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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65

작가: 김흰
제65화

영 잠이 오지 않아 정호는 호텔 베란다 문을 열고 슬리퍼를 신었다.

늦여름의 눅진한 바닷바람이 불어와 방금 말린 머리칼이 흩날리는 것이 느껴졌다. 새까만 바다 위로 보이는 밤하늘은 아름다웠지만 그 언젠가 석현이 보여주었던 하늘처럼 저절로 탄성을 내뱉을 정도는 아니었다.

정호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내일이면 드디어 여기 제주도에서의 촬영이 끝난다. 삼 주가 넘는 긴 여정이었다.

내일이면 서울로 간다고 생각하니 가슴속에서 풍선이 부풀어오는 것처럼 설렜다.

이제 서울에 가면 석현이 있다.

촬영을 위해 처음으로 오랜 기간 머물게 된 제주도는 정말 아름다운 섬이었다.

분명 서울과 같은 하늘일 텐데도 훨씬 채도가 높은 파랑의 낮은 하늘과 입체적인 구름들. 태양빛을 고스란히 받아 에메랄드빛으로 출렁이는 바다.

하지만 지난 일주일 동안 정호에게는 이 섬이 마치 저를 가둬둔 감옥처럼 느껴졌다. 일주일 전, 석현이 한국에 들어왔는데도 촬영에 발이 묶여 얼굴 한 번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자기도 처리해야 할 일들이 많다며 괜찮다고, 우선 촬영에 집중하라는 석현에게 볼멘소리로 저는 안 괜찮다고 전화기 너머로 투정 비슷한 것을 늘어놓고 말았다.

“석현 씨는 맨날 괜찮대. 뭐가 그렇게 괜찮은데.”

정호는 하나도 괜찮지 않았다. 촬영 같은 건 다 집어치우고 서울로 날아가 석현을 만나고 싶었다.

촬영을 빨리 마치고 싶은 마음에 평소보다도 엄청나게 집중력을 발휘하여 대부분의 장면에서 한 번에 감독님의 오케이를 받아냈다.

이렇게까지 작품에 열심히 임한 적이 있었던가. 제 짧지 않은 연기 인생에 회의를 느낄 정도로, 스스로를 이백 퍼센트 활용하는 감각으로 촬영에 임했다.

속사정을 모르는 스태프들은 컨디션이 특별히 좋은 것 같다는 둥 이 역할이 잘 맞는 것 같다는 둥 역시 연기의 귀재라며 정호를 추켜세웠다.

‘네, 제가 컨디션이 아주 좋습니다. 아주 좋은 일이 있거든요. 그래서 얼른 이것 좀 끝내고 빨리 서울에 가야겠는데요.’

이제 한 밤만 더 자면 된다.

소풍날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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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81화석현이 번역한 ‘푸른 시간의 기억’보다 먼저 세상에 나온 영화 ‘지나간 나날들’에서 정호가 맡았던 ‘한’이라는 이름의 주인공은 원작 소설에서는 제임스라는 이름으로, 오랫동안 소식을 알 수 없었던 어릴 적 친구와 직장에서 재회하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그저 추억으로만 남아있던 어릴 적 몰래 좋아했던 친구를 어른이 되어 현실에서 다시 만나게 되면서 제 감정에 대해 고민하는 과정에서 섬세한 표현을 요하는 장면이 많아 컷 하나하나 고민해 가며 어렵게 촬영했고 그만큼 정호를 많이 자라게 한 작품이었다.“아, 오랜만에 다시 보고 싶다. 정호 씨랑 같이.”불쑥, 그런 말을 내뱉은 석현이 개구쟁이같은 얼굴로 제게 빤히 눈을 맞춰온다.“음? 뭐요? 뭐가요?”“지나간 나날들이요.”부끄러워서 절대 안 된다고, 보고 싶으면 석현 씨 혼자 보라고, 한사코 손을 내두르며 버텼지만 결국 밥 먹는 내내 저를 조르고 설득하는 석현에게 지고 말았다. ‘하긴 이 사람을 내가 무슨 수로 이기나.’ 석현과 나란히 소파에 앉은 정호는 작게 한숨을 쉬며 오프닝 크레딧이 흘러나오는 화면을 노려보았다.정호가 연기한 한이 사랑했던 학창 시절의 현수는 부모의 학대 때문에 치마를 입고 머리를 기른 모습으로 생활하는 소년이다. 한은 현수가 여자애가 아니라는 걸 처음부터 알고 있지만 줄곧 모르는 것처럼 행동한다. 감정은 이유 없이 불시에 찾아온다. 한이 현수에게 반하는 순간의 얼굴이 클로즈업되었다.“와... 정호 씨 나한테 저런 표정 지은 적 한 번도 없는 거 같은데.”“아니 저건 연기잖아요, 연기. 연습해서 만들어낸 표정이라구요.”역시 석현과 함께 보는 게 아니었다고, 불쌍한 얼굴 좀 하고 조른다고 해서 져주는 게 아니었는데, 라고 늦은 후회를 하며 정호는 한숨을 쉬었다. 장면마다 석현의 놀림 아닌 놀림이 이어지는 데다가 몇 년도 더 전의 앳된 얼굴을 한 제가 연기하는 걸 보는 게 쑥스러워 어딘가로 숨고 싶어졌다.어느덧 영화는 클라이맥스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한과 현수

