왠지는 모르겠지만, 놀이동산 일에도 아프지 않던 머리가 이제 와서 아프기 시작했다. 나는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저를 못 믿어요?”“아뇨, 그건 아니고...”나는 진정우를 바라봤다. 상의도 바지도 더러워져 있었다. 귀찮으니 수리 기사를 부르겠다는 말은 아무래도 나오지 않았다.“저 이거 할 수 있어요. 빨리 다녀와요.”그는 손을 뻗어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얼른요.”나는 머리가 핑 어지러웠다. 얼마 전 강진혁도 쓰다듬은 적 있지만, 그때와는 확연히 다른 느낌이었다.말로 이루 형용하지 못할 따듯하고 달콤한 기분이 들었다. 어딘가 시큼한 것이 갈망하게 되기도 했다. 오랫동안 잃었던 것을 다시 찾은 기분이었다.진정우의 눈빛을 더는 감당할 수 없었던 나는 머리도 돌리지 않고 도망갔다. 그가 요구한 물건을 사서 돌아왔을 때, 그는 걸레로 복도에 고인 물을 청소하고 있었다.집 안에 들어갔을 때는 물기 하나 없이 청소된 바닥이 보였다. 배수구가 고장 나기 전보다도 깨끗했다. 내가 물건을 구하는 동안에도 그는 쉬지 않았던 것이다.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멀쩡한 집을 바라보며, 나는 코끝이 시큰거렸다.“아래층에 가서 확인해 보니까 누수는 없어요. 배상할 걱정은 안 해도 될 것 같아요.”진정우가 말했다.그는 유능할 뿐만 아니라 세심하기까지 했다. 나는 목이 탁 막혔다. 말을 하고 싶었지만 잘 나오지 않았다.진정우는 다시 배수관을 수리하기 시작했고 나는 멀뚱멀뚱 지켜봤다. 그는 아주 능숙했다. 현장에서 일할 때와 똑같았다.문턱에 기대서 그를 바라보며 나는 무심코 물었다.“정우 씨는 못하는 게 뭐예요?”“저도 못하는 거 있어요.”그는 일하면서도 내 질문에 대답했다.“뭔데요?”그는 나를 힐끗 보며 말했다.“애 낳는 거요.”어쩐지 약간 다운되던 기분이 그의 말을 들은 순간 확 사라졌다. 나도 입꼬리를 올리며 그의 장난을 받아쳤다.“그건 낳을 수 있는 사람을 찾으면 되는 거네요.”“그 정도는 할 수 있겠죠.”지나치게 무덤덤한 태도 때문일까?
나는 호흡이 점점 가빠진 채 얼어붙었다. 진정우는 말하지도 움직이지도 않았다. 시선은 나에게 단단히 고정되었다. 정확히는 나와 마주 보고 있었다.우리는 이대로 가만히 있었다. 먼저 피하지도, 혹은 더 가까이 다가가지도 않았다. 서로의 심장박동이 이토록 선명하게 느껴지는데도 말이다.이때 밖에서 이웃 아주머니의 목소리가 들렸다.“이 집 아가씨 남자친구 사람 참 좋아. 복도까지 깔끔하게 청소한 거 봐.”문뜩 정신을 차린 나는 진정우를 밀어내고 거실로 도망갔다. 심하게 당황스러웠다. 어쩔 바를 모를 정도로 말이다.뒤늦게 따라온 진정우는 아주 자연스럽게 입을 열었다.“여기 부모님 집이에요?”나는 약간 멈칫했다. 그가 어떻게 알았는지 궁금한 것도 잠시, 벽에 걸려 있는 사진을 발견했다.“팀장님 어릴 때랑 똑같이 생겼어요.”벽에는 내가 받았던 상장에 가족사진도 붙어 있었다. 교복 차림의 나는 부모님 사이에 서서 활짝 웃고 있었다. 지금 다시 보니 가슴이 아리기만 하는 미소였다.“학교 다닐 때 성적도 좋았나 봐요.”진정우는 또 내가 받았던 상장들을 바라봤다. 전부 학교에서 받은 것들이었다.“지금도 맡은 일은 잘하잖아요.”나는 당당하게 말했다. 그러자 진정우는 나를 바라보며 대답했다.“인정해요.”그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다시 이었다.“여러 가지 방면으로.”