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 될 거예요.”“그거 녹 쓴지 한참 됐어, 총각.”“밸브가 또 얼마나 아래에 있는지 우린 건드리지도 못했어요.”...주민들이 수군댔다.나의 시선은 오직 진정우에게 고정되었다. 밸브를 잡기 위해 그는 바닥에 바짝 엎드렸다. 힘을 주느라 팔뚝에 힘줄이 튀어 올랐다.그런 데도 밸브는 움직이지 않았다. 진정우는 얼굴이 빨개질 때까지 힘을 줬다.“안 될 거야, 총각. 힘 낭비하지 마. 여기 있는 남자들 이미 다 해 봤어.”할머니 한 분이 보다 못해 말했다. 나도 나서서 말리기 시작했다.“됐어요. 제가 수리 기사님을 부를게요.”말을 마치자마자 진정우가 갑자기 힘을 풀며 말했다.“됐어요.”그는 바닥에서 일어나 옷을 툭툭 털었다.“이제 올라가서 확인해요.”나는 계단을 타로 흘러내리는 물을 바라봤다. 지금 올라갔다가는 쫄딱 젖을 것 같았다.“이따가 올라가요. 물이 다 빠진 다음에요.”진정우는 내 신발을 힐끗 보고 나서 말했다.“제가 업어줄게요.”그 순간 나는 눈을 크게 뜨며 손사래를 쳤다.“아니에요. 아니에요.”이 말을 들은 나는 저도 모르게 얼굴을 붉혔다. 구경꾼들은 우리를 바라보며 웃고 있었다.나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무언가 보아낸 진정우가 다시 말했다.“그럼 제가 먼저 올라갈게요. 열쇠 줘요.”그는 이렇게 말하면서 벌써 손을 뻗어 내가 들고 있던 열쇠를 가져갔다. 그의 손가락이 피부에 닿은 순간 나는 흠칫 떨었다. 전기라도 닿은 것 같은 느낌이었다.강유형과 함께 있을 때는 한 번도 이런 적 없었다. 아마 너무 익숙해져서 그럴 것이다. 어릴 적부터 함께 있었으니, 손잡는 것도 포옹하는 것도 당연한 것이 되었다. 연애하는 긴장감은 당연히 없었다.이 순간 나는 어쩐지 강유형이 신지태에게 했던 말이 이해되는 것 같았다진정우는 성큼성큼 위층으로 올라갔다. 물을 타고 올라가는 것이 퍽 드라마틱해 보였다.내가 멍하니 그를 바라보고 있을 때 한 사람이 다가와서 말했다.“아가씨 남자친구죠? 든든하니 일 잘하게 생겼어요. 아주 잘 골랐어
왠지는 모르겠지만, 놀이동산 일에도 아프지 않던 머리가 이제 와서 아프기 시작했다. 나는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저를 못 믿어요?”“아뇨, 그건 아니고...”나는 진정우를 바라봤다. 상의도 바지도 더러워져 있었다. 귀찮으니 수리 기사를 부르겠다는 말은 아무래도 나오지 않았다.“저 이거 할 수 있어요. 빨리 다녀와요.”그는 손을 뻗어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얼른요.”나는 머리가 핑 어지러웠다. 얼마 전 강진혁도 쓰다듬은 적 있지만, 그때와는 확연히 다른 느낌이었다.말로 이루 형용하지 못할 따듯하고 달콤한 기분이 들었다. 어딘가 시큼한 것이 갈망하게 되기도 했다. 오랫동안 잃었던 것을 다시 찾은 기분이었다.진정우의 눈빛을 더는 감당할 수 없었던 나는 머리도 돌리지 않고 도망갔다. 그가 요구한 물건을 사서 돌아왔을 때, 그는 걸레로 복도에 고인 물을 청소하고 있었다.집 안에 들어갔을 때는 물기 하나 없이 청소된 바닥이 보였다. 배수구가 고장 나기 전보다도 깨끗했다. 내가 물건을 구하는 동안에도 그는 쉬지 않았던 것이다.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멀쩡한 집을 바라보며, 나는 코끝이 시큰거렸다.“아래층에 가서 확인해 보니까 누수는 없어요. 배상할 걱정은 안 해도 될 것 같아요.”진정우가 말했다.그는 유능할 뿐만 아니라 세심하기까지 했다. 나는 목이 탁 막혔다. 말을 하고 싶었지만 잘 나오지 않았다.진정우는 다시 배수관을 수리하기 시작했고 나는 멀뚱멀뚱 지켜봤다. 그는 아주 능숙했다. 현장에서 일할 때와 똑같았다.문턱에 기대서 그를 바라보며 나는 무심코 물었다.“정우 씨는 못하는 게 뭐예요?”“저도 못하는 거 있어요.”그는 일하면서도 내 질문에 대답했다.“뭔데요?”그는 나를 힐끗 보며 말했다.“애 낳는 거요.”어쩐지 약간 다운되던 기분이 그의 말을 들은 순간 확 사라졌다. 나도 입꼬리를 올리며 그의 장난을 받아쳤다.“그건 낳을 수 있는 사람을 찾으면 되는 거네요.”“그 정도는 할 수 있겠죠.”지나치게 무덤덤한 태도 때문일까?
