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3화한 시간 후면 출발해야 한다던 석현은 무슨 준비할 게 그렇게 많은지 거의 한 시간이 다 지나서야 급하게 방에서 나왔다. 의아하게도 아까와 전혀 다름없는 모습이었다. 손도 대지 않은 듯한 뒷머리가 여기저기 뻗쳐있었다. 옷도 갈아입지 않고 집에서 늘 입는 편한 옷을 입은 채로 서둘러 두꺼운 패딩 점퍼에 팔을 꿰었다. 나갈 준비를 한다더니. 뭐 급하게 해야 할 다른 일이라도 있었던 건가.정말 멀리까지 가야 하는 모양인지 석현은 지도를 확인해가며 집중해서 차를 몰았다. 중간에 주유소에 들러 기름을 넣는 동안 나란히 서서 커피와 빵을 사 먹었다. 입이 깔깔해 잘 넘어가지 않았다. 석현은 줄곧 이렇다할 말도 없이 눈도 잘 맞춰주지 않았다. 그런 석현이 야속하면서도, 이런 상황에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는 그 마음을 저도 왠지 알 것 같아서 정호는 마음이 쓰렸다.조용히 운전하는 석현을 하릴없이 바라보았다. 석현은 여기에 있지만 없는 사람처럼 희미하고 위태로워 보였다. 늘 금방이라도 연기처럼 사라질 것 같은 아스라한 분위기가 있었다. 석현을 향한 제 마음을 깨닫기 전부터 정호는 석현을 보면 어딘가 허무하게 마음이 아팠다. 정호는 이제야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다시는 만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예감 때문이었다.정호는 마음이 조급해졌다.“석현 씨,”정호가 입을 열었다.“나 석현 씨 진짜 좋아해요. 많이 좋아해요.”서둘러 이 마음을 몇 번이고 말해 두고 싶었다.잊지 않도록. 잊을 수 없도록.“한국 가서도 연락 자주 할게요.우리 둘 다 바쁘지 않은 시기에 어디라도 괜찮으니까, 어딘가 중간 지점에서 만나요. 아무래도 여기까지 나 혼자서는 못 올 것 같으니깐.”말없이 입술을 꼭 깨문 석현의 옆모습을 보며 정호는 독백처럼 말을 이어나갔다.“석현 씨가 한국 오기 힘든 거면,한국 아닌 데서 만나면 되는 거니까.우리 영영 못 보는 거 아니니까.”말 한 마디 한 마디에 힘을 주어 말했다.눈물이 날 것 같았다.“그러니까 나 좀
제34화공항에 도착하자 회사 통역 및 해외 업무를 담당해주는 선재의 낯익은 모습이 멀리 보였다. 아, 선재 씨가 이 먼 데까지 데리러 와줬구나. 너무 고맙고 미안하네. 그런데 나는 이렇게 가기가 싫어서, 어떡하지. 어떡하면 좋지.차에서 내리기 전, 석현이 불쑥 정호의 손을 붙잡았다. 울고 난 처연한 얼굴이 창백했다. 무언가를 말하고 싶은 듯한 얼굴로 석현은 자꾸 애꿎은 입술만 깨물었다. 정호는 석현의 어깨를 끌어안고 등을 토닥였다.“괜찮아요, 말 안 해도. 괜찮아요, 석현 씨.”정호의 말에 다시 흘러나오는 눈물을 서둘러 훔치며, 석현이 정호의 주머니에 무언가를 넣어주었다. 오른쪽에도, 왼쪽에도.“편지 썼어요.”너무 울어서 맹맹한 목소리로 석현이 말했다.“한국 도착해서 읽어줘요.”“그건 너무 오래 걸리잖아요.”애써 아무렇지 않게 엄살을 떠는 정호의 말에 석현이 풋 웃는가 싶더니 이내 다시 우는 얼굴이 되어,“그럼, 그러면, 출발하고 나서 읽어요.”석현은 급하게 쪽지에 전화번호를 쓰더니 그것도 정호의 주머니에 집어넣어주었다. 금방이라도 죽을 것 같은 목소리로,“정호 씨,”석현은 몇 번이나 정호의 이름을 불렀다.“정호 씨, 연락 기다릴게요. 연락해요.”그 말을 하는 석현의 눈이 무섭도록 짙고 깊었다.
