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강유형이 한 말을 웃으며 넘겼다.“설마 나 대신 걔랑 착각한 거야?”“나... 나는...”나는 그의 말을 바로 잘랐다.“강유형, 나랑 키스한 게 몇 번인데?”내 말을 들은 강유형의 미간이 잔뜩 찌푸려졌다.우리는 3년 넘게 사귀었지만 손잡고 포옹한 것 말고는 스킨십이 거의 없었다.가끔 손이나 볼, 이마에 입맞춤했고, 입술에 닿을 때도 겨우 스치는 정도였다.내 말에 그는 더 이상 할 말이 없는 듯 잡고 있던 손을 놓고 머리를 헝클며 말했다.“그래, 내가 한 번 실수로 걔한테 키스한 거 맞아. 근데 진짜 그 순간 충동이었고 아무 의미도 없어.”“그럼 자고 나서야 의미가 생긴다는 거야?”내가 비꼬듯 묻자 강유형은 어이없다는 듯 쳐다봤다.“내가 그렇게 천박한 놈으로 보여? 그런 놈이었으면 진작에 너랑 잤겠지. 오늘 이렇게 될 일도 없었을 거고.”나는 잠깐 당황했다가 피식 웃음이 나왔다.그 말은 내가 그와 잤으면, 지금처럼 문제 삼지도 않았을 거라는 뜻인가?무슨 논리야? 아직도 조선 시대에 살고 있는 줄 아나? 여자가 남자 하나만 바라봐야 한다고 생각하는 건가?그와 더 이상 얘기할 필요가 없다고 느낀 나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네가 나한테 관심이 없으니까 안 잔 거 아니야?”그의 말이 더는 상처로 와닿는 것이 아니라 그를 반격할 무기가 되었다는 걸 깨달았다.강유형은 당황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봤다.“윤지원, 계속 이렇게 할 거야?”“뭘? 우리 사이는 이미 끝났어. 네가 자꾸 얽매이고 과거를 들추니까 이렇게 된 거지.”나는 냉정하게 말했다.“끝났다고? 네가 나랑 헤어진 게 결국 진정우 만나려고 그런 거 아니야? 너희 둘의 과거를 이미 다 알고 있었어. 청평에선 같이 살았잖아.”강유형이 내가 청평에서 지내던 일을 알고 있는 건 놀랍지 않았다. 그의 어머니도 그 얘기를 했으니까. 하지만 나와 진정우가 예전부터 알던 사이였다고 생각할 줄이야.“네가 그렇게 생각하고 싶다면 그래, 그러든지. 어차피 정우를 만난 건 너랑 헤어진 후였
당구장.신지태가 도착했을 때, 강유형은 당구공을 힘껏 치고 있었다. 딱 봐도 화가 나서 스트레스를 풀러 온 게 분명했다.신지태는 조용히 옆에 있는 큐대를 들어 다가가며 말했다.“평소처럼 한 판 할래?”강유형은 대답 없이 계속 공만 쳤다. 하지만 연달아 몇번이고 공이 들어가지 않자, 큐대를 탁자 위에 던지고는 밖으로 나가려 했다.그러자 신지태는 큐대를 내려놓고 그를 따라가며 물었다.“또 지원이 때문에 화난 거야?”“누가 걔 때문이라고 했어? 내 앞에서 그런 얘긴 꺼내지 마.”강유형이 퉁명스럽게 대꾸하자, 신지태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지원이 말고는 널 이렇게까지 화나게 할 사람 없잖아. 그 애가 널 떠나려 하니까 이제 참기 힘든 거지?”신지태의 말은 늘 그렇듯 정곡을 찔렀다.그 순간 강유형이 돌아서서 신지태의 옷깃을 움켜잡았다.“그만하라고!”“내가 뭘?”신지태는 차분히 그를 바라보았다.강유형은 한마디 하려다 결국 손을 놓았다. 신지태에게 윤지원과 친하게 지내지 말라고 하고 싶었지만, 그 말을 하면 자신이 아직도 그녀를 신경 쓰고 있다는 걸 인정하는 꼴이었다.어떻게 신경 쓰지 않을 수 있을까?윤지원은 열 살 남짓이었을 때 강씨 집안에 들어왔고, 그때부터 강유형은 그녀를 미래의 아내라고 생각했다. 거부감이 들기는커녕 오히려 그녀를 가족처럼 지켜주고 싶었다.10년 동안 그렇게 그녀를 지켜왔고, 결국 내 여자 친구로 만들었다. 언제나 손을 뻗으면 닿을 듯 가까운 곳에 있었다.그런데 이제는 점점 멀어지고 있다. 심지어 다른 남자를 위해 강유형과 맞서기까지 하니 꼭 자기 물건을 빼앗긴 기분이었다.“왜 내가 이렇게 화나는지 너도 잘 알잖아.”강유형은 신지태를 노려보았다.“넌 지원이를 진짜 사랑하니까.”신지태는 솔직하게 말했다. 그러자 강유형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가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사랑? 웃기지 마. 그냥 익숙해진 거야. 마치 네가 왼손으로 당구 치는 것처럼.”신지태는 여전히 고집부리는 강유형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그런데
