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호흡이 점점 가빠진 채 얼어붙었다. 진정우는 말하지도 움직이지도 않았다. 시선은 나에게 단단히 고정되었다. 정확히는 나와 마주 보고 있었다.우리는 이대로 가만히 있었다. 먼저 피하지도, 혹은 더 가까이 다가가지도 않았다. 서로의 심장박동이 이토록 선명하게 느껴지는데도 말이다.이때 밖에서 이웃 아주머니의 목소리가 들렸다.“이 집 아가씨 남자친구 사람 참 좋아. 복도까지 깔끔하게 청소한 거 봐.”문뜩 정신을 차린 나는 진정우를 밀어내고 거실로 도망갔다. 심하게 당황스러웠다. 어쩔 바를 모를 정도로 말이다.뒤늦게 따라온 진정우는 아주 자연스럽게 입을 열었다.“여기 부모님 집이에요?”나는 약간 멈칫했다. 그가 어떻게 알았는지 궁금한 것도 잠시, 벽에 걸려 있는 사진을 발견했다.“팀장님 어릴 때랑 똑같이 생겼어요.”벽에는 내가 받았던 상장에 가족사진도 붙어 있었다. 교복 차림의 나는 부모님 사이에 서서 활짝 웃고 있었다. 지금 다시 보니 가슴이 아리기만 하는 미소였다.“학교 다닐 때 성적도 좋았나 봐요.”진정우는 또 내가 받았던 상장들을 바라봤다. 전부 학교에서 받은 것들이었다.“지금도 맡은 일은 잘하잖아요.”나는 당당하게 말했다. 그러자 진정우는 나를 바라보며 대답했다.“인정해요.”그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다시 이었다.“여러 가지 방면으로.”나는 감히 그를 바라보지도 못했다. 나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도, 입 밖으로 뱉은 말도 너무나 적나라했다.그와 엮이고 싶지 않았던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오늘 수고 했어요. 제가 밥 살게요. 밥부터 먹고 집 보러 갈까요?”처음 원하지 않던 데서, 이제는 내가 먼저 제안하게 되었다. 아까와 달리 지금은 빚진 게 있었기 때문이다.“좋아요. 그 전에 세수하고 싶은데, 혹시 수건 있어요?”나는 이제야 그의 얼굴에도 옷에도 먼지가 묻었다는 것을 인식했다.“그... 잠시만 기다려 줄래요? 옷부터 사 올게요.”이 근처에는 옷 살 수 있는 곳이 없었다. 하지만 멀지 않은 곳의 대형 마트에 가면 옷이
“혹시 물티슈 있어요?”진정우가 물었다.“아니면 다른 수건도 괜찮아요. 옷도 닦고 싶어서요.”그는 나의 수건을 들고 있었다. 그걸로 옷을 닦기는 아까웠던 모양이다.“일회용 수건 있어요. 그걸 적셔서 쓰면 되겠네요.”나는 일회용 수건을 뽑아줬다. 그는 멍한 얼굴로 잠시 바라보기만 했다. 처음 보는 신문물에 놀란 모습이었다.피식 웃은 나는 괜히 그를 놀리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설마 이게 뭔지 몰라요?”“네, 처음 봐요.”순순히 인정하는 모습도 귀여웠다.하긴, 연애 한번 한 적 없는 사람이 이런 건 알게 될 계기가 없었을 것이다. 유행하기 시작한 지도 얼마 안 됐고, 여자가 없으면 알기 어렵기 때문이다.“여자들이 세수할 때 쓰는 거예요. 깔끔하게 한 번 쓰고 버리도록요.”나는 일회용 수건을 물에 적셔서 건네줬다. 진정우는 고개를 숙여서 옷에 묻은 먼지를 닦기 시작했다. 등에도 먼지는 가득했다. 그래서 나도 자연스럽게 다른 수건을 들고 닦아줬다.내 손이 등에 닿은 순간 그의 몸은 눈에 띄게 굳었다. 하지만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계속해서 닦았다.그 순간 나는 진정우의 목덜미에 있는 점을 봤다. 머릿속에는 저도 모르게 그때의 꿈이 떠올랐다. 나를 등지고 있는 남자아이의 목덜미에도 점이 있었다.생각에 잠긴 나는 진정우가 불렀을 때에야 벌떡 정신 차렸다. 내가 들고 있던 수건이 그의 옷을 젹셔 가고 있었던 것이다.“그... 다 됐어요.”나는 그의 점을 바라보며 저도 모르게 물었다.“정우 씨, 목덜미에 점은 어릴 때부터 있었어요?”진정우는 손으로 점을 만지작대면서 말했다.“네.”나는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설마 꿈에서 본 사람이 진정우 씨는 아니겠지? 말도 안 돼. 현실에서 만나기도 전에 꿈에서 만날 리는 없지. 게다가 그냥 뒷모습이었잖아. 그래, 아닐 거야.’꿈은 환상일 뿐이다. 어떤 일도 일어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순간 나는 꿈과 현실이 결합한 듯한 묘한 기분이 들었다. 1분 전까지만 해도 모르는 사실이었는데 말이다.“