제35화“이선재입니다. 전석현 선생님, 이렇게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석현에게 악수를 청하는 선재의 말에 정호는 의아해져 석현을 바라보았다. 언제 울었냐는 듯, 말끔한 웃는 낯으로 선재가 내민 손을 가볍게 마주 잡으며 석현이 작게 고개를 숙였다. 분명 친절하게 웃고 있는데도 어딘가 차가워 보이는 석현이 낯설었다. 정호가 2주 동안 함께한 사람과는 마치 다른 사람 같았다.“그럼 가시는 길 모쪼록 조심해서 가십시오.”사무적인 말투로 선재에게 인사를 건넨 석현이 정호에게도 가볍게 목례를 하고는 등을 돌려 주저없는 걸음으로 멀어져갔다. 정호는 석현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그 자리에 서 있었다.“와…… 진짜 전석현이잖아…… 와…… 미친…… 이거 진짜.”정호의 뒤에서는 선재가 석현과 악수를 나눴던 손을 만지작거리며 실감이 나지 않는다는 듯 중얼거리고 있었다.“석현씨를, 알아요?”정신을 차린 듯 퍼뜩 정호를 본 선재가 흥분해서 대답했다.“그럼요! 이쪽 통번역 판에선 완전 유명하죠!”선재의 이야기로는 몇 년 전 홀연히 한국을 등지고 떠나 자취를 감춘 석현을 집요하게 찾는 사람들도 많다고 한다. 항간에는 석현이 죽었다는 소문도 있었지만 한국어가 아닌 외국어를 다시 다른 외국어로 번역한 작업물들에 간간이 이름이 올라와 석현이 살아있음을 알 수 있었다고. 그마저도 어딘가에 살아있다는 게 겨우 확인이 되었을 뿐, 그가 어디에 있는지, 구체적인 소재지를 알게 된 건 이번이 처음이라고 했다. 선재는 이름만 듣던 전석현을 만났다는 기쁨 때문인지 정호의 안색은 신경도 쓰지 않는 것 같았다.더, 더 제가 모르는 석현의 이야기를 캐묻고 싶었지만 오랜만에 다시 '배우 소정호'의 얼굴을 하게 된 정호는 마음속에 떠오르는 수많은 질문들을 속으로 삼켜야 했다.탑승 수속을 마치고 비행기에 탄 정호는 그저 멍했다. 막상 한국에 돌아갈 생각을 하니 막막했다. 결국 한 씬도 촬영 못 했는데 그건 어떻게 되는 거지. 나 때문에 영화 엎어지는 건 아니겠지. 비행기 좌석에 눕듯이
제36화눕듯이 몸을 누이고 있던 정호는 퍼뜩 몸을 일으켜 앉아 외투 주머니를 뒤졌다. 왼쪽 주머니에서 석현이 적어준 전화번호가 적힌 쪽지와 함께 네모 반듯하게 접힌 인쇄용지, 그리고 오른쪽 주머니에서는 작은 약 봉지가 나왔다. ‘어? 이 약봉지는...’겉면에 쓰인 날짜를 보니 마지막으로 함께 병원에 갔던 날 석현이 건네받았던 그 약봉지인 모양이다.“이건, 그...정호씨 약 아니에요.”분명 석현은 정호의 약이 아니라고 했었다. 굳이 꼬치꼬치 캐묻진 않았지만 정호는 자연스레 석현의 약이겠거니 했다. 하지만 이렇게 잘 보니 약봉지에는 흘려 쓴 글씨로,J.H SO제 이름이 확실하게 쓰여 있었다. ‘뭐지...?’ 정호는 서둘러 내용물을 확인했다. 봉투를 뒤집으니 손바닥에 툭, 떨어지는 투명한 약 껍질 안에 나란히 늘어선 익숙한 황갈색의 동그란 알약이 보였다. 여덟 알 짜리였고 그 중 한 알이 비어 있었다.“한 알, 한 알이면 돼요? 응? 정호씨!내 말 들려? 정호씨! 한 알이면 되는 거야?” 제가 발작을 일으켰던 순간의 석현의 다급한 목소리를 떠올렸다. 정호는 몹시 혼란스러웠다. ‘그래, 석현씨도 공황장애가 있다고 했지...그런데 왜 내 이름으로 약을 받은 거지? 애초에 이 약을 나한테 왜 준 거야, 자기는 어쩌려구. 한국에 가는 동안 내가 발작이라도 일으킬까 걱정이 돼서 그런 건가?’참 알다가도 모를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조금 아연한 심정으로 석현이 편지라고 했던 아무렇게나 접힌 종이를 부스럭 부스럭 펼쳤다.편지는 그 흔한 누구누구에게, 혹은 이름을 부르는 말도 없이 갑자기 시작되었다. 급하게 휘갈겨 쓴 듯한 글씨가 빼곡히 종이를 채우고 있었다.먼저 이런 식으로 중요한 이야기를 전하는 나를 용서해줘요. 사실 아직도 이게 중요한 이야기인지 별것 아닌 이야기인지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얼굴을 마주 보고 말할 자신이 없어서 내내 말을 못 한 걸 보면 아주 중요한 이야기인 것 같기도 하네요. 이 이야기를 들은 정호 씨 얼굴을 볼 자신이 없는