나는 감히 그를 바라보지도 못했다. 나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도, 입 밖으로 뱉은 말도 너무나 적나라했다.그와 엮이고 싶지 않았던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오늘 수고 했어요. 제가 밥 살게요. 밥부터 먹고 집 보러 갈까요?”처음 원하지 않던 데서, 이제는 내가 먼저 제안하게 되었다. 아까와 달리 지금은 빚진 게 있었기 때문이다.“좋아요. 그 전에 세수하고 싶은데, 혹시 수건 있어요?”나는 이제야 그의 얼굴에도 옷에도 먼지가 묻었다는 것을 인식했다.“그... 잠시만 기다려 줄래요? 옷부터 사 올게요.”이 근처에는 옷 살 수 있는 곳이 없었다. 하지만 멀지 않은 곳의 대형 마트에 가면 옷이
“혹시 물티슈 있어요?”진정우가 물었다.“아니면 다른 수건도 괜찮아요. 옷도 닦고 싶어서요.”그는 나의 수건을 들고 있었다. 그걸로 옷을 닦기는 아까웠던 모양이다.“일회용 수건 있어요. 그걸 적셔서 쓰면 되겠네요.”나는 일회용 수건을 뽑아줬다. 그는 멍한 얼굴로 잠시 바라보기만 했다. 처음 보는 신문물에 놀란 모습이었다.피식 웃은 나는 괜히 그를 놀리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설마 이게 뭔지 몰라요?”“네, 처음 봐요.”순순히 인정하는 모습도 귀여웠다.하긴, 연애 한번 한 적 없는 사람이 이런 건 알게 될 계기가 없었을 것이다. 유행하기 시작한 지도 얼마 안 됐고, 여자가 없으면 알기 어렵기 때문이다.“여자들이 세수할 때 쓰는 거예요. 깔끔하게 한 번 쓰고 버리도록요.”나는 일회용 수건을 물에 적셔서 건네줬다. 진정우는 고개를 숙여서 옷에 묻은 먼지를 닦기 시작했다. 등에도 먼지는 가득했다. 그래서 나도 자연스럽게 다른 수건을 들고 닦아줬다.내 손이 등에 닿은 순간 그의 몸은 눈에 띄게 굳었다. 하지만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계속해서 닦았다.그 순간 나는 진정우의 목덜미에 있는 점을 봤다. 머릿속에는 저도 모르게 그때의 꿈이 떠올랐다. 나를 등지고 있는 남자아이의 목덜미에도 점이 있었다.생각에 잠긴 나는 진정우가 불렀을 때에야 벌떡 정신 차렸다. 내가 들고 있던 수건이 그의 옷을 젹셔 가고 있었던 것이다.“그... 다 됐어요.”나는 그의 점을 바라보며 저도 모르게 물었다.“정우 씨, 목덜미에 점은 어릴 때부터 있었어요?”진정우는 손으로 점을 만지작대면서 말했다.“네.”나는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설마 꿈에서 본 사람이 진정우 씨는 아니겠지? 말도 안 돼. 현실에서 만나기도 전에 꿈에서 만날 리는 없지. 게다가 그냥 뒷모습이었잖아. 그래, 아닐 거야.’꿈은 환상일 뿐이다. 어떤 일도 일어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순간 나는 꿈과 현실이 결합한 듯한 묘한 기분이 들었다. 1분 전까지만 해도 모르는 사실이었는데 말이다.“
