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Chapter 91 - Chapter 100

303 Chapters

제91화

성유정은 이날을 위해 특별히 춤까지 연습하며 만반의 준비를 했는데 모두 망가져 버렸다.성유리 때문에!성유리가 가면을 쓰고 평소와 전혀 다른 복장을 하고 있었는데도 성유정은 단번에 그녀를 알아봤다.그 순간 성유정은 정말 달려가서 성유리의 가면을 벗기고 그대로 그녀를 바닥에 내동댕이치고 싶었다!하지만 그녀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그러면 오랜 시간 공들여 쌓아온 이미지가 무너질 것 같았다.성유정은 그냥 서서 이를 악물고 지켜보기만 했을 뿐 그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그 상황에서 성유정은 문득 14살 나던 해 성유리가 성씨 집안으로 돌아온다는 소식을 들었던 때를 떠올렸다.지난 10년 동안 성씨 집안에서 사랑받으며 컸고 그런 날이 앞으로도 계속될 줄 알았는데 갑자기 성유리가 돌아왔다.성유리가 진짜 성씨 집안의 딸이었고 자신이 소유한 모든 건 응당 그녀의 몫이어야 했다.아니면 그들이 자신을 쫓아낼 수도 있었기에 성유정은 절대 그렇게 내버려둘 수 없었다.그래서 성씨 집안 내외에게 더 잘 보이려고 노력하기 시작했고 성유리와 그들 사이의 틈새를 발견하고 그걸 빌미로 온갖 일들을 꾸며대기 시작했다.성유리 앞에서는 일부러 자신이 그들과 얼마나 다정한지 보여주고 성씨 집안 내외 앞에서는 성유리보다 더 세심하고 상냥하게 행동했다.10년 동안 그들과 함께 지냈기 때문에 성유리보다 그들의 생활 습관을 더 잘 알았고 이 바닥에서 또래인 사람들도 다 그녀의 친구들이었다.그녀는 완전히 성씨 집안 아가씨의 자리를 대체하고 있었다.하지만 박씨 집안에서 두 집안의 결혼 이야기를 꺼내자 김서영은 단번에 박한빈과 결혼할 사람은 성씨 집안의 친딸이어야 한다고 대놓고 말했고 그때 성유정은 깊은 무력감만 느꼈다.아무리 노력해도 진실은 바꿀 수 없는 느낌.그리고 지금 성유정은 또다시 그런 느낌을 받았다.성유리는 너무 쉽게... 모든 사람의 관심을 빼앗고 자신이 가장 원했던 것을 가져갔다.하지만 성유정은 문득 자신이 잘하는 건 성유리가 개의치 않는 것들뿐이며 성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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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2화

“6시 방향, 저기 서 있는 사람 보이지?”진무혁이 물었다.춤사위 때문에 두 사람의 몸은 서로 바짝 붙어 있었고 성유리는 오랜만에 이렇게 재미있게 놀아본 터라 이미 호흡이 다소 흐트러진 채 가면 아래로 코끝에 땀방울이 맺혀 있었다.진무혁이 그렇게 묻자 그녀도 바로 고개를 돌렸다.“네, 그래서요?”“해조그룹 임 대표 아들인데 요즘 너한테 관심이 많으니까 내가 나중에 소개해 주면 잠깐 같이 춤이라도 춰볼래?”성유리가 피식 웃었다.“내가 왜요?”“내가 요즘 쟤 아버지랑 같이 일하려고 하거든.”진무혁은 성유리에게 숨기지 않고 직설적으로 말했다.“이번에 네가 날 도와준다면 판권 제작할 때 네 지분도 넣어줄게. 드라마가 대박 나면 배당금이 쏠쏠할 거야.”성유리는 여전히 미소를 지으며 진무혁의 말에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진무혁 역시 그녀의 반응에 놀라지 않고 계속 말을 이어 나갔다.“물론 돈은 너에게 큰 유혹이 아닐 수도 있지만 네가 버틸 힘이 되어주잖아?”성유리는 진무혁의 말에 더 이상 반박하지 않고 몇 초간 진지하게 고민하던 그녀가 물었다.“도와달라는 게 저 사람이랑 춤추라는 거였어요?”“물론 아니지.”진무혁이 웃었다.“지금 해조그룹이 상승세를 타고 있어서 저녁에 기회를 노리고 임정우에게 빌붙으려는 사람들이 꽤 많을 텐데 혹시라도 네가 그 사람과 춤을 추게 된다면 나에 대해 좋은 말을 해 줄 수 있잖아?”“나랑 아는 사이도 아닌데 몇 마디 한다고 그 사람이 들을까요?”“응, 그러면서 다음번에 나와 저쪽 아버지가 따로 만날 식사 약속을 잡아.”진무혁은 자연스럽게 자신이 원하는 바를 말했고 아주 직설적으로 저녁 약속을 성사해야만 이 거래가 성사된 것으로 간주하겠다는 뜻을 전달했다.성유리는 잠시 침묵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진무혁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그리고 이때 두 사람의 춤도 끝이 났다.성유리는 진무혁의 손을 놓았고 혼자서 몇 바퀴를 돈 후 마무리까지 완벽하게 소화했다.파티장에는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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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3화

