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상치 못한 상황에 나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사실 꽤나 난처한 상황이었다. 한 여자가 두 남자 사이에 끼어 있다니 말이다.나는 이 어색함을 깰 결단을 내려야 했다. 한 가지는 분명했다. 나와 강진혁은 절대 불가능했다. 만약 두 사람 중 한 명 선택해야 한다면, 나는 차라리 진정우를 선택할 것이다.어찌 됐든 나와 강유형은 거의 혼인 신고를 할 뻔한 사이다. 그와 끝을 내지 않은 상황에서 그의 형과 얽힐 수는 없었다.“오빠, 저 피곤해요.”오빠라는 말은 상당히 효과가 있었다. 강진혁은 결국 내 손을 먼저 놓았다.진정우는 나를 잡고 호텔에 들어갔다. 나는 뒤돌아보지 않고서도 강진혁의 뜨거운 시선이 느껴졌다.술기운 때문인지, 아니면 그냥 내 마음이 어지러워서인지, 나는 호텔 계단을 내려가다 발을 헛디뎌버렸다. 순간 몸이 가벼워지며 진정우가 나를 안아 들었다.“이거 놔요.”나는 떨어지지 않으려고 진정우의 옷을 꽉 붙잡았다.“저 사람 때문에 난감한 거 아니었어요? 빨리 벗어나고 싶으면 가만히 있어요.”진정우는 낮은 목소리로 나에게 말했다. 강진혁이 한 말을 떠올리며 나는 조용히 안긴 채 움직이지 않았다.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강진혁과는 절대 엮여서 안 된다. 나는 정말 그를 친오빠로 생각했기 때문이다.나는 한 번도 그를 다른 시선으로 본 적 없었다. 그리고 이 관계는 나에게 아주 소중했다. 망가지게 두고 싶지 않았다.강진혁은 내성적인 사람이다. 그는 쉽게 고백하지 않았고 집착하지도 않는다. 내가 다른 사람을 좋아한다고 오해한다면 무조건 물러날 것이다.결국 나는 진정우의 품에 안긴 채 호텔 로비에 들어섰다. 그는 나를 방 앞까지 안아서 데려다줬다.나는 강진혁의 마음을 알아챈 것처럼 진정우의 마음도 알아챘다. 오늘 강진혁과의 관계를 정리한 참에 그와의 관계도 확실히 정리해야겠다고 생각했다.그가 나를 내려놓은 다음에도 나는 그의 옷을 잡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가슴팍을 응시하며 솔직하게 말했다.“정우 씨는 되게 잘생겼어요.”“네.”내 말에
“네.”진정우가 단호하게 대답하고 나서 말을 이었다.“저도 통제할 수가 없어요. 자꾸 팀장님한테 다가가고 싶고, 잘해주고 싶어요. 그리고... 그 유혹이라는 것도...”사랑이란 게 마음대로 되는 것이라면 인생도 그렇게 힘들지 않았을 것이다.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잠시 입을 다물었다. 진정우는 조용히 나를 놓아주었다.“들어가서 물 많이 마셔요. 필요한 게 있으면 전화하고요.”그는 말을 마치고 내 가방을 가리켰다.“카드 이리 줘요. 문 열어줄게요.”“아니에요.”나는 정신을 차리며 그와 거리를 벌렸다.“제가 할게요.”급히 카드를 꺼내 안으로 들어간 나는 문에 기대 한동안 멍하니 서 있었다.잠시 후 이소희가 돌아왔을 때, 나는 이미 침대에 누워 있었다. 그녀는 내가 깰까 봐 조심스레 움직였다.나도 눈을 뜨지 않았다. 말을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가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혼자서도 잘 자고 있었네.”이 말을 듣고 나는 이불 속에서 주먹을 쥐었다. 아무래도 진정우가 이소희에게 나를 부탁한 모양이다.‘진정우...’나는 도대체 어쩌다 그와 얽히게 된 걸까? 나는 깊이 생각하지 않고 천천히 잠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또 꿈을 꿨다.꿈은 혼란스러웠다. 나는 꿈속에서 부모님을 보았다. 그들이 사고를 당했던 장면을 말이다.비록 사고 현장을 본 적은 없지만, 나중에 경찰서에서 몰래 사건 파일을 뒤져서 사진을 본 적 있다. 그 끔찍한 장면은 내 기억 속에 깊이 새겨져 악몽이 되었다.나는 강씨 가문에 간 초반에 악몽을 자주 꿨다. 하지만 최근 몇 년간은 거의 꿈을 꾸지 않았다. 그런 꿈을 오늘 다시 꾼 것이다.일어나 보니 해는 아직 뜨지 않았다. 현재 시각은 새벽 5시였다.최근 들어 항상 이 시간에 일어났다. 아무리 늦게 자더라도 말이다.어제 술을 많이 마셨지만 다행히 머리도 아프지 않고 정신이 말끔했다. 핸드폰에 부재중 통화와 메시지가 와 있었다. 전화가 무음으로 되어 있어 몰랐던 것이다.안리영에게서 두 번의 전화