역시 뻔뻔한 사람을 이길 수는 없다.나를 향해 걸어오는 조나연을 보고 이런 생각이 문뜩 들었다.제대로 된 인간이라면 내연녀의 신분으로 이토록 당당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조나연은 당당하고도 남았다. 그녀는 자신이 대단한 존재라도 되는 듯이 으스댔다.“여기서 다 만나네요, 지원 씨. 밥 먹으러 왔어요?”조나연은 나와 말하면서 진정우를 힐끔댔다. 사실은 처음부터 진정우를 바라보며 걸어왔다.전정우는 원래도 시선이 가는 타입이니 할 말은 없다. 나이 많은 아주머니도 그를 힐끔거리기 마련이다. 조금 전 집에서도 그러지 않았는가?“안 그러면 구경하러 왔겠어요?”나는 차갑게 말했다. 내 성격이 못된 게 아니라, 그냥 그녀가 착한 척하는 게 꼴 보기 싫었다.만약 그녀가 당당하게 강유형을 좋아한다고 인정하면, 나는 흔쾌히 물러날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그러지 않았다. 일부러 내 신경을 거스르기만 했다.나의 말을 들은 그녀는 곧장 서러운 표정을 지었다. 강유형도 없는데 연기는 왜 하는지 모르겠다.‘혹시 이번 표적은 정우 씨인가?’세상에는 자기 주제를 모르는 사람이 꽤 된다.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세상 모두가 자신을 사랑한다고 착각하는 사람 말이다.조나연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과부 주제에 남자한테 잘 보이겠다고 가면을 쓴 모습이 퍽 우스웠다.‘쟤 강유형을 좋아하는 거 아니었어? 더 좋은 남자를 보면 바로 넘어갈 가벼운 마음이었나? 아니면 그냥 내 곁에 있는 남자라면 다 좋은 건가?’나와 진정우는 그런 사이가 아니었다. 그래도 나는 조나연이 치근덕대는 것이 싫었다. 그래서 피식 웃으며 말했다.“가서 임산부 세트나 먹어요. 여기 음식 꽤 건강하거든요. 나연 씨 같은 임산부한테 꼭 맞아요.”조나연의 안색은 순간 빨개졌다가 다시 창백해졌다. 그리고 속셈이 뻔히 보이는 표정으로 진정우를 힐끔댔다.“하.”나는 어이없는 웃음을 날렸다. 조나연이 이 꼴을 하고서도 진정우에게 잘 보이려고 하는 게 웃겼다.조나연이라면 유강후와 만나면서도 여러 남자
이럴 줄 알았으면 안 볼 걸 그랬다.내가 시선을 돌리려고 할 때 강유형이 문뜩 고개를 돌렸다. 그는 창문 유리를 통해 이쪽을 바라보며 미간을 찌푸렸다.나는 크게 신경 쓰지 않고 진정우를 바라봤다. 그는 마침 주문을 끝냈다. 들어보니 전부 내가 좋아하는 것이었다.나를 위해 주문했다기에는 불가능해 보였다. 그는 나를 이 정도로 잘 알고 있을 계기가 없었기 때문이다.궁금했던 나는 입을 달싹이며 머리를 들었다. 하지만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괜히 물어서 내가 그에게 신경 쓰고 있다는 인상을 주고 싶지 않았다.나는 그냥 다른 걸 물었다.“술 마실래요?”“아뇨, 오후에 할 일이 있어서요.”‘아, 맞다. 또 가서 집 봐야 하지.’나는 그가 집을 봐야 해서 술을 안 마시는 줄 알고 말했다.“괜찮아요. 집 볼 때도 제가 같이 있어 줄게요. 사기당할 일은 없어요.”“아니에요. 저...”그는 잠시 말을 멈췄다. 나는 그가 무슨 말을 할지 유심히 듣고 있었다.나와 시선을 마주친 그는 당당하게 마주 보며 말했다.“집은 알아서 고를게요.”나는 짧게 대답했다. 나도 귀찮던 참에 잘 됐다고 생각했다. 함께 본 집에 문제라도 있으면 나까지 책임을 지게 될 것 같았던 것도 있다.술을 안 마신다고 했으니 나는 음료수로 주문했다. 이때 식탁에 그림자가 드리우더니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일 바쁘다며? 여기서 밥 먹을 시간도 있어?”어디에서 개가 짖고 있었다. 조나연에게서 무슨 말을 들었는지 꽤 공격적이었다.그의 말을 들은 나는 뺨이라도 후려갈기고 싶었다. 일이 바쁘면 밥을 먹지 말아야 하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내가 마침 반격하려고 할 때 진정우가 대신 말했다.“오늘 쉬는 날이에요.”강유형은 차가운 눈빛으로 진정우를 바라보다가 다시 나에게 물었다.“누가 쉬어도 된다고 허락했지?”“제가 쉬자고 했어요.”진정우가 또다시 먼저 대답했다. 강유형의 안색은 더욱 어두워졌다.“일개 직원이 무슨 자격으로 휴식을 요구하죠? 채용됐으면 주어진 일이나 열심히
