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희연은 잠깐 멈칫하다가 다시 미소를 지었다.“그게 무슨 말이야. 설마 유형이 이 자식 때문에 남자라면 지긋지긋해진 거니? 세상에 나쁜 남자도 있겠지만, 좋은 남자가 훨씬 많아.”김희연은 성격이 좋고 말도 잘했다. 50대가 됐는데도 젊은 사람들이 하는 말을 쓸 줄 알았다.나는 웃는 얼굴로 말했다.“좋은 남자라고 해도 아직은 생각 없어요. 조금은 숨을 돌리고 나서 다시 생각하려고요.”김희연이 소개해 주는 걸 막기 위해 한 말이었다. 괜히 말을 꺼냈다가 서로 어색해질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하긴.”이 두 글자를 듣고 나는 시름을 놓았다. 하지만 곧이어 반전이 찾아왔다.“그래도 연애는 빨리해야지. 안 그러면 좋은 남자 다 뺏긴다?”나는 피식 웃었다. 김희연도 따라 웃었다.“우리 지원이처럼 착하고 예쁜 애를 누가 만날까? 웬만한 복으로는 안 될 거야.”김희연이 또 칭찬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칭찬만 들으면 나는 기분이 이상했다. 그래도 이제는 받아 치는 방법이 생겼다.“아주머니 말대로 최고의 남자랑 만날 거예요. 최고라는 생각이 안 들면 차라리 기다릴래요.”“맞아, 그 말은 나도 동의해. 아무나 대충 만나는 건 절대 안 돼. 상처받았다고 해서 이상한 사람이랑 어울리며 복수하는 것도 안 되지.”이상한 사람이란 곧 진정우일 것이다.나도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안 그래요. 제가 누군가 만난다고 해도 최고라고 생각해서 만난 걸 거예요.”나는 신중하게 선택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리려고 한 말이다. 강유형을 포기한 것을 포함해서 말이다.김희연은 나의 얼굴을 바라보며 더 이상 아무 말도 안 했다. 나는 그녀와 10년의 세월을 함께 보냈다. 내가 커가는 것을 곁에서 본 사람이 나의 성격을 모를 리가 없었다.“그러면 다행이고.”이 말을 마지막으로 화제는 끝났다.나는 조용히 밥을 먹었다. 거의 다 먹어갈 때 김희연이 갑자기 물었다.“너 얼마 전 본가에 돌아갔다며?”나는 고개를 들어서 그녀를 바라봤다.“유형이한테서 들었어. 유형이가 그래도 널 걱
나는 일단 알겠다고 하고 김희연을 보낸 다음에야 다시 일하기 시작했다. 현장에 돌아갔을 때 이소희만 보이고 진정우는 보이지 않았다.“진 기사님은요?”“김 기사님이 불러서 잠깐 그쪽에 갔어요. 근데 언니 시어머님이 직접 오신 걸 보면 혹시...”“저 유형이랑 헤어졌어요. 누가 와도 소용없어요. 이상한 생각하지 마요.”나는 단호하게 입장을 밝혔다. 이소희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그 집안 뭐든 다 좋은데 딱 남자주인공만 별로네요.”이소희의 말이 정확했다. 그 집안은 뭐든 다 좋았다. 그러나 내 남편은 집안이 아닌 강유형이었다. 강유형이 별로이면 집안이 아무리 좋아도 소용없었다.나와 이소희는 진정우를 거의 반 시간 동안 기다렸다. 그래도 돌아오지 않자 나는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가 챙겨가지 않은 핸드폰은 휴식 구역에 놓여 있었다.“진 기사님은 여자친구가 없는 게 분명해요. 핸드폰도 놓고 다니는 걸 봐요. 여자친구가 있었다면 24시간 핸드폰을 손에서 놓지 않았을 거예요.”이소희가 나름 전문적으로 분석했다. 그러나 나는 말하지 않고 시간을 확인했다.“제가 김 기사님한테 가서 확인해 볼게요.”근처에 도착하자마자 진정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제가 가면 일이 보름, 어쩌면 그 이상으로 밀릴 거예요.”나는 순간 멈칫했다. 진정우가 간다니 말이다.‘이게 무슨 말이지?’내가 들어가려고 할 때 고준석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늦어진다고 해도 저희 측 책임입니다. 기사님은 책임을 지지 않는다고 대표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상황을 파악한 나는 바로 안으로 들어갔다.“제가 허락 못 해요.”나를 발견한 고준석은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설명했다.“팀장님, 이건 대표님 뜻입니다.”“대표님 뜻이라고 해도 안 돼요. 이쪽 책임자는 저예요. 대표님이 무슨 자격으로 이래라저래라 하는 거죠?”나는 패기 넘치게 받아쳤다.고준석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그도 그저 말을 전하는 사람에 불과했다.그렇다고 해도 나는 물러설 수 없었다.“돌아가서 대표님한테 전하세요. 제