김희연은 전화가 통하자마자 집에 돌아와서 밥 먹으라고 했다. 밥은 핑계고 나한테 할 말이 있는 눈치였다.“아주머니가 만들어주신 만두 잘 먹었어요. 요즘 집에 돌아가기는 어려울 것 같아요. 놀이공원 쪽 일이 바빠서 쉬는 시간도 없어요. 언제 여유가 생기면 돌아갈게요.”나는 완곡하게 거절했다.“유형이도 참, 왜 너한테 급한 일을 맡겼다니? 내가 단단히 혼내주마.”김희연은 화난 척 말했다.“유형이 탓 아니에요. 이미 정해진 일이었어요.”그래도 강유형은 공과 사를 구분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개인적인 원한으로 나를 힘들게 만드는 일은 없을 것이다.“그래, 알았다. 일이 더 중요하지.”김희연은 기분이 상한 것 같았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나는 정말 일이 바빴기 때문이다. 그리고 안 바쁘다고 해도 이제 그곳에 돌아갈 명분은 없었다.김희연도 자주 실망하다 보면 익숙해질 것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이별이 전제되어 있기 마련이다. 마치 나와 부모님, 그리고 나와 강유형처럼 말이다.나와 이소희는 조식을 먹으러 갔다. 그때도 진정우는 보이지 않았다.“진 기사님 저희랑 같이 출근하는 거 아니었어요? 왜 또 먼저 갔죠?”이소희가 투덜댔다.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그녀는 내 어깨를 톡톡 치면서 말했다.“근데 진 기사님 언니한테 특별한 것 같아요. 어제도 저한테 언니 취한 것 같으니까 잘 부탁한다고 했거든요. 두 사람 어제같이 술 마셨어요?”“아니요!”“그럼 진 기사님은 어떻게 알았어요?”이소희는 참 궁금한 게 많았다.“만났어요, 호텔 아래에서.”“아, 그렇구나.”이소희는 여전히 의심하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그렇게 보지 마요. 저랑 진 기사님 그런 사이 아니에요.”나는 이소희가 미처 묻지 못한 질문에 답을 해줬다. 그러자 그녀는 웃으면서 말했다.“그런 사이라고 해도 괜찮아요. 제가 비록 진 기사님을 좋아하기는 하지만, 그냥 단순히 얼굴을 좋아하는 느낌이랄까요? 연예인 좋아하는 거랑 비슷하다고 생각하면 돼요.”“저희같이 연예인
“네, 전등에 문제가 생겨서요.”내가 설명할 때 김희연은 이미 진정우가 일하고 있는 사다리 아래로 갔다.“안전장치도 없이 너무 위험한 거 아니에요? 안전이 제일이에요, 기사님.”역시 사모님다운 순간이었다. 김희연은 한눈에 문제점을 찾아냈다.사실 진정우는 계속 안전장치를 하고 있었다. 조금 전 내려왔다가 잠깐만 올라간다고 지금은 안 한 모양이다.“제가 주의시킬게요.”나는 곧 진정우에게 말했다.“왜 안전장치 없이 올라갔어요. 빨리 내려와요.”진정우는 순순히 내려와서 말했다.“앞으로 조심할게요. 죄송합니다.”잘못을 인정하는 초등학생과 같은 모습이었다. 순간 내가 너무 거칠게 말했나 싶었다.김희연은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기사님을 보호하자고 있는 안전장치예요. 먼저 스스로를 사랑할 줄 알아야 다른 사람도 사랑하죠.”직장인이 아니라고 해도 재벌가 사모님은 사모님이었다. 하는 말의 기세가 남달랐다.하지만 나는 어딘가 의미심장한 느낌이 들었다.“네, 사모님.”진정우가 대답했다.“오전 내내 힘들었죠. 제가 식사를 가져왔으니 얼른 드세요.”김희연은 다시 부드러운 태도로 말했다. 진정우는 인사를 하고 나서 밥 먹으러 갔다. 김희연은 그의 뒷모습을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몸 튼튼하니 일 잘하게 생겼네.”나는 김희연의 뜻을 알아차렸다. 그녀는 강유형과 똑같이 진정우를 얕보고 있었다.오늘 김희연이 찾아온 이유도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아마도 강유형에게서 진정우에 관해 전해 들은 모양이다.“저희 엔지니어예요. 전등을 담당한.”내가 설명을 보탰다.김희연은 재벌가 사모님이다. 대단한 사람이라면 수없이 만났기에, 지금도 그냥 싱긋 웃기만 했다.“배고프지? 사무실에 가서 밥 먹자. 우리 밤 먹으면서 얘기해.”나에게는 다시 부드러운 태도로 돌아왔다. 나도 거절하지 않고 따라갔다.사무실에 도착했을 때 기사는 이미 음식을 펼쳐 놓았다. 정교하게 만들어진 음식들은 전부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었다.그렇기에 확신할 수 있었다. 내가 먹는 것과 이소희 등이
김희연은 잠깐 멈칫하다가 다시 미소를 지었다.“그게 무슨 말이야. 설마 유형이 이 자식 때문에 남자라면 지긋지긋해진 거니? 세상에 나쁜 남자도 있겠지만, 좋은 남자가 훨씬 많아.”김희연은 성격이 좋고 말도 잘했다. 50대가 됐는데도 젊은 사람들이 하는 말을 쓸 줄 알았다.나는 웃는 얼굴로 말했다.“좋은 남자라고 해도 아직은 생각 없어요. 조금은 숨을 돌리고 나서 다시 생각하려고요.”김희연이 소개해 주는 걸 막기 위해 한 말이었다. 괜히 말을 꺼냈다가 서로 어색해질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하긴.”이 두 글자를 듣고 나는 시름을 놓았다. 하지만 곧이어 반전이 찾아왔다.“그래도 연애는 빨리해야지. 안 그러면 좋은 남자 다 뺏긴다?”나는 피식 웃었다. 김희연도 따라 웃었다.“우리 지원이처럼 착하고 예쁜 애를 누가 만날까? 웬만한 복으로는 안 될 거야.”