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시 뻔뻔한 사람을 이길 수는 없다.나를 향해 걸어오는 조나연을 보고 이런 생각이 문뜩 들었다.제대로 된 인간이라면 내연녀의 신분으로 이토록 당당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조나연은 당당하고도 남았다. 그녀는 자신이 대단한 존재라도 되는 듯이 으스댔다.“여기서 다 만나네요, 지원 씨. 밥 먹으러 왔어요?”조나연은 나와 말하면서 진정우를 힐끔댔다. 사실은 처음부터 진정우를 바라보며 걸어왔다.전정우는 원래도 시선이 가는 타입이니 할 말은 없다. 나이 많은 아주머니도 그를 힐끔거리기 마련이다. 조금 전 집에서도 그러지 않았는가?“안 그러면 구경하러 왔겠어요?”나는 차갑게 말했다. 내 성격이 못된 게 아니라, 그냥 그녀가 착한 척하는 게 꼴 보기 싫었다.만약 그녀가 당당하게 강유형을 좋아한다고 인정하면, 나는 흔쾌히 물러날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그러지 않았다. 일부러 내 신경을 거스르기만 했다.나의 말을 들은 그녀는 곧장 서러운 표정을 지었다. 강유형도 없는데 연기는 왜 하는지 모르겠다.‘혹시 이번 표적은 정우 씨인가?’세상에는 자기 주제를 모르는 사람이 꽤 된다.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세상 모두가 자신을 사랑한다고 착각하는 사람 말이다.조나연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과부 주제에 남자한테 잘 보이겠다고 가면을 쓴 모습이 퍽 우스웠다.‘쟤 강유형을 좋아하는 거 아니었어? 더 좋은 남자를 보면 바로 넘어갈 가벼운 마음이었나? 아니면 그냥 내 곁에 있는 남자라면 다 좋은 건가?’나와 진정우는 그런 사이가 아니었다. 그래도 나는 조나연이 치근덕대는 것이 싫었다. 그래서 피식 웃으며 말했다.“가서 임산부 세트나 먹어요. 여기 음식 꽤 건강하거든요. 나연 씨 같은 임산부한테 꼭 맞아요.”조나연의 안색은 순간 빨개졌다가 다시 창백해졌다. 그리고 속셈이 뻔히 보이는 표정으로 진정우를 힐끔댔다.“하.”나는 어이없는 웃음을 날렸다. 조나연이 이 꼴을 하고서도 진정우에게 잘 보이려고 하는 게 웃겼다.조나연이라면 유강후와 만나면서도 여러 남자
이럴 줄 알았으면 안 볼 걸 그랬다.내가 시선을 돌리려고 할 때 강유형이 문뜩 고개를 돌렸다. 그는 창문 유리를 통해 이쪽을 바라보며 미간을 찌푸렸다.나는 크게 신경 쓰지 않고 진정우를 바라봤다. 그는 마침 주문을 끝냈다. 들어보니 전부 내가 좋아하는 것이었다.나를 위해 주문했다기에는 불가능해 보였다. 그는 나를 이 정도로 잘 알고 있을 계기가 없었기 때문이다.궁금했던 나는 입을 달싹이며 머리를 들었다. 하지만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괜히 물어서 내가 그에게 신경 쓰고 있다는 인상을 주고 싶지 않았다.나는 그냥 다른 걸 물었다.“술 마실래요?”“아뇨, 오후에 할 일이 있어서요.”‘아, 맞다. 또 가서 집 봐야 하지.’나는 그가 집을 봐야 해서 술을 안 마시는 줄 알고 말했다.“괜찮아요. 집 볼 때도 제가 같이 있어 줄게요. 사기당할 일은 없어요.”“아니에요. 저...”그는 잠시 말을 멈췄다. 나는 그가 무슨 말을 할지 유심히 듣고 있었다.나와 시선을 마주친 그는 당당하게 마주 보며 말했다.“집은 알아서 고를게요.”나는 짧게 대답했다. 나도 귀찮던 참에 잘 됐다고 생각했다. 함께 본 집에 문제라도 있으면 나까지 책임을 지게 될 것 같았던 것도 있다.술을 안 마신다고 했으니 나는 음료수로 주문했다. 이때 식탁에 그림자가 드리우더니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일 바쁘다며? 여기서 밥 먹을 시간도 있어?”어디에서 개가 짖고 있었다. 조나연에게서 무슨 말을 들었는지 꽤 공격적이었다.그의 말을 들은 나는 뺨이라도 후려갈기고 싶었다. 일이 바쁘면 밥을 먹지 말아야 하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내가 마침 반격하려고 할 때 진정우가 대신 말했다.“오늘 쉬는 날이에요.”강유형은 차가운 눈빛으로 진정우를 바라보다가 다시 나에게 물었다.“누가 쉬어도 된다고 허락했지?”“제가 쉬자고 했어요.”진정우가 또다시 먼저 대답했다. 강유형의 안색은 더욱 어두워졌다.“일개 직원이 무슨 자격으로 휴식을 요구하죠? 채용됐으면 주어진 일이나 열심히