  • 엔딩 크레딧에서 당신의 이름을 찾아   Chapter80

    제80화커피머신이 우우웅 소리를 내며 돌아가고 쌉싸름한 커피 향이 금세 코끝으로 밀려들어왔다. 정호는 모처럼 내린 커피를 쏟을까 조심조심 걸음을 옮겨 건너편 방문을 열었다.벽면이 모두 책장인 석현의 작업실에 들어가면 늘 오래된 책과 종이와 잉크 냄새가 난다. 여러 개의 모니터를 앞에 두고 앉은 석현이 두들기는 키보드 소리가 타닥타닥 하고 경쾌하게 들려온다. 여전히 정호가 들어온 줄도 모르고 집중한 뒷모습. 코 앞에 커피를 내려놓자 그제야 손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저를 본다.“아니 소정호 씨가 이런 특별 서비스를 다 해주시고.”석현이 웃는다. 꽃이 피는 것 같은 웃음이다. 몇 번을 봐도 익숙해지지가 않고, 매번 어김없이 가슴이 뛰고 그저 좋기만 한 이 사람의 웃는 얼굴.“쉬엄쉬엄 해요. 마감 아직 여유 있잖아요.”“응 그래서 알레그로 아니고 모데라토 정도로 작업하고 있는데요.”번역 작업할 때 옆에서 보면 피아노를 연주하는 것 같다고 제가 지나가듯 말했던 걸 잘도 기억하고 이런 농담을 해온다.“뭐예요 그게, 그럼 마감 임박하면 알레그로로 하는 거예요?”“마감 전엔 프레스토!”“프레스토? 그게 젤 빠른 건가?”“아마도요.”“석현 씬 대체 모르는 게 뭐예요?”앉은자리에서 부스스 일어나 어깨를 꼭 끌어안더니,“정호 씨가 왜 이렇게 좋은지,그걸 모르겠어요. 정말.”장난스럽게 대꾸하고 금방 얼굴을 부벼온다. 좋은 냄새가 난다. 석현 씨 냄새.다음 달이면 같이 산 지도 일 년이 된다. 시간은 언제나 그렇듯 우리를 기다려주지 않고 무심하게 꾸준히 흘러간다. 절대로 멈추는 법이 없다.“어, 지나간 나날들, 대본 이제 온 거예요?”아니 당장 모레부터 연습이라면서요, 그걸 오늘이 돼서야 보내나, 거참 되게 일 못하네, 한 번 읽었던 대본을 다시 훑어보는 중인 정호의 옆에 앉아서 석현이 못마땅한 듯 중얼거렸다. '지나간 나날들'은 한국에서 영화화가 되고 난 후에야 원작이 주목을 받는 바람에 한국어판 소설은 영화보다 나중에 나왔다. 그 소설의