나는 진정우를 슬쩍 쳐다보고 나서 이소희에게 핀잔을 주듯 말했다.“졸려서 정신이 오락가락하나 본데요.”“아니에요. 언니랑 정우 씨 둘 다 일 중독자잖아요. 난 이제 정말 못 버티겠어요.”이소희는 자동차 좌석에 기대며 투덜댔다.“못 버티겠어도 버텨야죠. 이제 얼마 안 남았어요.”나는 오늘 일부러 남은 업무를 살펴봤는데 지금 속도대로라면 열흘이면 끝날 것 같았다.“열흘이나 남았다고요?”이소희는 당장이라도 그만두고 싶은 얼굴이었다.나는 룸미러 너머로 진정우를 바라보다가 대답했다.“열흘 정도.”“열흘?”이소희는 거의 체념한 목소리로 말했다.우리가 호텔에 도착했을 때쯤, 이소희는 이미 잠들어 있었다. 몇 번을 깨워도 반응이 없어서, 나는 그녀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계속 안 일어나면 정우 씨가 소희 씨를 안을 거예요.”“좋아요. 안아주세요.”이소희는 손을 뻗었다. 나는 웃음이 터져 나와 그녀를 살짝 당기며 말했다.“얼른 일어나세요.”이소희는 반쯤 감긴 눈으로 나에게 끌려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방 앞에 도착하자, 그동안 말이 없던 진정우가 입을 열었다.“지원 씨, 할 말이 있어요.”순간 심장이 두근거렸다.“네?”방에 들어가자 이소희는 너무 피곤해서 바로 잠이 들었다. 나는 진정우를 바라보며 물었다.“무슨 일이죠?”“회사 측에 이미 말을 다 해놨어요. 이쪽 일 끝까지 마무리하고 떠날 거예요.”진정우의 말에 나는 살짝 놀랐지만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만약 그가 떠난다면 나 역시 당장 일을 그만뒀을 테니까.우리 둘이 빠져도 놀이공원의 조명 조정은 진행되겠지만 제시간에 완공할 수 있을지는 장담할 수 없을 거였다. 게다가 우리가 작업하는 조정 결과와는 차이가 날 것이 분명했다.가장 중요한 건 강진혁이 내가 회사를 떠나는 걸 원치 않는다는 점이다. 그는 진정우의 회사에 더 이상 압박을 주지 않았다. 내가 정말로 일을 관둘까 봐 진정우를 건드리지 않은 게 분명했다.“네.”나는 짧게 대답했다.“혹시 지원 씨도 이 프로젝트 끝나면 나
“여긴 어쩐 일로...”강진혁의 작업복 차림을 보며 나는 짐작이 갔다. 그는 일하려고 온 게 분명했다. 그래도 한 번 더 물어본 건 이 상황이 어처구니없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내 옆에 진정우 한 명 생겼다고 강씨 집안이 다 출동이라도 하겠다는 건가?더 놀라운 건, 몇 년간 해외에 머물렀던 강진혁이 본격적으로 국내에서 활동하려는 걸까? 아니면 KS 그룹에 합류한 건가?“일하러 왔어, 지원아. 앞으로 잘 부탁해.” 예상대로 강진혁이 나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나는 당황스럽지만 손을 내밀어 그와 악수를 했다.“마침 잘 왔네요. 진혁 오..” 나는 어떻게 불러야 할지 고민이 됐다. 그는 이제 직장 동료인데 여전히 ‘오빠’라고 부를 수는 없었다.“그냥 오빠라고 부르면 돼.” 강진혁은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업무 중에는 역할과 분업을 분명히 하는 게 좋겠죠. 이건 강 대표님이 늘 강조했둣이.” 나는 강유형의 이름을 꺼내며 약간 비꼬듯 대답했다.강진혁이 여기 오게 된 게 누구의 아이디어인지 모르겠지만 강유형이 모를 리는 없었다. 그는 지금 회사의 대표로서 강진혁이 합류한 걸 몰랐을 리 없었다.강진혁은 내 의도를 눈치챘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실장으로 왔어.”뭐? 실장? 회사에 다닌 지 오래됐지만 처음 듣는 직책이었다.“지금부터 놀이공원 프로젝트 마무리를 맡을 거야. 나도 기계 전공이니까 지금 너희가 겪고 있는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 될지도 모르지.”그 말을 듣고 나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강진혁이 도와주러 온 건 핑계고 실제 목적은 진정우와 나를 감시하는 게 아닐까? 강진혁이나 강유형 입장에서 보자면 내가 진정우와 엮이는 걸 원치 않을 테니까.“잘됐네요. 어제도 지원 씨랑 어떻게 속도를 올릴지 논의했는데 이렇게 한 명이 더 오니까 완공 시간을 조금이라도 더 당길 수 있겠네요.”진정우는 예상과 달리 아주 자연스럽게 강진혁의 합류를 받아들이며 말했다.나는 그를 의아하게 쳐다보자 진정우가 말했다.“그럼 시작해 볼까요.”그리고 강
