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딩 크레딧에서 당신의 이름을 찾아의 모든 챕터: 챕터 21 - 챕터 30

82 챕터

Chapter21

제21화정호는 이내 자려고 누웠지만 아까의 석현이 자꾸 신경이 쓰여 잠들 수 없었다. ‘대체 뭐였지, 그건.’‘나를…껴안다니?’ ‘유럽에 오래 살아서 스킨십이 아무렇지 않은 건가.’‘그저 호의의 표현인데 내가 너무 예민하게 반응하는 건가.’ 침대에 누운 채 몇 시간을 뒤척이던 정호는 목이 말라 방에서 나왔다. ‘따뜻한 물이라도 좀 마시면 잠이 오려나.’“깼어요?”보조등밖에 켜지 않아 어두운 테이블에 석현이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언뜻 포도주스처럼 보이는 것이 담긴 유리컵이 석현의 앞에 놓여 있었지만 풍겨오는 희미한 알코올 냄새로 와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석현 씨야말로 아직도 안 잤어요?”“미안해요, 정호씨 자는 줄 알았는데.정호씨 안 자면 근무시간인 셈이니까 나 술 마시면 안 되는데.”말끝을 길게 뺀 석현이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이며 눈을 가늘게 떠 웃어보였다.“석현씨 술 안 드시는 줄 알았어요.”“잘 안 마셔요. 멍해지는 느낌 싫어서.잘 못 마시기도 하고.”석현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근데 오늘은 너무 힘들었으니까조금만 마시려구요.”뭔가, 뭐라도 말을 해주고 싶은데,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좋을지 정호는 알 수가 없었다. 그러고 보니 누군가의 힘듦을 다독여 준 경험이 별로 없다는 걸 깨달았다.“그, 오늘 통역, 뭐 실수하시거나, 뭐라고 하지, 그, 잘 안 된……그런 부분이라도 있었어요?”석현이 잠깐 의아한 표정을 짓고는 곧 고맙다는 듯 나긋하게 웃었다.“정호씨,”무언가 얘기하려던 석현은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한숨을 쉴 때마다 석현은 산산이 부서져 내릴 것처럼 보였다.“정호 씨, 있잖아요.”천천히, 석현이 말을 이어갔다.“통역은, 정말 외로운 직업이에요.목소리를 잃어가는 듯한 기분이 돼요.끊임없이 말을 해야 하지만 그중에 정말로 내가 하는 말은 없으니까요. 없어야 하구요.”점점 몸을 기울이던 석현이 테이블에 팔을 걸치고 비스듬히 엎드렸다.“그 자리에 있지만, 결국 없는 것 같은 그런 존재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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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22

제22화“정호 씨.”정호의 손을 잡은 채로 석현이 나직하게 정호의 이름을 불렀다. 살아오면서 수도 없이 불려온 제 이름인데 이상하게 정호는 심장이 덜커덕 움직이는 기분이 들었다. ‘네’라든지 ‘왜요?’하고 아무렇지 않게 되받고 싶은데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정호 씨.”다시 한번, 석현이 정호의 이름을 불렀다. 짙은 갈색 눈동자가 흔들림 없이 정호의 눈을 응시하고 있었다. 붙잡은 손이 미미하게 떨려왔다. 정호는 떨고 있는 것이 제 손인지 석현의 손인지 알 수가 없었다.눈을 감고 천천히 크게 한숨을 내쉰 석현이 천천히 몸을 일으켜 바로 앉았다. 언제 그랬냐는듯 어느새 아무렇지 않은 얼굴을 하고 있다.“자야죠, 얼른. 정호씨.”석현은 정호를 방까지 데려다 주고 아무 일도 없었던 사람처럼 잘 자라는 다정한 인사와 함께 사라졌다. ‘뭐였지. 아까 그건.’ 정호는 제가 석현의 입에서 무슨 말인가가 나오기를 기다렸다는 걸 깨달았다. 석현이 세게 힘을 주어 제 손을 잡은 것도 아닌데, 뿌리치지도 못하고, 제 이름을 부르는 낮은 목소리에 짧은 대답조차 하지 못한 채. 가슴을 조이며 그 말을, 기다렸다.좋아한다는 말을.“이제 조금씩 가벼운 운동이나 외출을 하면서 체력만 회복하면 되겠대요.”노의사의 말을 통역하는 석현은 마치 큰 상을 받고 수상소감을 말하는 배우라도 된 듯 벅차고 기뻐 보였다.진찰이 끝나고 나가기 전, 석현이 갑자기 뭔가를 떠올린 듯 노의사에게 뭐라 뭐라 말을 했다. 두 사람은 심각한 표정으로 얼마 동안 대화를 나누고는 의사가 뭔가를 휘갈겨 쓴 종이를 석현에게 건네주었다. 정호는 석현이 외국어로 얘기할 때 목소리 톤이 변하는 게 참 신기하다고 생각했다. 연기할 때의 자신처럼,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는 것처럼 보였다. 진찰실 밖으로 나온 석현은 아까 건네받은 종이를 다시 간호사에게 건네주었다.“정호씨, 차에 먼저 가서 기다릴래요?”“왜요? 뭐 오래 걸려요? 뭐예요, 저거?”“아니, 그, 오래 걸리는 건 아닌데,”때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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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23