  • 엔딩 크레딧에서 당신의 이름을 찾아   Chapter79

    제79화정호에게 오점이 될까 두렵다는 석현의 말을 듣던 정호는 석현의 품에 안긴 채로,“오점이라니요. 석현 씨가 왜 오점이 돼요 나한테.그 말 취소해요.”괜히 장난처럼 시비를 걸었다.“알았어요. 취소.”석현이 웃음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아 뭔가 좀 더 투정을 부리고 싶은데.’정호는 왠지 무언가 덜 풀린 기분이 들었다.“석현씬 맨날 자기 마음도 말 잘 안 해주고.”“아니 그걸 꼭 말로 해야 알아요?”“말을 안 하면 어떻게 알아요? 내가 좋아한다고 말하기 전에 내가 좋아하는 거 알았어요?”“아니, 그때랑 지금이랑은...”말문이 막힌 듯 석현이 흐읍, 숨을 고쳐 쉬었다.갑자기 안았던 팔을 풀어낸 석현이 정호의 어깨를 붙잡아 저를 보게 했다. 정호는 왠지 부끄러워져 눈을 맞출 수가 없었다. 아까 다툰 것의 여파인지 속얘기를 다 털어놓아서인지 석현을 바로 쳐다보기가 열쩍었다.“정호 씨, 나 좀 봐요.”뭘 또 굳이 자기를 보래. 가슴 떨리게 왜 이래 이 사람.“사랑해요.”갑작스러운 고백에 놀라 정호는 석현을 보았다. 흔들림 없이 저를 향한 짙은 갈색 눈동자.“나 정호 씨 사랑한다구요.”정호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석현은 나직하고 힘있는 목소리로 몇 번이나 말했다.“나 전석현은, 소정호를, 사랑한다구요.”좀 알아 줘요, 라는 석현의 말에 정호는 아무런 대답도 못하고 바보처럼 그만 울고 말았다.“생각보다 대사가 바뀐 데가 많네...”대본을 덮고 작게 혼잣말을 한 정호는 소파에서 몸을 일으켜 크게 기지개를 켰다. 한 시간이 넘도록 집중해서 대본을 읽었더니 눈과 어깨가 뻐근했다. 몇 년 만에 받은 사흘 휴가의 가운뎃날이다. 이틀 이상을 연속으로 쉬는 게 대체 얼마만인지 내일도 쉴 수 있다는 게 실감이 나지 않을 정도다. 얼른 주차장으로 내려오라고 지금 당장이라도 매니저한테 전화가 걸려올 것만 같다.예전에 정호가 출연했던 영화가 연극으로 상연되기로 결정되면서 결국 제가 했던 역할이 다시 제게 돌아왔다. 아역 시절에 작은 역

  • 엔딩 크레딧에서 당신의 이름을 찾아   Chapter78

    제78화정호는 소리 내어 울었다. 이제 석현 없이는 살 수 없다고, 겨우 입 밖으로 내뱉은 깊은 속마음이 서러웠다.정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석현이 양손으로 정호의 어깨를 세게 붙들어왔다. 짙은 갈색의 눈동자로 제 눈을 뚫어지게 응시한 채,“나는요? 나는 정호 씨 없이 살 수 있을 것 같아?”처음 듣는 석현의 격앙된 목소리. 눈물이 고여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상처받은 눈. 이제 정호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석현 씨 지금 화났구나.생각해 보니 석현이 화난 목소리로 말하는 걸 처음 듣는 건 아니다. 병원에서 처음 만났던 날, 소속사 사람과 통화하던 석현의 목소리가 문틈을 비집고 들려왔을 때도 석현은 저를 위해 화를 내주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의 석현은 그때와는 또 다르다. 그때보다 훨씬, 날것의 감정이 느껴졌다. 어깨를 잡은 석현의 손이 떨려왔다.석현은 아무런 기약도 없이 스웨덴에서 하던 일을 다 정리하고 일본으로 거점을 옮기며 얼마나 참담하고 불안했는지, 어떻게든 정호를 만나기 위해 혼자서 이런 저런 방법을 강구하며 느낀 자괴감에 제가 음습한 스토커가 된 기분이었다는 이야기를, 중간중간 북받쳐 오는 감정을 추스르느라 말을 멈추어가며 힘겹게 쏟아냈다. 석현은 이야기를 듣는 내내 울음이 멎지 않아 눈물만 흘리는 정호를, 어깨를 잡고 있던 손을 그대로 끌어당겨 품에 꽉 안았다. 복잡한 감정이 뒤엉킨 눈동자가 무섭도록 깊고 짙었다.“석현 씨 그런 이야기 나한텐 한 번도 안 했잖아요.”‘참 못났다 소정호, 이런 말이나 하고.’정호는 석현에게 이루 말할 수 없이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그 마음이 너무 커서인지 미안하다는 말조차 입 밖으로 쉽게 나오지 않았다. 미안하다는 말보다 더 미안한 단어가 있다면 그걸 쓰고 싶었다.“이런 얘길 왜 해야 돼요, 정호 씨 마음 아프게.”저를 꼭 안은 채 여전히 화가 난 것 같은 목소리로 석현이 말했다.폭풍이 지나간 듯 감정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엔 왠지 어색한 공기가 감돌았다. 샤워를 마친 후 자려고 나