도망가고 싶었다. 어디든 가야 할 것만 같았다. 하지만 나는 그러지 못했다.내가 외면할수록 진정우는 더 이상하게 생각할 것이다. 그리고 그는 진작 할 말 못 할 말 직설적으로 하지 않았는가?나에게 그런 말을 하는 것이 그는 전혀 부끄러워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나도 애써 당당하게 말했다.“말로만요? 증명할 수 있어요?”“흠...”진정우는 물 한 모금 마시고 나서 대답했다.“할 수 있어요.”그의 대답을 들은 나는 되레 당황하며 말했다.“됐어요, 아무 말도 하지 마요.”결국 나의 참패다.“만약 증명이 필요하면 병원에 다녀올게요.”진정우는 담담하게 말했다. 참 생각을 많아지게 하는 말이었다.‘내가 뭐라고 증명하겠다는 거야? 참...’“그런 건 미래 와이프한테나 증명해요.”말을 마친 나는 황급히 화장실로 도망갔다. 그러나 코너를 돌자마자 누군가에게 팔이 잡혀서 억지로 멈춰 섰다. 냄새만으로 상대가 누구인지 알아차릴 수 있었다.강유형은 내 팔을 꽉 잡으며 말했다.“직원이랑 이런 데서 밥 먹는 건 좀 너무한 것 같지 않아?”그는 화난 표정이었다. 어쩐지 질투하는 것 같기도 했다. 나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왜? 여기 사장도 말이 없는데, 네가 뭐라고 멋대로 옳고 그름을 갈라?”“윤지원!”강유형은 눈을 부릅떴다.“남자가 아무리 고파도 제대로 된 걸 찾아야 할 거 아니야.”그는 처음부터 진정우를 깔보고 있었다. 동시에 나를 깔보는 것이기도 했다.“정우 씨는 고급 엔지니어에 명문대 출신으로 학벌까지 좋아. 너한테는 뭐가 있는데?”이건 오늘 아침 자료 조사를 통해 알게 된 것이다.내 질문에 강유형은 말을 잃었다. 그는 지위가 높기는 했지만 학벌이 그다지 좋지 않았다. 학벌이라면 강진혁보다도 못했다.하지만 그는 똑똑했다. 사업하기 딱 좋은 성격이라 가업을 물려받을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지금도 회사를 잘 이끌고 있다.누구나 잘하는 게 있고 못 하는 게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강유형은 과하게 오만했다. 그는 자신의 빛만 보이고 다른
강유형의 모습은 누가 봐도 질투하는 것이었다.정말 어이가 없었다. 과부와 썸 타면서도 나를 위해 질투한다니 말이다. 소유욕도 욕심도 어처구니없이 많았다.나는 화장실에 잠시 있다가 밖으로 나갔다. 그러다가 마침 조나연의 목소리를 들었다. 그녀는 아주 처량하게 말했다.“유형 씨 아직도 지원 씨 좋아하는 거지? 그런 거지?”“지원이는 내 약혼녀야.”강유형의 말은 내 추측을 검증하는 셈이었다. 그는 아직도 나에게 미련이 있었다.“근데 둘은 이미 헤어졌잖아.”조나연의 목소리는 아주 나른했다. 남자 하나 꼬시겠다고 목소리까지 조절하는 것은 꽤 대단했다.“헤어진다는 말은 나왔지만, 난 허락 안 했어. 그리고 지원이는 나랑 헤어지지 못해. 지금도 잠깐 화가 났을 뿐 풀리면 괜찮아 질 거야.”강유형이 이런 말을 할 줄은 나도 생각지 못했다. 그는 내가 헤어지자고 했던 말을 잠시 화내는 거로 생각했던 것이다.“남자들은 다 그래. 익숙한 건 소중한 줄 모르고 잃고 나서야 아쉬워하지.”조나연의 말에 강유형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조나연이 말을 이었다.“지원 씨랑 계속 만날 거면 나한테 왜 잘해줘? 나한테 잘해줘서 지원 씨가 오해한 거 몰라?”나는 호흡을 가다듬었다. 나도 궁금한 문제였다.오늘 이 대화를 듣기 전에, 나는 강유형과 조나연이 정말 서로를 사랑하는 줄 알았다. 하지만 서로 사랑하는 사이라면 강유형이 이런 식으로 말할 리는 없을 것 같았다.강유형은 여전히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저도 모르게 천천히 앞으로 걸어가서 몸을 숨겼다. 그곳에서는 마침 복도 끝의 거울에 비친 두 사람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어두운 안색으로 고개를 숙인 강유형은 발끝만 바라봤다.“지원 씨를 좋아한다면 왜 나랑 키스까지 했어?”조나연의 말을 듣고 나는 몸을 흠칫 떨었다.‘둘이 키스까지 한 거야?’나의 마음이 쿵 하고 울리더니 무언가 끊어져 나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유형 씨, 빨리 대답해!”조나연이 흥분해서 강유형의 옷을 잡아당겼다.“왜 나랑 키스했