나는 호흡이 점점 가빠진 채 얼어붙었다. 진정우는 말하지도 움직이지도 않았다. 시선은 나에게 단단히 고정되었다. 정확히는 나와 마주 보고 있었다.우리는 이대로 가만히 있었다. 먼저 피하지도, 혹은 더 가까이 다가가지도 않았다. 서로의 심장박동이 이토록 선명하게 느껴지는데도 말이다.이때 밖에서 이웃 아주머니의 목소리가 들렸다.“이 집 아가씨 남자친구 사람 참 좋아. 복도까지 깔끔하게 청소한 거 봐.”문뜩 정신을 차린 나는 진정우를 밀어내고 거실로 도망갔다. 심하게 당황스러웠다. 어쩔 바를 모를 정도로 말이다.뒤늦게 따라온 진정우는 아주 자연스럽게 입을 열었다.“여기 부모님 집이에요?”나는 약간 멈칫했다. 그가 어떻게 알았는지 궁금한 것도 잠시, 벽에 걸려 있는 사진을 발견했다.“팀장님 어릴 때랑 똑같이 생겼어요.”벽에는 내가 받았던 상장에 가족사진도 붙어 있었다. 교복 차림의 나는 부모님 사이에 서서 활짝 웃고 있었다. 지금 다시 보니 가슴이 아리기만 하는 미소였다.“학교 다닐 때 성적도 좋았나 봐요.”진정우는 또 내가 받았던 상장들을 바라봤다. 전부 학교에서 받은 것들이었다.“지금도 맡은 일은 잘하잖아요.”나는 당당하게 말했다. 그러자 진정우는 나를 바라보며 대답했다.“인정해요.”그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다시 이었다.“여러 가지 방면으로.”나는 감히 그를 바라보지도 못했다. 나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도, 입 밖으로 뱉은 말도 너무나 적나라했다.그와 엮이고 싶지 않았던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오늘 수고 했어요. 제가 밥 살게요. 밥부터 먹고 집 보러 갈까요?”처음 원하지 않던 데서, 이제는 내가 먼저 제안하게 되었다. 아까와 달리 지금은 빚진 게 있었기 때문이다.“좋아요. 그 전에 세수하고 싶은데, 혹시 수건 있어요?”나는 이제야 그의 얼굴에도 옷에도 먼지가 묻었다는 것을 인식했다.“그... 잠시만 기다려 줄래요? 옷부터 사 올게요.”이 근처에는 옷 살 수 있는 곳이 없었다. 하지만 멀지 않은 곳의 대형 마트에 가면 옷이
“혹시 물티슈 있어요?”진정우가 물었다.“아니면 다른 수건도 괜찮아요. 옷도 닦고 싶어서요.”그는 나의 수건을 들고 있었다. 그걸로 옷을 닦기는 아까웠던 모양이다.“일회용 수건 있어요. 그걸 적셔서 쓰면 되겠네요.”나는 일회용 수건을 뽑아줬다. 그는 멍한 얼굴로 잠시 바라보기만 했다. 처음 보는 신문물에 놀란 모습이었다.피식 웃은 나는 괜히 그를 놀리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설마 이게 뭔지 몰라요?”“네, 처음 봐요.”순순히 인정하는 모습도 귀여웠다.하긴, 연애 한번 한 적 없는 사람이 이런 건 알게 될 계기가 없었을 것이다. 유행하기 시작한 지도 얼마 안 됐고, 여자가 없으면 알기 어렵기 때문이다.“여자들이 세수할 때 쓰는 거예요. 깔끔하게 한 번 쓰고 버리도록요.”나는 일회용 수건을 물에 적셔서 건네줬다. 진정우는 고개를 숙여서 옷에 묻은 먼지를 닦기 시작했다. 등에도 먼지는 가득했다. 그래서 나도 자연스럽게 다른 수건을 들고 닦아줬다.내 손이 등에 닿은 순간 그의 몸은 눈에 띄게 굳었다. 하지만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계속해서 닦았다.그 순간 나는 진정우의 목덜미에 있는 점을 봤다. 머릿속에는 저도 모르게 그때의 꿈이 떠올랐다. 나를 등지고 있는 남자아이의 목덜미에도 점이 있었다.생각에 잠긴 나는 진정우가 불렀을 때에야 벌떡 정신 차렸다. 내가 들고 있던 수건이 그의 옷을 젹셔 가고 있었던 것이다.“그... 다 됐어요.”나는 그의 점을 바라보며 저도 모르게 물었다.“정우 씨, 목덜미에 점은 어릴 때부터 있었어요?”진정우는 손으로 점을 만지작대면서 말했다.“네.”나는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설마 꿈에서 본 사람이 진정우 씨는 아니겠지? 말도 안 돼. 현실에서 만나기도 전에 꿈에서 만날 리는 없지. 게다가 그냥 뒷모습이었잖아. 그래, 아닐 거야.’꿈은 환상일 뿐이다. 어떤 일도 일어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순간 나는 꿈과 현실이 결합한 듯한 묘한 기분이 들었다. 1분 전까지만 해도 모르는 사실이었는데 말이다.“