제23화지난번과 마찬가지로 병원에서 돌아가는 길에 석현은 한참을 차를 몰아 상가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무슨 축제라도 있는 건지 상가 앞에 노점들이 주욱 늘어서 있었다. 지난번에 왔을 때보다 훨씬 왁자한 분위기에 사람도 더 많았다.“아, 오늘 뭐 하나 보네…….”한숨 쉬듯 말한 석현의 짙은 갈색 눈동자가 걱정스레 정호를 향했다. 뭔가를 고민하는 듯이 잠시 눈썹을 움찔거리더니 입을 열었다.“차에서 기다릴래요?”정호는 당장 ‘네’라고 대답하고 싶었다. 적지 않은 인파로 북적이는 바깥을 보는 것만으로도 벌써 가슴께가 묵직하니 답답해져 오는 것 같았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보는 건 오랜만이었다. 하지만 지난 번 여기에 왔을 때의 석현의 말이 떠올라 선뜻 대답할 수가 없었다.“정호 씨가 여기 차에 혼자 있으면,편하게 장을 못 볼 것 같아요, 내가.”불안한 표정으로 말하던 석현의 목소리가 생생했다.“왜요, 같이 가요.”정호는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말하며 속으로는 조용하게, 굳은 각오를 다졌다. ‘저 사람들 사이로 나가는 거야.’ ‘소정호. 가자.’걱정스레 저를 보는 석현을 두고 정호는 일부러 씩씩하게 먼저 차에서 내렸다. ‘괜찮겠지. 이제 괜찮을 거야. 마지막으로 발작한 지도 몇 달이나 지났고.’서둘러 따라 내린 석현이 무슨 중요한 일이라도 앞둔 사람을 대하듯이 정호의 어깨를 다독였다.아아, 이 사람은 눈치가 너무 빠르다 정말.“저번에도 말했지만 여긴 정호 씨 알아볼 사람 아무도 없으니까, 정호 씨 해 보고 싶은 거 다 해요.”석현의 나직하고 다정한 목소리에 모든 것이 다 괜찮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설령 그게 다 착각이라 해도 정호는 착각의 힘이라도 빌리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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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24