역시 뻔뻔한 사람을 이길 수는 없다.나를 향해 걸어오는 조나연을 보고 이런 생각이 문뜩 들었다.제대로 된 인간이라면 내연녀의 신분으로 이토록 당당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조나연은 당당하고도 남았다. 그녀는 자신이 대단한 존재라도 되는 듯이 으스댔다.“여기서 다 만나네요, 지원 씨. 밥 먹으러 왔어요?”조나연은 나와 말하면서 진정우를 힐끔댔다. 사실은 처음부터 진정우를 바라보며 걸어왔다.전정우는 원래도 시선이 가는 타입이니 할 말은 없다. 나이 많은 아주머니도 그를 힐끔거리기 마련이다. 조금 전 집에서도 그러지 않았는가?“안 그러면 구경하러 왔겠어요?”나는 차갑게 말했다. 내 성격이 못된 게 아니라, 그냥 그녀가 착한 척하는 게 꼴 보기 싫었다.만약 그녀가 당당하게 강유형을 좋아한다고 인정하면, 나는 흔쾌히 물러날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그러지 않았다. 일부러 내 신경을 거스르기만 했다.나의 말을 들은 그녀는 곧장 서러운 표정을 지었다. 강유형도 없는데 연기는 왜 하는지 모르겠다.‘혹시 이번 표적은 정우 씨인가?’세상에는 자기 주제를 모르는 사람이 꽤 된다.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세상 모두가 자신을 사랑한다고 착각하는 사람 말이다.조나연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과부 주제에 남자한테 잘 보이겠다고 가면을 쓴 모습이 퍽 우스웠다.‘쟤 강유형을 좋아하는 거 아니었어? 더 좋은 남자를 보면 바로 넘어갈 가벼운 마음이었나? 아니면 그냥 내 곁에 있는 남자라면 다 좋은 건가?’나와 진정우는 그런 사이가 아니었다. 그래도 나는 조나연이 치근덕대는 것이 싫었다. 그래서 피식 웃으며 말했다.“가서 임산부 세트나 먹어요. 여기 음식 꽤 건강하거든요. 나연 씨 같은 임산부한테 꼭 맞아요.”조나연의 안색은 순간 빨개졌다가 다시 창백해졌다. 그리고 속셈이 뻔히 보이는 표정으로 진정우를 힐끔댔다.“하.”나는 어이없는 웃음을 날렸다. 조나연이 이 꼴을 하고서도 진정우에게 잘 보이려고 하는 게 웃겼다.조나연이라면 유강후와 만나면서도 여러 남자
이럴 줄 알았으면 안 볼 걸 그랬다.내가 시선을 돌리려고 할 때 강유형이 문뜩 고개를 돌렸다. 그는 창문 유리를 통해 이쪽을 바라보며 미간을 찌푸렸다.나는 크게 신경 쓰지 않고 진정우를 바라봤다. 그는 마침 주문을 끝냈다. 들어보니 전부 내가 좋아하는 것이었다.나를 위해 주문했다기에는 불가능해 보였다. 그는 나를 이 정도로 잘 알고 있을 계기가 없었기 때문이다.궁금했던 나는 입을 달싹이며 머리를 들었다. 하지만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괜히 물어서 내가 그에게 신경 쓰고 있다는 인상을 주고 싶지 않았다.나는 그냥 다른 걸 물었다.“술 마실래요?”“아뇨, 오후에 할 일이 있어서요.”‘아, 맞다. 또 가서 집 봐야 하지.’나는 그가 집을 봐야 해서 술을 안 마시는 줄 알고 말했다.“괜찮아요. 집 볼 때도 제가 같이 있어 줄게요. 사기당할 일은 없어요.”“아니에요. 저...”그는 잠시 말을 멈췄다. 나는 그가 무슨 말을 할지 유심히 듣고 있었다.나와 시선을 마주친 그는 당당하게 마주 보며 말했다.“집은 알아서 고를게요.”나는 짧게 대답했다. 나도 귀찮던 참에 잘 됐다고 생각했다. 함께 본 집에 문제라도 있으면 나까지 책임을 지게 될 것 같았던 것도 있다.술을 안 마신다고 했으니 나는 음료수로 주문했다. 이때 식탁에 그림자가 드리우더니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일 바쁘다며? 여기서 밥 먹을 시간도 있어?”어디에서 개가 짖고 있었다. 조나연에게서 무슨 말을 들었는지 꽤 공격적이었다.그의 말을 들은 나는 뺨이라도 후려갈기고 싶었다. 일이 바쁘면 밥을 먹지 말아야 하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내가 마침 반격하려고 할 때 진정우가 대신 말했다.“오늘 쉬는 날이에요.”강유형은 차가운 눈빛으로 진정우를 바라보다가 다시 나에게 물었다.“누가 쉬어도 된다고 허락했지?”“제가 쉬자고 했어요.”진정우가 또다시 먼저 대답했다. 강유형의 안색은 더욱 어두워졌다.“일개 직원이 무슨 자격으로 휴식을 요구하죠? 채용됐으면 주어진 일이나 열심히
도망가고 싶었다. 어디든 가야 할 것만 같았다. 하지만 나는 그러지 못했다.내가 외면할수록 진정우는 더 이상하게 생각할 것이다. 그리고 그는 진작 할 말 못 할 말 직설적으로 하지 않았는가?나에게 그런 말을 하는 것이 그는 전혀 부끄러워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나도 애써 당당하게 말했다.“말로만요? 증명할 수 있어요?”“흠...”진정우는 물 한 모금 마시고 나서 대답했다.“할 수 있어요.”그의 대답을 들은 나는 되레 당황하며 말했다.“됐어요, 아무 말도 하지 마요.”결국 나의 참패다.“만약 증명이 필요하면 병원에 다녀올게요.”진정우는 담담하게 말했다. 참 생각을 많아지게 하는 말이었다.‘내가 뭐라고 증명하겠다는 거야? 참...’“그런 건 미래 와이프한테나 증명해요.”말을 마친 나는 황급히 화장실로 도망갔다. 