역시 뻔뻔한 사람을 이길 수는 없다.나를 향해 걸어오는 조나연을 보고 이런 생각이 문뜩 들었다.제대로 된 인간이라면 내연녀의 신분으로 이토록 당당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조나연은 당당하고도 남았다. 그녀는 자신이 대단한 존재라도 되는 듯이 으스댔다.“여기서 다 만나네요, 지원 씨. 밥 먹으러 왔어요?”조나연은 나와 말하면서 진정우를 힐끔댔다. 사실은 처음부터 진정우를 바라보며 걸어왔다.전정우는 원래도 시선이 가는 타입이니 할 말은 없다. 나이 많은 아주머니도 그를 힐끔거리기 마련이다. 조금 전 집에서도 그러지 않았는가?“안 그러면 구경하러 왔겠어요?”나는 차갑게 말했다. 내 성격이 못된 게 아니라, 그냥 그녀가 착한 척하는 게 꼴 보기 싫었다.만약 그녀가 당당하게 강유형을 좋아한다고 인정하면, 나는 흔쾌히 물러날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그러지 않았다. 일부러 내 신경을 거스르기만 했다.나의 말을 들은 그녀는 곧장 서러운 표정을 지었다. 강유형도 없는데 연기는 왜 하는지 모르겠다.‘혹시 이번 표적은 정우 씨인가?’세상에는 자기 주제를 모르는 사람이 꽤 된다.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세상 모두가 자신을 사랑한다고 착각하는 사람 말이다.조나연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과부 주제에 남자한테 잘 보이겠다고 가면을 쓴 모습이 퍽 우스웠다.‘쟤 강유형을 좋아하는 거 아니었어? 더 좋은 남자를 보면 바로 넘어갈 가벼운 마음이었나? 아니면 그냥 내 곁에 있는 남자라면 다 좋은 건가?’나와 진정우는 그런 사이가 아니었다. 그래도 나는 조나연이 치근덕대는 것이 싫었다. 그래서 피식 웃으며 말했다.“가서 임산부 세트나 먹어요. 여기 음식 꽤 건강하거든요. 나연 씨 같은 임산부한테 꼭 맞아요.”조나연의 안색은 순간 빨개졌다가 다시 창백해졌다. 그리고 속셈이 뻔히 보이는 표정으로 진정우를 힐끔댔다.“하.”나는 어이없는 웃음을 날렸다. 조나연이 이 꼴을 하고서도 진정우에게 잘 보이려고 하는 게 웃겼다.조나연이라면 유강후와 만나면서도 여러 남자
이럴 줄 알았으면 안 볼 걸 그랬다.내가 시선을 돌리려고 할 때 강유형이 문뜩 고개를 돌렸다. 그는 창문 유리를 통해 이쪽을 바라보며 미간을 찌푸렸다.나는 크게 신경 쓰지 않고 진정우를 바라봤다. 그는 마침 주문을 끝냈다. 들어보니 전부 내가 좋아하는 것이었다.나를 위해 주문했다기에는 불가능해 보였다. 그는 나를 이 정도로 잘 알고 있을 계기가 없었기 때문이다.궁금했던 나는 입을 달싹이며 머리를 들었다. 하지만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괜히 물어서 내가 그에게 신경 쓰고 있다는 인상을 주고 싶지 않았다.나는 그냥 다른 걸 물었다.“술 마실래요?”“아뇨, 오후에 할 일이 있어서요.”‘아, 맞다. 또 가서 집 봐야 하지.’나는 그가 집을 봐야 해서 술을 안 마시는 줄 알고 말했다.“괜찮아요. 집 볼 때도 제가 같이 있어 줄게요. 사기당할 일은 없어요.”“아니에요. 저...”그는 잠시 말을 멈췄다. 나는 그가 무슨 말을 할지 유심히 듣고 있었다.나와 시선을 마주친 그는 당당하게 마주 보며 말했다.“집은 알아서 고를게요.”나는 짧게 대답했다. 나도 귀찮던 참에 잘 됐다고 생각했다. 함께 본 집에 문제라도 있으면 나까지 책임을 지게 될 것 같았던 것도 있다.술을 안 마신다고 했으니 나는 음료수로 주문했다. 이때 식탁에 그림자가 드리우더니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일 바쁘다며? 여기서 밥 먹을 시간도 있어?”어디에서 개가 짖고 있었다. 조나연에게서 무슨 말을 들었는지 꽤 공격적이었다.그의 말을 들은 나는 뺨이라도 후려갈기고 싶었다. 일이 바쁘면 밥을 먹지 말아야 하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내가 마침 반격하려고 할 때 진정우가 대신 말했다.“오늘 쉬는 날이에요.”강유형은 차가운 눈빛으로 진정우를 바라보다가 다시 나에게 물었다.“누가 쉬어도 된다고 허락했지?”“제가 쉬자고 했어요.”진정우가 또다시 먼저 대답했다. 강유형의 안색은 더욱 어두워졌다.“일개 직원이 무슨 자격으로 휴식을 요구하죠? 채용됐으면 주어진 일이나 열심히
도망가고 싶었다. 어디든 가야 할 것만 같았다. 하지만 나는 그러지 못했다.내가 외면할수록 진정우는 더 이상하게 생각할 것이다. 그리고 그는 진작 할 말 못 할 말 직설적으로 하지 않았는가?나에게 그런 말을 하는 것이 그는 전혀 부끄러워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나도 애써 당당하게 말했다.“말로만요? 증명할 수 있어요?”“흠...”진정우는 물 한 모금 마시고 나서 대답했다.“할 수 있어요.”그의 대답을 들은 나는 되레 당황하며 말했다.“됐어요, 아무 말도 하지 마요.”결국 나의 참패다.“만약 증명이 필요하면 병원에 다녀올게요.”진정우는 담담하게 말했다. 참 생각을 많아지게 하는 말이었다.‘내가 뭐라고 증명하겠다는 거야? 참...’“그런 건 미래 와이프한테나 증명해요.”말을 마친 나는 황급히 화장실로 도망갔다. 그러나 코너를 돌자마자 누군가에게 팔이 잡혀서 억지로 멈춰 섰다. 냄새만으로 상대가 누구인지 알아차릴 수 있었다.