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컨드는 이제 그만! 새 사랑 시작의 모든 챕터: 챕터 81 - 챕터 90

307 챕터

제81화

“팀장님은 모르시겠지만 저 연애 한 번도 못 해봤어요. 저는 팀장님처럼 경험이 많지도 못해요. 파혼한 약혼남에, 친한 오빠에, 그냥 아는 남자에... 팀장님처럼 알고 지내는 이성도 별로 없어요.”진정우는 나를 바라보며 느릿느릿 말했다. 나는 입을 열었다. 하지만 소리를 내기도 전에 그가 고개를 숙이며 먼저 말을 이었다.“그러니까 두려워해야 하는 사람은 저예요. 어젯밤 저희가 같은 방에 있었던 게 소문이라도 난다면, 사람들이 저를 어떻게 생각하겠어요.”“제가 진 기사님의 명성에 먹칠했다는 거예요?”나는 약간 화가 난 말투로 물었다.“그런 뜻은 아니에요. 팀장님 어젯밤은 그냥 잠만 잤잖아요.”진정우의 말을 듣고 있자면 내가 변태라도 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하는 고단수였다.나는 속으로만 씩씩댈 뿐 별다른 말은 하지 못했다. 손에 들린 빵만 애꿎은 화풀이 대상이 되었다.“명성을 지키려면 저한테서 멀어져야겠네요.”빵을 다 먹고 난 나는 소심하게 반격했다.“그건 어려울 것 같은데요. 저희같이 일하고 있잖아요.”진정우는 티슈를 내려놓고 몸을 일으켰다.“...”내가 아침 식사를 끝냈을 때 이소희도 끝냈다. 그녀는 동창들과 인사했다. 다음에는 꼭 오기 전에 연락하겠다면서 말이다.동창들이 차에 탄 다음 그녀는 고개를 돌려서 나를 바라봤다.“언니, 진 기사님이랑 무슨 얘기 했어요? 둘이 한참 얘기하던데?”나는 어이가 없었다. 그녀는 동창들과 밥 먹을 때에도 나를 관찰하고 있었던 것이다.“별 얘기 안 했어요.”나는 짧은 말로 둘러댔다. 이소희는 당연히 믿지 않고 계속 말하라는 듯이 눈을 깜빡였다. 그래서 나는 마지못해 말을 이었다.“그냥 일 얘기예요. 저희 앞으로 야근이 더 잦아질 것 같다고요.”“네?”이소희는 급 울상이 되었다.“기사님 너무 한 거 아니에요? 못됐어요, 정말!”나는 말없이 그녀와 함께 놀이동산에 갔다. 진정우는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우리가 차에서 내릴 때야 그는 따릉이를 타고 왔다.“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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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2화

“이게 무슨 말이에요? 쉰다니요?”나는 황급히 진정우에게 가서 물었다.“일주일에 두 번은 쉬도록 국가적으로 규정되어 있어요. 요즘은 일이 바쁘니 하루 정도 쉬는 건 문제 없죠?”진정우의 말에 나는 할 말이 없었다. 그래서 애써 분노를 억누르며 대답했다.“맞아요. 근데 저희 시간이 별로 없어요. 진 기사님도 알잖아요. 휴식은 후에 하면 안 될까요? 추가 수당도 줄게요.”진정우는 나를 빤히 바라봤다.“이건 돈 문제가 아니에요. 사람은 기계가 아니고 휴식이 필요해요. 쉬어야 일도 더 잘하죠.”전부 맞는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도무지 쉴 수 있을 때가 아니다.나는 숨을 고르고 나서 다시 말했다.“그래서 오늘 꼭 쉬어야겠다고요?”“네.”말을 마친 진정우는 몸을 돌려서 떠나려고 했다. 그러다가 또 한 마디 덧붙였다.“다른 분들도 쉬게 해줘요.”나는 화가 치밀어서 그를 보며 외쳤다.“진 기사님은 푹 쉬세요! 저희가 일하든 말든 신경 쓰지 말고요!”한쪽에서 이소희는 입을 가리고 웃음을 참았다. 진정우는 여전히 덤덤한 얼굴로 말했다.“그러다가 팀장님도 일 못해요. 어젯밤...”“진정우 씨!”나는 소리 내어 그의 말을 끊었다. 손바닥에는 땀이 한층 배었다.어젯밤 일을 비밀로 하자고 말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아서 언급될 뻔했다. 나는 그를 노려봤지만 결국 기세에 밀려나서 타협했다.“알았어요. 저희도 쉬면 되잖아요. 소희 씨, 이만 돌아가요.”나는 이소희를 불러서 가려고 했다.“팀장님.”이때 진정우가 다시 나를 불러세웠다.“저 부탁할 일이 있어요.”가슴에서는 또다시 불이 타오르는 것 같았다. 나는 화를 가까스로 참으며 이를 악물었다.“왜요, 쉬는 시간에 마사지라도 해줄까요?”“그건 됐고, 사야 할 물건이 있어요. 팀장님이 안내해 줬으면 하는데.”진정우는 아주 자연스럽게 말했다. 나는 그저 웃음이 나올 뿐이었다.“소희 씨랑 같이 가요.”“저는 팀장님이랑 가고 싶은데요.”“풉!”이소희가 결국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나도 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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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3화