제37화정호는 얻어맞은 듯 멍한 머리로 창밖을 보았다. 비행기에서 늘 보이는 익숙한 구름 가득한 하늘이 펼쳐져 있었다. 눈 덮인 평원과도 같은 풍경이었다. 석현과 함께 지냈던 이국의 풍경이 떠올라 가슴이 답답해졌다. 정호는 한숨을 내쉬며 제 손에 든 종이를 하릴없이 바라보았다. 끝났다고 생각한 편지의 뒷장에 이어지는 문장이 얼핏 보였다. 시트에 기대어 있던 몸을 일으켜 앉아 뒷장을 확인했다.정호 씨, 좋아해요.정말, 좋아해요.꾹 눌러 쓴 글씨였다. ‘좋아해요’, 석현에게 듣고 싶었던 말이었다. 노래하는 듯한 그 목소리로 직접. 정호는 가슴이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았다. 이런 식으로 전해 듣고 싶은 건 아니었다. 속에서 뭔가가 끓어오르는 것 같았다. 이상하게도 자꾸만 눈물이 나려고 해 입술을 연신 깨물었다.수많은 석현의 표정들이 떠올랐다. 저를 지긋이 보던 짙은 갈색의 눈동자, 해사한 웃는 얼굴, 제가 발작을 일으켰던 날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로 자기 탓을 하던 모습, 저를 꼭 껴안고 놓지 않던 저녁. 정호는 그것들이 모두 거짓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만약 석현 씨가 거짓말을 하지 않았더라면, 처음 만난 날 대뜸 ‘소정호 씨, 팬입니다’라고 했더라면, 나는 과연 마음 편하게 석현 씨 집에서 지낼 수 있었을까. 편하게 지내기는커녕 안심하고 내 정보를 건네주고 회사에 연락이나 할 수 있었을까.’거기까지 생각하자 정호는 문득 어느 정도는 납득이 되는 것 같았다. 적어도 제가 아는 석현이라면, 분명 저를 위해 거짓말을 하기 시작했을 것이라고. 거짓말을 하면서 가장 괴로운 건 아마도 석현이었을 것이라고. 눈가가 빨개지도록 울던 석현이 떠올라 정호는 얻어맞은 것처럼 가슴이 아팠다.그런데 정호 씨, 나는요, 우리가 언제 다시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드문드문 연락을 주고받다가 아무렇지 않게 멀어져 그저 알던 사람 중의 한 명이 되고 싶지는 않아요. 부디 내 욕심을 이해해주길. 이게 내가 나를 지키는 방법이에요. 끝까지 비겁해서 미안해요
제38화정호는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쏟아지는 플래시 세례를 받으며 돌아왔다는 것을 사무치게 실감했다.“많은 분들께 걱정을 끼쳐드려 죄송하구요, 앞으로 더 건강하게, 많은 작품에서 찾아뵐 수 있게 노력하는 소정호가 되겠습니다. 감사합니다.”소속사에서는 정호가 조난당한 것조차도 화제성이 있다고 생각했는지 적극적으로 뉴스를 흘린 모양이었다. 이런 식으로 활동을 재개하게 되다니. 최악이다. 오랜만에 서는 카메라 앞에서 정호는 담담한 목소리로 사과와 감사의 마음을 준비된 대사처럼 읊고 고개를 숙였다.서둘러 밴으로 이동한 정호는 오랜만에 만난 매니저에게 인사도 건네지 않고 황급히 물었다.“형, 내 핸드폰 가지고 왔어요?”하지만 매니저가 건네준 핸드폰은 정호가 쓰던 것이 아니라 보호필름도 떼어내지 않은 새것이었다. 정호의 물건들이 한국까지 옮겨지는 와중에 어디에선가 핸드폰이 없어지는 바람에 유출 위험성이 있어 번호도 바꾸고 새로 만들었다고 했다. 정호는 머릿속이 새하얘지는 것 같았다. ‘그럼 석현 씨가 나한테 전화를 못 할 텐데? 걸어도 없는 번호라고 나올 텐데?’공항으로 향하는 길에 몇 번이나 길가에 차를 세우며 울던 석현의 얼굴이 떠올라 마음이 불안해졌다.제가 얼른 전화를 걸어야겠다고 생각은 했지만 이제 막 복귀한 배우 소정호의 스케줄은 한가하게 전화를 걸고 있을 만큼 그렇게 녹록지 않았다. 옷을 갈아입을 시간도 없이 촬영하던 영화팀과의 미팅이 있었고, 새로 촬영에 들어갈 다음 작품을 오늘까지는 결정해야 한다며 예닐곱 개의 시나리오를 건네받았다. ‘이봐요, 나 죽다가 살아 돌아온 사람이라고요. 거의 이틀을 꼬박 비행기 타고 온 사람이라고.’살인적인 스케줄로 움직이는 데에는 익숙할 대로 익숙해진 정호였지만 워낙 오랜만이기도 하고, 2주일 동안 석현의 다정함에 기대어 지내고 와서 그런지 몰려오는 일들이 유독 팍팍하게 느껴졌다.서너 개의 미팅이 끝나고 늦은 밤 회사 휴게실에서 겨우 혼자가 된 정호는 마음을 다잡고 석현이 적어준 전화번호로