진정우는 정말 눈치가 빨랐다.나는 그의 품에서 얼른 벗어나며 어색한 분위기를 풀어보려 말했다.“방금 좀 선 넘으셨어요. 강진혁은 우리 쪽 대표님인데, 그 사람한테 일을 시키신 거예요?”“그쪽에서 일하러 온 사람인데 일을 안 시키고 뭐 해요? 우리가 시키는 게 당연한 거죠.”진정우의 말에 나는 딱히 반박할 말이 없었다. 강진혁이 아무리 잘나도 지금 우리가 하는 일에 대해서는 잘 모를 테니까.“왜요? 강진혁이랑 같이 일하고 싶으세요?” 진정우가 불쑥 물었다.“아니요, 전혀요.” 나는 얼른 부정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진정우의 입가에 잠깐 미소가 스쳐 지나갔다.나와 진정우는 평소처럼 일을 계속했고 강진혁은 그 후로는 더 이상 다가오지 않았다. 대신 이소희가 달려왔다.“언니, 이게 뭐예요? 대표님이 직접 나와서 작업을 감독하신다고요?”“게다가 소희 씨와 파트너가 되었네요. 그분이랑 한 팀이 돼서 조명 조정을 맡을 거예요.”내 말을 들은 이소희는 눈이 휘둥그레졌다.“언니, 너무해요! 대표님이랑 같은 팀은 싫어요. 언니가 그분이랑 한 팀 하세요. 언니는 잘못해도 혼나지 않을 거잖아요.” “그건 안 됩니다.” 진정우가 나서서 대답했다.이소희와 나는 동시에 그를 바라봤지만 진정우는 여전히 일에 집중하며 대답했다.“안 된다니까요.”그 대답에 나도 이소희도 당황했다. 이소희가 나를 애처롭게 쳐다봤고 나는 웃음을 참느라 입술을 꾹 다물었다.“언니, 나 좀 도와주세요...”이소희가 더 말하려던 그때 진정우가 다시 말했다.“지원 씨, 여기 와서 지금 나오는 결과가 맞는지 좀 봐주시겠어요?”나는 그의 말을 듣고 바로 리프트에 올라탔다. 리프트가 올라가는 동안 이소희는 불만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리프트가 멈추자 나는 진정우 옆으로 가서 화면을 들여다봤고 그 순간 멍해졌다. 화면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난 지원 씨랑 한 팀할 거예요.]이게 지금 그가 조정해 놓은 내용이라고? 나는 그를 보며 말했다.“정우 씨...”진정우는 나를 보며
나는 진정우 말대로 가만히 있었지만 어느새 그를 더 세게 붙잡고 있었다.쿵쿵...진정우의 심장 소리가 귓가에 가까이 들려오자 내가 그의 품에 기대고 있다는 걸 문득 깨달았다. 두려움에 정신이 팔려 그런 건 전혀 의식하지 못한 채 그에게 더 기대고 있었다.한참 후, 리프트가 더 이상 흔들리지 않자 나는 천천히 그에게서 몸을 떼었다. 그때 진정우가 아래를 내려다보며 말했다.“새로 오신 분이 또 계셨네요?”순간 정신이 번쩍 들어 그의 품에서 물러나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나를 올려다보고 있는 조나연이 서 있었다. 그 순간, 이유를 알 수 없는 불쾌함이 마음속에서 피어올랐다.나는 급히 리프트에서 내렸다. 조나연은 특유의 차분한 미소를 지으며 나에게 인사를 건넸다.“지원 씨, 오랜만이에요.”나는 그녀처럼 여유롭게 인사할 기분이 아니었다. 그래서 조금 날카로운 목소리로 물었다.“여긴 어떻게 오신 거예요?”내 말투가 조금 예의 없어 보였을 수도 있지만 지금 임신 중인 그녀가 이곳에 있는 건 위험했다. 아직 개장도 안 됐고 안전 점검도 다 끝나지 않은 현장이었다. 만약 사고라도 나면 그 누구도 그 책임을 질 수 없었다.조나연의 남편을 잃은 과부였으니 아이는 더 소중했다. 하지만 조나연의 대답은 전혀 예상 밖이었다.“일하러 왔어요.”그 말을 듣고 순간 귀를 의심했다.“뭐라고요?”“강 대표님이 보내셨어요. 안전 점검을 제가 직접 맡아달라고 하셨거든요.”조나연의 말을 듣자 나는 울컥 화가 치밀어 올랐다.“강유형 씨가 제정신이 아닌가 보네요. 여기에 임신부를 보내다니요.”내 말에 근처에 있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봤다. 조나연이 혼자 온 게 아니었다. 현장 직원들과 프로젝트팀 그리고 이소희와 강진혁도 그 자리에 있었다.조나연은 눈을 가늘게 뜨며 나에게 물었다.“왜 그렇게 말씀하시는 거죠?”“이곳은 임신하신 분이 있을 자리가 아니니까요.”나는 말하며 휴대폰을 꺼내 바로 강유형에게 전화를 걸었다.그는 전화
“대표님, 제가 지금 말로만 독한 게 아니라 정말 독하게 나갈 수도 있어요. 그렇게 걱정되신다면 나연 씨를 데려가세요. 아니면...”나는 강진혁을 보며 덧붙였다.“제가 사람을 붙여서 24시간 지켜보게 할까요?”강유형은 내 의도를 눈치채지 못한 듯 대답했다.“좋지. 조 팀장이 직접 보살피면 걱정이 없겠는데.”“그건 어려울 것 같네요. 저도 바빠서요.”나는 바로 전화를 끊었다. 그때 조나연이 마침 입을 열었다.“저한테 그렇게 적대감을 가지실 필요는 없어요. 제 안전은 제가 잘 지킬 테니까요.”“나연 씨가 지금 건강하시니 그렇게 말씀하시는 거겠죠. 하지만 여긴 언제든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는 곳이에요.”내 말에 옆에 있던 이소희는 입을 꾹 다물었지만 속으로 웃음을 참는 듯했다.“아까 대표님이 전화로 그러셨잖아요. 사람 하나 붙여서 24시간 보호하라고요. 근데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아요. 밤에 나연 씨 곁에서 지켜줄 사람은 따로 있을 테니까요. 그렇죠?”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예전에는 남편을 잃은 그녀를 동정했을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그런 마음이 전혀 들지 않았다.