“이봐요, 먼저 온 사람이 우선 아닌가요?”임정우가 고개를 돌려 웃는 얼굴로 물었지만 박한빈은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말했다.“알죠, 하지만 선택은 이 숙녀분이 하셔야 할 것 같아요.”그의 말은 상대를 말문이 막히게 했고 박한빈도 더 이상 임정우에게 눈길을 주지 않은 채 성유리만 올곧게 쳐다보았다.늘 호수처럼 잔잔하던 그 눈동자가 지금은 무언가를 억누르는 듯 요동치며 흐르는 게 보였다.성유리는 저도 모르게 옆으로 드리운 손을 꽉 말아쥐었다.잠시 후, 그녀는 갑자기 피식 웃더니 임정우의 손바닥 위에 손을 올려놓으며 그의 초대에 응했다.박한빈의 눈동자가 빛을 잃어갔고 내밀었던 손도 꽉 움켜쥐었다.그가 다시 성유리를 바라봤을 때 성유리는 이미 남자를 따라 돌아선 뒤였다.박한빈은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이를 조금 더 악물었다.그때 진무혁이 다가왔다.“박 대표님.”박한빈은 무표정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오늘 참석하실 줄은 몰랐는데요.” 진무혁이 웃으며 말했다.“아직 축하 인사를 못 드렸네요. G국에서 협상 아주 잘 끝냈다고 들었어요.”“감사합니다.”박한빈은 형식적인 예의도 갖추지 않은 채 대충 답했고 시종일관 고개를 돌려 진무혁을 쳐다보지도 않았다.“박 대표님께서는 오늘 성유리 때문에 오신 건가요?”진무혁이 덧붙이자 박한빈은 그제야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죠?”“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냥... 박 대표님하고 성유리가 이혼한 게 안타까워서요. 참 매력적인 여자 아닌가요?”말하며 진무혁의 시선도 다시 성유리에게 향했다.이때 이미 성유리와 임정우의 춤은 반쯤 진행된 상태였고 두 사람의 동작은 친밀하지는 않았지만 호흡이 아주 잘 맞아 서로 밀고 당기며 사람들의 시선을 끌기에는 충분했다.“왜요, 좋아해요?”진무혁의 시선을 따라가던 박한빈이 다그치듯 물었다.“저런 여자를 싫어할 사람은 없겠죠.” “아, 그런데 진 대표님은 지난번 교통사고 이후 몸이 불편하다고 들었는데 그런 상황에서 누구에게 행복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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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4화

성유리와 임정우의 협상은 순조롭게 진행됐다.노래가 끝나도 그들은 무대에서 내려오지 않고 두 번째 춤을 추기 시작했다.“아직도 그쪽 이름을 모르네요?”임정우가 참지 못하고 묻자 성유리는 눈썹을 치켜올렸다.“가면무도회인데 이름을 주고받을 필요는 없지 않나요?”“그런데 그쪽은 날 알잖아요. 그건 나한테 불공평한 것 아닌가?”“여기서 임정우 씨를 아는 사람은 많죠. 그렇게 유명하시니까 어쩔 수 없는 거죠.”성유리의 목소리에는 약간의 무력감이 묻어났지만 임정우는 전혀 화를 내지 않고 이렇게 말했다.“그럼 오늘 밤이 지나면 그쪽이랑 식사 한 번도 같이 할 기회가 없다는 말 아닌가요?”“아뇨, 기회는 있어요.” 성유리는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그쪽은 아버님과 함께, 전 진 대표와 같이 만나서 식사하면 더 좋지 않아요?”“그러니까 결국엔 진무혁 부하직원이다? 비서인가? 아니면 비서 실장? 그것도 아니면 회사 소속 연예인?”임정우는 하나하나 추측을 해보았지만 성유리는 대답하지 않고 이렇게 되묻기만 했다.“그럼 식사하는 건 동의하세요?”“그쪽이 온다면 난 무조건 동의죠.”“좋아요.”성유리는 흔쾌히 동의했고 한참을 쳐다보던 임정우가 말했다.“나한테 거짓말하는 거 아니죠? 미리 말하는데 나 오늘 당신 제대로 기억했어요. 진무혁이 다른 사람을 대신 데려오면 한눈에 알아볼 수 있다고요.”성유리는 미소만 지었다.“뭐에요, 나 못 믿어요?”“믿어요.”성유리는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임정우 씨 관심은 감사하네요. 걱정하지 마세요. 간다고 했으면 전 꼭 갈 거니까. 알아보는 건 임정우 씨 눈썰미에 달렸죠.”“그렇게 말하니까 정체가 점점 더 궁금해지네요.”임정우가 말하며 앞으로 나아가는 스텝을 빌미로 성유리에게 성큼 다가갔다.성유리가 깜짝 놀라 뒤로 물러서려는 순간 갑자기 옆에 있던 누군가가 다가와 임정우의 발등을 밟았다.“누구야!”임정우는 순간 화가 나서 고개를 들었지만 그의 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위에 매달려 있던 크리스털 조명이 깜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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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5화