강유형은 내 팔을 꽉 잡으며 말했다.“직원이랑 이런 데서 밥 먹는 건 좀 너무한 것 같지 않아?”그는 화난 표정이었다. 어쩐지 질투하는 것 같기도 했다. 나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왜? 여기 사장도 말이 없는데, 네가 뭐라고 멋대로 옳고 그름을 갈라?”“윤지원!”강유형은 눈을 부릅떴다.“남자가 아무리 고파도 제대로 된 걸 찾아야 할 거 아니야.”그는 처음부터 진정우를 깔보고 있었다. 동시에 나를 깔보는 것이기도 했다.“정우 씨는 고급 엔지니어에 명문대 출신으로 학벌까지 좋아. 너한테는 뭐가 있는데?”이건 오늘 아침 자료 조사를 통해 알게 된 것이다.내 질문에 강유형은 말을 잃었다. 그는 지위가 높기는 했지만 학벌이 그다지 좋지 않았다. 학벌이라면 강진혁보다도 못했다.하지만 그는 똑똑했다. 사업하기 딱 좋은 성격이라 가업을 물려받을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지금도 회사를 잘 이끌고 있다.누구나 잘하는 게 있고 못 하는 게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강유형은 과하게 오만했다. 그는 자신의 빛만 보이고 다른
강유형의 모습은 누가 봐도 질투하는 것이었다.정말 어이가 없었다. 과부와 썸 타면서도 나를 위해 질투한다니 말이다. 소유욕도 욕심도 어처구니없이 많았다.나는 화장실에 잠시 있다가 밖으로 나갔다. 그러다가 마침 조나연의 목소리를 들었다. 그녀는 아주 처량하게 말했다.“유형 씨 아직도 지원 씨 좋아하는 거지? 그런 거지?”“지원이는 내 약혼녀야.”강유형의 말은 내 추측을 검증하는 셈이었다. 그는 아직도 나에게 미련이 있었다.“근데 둘은 이미 헤어졌잖아.”조나연의 목소리는 아주 나른했다. 남자 하나 꼬시겠다고 목소리까지 조절하는 것은 꽤 대단했다.“헤어진다는 말은 나왔지만, 난 허락 안 했어. 그리고 지원이는 나랑 헤어지지 못해. 지금도 잠깐 화가 났을 뿐 풀리면 괜찮아 질 거야.”강유형이 이런 말을 할 줄은 나도 생각지 못했다. 그는 내가 헤어지자고 했던 말을 잠시 화내는 거로 생각했던 것이다.“남자들은 다 그래. 익숙한 건 소중한 줄 모르고 잃고 나서야 아쉬워하지.”조나연의 말에 강유형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조나연이 말을 이었다.“지원 씨랑 계속 만날 거면 나한테 왜 잘해줘? 나한테 잘해줘서 지원 씨가 오해한 거 몰라?”나는 호흡을 가다듬었다. 나도 궁금한 문제였다.오늘 이 대화를 듣기 전에, 나는 강유형과 조나연이 정말 서로를 사랑하는 줄 알았다. 하지만 서로 사랑하는 사이라면 강유형이 이런 식으로 말할 리는 없을 것 같았다.강유형은 여전히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저도 모르게 천천히 앞으로 걸어가서 몸을 숨겼다. 그곳에서는 마침 복도 끝의 거울에 비친 두 사람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어두운 안색으로 고개를 숙인 강유형은 발끝만 바라봤다.“지원 씨를 좋아한다면 왜 나랑 키스까지 했어?”조나연의 말을 듣고 나는 몸을 흠칫 떨었다.‘둘이 키스까지 한 거야?’나의 마음이 쿵 하고 울리더니 무언가 끊어져 나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유형 씨, 빨리 대답해!”조나연이 흥분해서 강유형의 옷을 잡아당겼다.“왜 나랑 키스했
나는 용은서를 품에 안고 눈앞의 사람들을 훑어보았다.그들은 더 이상 움직이지 않고 호시탐탐 나를 노려보았다. 곧이어 발자국 소리와 함께 애타는 외침이 들려왔다.“은서야, 두려워 마. 엄마가 왔어.”이 말을 듣고 나는 이 상황이 기가 막혔다. 함소은은 내 품에서 아이를 빼앗고 나를 밀쳐 버렸다.그녀는 연기를 정말 잘했다.함소은은 용은서를 안고 뽀뽀하며 달래더니 나를 노려보았다.“내가 지원 씨를 그렇게 믿고 은서랑 친구도 하게 해줬는데, 지원 씨는 어떻게 우리 모녀의 믿음과 사랑을 이용해 우리를 해쳐요?”“언니는 나를 해치지 않았어.”내가 입을 열기도 전에 용은서가 말했다.용은서의 말을 듣고 얼굴이 굳어진 함소은은 딸을 안고 울기 시작했다.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은 나를 괴롭히지 않았다. 함소은이 용은서를 데려가기 위해 그들과 함께 연기하러 온 것이었기 때문이다.용은서의 이 납치극 함소은에 의해 끝났지만 나의 문제는 이제부터 시작되었다. 예상대로 용진표가 나를 찾아왔다.“지원 씨는 내가 왜 찾아왔는지 알고 있을 거야.”용진표는 직접적으로 말했다.나는 그를 보며 함소은이 계획한 이 연극 같은 상황이 생각났다. 사람은 평생 총명하다가도 어리석을 때가 있다고 하더니 지금의 용진표가 그랬다.그는 자신의 여자에게 놀아났다.“용 대표님은 제가 왜 은서를 납치했는지 알고 싶으신 거예요?”나는 용진표에게 물었다.그는 사람을 시켜 나에게 아무 짓도 하지 않고 나를 여기로 초대했다. 함소은의 예측대로 나에게 빚진 것이 있었기에 너그럽게 나를 대했다.그래도 그는 이유를 알고 싶었기 때문일 것이다.“용 대표님은 모르시나요?”나는 웃으면서 말했다.그는 손으로 짐볼을 굴리면서 말했다.“지원 씨는 단순히 복수만 하고 싶은 것이 아닐 거야. 그리고 복수를 한다고 해도 어린아이한테 손댈 사람은 아니야.”‘잔인한 그가 나를 이렇게 떳떳한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다니!’“지원 씨는 나에게 원인을 말해주지 않아도 돼. 우리 앉아서 얘기 나누면서 지원 씨가 원하