“진 기사님, 이게 무슨 뜻이에요? 어제 일로 저를 협박이라도 하겠다는 거예요?”“아뇨.”진정우는 내 눈을 피하며 말했다. 거짓말을 하는 것이었다.나는 주먹을 꽉 쥐었다. 그를 패버리고 싶다는 충동까지 생기고 있었다.“저 진짜 이 동네에 대해 잘 몰라서 그래요. 조금 도와주는 건 어려운 일도 아니잖아요. 저도 팀장님 도와준 적 있고...”진정우의 목소리는 점점 작아졌다. 마치 내가 안 도와주면 나쁜 사람이라도 되는 것 같았다.역시 진 빚은 갚아야 한다. 그게 돈 빚이든, 인정 빚이든 말이다.나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좋아요, 오늘 어디 가고 싶어요? 뭘 사야 하는지 알려주면 안내해 줄게요.”“집 보고 싶어요.”그의 대답에 나는 또 말문이 막혔다.“집이요? 이쪽 일 끝나고 나면 돌아가는 거 아니었어요?”“안 돌아갈 것 같아요. 그래서 미리 봐두려고요.”진정우의 말에 나는 목구멍이 탁 막히는 것 같았다. 왜 이런 느낌이 드는지는 몰랐다. 아무튼 이상했다.“기사님 회사 다른 곳에 있잖아요.”“사직하면 돼요.”“...”“참, 저 월세로 알아보고 싶어요. 아직 집 살 능력은 없어서요.”진정우는 지나치게 태연하게 지갑 상황까지 밝혀버렸다.이 점은 약간 놀라웠다. 요즘은 돈이 없어도 있는 척, 할부로 명품을 사며 체면을 차리는 사람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그에 비하면 진정우는 솔직한 편이었다.“그런데 왜 사직해요?”진정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못 들은 것 같았다.그가 한 말 때문인지 나는 약간의 동정심이 생겼다. 그래서 그를 차에 태우고 시내로 향했다.“시내는 집값이 비싸지 않을까요?”“교외보다는 비싸겠지만 출퇴근이 어려워요. 교통비까지 생각하면 차라리 여기 사는 게 나아요. 기사님 같은 분이라면 적어도 CBD 쪽 회사에 다닐 거잖아요.”나의 제안에도 진정우는 대답하지 않았다. 사정이 많이 어려운가 싶어서 나는 말을 보탰다.“돈이 모자라면 제가 빌려줄게요. 돈이 생긴 다음 천천히 갚아요.”“어쩐지 몸으로 갚으라는 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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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4화