김희연이 또 칭찬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칭찬만 들으면 나는 기분이 이상했다. 그래도 이제는 받아 치는 방법이 생겼다.“아주머니 말대로 최고의 남자랑 만날 거예요. 최고라는 생각이 안 들면 차라리 기다릴래요.”“맞아, 그 말은 나도 동의해. 아무나 대충 만나는 건 절대 안 돼. 상처받았다고 해서 이상한 사람이랑 어울리며 복수하는 것도 안 되지.”이상한 사람이란 곧 진정우일 것이다.나도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안 그래요. 제가 누군가 만난다고 해도 최고라고 생각해서 만난 걸 거예요.”나는 신중하게 선택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리려고 한 말이다. 강유형을 포기한 것을 포함해서 말이다.김희연은 나의 얼굴을 바라보며 더 이상 아무 말도 안 했다. 나는 그녀와 10년의 세월을 함께 보냈다. 내가 커가는 것을 곁에서 본 사람이 나의 성격을 모를 리가 없었다.“그러면 다행이고.”이 말을 마지막으로 화제는 끝났다.나는 조용히 밥을 먹었다. 거의 다 먹어갈 때 김희연이 갑자기 물었다.“너 얼마 전 본가에 돌아갔다며?”나는 고개를 들어서 그녀를 바라봤다.“유형이한테서 들었어. 유형이가 그래도 널 걱
나는 일단 알겠다고 하고 김희연을 보낸 다음에야 다시 일하기 시작했다. 현장에 돌아갔을 때 이소희만 보이고 진정우는 보이지 않았다.“진 기사님은요?”“김 기사님이 불러서 잠깐 그쪽에 갔어요. 근데 언니 시어머님이 직접 오신 걸 보면 혹시...”“저 유형이랑 헤어졌어요. 누가 와도 소용없어요. 이상한 생각하지 마요.”나는 단호하게 입장을 밝혔다. 이소희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그 집안 뭐든 다 좋은데 딱 남자주인공만 별로네요.”이소희의 말이 정확했다. 그 집안은 뭐든 다 좋았다. 그러나 내 남편은 집안이 아닌 강유형이었다. 강유형이 별로이면 집안이 아무리 좋아도 소용없었다.나와 이소희는 진정우를 거의 반 시간 동안 기다렸다. 그래도 돌아오지 않자 나는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가 챙겨가지 않은 핸드폰은 휴식 구역에 놓여 있었다.“진 기사님은 여자친구가 없는 게 분명해요. 핸드폰도 놓고 다니는 걸 봐요. 여자친구가 있었다면 24시간 핸드폰을 손에서 놓지 않았을 거예요.”이소희가 나름 전문적으로 분석했다. 그러나 나는 말하지 않고 시간을 확인했다.“제가 김 기사님한테 가서 확인해 볼게요.”근처에 도착하자마자 진정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제가 가면 일이 보름, 어쩌면 그 이상으로 밀릴 거예요.”나는 순간 멈칫했다. 진정우가 간다니 말이다.‘이게 무슨 말이지?’내가 들어가려고 할 때 고준석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늦어진다고 해도 저희 측 책임입니다. 기사님은 책임을 지지 않는다고 대표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상황을 파악한 나는 바로 안으로 들어갔다.“제가 허락 못 해요.”나를 발견한 고준석은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설명했다.“팀장님, 이건 대표님 뜻입니다.”“대표님 뜻이라고 해도 안 돼요. 이쪽 책임자는 저예요. 대표님이 무슨 자격으로 이래라저래라 하는 거죠?”나는 패기 넘치게 받아쳤다.고준석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그도 그저 말을 전하는 사람에 불과했다.그렇다고 해도 나는 물러설 수 없었다.“돌아가서 대표님한테 전하세요. 제
강유형의 말투는 아주 사나웠다. 나를 잡아먹을 듯한 기세였다.하지만 나는 겁먹지 않았다. 마침 나도 그에게 할 말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곧바로 진정우의 손을 놓았다.그 순간 진정우가 내 손을 되잡았다. 나는 놀란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고, 그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눈빛 속에서 나는 익숙한 느낌을 받았다.청평에서 오향설이 나에게 못되게 굴 때, 그는 딱 이런 눈빛을 하고 있었다. 나를 보호하려는 눈빛이었다.하지만 지금은 그럴 필요가 없었다. 나는 그의 손을 밀어내면서 말했다.“괜찮아. 강유형 사람 안 잡아먹어.”진정우는 더 이상 나를 막지 않았고, 나는 강유형의 뒤를 따라갔다.고준석도 당연히 따라가려고 했다. 그러자 강유형이 멈춰 서며 네 일이 아니라고 호통쳤다. 겁에 질린 고준석은 바로 멈춰 서서 나를 바라봤다.강유형은 계속해서 걸었다. 나는 그가 어디로 가는지 몰라서 일단 불러 세웠다.“충분히 멀리 온 것 같은데, 그냥 지금 말하면 안 돼?”