제39화“저 찾으셨어요?”노크 소리와 함께 선재가 들어왔다. 다행히 이 시간까지 회사에 남아있었던 모양이다.“선재 씨 스웨덴어 할 줄 알죠?”“네? 스웨덴어요? 아뇨. 전 영어랑 중국어만.”“그럼 누구 스웨덴어 할 줄 아는 사람 없어요?”“스웨덴어요……? 없을 것 같은데.”선재는 당황한 듯했지만, 곧 정호에게 받은 번호로 전화를 걸어보더니,“이거 별거 아니고, 그냥 없는 번호라는 안내 메시지 같은데요?”가볍게 대답하는 목소리가 야속했다. 선재가 나가자마자 정호는 바닥에 주저앉았다.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한참을 그대로 있던 정호는 벌떡 일어나 제 가방을 뒤졌다. 석현이 준 편지의 마지막 부분을 천천히 다시 읽었다.우리가 언제 다시 만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드문드문 연락을 주고받다가 아무렇지 않게 멀어져 그저 알던 사람 중의 한 명이 되고 싶지는 않아요. 부디 내 욕심을 이해해주길. 이게 내가 나를 지키는 방법이에요. 끝까지 비겁해서 미안해요.정호는 머릿속이 하얘지는 것 같았다. 결코 짧지 않은 편지는 담백한 사랑 고백임과 동시에 담담하게 안녕을 고하고 있었다.그러니까, 이 바닥에서 일을 못하게 만들겠다,이런 말씀이신 거네요.못 하게 되기 전에,안 하겠습니다, 일.저도 이런 썩어빠지고 좁아터진 한국 통역판,더이상 못 참겠습니다.한국을 떠나오기 전, 악에 받쳐 낮은 목소리로 뱉었던 그 말을, 다시 내뱉는 꿈을 꾸었다. 몇 번이고 반복된다, 이 장면은. 제가 한국을, 버리고 떠나기로 마음을 먹었던 순간.난방을 켜지 않은 거실의 공기가 싸늘했다. 석현은 어깨를 움츠리고 몸을 떨며 부스스 담요를 둘렀다. 힘없는 손으로 담배에 불을 붙였다. 해가 뜨지 않아 어둡고 고요한 겨울 아침, 담배 끝이 타들어 가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석현은 허망한 얼굴로 흰 연기를 내뱉었다.‘겨울, 그래. 다시 겨울이구나.’석현은 이 계절이 오는 게 죽을 만큼 두려웠다.일 년 정도 지나면 괜찮을 줄 알았다.석현은 그 언젠가 '배우
제40화석현은 그저 소정호의 연기가 좋았다. 대학을 졸업하고 제대로 통번역계에 발을 내딛자 휘몰아치듯 바쁜 생활이 계속되었다. 휩쓸리듯 하루하루를 보내느라 이렇다 할만한 번듯한 취미도 없었지만 소정호가 나오는 영화만은 나중에라도 찾아서 꼬박꼬박 보았다. 매번 훌륭하게 다른 사람으로 변해 눈빛을, 표정을, 말투와 목소리를 바꾸는 소정호를 지켜보는 것은 쉴 틈 없이 달려야 하는 나날들 사이에서 어딘가 위로가 되었다.‘그래,’‘이런 깡시골까지 와서도 어떻게든 찾아서 봤었지.’석현은 쓴웃음을 지으며 담배를 고쳐 물었다.석현이 마지막으로 한국어로 번역한 책, 어느 날 잠에서 깨어보니 정호가 읽고 있었던 그 책은, 정호가 출연했던 영화의 원작 소설이었다. 소설 번역은 일반 문서 번역보다 훨씬 시간과 노력을 요하는 작업이라 의뢰를 거절하려고 했지만 제목을 보고 승낙해버렸다. ‘그래, 그때도 생각했었지. 내가 지금 뭐하는 거냐고.’‘내가 지금 대체 뭐하는 거지.’정호의 보호자 역할을 위임하기 위해서는 신원확인이 필요하다는 말에 꽁꽁 감춰왔던 제 정보를 수화기 너머의 보이지 않는 상대에게 술술 뱉으며 몇 번이나 생각했었다.‘전석현 너 지금 대체 뭐하고 있는 거야.’일 주일을 내리 잠만 자던 소정호가 겨우 깨어나 다른 별에 떨어지기라도 한 듯 불안한 표정을 짓는 게 그렇게 신경이 쓰였나.“그, 사실 저는 그, 소정호...라고 하는데요.”알아요, 알아. 알고 있다고. 소정호를 모르는 사람이 어딨어. 왜 이렇게 허술한 거짓말을 믿는 거야 당신은. 왜 그렇게 순식간에 경계를 풀고 아이 같은 얼굴을 하는 거야.역시 그 때 말했더라면 좋았을까. 장난이에요, 소정호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하면서 가볍게. 그다음 날이라도. 아니면 그다음 다음 날이라도.장난이었다고. 아무렇지 않게. 정호 씨가 너무 겁먹은 얼굴이라 어떻게든 안심시키고 싶었다고. 그렇게 말했더라면 차라리 좋았을 텐데.