“안 될 거예요.”“그거 녹 쓴지 한참 됐어, 총각.”“밸브가 또 얼마나 아래에 있는지 우린 건드리지도 못했어요.”...주민들이 수군댔다.나의 시선은 오직 진정우에게 고정되었다. 밸브를 잡기 위해 그는 바닥에 바짝 엎드렸다. 힘을 주느라 팔뚝에 힘줄이 튀어 올랐다.그런 데도 밸브는 움직이지 않았다. 진정우는 얼굴이 빨개질 때까지 힘을 줬다.“안 될 거야, 총각. 힘 낭비하지 마. 여기 있는 남자들 이미 다 해 봤어.”할머니 한 분이 보다 못해 말했다. 나도 나서서 말리기 시작했다.“됐어요. 제가 수리 기사님을 부를게요.”말을 마치자마자 진정우가 갑자기 힘을 풀며 말했다.“됐어요.”그는 바닥에서 일어나 옷을 툭툭 털었다.“이제 올라가서 확인해요.”나는 계단을 타로 흘러내리는 물을 바라봤다. 지금 올라갔다가는 쫄딱 젖을 것 같았다.“이따가 올라가요. 물이 다 빠진 다음에요.”진정우는 내 신발을 힐끗 보고 나서 말했다.“제가 업어줄게요.”그 순간 나는 눈을 크게 뜨며 손사래를 쳤다.“아니에요. 아니에요.”이 말을 들은 나는 저도 모르게 얼굴을 붉혔다. 구경꾼들은 우리를 바라보며 웃고 있었다.나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무언가 보아낸 진정우가 다시 말했다.“그럼 제가 먼저 올라갈게요. 열쇠 줘요.”그는 이렇게 말하면서 벌써 손을 뻗어 내가 들고 있던 열쇠를 가져갔다. 그의 손가락이 피부에 닿은 순간 나는 흠칫 떨었다. 전기라도 닿은 것 같은 느낌이었다.강유형과 함께 있을 때는 한 번도 이런 적 없었다. 아마 너무 익숙해져서 그럴 것이다. 어릴 적부터 함께 있었으니, 손잡는 것도 포옹하는 것도 당연한 것이 되었다. 연애하는 긴장감은 당연히 없었다.이 순간 나는 어쩐지 강유형이 신지태에게 했던 말이 이해되는 것 같았다진정우는 성큼성큼 위층으로 올라갔다. 물을 타고 올라가는 것이 퍽 드라마틱해 보였다.내가 멍하니 그를 바라보고 있을 때 한 사람이 다가와서 말했다.“아가씨 남자친구죠? 든든하니 일 잘하게 생겼어요. 아주 잘 골랐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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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5화

왠지는 모르겠지만, 놀이동산 일에도 아프지 않던 머리가 이제 와서 아프기 시작했다. 나는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저를 못 믿어요?”“아뇨, 그건 아니고...”나는 진정우를 바라봤다. 상의도 바지도 더러워져 있었다. 귀찮으니 수리 기사를 부르겠다는 말은 아무래도 나오지 않았다.“저 이거 할 수 있어요. 빨리 다녀와요.”그는 손을 뻗어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얼른요.”나는 머리가 핑 어지러웠다. 얼마 전 강진혁도 쓰다듬은 적 있지만, 그때와는 확연히 다른 느낌이었다.말로 이루 형용하지 못할 따듯하고 달콤한 기분이 들었다. 어딘가 시큼한 것이 갈망하게 되기도 했다. 오랫동안 잃었던 것을 다시 찾은 기분이었다.진정우의 눈빛을 더는 감당할 수 없었던 나는 머리도 돌리지 않고 도망갔다. 그가 요구한 물건을 사서 돌아왔을 때, 그는 걸레로 복도에 고인 물을 청소하고 있었다.집 안에 들어갔을 때는 물기 하나 없이 청소된 바닥이 보였다. 배수구가 고장 나기 전보다도 깨끗했다. 내가 물건을 구하는 동안에도 그는 쉬지 않았던 것이다.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멀쩡한 집을 바라보며, 나는 코끝이 시큰거렸다.“아래층에 가서 확인해 보니까 누수는 없어요. 배상할 걱정은 안 해도 될 것 같아요.”진정우가 말했다.그는 유능할 뿐만 아니라 세심하기까지 했다. 나는 목이 탁 막혔다. 말을 하고 싶었지만 잘 나오지 않았다.진정우는 다시 배수관을 수리하기 시작했고 나는 멀뚱멀뚱 지켜봤다. 그는 아주 능숙했다. 현장에서 일할 때와 똑같았다.문턱에 기대서 그를 바라보며 나는 무심코 물었다.“정우 씨는 못하는 게 뭐예요?”“저도 못하는 거 있어요.”그는 일하면서도 내 질문에 대답했다.“뭔데요?”그는 나를 힐끗 보며 말했다.“애 낳는 거요.”어쩐지 약간 다운되던 기분이 그의 말을 들은 순간 확 사라졌다. 나도 입꼬리를 올리며 그의 장난을 받아쳤다.“그건 낳을 수 있는 사람을 찾으면 되는 거네요.”“그 정도는 할 수 있겠죠.”지나치게 무덤덤한 태도 때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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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6화

