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엔딩 크레딧에서 당신의 이름을 찾아: Chapter 61 - Chapter 70

82 Chapters

Chapter61

제61화한참을 석현의 품에서 울던 정호는 아이처럼 들릴 거라는 걸 알면서도, 울음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말했다.“나 진짜, 다 그만두고 아무도 모르는 데로 도망가서, 석현 씨랑 같이 살고 싶어요.”정호의 말에 석현이 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나도 그래요, 나도. 근데 난 정호 씨 연기가 너무 좋은데?”이마에 꾹 입을 맞추고는,“정호 씨도 좋아하잖아요, 연기도, 영화도.”안은 팔로 등을 토닥이며 조곤조곤 말했다.“언젠가 정호 씨가 너무 힘들고 지쳐서, 막 연기가 너무 싫어지고 정말로 그만두고 싶어지면, 그때는 꼭, 꼭 다 그만두고 나한테 와요.” “하지만 단지 나랑 같이 있기 위해서 정호 씨 인생에 중요한 뭔가를 포기하진 말아요. 정호씨 정말 내가 존경하는 대단한 사람이니까.”석현의 말이 너무 어른 같아서 정호는 제가 정말 떼쓰는 아이처럼 느껴졌다.“정호 씨, 길게 봐요 길게.나는 길게 보고 여기까지 왔어요.”이제 몇 시간 후면 다시 떨어져야 하는데, 이 사람은 왜 이렇게 침착하고 여유로운 건지. 2년 전에 헤어질 땐 눈이 빨개질 때까지 울었으면서.“나는 괜찮으니까. 언제든 정호 씰 기다릴테니까.”정호의 속도 모르고 석현의 말은 이어졌다.“내가 정호 씨에게 갈 테니까.”다정하고 나직하게 한 마디씩, 자꾸 마음을 두드려,“봐요, 시간은 좀 걸렸지만 결국 내가 왔잖아요.”겨우 멎었던 눈물을 기어코 다시 흐르게 만들었다.“그러니까 어디 너도 한 번 죽어 보라구.”정호는 낮은 목소리로 싸늘하게 말했다. 손에 쥔 나이프가 조용히 빛났다. 한 번, 두 번, 세 번... 나이프를 휘두를 때마다 점점 가슴속이 끓어올라왔다. 정호는 서서히 냉정을 잃고 제 감정을 가두어두었던 문을 열어젖혔다. 낮은 신음과도 같은 욕지거리를 내뱉고 눈을 희번덕거리며 목이 터져라 소리를 질러댔다. 그래도 속이 시원해지지 않았다.“컷!”감독님의 목소리에 현실로 돌아온 정호는 온몸의 힘이 풀려 천천히 주저앉았다. 제 것이 아닌 분노가 채 가시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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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62

제62화떨어져 있다는 느낌이 없다고 해도 보고 싶은 기분이 들지 않는 건 아니다. 단지 영영 다시는 볼 수 없는 사람이라고 여겼던 때의 보고 싶다는 감정과 지금 이렇게 서로의 일상을 공유하며 물리적으로만 떨어져 있으면서 느끼는 보고 싶다는 감정은 확연히 달랐다. 전자가 가슴이 에이는 듯한 추운 겨울 같은 느낌이라면 후자는 가슴 한 구석에 따스한 바람이 불어오는 듯한 설렘이 섞인 봄날 같은 기분이었다. 석현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정호는 기분 좋게 가슴이 뛰었다.프리랜서 통번역가와 영화배우의 스케줄은 어느 쪽 할 것 없이 양쪽 다 들쑥날쑥 제멋대로 깎아 만든 톱니바퀴처럼, 제대로 맞물리는 일이 없어 수화기 너머로라도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날조차 드문드문했다. 석현은 촬영이 시작되어 배역에 몰입하느라 감정적으로 피곤한 정호를 배려하는 건지 이전처럼 갑자기 전화를 걸어오는 일도 없었다. 집중한 석현을 방해하고 싶지 않은 마음은 정호도 마찬가지라 석현이 작업하고 있을 시간대에는 메시지를 보내는 것조차 조심스러웠다.그런 석현에게서 오랜만에 갑자기 전화가 걸려온 것은 정호가 잠을 깨려 커피를 마시며 텔레비전에서 흘러나오는 뉴스를 흘려듣던 어느 이른 아침이었다. 화면 속 아나운서는 특유의 감정 없는 어조로 한국 삼대 대기업 중 하나인 은강전자 회장이 지난밤 숨을 거두었다는 이야기를 보도하고 있었다. 은강은 전자업계뿐만 아니라 다방면으로 가지를 뻗어 사회전체적으로 꽤나 영향력이 있는 기업이다. 저렇게 거대한 기업의 총수도 죽음 앞에서는 무력하구나. 영화 산업에도 적지 않게 관여했던 기업이라서 정호는 앞으로 제게 불어올 바람들을 이리저리 예측해 보고 있던 참이었다.“정호 씨, 나 이제 한국 갈 거예요.”아니, 이런 걸 예상한 건 아닌데?석현의 목소리를 들으며 정호는 ‘그게 무슨 소리예요, 아침부터 농담하지 말구요’라고 하고 싶었지만 장난기라곤 전혀 느껴지지 않는 석현의 말투에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정호 씨? 듣고 있어요? 나 한국 갈 거라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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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63