그러나 코너를 돌자마자 누군가에게 팔이 잡혀서 억지로 멈춰 섰다. 냄새만으로 상대가 누구인지 알아차릴 수 있었다.강유형은 내 팔을 꽉 잡으며 말했다.“직원이랑 이런 데서 밥 먹는 건 좀 너무한 것 같지 않아?”그는 화난 표정이었다. 어쩐지 질투하는 것 같기도 했다. 나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왜? 여기 사장도 말이 없는데, 네가 뭐라고 멋대로 옳고 그름을 갈라?”“윤지원!”강유형은 눈을 부릅떴다.“남자가 아무리 고파도 제대로 된 걸 찾아야 할 거 아니야.”그는 처음부터 진정우를 깔보고 있었다. 동시에 나를 깔보는 것이기도 했다.“정우 씨는 고급 엔지니어에 명문대 출신으로 학벌까지 좋아. 너한테는 뭐가 있는데?”이건 오늘 아침 자료 조사를 통해 알게 된 것이다.내 질문에 강유형은 말을 잃었다. 그는 지위가 높기는 했지만 학벌이 그다지 좋지 않았다. 학벌이라면 강진혁보다도 못했다.하지만 그는 똑똑했다. 사업하기 딱 좋은 성격이라 가업을 물려받을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지금도 회사를 잘 이끌고 있다.누구나 잘하는 게 있고 못 하는 게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강유형은 과하게 오만했다. 그는 자신의 빛만 보이고 다른
강유형의 모습은 누가 봐도 질투하는 것이었다.정말 어이가 없었다. 과부와 썸 타면서도 나를 위해 질투한다니 말이다. 소유욕도 욕심도 어처구니없이 많았다.나는 화장실에 잠시 있다가 밖으로 나갔다. 그러다가 마침 조나연의 목소리를 들었다. 그녀는 아주 처량하게 말했다.“유형 씨 아직도 지원 씨 좋아하는 거지? 그런 거지?”“지원이는 내 약혼녀야.”강유형의 말은 내 추측을 검증하는 셈이었다. 그는 아직도 나에게 미련이 있었다.“근데 둘은 이미 헤어졌잖아.”조나연의 목소리는 아주 나른했다. 남자 하나 꼬시겠다고 목소리까지 조절하는 것은 꽤 대단했다.“헤어진다는 말은 나왔지만, 난 허락 안 했어. 그리고 지원이는 나랑 헤어지지 못해. 지금도 잠깐 화가 났을 뿐 풀리면 괜찮아 질 거야.”강유형이 이런 말을 할 줄은 나도 생각지 못했다. 그는 내가 헤어지자고 했던 말을 잠시 화내는 거로 생각했던 것이다.“남자들은 다 그래. 익숙한 건 소중한 줄 모르고 잃고 나서야 아쉬워하지.”조나연의 말에 강유형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조나연이 말을 이었다.“지원 씨랑 계속 만날 거면 나한테 왜 잘해줘? 나한테 잘해줘서 지원 씨가 오해한 거 몰라?”나는 호흡을 가다듬었다. 나도 궁금한 문제였다.오늘 이 대화를 듣기 전에, 나는 강유형과 조나연이 정말 서로를 사랑하는 줄 알았다. 하지만 서로 사랑하는 사이라면 강유형이 이런 식으로 말할 리는 없을 것 같았다.강유형은 여전히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저도 모르게 천천히 앞으로 걸어가서 몸을 숨겼다. 그곳에서는 마침 복도 끝의 거울에 비친 두 사람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어두운 안색으로 고개를 숙인 강유형은 발끝만 바라봤다.“지원 씨를 좋아한다면 왜 나랑 키스까지 했어?”조나연의 말을 듣고 나는 몸을 흠칫 떨었다.‘둘이 키스까지 한 거야?’나의 마음이 쿵 하고 울리더니 무언가 끊어져 나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유형 씨, 빨리 대답해!”조나연이 흥분해서 강유형의 옷을 잡아당겼다.“왜 나랑 키스했
나는 오후 3시부터 저녁 9시까지 술집에 있었다. 많이 마신 건 아니지만 그래도 꽤 오래 마셨다. 마지막쯤에는 몸에 힘이 풀리며 머릿속이 창백해졌다.술집 사장은 나와 아는 사이였다. 그래서 혼자 늦게까지 마셔도 사고가 생길 걱정은 없었다.“오늘 언제 가요? 데리러 올 사람은 있어요?”사장은 지 씨였다. 이름이 뭔지는 나도 모른다. 사람들은 그를 지 사장이라고 불렀다.지 사장은 50대 정도 되어 보였다. 만약 내 아버지 살아있었다면 비슷한 나이대였을 것이다.“지금 갈 거예요.”사실 나는 가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내일 또 할 일이 있는 관계로 빨리 돌아가서 쉬어야 했다.오늘 마신 술은 강유형과의 완전한 이별을 선고했다.내가 의자를 짚고 일어날 때 지 사장이 와서 막아섰다.“지원 씨 혼자 가는 건 걱정돼서 안 되겠어요. 사람 보내서 지원 씨 데려다주라고 할게요.”지 사장은 아주 세심한 사람이었다. 그래서인지 몇 년째 골목길에서 운영하는 이 술집은 장사가 아주 잘 되었다.이곳 손님 중 대부분이 단골이었다. 나는 학교 다닐 때부터 이곳을 알았다. 처음에는 강유형이 자신을 좋아하는 여자와 가까이 지내서 질투하는 마음에 온 것이었다.그날 술에 취해 기절한 나는 아침까지 술집에 있었다. 