강유형의 말투는 아주 사나웠다. 나를 잡아먹을 듯한 기세였다.하지만 나는 겁먹지 않았다. 마침 나도 그에게 할 말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곧바로 진정우의 손을 놓았다.그 순간 진정우가 내 손을 되잡았다. 나는 놀란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고, 그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눈빛 속에서 나는 익숙한 느낌을 받았다.청평에서 오향설이 나에게 못되게 굴 때, 그는 딱 이런 눈빛을 하고 있었다. 나를 보호하려는 눈빛이었다.하지만 지금은 그럴 필요가 없었다. 나는 그의 손을 밀어내면서 말했다.“괜찮아. 강유형 사람 안 잡아먹어.”진정우는 더 이상 나를 막지 않았고, 나는 강유형의 뒤를 따라갔다.고준석도 당연히 따라가려고 했다. 그러자 강유형이 멈춰 서며 네 일이 아니라고 호통쳤다. 겁에 질린 고준석은 바로 멈춰 서서 나를 바라봤다.강유형은 계속해서 걸었다. 나는 그가 어디로 가는지 몰라서 일단 불러 세웠다.“충분히 멀리 온 것 같은데, 그냥 지금 말하면 안 돼?”그래도 그는 멈추지 않았다. 하지만 내가 멈춰서 그의 등을 바라보며 말했다.“여기서 말하라고. 나 아직 할 일 있어. 업무 시간에 방해하지 마.”그제야 강유형이 걸음을 멈추고 나를 차갑게 노려보았다. 내가 다가가자 그는 바로 손을 들어서 내 팔을 꽉 붙잡았다.세상이 빙글빙글 도는 것 같은 것도 잠시 그가 나를 벽으로 밀어붙였다. 그의 차가운 숨결과 10년간 사랑했던 얼굴이 바로 눈앞에 있었다. 그의 콧날은 거의 내 코에 닿을 정도로 가까웠다.“너 이제 날 협박할 줄도 알아?”내 등이 벽에 짓눌려 아팠다.강유형은 이렇듯 충동적이고 쉽게 화를 내는 성격이었다. 그래서 지난 10년 동안 나는 항상 조심스럽게 맞춰 가면서 지냈다.그러나 이제는 이런 그가 역겹게만 느껴졌다. 나는 두려움 없이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나는 너 때문에 공사 기간이 영향받지 않길 바랄 뿐이야.”강유형은 내 말에 직접적으로 대답하지 않고 말을 돌렸다.“너 정말 그 진정우라는 사람이랑 만나는 거야?”“아니.”
나는 강유형이 한 말을 웃으며 넘겼다.“설마 나 대신 걔랑 착각한 거야?”“나... 나는...”나는 그의 말을 바로 잘랐다.“강유형, 나랑 키스한 게 몇 번인데?”내 말을 들은 강유형의 미간이 잔뜩 찌푸려졌다.우리는 3년 넘게 사귀었지만 손잡고 포옹한 것 말고는 스킨십이 거의 없었다.가끔 손이나 볼, 이마에 입맞춤했고, 입술에 닿을 때도 겨우 스치는 정도였다.내 말에 그는 더 이상 할 말이 없는 듯 잡고 있던 손을 놓고 머리를 헝클며 말했다.“그래, 내가 한 번 실수로 걔한테 키스한 거 맞아. 근데 진짜 그 순간 충동이었고 아무 의미도 없어.”“그럼 자고 나서야 의미가 생긴다는 거야?”내가 비꼬듯 묻자 강유형은 어이없다는 듯 쳐다봤다.“내가 그렇게 천박한 놈으로 보여? 그런 놈이었으면 진작에 너랑 잤겠지. 오늘 이렇게 될 일도 없었을 거고.”나는 잠깐 당황했다가 피식 웃음이 나왔다.그 말은 내가 그와 잤으면, 지금처럼 문제 삼지도 않았을 거라는 뜻인가?무슨 논리야? 아직도 조선 시대에 살고 있는 줄 아나? 여자가 남자 하나만 바라봐야 한다고 생각하는 건가?그와 더 이상 얘기할 필요가 없다고 느낀 나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네가 나한테 관심이 없으니까 안 잔 거 아니야?”그의 말이 더는 상처로 와닿는 것이 아니라 그를 반격할 무기가 되었다는 걸 깨달았다.강유형은 당황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봤다.“윤지원, 계속 이렇게 할 거야?”“뭘? 우리 사이는 이미 끝났어. 네가 자꾸 얽매이고 과거를 들추니까 이렇게 된 거지.”나는 냉정하게 말했다.“끝났다고? 네가 나랑 헤어진 게 결국 진정우 만나려고 그런 거 아니야? 너희 둘의 과거를 이미 다 알고 있었어. 청평에선 같이 살았잖아.”강유형이 내가 청평에서 지내던 일을 알고 있는 건 놀랍지 않았다. 그의 어머니도 그 얘기를 했으니까. 하지만 나와 진정우가 예전부터 알던 사이였다고 생각할 줄이야.“네가 그렇게 생각하고 싶다면 그래, 그러든지. 어차피 정우를 만난 건 너랑 헤어진 후였