그래도 그는 멈추지 않았다. 하지만 내가 멈춰서 그의 등을 바라보며 말했다.“여기서 말하라고. 나 아직 할 일 있어. 업무 시간에 방해하지 마.”그제야 강유형이 걸음을 멈추고 나를 차갑게 노려보았다. 내가 다가가자 그는 바로 손을 들어서 내 팔을 꽉 붙잡았다.세상이 빙글빙글 도는 것 같은 것도 잠시 그가 나를 벽으로 밀어붙였다. 그의 차가운 숨결과 10년간 사랑했던 얼굴이 바로 눈앞에 있었다. 그의 콧날은 거의 내 코에 닿을 정도로 가까웠다.“너 이제 날 협박할 줄도 알아?”내 등이 벽에 짓눌려 아팠다.강유형은 이렇듯 충동적이고 쉽게 화를 내는 성격이었다. 그래서 지난 10년 동안 나는 항상 조심스럽게 맞춰 가면서 지냈다.그러나 이제는 이런 그가 역겹게만 느껴졌다. 나는 두려움 없이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나는 너 때문에 공사 기간이 영향받지 않길 바랄 뿐이야.”강유형은 내 말에 직접적으로 대답하지 않고 말을 돌렸다.“너 정말 그 진정우라는 사람이랑 만나는 거야?”“아니.”
나는 강유형이 한 말을 웃으며 넘겼다.“설마 나 대신 걔랑 착각한 거야?”“나... 나는...”나는 그의 말을 바로 잘랐다.“강유형, 나랑 키스한 게 몇 번인데?”내 말을 들은 강유형의 미간이 잔뜩 찌푸려졌다.우리는 3년 넘게 사귀었지만 손잡고 포옹한 것 말고는 스킨십이 거의 없었다.가끔 손이나 볼, 이마에 입맞춤했고, 입술에 닿을 때도 겨우 스치는 정도였다.내 말에 그는 더 이상 할 말이 없는 듯 잡고 있던 손을 놓고 머리를 헝클며 말했다.“그래, 내가 한 번 실수로 걔한테 키스한 거 맞아. 근데 진짜 그 순간 충동이었고 아무 의미도 없어.”“그럼 자고 나서야 의미가 생긴다는 거야?”내가 비꼬듯 묻자 강유형은 어이없다는 듯 쳐다봤다.“내가 그렇게 천박한 놈으로 보여? 그런 놈이었으면 진작에 너랑 잤겠지. 오늘 이렇게 될 일도 없었을 거고.”나는 잠깐 당황했다가 피식 웃음이 나왔다.그 말은 내가 그와 잤으면, 지금처럼 문제 삼지도 않았을 거라는 뜻인가?무슨 논리야? 아직도 조선 시대에 살고 있는 줄 아나? 여자가 남자 하나만 바라봐야 한다고 생각하는 건가?그와 더 이상 얘기할 필요가 없다고 느낀 나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네가 나한테 관심이 없으니까 안 잔 거 아니야?”그의 말이 더는 상처로 와닿는 것이 아니라 그를 반격할 무기가 되었다는 걸 깨달았다.강유형은 당황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봤다.“윤지원, 계속 이렇게 할 거야?”“뭘? 우리 사이는 이미 끝났어. 네가 자꾸 얽매이고 과거를 들추니까 이렇게 된 거지.”나는 냉정하게 말했다.“끝났다고? 네가 나랑 헤어진 게 결국 진정우 만나려고 그런 거 아니야? 너희 둘의 과거를 이미 다 알고 있었어. 청평에선 같이 살았잖아.”강유형이 내가 청평에서 지내던 일을 알고 있는 건 놀랍지 않았다. 그의 어머니도 그 얘기를 했으니까. 하지만 나와 진정우가 예전부터 알던 사이였다고 생각할 줄이야.“네가 그렇게 생각하고 싶다면 그래, 그러든지. 어차피 정우를 만난 건 너랑 헤어진 후였
만약 강유형이 정말 이대로 다리를 잃게 된다면 내가 그에게 진 빚이 너무 클 것이다.하지만 그와 더 이상 복잡하게 얽히고 싶지 않았다. 그저 할 수 있는 한 그를 설득해 제대로 치료를 받게 하려는 것뿐이었다.“그렇게 심각하지 않아. 몇 번 더 치료받으면 괜찮아질 거야.”그는 창백한 얼굴로 힘없이 말했고 목소리조차 기운이 없어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다.그렇게까지 고집을 부리는 그를 더 설득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강유형이 나를 보며 희미하게 웃었다.“네가 돌아왔으니, 내 상처도 금방 나을 거야.”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의 의도를 모를 리 없었지만 그는 곧장 화제를 돌렸다.“신지태가 널 몇 번이나 찾았어. 내가 말리지 않았으면 실종 신고라도 했을걸?”나는 한동안 연락을 끊고 지냈다. 그동안 나를 걱정한 사람들이 많았을 거라는 건 알고 있었다.“지태 오빠 오늘 와?”나는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어갔다.“모르겠어. 네가 왔다고 하면 당장이라도 뛰어올걸?”그는 핸드폰을 집어 들며 신지태에게 연락하려 했다.그러나 팔을 움직이는 순간, 상처에서 뻐근한 통증이 밀려온 듯 그는 순간적으로 멈췄다. 나는 그의 감싼 팔을 조심스레 붙잡으며 말했다.“굳이 전화할 필요 없어. 내가 돌아왔으니, 곧 만나겠지.”그는 통증 때문인지, 혹은 다른 이유 때문인지 알 수 없었지 아무 말 없이 나를 바라보았다. “의사 불러줄까?”그는 살짝 고개를 저으며 입술을 적셨다.“물 좀 줘.”나는 컵을 건네주었고 그는 두어 모금 마신 후에야 얼굴이 조금 나아 보였다.“형은 너 보러 왔어?”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두 번 왔었어.”“어제 돌아오면서 우연히 마주쳤어.”“어디서?”“샤부샤부 집에서.”강유형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의 반응이 흥미로워 나는 살짝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나랑 참 인연이 깊은 것 같아.”그는 내 말을 단숨에 이해했는지, 얼굴이 점점 굳어졌다.“지원아, 하고 싶은 말이 뭐야? 돌려 말하지 말고 그냥 말해.”나는