나는 오후 3시부터 저녁 9시까지 술집에 있었다. 많이 마신 건 아니지만 그래도 꽤 오래 마셨다. 마지막쯤에는 몸에 힘이 풀리며 머릿속이 창백해졌다.술집 사장은 나와 아는 사이였다. 그래서 혼자 늦게까지 마셔도 사고가 생길 걱정은 없었다.“오늘 언제 가요? 데리러 올 사람은 있어요?”사장은 지 씨였다. 이름이 뭔지는 나도 모른다. 사람들은 그를 지 사장이라고 불렀다.지 사장은 50대 정도 되어 보였다. 만약 내 아버지 살아있었다면 비슷한 나이대였을 것이다.“지금 갈 거예요.”사실 나는 가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내일 또 할 일이 있는 관계로 빨리 돌아가서 쉬어야 했다.오늘 마신 술은 강유형과의 완전한 이별을 선고했다.내가 의자를 짚고 일어날 때 지 사장이 와서 막아섰다.“지원 씨 혼자 가는 건 걱정돼서 안 되겠어요. 사람 보내서 지원 씨 데려다주라고 할게요.”지 사장은 아주 세심한 사람이었다. 그래서인지 몇 년째 골목길에서 운영하는 이 술집은 장사가 아주 잘 되었다.이곳 손님 중 대부분이 단골이었다. 나는 학교 다닐 때부터 이곳을 알았다. 처음에는 강유형이 자신을 좋아하는 여자와 가까이 지내서 질투하는 마음에 온 것이었다.그날 술에 취해 기절한 나는 아침까지 술집에 있었다. 고요한 술집에는 나 혼자만 있었다. 당황한 표정으로 일어난 나한테 지 사장은 해장국을 건네줬다. 술 마시고 싶으면 다른 곳에 가지 말고 자신에게 오라며 말이다. 그는 다른 곳에서 나쁜 사람이라도 만나면 큰 일이라고 했다.그 이후 나는 기분이 안 좋을 때마다 이곳에 방문했다. 지 사장은 내가 고주망태가 되어도 말리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안전만 보장해 줄 뿐이다.지 사장에게는 딸이 있었다. 그의 딸은 17살쯤 되던 해 남자친구와 헤어지고 술을 마셨다가 나쁜 사람을 만났다. 후에는 정신적인 고통에 시달리다가 자살했다고 한다.그렇게 지 사장은 이 술집을 열어서 술의 위로가 필요한 여자들을 보호해 줬다.“좋아요.”나는 거절하지 않았다. 괜히 지 사장을 걱정시키고 싶지
나는 자전거를 안 탄 지 한참 된 것 같았다.“자전거 탈래요.”나는 한쪽에 있는 따릉이를 가리켰다. 강진혁이 먼저 큐알 코드를 스캔했고 나도 뒤따르려고 했다.이때 강진혁이 나를 말리며 말했다.“넌 술 마셨으니까 안 돼.”“자전거도 음주 운전에 속해요?”“그건...”강진혁은 내 팔을 잡았다. 강유형이 늘 그랬듯 아프게 잡은 것이 아닌 아주 살며시 잡았다.“술 마시고 자전거 타는 건 위험하잖아.”그는 정말 물같이 부드러운 사람이었다. 나는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오빠도 같이 있잖아요.”“자전거 타고 싶으면 다음에 같이 타자. 오늘은 내가 데려다줄게.”강진혁은 나를 자기 자전거의 뒷좌석에 앉혔다.“넘어지지 않게 꽉 잡아.”나는 그의 허리를 잡으며 대답했다.“네.”저녁 바람 속에서 자전거를 타는 소년이라... 이는 강진혁이 나에게 남겨준 추억이다. 강유형은 다르다. 그는 오토바이만 탔다.두 사람은 너무나도 달랐다. 분명히 형제인데도 성격이 정반대였다.“오늘 기분 안 좋을 일 있었어?”강진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아니요.”“유형이 때문에 그러지? 아직도 포기 못 했어?”강진혁이 또 물렀다.나는 콧방귀를 뀌며 그를 콕 찔렀다.“누가 포기 못 했다고 그래요? 진작 포기했거든요. 오늘부로 다시는 신경 쓰지 않을 거예요. 완전히 다른 길을 갈 거라고요.”강진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계속 앞으로 갈 뿐이었다.이때 무언가 떠오른 나는 말을 보탰다.“호텔에 데려다줘요. 내일 출근해야 해요.”“지원아.”강진혁이 갑자기 나를 불렀다.“왜 너한테는 유형이 밖에 안 보일까? 나도 여기 있는데, 왜 알아주지 않아?”나는 그의 옷을 더욱 꽉 잡았다. 심장은 쿵 하고 크게 울렸다.나도 바보가 아니다. 강진혁이 나를 좋아하는 건 진작 알고 있었다. 그저 인정하지 않았을 뿐이다.‘진짜 날 동생 이상으로 생각하고 있었구나.’“약혼했으니까, 사람들이 다 그래야 한다니까, 더 눈에 띌 수밖에 없죠.”“둘이 이제 헤어졌으면... 나
예상치 못한 상황에 나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사실 꽤나 난처한 상황이었다. 한 여자가 두 남자 사이에 끼어 있다니 말이다.나는 이 어색함을 깰 결단을 내려야 했다. 한 가지는 분명했다. 나와 강진혁은 절대 불가능했다. 만약 두 사람 중 한 명 선택해야 한다면, 나는 차라리 진정우를 선택할 것이다.어찌 됐든 나와 강유형은 거의 혼인 신고를 할 뻔한 사이다. 그와 끝을 내지 않은 상황에서 그의 형과 얽힐 수는 없었다.“오빠, 저 피곤해요.”오빠라는 말은 상당히 효과가 있었다. 강진혁은 결국 내 손을 먼저 놓았다.진정우는 나를 잡고 호텔에 들어갔다. 나는 뒤돌아보지 않고서도 강진혁의 뜨거운 시선이 느껴졌다.술기운 때문인지, 아니면 그냥 내 마음이 어지러워서인지, 나는 호텔 계단을 내려가다 발을 헛디뎌버렸다. 순간 몸이 가벼워지며 진정우가 나를 안아 들었다.“이거 놔요.”나는 떨어지지 않으려고 진정우의 옷을 꽉 붙잡았다.“저 사람 때문에 난감한 거 아니었어요? 빨리 벗어나고 싶으면 가만히 있어요.”