제63화한국에 돌아와도 괜찮냐는 정호의 물음에“뭐, 안 괜찮은 부분도 있겠지만, 괜찮아요.”석현의 어조가 금세 노래하는 듯 경쾌해졌다.“정호 씨 있으니까.”정호는 석현에게 제 얼굴이 보이지 않는 것을 다행으로 여기며 뜨거워진 귀를 연신 만지작거렸다. 이렇게 덜컥 이야기를 들었다고 해서 금방 실감이 날만한 일이 아니었다. 한국에, 석현 씨가 온다니. 비행기를 타지 않고 갈 수 있는 거리에 있게 된다니. 이게 정말 그냥 다 농담은 아니겠지.이제 당분간 바빠질 거라는 얘기를 포함해서 역시나 그냥 농담으로 하는 이야기는 아니었던 건지 그날 이후 석현이 연락하는 횟수는 무섭게 줄어들었다. 시시콜콜한 일상 이야기 대신 이틀이나 사흘에 한 번 꼴로,[보고 싶다 정호 씨]라는 메시지가 시간대에 관계없이 간간이 정호의 핸드폰을 울릴 뿐이었다. ‘보고 싶다’, 지금까지 한 번도 두 사람의 사이를 오가지 않던 문장이었다. 언제 만날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기약 없음이 괴로워서인지 서로 약속이라도 한 듯 보고 싶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떨어져 있어도 가까이 있는 것처럼, 작정한 듯 자잘한 일상적인 이야기만을 일일이 공유했다. 신기하게도 그러면 정말로 멀리 있지 않은 것처럼 느껴졌다. 그런데도 막상 가까운 미래에 만난다는 생각을 하니 기다리는 시간이 참을 수 없이 길게 느껴졌다.[나도 보고 싶어요 많이]정호는 한숨을 쉬며 한 글자 한 글자 꾹꾹 누른 답장을 보내곤 했다. 석현의 연락이 줄어드니 점점 더 멀리 있는 것처럼 느껴져 정호는 이유 없이 불안해졌다. 습관 같은 두려움이었다. 손이 닿지 않는 곳으로 석현이 사라져 버릴 것만 같은.촬영을 마치고 오랜만에 이른 저녁에 집에 돌아온 정호는 따뜻한 물로 오래오래 샤워를 했다. 마른 수건으로 젖은 머리를 털어 말리며 크랭크업 기념으로 받은 꽃다발을 풀어 화병에 꽂았다. 또 한 번의 제 삶이 끝났다. 작품이 끝나면 늘 성취감보다는 허무감이 앞선다. 연기를 하는 중에는 무언가가 제멋대로 깊숙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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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64