“강 실장님.”나는 강진혁을 보며 말했다.“강 실장님도 막 오셨으니 나연 씨와 함께 현장을 둘러보면서 익히세요. 물론 보호도 잘 해주시고요.”강진혁은 내 말에 잠시 멍해졌다.“지원아, 너...”“강 실장님.”나는 그의 말을 끊었다.“회사에서는 강 실장님이 저보다 높은 분이지만, 이 현장에서는 제가 책임자입니다. 여기서는 제 지시에 따라 주셔야 해요.”이건 강유형이 나에게 준 권한이었다. 지금까지는 쓸 일이 없었지만 이제 프로젝트가 거의 끝나가니 처음으로 이 권한을 쓰게 됐다.강진혁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고 조나연은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다.“전 괜찮습니다. 제 안전은 제가 잘 지킬 수 있어요.”그녀도 강유형과 강진혁의 관계를 모를 리 없었다. 강유형과 얽힌 사이에 괜히 강유형이 오해라도 할까 봐 강진혁과 함께 다니는 걸 꺼리는 게 분명했다.“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하
막대사탕이라니, 나를 어린애 취급하는 걸까?뭔가 유치하다고 말하려던 참에, 진정우는 이미 막대사탕을 내 손에 쥐여주고는 물을 마시러 갔다. 그러면서 내 물컵까지 가져다주었다.그는 옆 의자에 앉으며 옆자리를 톡톡 두드렸다.“좀 쉬어요.”나는 지금 쉬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아까부터 사람 상대하는 일밖에 한 게 없어서 딱히 할 일도 없었다. 하지만 진정우가 앉으니 나도 그 옆에 앉을 수밖에 없었다. 그가 없으면 일 자체가 불가능하니까.그제야 내가 이 사람의 주도에 따라 움직이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아까 좀 무서워 보였어요.”진정우가 입을 열었다.나는 물을 한 모금 마시며 물었다.“그래요?”“네, 조금요.”그가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을 보니, 문득 그가 귀여워 보였다.듬직한 군인 출신인 남자가 이런 식으로 말하니 묘하게 어색하면서도 웃음이 났다.“정우 씨는 몇 살이에요?”어린애처럼 굴지 말라는 뜻으로 놀리려는 말이었다. 그런데 그는 뜻밖의 대답을 했다.“예전에 말했잖아요.”어라? 난 기억이 가물가물한데...“우리 처음 만났을 때, 소개팅에서요.”“아...”“서른하나요.”그는 내가 기억해 낼 틈도 주지 않고 답했다.그와 대화를 나누고 있자니 나는 같은 세상에 살지 않는 사람과 얘기하는 기분이었다. 어색한 침묵을 깨려 물을 몇 모금 더 마시자 그가 말했다.“집주인 할머니께 전화가 왔었어요. 우리가 같이 일하는 거 아신다면서 일이 끝나면 둘이 같이 오라고 하시더라고요.”진정우가 이곳에 오고 나서 집주인 할머니 이야기를 꺼낸 건 처음이었다.진정우가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것도 자연스럽지만, 내가 할머니 이야기를 피했던 건 그분이 자꾸 나와 진정우를 엮으려 했기 때문이었다. 그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우리는 어색해지니까.이제 그가 말했으니 나도 대답을 해야 했다.“여기 계속 머물 거라고 말씀 안 드렸어요?”“상황 봐서요.”진정우의 대답을 듣자 나는 그를 바라봤다. 하지만 그는 나를 보지 않은 채 물을 마셨다. 그리고 고개를 들
강유형이 여태껏 안 보이던 이유가 드디어 밝혀졌다. 강진혁이 그를 가둬둔 것이다.안리영의 말이 딱 맞아떨어졌다. 그는 정말로 아버지의 장례식에서까지 수작을 부렸다.용준호는 이미 처리됐고 강유형마저 가둬두었으니 이제 남은 건 강진혁, 그 혼자뿐이었다. 모든 결정권이 그의 손에 넘어갔다.사람들은 말한다. 사내는 독해야 자신의 자리를 지킬 수 있다고 말이다. 언제나 점잖고 다정하기만 했던 그가 지금은 혈육도 모르는 체하는 악마가 되어 있었다.“지원아, 그이를 구할 사람, 너밖에 없어...”김희연은 그렇게 말하고는 더욱 큰 소리로 울음을 터뜨렸다.그녀는 이런 방식으로 내게 몰래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이렇게라도 말하지 않으면 자신도 강진혁한테 잡혀 갇힐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그녀는 눈을 감고 못 본 척해야만 했다. 이렇게 간접적으로 내게 도움을 요청할 수밖에 없었다.자식에게 두려움을 느껴서라기보다는 그녀에게 아직 다하지 못한 소원이 있었기 때문이다.강두식은 그녀가 인생에서 가장 사랑하고 가장 의지하던 사람이었다. 그런 남자가 먼저 떠났으니 그녀에게 삶은 의미 없는 것이 되어버렸다. 