당구장.신지태가 도착했을 때, 강유형은 당구공을 힘껏 치고 있었다. 딱 봐도 화가 나서 스트레스를 풀러 온 게 분명했다.신지태는 조용히 옆에 있는 큐대를 들어 다가가며 말했다.“평소처럼 한 판 할래?”강유형은 대답 없이 계속 공만 쳤다. 하지만 연달아 몇번이고 공이 들어가지 않자, 큐대를 탁자 위에 던지고는 밖으로 나가려 했다.그러자 신지태는 큐대를 내려놓고 그를 따라가며 물었다.“또 지원이 때문에 화난 거야?”“누가 걔 때문이라고 했어? 내 앞에서 그런 얘긴 꺼내지 마.”강유형이 퉁명스럽게 대꾸하자, 신지태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지원이 말고는 널 이렇게까지 화나게 할 사람 없잖아. 그 애가 널 떠나려 하니까 이제 참기 힘든 거지?”신지태의 말은 늘 그렇듯 정곡을 찔렀다.그 순간 강유형이 돌아서서 신지태의 옷깃을 움켜잡았다.“그만하라고!”“내가 뭘?”신지태는 차분히 그를 바라보았다.강유형은 한마디 하려다 결국 손을 놓았다. 신지태에게 윤지원과 친하게 지내지 말라고 하고 싶었지만, 그 말을 하면 자신이 아직도 그녀를 신경 쓰고 있다는 걸 인정하는 꼴이었다.어떻게 신경 쓰지 않을 수 있을까?윤지원은 열 살 남짓이었을 때 강씨 집안에 들어왔고, 그때부터 강유형은 그녀를 미래의 아내라고 생각했다. 거부감이 들기는커녕 오히려 그녀를 가족처럼 지켜주고 싶었다.10년 동안 그렇게 그녀를 지켜왔고, 결국 내 여자 친구로 만들었다. 언제나 손을 뻗으면 닿을 듯 가까운 곳에 있었다.그런데 이제는 점점 멀어지고 있다. 심지어 다른 남자를 위해 강유형과 맞서기까지 하니 꼭 자기 물건을 빼앗긴 기분이었다.“왜 내가 이렇게 화나는지 너도 잘 알잖아.”강유형은 신지태를 노려보았다.“넌 지원이를 진짜 사랑하니까.”신지태는 솔직하게 말했다. 그러자 강유형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가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사랑? 웃기지 마. 그냥 익숙해진 거야. 마치 네가 왼손으로 당구 치는 것처럼.”신지태는 여전히 고집부리는 강유형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그런데
나는 진정우를 슬쩍 쳐다보고 나서 이소희에게 핀잔을 주듯 말했다.“졸려서 정신이 오락가락하나 본데요.”“아니에요. 언니랑 정우 씨 둘 다 일 중독자잖아요. 난 이제 정말 못 버티겠어요.”이소희는 자동차 좌석에 기대며 투덜댔다.“못 버티겠어도 버텨야죠. 이제 얼마 안 남았어요.”나는 오늘 일부러 남은 업무를 살펴봤는데 지금 속도대로라면 열흘이면 끝날 것 같았다.“열흘이나 남았다고요?”이소희는 당장이라도 그만두고 싶은 얼굴이었다.나는 룸미러 너머로 진정우를 바라보다가 대답했다.“열흘 정도.”“열흘?”이소희는 거의 체념한 목소리로 말했다.우리가 호텔에 도착했을 때쯤, 이소희는 이미 잠들어 있었다. 몇 번을 깨워도 반응이 없어서, 나는 그녀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계속 안 일어나면 정우 씨가 소희 씨를 안을 거예요.”“좋아요. 안아주세요.”이소희는 손을 뻗었다. 나는 웃음이 터져 나와 그녀를 살짝 당기며 말했다.“얼른 일어나세요.”이소희는 반쯤 감긴 눈으로 나에게 끌려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방 앞에 도착하자, 그동안 말이 없던 진정우가 입을 열었다.“지원 씨, 할 말이 있어요.”순간 심장이 두근거렸다.“네?”방에 들어가자 이소희는 너무 피곤해서 바로 잠이 들었다. 나는 진정우를 바라보며 물었다.“무슨 일이죠?”“회사 측에 이미 말을 다 해놨어요. 이쪽 일 끝까지 마무리하고 떠날 거예요.”진정우의 말에 나는 살짝 놀랐지만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만약 그가 떠난다면 나 역시 당장 일을 그만뒀을 테니까.우리 둘이 빠져도 놀이공원의 조명 조정은 진행되겠지만 제시간에 완공할 수 있을지는 장담할 수 없을 거였다. 게다가 우리가 작업하는 조정 결과와는 차이가 날 것이 분명했다.가장 중요한 건 강진혁이 내가 회사를 떠나는 걸 원치 않는다는 점이다. 그는 진정우의 회사에 더 이상 압박을 주지 않았다. 내가 정말로 일을 관둘까 봐 진정우를 건드리지 않은 게 분명했다.“네.”나는 짧게 대답했다.“혹시 지원 씨도 이 프로젝트 끝나면 나
“여긴 어쩐 일로...”강진혁의 작업복 차림을 보며 나는 짐작이 갔다. 그는 일하려고 온 게 분명했다. 그래도 한 번 더 물어본 건 이 상황이 어처구니없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내 옆에 진정우 한 명 생겼다고 강씨 집안이 다 출동이라도 하겠다는 건가?더 놀라운 건, 몇 년간 해외에 머물렀던 강진혁이 본격적으로 국내에서 활동하려는 걸까? 아니면 KS 그룹에 합류한 건가?“일하러 왔어, 지원아. 앞으로 잘 부탁해.” 예상대로 강진혁이 나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나는 당황스럽지만 손을 내밀어 그와 악수를 했다.“마침 잘 왔네요. 진혁 오..” 나는 어떻게 불러야 할지 고민이 됐다. 그는 이제 직장 동료인데 여전히 ‘오빠’라고 부를 수는 없었다.“그냥 오빠라고 부르면 돼.” 