진정우는 낮은 목소리로 나에게 말했다. 강진혁이 한 말을 떠올리며 나는 조용히 안긴 채 움직이지 않았다.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강진혁과는 절대 엮여서 안 된다. 나는 정말 그를 친오빠로 생각했기 때문이다.나는 한 번도 그를 다른 시선으로 본 적 없었다. 그리고 이 관계는 나에게 아주 소중했다. 망가지게 두고 싶지 않았다.강진혁은 내성적인 사람이다. 그는 쉽게 고백하지 않았고 집착하지도 않는다. 내가 다른 사람을 좋아한다고 오해한다면 무조건 물러날 것이다.결국 나는 진정우의 품에 안긴 채 호텔 로비에 들어섰다. 그는 나를 방 앞까지 안아서 데려다줬다.나는 강진혁의 마음을 알아챈 것처럼 진정우의 마음도 알아챘다. 오늘 강진혁과의 관계를 정리한 참에 그와의 관계도 확실히 정리해야겠다고 생각했다.그가 나를 내려놓은 다음에도 나는 그의 옷을 잡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가슴팍을 응시하며 솔직하게 말했다.“정우 씨는 되게 잘생겼어요.”“네.”내 말에
“네.”진정우가 단호하게 대답하고 나서 말을 이었다.“저도 통제할 수가 없어요. 자꾸 팀장님한테 다가가고 싶고, 잘해주고 싶어요. 그리고... 그 유혹이라는 것도...”사랑이란 게 마음대로 되는 것이라면 인생도 그렇게 힘들지 않았을 것이다.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잠시 입을 다물었다. 진정우는 조용히 나를 놓아주었다.“들어가서 물 많이 마셔요. 필요한 게 있으면 전화하고요.”그는 말을 마치고 내 가방을 가리켰다.“카드 이리 줘요. 문 열어줄게요.”“아니에요.”나는 정신을 차리며 그와 거리를 벌렸다.“제가 할게요.”급히 카드를 꺼내 안으로 들어간 나는 문에 기대 한동안 멍하니 서 있었다.잠시 후 이소희가 돌아왔을 때, 나는 이미 침대에 누워 있었다. 그녀는 내가 깰까 봐 조심스레 움직였다.나도 눈을 뜨지 않았다. 말을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가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혼자서도 잘 자고 있었네.”이 말을 듣고 나는 이불 속에서 주먹을 쥐었다. 아무래도 진정우가 이소희에게 나를 부탁한 모양이다.‘진정우...’나는 도대체 어쩌다 그와 얽히게 된 걸까? 나는 깊이 생각하지 않고 천천히 잠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또 꿈을 꿨다.꿈은 혼란스러웠다. 나는 꿈속에서 부모님을 보았다. 그들이 사고를 당했던 장면을 말이다.비록 사고 현장을 본 적은 없지만, 나중에 경찰서에서 몰래 사건 파일을 뒤져서 사진을 본 적 있다. 그 끔찍한 장면은 내 기억 속에 깊이 새겨져 악몽이 되었다.나는 강씨 가문에 간 초반에 악몽을 자주 꿨다. 하지만 최근 몇 년간은 거의 꿈을 꾸지 않았다. 그런 꿈을 오늘 다시 꾼 것이다.일어나 보니 해는 아직 뜨지 않았다. 현재 시각은 새벽 5시였다.최근 들어 항상 이 시간에 일어났다. 아무리 늦게 자더라도 말이다.어제 술을 많이 마셨지만 다행히 머리도 아프지 않고 정신이 말끔했다. 핸드폰에 부재중 통화와 메시지가 와 있었다. 전화가 무음으로 되어 있어 몰랐던 것이다.안리영에게서 두 번의 전화
강유형이 여태껏 안 보이던 이유가 드디어 밝혀졌다. 강진혁이 그를 가둬둔 것이다.안리영의 말이 딱 맞아떨어졌다. 그는 정말로 아버지의 장례식에서까지 수작을 부렸다.용준호는 이미 처리됐고 강유형마저 가둬두었으니 이제 남은 건 강진혁, 그 혼자뿐이었다. 모든 결정권이 그의 손에 넘어갔다.사람들은 말한다. 사내는 독해야 자신의 자리를 지킬 수 있다고 말이다. 언제나 점잖고 다정하기만 했던 그가 지금은 혈육도 모르는 체하는 악마가 되어 있었다.“지원아, 그이를 구할 사람, 너밖에 없어...”김희연은 그렇게 말하고는 더욱 큰 소리로 울음을 터뜨렸다.그녀는 이런 방식으로 내게 몰래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이렇게라도 말하지 않으면 자신도 강진혁한테 잡혀 갇힐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그녀는 눈을 감고 못 본 척해야만 했다. 이렇게 간접적으로 내게 도움을 요청할 수밖에 없었다.자식에게 두려움을 느껴서라기보다는 그녀에게 아직 다하지 못한 소원이 있었기 때문이다.강두식은 그녀가 인생에서 가장 사랑하고 가장 의지하던 사람이었다. 그런 남자가 먼저 떠났으니 그녀에게 삶은 의미 없는 것이 되어버렸다. 그녀는 그저 가장 사랑했던 이의 곁을 지키고 그의 마지막 길을 함께하고 싶을 뿐이었다.나는 그녀를 달래고는 조용히 안리영 곁으로 다가가 속삭였다.“내가 강진혁을 붙잡고 있을게. 넌 지하 주차장으로 가서 강유형을 구해.”안리영이 놀란 눈으로 나를 보았다.“내가?”지금껏 메스만 들어본 그녀였다. 이런 식으로 사람을 구하는 일은 해본 적이 없었다.하지만 이곳엔 우리 둘뿐이었고 그녀 외엔 도움이 될 만한 사람이 없었다.망설임도 잠시 안리영은 고개를 끄덕였다.김희연은 몸을 휘청이더니 그대로 쓰러져 정신을 잃은 척했다.강진혁은 얼른 그녀를 안아 침실로 옮겼고 안리영은 의사라는 이유로 당연히 함께 불려 들어갔다.나와 안리영은 서로 눈빛을 교환하고는 역할을 바꿨다. 그녀가 강진혁을 붙잡아두는 사이, 나는 강유형을 구하러 나섰다.“혈압이 너무 높아요. 혹시 혈