나는 호흡이 점점 가빠진 채 얼어붙었다. 진정우는 말하지도 움직이지도 않았다. 시선은 나에게 단단히 고정되었다. 정확히는 나와 마주 보고 있었다.우리는 이대로 가만히 있었다. 먼저 피하지도, 혹은 더 가까이 다가가지도 않았다. 서로의 심장박동이 이토록 선명하게 느껴지는데도 말이다.이때 밖에서 이웃 아주머니의 목소리가 들렸다.“이 집 아가씨 남자친구 사람 참 좋아. 복도까지 깔끔하게 청소한 거 봐.”문뜩 정신을 차린 나는 진정우를 밀어내고 거실로 도망갔다. 심하게 당황스러웠다. 어쩔 바를 모를 정도로 말이다.뒤늦게 따라온 진정우는 아주 자연스럽게 입을 열었다.“여기 부모님 집이에요?”나는 약간 멈칫했다. 그가 어떻게 알았는지 궁금한 것도 잠시, 벽에 걸려 있는 사진을 발견했다.“팀장님 어릴 때랑 똑같이 생겼어요.”벽에는 내가 받았던 상장에 가족사진도 붙어 있었다. 교복 차림의 나는 부모님 사이에 서서 활짝 웃고 있었다. 지금 다시 보니 가슴이 아리기만 하는 미소였다.“학교 다닐 때 성적도 좋았나 봐요.”진정우는 또 내가 받았던 상장들을 바라봤다. 전부 학교에서 받은 것들이었다.“지금도 맡은 일은 잘하잖아요.”나는 당당하게 말했다. 그러자 진정우는 나를 바라보며 대답했다.“인정해요.”그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다시 이었다.“여러 가지 방면으로.”나는 감히 그를 바라보지도 못했다. 나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도, 입 밖으로 뱉은 말도 너무나 적나라했다.그와 엮이고 싶지 않았던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오늘 수고 했어요. 제가 밥 살게요. 밥부터 먹고 집 보러 갈까요?”처음 원하지 않던 데서, 이제는 내가 먼저 제안하게 되었다. 아까와 달리 지금은 빚진 게 있었기 때문이다.“좋아요. 그 전에 세수하고 싶은데, 혹시 수건 있어요?”나는 이제야 그의 얼굴에도 옷에도 먼지가 묻었다는 것을 인식했다.“그... 잠시만 기다려 줄래요? 옷부터 사 올게요.”이 근처에는 옷 살 수 있는 곳이 없었다. 하지만 멀지 않은 곳의 대형 마트에 가면 옷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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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7화

“혹시 물티슈 있어요?”진정우가 물었다.“아니면 다른 수건도 괜찮아요. 옷도 닦고 싶어서요.”그는 나의 수건을 들고 있었다. 그걸로 옷을 닦기는 아까웠던 모양이다.“일회용 수건 있어요. 그걸 적셔서 쓰면 되겠네요.”나는 일회용 수건을 뽑아줬다. 그는 멍한 얼굴로 잠시 바라보기만 했다. 처음 보는 신문물에 놀란 모습이었다.피식 웃은 나는 괜히 그를 놀리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설마 이게 뭔지 몰라요?”“네, 처음 봐요.”순순히 인정하는 모습도 귀여웠다.하긴, 연애 한번 한 적 없는 사람이 이런 건 알게 될 계기가 없었을 것이다. 유행하기 시작한 지도 얼마 안 됐고, 여자가 없으면 알기 어렵기 때문이다.“여자들이 세수할 때 쓰는 거예요. 깔끔하게 한 번 쓰고 버리도록요.”나는 일회용 수건을 물에 적셔서 건네줬다. 진정우는 고개를 숙여서 옷에 묻은 먼지를 닦기 시작했다. 등에도 먼지는 가득했다. 그래서 나도 자연스럽게 다른 수건을 들고 닦아줬다.내 손이 등에 닿은 순간 그의 몸은 눈에 띄게 굳었다. 하지만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계속해서 닦았다.그 순간 나는 진정우의 목덜미에 있는 점을 봤다. 머릿속에는 저도 모르게 그때의 꿈이 떠올랐다. 나를 등지고 있는 남자아이의 목덜미에도 점이 있었다.생각에 잠긴 나는 진정우가 불렀을 때에야 벌떡 정신 차렸다. 내가 들고 있던 수건이 그의 옷을 젹셔 가고 있었던 것이다.“그... 다 됐어요.”나는 그의 점을 바라보며 저도 모르게 물었다.“정우 씨, 목덜미에 점은 어릴 때부터 있었어요?”진정우는 손으로 점을 만지작대면서 말했다.“네.”나는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설마 꿈에서 본 사람이 진정우 씨는 아니겠지? 말도 안 돼. 현실에서 만나기도 전에 꿈에서 만날 리는 없지. 게다가 그냥 뒷모습이었잖아. 그래, 아닐 거야.’꿈은 환상일 뿐이다. 어떤 일도 일어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순간 나는 꿈과 현실이 결합한 듯한 묘한 기분이 들었다. 1분 전까지만 해도 모르는 사실이었는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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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8화