강진혁은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업무 중에는 역할과 분업을 분명히 하는 게 좋겠죠. 이건 강 대표님이 늘 강조했둣이.” 나는 강유형의 이름을 꺼내며 약간 비꼬듯 대답했다.강진혁이 여기 오게 된 게 누구의 아이디어인지 모르겠지만 강유형이 모를 리는 없었다. 그는 지금 회사의 대표로서 강진혁이 합류한 걸 몰랐을 리 없었다.강진혁은 내 의도를 눈치챘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실장으로 왔어.”뭐? 실장? 회사에 다닌 지 오래됐지만 처음 듣는 직책이었다.“지금부터 놀이공원 프로젝트 마무리를 맡을 거야. 나도 기계 전공이니까 지금 너희가 겪고 있는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 될지도 모르지.”그 말을 듣고 나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강진혁이 도와주러 온 건 핑계고 실제 목적은 진정우와 나를 감시하는 게 아닐까? 강진혁이나 강유형 입장에서 보자면 내가 진정우와 엮이는 걸 원치 않을 테니까.“잘됐네요. 어제도 지원 씨랑 어떻게 속도를 올릴지 논의했는데 이렇게 한 명이 더 오니까 완공 시간을 조금이라도 더 당길 수 있겠네요.”진정우는 예상과 달리 아주 자연스럽게 강진혁의 합류를 받아들이며 말했다.나는 그를 의아하게 쳐다보자 진정우가 말했다.“그럼 시작해 볼까요.”그리고 강
진정우는 정말 눈치가 빨랐다.나는 그의 품에서 얼른 벗어나며 어색한 분위기를 풀어보려 말했다.“방금 좀 선 넘으셨어요. 강진혁은 우리 쪽 대표님인데, 그 사람한테 일을 시키신 거예요?”“그쪽에서 일하러 온 사람인데 일을 안 시키고 뭐 해요? 우리가 시키는 게 당연한 거죠.”진정우의 말에 나는 딱히 반박할 말이 없었다. 강진혁이 아무리 잘나도 지금 우리가 하는 일에 대해서는 잘 모를 테니까.“왜요? 강진혁이랑 같이 일하고 싶으세요?” 진정우가 불쑥 물었다.“아니요, 전혀요.” 나는 얼른 부정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진정우의 입가에 잠깐 미소가 스쳐 지나갔다.나와 진정우는 평소처럼 일을 계속했고 강진혁은 그 후로는 더 이상 다가오지 않았다. 대신 이소희가 달려왔다.“언니, 이게 뭐예요? 대표님이 직접 나와서 작업을 감독하신다고요?”“게다가 소희 씨와 파트너가 되었네요. 그분이랑 한 팀이 돼서 조명 조정을 맡을 거예요.”내 말을 들은 이소희는 눈이 휘둥그레졌다.“언니, 너무해요! 대표님이랑 같은 팀은 싫어요. 언니가 그분이랑 한 팀 하세요. 언니는 잘못해도 혼나지 않을 거잖아요.” “그건 안 됩니다.” 진정우가 나서서 대답했다.이소희와 나는 동시에 그를 바라봤지만 진정우는 여전히 일에 집중하며 대답했다.“안 된다니까요.”그 대답에 나도 이소희도 당황했다. 이소희가 나를 애처롭게 쳐다봤고 나는 웃음을 참느라 입술을 꾹 다물었다.“언니, 나 좀 도와주세요...”이소희가 더 말하려던 그때 진정우가 다시 말했다.“지원 씨, 여기 와서 지금 나오는 결과가 맞는지 좀 봐주시겠어요?”나는 그의 말을 듣고 바로 리프트에 올라탔다. 리프트가 올라가는 동안 이소희는 불만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리프트가 멈추자 나는 진정우 옆으로 가서 화면을 들여다봤고 그 순간 멍해졌다. 화면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난 지원 씨랑 한 팀할 거예요.]이게 지금 그가 조정해 놓은 내용이라고? 나는 그를 보며 말했다.“정우 씨...”진정우는 나를 보며
강유형과 헤어진 이후로 이렇게 가까이에서 그를 바라본 건 처음이었다.지금 그는 바로 내 앞에 있었고 심한 상처를 입은 상태였다.차가 뒤집힐 때 나를 안고 보호해 준 사람이 그였고 나 때문에 이렇게 심하게 다쳤을 것이다.“강유형, 말 좀 해봐.”내가 뭐라고 해도 소용없을 것 같았다. 내가 말을 걸어도 그는 점점 더 잠에 빠질 뿐이었다.“무슨 말을 하라는 거야?”그가 힘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하고 싶은 말 다 해봐. 우리가 헤어진 후에 무슨 생각 했는지... 조나연 얘기도 좋고, 얼마 전 네가 왜 갑자기 사라졌는지 말해도 좋아.”나는 마음속에 있는 말들을 한꺼번에 쏟아냈다.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혹시 잠이 든 건가 싶어 다시 불렀는데 마침내 그가 입을 열었다.“지원아, 난 정말 널 사랑했어.”나는 숨을 멈추고 그의 창백한 얼굴을 바라보았고 뭐라 답해야 할지 몰랐다.“넌 내가 유일하게 좋아했던 여자야. 너를 본 이후로 다른 여자는 그냥 평범한 사람으로만 보였어. 그 어떤 설렘도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그는 미소처럼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계속 말했다.