그녀는 그저 가장 사랑했던 이의 곁을 지키고 그의 마지막 길을 함께하고 싶을 뿐이었다.나는 그녀를 달래고는 조용히 안리영 곁으로 다가가 속삭였다.“내가 강진혁을 붙잡고 있을게. 넌 지하 주차장으로 가서 강유형을 구해.”안리영이 놀란 눈으로 나를 보았다.“내가?”지금껏 메스만 들어본 그녀였다. 이런 식으로 사람을 구하는 일은 해본 적이 없었다.하지만 이곳엔 우리 둘뿐이었고 그녀 외엔 도움이 될 만한 사람이 없었다.망설임도 잠시 안리영은 고개를 끄덕였다.김희연은 몸을 휘청이더니 그대로 쓰러져 정신을 잃은 척했다.강진혁은 얼른 그녀를 안아 침실로 옮겼고 안리영은 의사라는 이유로 당연히 함께 불려 들어갔다.나와 안리영은 서로 눈빛을 교환하고는 역할을 바꿨다. 그녀가 강진혁을 붙잡아두는 사이, 나는 강유형을 구하러 나섰다.“혈압이 너무 높아요. 혹시 혈
“의료사고는 병원이나 의사의 책임이 아니라는 결론이 나왔고 도 선생님도 복직하셨어. 다만...”안리영은 말을 잠시 멈췄다.“다른 병원으로 전근 가셨어.”며칠 동안 병원에 머물면서 그녀를 한 번도 보지 못한 이유를 알 수 있었다.“이번 사고 때문에 전근 가신 거야?”“응. 조사 결과 산모의 죽음은 도 선생님과는 전혀 무관하다고 밝혀졌지만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그냥 그녀 손에 죽었다는 사실만 보고 이 모든 게 그녀의 책임이라고 여기는 거지.”안리영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씁쓸히 말했다.“사람들의 입이 제일 무서워. 가볍게 내뱉는 말 한마디 한마디의 무게가 얼마나 무거운지 다들 몰라.”그 말의 뜻은 도 선생님에 대한 안타까움이기도 했지만 자신의 경험에서 우러난 것이기도 했다. 그녀도 지난 세월 동안 유가족들에게 오해받고 괴로워한 적이 있었으니 말이다.“우리 리영이, 마음고생 많았겠네.”나는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그녀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세상에 사연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맞는 말이었다. 누구나 자신의 삶이 가장 고달프다고 느끼지만 정작 우리가 겪는 고통은 이 세상 온갖 아픔 중의 아주 작은 한 조각일지도 모른다.출관하는 날, 하늘에선 보슬비가 내리고 있었다. 마치 하늘조차 이 아픔을 가엾게 여기는 것처럼 말이다.나는 안리영과 함께 강씨 가문에 도착했다. 저 멀리 길 양쪽으로 차들이 길게 늘어서 있는 것이 보였다.강두식은 평생을 업계에서 살아온 인물이다. 그를 애도하러 찾아오는 사람이 많다는 건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강씨댁 대문 앞엔 흰 보가 드리워져 있었고 양옆에는 추모의 글귀가 붙어 있었다. 문 앞에 서기만 해도 가슴 속으로 서늘한 기운이 파고들었다.“조금 있다가 아주머니 뵙게 될 텐데 감정 조절 잘 해야 해. 흥분하면 안 돼.”안리영이 걱정된다는 듯이 당부했다.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지만 속으로는 잘 알고 있었다. 감정이라는 게 그렇게 쉽게 조절되는 거라면 이 세상엔 그렇게 많은 희로애락도 없었을 것이
강유형은 들고 있던 휴대폰을 천천히 내려놓았다. 온몸에 힘이 빠진 듯했다. 온몸의 피가 다 빠져나간 사람처럼 보였다. 그는 입술을 살짝 떨며 말을 꺼냈다.“엄마가 그러는데, 아빠가... 돌아가셨대.”강진혁은 이미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는지 별다른 반응도, 놀라움도 없었다.둘은 말없이 한동안 침묵을 지켰다. 그러다 강진혁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가자.”그때 마침 강유형이 전화를 걸어왔고 나는 잠결에 정신이 몽롱한 상태였다. 나는 어지럽고 복잡한 꿈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채 헤매고 있었다.그 전화는 마치 구명줄처럼 나를 그 혼란스러운 꿈에서 깨어나게 해주었다. 하지만 꿈에서 너무 많은 힘을 빼버려서 그런지 목소리가 흐물거렸다.“여보세요...”“지원아.”강유형은 나지막이 내 이름을 불렀고 그 뒤로 말이 없었다.“무슨 일이야?”나는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한 채 흐물거리며 물었다.“아빠... 오늘 가셨대.”강유형의 목소리는 깊고도 낮았다. 하지만 내게는 그 소리가 너무 크고 너무 선명하게 들렸다.그 말을 듣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주 짧은 찰나였지만 시간조차 멈춘 듯한 기분이 들었다.강두식은 내 부모님의 죽음과 관련된 사람이었다. 