역시 뻔뻔한 사람을 이길 수는 없다.나를 향해 걸어오는 조나연을 보고 이런 생각이 문뜩 들었다.제대로 된 인간이라면 내연녀의 신분으로 이토록 당당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조나연은 당당하고도 남았다. 그녀는 자신이 대단한 존재라도 되는 듯이 으스댔다.“여기서 다 만나네요, 지원 씨. 밥 먹으러 왔어요?”조나연은 나와 말하면서 진정우를 힐끔댔다. 사실은 처음부터 진정우를 바라보며 걸어왔다.전정우는 원래도 시선이 가는 타입이니 할 말은 없다. 나이 많은 아주머니도 그를 힐끔거리기 마련이다. 조금 전 집에서도 그러지 않았는가?“안 그러면 구경하러 왔겠어요?”나는 차갑게 말했다. 내 성격이 못된 게 아니라, 그냥 그녀가 착한 척하는 게 꼴 보기 싫었다.만약 그녀가 당당하게 강유형을 좋아한다고 인정하면, 나는 흔쾌히 물러날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그러지 않았다. 일부러 내 신경을 거스르기만 했다.나의 말을 들은 그녀는 곧장 서러운 표정을 지었다. 강유형도 없는데 연기는 왜 하는지 모르겠다.‘혹시 이번 표적은 정우 씨인가?’세상에는 자기 주제를 모르는 사람이 꽤 된다.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세상 모두가 자신을 사랑한다고 착각하는 사람 말이다.조나연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과부 주제에 남자한테 잘 보이겠다고 가면을 쓴 모습이 퍽 우스웠다.‘쟤 강유형을 좋아하는 거 아니었어? 더 좋은 남자를 보면 바로 넘어갈 가벼운 마음이었나? 아니면 그냥 내 곁에 있는 남자라면 다 좋은 건가?’나와 진정우는 그런 사이가 아니었다. 그래도 나는 조나연이 치근덕대는 것이 싫었다. 그래서 피식 웃으며 말했다.“가서 임산부 세트나 먹어요. 여기 음식 꽤 건강하거든요. 나연 씨 같은 임산부한테 꼭 맞아요.”조나연의 안색은 순간 빨개졌다가 다시 창백해졌다. 그리고 속셈이 뻔히 보이는 표정으로 진정우를 힐끔댔다.“하.”나는 어이없는 웃음을 날렸다. 조나연이 이 꼴을 하고서도 진정우에게 잘 보이려고 하는 게 웃겼다.조나연이라면 유강후와 만나면서도 여러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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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9화