“네, 장소를 알려주세요.”그녀는 흔쾌히 대답했다.나는 사방을 둘러보다 카페 이름을 말했다. 반 시간쯤 기다리자 캐주얼차림에 오토바이를 탄 멋지고 훤칠한 외모를 가진 용설아가 왔다.진정우와 용설아는 취향이 서로 같았다. 나는 그녀의 모습을 보고 진정우가 오토바이를 타던 모습이 떠올랐다.심지어 나는 진정우가 먼저 나를 사랑한 것이 아니었다면 지금쯤 그의 옆에는 내가 아니라 용설아였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죄송해요. 오래 기다렸죠?”용설아는 먼저 나에게 사과부터 했다.비록 그녀도 용씨 가문의 사람이었고 진정우와도 갈등이 있었지만 나는 그녀가 싫지 않았다.나는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제가 당돌했어요, 설아 씨 휴식 시간을 방해해서 죄송해요.”아까 그녀가 전화 받을 때 분명 자다 깬 목소리였다.“네, 요즘 잠을 못 자서 모처럼 오늘 좀 자고 있었는데 방해를 받았네요.”그녀는 직설적이었다.나는 그녀가 요즘 왜 잠을 못 잤는지 궁금했지만 그녀와 친하지 않아서 묻기가 어려웠기에 그녀에게 용건만 말했다.“오늘 설아 씨에게 부탁할 일이 있어서 만나자고 했어요.”“정우 때문이에요?”용설아도 시치미를 떼지 않았다.“아니에요.”말을 마치고 나는 머뭇거리며 계속 말했다.“제 남자는 제가 알아 할게요.”“하하”용설아는 해맑게 웃었다.“나에게 이 말 해주려고 만나자고 한 거예요?”나도 웃었다.“저는 그런 생각 한 적 없어요. 오늘 다른 부탁이 있어서 만나자고 했어요.”“뭔데요?”나는 몇 초간 고민하다 말했다.“용준호의 약점이 무엇인지 알려주세요.”용설아는 몇 초간 멈칫하더니 말했다.“약점을 손에 잡고 준호를 협박하려고요?”“네, 저는 준호 씨가 제 친구를 괴롭힐까 봐 걱정돼서요. 만약 그가 함부로 하지 않는다면 저도 이 수법을 쓰지 않을 거예요.”나는 용설아에게 설명했다.용설아는 몇 초간 침묵하더니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나의 조카인 준호를 배신하란 거예요?”“당신들의 관계를 알아요. 하지만 설아 씨도 준호 씨가 하는 짓
나는 용준호가 이 요구를 제시한 것이 하나도 놀랍지 않았다. 그리고 예전에 내가 살던 집 주소지로 안리영에게 택배를 보낸 것은 나를 끌어들이기 위함이다.정말 청춘어람이라고 그의 아버지 모습을 그대로 잘 이어받았다.“먼저 무슨 일이신지 말씀해 보세요.”나는 그가 마음대로 나의 약점을 가지고 나를 협박하지 못하게 했다.그가 나를 마음대로 협박하는 것도 나의 약점이 안리영이라는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이 사실일지라도 나는 그를 눈치채게 하면 안 되었다.“지원 씨, 정우가 준 물건을 내놔.”용준호는 직접적으로 말했다.나는 웃으면서 말했다.“정우 씨가 나에게 아무것도 주지 않았다면 믿으실 수 있어요?”용준호는 가볍게 비웃으며 말했다.“지원 씨, 이러면 재미가 없어.”나는 조롱 하며 말했다.“믿지 않으셔도 말할게요. 전에 휴링턴에 있을 때 정우 씨와 제가 어떤 상황이었는지 직접 두 눈으로 보셨죠? 그러다 정우 씨가 사고 난 후 그의 얼굴을 보기도 전에 용씨 가문 딸인 설아 씨가 화장해 버렸어요. 정우 씨를 접촉하지도 못했는데 나에게 준 것이 뭐가 있겠어요?”용준호는 턱을 어루만지며 나를 바라보았다.용준호가 이상한 낌새를 느끼지 못하게 나도 그의 눈길을 피하지 않았다.“정말 정우 씨에게 뭐가 있다고 생각되면 준호 씨의 고모를 찾아가야 할 것 같아요.정우 씨를 제일 마지막으로 접촉한 사람이 설아 씨에요.”나는 모든 것을 용씨 가문에 떠넘겼다. 용설아가 지금 어떤 역할을 맡았는지 모르지만 모든 것을 그녀가 떠안는 것이 내가 떠안는 것보다 낫다.“지원 씨의 속내를 모를 줄 알아? 나의 고모에게 모든 책임을 떠넘기면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다고 생각하나 보지?”용준호도 바보는 아니었다.“그건 준호 씨와 고모 사이의 일이고요. 아무튼 정우 씨는 저에게 준 것이 없어요.만약 있다고 해도...”나는 일부러 머뭇거리며 말했다.“그건 바로 정우 씨가 저에게 남긴 상처뿐이죠.”나는 손으로 가슴을 찔렀다.“여기요, 칼로 한번 갈라 볼래요?”