  • 엔딩 크레딧에서 당신의 이름을 찾아   Chapter77

    제77화“석현씨, 무슨 사이죠, 우린?”“뭐... 뭐라구요?”귀국하자마자 집에 짐만 두고 곧장 정호에게 온 석현이 한숨을 돌리기가 무섭게, 정호는 줄곧 생각했던 질문을 던졌다. 어이가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쉰 석현이 입을 열었다.“그게 또 무슨 말이에요, 정호 씨는 그렇게 막 불안해요? 내가?”정호는 잠자코 석현의 대답을 기다렸다.“아니, 내가... 왜, 어떻게 다시 한국까지 왔는데... 내가 어떤 마음인지, 전혀 모르겠어요?”석현은 대답이 아닌 질문만을 던져왔다.“안 되겠네, 이참에 서로 솔직히 얘기 좀 해요. 이런 게 다 쌓이면 독이 되는 거고. 정호 씨가 이렇게까지 불안해하는 걸 내내 몰랐다는 게, ...솔직히 나도 속상하니까.”속상하니까, 라고 말하는 석현의 말끝이 떨려왔다. 곧 차분한 어조로 어디 한 번 얘기 좀 해봐요, 하면서 석현이 자세를 고쳐 앉았다.어디서부터 무슨 얘기를 해야 하나. 이 불안은 어디에서 시작된 걸까. 석현을 다시 만날 수 있을지 실낱같은 희망만을 붙들고, 없는 번호라는 알아듣지도 못할 언어로 흘러나오는 메시지를 몇 번이나 확인했던 그때부터인가. 상상도 못 했던 곳에서 갑자기 만나 이게 꿈인가 싶어 번듯한 말 한마디도 못하는 저와는 달리 너무나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웃어 보이던 석현 앞에서 작아지는 기분을 느꼈던 그때부터인가. 나는 이제 정말,“나는 이제 정말, 석현 씨가 없으면, 살 수가 없는데.”이야기를 하다 보니 역시나 저도 모르게 울고 있었다.

  • 엔딩 크레딧에서 당신의 이름을 찾아   Chapter76

    제76화아무래도 신경이 쓰였던 모양인지 석현답지 않게 출장 중인데도 빈번하게 연락을 해왔다. 제가 스케줄 중이라 받지 못한 부재중 전화에 석현이 걸었을 법한 번호가 보이면 마음이 놓이면서도 속이 상했다. 석현의 연락처가 없어서 걸려오는 전화를 기다릴 뿐 제가 연락을 할 수가 없으니 이상하게 불안했다. 지면에 발을 딛지 않은 채 붕 떠 있는 것 같은 기묘한 부유감이 정호를 괴롭혔다.“근데 정호 씨는 정말, 내가 미덥지 못한가 봐요.”제 불안한 마음을 토로하자 핸드폰 건은 정말로 미안하다고 벌써 몇 번째인지 알 수 없는 사과를 하고는 전화기 너머로 희미하게 한숨을 쉰 석현이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대체 뭐가 그렇게 불안해요, 정호 씨는.” 내가 어떻게 겨우 정호 씨한테 닿았는데, 막 그렇게 금방이라도 사라질 것 같고 그래요?”순간 석현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순순히 미안하다는 말은 나오지를 않고,“석현 씨는 왜 그렇게 항상 여유로운 건데요?”오히려 원망하는 어조로 말하고 말았다.“... 내가, 여유로운 것 같아요?”전화기 저편에서 들려오는 석현의 목소리가 약간, 화가 난 것 같았지만 석현이 제게 화낸 적이 한 번도 없어서인지 목소리만으로는 확신이 서지 않았다. ‘지금 석현 씨 화난... 건가?’ 곧 크게 한숨을 쉰 석현이 다시 나직한 목소리로.“이러다 싸우겠어요. 내일 한국 가서 얘기해요.”정호는 전화를 끊고 침대에 털썩 드러누워 멍하니 천장을 보았다.나는 이제 석현 씨가 없이는 살 수 없다.석현 씨는 알고 있을까.석현 씨, 나는 석현 씨에게 어떤 의미인가요.