“이런저런 여자들이 나한테 고백도 하고 출장 중엔 누군가는 옷까지 벗고 내 침대에 들어와 있었던 적도 있었어. 하지만 난 말하지 않았어. 네가 걱정하고 상처받을까 봐.”“나는 항상 너를 지키고 싶었어. 그래서 어떤 여자를 만나도 손끝 하나 대지 않았어. 그들이 너무 더럽게 느껴졌거든. 내가 그들을 만지면 너까지 더럽혀질까 봐.”그는 잠시 숨을 골랐다가 다시 말했다.“조나연 일이 벌어진 것도 나도 모르게 빠져버린 함정이었어. 조나연은 겉으로 너무 잘 꾸며져 있었어. 아마 하늘이 일부러 우리를 방해한 거겠지...”그가 한참 힘을 주어 눈꺼풀을 들어 올려 나를 바라보았다.항상 강하고 당당했던 그가 이렇게 무기력해진 모습은 처음이었다.“우리 운명이 거기까지였나 봐. 아마도 서로 진심이 부족했나 보지. 우리는 하늘도 어쩌지 못할 운명이었겠지.”나는 그의 말을 받아줬다.강유형은
교통사고는 정말 내게 악몽 같은 존재였다. 그런데 내가 그 악몽을 직접 겪게 될 줄은 몰랐다.이 절망감은 얼마나 깊은지... 부모님이 사고를 당했던 순간에도 분명 나와 같은 감정을 느꼈을 거라고 생각했다.아니, 어쩌면 더 큰 절망감이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심한 상처를 입은 끝에 돌아가셨으니까.나는 머릿속이 혼란스러웠지만 진정우는 그런 나를 잡아주려고 애썼다.“지원아, 괜찮아. 곧 사람들이 너희를 구하러 갈 거야. 나도 금방 갈게.”그는 내게 계속 말을 걸며 진정시키려 했고 나는 그의 말대로 차에서 빠져나오려고 했지만 아무리 시도해도 차 문이 열리지 않았다.“움직이지 마... 아파...”강유형의 힘없는 신음이 내 옆에서 들려왔다.그 한마디에 나는 더 이상 움직일 수 없었고 심지어 말조차 하지 못했다.“지원아, 왜 대답 안 해? 괜찮아?”진정우의 걱정 어린 목소리가 전화 너머에서 들려왔다.“괜찮아...”나는 최대한 침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차에서 불이 나거나 휘발유 냄새가 나는지 확인해 봐.”그의 말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만약 그런 상황이라면 우리는 여기서 빠져나가기 전에는 살아남을 수 없을 것이다.나는 몸을 간신히 움직여 차 앞쪽을 살폈다. 하지만 내가 조금 움직이자마자 차가 또다시 흔들리더니 곧이어 세상이 한 바퀴 돌기 시작했다.“으악!”나는 본능적으로 뭔가를 잡으려 했지만 다시 차가 뒤집히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다시 멈췄을 때 나는 이미 온몸이 탈진한 상태였다.“지원아! 지원아!”멀리서 진정우가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그는 어디에 있었고 내 핸드폰은 또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었다.아까 차가 뒤집힐 때 핸드폰은 어디론가 던져졌고 나는 간절히 외쳤다.“진정우! 차가 또 뒤집혔어!”“진정우, 제발 사람들 빨리 보내줘. 제발!”커가는 공포감에 나는 절박하게 소리쳤다.나는 이 상태로 죽고 싶지 않았다. 이렇게 아무것도 모른 채 죽을 수는 없었다.나는 창밖을 볼 용기가 없었다. 만약 불이 나
차가 크게 충돌하며 뒤집히고 마침내 모든 게 멈췄다. 온 세상이 갑자기 정적에 휩싸였다.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만큼의 고요함 마치 내 생명이 멈춘 듯한 순간이었다.한참 후 정신을 차린 나는 내가 아직 살아 있음을 확인했다. 나는 몸을 움직이려 했지만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조금 더 힘을 주어 보려고 하자 희미한 신음이 들려왔다.“움직이지 마...”주변은 여전히 깜깜했다. 단순히 어두운 것이 아니라 내 얼굴이 무엇인가에 가려져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강유형?”“나... 여기 있어.”그의 목소리는 바로 앞에서 들렸지만 무척 힘이 없어 보였다.“좀 비켜봐. 움직일 수가 없어.”나는 그의 상태를 알지 못한 채 몸을 빼내려 했다.그가 천천히 몸을 움직이자 나는 얼굴을 그의 품에서 겨우 빼낼 수 있었다.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충격적이었다. 찌그러진 차체와 피를 흘리며 움직이지 않는 운전기사가 보였다.나는 공포에 질려 외쳤다.“강유형! 강유형!”나는 너무 놀라서 눈이 휘둥그레졌고 그를 돌아보니 얼굴 역시 피투성이였다.‘큰일이야. 둘 다 다쳤어. 어떡하면 좋아.’나는 내가 다쳤는지조차 확인할 수 없었다. 난 여전히 강유형의 아래에 깔려 있어 움직일 수 없었기 때문이다.그는 찌그러진 차체에 더 깊이 눌려 있었다.