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화정호는 이내 자려고 누웠지만 아까의 석현이 자꾸 신경이 쓰여 잠들 수 없었다. ‘대체 뭐였지, 그건.’‘나를…껴안다니?’ ‘유럽에 오래 살아서 스킨십이 아무렇지 않은 건가.’‘그저 호의의 표현인데 내가 너무 예민하게 반응하는 건가.’ 침대에 누운 채 몇 시간을 뒤척이던 정호는 목이 말라 방에서 나왔다. ‘따뜻한 물이라도 좀 마시면 잠이 오려나.’“깼어요?”보조등밖에 켜지 않아 어두운 테이블에 석현이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언뜻 포도주스처럼 보이는 것이 담긴 유리컵이 석현의 앞에 놓여 있었지만 풍겨오는 희미한 알코올 냄새로 와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석현 씨야말로 아직도 안 잤어요?”“미안해요, 정호씨 자는 줄 알았는데.정호씨 안 자면 근무시간인 셈이니까 나 술 마시면 안 되는데.”말끝을 길게 뺀 석현이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이며 눈을 가늘게 떠 웃어보였다.“석현씨 술 안 드시는 줄 알았어요.”“잘 안 마셔요. 멍해지는 느낌 싫어서.잘 못 마시기도 하고.”석현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근데 오늘은 너무 힘들었으니까조금만 마시려구요.”뭔가, 뭐라도 말을 해주고 싶은데,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좋을지 정호는 알 수가 없었다. 그러고 보니 누군가의 힘듦을 다독여 준 경험이 별로 없다는 걸 깨달았다.“그, 오늘 통역, 뭐 실수하시거나, 뭐라고 하지, 그, 잘 안 된……그런 부분이라도 있었어요?”석현이 잠깐 의아한 표정을 짓고는 곧 고맙다는 듯 나긋하게 웃었다.“정호씨,”무언가 얘기하려던 석현은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한숨을 쉴 때마다 석현은 산산이 부서져 내릴 것처럼 보였다.“정호 씨, 있잖아요.”천천히, 석현이 말을 이어갔다.“통역은, 정말 외로운 직업이에요.목소리를 잃어가는 듯한 기분이 돼요.끊임없이 말을 해야 하지만 그중에 정말로 내가 하는 말은 없으니까요. 없어야 하구요.”점점 몸을 기울이던 석현이 테이블에 팔을 걸치고 비스듬히 엎드렸다.“그 자리에 있지만, 결국 없는 것 같은 그런 존재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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