“지원아, 돌아왔구나?”강진혁이 나를 보며 살짝 놀란 듯, 그리고 반가운 기색을 감추지 못한 채 말했다.“네, 오늘 막 도착했어요.”나는‘오늘’이라는 단어를 강조하며 대답했고 안리영도 자연스럽게 말을 받았다.“오자마자 이렇게 마주치는 거 보면 진짜 우연인가 보네요.”강진혁은 그녀의 말에서 숨은 의미를 느꼈는지, 위층을 가리키며 덤덤하게 말했다.“고등학교 친구들이 며칠 전부터 약속 잡고 여기서 모이기로 했어.”마침 누군가 그를 불렀다.“진혁아, 우리 먼저 갈게.”그는 멀리 있는 친구들에게 손짓하며 배웅한 뒤, 다시 우리를 바라보며 물었다.“더 필요한 거 있어? 주문할 거 있으면 내가 계산할게.”그의 말투는 자연스러웠지만 분명 의도적으로 챙기려는 느낌이 들었다.“이미 결제했어요.”안리영이 대신 대답했다. 그러자 강진혁은 다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지원아, 좀 쉬고 나면 집에 와서 밥 한 끼 하자. 부모님이 네 걱정을 많이 하셔.”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대답했다.“조만간 먼저 연락할게요. 그리고... 휴링턴에서 신세 많이 졌어요.”굳이 ‘휴링턴’을 언급한 이유는, 그의 반응을 살펴보기 위해서였지만 그는 별다른 표정 변화 없이 짧게 대답했다.“그래.”그는 안리영에게도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한 뒤 자리를 떠났다. 우리는 유리창 너머로 그가 차에 올라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그 순간, 안리영이 내 발을 슬쩍 건드리며 장난스럽게 물었다.“뭐야, 강진혁 아직도 너 못 잊은 거 아냐?”나는 시선을 다시 테이블로 돌리며 끓어오르는 국물 속에서 부글거리는 재료들을 바라보았다.“리영아, 나는 지금... 강진혁이 이 모든 일의 배후일 수도 있다고 생각해.”“뭐라고?”그녀는 놀라서 젓가락을 들던 손을 멈췄다. 나는 휴링턴에서 발견한 것들에 대해 조용히 이야기했다.“앞으로 내가 하는 일이 좀 이상하게 보일 수도 있어. 하지만 이해해 줘.”안리영은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이상하게 보인다니, 도대체 뭘 하려고?”나는 젓가락을 내려놓고
나는 의료 서적을 넘기며 한 장 한 장 읽어 내려갔다. 문외한인 내가 이런 책을 본다는 게 쉽지 않았지만 지난 한 달 동안 고요한 시간을 보내면서 마음이 차분해져서인지 의외로 집중이 잘 됐다. 어쩌면 이제야 비로소 내 마음이 가라앉았다는 증거일지도 몰랐다.얼마 후, 안리영이 수술을 마치고 돌아왔다. 문 앞에서 나를 보던 그녀는 몇 초간 멈춰 서 있더니, 아무 말 없이 다가와 나를 꼭 안아 주었다.“돌아왔네.”진정우의 일을 나는 오직 안리영에게만 이야기했다. 진정우를 어디에 묻었는지 아는 사람도 그녀뿐이었다.나는 그녀의 어깨에 기대며 익숙한 소독약 냄새를 맡았다.“나, 갑자기 훠궈가 먹고 싶어.”“좋지! 당장 가자!”그녀의 대답에는 묘하게 들뜬 기운이 섞여 있었다. 어쩌면 그녀도 내가 다시 일상으로 돌아온 게 반가웠던 걸지도 몰랐다.그래, 나도 이제 다시 살아가야 했다. 진정우는 떠났지만 나는 아직 해야 할 일이 많았다.식사를 하던 중, 문득 떠오른 듯 물었다.“강유형, 본 적 있어?”“그럼, 매일 보지. 악어한테 물린 이후로 계속 우리 병원에서 치료받고 있어.”그녀의 말에 나는 젓가락을 멈췄다.“벌써 한 달이 넘었잖아? 아직도 치료 중이야?”“응. 상처가 아물질 않아서 계속 곪고 있대. 이미 몇 번이나 괴사한 살을 도려냈다더라.”그 말을 듣는 순간, 강유형이 악어에게 물렸던 장면이 눈앞을 스쳤다.“그 정도로 심각했어?”“직접 가서 볼래?” 그녀가 조심스럽게 물었고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응. 나 때문이잖아.”안리영이 고기를 집어 내 그릇에 올려주며 말했다.“많이 먹어. 한 달 사이에 살이 너무 빠졌어.”“그래? 나 하루 세 끼 잘 챙겨 먹었는데.”나는 거짓말이 아니었다. 진정우 곁을 지키는 동안에도 먹고 자는 것만큼은 철저히 지켰다.“그럼... 마음고생 때문인가 보네.”그녀가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했다.나는 안리영을 보며 피식 웃었다.“넌 얼굴이 더 좋아진 것 같은데? 교수님이랑 잘 지내나 보네?”