“의료사고는 병원이나 의사의 책임이 아니라는 결론이 나왔고 도 선생님도 복직하셨어. 다만...”안리영은 말을 잠시 멈췄다.“다른 병원으로 전근 가셨어.”며칠 동안 병원에 머물면서 그녀를 한 번도 보지 못한 이유를 알 수 있었다.“이번 사고 때문에 전근 가신 거야?”“응. 조사 결과 산모의 죽음은 도 선생님과는 전혀 무관하다고 밝혀졌지만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그냥 그녀 손에 죽었다는 사실만 보고 이 모든 게 그녀의 책임이라고 여기는 거지.”안리영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씁쓸히 말했다.“사람들의 입이 제일 무서워. 가볍게 내뱉는 말 한마디 한마디의 무게가 얼마나 무거운지 다들 몰라.”그 말의 뜻은 도 선생님에 대한 안타까움이기도 했지만 자신의 경험에서 우러난 것이기도 했다. 그녀도 지난 세월 동안 유가족들에게 오해받고 괴로워한 적이 있었으니 말이다.“우리 리영이, 마음고생 많았겠네.”나는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그녀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세상에 사연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맞는 말이었다. 누구나 자신의 삶이 가장 고달프다고 느끼지만 정작 우리가 겪는 고통은 이 세상 온갖 아픔 중의 아주 작은 한 조각일지도 모른다.출관하는 날, 하늘에선 보슬비가 내리고 있었다. 마치 하늘조차 이 아픔을 가엾게 여기는 것처럼 말이다.나는 안리영과 함께 강씨 가문에 도착했다. 저 멀리 길 양쪽으로 차들이 길게 늘어서 있는 것이 보였다.강두식은 평생을 업계에서 살아온 인물이다. 그를 애도하러 찾아오는 사람이 많다는 건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강씨댁 대문 앞엔 흰 보가 드리워져 있었고 양옆에는 추모의 글귀가 붙어 있었다. 문 앞에 서기만 해도 가슴 속으로 서늘한 기운이 파고들었다.“조금 있다가 아주머니 뵙게 될 텐데 감정 조절 잘 해야 해. 흥분하면 안 돼.”안리영이 걱정된다는 듯이 당부했다.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지만 속으로는 잘 알고 있었다. 감정이라는 게 그렇게 쉽게 조절되는 거라면 이 세상엔 그렇게 많은 희로애락도 없었을 것이
강유형은 들고 있던 휴대폰을 천천히 내려놓았다. 온몸에 힘이 빠진 듯했다. 온몸의 피가 다 빠져나간 사람처럼 보였다. 그는 입술을 살짝 떨며 말을 꺼냈다.“엄마가 그러는데, 아빠가... 돌아가셨대.”강진혁은 이미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는지 별다른 반응도, 놀라움도 없었다.둘은 말없이 한동안 침묵을 지켰다. 그러다 강진혁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가자.”그때 마침 강유형이 전화를 걸어왔고 나는 잠결에 정신이 몽롱한 상태였다. 나는 어지럽고 복잡한 꿈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채 헤매고 있었다.그 전화는 마치 구명줄처럼 나를 그 혼란스러운 꿈에서 깨어나게 해주었다. 하지만 꿈에서 너무 많은 힘을 빼버려서 그런지 목소리가 흐물거렸다.“여보세요...”“지원아.”강유형은 나지막이 내 이름을 불렀고 그 뒤로 말이 없었다.“무슨 일이야?”나는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한 채 흐물거리며 물었다.“아빠... 오늘 가셨대.”강유형의 목소리는 깊고도 낮았다. 하지만 내게는 그 소리가 너무 크고 너무 선명하게 들렸다.그 말을 듣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주 짧은 찰나였지만 시간조차 멈춘 듯한 기분이 들었다.강두식은 내 부모님의 죽음과 관련된 사람이었다. 나는 그를 원망했었다. 하지만 지난 세월 동안 그는 나를 친딸처럼 아껴주었고 그로 인해 나는 더 이상 그를 미워할 수 없게 되었다.