나는 그를 원망했었다. 하지만 지난 세월 동안 그는 나를 친딸처럼 아껴주었고 그로 인해 나는 더 이상 그를 미워할 수 없게 되었다.그 애매한 감정은 늘 내 마음을 갉아먹었다. 그래서 김희연이 나더러 집에 한번 들르라고 부탁했을 때, 그러겠다고 했지만 결국엔 가지 못했다.이제 강두식은 세상을 떠났다. 더는 그를 볼 수도, 마주할 수도 없게 되었다.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수화기 너머로 흐느끼는 소리가 아주 작게 들렸다. 그 틈 사이로 강유형의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이제 난 아버지가 없어.”이런 영원한 상실이라는 감정은 직접 겪어본 사람만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나는 안다. 우리 부모님이 세상을 떠났을 때, 그때의 나는 너무나도 어렸지만 그날 느낀 망연자실한 공포는 지금까지도 내 마음속에 깊
김희연은 순간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러다 이내 눈시울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그래... 약속한 거야...”나는 인터넷에서 용준호가 폭행을 당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사진과 영상도 함께 올라왔고 댓글에는 속 시원하다는 반응이 줄을 지었다. 조직 연루설도 떠돌고 있었다.하지만 나는 안다. 그건 강유형이 사람을 시켜 한 짓이었다.나만 아는 것도 아니었다. 눈치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강진혁은 그 일로 그를 찾아왔다.“네가 용준호를 건드렸지? 살 만큼 살았다는 거야? 죽고 싶은 거냐고.”그는 날 선 질책을 던졌다.“그런가 봐. 불 속에서도 살아남았으니 말이야.”강유형은 비웃는 듯한 말투로 빈정거렸다.강진혁은 그 말속의 숨은 뜻을 알아챈 듯했다. 하지만 따로 더 설명하지 않고 단호하게 말했다.“은신처 마련해줄게. 용진표가 널 가만두지 않을 게 분명해.”“오라고 해.”강유형은 무심하게 어깨를 으쓱였다.“허.”강진혁은 차가운 웃음을 흘렸다.“넌 아직도 우리 아버지가 예전 그 모습인 줄 아는 거야? 지금 어떤 상황인지 너도 잘 알잖아. 용진표는 더 이상 우리 아버지를 봐주지 않을 거라고.”강유형은 소파에 늘어져 앉아 다리를 탁자 위에 올렸다. 두 다리를 교차한 채로 널브러져 있었다. 셔츠 단추도 몇 개 풀어진 상태였다. 그야말로 태평한 모습이었다.“내가 언제 아버지 힘을 빌린 적이 있었나?”그는 입술을 살짝 내밀며 말했다.“형, 형은 늘 부모님이 나를 더 사랑하고 유산도 나한테 물려준다고 생각했겠지. 하지만 형이 모르는 게 있어. 내가 넘겨받은 건 용씨 가문에 다 털리고 껍데기만 남은 KS 그룹이었어. 내가 하나하나 다시 살을 붙이고 키워서 지금처럼 만들어낸 거야. 결국엔 용씨 가문을 내 발밑에서 기어다니게 만들었지.”강진혁의 길고 가는 눈이 안경 너머로 조소를 띠며 번뜩였다.“지금 그 말은 모든 걸 네 실력으로 해냈다고 자랑하는 거야? 부모님이 KS를 너한테 물려준 게 네가 나보다 더 유능해서라고 주장하
“아무 일도 아니야”안리영은 휴대폰을 끄며 말했다.저 말의 뜻은 대개 무슨 일이 있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말하고 싶지 않아 하는 것 같기에 나도 더 이상 묻지 않았다.아마 구안석과 관련된 일일 것이다.연이 끊겼어도 실처럼 미련이 남는 건 아주 흔한 일이다. 나도 강유형과 헤어진 지 꽤 되었고 이미 새로운 연애를 시작했지만 여전히 그와 완전히 끝맺지 못한 채 이리저리 얽히고 있었다. 사랑이 아니더라도 그 외의 다른 끈들이 남아 있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내가 임신한 사실을 김희연이 알게 되었고 그녀는 보양식을 한가득 들고 나를 찾아왔다.“참 잘됐다. 지원이도 이제 엄마가 되는구나.”“지원아, 병원은 아무래도 환경이 좋지 않고 먹는 것도 부실하잖니. 집으로 돌아가렴. 아줌마가 돌봐줄게.”...그녀의 얼굴은 기쁨과 감격으로 흘러넘쳤다. 내 아이가 강씨 가문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말이다.난 더 이상 그녀의 며느리가 아니게 되었지만 여전히 그녀가 키운 딸이나 마찬가지인 것에서 비롯된 기쁨이었다.비록 우리 부모님의 죽음에 강씨 가문의 책임이 있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지만 그래도 내가 강씨 가문에서 보낸 10년 동안 나를 누구보다 아끼고 사랑해 준 것만은 진심이었다. 그게 죄책감에서 비롯된 감정일지라도 나는 그 사랑을 절실히 느꼈고 실감하며 받아들였다.