그녀가 온라인 쇼핑을 하지 않았다는 것을 그녀의 표정에서도 알 수 있었다.나는 하루 종일 수술만 한 안리영을 대신해 택배를 받아 받는 사람 이름을 확인했더니 확실히 그녀에게 온 택배였다.“설마 또 너를 애모하는 누군가가 보낸 거 아니야?”나는 택배를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안리영은 모르는 표정이었다. 그녀는 책상 위의 커터 칼로 택배를 열어보았다.나도 그녀처럼 안에 든 것이 무엇인지 궁금해서 쳐다보았지만 택배의 외부 포장을 뜯어 내부 상자를 열자 그녀와 나는 동시에 돼지를 잡는듯한 비명을 질렀다.그리고 이 비명은 계속 되였다...밖에서 이 소리를 듣고 누군가가 달려 들어와 여기저기 기어다니는 뱀을 잡을 때까지 말이다.나와 안리영은 놀라서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방금 택배를 여는 순간 뱀이 툭 튀어나왔고 심지어 그 뱀이 나와 안리영의 얼굴을 스쳐지났다...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와 안리영은 연체동물을 제일 무서워한다. 심지어 뱀뿐만 아니라 애벌레도 무서워한다.이는 분명히 일부러 안리영이 겁먹게 하려고 협박하는 것이다.송장에 있는 배송지를 확인해 보니 내가 전에 살던 동네였다. 하지만 그곳은 이미 철거된 상태이기에 협박 소포를 보낸 사람은 나를 아는 사람일 것이다.이 사람은 나를 알고 있고 지금 또 안리영도 협박한 걸 보니 나는 바로 무슨 의미인지 이해되었다.안리영이 피해를 본 여자들의 일을 조사하는 것을 도운 것이 발각된 것이다. 이는 그녀더러 더 이상 참견하지 말라는 경고이다.“리영아, 미안해. 결국엔 너도 이 일에 연루됐어.”새하얗게 질린 안리영의 얼굴을 보고 마음이 아팠던 나는 그녀에게 사과했다.내가 제일 두려워하던 일이 결국엔 일어나고 말았다.“리영아, 이 일은 여기서 그만하자. 너는 더 이상 참견하지 마. 뱀을 보낸 것을 보면 그냥 너에게 참견하지 말라는 경고야. 앞으로 더 이상 너에게 허튼짓하지는 않을 거야.”나는 안리영에게 말했다.안리영은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협박 같은 거 나는 두렵지 않아.”안리영은 고집이 센
그가 나에게 할 말이란 자신의 후사에 관한 일이었다.“삼촌, 이런 말씀 하실 필요 없어요. 삼촌은 괜찮으실 거예요.”나는 그를 위로했다.하지만 별 소용이 없었다. 그는 여전히 자신의 자산과 부동산 그리고 세상 물정들을 나에게 당부했다.그는 유언을 남기는 것이었다. 그와 비록 감정이 깊지 않았지만 나는 여전히 이별의 아픔을 느꼈다.그는 낮은 목소리로 슬퍼하는 나를 위로했다.“지원아, 누구나 다 죽게 돼 있어. 언젠가 그날이 온다면 슬퍼할 필요 없어, 나와 외숙모는 희연이와 재회하러 간 거야, 우리 가족이 다시 하늘나라에서 행복하게 함께 살 수 있어.”이제야 그가 딸을 잃은 후 얼마나 슬프고 외로웠으며 그에게 하루하루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게 되었다.그는 유희연에 대한 그리움을 마음속 깊이 담아두고 있었고 한 번도 언급한 적이 없었다.나는 불안한 마음으로 그의 손을 잡고 말했다.“삼촌한테는 제가 있잖아요, 이젠 저한테도 가족이 삼촌밖에 없어요.”나와 그는 혈연이 있으나 늦게 만난 탓에 정이 깊지 않았다.아무 말도 하지 않는 그를 보고 나는 그가 삶에 대한 욕구가 없다는 것을 알았다. 나도 그의 가족이지만 친딸을 대신할 수는 없었다.그는 딸을 찾으러 가려는 것이다.지금까지 그가 버틸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아내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가 무사하길 원한다면 외숙모에게 아무 일도 없어야 한다.“리영아, 구 교수님을 만나면 나를 도와줄 수 있는지 물어봐 줄 수 있어?”나는 안리영을 찾아 그녀에게 도와 달라고 부탁했다.외숙모가 넘어져 이렇게 된 후 의사는 심근경색이라고 했다. 이 분야는 구안석전문이었다.“알았어, 마침 요 며칠 사이에 선배가 돌아올 거야.”안리영이 흔쾌히 대답해서 나는 그녀의 안색이 어둡다는 것을 발견하지 못했다.“잘됐네.”나는 흥분해서 말했다.심장 분야 전문인 구안석이 진소영의 심장 이식도 성공했기에 외숙모의 일도 희망이 있을 것이다.안리영은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용은서를 언급했다.“은서가 너무 불쌍해. 집으로 일찍