제64화정호는 목소리를 가다듬고는 버튼을 꾹 눌러 전화를 받았다. 화면 너머로 덥수룩한 머리에 피곤한 눈을 한 석현이 나타났다. 눈밑이 패일 듯 그늘이 져 있었다. 힘없는 목소리로,“짜잔.”하고 말해오는 석현 때문에 웃음이 나오는 바람에 막 나오려던 눈물이 쏙 들어가고 말았다. 영상통화는 처음인 데다 대화하는 것 자체가 오랜만인데도 바로 어제 같이 있었던 것처럼 느껴졌다. “정호 씨, 무슨 일 있었어요?”아니 그렇게 곧 죽을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지금 내 걱정을 하는 건가. “석현 씨, 잠은 좀 자면서 하고 있는 거예요?”“하루 걸러 하루 정도?“근데 정호 씨 진짜 아무 일도 없는 거죠?”늘 자기 일은 별 것이 아니라는 듯 말하는 석현은 이번에도 정호의 걱정스런 질문은 가볍게 흘려 넘기고는, 화면 너머에서 눈을 크게 뜨고 정호의 얼굴을 찬찬이 살피며 재차 물었다. 보고 싶어요, 단지 다섯 글자를 보냈을 뿐인데 거기에서 뭔가를 읽어낸 모양이다. 언어를 다루는 사람 특유의 예리한 감 같은 걸까. 비록 화면이지만 바로 눈 앞에서 저를 걱정하는 석현의 얼굴을 보니 정호는 불안하고 외롭던 마음이 거짓말처럼 편해져 오는 것을 느끼며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두서없이 늘어놓았다. 웃음 띈 얼굴로 물끄러미 저를 보며 내내 이야기를 듣던 화면 너머의 석현이 한숨을 쉬었다.“근데, 이거 좀 생각보다,”석현은 말을 하려다 말고 뭔가 어이가 없는 듯 고개를 돌려 짧은 웃음을 뱉더니,“무슨 고문하는 거 같네요.”라고 하며 웃었다.갑자기 고문 같다고 하는 석현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 몰라 눈을 크게 뜨고 정지 화면 상태가 된 정호를 보며 또 하하하, 듣기 좋은 소리를 내며 웃은 석현이 말을 이었다.“아니, 정호 씨가 바로 눈앞에서 이렇게 얘기하고 있는데, 만질 수도 없고 냄새도 맡을 수 없고. 무슨 유리상자 안에 들어 있는 것처럼.”석현의 말에 정호도 웃음이 나왔다.“아니 석현 씨 무슨 영상통화 처음 해보는 사람처럼...”“나 영상통화 처음 해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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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65

제65화영 잠이 오지 않아 정호는 호텔 베란다 문을 열고 슬리퍼를 신었다. 늦여름의 눅진한 바닷바람이 불어와 방금 말린 머리칼이 흩날리는 것이 느껴졌다. 새까만 바다 위로 보이는 밤하늘은 아름다웠지만 그 언젠가 석현이 보여주었던 하늘처럼 저절로 탄성을 내뱉을 정도는 아니었다. 정호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내일이면 드디어 여기 제주도에서의 촬영이 끝난다. 삼 주가 넘는 긴 여정이었다.내일이면 서울로 간다고 생각하니 가슴속에서 풍선이 부풀어오는 것처럼 설렜다.이제 서울에 가면 석현이 있다.촬영을 위해 처음으로 오랜 기간 머물게 된 제주도는 정말 아름다운 섬이었다. 분명 서울과 같은 하늘일 텐데도 훨씬 채도가 높은 파랑의 낮은 하늘과 입체적인 구름들. 태양빛을 고스란히 받아 에메랄드빛으로 출렁이는 바다. 하지만 지난 일주일 동안 정호에게는 이 섬이 마치 저를 가둬둔 감옥처럼 느껴졌다. 일주일 전, 석현이 한국에 들어왔는데도 촬영에 발이 묶여 얼굴 한 번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자기도 처리해야 할 일들이 많다며 괜찮다고, 우선 촬영에 집중하라는 석현에게 볼멘소리로 저는 안 괜찮다고 전화기 너머로 투정 비슷한 것을 늘어놓고 말았다. “석현 씨는 맨날 괜찮대. 뭐가 그렇게 괜찮은데.” 정호는 하나도 괜찮지 않았다. 촬영 같은 건 다 집어치우고 서울로 날아가 석현을 만나고 싶었다. 촬영을 빨리 마치고 싶은 마음에 평소보다도 엄청나게 집중력을 발휘하여 대부분의 장면에서 한 번에 감독님의 오케이를 받아냈다. 이렇게까지 작품에 열심히 임한 적이 있었던가. 제 짧지 않은 연기 인생에 회의를 느낄 정도로, 스스로를 이백 퍼센트 활용하는 감각으로 촬영에 임했다. 속사정을 모르는 스태프들은 컨디션이 특별히 좋은 것 같다는 둥 이 역할이 잘 맞는 것 같다는 둥 역시 연기의 귀재라며 정호를 추켜세웠다.‘네, 제가 컨디션이 아주 좋습니다. 아주 좋은 일이 있거든요. 그래서 얼른 이것 좀 끝내고 빨리 서울에 가야겠는데요.’이제 한 밤만 더 자면 된다.소풍날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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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66