“아줌마, 삼촌도 돌보셔야 하잖아요. 저까지 돌보시면 너무 힘드실 거예요. 그리고 아무래도 병원에 있는 게 더 안전할 거예요. 무슨 일이 생기면 의사 선생님이 바로 달려올 수 있으니까요.”나는 조심스럽게 그녀의 제안을 거절했다.부모님의 죽음에 대한 원한 때문이 아니라 그녀의 두 아들과 나 사이의 미묘한 관계 때문이었다.강유형은 나를 향한 마음을 다 떨쳐내지 못했고 강진혁은 나를 노리는 듯한 눈빛을 감추지 못했다. 내가 다시 저 곳으로 들어간다는 건 그야말로 스스로 불길에 뛰어드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게다가 어떤 일들은 내려놓았다 해도 되돌릴 수 없는 지점에 다다르면
나는 오직 그녀만을 믿었다.“괜찮아. 초음파 사진 봤어. 아기는 아주 건강해.”안리영의 곱고 단정한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그저 그렇게 미묘하게 번진 웃음 하나가 내겐 믿음을 주는 보약처럼 느껴졌다.“리영아, 제발 이 아이만은 꼭 지킬 수 있게 도와줘.”나는 긴장과 초조함 속에서 그녀에게 매달리듯 말했다.“당연하지. 이건 너랑 정우 씨의 사랑의 결실이잖아.”안리영이 장난스럽게 받아쳤다.강유형은 고개를 돌렸다. 감춰지지 못한 외로움이 스쳐 지나갔다.그와의 관계에서 나는 이미 완전히 빠져나왔다. 그 역시 이별을 받아들였다고 하긴 했지만 아직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한 듯했다.안리영 덕분에 나는 병실에, 그것도 VIP 병실에 입원할 수 있었다. 그녀의 당직실이 아니라 정식 병실이었다.아랫배의 통증도 가라앉았고 출혈도 점점 잦아들었다. 마음이 조금 놓이자 문득 이런저런 생각이 들었다.“그 강 선생님이라는 사람, 갑자기 부임한 거라면서? 어떻게 된 일이야?”안리영은 반 박자쯤 쉬었다가 입을 열었다.“소희연의 고모인가 이모인가 그래.”이 말을 듣고 나는 바로 눈치를 챘다. 슬쩍 그녀의 표정을 살폈지만 전과 다를 건 없었다. 다만 얼굴이 조금 더 야위어 보였다.그녀는 구안석과 헤어졌다. 게다가 먼저 끝내자고 한 것도 그녀였다. 실망이 극에 달해 내린 결정이었지만 그래도 구안석은 그녀가 오랜 세월 마음을 품었던 사람이었다. 그 오랜 감정을 끊어낸다는 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나는 그 마음을 누구보다도 잘 알았다.그런 감정은 그 누구도 위로해 줄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위로하지 않았다. 그녀의 아픈 상처를 건드리지도 않았다. 그저 무심히 말했다.“강유형이 병원장한테 얘기할 것 같아.”“고자질할 만하면 해야지.”안리영은 자비로운 사람이 아니었다. 가만히 당해줄 호구도 아니었다.나는 웃음이 터졌다.“의사 선생님답네. 칼 쥐고 돈 받는 직업이라 그런가 마음도 차갑기 그지없군.”“남한테 괜히 마음 써봤자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히는 셈이나
“유산 조짐이 있습니다.”그 말을 듣자 나는 마치 환청이라도 들은 듯 얼이 빠졌다.‘유산이라니?’“의사 선생님, 저 임신한 거예요?”놀라움과 기쁨이 한꺼번에 몰려와 나는 의사의 가운을 붙잡았다.“몰랐어요?”의사도 당황한 얼굴이었다. 그러고는 곧 못마땅하다는 듯 한마디 덧붙였다.“요즘 젊은이들은 쾌락만 즐기고 책임질 생각을 전혀 안 한다니까요.”의사는 나와 강유형을 연인으로 착각하고는 설교를 퍼부었다.하지만 지금은 그걸 해명할 정신도, 그의 핀잔에 대응할 여유도 없었다. 나는 재차 물었다.“선생님, 저 정말 임신한 거 맞죠?”“네.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유산 조짐이 보여요. 아이를 지킬 수 있을지는 아직 몰라요.”의사의 말에 나는 그의 가운을 더 꽉 움켜쥐었다.“제발 부탁드릴게요. 아이를 지켜 주세요.”흥분에 겨워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떨렸다.요즘 들어 이유 없이 아이가 갖고 싶다는 생각이 자꾸 들었는데 내 마음을 알아차리고 이렇게 선물처럼 안겨 오다니 꿈만 같은 소식이었다.그런데도 나는 멍청하게 지금까지 아무것도 몰랐었고 그로 인해 아이를 놀라게 하고 말았다.형언할 수 없는 죄책감이 가슴 깊은 곳에서 밀려왔다. 나는 간절히 기도했다.‘아가야, 아무 일 없어야 해. 꼭...’“우선은 보태부터 시작할게요. 절대 안정을 취해야 합니다. 화장실을 가는 것과 식사 시간을 제외하고는 무조건 누워 있어야 해요. 일주일 정도 상태를 지켜본 후에 다시 판단할 겁니다. 계속 출혈이 있으면 아이는 지키기 힘들지도 몰라요.”의사는 이미 키보드를 두드리며 처방전을 작성하고 있었다.“선생님, 여기 병원에 입원해서 치료받을 수 있을까요?”나는 지금 몸을 함부로 움직이기 두려웠고 그저 병원 안에 머무르고 싶었다.이 병원엔 안리영이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산부인과 과장이기도 하다.지금은 또 수술에 들어갔는지 보이지 않았지만 그녀가 이 자리에 있었다면 내가 안정을 취할 수 있게 도와줬을 것이 분명했다.“지금은 남는 병상이 없어요. 일단 집에서 안정을