“아니에요, 저는 단지 은서가 나에게로 빨리 돌아오기를 바랄 뿐이에요.”함소은의 얼굴은 수척해 보였다.하지만 나는 그녀가 불쌍해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의 자업자득이라고 생각했다.“소은 씨, 며칠도 참았는데 사흘만 더 참으세요.”나의 말을 들은 함소은은 화를 냈다.“지원 씨, 지금 무슨 뜻이에요? 이제 와서 나 몰라라 하는 건 아니죠?”“전 소은 씨에게 이삼일만 더 기다려달라고 하는 거예요.”나는 그녀에게 설명했다.“왜 기다려야 하는데요? 뭘 하려고 그래요?”그녀는 머리가 좋았다.나는 차창 밖을 바라보며 말했다.“누군가 무사하게 돌아오기를 기다리려고요.”함소은은 나를 붙잡고 말했다.“은서로 성재 씨를 맞바꾸려고 그러는 거죠?”함소은도 배성재가 무엇을 하러 갔는지 알고 있다. 나도 대범하게 인정했다.“네.”“지원 씨!”함소은은 화가 치밀어 올랐다.“어떻게 이렇게 비열할 수가 있어요, 은서는 아직 아이일 뿐이에요.”“네, 맞아요. 은서는 당신이 딸이기도 하죠. 그런데 당신도 은서를 도구로 이용하지 않았나요?”나는 그녀에게 거침없이 말했다.게다가 윤은서도 함소은이 직접 나한테 보내온 도구였기에 이용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눈을 부릅뜨고 나를 노려보던 함소은은 몇 초 후 김빠진 공처럼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이 세상에는 믿을 사람이 오직 자신뿐이네요.”나는 그녀의 인생을 꿰뚫어 본 듯한 발언을 무시한 채 차분하게 말했다.“은서는 무사할 거예요, 며칠 소은 씨와 늦게 만날 뿐이에요.”함소은은 더 말해도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나를 데려다준 후 함소은은 떠났다. 나는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은 후 음식을 주문했다. 배불리 먹고 물건을 사서 유희연의 집으로 갔다.그곳에 갇혀있는 동안 나는 꿈에서 유희연을 보았다. 비록 꿈은 무의식적인 행동이지만 나는 그녀가 나에게 무언가를 암시해 주는 것이라고 느껴졌다.유희연이 세상에서 가족은 오직 부모뿐이었기에 나는 그녀의 걱정도 그들이라고 생각
“뭔데요?”그녀의 말을 들은 안리영은 놀라지 않았다.누구든 나에게 요구하는 것이 있으면 나도 그에게 보답을 원한다. 이른바 오는 것이 있어야 가는 것이 있는 법이다.“지원 씨는 제 딸을 납치한 죄를 뒤집어써야 해요.”함소은의 말을 들은 안리영은 그녀의 뜻을 이해했다.“소은 씨는 지금 이 상황을 수습하기 힘들죠?”그녀의 마음을 간파한 안리영이 말했다.함소은도 숨기지 않고 말했다.“진표 그 개자식은 은서를 매우 사랑하는 것 같지만 이 상황이 되도록 그는 조급해하지 않아요.”그녀는 자신이 딸 용은서로 용진표에게서 돈을 바꾸고 싶었지만 그는 속지 않았다. 게다가 며칠 동안 갇혀 있던 딸은 울고불고 난리를 피워 보러 가고 싶었으나 노출이 될 것이 두려웠고 그녀도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다.그녀는 아무 이유 없이 납치당한 아이를 돌아오게 할 수 없었다. 그녀가 들은 바에 의하면 용진표는 누가 자신의 딸을 납치했는지 조사 하라고 시켰고 그녀를 의심하는 것 같았다.그래서 그녀는 최대한 빨리 은서를 무사히 돌아오게 해야 했다, 그러면 용진표도 조사를 멈출 것이다.“그러나 지원이가 죄를 뒤집어쓴다면 용 대표님이 그녀를 가만히 두지 않을 거예요.”안리영이 말했다.“진표 씨는 지원 씨 부모님께 목숨값 두 개를 빚진 것이 있기에 지원 씨가 그의 딸을 납치했다고 해도 아무 일 없을 거예요. 게다가 은서가 다치지 않았기에 진표 씨는 지원 씨를 난처하게 하지 않을 거예요.”함소은의 분석이 매우 정확했다.안리영은 웃으면서 말했다.“소은 씨는 얼굴이 이쁠 뿐만 아니라 지능도 좋아요.”함소은은 조롱하듯 웃었다. 만약 용진표가 그녀의 외모에 반해 그녀를 좋아하지 않았다면 그의 숨겨둔 애인에 그치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는 정태성과 함께 연수해서 회사원이나 성공적인 사람이 되었을 것이다.하지만 모든 것을 용진표가 망가뜨렸다. 이쁜 얼굴이 싫었던 그녀는 누가 그녀를 이쁘다고 칭찬하면 화를 냈다.누군가는 아름다운 외모를 밑천으로 생각하지만 그녀에게는 모든 불행의 시작이