고요한 술집에는 나 혼자만 있었다. 당황한 표정으로 일어난 나한테 지 사장은 해장국을 건네줬다. 술 마시고 싶으면 다른 곳에 가지 말고 자신에게 오라며 말이다. 그는 다른 곳에서 나쁜 사람이라도 만나면 큰 일이라고 했다.그 이후 나는 기분이 안 좋을 때마다 이곳에 방문했다. 지 사장은 내가 고주망태가 되어도 말리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안전만 보장해 줄 뿐이다.지 사장에게는 딸이 있었다. 그의 딸은 17살쯤 되던 해 남자친구와 헤어지고 술을 마셨다가 나쁜 사람을 만났다. 후에는 정신적인 고통에 시달리다가 자살했다고 한다.그렇게 지 사장은 이 술집을 열어서 술의 위로가 필요한 여자들을 보호해 줬다.“좋아요.”나는 거절하지 않았다. 괜히 지 사장을 걱정시키고 싶지
나는 자전거를 안 탄 지 한참 된 것 같았다.“자전거 탈래요.”나는 한쪽에 있는 따릉이를 가리켰다. 강진혁이 먼저 큐알 코드를 스캔했고 나도 뒤따르려고 했다.이때 강진혁이 나를 말리며 말했다.“넌 술 마셨으니까 안 돼.”“자전거도 음주 운전에 속해요?”“그건...”강진혁은 내 팔을 잡았다. 강유형이 늘 그랬듯 아프게 잡은 것이 아닌 아주 살며시 잡았다.“술 마시고 자전거 타는 건 위험하잖아.”그는 정말 물같이 부드러운 사람이었다. 나는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오빠도 같이 있잖아요.”“자전거 타고 싶으면 다음에 같이 타자. 오늘은 내가 데려다줄게.”강진혁은 나를 자기 자전거의 뒷좌석에 앉혔다.“넘어지지 않게 꽉 잡아.”나는 그의 허리를 잡으며 대답했다.“네.”저녁 바람 속에서 자전거를 타는 소년이라... 이는 강진혁이 나에게 남겨준 추억이다. 강유형은 다르다. 그는 오토바이만 탔다.두 사람은 너무나도 달랐다. 분명히 형제인데도 성격이 정반대였다.“오늘 기분 안 좋을 일 있었어?”강진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아니요.”“유형이 때문에 그러지? 아직도 포기 못 했어?”강진혁이 또 물렀다.나는 콧방귀를 뀌며 그를 콕 찔렀다.“누가 포기 못 했다고 그래요? 진작 포기했거든요. 오늘부로 다시는 신경 쓰지 않을 거예요. 완전히 다른 길을 갈 거라고요.”강진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계속 앞으로 갈 뿐이었다.이때 무언가 떠오른 나는 말을 보탰다.“호텔에 데려다줘요. 내일 출근해야 해요.”“지원아.”강진혁이 갑자기 나를 불렀다.“왜 너한테는 유형이 밖에 안 보일까? 나도 여기 있는데, 왜 알아주지 않아?”나는 그의 옷을 더욱 꽉 잡았다. 심장은 쿵 하고 크게 울렸다.나도 바보가 아니다. 강진혁이 나를 좋아하는 건 진작 알고 있었다. 그저 인정하지 않았을 뿐이다.‘진짜 날 동생 이상으로 생각하고 있었구나.’“약혼했으니까, 사람들이 다 그래야 한다니까, 더 눈에 띌 수밖에 없죠.”“둘이 이제 헤어졌으면... 나
만약 강유형이 정말 이대로 다리를 잃게 된다면 내가 그에게 진 빚이 너무 클 것이다.하지만 그와 더 이상 복잡하게 얽히고 싶지 않았다. 그저 할 수 있는 한 그를 설득해 제대로 치료를 받게 하려는 것뿐이었다.“그렇게 심각하지 않아. 몇 번 더 치료받으면 괜찮아질 거야.”그는 창백한 얼굴로 힘없이 말했고 목소리조차 기운이 없어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다.그렇게까지 고집을 부리는 그를 더 설득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강유형이 나를 보며 희미하게 웃었다.“네가 돌아왔으니, 내 상처도 금방 나을 거야.”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의 의도를 모를 리 없었지만 그는 곧장 화제를 돌렸다.“신지태가 널 몇 번이나 찾았어. 내가 말리지 않았으면 실종 신고라도 했을걸?”나는 한동안 연락을 끊고 지냈다. 그동안 나를 걱정한 사람들이 많았을 거라는 건 알고 있었다.“지태 오빠 오늘 와?”나는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어갔다.“모르겠어. 네가 왔다고 하면 당장이라도 뛰어올걸?”그는 핸드폰을 집어 들며 신지태에게 연락하려 했다.그러나 팔을 움직이는 순간, 상처에서 뻐근한 통증이 밀려온 듯 그는 순간적으로 멈췄다. 나는 그의 감싼 팔을 조심스레 붙잡으며 말했다.“굳이 전화할 필요 없어. 내가 돌아왔으니, 곧 만나겠지.”그는 통증 때문인지, 혹은 다른 이유 때문인지 알 수 없었지 아무 말 없이 나를 바라보았다. “의사 불러줄까?”그는 살짝 고개를 저으며 입술을 적셨다.“물 좀 줘.”나는 컵을 건네주었고 그는 두어 모금 마신 후에야 얼굴이 조금 나아 보였다.“형은 너 보러 왔어?”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두 번 왔었어.”“어제 돌아오면서 우연히 마주쳤어.”“어디서?”“샤부샤부 집에서.”강유형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의 반응이 흥미로워 나는 살짝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나랑 참 인연이 깊은 것 같아.”그는 내 말을 단숨에 이해했는지, 얼굴이 점점 굳어졌다.“지원아, 하고 싶은 말이 뭐야? 돌려 말하지 말고 그냥 말해.”나는