그 애매한 감정은 늘 내 마음을 갉아먹었다. 그래서 김희연이 나더러 집에 한번 들르라고 부탁했을 때, 그러겠다고 했지만 결국엔 가지 못했다.이제 강두식은 세상을 떠났다. 더는 그를 볼 수도, 마주할 수도 없게 되었다.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수화기 너머로 흐느끼는 소리가 아주 작게 들렸다. 그 틈 사이로 강유형의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이제 난 아버지가 없어.”이런 영원한 상실이라는 감정은 직접 겪어본 사람만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나는 안다. 우리 부모님이 세상을 떠났을 때, 그때의 나는 너무나도 어렸지만 그날 느낀 망연자실한 공포는 지금까지도 내 마음속에 깊
김희연은 순간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러다 이내 눈시울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그래... 약속한 거야...”나는 인터넷에서 용준호가 폭행을 당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사진과 영상도 함께 올라왔고 댓글에는 속 시원하다는 반응이 줄을 지었다. 조직 연루설도 떠돌고 있었다.하지만 나는 안다. 그건 강유형이 사람을 시켜 한 짓이었다.나만 아는 것도 아니었다. 눈치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강진혁은 그 일로 그를 찾아왔다.“네가 용준호를 건드렸지? 살 만큼 살았다는 거야? 죽고 싶은 거냐고.”그는 날 선 질책을 던졌다.“그런가 봐. 불 속에서도 살아남았으니 말이야.”강유형은 비웃는 듯한 말투로 빈정거렸다.강진혁은 그 말속의 숨은 뜻을 알아챈 듯했다. 하지만 따로 더 설명하지 않고 단호하게 말했다.“은신처 마련해줄게. 용진표가 널 가만두지 않을 게 분명해.”“오라고 해.”강유형은 무심하게 어깨를 으쓱였다.“허.”강진혁은 차가운 웃음을 흘렸다.“넌 아직도 우리 아버지가 예전 그 모습인 줄 아는 거야? 지금 어떤 상황인지 너도 잘 알잖아. 용진표는 더 이상 우리 아버지를 봐주지 않을 거라고.”강유형은 소파에 늘어져 앉아 다리를 탁자 위에 올렸다. 두 다리를 교차한 채로 널브러져 있었다. 셔츠 단추도 몇 개 풀어진 상태였다. 그야말로 태평한 모습이었다.“내가 언제 아버지 힘을 빌린 적이 있었나?”그는 입술을 살짝 내밀며 말했다.“형, 형은 늘 부모님이 나를 더 사랑하고 유산도 나한테 물려준다고 생각했겠지. 하지만 형이 모르는 게 있어. 내가 넘겨받은 건 용씨 가문에 다 털리고 껍데기만 남은 KS 그룹이었어. 내가 하나하나 다시 살을 붙이고 키워서 지금처럼 만들어낸 거야. 결국엔 용씨 가문을 내 발밑에서 기어다니게 만들었지.”강진혁의 길고 가는 눈이 안경 너머로 조소를 띠며 번뜩였다.“지금 그 말은 모든 걸 네 실력으로 해냈다고 자랑하는 거야? 부모님이 KS를 너한테 물려준 게 네가 나보다 더 유능해서라고 주장하
“아무 일도 아니야”안리영은 휴대폰을 끄며 말했다.저 말의 뜻은 대개 무슨 일이 있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말하고 싶지 않아 하는 것 같기에 나도 더 이상 묻지 않았다.아마 구안석과 관련된 일일 것이다.연이 끊겼어도 실처럼 미련이 남는 건 아주 흔한 일이다. 나도 강유형과 헤어진 지 꽤 되었고 이미 새로운 연애를 시작했지만 여전히 그와 완전히 끝맺지 못한 채 이리저리 얽히고 있었다. 사랑이 아니더라도 그 외의 다른 끈들이 남아 있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내가 임신한 사실을 김희연이 알게 되었고 그녀는 보양식을 한가득 들고 나를 찾아왔다.“참 잘됐다. 지원이도 이제 엄마가 되는구나.”“지원아, 병원은 아무래도 환경이 좋지 않고 먹는 것도 부실하잖니. 집으로 돌아가렴. 아줌마가 돌봐줄게.”...그녀의 얼굴은 기쁨과 감격으로 흘러넘쳤다. 내 아이가 강씨 가문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말이다.난 더 이상 그녀의 며느리가 아니게 되었지만 여전히 그녀가 키운 딸이나 마찬가지인 것에서 비롯된 기쁨이었다.비록 우리 부모님의 죽음에 강씨 가문의 책임이 있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지만 그래도 내가 강씨 가문에서 보낸 10년 동안 나를 누구보다 아끼고 사랑해 준 것만은 진심이었다. 그게 죄책감에서 비롯된 감정일지라도 나는 그 사랑을 절실히 느꼈고 실감하며 받아들였다.“아줌마, 삼촌도 돌보셔야 하잖아요. 저까지 돌보시면 너무 힘드실 거예요. 그리고 아무래도 병원에 있는 게 더 안전할 거예요. 무슨 일이 생기면 의사 선생님이 바로 달려올 수 있으니까요.”나는 조심스럽게 그녀의 제안을 거절했다.부모님의 죽음에 대한 원한 때문이 아니라 그녀의 두 아들과 나 사이의 미묘한 관계 때문이었다.강유형은 나를 향한 마음을 다 떨쳐내지 못했고 강진혁은 나를 노리는 듯한 눈빛을 감추지 못했다. 내가 다시 저 곳으로 들어간다는 건 그야말로 스스로 불길에 뛰어드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게다가 어떤 일들은 내려놓았다 해도 되돌릴 수 없는 지점에 다다르면