함소은은 안리영의 말을 확신하는 듯 그녀를 넋 놓고 바라보았다.“만약 태성 씨를 만나고 싶으시다면 제가 도와드릴 수 있어요.”말을 마친 안리영은 고개를 흔들며 웃었다.“저 말고 지원이가 도울 수 있어요.”안리영을 본 함소은은 첫눈에 그녀를 보낸 것이 윤지원이라는 것을 알았다. 윤지원의 상황을 생각한 함소은은 비웃으며 말했다.“지금 지원 씨 자신도 돌볼 수 없는 상황인데 나를 도울 수 있다고요?”“지원이 이 보살이 그곳에 들어가 나랏밥을 먹을 수 있는 것도 기회를 만들어준 소은 씨에게 감사드려야죠.”안리영은 힌트를 주었다.함소은은 안리영의 눈길을 피해 다른 곳을 바라보며 말했다.“나랑 뭔 상관이에요?”안리영은 직설적으로 말했다.“소은 씨, 여기까지 말했으면 더 이상 시치미를 떼지 마세요. 사실 은서는 소은 씨가 사람을 시켜 데려간 거죠?”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함소은은 화를 내며 소파를 내리쳤다.“무슨 헛소리에요? 제가 왜 제 딸을 납치해요. 저...”“소은 씨는 딸로 정태성을 맞바꾸려고 그러는 거잖아요.”안리영은 그녀의 말을 자르고 말했다.얼굴을 돌린 함소은은 그녀의 말을 부정했다.“아니에요.”“제가 용 대표님에게는 말하지 않을게요. 두려워 마세요.”안리영은 그녀를 안심시켰다.“그럼, 이 말을 저에게 한 이유가 뭐예요?”함소은은 직접적으로 안리영에게 물었다.안리영은 숨을 들이쉬고 말했다.“지원이가 저를 보낸 게 맞아요. 지원이는 지금 그곳에서 너무 불편해서 나오고 싶어 해요.”“나오고 싶으면 경찰을 찾으면 될 것을 저를 찾아 뭐 해요?”함소은은 콧방귀를 뀌었다.안리영은 가볍게 웃었다.“소은 씨가 지원이를 그곳에서 꺼내준다면 정태성을 만나게 도와줄 거예요.”안리영의 말을 들은 함소은은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며 웃었다.갑자기 웃음을 터뜨린 함소은의 모습을 본 안리영은 그녀의 마음을 가늠할 수 없었다.“지원 씨가 나오려고 하면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이 많을 텐데, 왜 저를 찾아오신 거죠?”함소은은 웃으면서 안리영에게
‘위선적이야!’그냥 거절하면 될 것을 방금까지 그녀와 여자 친구가 없다고 부정하던 조시언은 지금 또 여자 친구가 있다고 말했다.“못 믿겠으면 물어봐요.”조시언은 안리영을 가리키며 말했다.안리영은 속으로 중얼거렸다.‘나랑 뭔 상관이야?’사실 이쯤 되면 여인은 조시언에게 거절을 당했기에 즉시 떠나는 것이 맞으나 여인은 대답을 요구하듯 안리영을 바라보았다.안리영은 그런 그녀를 원망하지 않고 오히려 조시언을 노려봤다. 이어서 안리영이 대답하려는데 조시언이 먼저 말했다.“조금 전 여자 친구랑 산부인과에 갔던 일을 물어봤어요.”안리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놀란 여인은 얼굴이 빨개서 뒤돌아 도망갔다.“삼촌은 여인들의 고백을 거절하는 법도 다양하네요.”안리영은 조시언을 조롱하며 말했다.그녀의 말을 들은 조시언이 말했다.“쌀국수 왔어.”조시언이 말을 마치자 복무원이 쌀국수를 들고 왔다. 조용하게 앉아서 쌀국수를 먹던 안리영은 열심히 먹는 조시언의 모습을 바라보고 자신도 열심히 먹었다.역시 장사가 잘되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쌀국수가 정말 맛있었다. 얼큰하게 먹었던 안리영은 코끝에 땀이 났다.반면 우아하고 차분한 조시언의 모습은 마치 프랑스 파스타를 먹는 것 같았다.쌀국수를 먹은 후 조시언이 그녀와 할 말 도 다 했기에 안리영은 그와 작별했다.“삼촌, 나 먼저 갈게, 다음에 봐.”“리영아.”조시언이 귀국 후 처음으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어릴 적 그는 그녀를 항상 이렇게 불렀기에 안리영은 그때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 조시언을 바라본 그녀는 그가 말하기를 기다렸다.“나중에 무슨 일 있으면 나한테 직접 물어봐, 스스로 추측하지 말고.”조시언의 말을 들은 안리영은 난감했다.다시는 그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을 것이기에 나중은 없을 것이다.조시언과 헤어진 후 함소은을 찾아온 안리영은 문전박대를 당했다. 안리영은 전혀 놀라지 않고 그녀를 거절한 사람에게 말했다.“태성 씨가 보냈다고 소은 씨에게 전해주세요.”이 말은 확실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