제82화석현은 코 먹는 소리를 내며 연신 소매로 눈물을 닦았다. 정호는 얼른 석현의 허리를 껴안고 달래듯 말했다.“아이, 석현 씨, 나 자주 죽잖아요. 뭘 또 그렇게 울고 그래요.”“아아, 나 이제 이런 건 못 보겠어요. 정호 씨 고생하는 영화는. 진짜.”울음을 멈추지 않고 숨을 몰아쉬며 석현이 말했다.“그러니깐 내가 안 본댔잖아요, 석현 씨가 보자고 해놓고, 으이그.”이 사람이 이렇게 무방비한 얼굴로 우는 모습을 보이는 건 제 앞에서 뿐이라는 걸, 이제 정호는 잘 알고 있다.스크린 안에서 어느 누군가와 만나서 다른 사람 사랑하는 모습을 아무리 진짜처럼 연기해도 소정호의 삶에 존재하는 진짜 사랑하는 사람은 오직 저뿐이라는 걸, 석현도 분명 잘 알고 있으리라.문득 가슴이 벅차올랐다.석현을 만나고부터 지금까지의 많은 날들이 떠올랐다.우리의 이야기는 해피엔딩이다.영원히 간직할 수 있는, 해피엔딩.겨우 진정한 듯한 석현이 정호의 어깨에 팔을 둘러 저를 꼬옥 마주 안아왔다.“정호 씨 나보다 먼저 죽으면 안 돼요.”내내 울어 엉망이 된 목소리로 한다는 말이.정호는 입꼬리를 꾹 누르며 웃음을 찾았다.“석현 씨,”제가 이름을 부르면 곧 으응, 하고 대답하는 다정한 목소리. 내가 좋아하는 사람의, 좋아하는 목소리.“사랑해요.”갑자기 뱉은 제 말에도,“내가 더 사랑하니까.”라고, 안은 팔에 힘을 주며 천연덕스레 대꾸해 오는 이 사람을. 사랑한다는 말로는 부족할 만큼,사랑한다.
제81화석현이 번역한 ‘푸른 시간의 기억’보다 먼저 세상에 나온 영화 ‘지나간 나날들’에서 정호가 맡았던 ‘한’이라는 이름의 주인공은 원작 소설에서는 제임스라는 이름으로, 오랫동안 소식을 알 수 없었던 어릴 적 친구와 직장에서 재회하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그저 추억으로만 남아있던 어릴 적 몰래 좋아했던 친구를 어른이 되어 현실에서 다시 만나게 되면서 제 감정에 대해 고민하는 과정에서 섬세한 표현을 요하는 장면이 많아 컷 하나하나 고민해 가며 어렵게 촬영했고 그만큼 정호를 많이 자라게 한 작품이었다.“아, 오랜만에 다시 보고 싶다. 정호 씨랑 같이.”불쑥, 그런 말을 내뱉은 석현이 개구쟁이같은 얼굴로 제게 빤히 눈을 맞춰온다.“음? 뭐요? 뭐가요?”“지나간 나날들이요.”부끄러워서 절대 안 된다고, 보고 싶으면 석현 씨 혼자 보라고, 한사코 손을 내두르며 버텼지만 결국 밥 먹는 내내 저를 조르고 설득하는 석현에게 지고 말았다. ‘하긴 이 사람을 내가 무슨 수로 이기나.’ 석현과 나란히 소파에 앉은 정호는 작게 한숨을 쉬며 오프닝 크레딧이 흘러나오는 화면을 노려보았다.정호가 연기한 한이 사랑했던 학창 시절의 현수는 부모의 학대 때문에 치마를 입고 머리를 기른 모습으로 생활하는 소년이다. 한은 현수가 여자애가 아니라는 걸 처음부터 알고 있지만 줄곧 모르는 것처럼 행동한다. 감정은 이유 없이 불시에 찾아온다. 한이 현수에게 반하는 순간의 얼굴이 클로즈업되었다.“와... 정호 씨 나한테 저런 표정 지은 적 한 번도 없는 거 같은데.”“아니 저건 연기잖아요, 연기. 연습해서 만들어낸 표정이라구요.”역시 석현과 함께 보는 게 아니었다고, 불쌍한 얼굴 좀 하고 조른다고 해서 져주는 게 아니었는데, 라고 늦은 후회를 하며 정호는 한숨을 쉬었다. 장면마다 석현의 놀림 아닌 놀림이 이어지는 데다가 몇 년도 더 전의 앳된 얼굴을 한 제가 연기하는 걸 보는 게 쑥스러워 어딘가로 숨고 싶어졌다.어느덧 영화는 클라이맥스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한과 현수
제80화커피머신이 우우웅 소리를 내며 돌아가고 쌉싸름한 커피 향이 금세 코끝으로 밀려들어왔다. 정호는 모처럼 내린 커피를 쏟을까 조심조심 걸음을 옮겨 건너편 방문을 열었다.벽면이 모두 책장인 석현의 작업실에 들어가면 늘 오래된 책과 종이와 잉크 냄새가 난다. 여러 개의 모니터를 앞에 두고 앉은 석현이 두들기는 키보드 소리가 타닥타닥 하고 경쾌하게 들려온다. 여전히 정호가 들어온 줄도 모르고 집중한 뒷모습. 코 앞에 커피를 내려놓자 그제야 손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저를 본다.“아니 소정호 씨가 이런 특별 서비스를 다 해주시고.”석현이 웃는다. 꽃이 피는 것 같은 웃음이다. 몇 번을 봐도 익숙해지지가 않고, 매번 어김없이 가슴이 뛰고 그저 좋기만 한 이 사람의 웃는 얼굴.“쉬엄쉬엄 해요. 마감 아직 여유 있잖아요.”“응 그래서 알레그로 아니고 모데라토 정도로 작업하고 있는데요.”