나는 진정우를 고국으로, 그리고 우리가 함께 꿈꾸던 집으로 데려왔다.해가 지는 어느 저녁, 우리는 그가 노후를 함께 보내고 싶다던 그 땅에 그를 묻었다. 그렇게 하고도 쉽게 떠날 수 없어 나는 그의 곁에 꼬박 35일 동안, 단 하루도 빠짐없이 다녀왔다.어릴 적 어머니가 이야기하던 말이 떠올랐다. 사람이 세상을 떠난 후에도 영혼은 바로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가장 소중했던 사람 곁에서 머문다고. 흔히 말하는 35날이라는 기간 동안 말이다. 사실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었지만 나는 그것을 믿고 싶었다. 그가 홀로 떠나지 않도록, 마지막까지 함께 있어 주고 싶었다. 그의 영혼이 완전히 떠난 후에야 나도 떠날 수 있을 것 같았다.그동안 나는 세상과의 연락을 끊고 조용한 나날을 보냈다. 진소영이 그랬던 것처럼 책을 읽고 꽃을 따서 차를 우려 마시고 그림을 그렸고 그림 속에는 온통 진정우뿐이었다. 그를 그릴 때마다 떠오르는 것은 강진혁의 방에 빼곡히 걸려 있던 내 초상화들이었다.아침과 저녁이면 그의 곁에서 혼잣말을 하듯 이야기를 나눴다.“진정우, 오늘 밤 꿈에라도 와서, 그때 못다 한 말을 마저 해줄래?”“진정우, 네가 너무 보고 싶어. 너를 안아보고 싶은데 이제는 만질 수도 없잖아. 그런 공허한 아픔이 날 미치게 할 것 같아.”“진정우, 오늘 길에서 다친 작은 새를 주웠어. 어미는 보이지 않더라. 내가 잘 키울 수 있을까?”이런저런 이야기를 했지만 그의 대답을 들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가끔 얼굴을 스치는 바람이, 마치 마지막으로 내 얼굴을 쓰다듬던 그의 손길처럼 느껴졌다.그렇게 시간이 흘러 마침내 35번째 날, 나는 새로 딴 꽃을 들고 그의 곁을 찾았다.“진정우, 오늘이 네가 이 세상을 떠나는 마지막 날이야? 내일부터는 정말로 네가 없는 걸까? 나도 이제 돌아가야겠어.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고 마주해야 할 사람들을 만나야 해. 그리고...”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나는 결연한 목소리로 말했다.“널 함정에 빠뜨린 사람을 찾아야겠어.”그 순간, 바람
나는 무겁게 발을 떼며 앞으로 걸어갔다. 신지태가 나를 부축하며 문 앞까지 데려다주었지만 안으로 들어가기 전 이미 누군가가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그 사람의 품에는 검은색 상자가 안겨 있었고 그의 얼굴에는 깊은 슬픔과 혼란이 서려 있었다. 나는 그 상자를 보는 순간, 숨이 멎었다.신지태의 손에 힘이 들어가며 나를 더 단단히 부축했지만 그마저도 희미하게 느껴질 정도로 온몸의 감각이 무뎌졌다. 나는 다시 정신을 붙잡으려 애쓰며 힘겹게 발걸음을 옮기다가 문 안쪽, 등을 돌린 채 서 있는 용설아를 한눈에 그녀를 보았다.그녀의 표정은 보이지 않았지만 그저 등 뒤로 느껴지는 깊은 절망과 슬픔만으로도 충분히 모든 걸 알 수 있었다.그 순간, 발이 땅에 박힌 듯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다. 신지태도 함께 멈춰 섰고 우리 둘 다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잠시 후, 용설아는 천천히 몸을 돌렸고 그녀의 두 손 위에는 검은색 상자가 놓여 있었다. 나는 그대로 시야가 흐려지며 쓰러질 뻔했다.용설아는 내 앞까지 걸어와 조용히 말했다.“이건 진정우가 남긴 마지막 부탁이에요. 그가 원했던 대로, 지원 씨가 직접 그를 데려가 주세요. 두 분이 가장 좋아했던 그곳에 묻어달라고 했어요.”나는 그녀가 들고 있는 상자를 멍하니 바라보면서 지난 기억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그와 함께 걸었던 들판, 그가 나지막이 속삭였던 약속들 그리고 그곳에서 함께 살자고 했던 말.그러나 그는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한 채, 나에게 마지막 부탁을 남겼다.그를 그곳에 묻어달라는 마지막 부탁 말이다.‘이건, 나보고 죽으라는 말이야?’나는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상자를 노려보았다.“왜 나를 기다리지 않았어?”작은 상자 하나에 다 담길 리 없는 그를 떠올리며 나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왜... 기다려주지 않았어, 진정우?”“정우는 지원 씨가 그 순간을 직접 마주하지 않길 바랐거든요.”용설아의 차분한 목소리가 들려왔고 나는 힘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정우는... 이미 오래전부터 이