제66화오랜만에 보는 석현 때문에 정호의 심장이 난리가 난 걸 아는지 모르는지“아아, 이렇게 보고 싶을 수가 있나, 싶을 만큼”장난스런 한숨을 섞어가며 석현이 말했다.“보고 싶었어요.”석현의 보고 싶었다는 말에 정호는 가슴 언저리가 뭉근하게 따뜻해져 오는 것 같았다. 아 진짜 뭐야, 맨날 자기는 괜찮다더니. 그런 눈으로 보고 싶었단 말을 하고.“석현 씨 한국 오면 제일 먹고 싶었던 거, 먹으러 가요.”“웬만한 건 일본에서 다 먹었어요.”“그래도 여기서 먹는 거랑 같나요, 그게.”“한국 사람이 하는 집 가면 뭐 그냥 한국이랑 똑같더라구요, 정말. 정말이에요. 정호 씨 촬영 끝난 기념으로 정호 씨 먹고 싶은 거 먹으러 가요.”일본에서 만났을 때와 앉은자리는 같은데, 석현이 아닌 제 앞에 운전대가 있고 석현이 잠자코 앉아 있는 이 상황이 낯설면서도 웃음이 나왔다. 석현도 마찬가지인지 자꾸,“오오, 정호 씨 운전하는 거 멋있네요.”하며 너스레를 떨었다. 석현의 손이 제 머리칼을 만지작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정호는 석현의 흉내를 내어,“어어? 나 그럼 운전 못 해요.”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석현이 소리 내어 웃었다. 언제 들어도 좋은 석현의 웃음소리. 바로 옆에서 듣는 게 너무 오랜만이라 정호는 농담이 아니라 정말로 운전에 온전히 집중하기가 어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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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67

제67화지인과 식사할 일이 있으면 가끔 가곤 하는 레스토랑으로 석현을 안내하고 이층에 있는 룸에 마주 앉아 식사를 기다리고 있으려니 정호는 정말로 기분이 이상했다. 일본에서 비현실적으로 다시 만났을 때와는 다른 의미로 또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았다. 대체 언제쯤 이 사람은 내게 현실감 있는 존재가 되려나.“일본에서 만났을 때도 조심은 했었지만,역시 한국 오니까 다르네요.”“뭐가요?”갑자기 무슨 얘기인가 싶어 정호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석현을 쳐다보았다.“아까 일층에 밥 먹던 사람들이 다 정호 씨만 쳐다봤잖아요.”그러고 보니 오늘은 무슨 정신이었는지 모자도 쓰지 않고 마스크도 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저를 쳐다보는 것도 몰랐다. 그저 석현을 만난다는, 그리고 만났다는 생각밖에 하지 못했다.“정호 씨 이제... 괜찮은 거예요? 사람 많은 데 가도?”금방 그렇게 또 걱정스런 얼굴을 한다, 이 사람은.“괜찮아요.”이건 정말이다. 걱정할까 봐 하는 거짓말이 아니고.“석현 씨 있으니깐.”석현의 귀가 눈에 보일 만큼 빨갛게 달아오른 것이 보였다. 그걸 보니 괜히 제 얼굴도 뜨거워져오는 것 같았다. 둘 다 귀 끝이 새빨개져서는, 한참을 말없이 테이블에 놓여진 요리를 먹기만 했다. 달그락, 달그락, 포크와 식기가 부딪는 소리가 조용히 울렸다.이제 겨우 같은 서울 하늘 아래에 있게 되었는데 이렇게 못 만날 일인가. 석현을 마지막으로 만난 지 벌써 일주일이 넘어 이주일이 다 되어간다. 정호는 마지막으로 석현을 만난 게 언제인지 속으로 헤아려보다가 어이가 없어 헛웃음을 웃었다.“어, 배우님, 웃으시면 안 돼요.”정호의 얼굴에 분주하게 메이크업을 하던 손이 멈칫하는가 싶더니 금방 주의를 받았다.“아, 죄송합니다.”오늘은 광고 촬영 이외에는 스케줄이 없다. 오랜만에 비교적 한가한 날이기는 한데, 이 광고 촬영이라는 게, 몇 시에 끝날지 도대체 알 수가 없는 종류의 스케줄이라 과연 한가한 날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 정호는 잘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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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68