번역 작업할 때 옆에서 보면 피아노를 연주하는 것 같다고 제가 지나가듯 말했던 걸 잘도 기억하고 이런 농담을 해온다.“뭐예요 그게, 그럼 마감 임박하면 알레그로로 하는 거예요?”“마감 전엔 프레스토!”“프레스토? 그게 젤 빠른 건가?”“아마도요.”“석현 씬 대체 모르는 게 뭐예요?”앉은자리에서 부스스 일어나 어깨를 꼭 끌어안더니,“정호 씨가 왜 이렇게 좋은지,그걸 모르겠어요. 정말.”장난스럽게 대꾸하고 금방 얼굴을 부벼온다. 좋은 냄새가 난다. 석현 씨 냄새.다음 달이면 같이 산 지도 일 년이 된다. 시간은 언제나 그렇듯 우리를 기다려주지 않고 무심하게 꾸준히 흘러간다. 절대로 멈추는 법이 없다.“어, 지나간 나날들, 대본 이제 온 거예요?”아니 당장 모레부터 연습이라면서요, 그걸 오늘이 돼서야 보내나, 거참 되게 일 못하네, 한 번 읽었던 대본을 다시 훑어보는 중인 정호의 옆에 앉아서 석현이 못마땅한 듯 중얼거렸다. '지나간 나날들'은 한국에서 영화화가 되고 난 후에야 원작이 주목을 받는 바람에 한국어판 소설은 영화보다 나중에 나왔다. 그 소설의
제79화정호에게 오점이 될까 두렵다는 석현의 말을 듣던 정호는 석현의 품에 안긴 채로,“오점이라니요. 석현 씨가 왜 오점이 돼요 나한테.그 말 취소해요.”괜히 장난처럼 시비를 걸었다.“알았어요. 취소.”석현이 웃음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아 뭔가 좀 더 투정을 부리고 싶은데.’정호는 왠지 무언가 덜 풀린 기분이 들었다.“석현씬 맨날 자기 마음도 말 잘 안 해주고.”“아니 그걸 꼭 말로 해야 알아요?”“말을 안 하면 어떻게 알아요? 내가 좋아한다고 말하기 전에 내가 좋아하는 거 알았어요?”“아니, 그때랑 지금이랑은...”말문이 막힌 듯 석현이 흐읍, 숨을 고쳐 쉬었다.갑자기 안았던 팔을 풀어낸 석현이 정호의 어깨를 붙잡아 저를 보게 했다. 정호는 왠지 부끄러워져 눈을 맞출 수가 없었다. 아까 다툰 것의 여파인지 속얘기를 다 털어놓아서인지 석현을 바로 쳐다보기가 열쩍었다.“정호 씨, 나 좀 봐요.”뭘 또 굳이 자기를 보래. 가슴 떨리게 왜 이래 이 사람.“사랑해요.”갑작스러운 고백에 놀라 정호는 석현을 보았다. 흔들림 없이 저를 향한 짙은 갈색 눈동자.“나 정호 씨 사랑한다구요.”정호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석현은 나직하고 힘있는 목소리로 몇 번이나 말했다.“나 전석현은, 소정호를, 사랑한다구요.”좀 알아 줘요, 라는 석현의 말에 정호는 아무런 대답도 못하고 바보처럼 그만 울고 말았다.“생각보다 대사가 바뀐 데가 많네...”대본을 덮고 작게 혼잣말을 한 정호는 소파에서 몸을 일으켜 크게 기지개를 켰다. 한 시간이 넘도록 집중해서 대본을 읽었더니 눈과 어깨가 뻐근했다. 몇 년 만에 받은 사흘 휴가의 가운뎃날이다. 이틀 이상을 연속으로 쉬는 게 대체 얼마만인지 내일도 쉴 수 있다는 게 실감이 나지 않을 정도다. 얼른 주차장으로 내려오라고 지금 당장이라도 매니저한테 전화가 걸려올 것만 같다.예전에 정호가 출연했던 영화가 연극으로 상연되기로 결정되면서 결국 제가 했던 역할이 다시 제게 돌아왔다. 아역 시절에 작은 역
제78화정호는 소리 내어 울었다. 이제 석현 없이는 살 수 없다고, 겨우 입 밖으로 내뱉은 깊은 속마음이 서러웠다.정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석현이 양손으로 정호의 어깨를 세게 붙들어왔다. 짙은 갈색의 눈동자로 제 눈을 뚫어지게 응시한 채,“나는요? 나는 정호 씨 없이 살 수 있을 것 같아?”처음 듣는 석현의 격앙된 목소리. 눈물이 고여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상처받은 눈. 이제 정호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석현 씨 지금 화났구나.생각해 보니 석현이 화난 목소리로 말하는 걸 처음 듣는 건 아니다. 병원에서 처음 만났던 날, 소속사 사람과 통화하던 석현의 목소리가 문틈을 비집고 들려왔을 때도 석현은 저를 위해 화를 내주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의 석현은 그때와는 또 다르다. 그때보다 훨씬, 날것의 감정이 느껴졌다. 어깨를 잡은 석현의 손이 떨려왔다.