“지원아, 돌아왔구나?”강진혁이 나를 보며 살짝 놀란 듯, 그리고 반가운 기색을 감추지 못한 채 말했다.“네, 오늘 막 도착했어요.”나는‘오늘’이라는 단어를 강조하며 대답했고 안리영도 자연스럽게 말을 받았다.“오자마자 이렇게 마주치는 거 보면 진짜 우연인가 보네요.”강진혁은 그녀의 말에서 숨은 의미를 느꼈는지, 위층을 가리키며 덤덤하게 말했다.“고등학교 친구들이 며칠 전부터 약속 잡고 여기서 모이기로 했어.”마침 누군가 그를 불렀다.“진혁아, 우리 먼저 갈게.”그는 멀리 있는 친구들에게 손짓하며 배웅한 뒤, 다시 우리를 바라보며 물었다.“더 필요한 거 있어? 주문할 거 있으면 내가 계산할게.”그의 말투는 자연스러웠지만 분명 의도적으로 챙기려는 느낌이 들었다.“이미 결제했어요.”안리영이 대신 대답했다. 그러자 강진혁은 다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지원아, 좀 쉬고 나면 집에 와서 밥 한 끼 하자. 부모님이 네 걱정을 많이 하셔.”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대답했다.“조만간 먼저 연락할게요. 그리고... 휴링턴에서 신세 많이 졌어요.”굳이 ‘휴링턴’을 언급한 이유는, 그의 반응을 살펴보기 위해서였지만 그는 별다른 표정 변화 없이 짧게 대답했다.“그래.”그는 안리영에게도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한 뒤 자리를 떠났다. 우리는 유리창 너머로 그가 차에 올라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그 순간, 안리영이 내 발을 슬쩍 건드리며 장난스럽게 물었다.“뭐야, 강진혁 아직도 너 못 잊은 거 아냐?”나는 시선을 다시 테이블로 돌리며 끓어오르는 국물 속에서 부글거리는 재료들을 바라보았다.“리영아, 나는 지금... 강진혁이 이 모든 일의 배후일 수도 있다고 생각해.”“뭐라고?”그녀는 놀라서 젓가락을 들던 손을 멈췄다. 나는 휴링턴에서 발견한 것들에 대해 조용히 이야기했다.“앞으로 내가 하는 일이 좀 이상하게 보일 수도 있어. 하지만 이해해 줘.”안리영은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이상하게 보인다니, 도대체 뭘 하려고?”나는 젓가락을 내려놓고
나는 의료 서적을 넘기며 한 장 한 장 읽어 내려갔다. 문외한인 내가 이런 책을 본다는 게 쉽지 않았지만 지난 한 달 동안 고요한 시간을 보내면서 마음이 차분해져서인지 의외로 집중이 잘 됐다. 어쩌면 이제야 비로소 내 마음이 가라앉았다는 증거일지도 몰랐다.얼마 후, 안리영이 수술을 마치고 돌아왔다. 문 앞에서 나를 보던 그녀는 몇 초간 멈춰 서 있더니, 아무 말 없이 다가와 나를 꼭 안아 주었다.“돌아왔네.”진정우의 일을 나는 오직 안리영에게만 이야기했다. 진정우를 어디에 묻었는지 아는 사람도 그녀뿐이었다.나는 그녀의 어깨에 기대며 익숙한 소독약 냄새를 맡았다.“나, 갑자기 훠궈가 먹고 싶어.”“좋지! 당장 가자!”그녀의 대답에는 묘하게 들뜬 기운이 섞여 있었다. 어쩌면 그녀도 내가 다시 일상으로 돌아온 게 반가웠던 걸지도 몰랐다.그래, 나도 이제 다시 살아가야 했다. 진정우는 떠났지만 나는 아직 해야 할 일이 많았다.식사를 하던 중, 문득 떠오른 듯 물었다.“강유형, 본 적 있어?”“그럼, 매일 보지. 악어한테 물린 이후로 계속 우리 병원에서 치료받고 있어.”그녀의 말에 나는 젓가락을 멈췄다.“벌써 한 달이 넘었잖아? 아직도 치료 중이야?”“응. 상처가 아물질 않아서 계속 곪고 있대. 이미 몇 번이나 괴사한 살을 도려냈다더라.”그 말을 듣는 순간, 강유형이 악어에게 물렸던 장면이 눈앞을 스쳤다.“그 정도로 심각했어?”“직접 가서 볼래?” 그녀가 조심스럽게 물었고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응. 나 때문이잖아.”안리영이 고기를 집어 내 그릇에 올려주며 말했다.“많이 먹어. 한 달 사이에 살이 너무 빠졌어.”“그래? 나 하루 세 끼 잘 챙겨 먹었는데.”나는 거짓말이 아니었다. 진정우 곁을 지키는 동안에도 먹고 자는 것만큼은 철저히 지켰다.“그럼... 마음고생 때문인가 보네.”그녀가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했다.나는 안리영을 보며 피식 웃었다.“넌 얼굴이 더 좋아진 것 같은데? 교수님이랑 잘 지내나 보네?”