제68화한국에 돌아온 석현은 그 어느 때보다도 바빠 보였다. 그 겨울처럼 위태로운 느낌은 없었지만 오히려 그때보다 더 여유가 없어 보였다. 지난번에 정호의 집에 왔을 때도 잠시 눈을 붙이는가 싶더니 새벽같이 일어나 제가 깰까 봐 이어폰을 귀에 꽂고 아마도 여러 외국어로 흘러나오는 뉴스임이 분명한, 뭔가를 듣고는, 한국어가 아닌 신문을 몇 부나 무서운 속도로 읽어 내려갔다. 정호는 잠이 깬 것을 들킬까 봐 자는 척 눈을 가늘게 뜨고 집중한 석현의 옆얼굴을 오래오래 바라보았다. 어슴푸레 날이 밝아올 때까지 석현은 꼼짝도 않고 날이 선 얼굴로 신문을 읽고 있었다. 정호는 무언가에 몰두하면 분위기가 바뀌는 석현이 다른 사람 같아서 괜히 신기했다. 스탠드 불빛 아래 보이는 단정한 옆얼굴에 가슴이 뛰었다.좀 더 자주 만나고 싶은 건 너무 욕심인가.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다더니 제가 딱 그 꼴이었다. 연락만이라도 닿기를 간절히 바랐었고, 어떻게든 한 번이라도 다시 만날 수 있기를 바랐었고, 이제는 같은 나라의 같은 도시에 있게 되었는데도 만족이 안 되고 채워지지 않는 끝없는 욕심.더 자주 만날 수 있었으면 좋겠다.석현 씨를.더 자주 만날 수 있었으면 좋겠다.석현 씨를.줄곧 그런 생각을 해서인지,“그, 일본어 선생님은 제가 아는 사람한테 부탁해도 돼요?”생각 없이 입 밖으로 멋대로 말이 튀어나왔다. 일본 영화 출연이 성사되었으니 촬영이 시작되기 전까지 일본어 대사 연습에 전력을 쏟아야 한다는 설명과 함께, 앞으로 스케줄에 억지로라도 시간을 비워 일본어 개인 지도를 끼워 넣을 거라는 매니저의 이야기를 들으며 번개처럼 석현이 머리를 스쳤기 때문이다.‘그럼 더 자주 만날 수 있잖아.’ 정호는 아이처럼 해맑은 희망을 품었다. 석현 씨라면 분명 선뜻 맡아 줄 것이다.“말하는 거랑 가르치는 거랑은 전혀 달라요.나 가르치는 거 잘 못해요.”오랜만에 집에 온 석현에게 대뜸 일본어를 가르쳐달라는 얘기부터 했더니 예상외의 대답이 돌아왔다.“선생님 필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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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69