석현은 아무런 기약도 없이 스웨덴에서 하던 일을 다 정리하고 일본으로 거점을 옮기며 얼마나 참담하고 불안했는지, 어떻게든 정호를 만나기 위해 혼자서 이런 저런 방법을 강구하며 느낀 자괴감에 제가 음습한 스토커가 된 기분이었다는 이야기를, 중간중간 북받쳐 오는 감정을 추스르느라 말을 멈추어가며 힘겹게 쏟아냈다. 석현은 이야기를 듣는 내내 울음이 멎지 않아 눈물만 흘리는 정호를, 어깨를 잡고 있던 손을 그대로 끌어당겨 품에 꽉 안았다. 복잡한 감정이 뒤엉킨 눈동자가 무섭도록 깊고 짙었다.“석현 씨 그런 이야기 나한텐 한 번도 안 했잖아요.”‘참 못났다 소정호, 이런 말이나 하고.’정호는 석현에게 이루 말할 수 없이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그 마음이 너무 커서인지 미안하다는 말조차 입 밖으로 쉽게 나오지 않았다. 미안하다는 말보다 더 미안한 단어가 있다면 그걸 쓰고 싶었다.“이런 얘길 왜 해야 돼요, 정호 씨 마음 아프게.”저를 꼭 안은 채 여전히 화가 난 것 같은 목소리로 석현이 말했다.폭풍이 지나간 듯 감정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엔 왠지 어색한 공기가 감돌았다. 샤워를 마친 후 자려고 나
제77화“석현씨, 무슨 사이죠, 우린?”“뭐... 뭐라구요?”귀국하자마자 집에 짐만 두고 곧장 정호에게 온 석현이 한숨을 돌리기가 무섭게, 정호는 줄곧 생각했던 질문을 던졌다. 어이가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쉰 석현이 입을 열었다.“그게 또 무슨 말이에요, 정호 씨는 그렇게 막 불안해요? 내가?”정호는 잠자코 석현의 대답을 기다렸다.“아니, 내가... 왜, 어떻게 다시 한국까지 왔는데... 내가 어떤 마음인지, 전혀 모르겠어요?”석현은 대답이 아닌 질문만을 던져왔다.“안 되겠네, 이참에 서로 솔직히 얘기 좀 해요. 이런 게 다 쌓이면 독이 되는 거고. 정호 씨가 이렇게까지 불안해하는 걸 내내 몰랐다는 게, ...솔직히 나도 속상하니까.”속상하니까, 라고 말하는 석현의 말끝이 떨려왔다. 곧 차분한 어조로 어디 한 번 얘기 좀 해봐요, 하면서 석현이 자세를 고쳐 앉았다.어디서부터 무슨 얘기를 해야 하나. 이 불안은 어디에서 시작된 걸까. 석현을 다시 만날 수 있을지 실낱같은 희망만을 붙들고, 없는 번호라는 알아듣지도 못할 언어로 흘러나오는 메시지를 몇 번이나 확인했던 그때부터인가. 상상도 못 했던 곳에서 갑자기 만나 이게 꿈인가 싶어 번듯한 말 한마디도 못하는 저와는 달리 너무나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웃어 보이던 석현 앞에서 작아지는 기분을 느꼈던 그때부터인가. 나는 이제 정말,“나는 이제 정말, 석현 씨가 없으면, 살 수가 없는데.”이야기를 하다 보니 역시나 저도 모르게 울고 있었다.
제76화아무래도 신경이 쓰였던 모양인지 석현답지 않게 출장 중인데도 빈번하게 연락을 해왔다. 제가 스케줄 중이라 받지 못한 부재중 전화에 석현이 걸었을 법한 번호가 보이면 마음이 놓이면서도 속이 상했다. 석현의 연락처가 없어서 걸려오는 전화를 기다릴 뿐 제가 연락을 할 수가 없으니 이상하게 불안했다. 지면에 발을 딛지 않은 채 붕 떠 있는 것 같은 기묘한 부유감이 정호를 괴롭혔다.“근데 정호 씨는 정말, 내가 미덥지 못한가 봐요.”제 불안한 마음을 토로하자 핸드폰 건은 정말로 미안하다고 벌써 몇 번째인지 알 수 없는 사과를 하고는 전화기 너머로 희미하게 한숨을 쉰 석현이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대체 뭐가 그렇게 불안해요, 정호 씨는.” 내가 어떻게 겨우 정호 씨한테 닿았는데, 막 그렇게 금방이라도 사라질 것 같고 그래요?”순간 석현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순순히 미안하다는 말은 나오지를 않고,“석현 씨는 왜 그렇게 항상 여유로운 건데요?”오히려 원망하는 어조로 말하고 말았다.“... 내가, 여유로운 것 같아요?”전화기 저편에서 들려오는 석현의 목소리가 약간, 화가 난 것 같았지만 석현이 제게 화낸 적이 한 번도 없어서인지 목소리만으로는 확신이 서지 않았다. ‘지금 석현 씨 화난... 건가?’ 곧 크게 한숨을 쉰 석현이 다시 나직한 목소리로.“이러다 싸우겠어요. 내일 한국 가서 얘기해요.”정호는 전화를 끊고 침대에 털썩 드러누워 멍하니 천장을 보았다.나는 이제 석현 씨가 없이는 살 수 없다.석현 씨는 알고 있을까.석현 씨, 나는 석현 씨에게 어떤 의미인가요.