나는 진정우를 고국으로, 그리고 우리가 함께 꿈꾸던 집으로 데려왔다.해가 지는 어느 저녁, 우리는 그가 노후를 함께 보내고 싶다던 그 땅에 그를 묻었다. 그렇게 하고도 쉽게 떠날 수 없어 나는 그의 곁에 꼬박 35일 동안, 단 하루도 빠짐없이 다녀왔다.어릴 적 어머니가 이야기하던 말이 떠올랐다. 사람이 세상을 떠난 후에도 영혼은 바로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가장 소중했던 사람 곁에서 머문다고. 흔히 말하는 35날이라는 기간 동안 말이다. 사실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었지만 나는 그것을 믿고 싶었다. 그가 홀로 떠나지 않도록, 마지막까지 함께 있어 주고 싶었다. 그의 영혼이 완전히 떠난 후에야 나도 떠날 수 있을 것 같았다.그동안 나는 세상과의 연락을 끊고 조용한 나날을 보냈다. 진소영이 그랬던 것처럼 책을 읽고 꽃을 따서 차를 우려 마시고 그림을 그렸고 그림 속에는 온통 진정우뿐이었다. 그를 그릴 때마다 떠오르는 것은 강진혁의 방에 빼곡히 걸려 있던 내 초상화들이었다.아침과 저녁이면 그의 곁에서 혼잣말을 하듯 이야기를 나눴다.“진정우, 오늘 밤 꿈에라도 와서, 그때 못다 한 말을 마저 해줄래?”“진정우, 네가 너무 보고 싶어. 너를 안아보고 싶은데 이제는 만질 수도 없잖아. 그런 공허한 아픔이 날 미치게 할 것 같아.”“진정우, 오늘 길에서 다친 작은 새를 주웠어. 어미는 보이지 않더라. 내가 잘 키울 수 있을까?”이런저런 이야기를 했지만 그의 대답을 들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가끔 얼굴을 스치는 바람이, 마치 마지막으로 내 얼굴을 쓰다듬던 그의 손길처럼 느껴졌다.그렇게 시간이 흘러 마침내 35번째 날, 나는 새로 딴 꽃을 들고 그의 곁을 찾았다.“진정우, 오늘이 네가 이 세상을 떠나는 마지막 날이야? 내일부터는 정말로 네가 없는 걸까? 나도 이제 돌아가야겠어.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고 마주해야 할 사람들을 만나야 해. 그리고...”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나는 결연한 목소리로 말했다.“널 함정에 빠뜨린 사람을 찾아야겠어.”그 순간, 바람
나는 무겁게 발을 떼며 앞으로 걸어갔다. 신지태가 나를 부축하며 문 앞까지 데려다주었지만 안으로 들어가기 전 이미 누군가가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그 사람의 품에는 검은색 상자가 안겨 있었고 그의 얼굴에는 깊은 슬픔과 혼란이 서려 있었다. 나는 그 상자를 보는 순간, 숨이 멎었다.신지태의 손에 힘이 들어가며 나를 더 단단히 부축했지만 그마저도 희미하게 느껴질 정도로 온몸의 감각이 무뎌졌다. 나는 다시 정신을 붙잡으려 애쓰며 힘겹게 발걸음을 옮기다가 문 안쪽, 등을 돌린 채 서 있는 용설아를 한눈에 그녀를 보았다.그녀의 표정은 보이지 않았지만 그저 등 뒤로 느껴지는 깊은 절망과 슬픔만으로도 충분히 모든 걸 알 수 있었다.그 순간, 발이 땅에 박힌 듯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다. 신지태도 함께 멈춰 섰고 우리 둘 다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잠시 후, 용설아는 천천히 몸을 돌렸고 그녀의 두 손 위에는 검은색 상자가 놓여 있었다. 나는 그대로 시야가 흐려지며 쓰러질 뻔했다.용설아는 내 앞까지 걸어와 조용히 말했다.“이건 진정우가 남긴 마지막 부탁이에요. 그가 원했던 대로, 지원 씨가 직접 그를 데려가 주세요. 두 분이 가장 좋아했던 그곳에 묻어달라고 했어요.”나는 그녀가 들고 있는 상자를 멍하니 바라보면서 지난 기억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그와 함께 걸었던 들판, 그가 나지막이 속삭였던 약속들 그리고 그곳에서 함께 살자고 했던 말.그러나 그는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한 채, 나에게 마지막 부탁을 남겼다.그를 그곳에 묻어달라는 마지막 부탁 말이다.‘이건, 나보고 죽으라는 말이야?’나는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상자를 노려보았다.“왜 나를 기다리지 않았어?”작은 상자 하나에 다 담길 리 없는 그를 떠올리며 나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왜... 기다려주지 않았어, 진정우?”“정우는 지원 씨가 그 순간을 직접 마주하지 않길 바랐거든요.”용설아의 차분한 목소리가 들려왔고 나는 힘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정우는... 이미 오래전부터 이