그러나 이렇게 있을 수는 없었다. 여기서 시간을 끌면 우리 모두 더 큰 위험에 처할 게 분명했다.“강유형, 숨을 깊게 들이쉬고 몸을 웅크려 봐. 그래야 내가 빠져나올 수 있어.”내 말에 그는 힘겹게 호흡을 조절하며 몸을 웅크렸다. 여러 번 시도 끝에 마침내 나는 그의 몸 아래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러나 그의 얼굴은 이미 창백했고 고통에 몸을 떨고 있었다.내가 나올 수 있게 하느라 그는 막심한 고통을 가까스로 참고 있었다.나는 그의 얼굴에 흐르는 피를 닦아 주려 했지만 그는 내 손을 붙잡으며 말했다.“먼저... 경찰에 신고해.”“아니... 진정우한테 전화해.”나는 바로 그의 말뜻을 이해했다. 혹시라도 경찰이 Q 클럽과 연루
감금실을 나올 때까지도 신지태의 절박한 외침이 나의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강유형의 말은 결코 틀리지 않았다. 신지태의 감정 상태는 순간적으로 격앙되었다가 금세 우울해질 정도로 정말 불안정했다. 특히 그가 마지막에 외쳤던 말이 기억났다.“지원아, 난 여기 있을 사람이 아니야. 난 결백해. 제발 나 좀 꺼내줘!”그 목소리가 내 가슴을 짓눌렀다.밖으로 나오자 기다리고 있던 강유형이 빠르게 다가왔다.그는 내 안색이 나빠진 걸 보자 재빨리 날 부축하며 말했다.“너 괜찮아? 얼굴이 왜 그래? 신지태가 무슨 얘기라도 했어?”신지태가 나한테 부탁한 걸 떠올리자 나는 강유형에게 말했다.“일단 차에 가서 얘기하자.”신지태는 내가 이곳을 빨리 떠나길 바랐다. 아마도 Q 클럽의 감시자들이 근처에 있다는 걸 염두에 둔 것 같았다. 그는 나마저 위험에 빠질까 봐 몹시 걱정하고 있었다.차에 오르자마자 강유형이 물 한 잔을 건네며 말했다.“진정 좀 해.”하지만 나는 물을 받지 않고 조용히 말했다.“지태 오빠는 자신이 누군가의 함정에 빠졌다고 했어.”나는 그가 했던 말을 그대로 전했다.“지태 오빠 말로는 여긴 아주 위험한 곳이고 우리도 무사하리란 보장이 없대.”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갑자기 차 앞쪽에서 강렬한 헤드라이트가 번쩍였고 운전기사는 당황하며 욕을 내뱉었다.“젠장!”강유형은 곧바로 내 어깨를 붙잡으며 주변 상황을 살폈다.나도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신지태를 만난 지 10분도 안 돼 이런 일이 벌어질 줄은 상상도 못 했다.“이제 어떡해?”나는 공포가 밀려와 본능적으로 강유형의 팔을 붙잡았고 그는 흔들림 없이 침착하게 운전사에게 지시했다.“앞뒤 좌우로 네 대가 따라붙었어. 네가 알아서 어떻게든 따돌려.”운전기사는 침착하게 대답하며 말했다.“알겠습니다. 강 대표님, 뒷좌석 안전벨트 꼭 하세요.”강유형은 재빠르게 내 안전벨트를 단단히 조여주었다.차는 심하게 흔들리기 시작했고 온몸이 뒤틀리는 듯한 느낌이었다.내가 휘청거리자 강유형은
진정우는 내가 여전히 화가 나 있다는 걸 눈치챘는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나는 드디어 신지태를 만났다. 그는 수감복을 입고 있었고 멋있던 헤어스타일은 온데간데없이 거의 삭발된 상태였다.이렇게 초라한 모습의 그는 처음이었다. 그를 보는 순간 나는 눈물이 왈칵 쏟아질 뻔했다.신지태는 강유형의 친구들 사이에서도 실력으로 인정받으며 자리 잡은 사람이었다. 하지만 이번 사건은 그의 인생을 한순간에 무너뜨릴 수도 있었다.“지태 오빠.”내가 조심스럽게 그의 이름을 불렀고 그는 나를 보며 여전히 웃고 있었다.“여긴 어떻게 왔어?”늘 그랬듯이 그는 내 앞에서 항상 밝고 긍정적인 모습을 보였다. 마치 그의 세상은 언제나 맑은 햇살로 가득한 듯했다.그런 그의 태도가 오히려 나를 더 침묵하게 했다.“내 모습이 너무 초라해서 말이 안 나오는 거야? 아니면 너무 못생겨져서 날 못 알아보겠어?”그가 이렇게 밝게 웃는 건 전부 연기였을 것이다. 나를 걱정시키기 싫어서 그리고 자신의 초라한 모습을 나에게 보이고 싶지 않아서 말이다.“아니야. 오빠는 언제나 멋져.”나는 그의 말을 받아 웃으며 대답했다.그러자 그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그렇게 날 위로하지 않아도 돼.”“우리는 오빠가 누군가의 계략에 빠졌다는 걸 다 알아. 강유형과 진정우도 오빠를 돕기 위해 애쓰고 있어. 그러니까 오빠는 꼭 침착하게 기다려야 해. 분명 잘 해결될 거야.”나는 그의 마음을 달래며 준비한 질문으로 대화를 유도했고 신지태는 잠시 놀란 듯한 표정을 지었다.아무도 그의 얘기를 들어주지 않았으니 우리의 말이 의외였던 것 같았다.“누가 오빠를 찾아왔었는지 자세히 말해줘. 디크랑 왜 다투게 됐는지. 최대한 자세히 말해줘. 혹시 다른 중요한 일도 있었다면 모두 얘기해줘.”내가 간절히 말하자 그는 잠시 눈을 감고 깊이 생각하는 듯했지만 다시 눈을 뜨며 고개를 저었다.“내 일은 너희가 신경 쓸 필요 없어. 괜히 너희까지 휘말리게 될 수도 있어.”그의 목소리에는 포기와 체념이 묻어