강유형과 신지태 오빠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그저 조용히 나를 바라볼 뿐이었다. 나는 멍하니 고개를 들고 그들을 바라보며 어리둥절하게 물었다.“둘 다 몰라?”나는 머릿속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으면서도 몸을 일으키려 애쓰며 말했다.“그럼 내가 직접 찾아갈게...”그 순간, 신지태가 미세하게 떨리는 손으로 나를 붙잡았고 나는 눈을 깜빡이며 그를 바라보았다.“왜 그래?”“지원아, 이제 받아들여야 해. 진정우는... 더 이상 없어.”강유형의 낮고 무거운 목소리가 들려오자, 나는 멍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알아... 나도 알아.”그러면서도 어설프게 웃으며 덧붙였다.“그래서, 그를 보러 가려고 해. 조용히 곁에 있고 싶어서.”그 순간, 신지태의 손끝에 힘이 들어가면서 살짝 아프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내 팔을 더 강하게 움켜잡았다. 나는 그를 올려다보며 조용히 말했다.“오빠, 너무 아파.”그의 목소리는 갈라져 있었다.“지원아... 진정우는... 없어. 더 이상 볼 수 없어.”그 말에 나는 얼어붙은 듯 멈춰 섰고 눈앞이 흔들렸지만 나는 애써 강하게 말했다.“아니, 난 볼 수 있어. 그러니까 가게 해 줘.”“지원아!”신지태가 단호하게 나를 불렀지만 나는 그의 손을 뿌리치려 하며 애타게 말했다.“제발, 가게 해 줘.”그 순간, 강유형이 낮고 단단한 목소리로 말을 끊었다.“볼 수 없어. 그는 이미... 화장됐어.”그 순간, 내 손이 허공에서 멈춰 섰고 나는 서서히 강유형을 바라보았다. 아무 말도 나오지 않고 온몸이 얼어붙은 듯 머릿속이 텅 빈 느낌이었다.“강유형.”신지태 오빠가 낮게 그의 이름을 부르면서도 여전히 내 어깨를 단단히 붙잡고 있었다.“지원아... 진정해.”나는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면서 그 말이 거짓이길 바랐다.“그 말, 거짓말이지...? 진정우... 진짜 아니지?”신지태 오빠의 눈이 더 붉어졌다.“지원아, 울고 싶으면 울어.”나는 울고 싶지 않았다. 아니, 나는 믿고 싶지 않았다. 눈앞이 흐려지면서 몸이 떨렸고
나는 다시 한번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려 했지만 용설아가 울컥하며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진정우!”그 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으며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진정우를 바라보았다.그의 눈꺼풀이 희미하게 감겼고, 긴 속눈썹은 더 이상 미동도 하지 않았으며 침대 밖으로 내려와 있던 손이 힘없이 축 늘어졌다.“진정우...”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불렀지만 그는 더 이상 대답하지 않았다.나는 믿을 수 없어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으며 그의 얼굴을 감싸 쥐었다.“진정우, 진정우... 아직 말 다 못했잖아. 계속해. 좀 더 말해줘...”그러나 내 목소리는 점점 작아졌고, 결국에는 말을 잇지 못했다. 나는 마지막 남은 힘을 쥐어짜듯 그의 얼굴을 애타게 쓰다듬고 코끝을 맞대고, 눈가를 스치고, 볼을 어루만졌다. 그리고 끝내 그의 입술을 조심스럽게 맞췄지만 아무리 닿아도,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이제 그는 더 이상 나를 보며 “지원아, 장난치지 마.”라고 말해주지 않았다.“정우야... 제발 날 버리지 마. 난 이제 너밖에 없어...”나는 끝내 외쳤다. 그러나 그 순간, 내 안의 모든 것이 무너져 내렸다.이 절망은 부모님을 잃었을 때보다도 더 깊고 아팠다. 어릴 적에는 '죽음'이라는 게 뭔지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을지도 모른지만 지금은 너무도 분명했다.이제 다시는 볼 수도, 만질 수도, 부를 수도 없는 사람이 되어버렸다는 걸.나는 필사적으로 그의 몸을 흔들며 울었지만, 그저 눈물만 그의 차가운 얼굴 위로 떨어질 뿐이었다.그렇게 내 정신은 서서히 희미해졌다. 눈을 떴을 때, 나는 차가운 병실 침대에 혼자 누워 있었다.아무것도 없는 텅 빈 공간, 그리고 창밖으로 쏟아지는 눈부신 햇빛.어젯밤의 어둠과 그 속에서 서서히 멀어져 가던 진정우의 얼굴.모든 순간들이 스치면서 몸이 경련하듯 떨려왔고 숨조차 쉬기 힘들 만큼 가슴이 너무 아팠다.“지원아, 괜찮아? 어디 아파?”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강유형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고 곧이어 신지태의 목소리도
