨 시스템에 문제라도 생겼나. 그럴 리가 없는데. 그럴 리가. 정호는 다시 통화버튼을 눌렀다. 손이 제멋대로 떨려왔다.지금 거신 번호는 없는...안내멘트를 마지막까지 듣지 못하고 정호는 전화를 끊었다.이게 지금 무슨 상황인지 전혀 알 수가 없어 머릿속은 혼란스러울 뿐인데도 몸이 먼저 반응해 걷잡을 수 없이 눈물이 흘렀다. 다리에 힘이 풀려 그대로 주저앉았다. 심장이 무섭게도 빠르게 뛰어왔다. 아니 이건 좀 너무, 빠르게 뛴다. 정호는 정말 오랜만에 덜덜 떨리는 손으로 가방을 더듬어 황갈색 알약을 찾아 삼켰다.석현은 지금 출장으로 일주일 동안 스위스에 가 있다. 바로 이틀 전까지만 해도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로 통화를 했다. 출장이 끝나고 돌아오면 여유가 있으니까 어디 조용한 데로 놀러 가자고, 그런 이야기를 했었다. 마지막으로 통화했을 때 내가 눈치채지 못한 뭔가 이상한 낌새가 있었나? 석현 씨 목소리가 어땠지? 분명 우는 목소리는 아니었는데.‘그런데 왜 없는 번호가 된 거지, 석현 씨 전화가.’정호는 불시에 모든 사고회로가 정지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정말 아무런 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지금 이 상황이 뭐가 어떻게 된 건지를 전혀 파악할 수 없었다. 이대로 다시는 석현을 만날 수 없을 것만 같은 예감이 파도처럼 저를 덮쳐왔다.나는 이제 석현 씨가 없이는 살 수 없다.이성적으로 상황을 판단할 여력 따윈 없었다. 사무치게 제 마음을 깨달았을 뿐이었다. 가파른 절벽 위에 선 기분이었다. 끝없는 절망 속에서도 약기운이 도는지 가빠졌던 호흡이 진정되어 왔다. 기분 탓인지 심장이 여전히 방망이질 치는 것처럼 느껴졌다.바닥에 드러누운 정호의 귀에 부우웅 진동소리가 들려왔다. 플러스 사, 일로 시작되는 번호였다.
제74화정호가 다른 사람처럼 멋있어 보였다는 말에 정호도 서둘러 오늘 하루 내내 생각하던 말을 했다.“나는 오늘 석현 씨가 너무 멋있었는데요. 그, 진짜 다른 사람 된 것처럼요. 되게, 멋있었어요.”정호의 말에 눈빛이 짙어진 석현이 답답한 듯 한숨을 내쉬더니,“역시 안 되겠죠? 여기서 껴안으면.”“음, 축하의 포옹으로 보이지 않을까요?“아니야, 역시 안 되겠어요. 껴안는 데서 못 멈출 것 같아요, 나.”팀장님을 목놓아 부르짖으며 석현을 찾는 선재의 목소리에 이따 집에서 봐요, 하고 석현이 먼저 시끌벅적한 공간으로 돌아갔다. 정호는 석현에게 건네받은 커피를 마저 마시고 나서도 한참을 밖에 서서 창문 너머로 보이는 석현을 바라보았다. 제가 아까 창문 밖을 보기 전까지 석현이 그랬던 것처럼.영화팀 회식과 통역팀 회식은 분명 동시에 끝났는데 집에서 보자던 석현은 여태 소식이 없다. 빨리 샤워를 해서 제 몸에 배인 고기냄새와 술 냄새를 씻어내고 싶은데. ‘석현 씨 오기 전에 우선 먼저 샤워를 할까?’ 그러기에는 주인 없는 집에서 너무 맘대로 구는 것 같기도 하고.참지 못한 정호는 결국 석현에게 전화를 걸었다.“석현 씨, 왜 안 와요, 어디예요?”“정호 씬 어딘데요?”“석현 씨 집이죠.”“네? 난 정호 씨 집인데?”정호는 샤워를 하면서도 이 상황이 너무 웃겨서 이상한 사람처럼 자꾸 혼자 소리 내어 웃었다. 석현의 집에서 제가 혼자서 샤워를 하고 있고 석현은 아마도 제 집에서 샤워를 마치고 올 것이다. 집에서 보자는 말에 서로 다른 집을 떠올린 두 사람 다 어느 쪽 할 것 없이 너무 바보 같다는 생각이 들어 계속 웃음이 나왔다. 제 몸을 휘감는 석현의 비누 냄새에 기분이 좋아졌다. 머리를 다 말리고 소파에 앉으려는 순간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아아, 겨우 만났네요.” 라고 말하며, 머리끝이 아직 약간 젖은 채 저를 껴안아오는 석현에게서 제가 쓰는 익숙한 비누 냄새가 났다. 행복에 냄새가 있다면 분명 이런 냄새일 것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