도망가고 싶었다. 어디든 가야 할 것만 같았다. 하지만 나는 그러지 못했다.내가 외면할수록 진정우는 더 이상하게 생각할 것이다. 그리고 그는 진작 할 말 못 할 말 직설적으로 하지 않았는가?나에게 그런 말을 하는 것이 그는 전혀 부끄러워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나도 애써 당당하게 말했다.“말로만요? 증명할 수 있어요?”“흠...”진정우는 물 한 모금 마시고 나서 대답했다.“할 수 있어요.”그의 대답을 들은 나는 되레 당황하며 말했다.“됐어요, 아무 말도 하지 마요.”결국 나의 참패다.“만약 증명이 필요하면 병원에 다녀올게요.”진정우는 담담하게 말했다. 참 생각을 많아지게 하는 말이었다.‘내가 뭐라고 증명하겠다는 거야? 참...’“그런 건 미래 와이프한테나 증명해요.”말을 마친 나는 황급히 화장실로 도망갔다. 그러나 코너를 돌자마자 누군가에게 팔이 잡혀서 억지로 멈춰 섰다. 냄새만으로 상대가 누구인지 알아차릴 수 있었다.강유형은 내 팔을 꽉 잡으며 말했다.“직원이랑 이런 데서 밥 먹는 건 좀 너무한 것 같지 않아?”그는 화난 표정이었다. 어쩐지 질투하는 것 같기도 했다. 나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왜? 여기 사장도 말이 없는데, 네가 뭐라고 멋대로 옳고 그름을 갈라?”“윤지원!”강유형은 눈을 부릅떴다.“남자가 아무리 고파도 제대로 된 걸 찾아야 할 거 아니야.”그는 처음부터 진정우를 깔보고 있었다. 동시에 나를 깔보는 것이기도 했다.“정우 씨는 고급 엔지니어에 명문대 출신으로 학벌까지 좋아. 너한테는 뭐가 있는데?”이건 오늘 아침 자료 조사를 통해 알게 된 것이다.내 질문에 강유형은 말을 잃었다. 그는 지위가 높기는 했지만 학벌이 그다지 좋지 않았다. 학벌이라면 강진혁보다도 못했다.하지만 그는 똑똑했다. 사업하기 딱 좋은 성격이라 가업을 물려받을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지금도 회사를 잘 이끌고 있다.누구나 잘하는 게 있고 못 하는 게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강유형은 과하게 오만했다. 그는 자신의 빛만 보이고 다른
강유형의 모습은 누가 봐도 질투하는 것이었다.정말 어이가 없었다. 과부와 썸 타면서도 나를 위해 질투한다니 말이다. 소유욕도 욕심도 어처구니없이 많았다.나는 화장실에 잠시 있다가 밖으로 나갔다. 그러다가 마침 조나연의 목소리를 들었다. 그녀는 아주 처량하게 말했다.“유형 씨 아직도 지원 씨 좋아하는 거지? 그런 거지?”“지원이는 내 약혼녀야.”강유형의 말은 내 추측을 검증하는 셈이었다. 그는 아직도 나에게 미련이 있었다.“근데 둘은 이미 헤어졌잖아.”조나연의 목소리는 아주 나른했다. 남자 하나 꼬시겠다고 목소리까지 조절하는 것은 꽤 대단했다.“헤어진다는 말은 나왔지만, 난 허락 안 했어. 그리고 지원이는 나랑 헤어지지 못해. 지금도 잠깐 화가 났을 뿐 풀리면 괜찮아 질 거야.”강유형이 이런 말을 할 줄은 나도 생각지 못했다. 그는 내가 헤어지자고 했던 말을 잠시 화내는 거로 생각했던 것이다.“남자들은 다 그래. 