“이 난장판에 끼어들 생각은 없어요. 대단하신 지원 양이 알아서 해봐요.”함소은은 그렇게 말하며 용은서의 손을 잡아당겼다. “가자. 준호 오빠 지금 바쁜 거 안 보여? 너랑 놀아줄 틈 없어”“싫어요! 나랑 안 놀아줄 거면 저 언니를 내려놓으라고 해요! 언니가 나랑 놀아주면 되잖아요!”이 아이는 참으로 귀엽고 사랑스러웠다.“그래, 그럼 여기서 계속 붙잡고 있어. 난 먼저 간다.”함소은은 아이의 손을 놓고 안으로 들어가면서 용준호에게 한마디 던졌다.“이번엔 너한테 맡긴다. 제대로 잘 봐. 잃어버리기만 해봐, 아주 그냥.”그러고는 정말로 가버렸다. 그것도 엉덩이를 씰룩거리며 아주 태연하게 말이다.이 여자는 정말 대단했다. 아이는 그렇게 내버려둔 채로 신경도 안 쓰고 가버렸다.하긴 자신의 딸을 납치까지 했던 사람이니 용준호한테 애를 맡기는 건 별일도 아닐 게 분명했다.하지만 그녀의 행동이 내게는 도움이 됐다. 용은서가 용준호를 붙잡고 있는 덕분에 날 업고 도망가기는 어렵게 됐으니 말이다.함소은이 떠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강유형이 도착했다.코피는 이미 멈췄지만 낯빛은 아까보다 더 창백해져 있었다.“용준호, 윤지원 놓아줘. 아니면 오늘 나랑 끝을 보든지 해.”강유형은 단호하게 말했다.그는 용준호랑 한패도 아니었고 평소에 저렇게 거칠게 말하는 스타일도 아니었다.“코피도 아직 덜 닦았구먼 왜 또 여기서 영웅 행세야?”용준호가 빈정거리듯 말했다.“오빠 피도 아직 안 말랐거든.”용준호가 날 어깨에 짊어지고 있어 답답하긴 했지만 한마디는 해야겠다 싶었다.용준호는 내 말을 완전히 무시한 채 강유형을 바라보며 말했다.“강유형, 이 여자는 이미 딴 남자랑 잤어. 이제 너랑은 아무 관계 없는 여자라고. 이제 와서 뭘 어쩌겠다는 거야? 남이 쓰던 걸 다시 쓰고 싶냐고.”‘이 자식이 지금 날 뭐라고 한 거야? 지금 붙잡혀 있지 않았다면 당장이라도 주먹을 날렸을 텐데.’“내려놓으라고 했어. 헛소리는 그만하지?”강유형은 더 이상 말다툼할 가치도 없다
사람들이 나에게 시선을 던졌지만 모두 의혹 가득한 눈으로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채 멀찍이 서서 바라볼 뿐이었다.용준호는 그들을 향해 소리쳤다.“어느 새끼가 감히 널 구하려는지 두고 보자고!”그는 너무나도 오만방자했다.“오빠!”카랑카랑한 목소리에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듯했다.용준호가 걸음을 멈추었다. 뒤집힌 시야 속에서 만두 머리를 한 여자아이를 보았다.바로 용은서였다.내가 이 여자아이에게 도움을 청하기도 전에 용준호는 콧방귀를 뀌었다.“저리 썩 꺼져.”살벌한 목소리에 평범한 아이였다면 벌써 울음을 터뜨렸을 것이다.하지만 용은서는 그의 혈육이었고 평소에도 늘 호통에 익숙했는지 전혀 겁내지 않고 당당하게 물었다.“왜 사람을 업고 있어? 강도 같아!”대담한 발언이었다.“꺼지라니까.”용준호는 음을 길게 끌며 말했다.“사람 말을 못 알아듣나? 집에서 안 가르쳐줬어?”용은서는 눈을 흘기며 받아쳤다.“오빤 맨날 이렇게 화내. 무슨 폭탄이라도 먹었어?”용준호가 다시 호통을 치려는 순간 용은서가 재빨리 입을 열었다.“오빠, 나 할 말 있어.”용은서는 정말 사랑스러웠다. 내가 제대로 서 있기만 했어도 당장 품에 안아서 볼에 뽀뽀를 해주고 싶을 정도였다.하지만 용준호는 여전히 사나웠다.“꺼지라고 했지. 말 안 들으면 발로 차버린다.”혈육에게 말이 너무 지나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의 머리를 후려치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하지만 용은서는 조금도 주눅이 들지 않고 오히려 그의 바지 끝을 움켜잡으며 나를 바라보았다.“은서야, 언니 구해줘!”나는 목소리를 냈지만 어린아이에게 도움을 청한다는 것이 소꿉장난처럼 느껴져 부끄럽기 그지없었다.“윤지원,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어린애한테 도움을 청하다니. 부끄럽지도 않냐?” 용준호는 나에게도 으르렁댔다.지금의 그는 미친개처럼 닥치는 대로 물어뜯는 중이었다.“오빠, 왜 언니를 업고 있어? 다쳐서 걷지 못해?”용은서의 질문은 철없는 아이다운 순수함이 묻어났다.용준호의 인내심은 바닥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