강유형과 신지태 오빠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그저 조용히 나를 바라볼 뿐이었다. 나는 멍하니 고개를 들고 그들을 바라보며 어리둥절하게 물었다.“둘 다 몰라?”나는 머릿속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으면서도 몸을 일으키려 애쓰며 말했다.“그럼 내가 직접 찾아갈게...”그 순간, 신지태가 미세하게 떨리는 손으로 나를 붙잡았고 나는 눈을 깜빡이며 그를 바라보았다.“왜 그래?”“지원아, 이제 받아들여야 해. 진정우는... 더 이상 없어.”강유형의 낮고 무거운 목소리가 들려오자, 나는 멍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알아... 나도 알아.”그러면서도 어설프게 웃으며 덧붙였다.“그래서, 그를 보러 가려고 해. 조용히 곁에 있고 싶어서.”그 순간, 신지태의 손끝에 힘이 들어가면서 살짝 아프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내 팔을 더 강하게 움켜잡았다. 나는 그를 올려다보며 조용히 말했다.“오빠, 너무 아파.”그의 목소리는 갈라져 있었다.“지원아... 진정우는... 없어. 더 이상 볼 수 없어.”그 말에 나는 얼어붙은 듯 멈춰 섰고 눈앞이 흔들렸지만 나는 애써 강하게 말했다.“아니, 난 볼 수 있어. 그러니까 가게 해 줘.”“지원아!”신지태가 단호하게 나를 불렀지만 나는 그의 손을 뿌리치려 하며 애타게 말했다.“제발, 가게 해 줘.”그 순간, 강유형이 낮고 단단한 목소리로 말을 끊었다.“볼 수 없어. 그는 이미... 화장됐어.”그 순간, 내 손이 허공에서 멈춰 섰고 나는 서서히 강유형을 바라보았다. 아무 말도 나오지 않고 온몸이 얼어붙은 듯 머릿속이 텅 빈 느낌이었다.“강유형.”신지태 오빠가 낮게 그의 이름을 부르면서도 여전히 내 어깨를 단단히 붙잡고 있었다.“지원아... 진정해.”나는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면서 그 말이 거짓이길 바랐다.“그 말, 거짓말이지...? 진정우... 진짜 아니지?”신지태 오빠의 눈이 더 붉어졌다.“지원아, 울고 싶으면 울어.”나는 울고 싶지 않았다. 아니, 나는 믿고 싶지 않았다. 눈앞이 흐려지면서 몸이 떨렸고
나는 다시 한번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려 했지만 용설아가 울컥하며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진정우!”그 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으며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진정우를 바라보았다.그의 눈꺼풀이 희미하게 감겼고, 긴 속눈썹은 더 이상 미동도 하지 않았으며 침대 밖으로 내려와 있던 손이 힘없이 축 늘어졌다.“진정우...”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불렀지만 그는 더 이상 대답하지 않았다.나는 믿을 수 없어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으며 그의 얼굴을 감싸 쥐었다.“진정우, 진정우... 아직 말 다 못했잖아. 계속해. 좀 더 말해줘...”그러나 내 목소리는 점점 작아졌고, 결국에는 말을 잇지 못했다. 나는 마지막 남은 힘을 쥐어짜듯 그의 얼굴을 애타게 쓰다듬고 코끝을 맞대고, 눈가를 스치고, 볼을 어루만졌다. 그리고 끝내 그의 입술을 조심스럽게 맞췄지만 아무리 닿아도,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이제 그는 더 이상 나를 보며 “지원아, 장난치지 마.”라고 말해주지 않았다.“정우야... 제발 날 버리지 마. 난 이제 너밖에 없어...”나는 끝내 외쳤다. 그러나 그 순간, 내 안의 모든 것이 무너져 내렸다.이 절망은 부모님을 잃었을 때보다도 더 깊고 아팠다. 어릴 적에는 '죽음'이라는 게 뭔지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을지도 모른지만 지금은 너무도 분명했다.이제 다시는 볼 수도, 만질 수도, 부를 수도 없는 사람이 되어버렸다는 걸.나는 필사적으로 그의 몸을 흔들며 울었지만, 그저 눈물만 그의 차가운 얼굴 위로 떨어질 뿐이었다.그렇게 내 정신은 서서히 희미해졌다. 눈을 떴을 때, 나는 차가운 병실 침대에 혼자 누워 있었다.아무것도 없는 텅 빈 공간, 그리고 창밖으로 쏟아지는 눈부신 햇빛.어젯밤의 어둠과 그 속에서 서서히 멀어져 가던 진정우의 얼굴.모든 순간들이 스치면서 몸이 경련하듯 떨려왔고 숨조차 쉬기 힘들 만큼 가슴이 너무 아팠다.“지원아, 괜찮아? 어디 아파?”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강유형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고 곧이어 신지태의 목소리도