익숙한 건 소중한 줄 모르고 잃고 나서야 아쉬워하지.”조나연의 말에 강유형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조나연이 말을 이었다.“지원 씨랑 계속 만날 거면 나한테 왜 잘해줘? 나한테 잘해줘서 지원 씨가 오해한 거 몰라?”나는 호흡을 가다듬었다. 나도 궁금한 문제였다.오늘 이 대화를 듣기 전에, 나는 강유형과 조나연이 정말 서로를 사랑하는 줄 알았다. 하지만 서로 사랑하는 사이라면 강유형이 이런 식으로 말할 리는 없을 것 같았다.강유형은 여전히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저도 모르게 천천히 앞으로 걸어가서 몸을 숨겼다. 그곳에서는 마침 복도 끝의 거울에 비친 두 사람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어두운 안색으로 고개를 숙인 강유형은 발끝만 바라봤다.“지원 씨를 좋아한다면 왜 나랑 키스까지 했어?”조나연의 말을 듣고 나는 몸을 흠칫 떨었다.‘둘이 키스까지 한 거야?’나의 마음이 쿵 하고 울리더니 무언가 끊어져 나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유형 씨, 빨리 대답해!”조나연이 흥분해서 강유형의 옷을 잡아당겼다.“왜 나랑 키스했
나는 오후 3시부터 저녁 9시까지 술집에 있었다. 많이 마신 건 아니지만 그래도 꽤 오래 마셨다. 마지막쯤에는 몸에 힘이 풀리며 머릿속이 창백해졌다.술집 사장은 나와 아는 사이였다. 그래서 혼자 늦게까지 마셔도 사고가 생길 걱정은 없었다.“오늘 언제 가요? 데리러 올 사람은 있어요?”사장은 지 씨였다. 이름이 뭔지는 나도 모른다. 사람들은 그를 지 사장이라고 불렀다.지 사장은 50대 정도 되어 보였다. 만약 내 아버지 살아있었다면 비슷한 나이대였을 것이다.“지금 갈 거예요.”사실 나는 가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내일 또 할 일이 있는 관계로 빨리 돌아가서 쉬어야 했다.오늘 마신 술은 강유형과의 완전한 이별을 선고했다.내가 의자를 짚고 일어날 때 지 사장이 와서 막아섰다.“지원 씨 혼자 가는 건 걱정돼서 안 되겠어요. 사람 보내서 지원 씨 데려다주라고 할게요.”지 사장은 아주 세심한 사람이었다. 그래서인지 몇 년째 골목길에서 운영하는 이 술집은 장사가 아주 잘 되었다.이곳 손님 중 대부분이 단골이었다. 나는 학교 다닐 때부터 이곳을 알았다. 처음에는 강유형이 자신을 좋아하는 여자와 가까이 지내서 질투하는 마음에 온 것이었다.그날 술에 취해 기절한 나는 아침까지 술집에 있었다. 고요한 술집에는 나 혼자만 있었다. 당황한 표정으로 일어난 나한테 지 사장은 해장국을 건네줬다. 술 마시고 싶으면 다른 곳에 가지 말고 자신에게 오라며 말이다. 그는 다른 곳에서 나쁜 사람이라도 만나면 큰 일이라고 했다.그 이후 나는 기분이 안 좋을 때마다 이곳에 방문했다. 지 사장은 내가 고주망태가 되어도 말리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안전만 보장해 줄 뿐이다.지 사장에게는 딸이 있었다. 그의 딸은 17살쯤 되던 해 남자친구와 헤어지고 술을 마셨다가 나쁜 사람을 만났다. 후에는 정신적인 고통에 시달리다가 자살했다고 한다.그렇게 지 사장은 이 술집을 열어서 술의 위로가 필요한 여자들을 보호해 줬다.“좋아요.”나는 거절하지 않았다. 괜히 지 사장을 걱정시키고 싶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