제24화착각의 힘 덕분인지, 인파 속을 걷는 것은 생각보다 짜릿한 일이었다. 사람과 사람 사이를 헤치고 주변을 둘러보며 앞으로 나아가는 것. 아주 보통의 관광 같은 것. 이게 얼마 만인가. 그런데 의외로 석현에게 인사를 해오는 사람들이 많았다. 노점들을 둘러보며 천천히 걷는 동안 벌써 대여섯 명은 석현에게 반가운 듯 말을 걸어왔다. 여전히 뭐라고 하는지는 전혀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석현 씨 아는 사람이 많은가 봐요?”“아, 그냥 근처에 사는 사람들이에요.무슨 동네잔치 같은 분위기네요 여기 정말.”석현이 고개를 작게 내저으며 웃었다. 방에 틀어박혀 혼자 일하는 인상이 강해서인지 익숙한 듯 사람들과 인사를 주고받는 석현이 부쩍 낯설게 느껴졌다.“여기 오니까 내가 되게, 뭐랄까, 튀더라구요. 그래서 몇 번 안 만났어도 그냥 기억해주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아요.”그러고 보니 이렇게 많은 사람들 중 검은 머리칼을 한 사람은 정호뿐이었다. 푸른 눈과 창백한 피부, 레몬색에 가까운 밝은 금발, 그리고 나이 지긋한 은발의 사람들 사이에서 정호는 단연 눈에 띄었다. ‘아, 석현 씨는 눈에 덜 띄려고 머릴 염색한 건가.’ 웃는 석현의 옆 얼굴이 돌연 쓸쓸하게 느껴졌다.“이런 시골에 오는 사람이 없으니까, 정호씨 오기 전까진 유일한 이방인이었거든요, 내가.게다가 아시아 사람이고.어찌나 동물원 원숭이 보듯 하던지.”석현이 한숨처럼 허탈하게 웃으며 말했다.“그래요? 지금은 되게 ‘마을청년1’ 같은 거 알아요?”정호의 말에 석현이 소리를 내어 웃었다. 정호도 따라 웃었다. 정호는 석현이 웃는 게 좋았다. 정말, 좋았다.누군가가 웃고 있는 석현의 어깨를 덥썩 붙잡았다. 고개를 돌린 석현이 눈을 크게 뜨더니 이내 활짝 웃으며 반가운 얼굴을 했다. 두 사람 다 약간 흥분한 듯 빠른 어조로 대화를 이어갔다.정호는 갑자기 스스로가 작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 사람과 얘기를 나누는 석현이 전에 없이 너무나도 신이 나 보였기 때문이다. 두 사람의 대화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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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25

제25화석현이 저를 두고 즐거운 듯 다른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이상하게 신경에 거슬린다. 갑자기 답답해진 정호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봤다. 쨍 소리가 날 것만 같은 파랗고 맑은 하늘이었다.순간 갑자기 큰 음악 소리와 함께 퍼레이드가 시작되었다. 저쪽에서 춤을 추는 사람들과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들이 등장하자 길을 터 주느라 사람들이 이리저리 밀고 밀렸다. 정호는 기자들에게 둘러싸여 취재를 당할 때도 이렇게까지 사람에게 직접 부대끼며 밀린 경험이라곤 단 한 번도 없었다. ‘경호원이란 정말 고마운 존재구나. 하아…….’ 정호는 사람들에게 이쪽저쪽으로 밀리면서도 자신에 대한 모두의 무관심에 마음이 편안했다.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이란 정말, 좋구나…….’갑자기 시작된 퍼레이드가 휩쓸고 지나간 뒤 정호는 주위를 둘러보며 눈으로 열심히 석현을 찾았다. 석현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정호는 갑자기 퍼뜩 불안해졌다. 아까 있었던 방향으로 급하게 걸음을 옮겼다. 심장이 빨리 뛰기 시작했다.주변 사람들이 자꾸 자기를 힐끔거리는 것처럼 느껴졌다. 금방이라도 누군가가 소정호다!하고 외칠 것만 같았다. 수많은 사람들이 일제히 자신을 쳐다보고 우르르 몰려오는 장면이 떠올랐다.점점 심장이 빨리 뛰고 숨이 차올라왔다. 정호는 가쁜 숨을 내쉬며 가슴을 붙잡고 주저앉았다. 갑자기 주저앉은 정호 주변으로 사람들이 다가왔지만 이미 귀에서 ‘삐이이’하고 이명이 울리기 시작한 정호에게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아아, 안돼. 지금 여기서는 안돼.’“정호 씨! 정호 씨!”사람들을 헤치고 나타난 석현이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정호의 어깨를 붙들었다. 정호는 석현의 얼굴을 본 순간 안심이 되었다. 석현의 이름을 부르고 싶었지만 정호의 심장은 여전히 요동을 치며 빠르게 뛰고 있었고 호흡이 가빠 말이 나오지 않았다. 늘 제 가방에 들어있던 황갈색 알약이 절실했다.그 순간 석현이 주머니에서 급히 뭔가를 꺼냈다.“정호 씨, 정호 씨, 빨리 이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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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26