[가능한 빨리 연락 주세요.]상대에게서 온 짧은 메시지였다.그래서 나는 바로 답장을 보냈다.[알겠습니다.]그런데 답장을 보내고 나니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가능한 빨리라는 말은 뭔가 다급한 느낌이 들었고 그래서 나는 다시 메시지를 보냈다.[혹시 시간이 안 되시거나 여건이 어려우시면 사진으로라도 보내주실 수 있을까요?]하지만 이번에는 아무 응답이 없었다.그 사람은 늘 이렇게 종잡을 수 없었다. 그가 먼저 연락하지 않으면 내가 그를 찾을 방법은 없었다.부모님의 사고가 다시 떠오르자 나의 마음속 불안함은 한층 더 깊어졌다.그날 밤, 나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낯선 환경 때문인지 아니면 머릿속에 엉킨 걱정 때문인지 나는 밤새 뒤척였다.다음 날 아침, 강유형은 나를 보자마자 한눈에 상태를 알아챘다.“잠을 잘 자지 못했나 봐.”“괜찮아.”나는 애써 태연한 척 말했다.난 그에게 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이런 태도는 아마 헤어진 여자들의 마지막 자존심 같았다.강유형은 더 이상 묻지 않았지만 표정만으로도 내가 그를 답답하게 만든다는 게 느껴졌다.잠시 후, 그가 입을 열었다.“오늘 신지태를 만날 수 있을 거야. 일단 지태의 마음을 진정시키고 필요한 것도 물어봐야 해.”그의 말은 전날 진정우가 했던 말과 거의 같았다. 둘 다 신지태의 사건이 단순한 사고가 아니라고 믿고 있었다.그가 말을 끝냈지만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고 그는 내 반응이 이상했는지 다시 물었다.“왜 아무 말이 없어?”“어제 진정우가 똑같이 말했거든.”내 대답에 그는 잠시 말을 잃었다.“진정우가 사람을 보내 내가 신지태를 만날 수 있도록 도와주겠대.”나는 솔직히 말했다.그러자 강유형은 아무 말 없이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나는 그를 올려다보았다. 턱은 굳게 다물려 있었고 얼굴에는 분노가 가득했다. 예전과 똑같은 모습이었다.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고 하더니 그는 여전히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쉽게 화를 냈다.다만 예전과 다른 점이 있다면 이제는
나는 마음이 조여 오는 듯한 불안감을 느끼며 물었다.“내일 대략 몇 시쯤?”“정확히는 모르겠어. 내일 전화로 알려줄게.”진정우는 그렇게 말하며 잠시 멈췄다가 물었다.“밥은 먹었어?”“응. 강유형이랑 같이 먹었어.”나는 사실 그대로 대답했다. 진정우도 이런 사소한 것에 신경 쓰지 않을 사람이었다. 게다가 나를 강유형에게 맡긴 것도 그였으니.그는 예상대로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고 화제를 돌렸다.“신지태에 대해 강유형이 뭐라고 했어?”“그가 면회를 도와줄 방법을 찾고 있다고 했어. 다른 말은 없었어.”“강유형은 신지태 팀원들과 친하니까 유용한 단서를 얻을 수도 있을 거야.”그의 말에 굳이 대꾸하지 않았고 대화는 거기서 멈췄다.우리는 전화 속에서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 나는 창밖을 바라보다가 조용히 말했다.“여기 비가 꽤 많이 와.”“들었어.”그제야 나는 화면이 천장을 비추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진정우는 비도, 나도 보지 못한 채 호텔 천장만 보고 있었던 것이다.“보여줄게.”나는 휴대폰을 들어 창밖의 비 내리는 풍경을 비췄다.“내가 보고 싶은 건 너야.”그의 목소리가 부드럽게 흘렀다. 잠시 침묵한 뒤, 나는 고개를 살짝 숙이며 말했다.“정우야, 넌 날 화나게 했어. 그래서 너에게 벌줄 거야. 내가 돌아가기 전까지 날 못 볼 거야.”그는 한참 조용히 있더니 결국 말했다.“알겠어. 네가 말한 벌을 받아들일게.”그게 벌일까? 어쩌면 그럴지도.그는 나를 사랑하니까. 사랑하는 사람은 하루라도 못 보면 긴 시간이 흐른 것처럼 느껴지는 법이다.진정우는 휴대폰 너머로 나와 함께 낯선 도시의 비를 바라보았다. 우리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나는 한참 동안 창가에 앉아 있었고 허리가 뻐근해지자 침대로 옮겨 누웠다.휴대폰을 들었을 때, 그는 여전히 전화를 끊지 않고 있었다.“왜 아직 안 끊었어?”“끊고 싶지 않아. 네 목소리라도 들을 수 있으니까.”그의 대답은 내 가슴을 울렸지만 나는 장난스럽게 말했다.“그럼 내가 끊을게.