이럴 줄 알았으면 안 볼 걸 그랬다.내가 시선을 돌리려고 할 때 강유형이 문뜩 고개를 돌렸다. 그는 창문 유리를 통해 이쪽을 바라보며 미간을 찌푸렸다.나는 크게 신경 쓰지 않고 진정우를 바라봤다. 그는 마침 주문을 끝냈다. 들어보니 전부 내가 좋아하는 것이었다.나를 위해 주문했다기에는 불가능해 보였다. 그는 나를 이 정도로 잘 알고 있을 계기가 없었기 때문이다.궁금했던 나는 입을 달싹이며 머리를 들었다. 하지만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괜히 물어서 내가 그에게 신경 쓰고 있다는 인상을 주고 싶지 않았다.나는 그냥 다른 걸 물었다.“술 마실래요?”“아뇨, 오후에 할 일이 있어서요.”‘아, 맞다. 또 가서 집 봐야 하지.’나는 그가 집을 봐야 해서 술을 안 마시는 줄 알고 말했다.“괜찮아요. 집 볼 때도 제가 같이 있어 줄게요. 사기당할 일은 없어요.”“아니에요. 저...”그는 잠시 말을 멈췄다. 나는 그가 무슨 말을 할지 유심히 듣고 있었다.나와 시선을 마주친 그는 당당하게 마주 보며 말했다.“집은 알아서 고를게요.”나는 짧게 대답했다. 나도 귀찮던 참에 잘 됐다고 생각했다. 함께 본 집에 문제라도 있으면 나까지 책임을 지게 될 것 같았던 것도 있다.술을 안 마신다고 했으니 나는 음료수로 주문했다. 이때 식탁에 그림자가 드리우더니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일 바쁘다며? 여기서 밥 먹을 시간도 있어?”어디에서 개가 짖고 있었다. 조나연에게서 무슨 말을 들었는지 꽤 공격적이었다.그의 말을 들은 나는 뺨이라도 후려갈기고 싶었다. 일이 바쁘면 밥을 먹지 말아야 하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내가 마침 반격하려고 할 때 진정우가 대신 말했다.“오늘 쉬는 날이에요.”강유형은 차가운 눈빛으로 진정우를 바라보다가 다시 나에게 물었다.“누가 쉬어도 된다고 허락했지?”“제가 쉬자고 했어요.”진정우가 또다시 먼저 대답했다. 강유형의 안색은 더욱 어두워졌다.“일개 직원이 무슨 자격으로 휴식을 요구하죠? 채용됐으면 주어진 일이나 열심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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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0화

도망가고 싶었다. 어디든 가야 할 것만 같았다. 하지만 나는 그러지 못했다.내가 외면할수록 진정우는 더 이상하게 생각할 것이다. 그리고 그는 진작 할 말 못 할 말 직설적으로 하지 않았는가?나에게 그런 말을 하는 것이 그는 전혀 부끄러워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나도 애써 당당하게 말했다.“말로만요? 증명할 수 있어요?”“흠...”진정우는 물 한 모금 마시고 나서 대답했다.“할 수 있어요.”그의 대답을 들은 나는 되레 당황하며 말했다.“됐어요, 아무 말도 하지 마요.”결국 나의 참패다.“만약 증명이 필요하면 병원에 다녀올게요.”진정우는 담담하게 말했다. 참 생각을 많아지게 하는 말이었다.‘내가 뭐라고 증명하겠다는 거야? 참...’“그런 건 미래 와이프한테나 증명해요.”말을 마친 나는 황급히 화장실로 도망갔다. 그러나 코너를 돌자마자 누군가에게 팔이 잡혀서 억지로 멈춰 섰다. 냄새만으로 상대가 누구인지 알아차릴 수 있었다.강유형은 내 팔을 꽉 잡으며 말했다.“직원이랑 이런 데서 밥 먹는 건 좀 너무한 것 같지 않아?”그는 화난 표정이었다. 어쩐지 질투하는 것 같기도 했다. 나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왜? 여기 사장도 말이 없는데, 네가 뭐라고 멋대로 옳고 그름을 갈라?”“윤지원!”강유형은 눈을 부릅떴다.“남자가 아무리 고파도 제대로 된 걸 찾아야 할 거 아니야.”그는 처음부터 진정우를 깔보고 있었다. 동시에 나를 깔보는 것이기도 했다.“정우 씨는 고급 엔지니어에 명문대 출신으로 학벌까지 좋아. 너한테는 뭐가 있는데?”이건 오늘 아침 자료 조사를 통해 알게 된 것이다.내 질문에 강유형은 말을 잃었다. 그는 지위가 높기는 했지만 학벌이 그다지 좋지 않았다. 학벌이라면 강진혁보다도 못했다.하지만 그는 똑똑했다. 사업하기 딱 좋은 성격이라 가업을 물려받을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지금도 회사를 잘 이끌고 있다.누구나 잘하는 게 있고 못 하는 게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강유형은 과하게 오만했다. 그는 자신의 빛만 보이고 다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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