제26화정호를 거의 업다시피 부축해서 차까지 온 석현은 자동차 좌석을 뒤로 젖혀 정호를 눕혔다. 약이 듣는지 호흡이 편해진 정호는 석현의 손 위에 가볍게 손을 얹었다.석현은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이었다.“나 이제 괜찮아요.”그러니까 그런 표정 하지 마요, 라고 말하고 싶었다.“정호 씨, 미안해요.”석현은 여전히 울 것 같은 눈을 하고 있었다.“정호 씨를 그렇게 혼자 두는 게 아닌데, 하…… 진짜 바보같이, 그렇게 사람이 많은 데서.”석현은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쉴 새 없이 말을 쏟아냈다.“아니, 처음부터, 거길 가는 게 아니었는데. 내가 진짜, 왜, 무슨 생각으로…….”정호는 스스로를 질책하는 석현이 안쓰러워 뭐라도 다른 얘기를 하고 싶었다. 줄곧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던 질문이 멋대로 입 밖으로 미끄러져 나왔다.“석현 씨도…… 공황장애 있어요?”갑자기 던져진 질문에 석현은 얻어맞은 듯 멍한 표정으로 정호를 보았다.“……네?”“아까 준 약, 공황장애 응급약이잖아요. 그 약, 석현 씨 약 아니에요?”석현은 잠시 아연한 얼굴을 하더니 정호의 시선을 피해 힘없이 고개를 숙였다.석현은 한참을 대답이 없이 가만히 있었다.“……맞아요.”마지못해 하는 듯한 대답이었다. “제 약이에요.”꺼져가는 듯한 석현의 목소리에 정호는 아차 싶었다. ‘석현 씨도 나처럼 숨기고 싶은 건가? 별로 얘기 하고 싶지 않을 수도 있는데.’ ‘그냥 그런가보다 할 걸 괜히 물어봤나, 이런 건 되게 개인적인 부분인데…….’ 정호는 붙잡은 손에 부드럽게 힘을 주며 더는 묻지 않고 말을 돌렸다.“석현 씨, 이제 집에 가요. 우리.”“미안해요.”석현은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작은 목소리로 읊조리듯 연신 미안하다고 했다.“나 진짜 괜찮으니까 그만 사과해요. 내가 아픈 게 석현 씨 탓도 아닌데.”창백한 얼굴로 말없이 차를 모는 석현의 옆얼굴이 어쩐지 슬퍼 보였다.집에 돌아와서도 석현은 어딘가 얼이 빠진 사람처럼 말이 없었다. 정호가 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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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27

제27화이제 사흘 뒤면 한국에서 누군가가 데리러 올 테고 나는 다시 한국으로 돌아간다. 그렇게 생각하니 정호는 가슴 한구석이 시큰거렸다. 뭔가 복잡한 기분인데 아직 뭐가 뭔지 저 스스로도 명확히 알 수 없었다. 무엇보다도 어제 석현이 했던 행동과, 그 순간 느꼈던 제 감정들이 답을 알 듯 말 듯한 어려운 수수께끼처럼 모호했다. 짙은 안개 속에서 길을 찾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방문 너머로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낯선 외국어 뉴스가 들려왔다. 첫 주에는 약기운에 늦게까지 자느라 몰랐던 석현의 아침 일과 중 하나는 여러 언어로 된 뉴스를 차례대로 듣는 것이었다. 한 번은 과연 석현이 몇 종류의 외국어 뉴스를 듣는지 세어보려고 한 적도 있지만 다 비슷하게 들려서 그만 포기하고 말았다. 정말 알 수 없는 사람이다, 석현은. 어제는 갑자기 저를 끌어안고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을 해놓고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아침 일찍 일어나 저렇게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뉴스를 듣고 있다니. 나는 머리가 터질 것 같아서 한숨도 못 자다시피 했는데. 아니 대체 지금 뉴스가 귀에 들어온단 말인가. 정호는 부아가 치밀었다.“어, 정호 씨, 일찍 일어났네요.”거실로 나가자 뉴스를 듣던 말간 얼굴의 석현이 아무렇지 않게 아침 인사를 건네왔다. 아니 진짜 대체 어제 그건 뭐였던거야?“나 이거까지만 듣고 아침 해 줄게요.미안해요. 조금만 기다려요.”여느 때처럼 다정한 석현이다. 다시 뉴스를 들으며 집중한 얼굴로 뭔가를 메모하는 석현의 단정한 손끝을 보며 정호는 한편으로 안심이 되면서도 머릿속이 복잡해졌다.묻고 싶은 것 투성이인데 뭐라고 물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어제는 왜 그랬냐고 물어볼까, 아니 너무 애매한데 그건. 석현 씨라면 ‘내가 뭘 어쨌는데요?’라고 되물을지도 몰라. ‘어제 왜 나 껴안은 거예요?’라고 물어봐야 하나. 근데 나도 같이 껴안았잖아. 그러면 ‘어제 우리 왜 껴안은 거예요?’라고 물어봐야 하나. 아니야, 그건 또 좀 이상하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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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28