“수술 실패라니, 그게 무슨 말이에요?”용설아 씨가 의사의 팔을 붙잡고 다급하게 물었다.나도 똑같은 질문을 하고 싶었지만 목이 막힌 듯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의사는 잠시 머뭇거리다 조용히 말했다.“안으로 들어가 보세요.”그 말만 남긴 채 그는 가려 했지만 용설아 씨는 여전히 그의 팔을 놓지 않았다.그때, 옆에 있던 간호사가 대신 설명했다. “환자의 후두부 뼈가 심각하게 손상되었습니다. 우리는 최대한 봉합을 시도했지만 뇌출혈이 멈추지 않고 있어요. 출혈 부위도 여러 군데라... 마음의 준비를 하시는 게 좋겠습니다.”그 순간, 용설아 씨의 손이 스르르 풀렸다. 마치 모든 힘이 빠져나간 듯, 그녀는 휘청거리면서도 애써 몸을 가누며 안으로 향했다. 그러다 문득 멈춰 서더니, 나를 돌아보면서 다가와 내 팔을 붙잡고 천천히 일으켰다. 그녀의 부축을 받으며 나는 힘겹게 발걸음을 옮겼다.병실 안은 눈이 부실 정도로 밝았다. 너무 밝아서 오히려 눈을 찌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침대 위에는 수술복을 덮고 누워 있는 진정우가 있었다. 그의 얼굴에는 산소 마스크가 씌워져 있었고 머리는 하얀 붕대에 감겨 있었다.나는 그를 마주하는 게 두려워 선뜻 다가가지 못했다.그때, 용설아가 조용히 말했다.“지원 씨, 지금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다 하세요. 안 그러면... 다시는 기회가 없을지도 몰라요.”그녀의 목소리는 가라앉아 있었지만 나는 그 말이 얼마나 큰 의미를 담고 있는지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용설아는 이미 현실을 받아들인 듯했다.그녀가 나를 데리고 침대 앞으로 다가가자, 나는 마침내 진정우의 얼굴을 또렷하게 바라볼 수 있었다.그는 눈을 감고 있었고 평소에 그가 잠들었을 때처럼, 조용하고 평온해 보지만 지금의 이 고요함은 나를 두렵게 했다.“정우야...”용설아가 그의 이름을 불렀지만 그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나는 그의 손을 잡을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때, 용설아 씨가 다시 말했다.“정우야, 정신 차려. 지원 씨가 왔어.”그 순간, 그
“정우는...”나는 입을 열었지만 정작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런데 용설아는 이미 내가 묻고 싶은 것을 아는 듯 조용히 입을 열었다.“지원 씨는 그가 군인이었다는 것만 알지, 어떤 임무를 수행했는지는 모르셨죠?”그녀는 잠시 숨을 고르고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그는 단순한 군인이 아니라 극비 특수 요원이었어요. 3년 동안 국제 작전에 투입되어 전 세계를 장악하려던 거대 조직을 무너뜨렸죠. 지금 우리가 상대하고 있는 브라운이나 헤르나는 그 조직의 잔당에 불과해요.”나는 순간 숨이 멎을 것 같았다.“정우는 임무를 마친 후 전역하고 평범한 삶을 살기로 했어요. 하지만 이번에 신지태 씨 사건을 통해 그 조직의 잔당이 다시 세력을 키우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죠. 게다가, 그 조직의 남은 자들이 복수를 다짐했다고 해요. 그는 그들이 얼마나 무서운 존재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어요. 그래서 그들은 직접 정우를 건드리기 어려우니, 결국 그의 주변 사람들을 노릴 거라고 확신했어요.”용설아는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그게 그가 지원 씨와 헤어진 이유예요. 그리고 그의 진짜 정체와 배경이죠.”나는 입을 열고 싶었지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내가 그에게서 전혀 알지 못했던 이야기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혹시... 설아 씨는 그와 함께 싸운 적이 있나요?”내가 어렵게 물었지만 정작 어떤 말부터 해야 할지 몰랐다. 그녀가 진정우에 대해 너무 잘 알고 있다는 게 신경 쓰였다.용설아는 살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저는 그와 함께 싸운 적 없어요. 우리의 관계도 모두 거짓이었어요. 그가 그렇게 한 것도, 결국 지원 씨를 지키기 위해서였죠.”그녀의 표정에는 씁쓸함이 묻어 있었다. 그녀는 다시 깊이 숨을 들이마신 후, 수술실 문을 바라보며 말했다.“그는 자신이 조사당할 걸 알고 있었어요. 그래서 지원 씨와 헤어졌어도 여전히 위험할 거라고 생각했죠. 그러다 보니 저와 약혼을 발표하고 사람들이 저와 함께 있다고 믿게 만들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