“수술 실패라니, 그게 무슨 말이에요?”용설아 씨가 의사의 팔을 붙잡고 다급하게 물었다.나도 똑같은 질문을 하고 싶었지만 목이 막힌 듯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의사는 잠시 머뭇거리다 조용히 말했다.“안으로 들어가 보세요.”그 말만 남긴 채 그는 가려 했지만 용설아 씨는 여전히 그의 팔을 놓지 않았다.그때, 옆에 있던 간호사가 대신 설명했다. “환자의 후두부 뼈가 심각하게 손상되었습니다. 우리는 최대한 봉합을 시도했지만 뇌출혈이 멈추지 않고 있어요. 출혈 부위도 여러 군데라... 마음의 준비를 하시는 게 좋겠습니다.”그 순간, 용설아 씨의 손이 스르르 풀렸다. 마치 모든 힘이 빠져나간 듯, 그녀는 휘청거리면서도 애써 몸을 가누며 안으로 향했다. 그러다 문득 멈춰 서더니, 나를 돌아보면서 다가와 내 팔을 붙잡고 천천히 일으켰다. 그녀의 부축을 받으며 나는 힘겹게 발걸음을 옮겼다.병실 안은 눈이 부실 정도로 밝았다. 너무 밝아서 오히려 눈을 찌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침대 위에는 수술복을 덮고 누워 있는 진정우가 있었다. 그의 얼굴에는 산소 마스크가 씌워져 있었고 머리는 하얀 붕대에 감겨 있었다.나는 그를 마주하는 게 두려워 선뜻 다가가지 못했다.그때, 용설아가 조용히 말했다.“지원 씨, 지금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다 하세요. 안 그러면... 다시는 기회가 없을지도 몰라요.”그녀의 목소리는 가라앉아 있었지만 나는 그 말이 얼마나 큰 의미를 담고 있는지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용설아는 이미 현실을 받아들인 듯했다.그녀가 나를 데리고 침대 앞으로 다가가자, 나는 마침내 진정우의 얼굴을 또렷하게 바라볼 수 있었다.그는 눈을 감고 있었고 평소에 그가 잠들었을 때처럼, 조용하고 평온해 보지만 지금의 이 고요함은 나를 두렵게 했다.“정우야...”용설아가 그의 이름을 불렀지만 그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나는 그의 손을 잡을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때, 용설아 씨가 다시 말했다.“정우야, 정신 차려. 지원 씨가 왔어.”그 순간, 그
“정우는...”나는 입을 열었지만 정작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런데 용설아는 이미 내가 묻고 싶은 것을 아는 듯 조용히 입을 열었다.“지원 씨는 그가 군인이었다는 것만 알지, 어떤 임무를 수행했는지는 모르셨죠?”그녀는 잠시 숨을 고르고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그는 단순한 군인이 아니라 극비 특수 요원이었어요. 3년 동안 국제 작전에 투입되어 전 세계를 장악하려던 거대 조직을 무너뜨렸죠. 지금 우리가 상대하고 있는 브라운이나 헤르나는 그 조직의 잔당에 불과해요.”나는 순간 숨이 멎을 것 같았다.“정우는 임무를 마친 후 전역하고 평범한 삶을 살기로 했어요. 하지만 이번에 신지태 씨 사건을 통해 그 조직의 잔당이 다시 세력을 키우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죠. 게다가, 그 조직의 남은 자들이 복수를 다짐했다고 해요. 그는 그들이 얼마나 무서운 존재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어요. 그래서 그들은 직접 정우를 건드리기 어려우니, 결국 그의 주변 사람들을 노릴 거라고 확신했어요.”용설아는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그게 그가 지원 씨와 헤어진 이유예요. 그리고 그의 진짜 정체와 배경이죠.”나는 입을 열고 싶었지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내가 그에게서 전혀 알지 못했던 이야기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혹시... 설아 씨는 그와 함께 싸운 적이 있나요?”내가 어렵게 물었지만 정작 어떤 말부터 해야 할지 몰랐다. 그녀가 진정우에 대해 너무 잘 알고 있다는 게 신경 쓰였다.용설아는 살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저는 그와 함께 싸운 적 없어요. 우리의 관계도 모두 거짓이었어요. 그가 그렇게 한 것도, 결국 지원 씨를 지키기 위해서였죠.”그녀의 표정에는 씁쓸함이 묻어 있었다. 그녀는 다시 깊이 숨을 들이마신 후, 수술실 문을 바라보며 말했다.“그는 자신이 조사당할 걸 알고 있었어요. 그래서 지원 씨와 헤어졌어도 여전히 위험할 거라고 생각했죠. 그러다 보니 저와 약혼을 발표하고 사람들이 저와 함께 있다고 믿게 만들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