나는 오직 그녀만을 믿었다.“괜찮아. 초음파 사진 봤어. 아기는 아주 건강해.”안리영의 곱고 단정한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그저 그렇게 미묘하게 번진 웃음 하나가 내겐 믿음을 주는 보약처럼 느껴졌다.“리영아, 제발 이 아이만은 꼭 지킬 수 있게 도와줘.”나는 긴장과 초조함 속에서 그녀에게 매달리듯 말했다.“당연하지. 이건 너랑 정우 씨의 사랑의 결실이잖아.”안리영이 장난스럽게 받아쳤다.강유형은 고개를 돌렸다. 감춰지지 못한 외로움이 스쳐 지나갔다.그와의 관계에서 나는 이미 완전히 빠져나왔다. 그 역시 이별을 받아들였다고 하긴 했지만 아직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한 듯했다.안리영 덕분에 나는 병실에, 그것도 VIP 병실에 입원할 수 있었다. 그녀의 당직실이 아니라 정식 병실이었다.아랫배의 통증도 가라앉았고 출혈도 점점 잦아들었다. 마음이 조금 놓이자 문득 이런저런 생각이 들었다.“그 강 선생님이라는 사람, 갑자기 부임한 거라면서? 어떻게 된 일이야?”안리영은 반 박자쯤 쉬었다가 입을 열었다.“소희연의 고모인가 이모인가 그래.”이 말을 듣고 나는 바로 눈치를 챘다. 슬쩍 그녀의 표정을 살폈지만 전과 다를 건 없었다. 다만 얼굴이 조금 더 야위어 보였다.그녀는 구안석과 헤어졌다. 게다가 먼저 끝내자고 한 것도 그녀였다. 실망이 극에 달해 내린 결정이었지만 그래도 구안석은 그녀가 오랜 세월 마음을 품었던 사람이었다. 그 오랜 감정을 끊어낸다는 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나는 그 마음을 누구보다도 잘 알았다.그런 감정은 그 누구도 위로해 줄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위로하지 않았다. 그녀의 아픈 상처를 건드리지도 않았다. 그저 무심히 말했다.“강유형이 병원장한테 얘기할 것 같아.”“고자질할 만하면 해야지.”안리영은 자비로운 사람이 아니었다. 가만히 당해줄 호구도 아니었다.나는 웃음이 터졌다.“의사 선생님답네. 칼 쥐고 돈 받는 직업이라 그런가 마음도 차갑기 그지없군.”“남한테 괜히 마음 써봤자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히는 셈이나
“유산 조짐이 있습니다.”그 말을 듣자 나는 마치 환청이라도 들은 듯 얼이 빠졌다.‘유산이라니?’“의사 선생님, 저 임신한 거예요?”놀라움과 기쁨이 한꺼번에 몰려와 나는 의사의 가운을 붙잡았다.“몰랐어요?”의사도 당황한 얼굴이었다. 그러고는 곧 못마땅하다는 듯 한마디 덧붙였다.“요즘 젊은이들은 쾌락만 즐기고 책임질 생각을 전혀 안 한다니까요.”의사는 나와 강유형을 연인으로 착각하고는 설교를 퍼부었다.하지만 지금은 그걸 해명할 정신도, 그의 핀잔에 대응할 여유도 없었다. 나는 재차 물었다.“선생님, 저 정말 임신한 거 맞죠?”“네.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유산 조짐이 보여요. 아이를 지킬 수 있을지는 아직 몰라요.”의사의 말에 나는 그의 가운을 더 꽉 움켜쥐었다.“제발 부탁드릴게요. 아이를 지켜 주세요.”흥분에 겨워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떨렸다.요즘 들어 이유 없이 아이가 갖고 싶다는 생각이 자꾸 들었는데 내 마음을 알아차리고 이렇게 선물처럼 안겨 오다니 꿈만 같은 소식이었다.그런데도 나는 멍청하게 지금까지 아무것도 몰랐었고 그로 인해 아이를 놀라게 하고 말았다.형언할 수 없는 죄책감이 가슴 깊은 곳에서 밀려왔다. 나는 간절히 기도했다.‘아가야, 아무 일 없어야 해. 꼭...’“우선은 보태부터 시작할게요. 절대 안정을 취해야 합니다. 화장실을 가는 것과 식사 시간을 제외하고는 무조건 누워 있어야 해요. 일주일 정도 상태를 지켜본 후에 다시 판단할 겁니다. 계속 출혈이 있으면 아이는 지키기 힘들지도 몰라요.”의사는 이미 키보드를 두드리며 처방전을 작성하고 있었다.“선생님, 여기 병원에 입원해서 치료받을 수 있을까요?”나는 지금 몸을 함부로 움직이기 두려웠고 그저 병원 안에 머무르고 싶었다.이 병원엔 안리영이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산부인과 과장이기도 하다.지금은 또 수술에 들어갔는지 보이지 않았지만 그녀가 이 자리에 있었다면 내가 안정을 취할 수 있게 도와줬을 것이 분명했다.“지금은 남는 병상이 없어요. 일단 집에서 안정을