진정우의 영상 통화가 걸려 왔을 때, 나는 호텔 발코니에서 비 내리는 도시를 바라보고 있었다.낯선 도시는 언제나 사람의 마음을 고요하게 만들면서도 어딘가 쓸쓸한 기운을 준다.창밖에서 들려오는 빗소리는 그런 감정을 더 깊게 파고들었다.며칠 전 영상 통화에서 들었던 대화가 머릿속을 맴돌았다.강유형이 왜 진정우에 대해 다 아냐고 물었는지 이제야 알 것 같았다.진정우는 단순한 평범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진씨 가문의 사람이었다.나는 그를 평범한 회사원이라 생각했지만 알고 보니 숨겨진 거대 재산을 가진 부잣집 자제였다.그런데 왜 그는 자신을 숨겼을까? 혹시 영화나 소설처럼, 자기기 재산이나 신분 때문에 사랑받고 싶지 않았던 걸까?이 생각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순간 핸드폰이 울렸고 화면에 나타난 진정우의 얼굴은 여전히 차분하고 잘생겼다.“지원아, 내가 설명할게.”그의 말은 단도직입적이었다. 이미 내가 모든 걸 알았다는 걸 그는 직감하고 있었다.“뭘 설명하려는 건데?” 나는 다리를 꼼지락거리며 일부러 무심한 척 물었다.“널 일부러 속이거나 숨긴 건 아니야.” 그의 목소리는 진지했다. 나는 창문에 손가락으로 무심히 선을 그으며 말했다.“뭐, 네가 말하지 않은 것도 네 선택이지.”“지원아...”“진정우, 네가 날 강유형에게 맡긴 건, 그가 진씨 가문과 협력하려면 널 의식할 수밖에 없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겠지?”“그건...”“하지만 일반적인 남자 친구라면, 전 남자 친구에게 여자 친구를 맡기진 않지 않아?” 나는 낮게 속삭였다.“지원아...”“내가 네게 했던 말 기억나? 나는 거짓말을 제일 싫어한다고 했잖아.”내 마음은 이미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알아. 네가 알게 되면 말하려고 했어. 하지만 적당한 시기를 찾지 못했어.” 그의 목소리는 간절했다.“시기를 찾지 못했다니. 진씨 가문으로 돌아갈 결심을 하고 나서 말하려고 했던 거야? 아니면 오늘 내가 우연히 듣지 않았다면, 영영 말하지 않았겠지?”그는 한동안 침묵하다 답했다.
강유형이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보아하니 정말 날 원망하는구나.”“그렇게까지는 아니야. 하지만 마음이 불편한 건 사실이야. 내 10년을 너한테 낭비했으니까.”이미 이 화제가 시작된 이상, 나는 솔직하게 대답했다.그가 잠시 침묵하더니 나지막이 말했다.“그럼 내 10년은? 윤지원, 나도 널 사랑했고 진심으로 너에게 최선을 다했어.”나는 잠시 그와 눈을 마주쳤다가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그건 부정하지 않아. 하지만 네가 조나연과 엮인 그 순간, 네가 했던 모든 노력을 스스로 지운 거야.”“죄인도 집행유예나 한 번쯤은 용서받을 기회를 얻잖아. 그런데 왜 나는 그런 기회조차 없는 거야?”그의 목소리엔 억울함이 가득했다.“난 그럴 너에게 그런 기회를 주고 싶지 않아.”내 단호한 대답과 동시에 음식이 상에 올랐다.강유형은 더 무언가를 말하려는 듯했지만 내가 먼저 선을 그었다.“이 식사를 계속하고 싶다면 과거 이야기는 하지 마.”그는 잠시 나를 바라보았고 결국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우리는 말없이 식사를 시작했지만 서로 음식 맛조차 느끼지 못한 채 숟가락만 들었다.식사를 마친 후 그는 나를 호텔로 데려다줬고 내 방은 그의 바로 옆방이었다.방에 들어가기 전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지태 오빠를 가능한 한 빨리 만나고 싶어.”그는 짧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알아.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 불러.”이번엔 그의 배려를 받아들여 고개를 끄덕이고 방으로 들어가려던 순간, 그가 다시 불렀다.“윤지원, 넌 진정우에 대해 정말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해?”“뭐라고?”나는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봤지만 그는 대답 대신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나는 문을 닫으며 생각했다.‘도대체 무슨 뜻이지? 진정우에 대해 뭘 말하려는 거야?’방에 들어오자마자 나는 진정우에게 영상통화를 걸었지만 그는 받지 않았다.‘휴대폰을 안 들고 있나, 아니면 바쁜 건가?’나는 호텔 방 사진을 찍어 메시지와 함께 보냈다.[안전하게 도착했어.]하지만 여전히 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