제28화정호의 머릿속에 물음표가 가득한 채 시간은 야속하게 흘러갔다. 벌써 오후가 지나고 저녁에 가까운 시간이었다. 해가 짧은 탓에 밖은 한밤중처럼 어두웠다. 사흘 뒤면 한국에 돌아간다는 생각을 하면 괜히 마음이 초조해졌다. 초조함의 이유도 잘 알 수가 없어 더욱 답답했다. 내가, 왜 이러는 거지. 뭐가 이렇게 초조한 거지. 속도 모르는 석현은 아무렇지 않게 말을 걸어오고 정호도 평정을 가장하여 대답하다 보니 정말 아무 일도 없었던 것 같은 분위기가 되었다. ‘나 내일모레면 한국 가는데요, 석현 씨는 아무렇지도 않은가요?’ 몇 번이나 목까지 차오른 말을 꾹 참았다. 정호는 저 혼자만 마음이 복잡한 것 같아 되려 화가 날 것만 같았다.“정호씨, 오늘 저녁은 밖에서 먹을 테니까, 나갈 준비 해요.”테이블에 앉아 한참을 집중해서 무언가를 하던 석현이 ‘다 했다’ 하고 혼잣말을 하며 작게 기지개를 켜더니 건네온 말이다. 정말 아무렇지도 않은 말투다. 정말로.‘나는 둘이서 하고 싶은 얘기가 많은데.’ ‘밖에서 식사하는 건가. 사람 많은 데는 불편한데.’ 정호는 점점 더 심기가 불편해졌다.“여기, 밤에는 진짜 추우니까옷 단단히 챙겨입구요.”석현은 ‘내가 두꺼운 옷 꺼내줄게요’라고 하더니 부루퉁한 정호의 팔을 끌고 방으로 들어가 큰 패딩 점퍼와 두꺼운 회색 스웨터를 꺼내주었다. 정호는 순순히 입고 있던 옷 위에 스웨터를 덧입었다. 스웨터에서 석현의 비누 냄새가 났다. 또 이상하게 가슴이 간질거리는 것 같았다.“정호씨, 오늘 왜 이렇게 조용해요?”운전하느라 정면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석현이 나직이 물어왔다. 예상 못 했던 질문에 정호는 약간 당황했다. ‘내가 오늘 그렇게 말이 없었던가?’ ‘뭐라고 대답해야 되지?’정호는 당황한 나머지 대답할 말을 떠올릴 수가 없었다.“이제 모레면 정호 씨 한국 가는데.”석현의 입에서 나온 또 다른 의외의 말에 정호는 마치 제 마음을 들킨 것만 같은 기분이 들어 놀랐다. 애써 태연함을 가장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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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29