  • 엔딩 크레딧에서 당신의 이름을 찾아   Chapter75

    제75화지금 거신 번호는 없는 번호입니다. 다시 한번 확인하시고 걸어주시기 바랍니다.정호는 제 귀를 의심했다. ‘지금 거신... 뭐라고?’머리를 세게 얻어맞은 것처럼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뭔가 통신 오류가 난 건가, 무슨 시스템에 문제라도 생겼나. 그럴 리가 없는데. 그럴 리가. 정호는 다시 통화버튼을 눌렀다. 손이 제멋대로 떨려왔다.지금 거신 번호는 없는...안내멘트를 마지막까지 듣지 못하고 정호는 전화를 끊었다.이게 지금 무슨 상황인지 전혀 알 수가 없어 머릿속은 혼란스러울 뿐인데도 몸이 먼저 반응해 걷잡을 수 없이 눈물이 흘렀다. 다리에 힘이 풀려 그대로 주저앉았다. 심장이 무섭게도 빠르게 뛰어왔다. 아니 이건 좀 너무, 빠르게 뛴다. 정호는 정말 오랜만에 덜덜 떨리는 손으로 가방을 더듬어 황갈색 알약을 찾아 삼켰다.석현은 지금 출장으로 일주일 동안 스위스에 가 있다. 바로 이틀 전까지만 해도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로 통화를 했다. 출장이 끝나고 돌아오면 여유가 있으니까 어디 조용한 데로 놀러 가자고, 그런 이야기를 했었다. 마지막으로 통화했을 때 내가 눈치채지 못한 뭔가 이상한 낌새가 있었나? 석현 씨 목소리가 어땠지? 분명 우는 목소리는 아니었는데.‘그런데 왜 없는 번호가 된 거지, 석현 씨 전화가.’정호는 불시에 모든 사고회로가 정지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정말 아무런 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지금 이 상황이 뭐가 어떻게 된 건지를 전혀 파악할 수 없었다. 이대로 다시는 석현을 만날 수 없을 것만 같은 예감이 파도처럼 저를 덮쳐왔다.나는 이제 석현 씨가 없이는 살 수 없다.이성적으로 상황을 판단할 여력 따윈 없었다. 사무치게 제 마음을 깨달았을 뿐이었다. 가파른 절벽 위에 선 기분이었다. 끝없는 절망 속에서도 약기운이 도는지 가빠졌던 호흡이 진정되어 왔다. 기분 탓인지 심장이 여전히 방망이질 치는 것처럼 느껴졌다.바닥에 드러누운 정호의 귀에 부우웅 진동소리가 들려왔다. 플러스 사, 일로 시작되는 번호였다.

  • 엔딩 크레딧에서 당신의 이름을 찾아   Chapter74

    제74화정호가 다른 사람처럼 멋있어 보였다는 말에 정호도 서둘러 오늘 하루 내내 생각하던 말을 했다.“나는 오늘 석현 씨가 너무 멋있었는데요. 그, 진짜 다른 사람 된 것처럼요. 되게, 멋있었어요.”정호의 말에 눈빛이 짙어진 석현이 답답한 듯 한숨을 내쉬더니,“역시 안 되겠죠? 여기서 껴안으면.”“음, 축하의 포옹으로 보이지 않을까요?“아니야, 역시 안 되겠어요. 껴안는 데서 못 멈출 것 같아요, 나.”팀장님을 목놓아 부르짖으며 석현을 찾는 선재의 목소리에 이따 집에서 봐요, 하고 석현이 먼저 시끌벅적한 공간으로 돌아갔다. 정호는 석현에게 건네받은 커피를 마저 마시고 나서도 한참을 밖에 서서 창문 너머로 보이는 석현을 바라보았다. 제가 아까 창문 밖을 보기 전까지 석현이 그랬던 것처럼.영화팀 회식과 통역팀 회식은 분명 동시에 끝났는데 집에서 보자던 석현은 여태 소식이 없다. 빨리 샤워를 해서 제 몸에 배인 고기냄새와 술 냄새를 씻어내고 싶은데. ‘석현 씨 오기 전에 우선 먼저 샤워를 할까?’ 그러기에는 주인 없는 집에서 너무 맘대로 구는 것 같기도 하고.참지 못한 정호는 결국 석현에게 전화를 걸었다.“석현 씨, 왜 안 와요, 어디예요?”“정호 씬 어딘데요?”“석현 씨 집이죠.”“네? 난 정호 씨 집인데?”정호는 샤워를 하면서도 이 상황이 너무 웃겨서 이상한 사람처럼 자꾸 혼자 소리 내어 웃었다. 석현의 집에서 제가 혼자서 샤워를 하고 있고 석현은 아마도 제 집에서 샤워를 마치고 올 것이다. 집에서 보자는 말에 서로 다른 집을 떠올린 두 사람 다 어느 쪽 할 것 없이 너무 바보 같다는 생각이 들어 계속 웃음이 나왔다. 제 몸을 휘감는 석현의 비누 냄새에 기분이 좋아졌다. 머리를 다 말리고 소파에 앉으려는 순간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아아, 겨우 만났네요.” 라고 말하며, 머리끝이 아직 약간 젖은 채 저를 껴안아오는 석현에게서 제가 쓰는 익숙한 비누 냄새가 났다. 행복에 냄새가 있다면 분명 이런 냄새일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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