제69화석현은 그제서야 정호가 제게 부탁하는 의미를 깨달은 모양인지 조용히 웃더니 얼른 팔을 뻗어 정호를 품에 안았다. 안긴 어깨너머로 석현이 크게 한숨을 내쉬는 소리가 들려왔다.“촬영까지 준비 기간도 얼마 없다면서요,그럼 되게 스파르타식으로 해야 되는데.”어깨를 감은 팔에 힘을 줘 꽉 안아오며 나직이 말했다.“나 진짜 정호 씨한테 좋은 선생 될 자신 없어요.”그런 말까지 들으니 정호는 더 이상 석현에게 떼를 쓸 수가 없었다.결국 정호는 회사에서 섭외해 준 일본인 선생님한테 일본어 레슨을 받게 되었다. 두 번째 레슨이 끝나고 나서야 왜 석현이 제게 좋은 선생님이 될 수 없다며 한사코 거절했는지 조금 알 것도 같은 기분이 들었다. 후지키 선생님은 아주 친절한 사람이었지만 웃는 낯으로 몇 번이나 같은 문장을 지칠 때까지 반복해서 연습을 시켰다. 아주 작은 발음 실수도 용납하지 않았다. 안되면 될 때까지, 그게 선생님의 모토라고 첫 시간에 말하더니 그냥 하는 말은 아니었던 모양이다.오랜만에 머리를 많이 써서 그런지 정호는 뭔가 단 것이 당겨 자판기가 있는 휴게실로 향했다. ‘약간 어지러운 것 같기도 하고, 코코아 같은 거라도 마시면 좀 나으려나?’ 좌우로 목을 틀어 수업으로 긴장되어 있던 목뒤 근육을 풀면서 복도 모퉁이를 돌아선 순간, 회사에서 들려올 리가 없는, 아주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네 그럼, 연락드리겠습니다.”인사를 하며 인사팀장실 문을 닫는 뒷모습은 이리 보고 저리 봐도 석현이었다. ‘내가 지금 너무 힘들어서 헛것을 보는 건가?’ 정호는 눈을 꾹 감았다가 다시 떴다. 이젠 석현이 빙글빙글 웃는 얼굴로 제 앞에 서 있다.“...석현 씨?”“안녕하세요, 소배우님.”멀끔하게 수트를 차려입은 석현이 짓궂게도 고개를 꾸벅 숙이며 정중하게 인사를 해 왔다. 참 나, 정호는 웃음을 참으며 장단을 맞춰주었다.“오랜만에 뵙습니다, 전석현 씨.휴게실에서 커피나 한 잔 하실까요?”다행히 휴게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휴게실 문이 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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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70

제70화“배우님, 다른 것도 더 입어보고 결정하실래요?”“아니, 전 그냥 이것도 괜찮은 것 같은데요. 아까 입었던 것도 괜찮고.”사실 아무거나 괜찮은데,라고 생각했지만 잔뜩 의상을 준비해 준 스타일리스트에게 미안해서 정호는 차마 그 말을 입 밖으로 낼 수는 없었다.“정호야, 그래도 엘렌 가는 건데 잘 좀 골라봐. 무려 남우주연상 후보님이신데.”옆에서 보던 매니저가 한 마디 거들었다. 칸, 베니스, 베를린, 선댄스 영화제와 나란히 세계 5대 영화제 중 하나인 엘렌 영화제는 칠십 년대 후반부터 줄곧, 5년에 한 번은 다른 나라에서 개최하는 것이 특징인데 아시아에서는 최초로 서울에서 열리게 되어 개최가 결정된 시점부터 국내 영화판이 들썩거렸다.정호는 이번에는 비행기를 타고 멀리 다른 나라까지 가지 않아도 되니까 편하다고 생각했을 뿐 아무런 감흥이 없었다. 국제영화제에서 남우주연상 후보에 오르는 것도 처음은 아니고 이번에도 아마 다른 사람이 받을 것이다. 조연상을 받은 지도 얼마 되지 않았고 저는 아직 주연상을 받을 정도는 아니라고, 정호는 생각했다.‘오랜만에 석현 씨를 보겠구나.’세계 각국에서 귀빈들이 모이는 자리이고 전 세계로 생중계되는 행사인지라 영화제 측에서는 한국에 전문통역팀을 구성해 줄 것을 요청했는데 그쪽에서 총괄지휘자로 석현을 지목하는 바람에 두 달 전부터 석현은 눈코 뜰 새 없이 바빠 보였다. 제가 아는 석현이라면 아무리 영화제 측에서 직접 요청이 들어왔다고는 해도 분명 거절하고도 남을 종류의 일인데 어째서 넙죽 수락한 건지 정호는 아직도 의문이었다. 지금까지 옆에서 지켜본 바로는 석현은 가능하면 사람과 직접 만나지 않으면서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을 선호하는 사람이다. 영화제처럼 부산스럽고 사람이 많은, 게다가 팀으로 해야 하는 일을 할 것 같은 사람이 아니다. ‘안 그래도 바쁜 사람이 무슨 바람이 든 거야 대체.’석현이 바빠지는 덕분에 지난 두 달 동안 만난 횟수는 한 손으로도 손가락을 접어 충분히 셀 수 있을 만큼 적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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