제29화어딘가 식당에 가는 줄 알았더니 석현이 모는 차는 점점 눈 덮인 산길로 들어서더니 한참을 구부정한 길을 따라 달려 꽤 높은 곳에 와서야 멈추었다.“내려요.”“……여기서요?”정호는 앉은 채로 주변을 휙 둘러보았다. 식당은커녕 사람 그림자도 보이지 않는 곳이었다. 그저 나무들이 듬성듬성 서 있는 눈 덮인 산 중턱의 작은 벌판이었다.“여기서 내리라구요?”정호는 재차 물었다. 눈을 부릅뜬 정호를 보고 석현이 소리 없이 웃었다. 그 모습에 돌연 마음이 훅 따뜻해지는 기분이 들어 정호는 자기도 모르게 같이 웃고 말았다.“네, 같이 내려요. 여기서 저녁 먹을 거예요”“석현 씨…… 이제 날 여기에 버리려는 거예요?우리 회사에서 석현 씨 연락처랑, 막 그, 신원정보, 그런 거 다 안다구요.”정호는 괜히 장난을 치며 겁먹은 얼굴을 해 보였다. 이번엔 석현이 소리를 내어 웃었다. 낮은 웃음소리가 음악처럼 듣기 좋았다. 희고 긴 손에 얼굴을 묻고 웃는 석현의 옆모습을 정호는 지긋이 바라보았다.히터를 세게 틀었던 차에서 내리자 마치 다른 세계에 온 듯 얼어붙을 것만 같은 찬 공기가 화악 몰려왔다. 머리가 얼얼하면서도 기분이 좋았다. 정호는 문득 숲에서 길을 잃었던 날을 떠올렸다. 그 때 몇 시간이고 눈길을 헤매며 그렇게 생각 없이 차 밖으로 나온 걸 얼마나 사무치게 후회했던가. 정말 내가 바보같이 산책이나 하다가 길을 잃고 이렇게 먼 나라의 숲에서 죽는구나 하고, 생각했었다.그런데 지금은, 후회하지 않는 것 같다. 아니, 후회하지 않는 것 같은 게 아니라, 후회하지 않는다. 지금 기억 그대로 다시 시간을 돌려 그때로 돌아가도 똑같이 할 것이다. 길을 잃을 것을 알아도, 죽을 뻔할 거라는 걸 알아도, 다시 그 눈밭을 실컷 헤매고 죽을 고비를 넘겨 구조되어 병원에서 눈을 뜰 것이다.그리고 석현을, 만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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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30

제30화“마셔요.”불쑥 석현이 김이 모락모락 나는 보온컵을 내밀었다. 커피 냄새가 훅 끼쳐왔다.“진짜 여기서 저녁 먹는 거예요, 우리?”“응, 그러려고 했는데 생각보다 추워서 안되겠네.커피만 마시고 차에 들어가서 먹어요.샌드위치랑 수프 만들어왔어요.”‘왜 굳이 여기까지 온 거지?’ 의아한 얼굴로 잠자코 커피를 마시는 정호를 향해 석현이 싱긋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속삭이듯 나직한 목소리로,“하늘 봐봐요, 정호 씨.”석현의 말에 정호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젖혀 하늘을 보았다.엄청난 하늘이었다.별들이 말 그대로 쏟아질 듯 새까만 밤하늘을 배경으로 빼곡히 빛나고 있었다. 정호는 꿈을 꾸는 것만 같았다. 제 눈앞에 펼쳐진 현실이라고 믿기 어려울 만큼 아름다운 광경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와아, 낮은 탄성이 저절로 나왔다. 숨소리가 들릴 만큼 고요한 설원 위 하늘에 흐드러지게 빛나는 별들과 커피 내음. 나무들의 그림자, 바람 소리.정호는 커피와 샌드위치를 만들고 오래오래 운전을 해 여기까지 와서 이런 걸 보여주는 석현이, 처음 만났을 때와는 무언가 달라졌다고 생각했다. 친절해졌다고 해야 하나. 아니, 생각해보면 처음부터 생판 남인 저를 집에 데려가 돌봐줄 만큼 친절하긴 했지만, 친절의 종류라고 할까 색깔이라고 할까. 병원에서 처음 만난 그날과 지금은 무언가 분위기가 달랐다.정호는 아름다운 밤하늘에서 눈을 떼고 고개를 돌려 석현을 보았다. 줄곧 정호를 보고 있던 석현과 눈이 마주쳤다. 눈이 마주쳐도 석현은 아무런 동요 없이 진득하게 정호의 눈을 마주 봐 왔다. 짙은 갈색의 눈동자가 한없이 다정했다. 친절한 사람. 내게 친절한 사람은 수도 없이 많았는데.자꾸 그런 눈으로 나를 보면.정호는 며칠 전 새벽, 몇 번이나 제 이름을 부르던 석현의 입에서 좋아한다는 말이 나오기를 기다렸던 이유를, 이제 알 것 같았다. 저를 껴안은 석현의 등에 저도 모르게 팔을 둘러 마주 안았던 이유를.“나 석현 씨 좋아해요.”흘러넘치듯 진심이 입 밖으로 나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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