“이 난장판에 끼어들 생각은 없어요. 대단하신 지원 양이 알아서 해봐요.”함소은은 그렇게 말하며 용은서의 손을 잡아당겼다. “가자. 준호 오빠 지금 바쁜 거 안 보여? 너랑 놀아줄 틈 없어”“싫어요! 나랑 안 놀아줄 거면 저 언니를 내려놓으라고 해요! 언니가 나랑 놀아주면 되잖아요!”이 아이는 참으로 귀엽고 사랑스러웠다.“그래, 그럼 여기서 계속 붙잡고 있어. 난 먼저 간다.”함소은은 아이의 손을 놓고 안으로 들어가면서 용준호에게 한마디 던졌다.“이번엔 너한테 맡긴다. 제대로 잘 봐. 잃어버리기만 해봐, 아주 그냥.”그러고는 정말로 가버렸다. 그것도 엉덩이를 씰룩거리며 아주 태연하게 말이다.이 여자는 정말 대단했다. 아이는 그렇게 내버려둔 채로 신경도 안 쓰고 가버렸다.하긴 자신의 딸을 납치까지 했던 사람이니 용준호한테 애를 맡기는 건 별일도 아닐 게 분명했다.하지만 그녀의 행동이 내게는 도움이 됐다. 용은서가 용준호를 붙잡고 있는 덕분에 날 업고 도망가기는 어렵게 됐으니 말이다.함소은이 떠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강유형이 도착했다.코피는 이미 멈췄지만 낯빛은 아까보다 더 창백해져 있었다.“용준호, 윤지원 놓아줘. 아니면 오늘 나랑 끝을 보든지 해.”강유형은 단호하게 말했다.그는 용준호랑 한패도 아니었고 평소에 저렇게 거칠게 말하는 스타일도 아니었다.“코피도 아직 덜 닦았구먼 왜 또 여기서 영웅 행세야?”용준호가 빈정거리듯 말했다.“오빠 피도 아직 안 말랐거든.”용준호가 날 어깨에 짊어지고 있어 답답하긴 했지만 한마디는 해야겠다 싶었다.용준호는 내 말을 완전히 무시한 채 강유형을 바라보며 말했다.“강유형, 이 여자는 이미 딴 남자랑 잤어. 이제 너랑은 아무 관계 없는 여자라고. 이제 와서 뭘 어쩌겠다는 거야? 남이 쓰던 걸 다시 쓰고 싶냐고.”‘이 자식이 지금 날 뭐라고 한 거야? 지금 붙잡혀 있지 않았다면 당장이라도 주먹을 날렸을 텐데.’“내려놓으라고 했어. 헛소리는 그만하지?”강유형은 더 이상 말다툼할 가치도 없다
사람들이 나에게 시선을 던졌지만 모두 의혹 가득한 눈으로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채 멀찍이 서서 바라볼 뿐이었다.용준호는 그들을 향해 소리쳤다.“어느 새끼가 감히 널 구하려는지 두고 보자고!”그는 너무나도 오만방자했다.“오빠!”카랑카랑한 목소리에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듯했다.용준호가 걸음을 멈추었다. 뒤집힌 시야 속에서 만두 머리를 한 여자아이를 보았다.바로 용은서였다.내가 이 여자아이에게 도움을 청하기도 전에 용준호는 콧방귀를 뀌었다.“저리 썩 꺼져.”살벌한 목소리에 평범한 아이였다면 벌써 울음을 터뜨렸을 것이다.하지만 용은서는 그의 혈육이었고 평소에도 늘 호통에 익숙했는지 전혀 겁내지 않고 당당하게 물었다.“왜 사람을 업고 있어? 강도 같아!”대담한 발언이었다.“꺼지라니까.”용준호는 음을 길게 끌며 말했다.“사람 말을 못 알아듣나? 집에서 안 가르쳐줬어?”용은서는 눈을 흘기며 받아쳤다.“오빤 맨날 이렇게 화내. 무슨 폭탄이라도 먹었어?”용준호가 다시 호통을 치려는 순간 용은서가 재빨리 입을 열었다.“오빠, 나 할 말 있어.”용은서는 정말 사랑스러웠다. 내가 제대로 서 있기만 했어도 당장 품에 안아서 볼에 뽀뽀를 해주고 싶을 정도였다.하지만 용준호는 여전히 사나웠다.“꺼지라고 했지. 말 안 들으면 발로 차버린다.”혈육에게 말이 너무 지나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의 머리를 후려치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하지만 용은서는 조금도 주눅이 들지 않고 오히려 그의 바지 끝을 움켜잡으며 나를 바라보았다.“은서야, 언니 구해줘!”나는 목소리를 냈지만 어린아이에게 도움을 청한다는 것이 소꿉장난처럼 느껴져 부끄럽기 그지없었다.“윤지원,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어린애한테 도움을 청하다니. 부끄럽지도 않냐?” 용준호는 나에게도 으르렁댔다.지금의 그는 미친개처럼 닥치는 대로 물어뜯는 중이었다.“오빠, 왜 언니를 업고 있어? 다쳐서 걷지 못해?”용은서의 질문은 철없는 아이다운 순수함이 묻어났다.용준호의 인내심은 바닥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