제75화지금 거신 번호는 없는 번호입니다. 다시 한번 확인하시고 걸어주시기 바랍니다.정호는 제 귀를 의심했다. ‘지금 거신... 뭐라고?’머리를 세게 얻어맞은 것처럼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뭔가 통신 오류가 난 건가, 무슨 시스템에 문제라도 생겼나. 그럴 리가 없는데. 그럴 리가. 정호는 다시 통화버튼을 눌렀다. 손이 제멋대로 떨려왔다.지금 거신 번호는 없는...안내멘트를 마지막까지 듣지 못하고 정호는 전화를 끊었다.이게 지금 무슨 상황인지 전혀 알 수가 없어 머릿속은 혼란스러울 뿐인데도 몸이 먼저 반응해 걷잡을 수 없이 눈물이 흘렀다. 다리에 힘이 풀려 그대로 주저앉았다. 심장이 무섭게도 빠르게 뛰어왔다. 아니 이건 좀 너무, 빠르게 뛴다. 정호는 정말 오랜만에 덜덜 떨리는 손으로 가방을 더듬어 황갈색 알약을 찾아 삼켰다.석현은 지금 출장으로 일주일 동안 스위스에 가 있다. 바로 이틀 전까지만 해도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로 통화를 했다. 출장이 끝나고 돌아오면 여유가 있으니까 어디 조용한 데로 놀러 가자고, 그런 이야기를 했었다. 마지막으로 통화했을 때 내가 눈치채지 못한 뭔가 이상한 낌새가 있었나? 석현 씨 목소리가 어땠지? 분명 우는 목소리는 아니었는데.‘그런데 왜 없는 번호가 된 거지, 석현 씨 전화가.’정호는 불시에 모든 사고회로가 정지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정말 아무런 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지금 이 상황이 뭐가 어떻게 된 건지를 전혀 파악할 수 없었다. 이대로 다시는 석현을 만날 수 없을 것만 같은 예감이 파도처럼 저를 덮쳐왔다.나는 이제 석현 씨가 없이는 살 수 없다.이성적으로 상황을 판단할 여력 따윈 없었다. 사무치게 제 마음을 깨달았을 뿐이었다. 가파른 절벽 위에 선 기분이었다. 끝없는 절망 속에서도 약기운이 도는지 가빠졌던 호흡이 진정되어 왔다. 기분 탓인지 심장이 여전히 방망이질 치는 것처럼 느껴졌다.바닥에 드러누운 정호의 귀에 부우웅 진동소리가 들려왔다. 플러스 사, 일로 시작되는 번호였다.
제74화정호가 다른 사람처럼 멋있어 보였다는 말에 정호도 서둘러 오늘 하루 내내 생각하던 말을 했다.“나는 오늘 석현 씨가 너무 멋있었는데요. 그, 진짜 다른 사람 된 것처럼요. 되게, 멋있었어요.”정호의 말에 눈빛이 짙어진 석현이 답답한 듯 한숨을 내쉬더니,“역시 안 되겠죠? 여기서 껴안으면.”“음, 축하의 포옹으로 보이지 않을까요?“아니야, 역시 안 되겠어요. 껴안는 데서 못 멈출 것 같아요, 나.”팀장님을 목놓아 부르짖으며 석현을 찾는 선재의 목소리에 이따 집에서 봐요, 하고 석현이 먼저 시끌벅적한 공간으로 돌아갔다. 정호는 석현에게 건네받은 커피를 마저 마시고 나서도 한참을 밖에 서서 창문 너머로 보이는 석현을 바라보았다. 제가 아까 창문 밖을 보기 전까지 석현이 그랬던 것처럼.영화팀 회식과 통역팀 회식은 분명 동시에 끝났는데 집에서 보자던 석현은 여태 소식이 없다. 빨리 샤워를 해서 제 몸에 배인 고기냄새와 술 냄새를 씻어내고 싶은데. ‘석현 씨 오기 전에 우선 먼저 샤워를 할까?’ 그러기에는 주인 없는 집에서 너무 맘대로 구는 것 같기도 하고.참지 못한 정호는 결국 석현에게 전화를 걸었다.“석현 씨, 왜 안 와요, 어디예요?”“정호 씬 어딘데요?”“석현 씨 집이죠.”“네? 난 정호 씨 집인데?”정호는 샤워를 하면서도 이 상황이 너무 웃겨서 이상한 사람처럼 자꾸 혼자 소리 내어 웃었다. 석현의 집에서 제가 혼자서 샤워를 하고 있고 석현은 아마도 제 집에서 샤워를 마치고 올 것이다. 집에서 보자는 말에 서로 다른 집을 떠올린 두 사람 다 어느 쪽 할 것 없이 너무 바보 같다는 생각이 들어 계속 웃음이 나왔다. 제 몸을 휘감는 석현의 비누 냄새에 기분이 좋아졌다. 머리를 다 말리고 소파에 앉으려는 순간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아아, 겨우 만났네요.” 라고 말하며, 머리끝이 아직 약간 젖은 채 저를 껴안아오는 석현에게서 제가 쓰는 익숙한 비누 냄새가 났다. 행복에 냄새가 있다면 분명 이런 냄새일 것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