그제야 성유리는 무언가를 알아차린 듯 계속해서 걷어차려던 다리를 거두었다.그의 가면은 여전히 얼굴에 제대로 붙어 있었고 시리도록 차가운 두 눈은 성유리를 갈기갈기 찢어버릴 것 같았다.“당... 당신 왜 날 여기로 데려왔어요?”성유리는 한참 동안 그와 두 눈을 마주하고 있다가 말을 꺼냈다.“왜, 즐거운 시간 방해해서 싫어?”박한빈의 얼굴은 점점 더 험악해졌고 그의 손은 성유리의 턱을 꽉 쥐었다.아까 춤추자는 제안을 거절당한 것과 조금 전 차였던 발길질에 대한 복수심이 차오른 듯 성유리의 뼈를 분질러 버리려는 듯한 힘이었다.성유리가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찡그리며 그의 손을 뿌리치려는데 박한빈이 그녀의 두 손을 낚아챈 뒤 무릎을 위로 들어 그녀의 두 다리 사이를 파고들었다.“성유리 씨 인기가 참 많네.”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사교계의 꽃이 될 자질이 있는 줄은 몰랐는데?”과거 그녀는 늘 얌전하고 조용했으며 딱 어떠한 순간에만 그토록 유혹적인 모습을 드러냈었고 박한빈은 그런 모습을 자신만이 볼 수 있다고 생각했었다.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은 것 같았다.박한빈은 마치 속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아니, 속았다기보다... 자신을 갖고 노는 것 같았다.박한빈의 말에 성유리의 표정은 눈에 띄게 달라졌지만 이내 다시 웃으며 말했다.“박 대표님 눈에는 누가 다른 사람과 춤 두 번 추면 사교계의 꽃이 되나 봐요?”“물론 다른 사람들은 그렇지 않겠지만 넌 신분이 다르잖아. 다른 남자한테 그렇게 웃는 건 이상하다고 생각 안 해?”“내 신분은 뭐가 다른데요?”성유리는 무의식적으로 되물었다가 말을 뱉는 동시에 무언가 떠올라 천천히 그를 바라보았다.“무슨 뜻이에요?”박한빈은 대답하지 않고 눈을 가늘게 뜬 채 그녀를 바라보기만 했다.이 반응은 그녀의 생각이 맞다는 걸 말해주고 있었다.신분이 뭐가 다른데? 결국 다른 사람에게 험한 짓 당할뻔했다는 거잖아.지석민이 잡혀간 후 성유리는 그녀가 조심하지 않아 이런 일을 당했다는 그들의 말을 들은 적이 있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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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6화

“뭐 하는 거예요?”성유리는 처음엔 당황하다가 몸부림치기 시작했다.“이거 놔요! 박한빈 씨, 이거 놓으라고!”쉬지 않고 발을 버둥거리자 하이힐이 벗겨졌고 카펫이 깔린 호텔 복도에는 신발이 떨어져도 소리조차 나지 않았다.엘리베이터에 들어가고 나서야 그는 성유리를 내려놓았다.하지만 이내 성유리를 구석으로 몰아 가둬놓고 그녀가 가려고 하자 단번에 턱을 그러쥐고 입을 맞췄다.그는 성유리가 망설이거나 저항할 틈도 주지 않았고 입술을 대자마자 잇새를 가르고 혀끝을 밀어 넣었다.거침없이 헤집는 움직임에 성유리는 숨이 막혔지만 두 손마저 그에게 잡혀 있어 밀어낼 기회조차 없었다.이윽고 박한빈의 무릎이 재빨리 그녀의 치마 속을 파고들었다.누구보다 성유리의 몸에 익숙했던 그의 거친 움직임은 성유리를 마치 도마 위에 올려진 물고기가 된 듯한 느낌이 들게 했다.눈을 훤히 뜬 채 칼날이 떨어지면서 그녀의 살갗이 벗겨지고 뼈가 부러지는 것을 지켜보았다.성유리를 더욱 굴욕적으로 만든 것은 이 와중에도 그녀의 몸이 반응한다는 사실이었다.그녀는 저도 모르게 몸이 흠칫 떨리며 허리 쪽에 힘이 풀렸다.당연히 이 반응을 박한빈도 감지하고 피식 웃음을 터뜨리나 싶더니 그녀의 목을 움켜쥐고 있던 손이 아래로 내려갔다.성유리의 어깨끈이 그의 손에 의해 내려가고 엘리베이터로 전해오는 에어컨 바람이 목선 사이로 파고들어 성유리의 몸은 더욱 떨렸다.하지만 그녀는 더 이상 몸부림치지 않고 눈을 감은 채 가만히 서 있었다.띵-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 문이 갑자기 열리며 재빨리 반응한 박한빈이 문이 열리는 순간 재킷을 벗어 성유리의 몸을 덮은 뒤 그녀를 자신의 품 안으로 끌어당겼다.그 본인은 아직 가면을 쓰고 있었다.문밖에 있던 사람들은 이 모습을 보고 조금 놀랐지만 박한빈은 그들이 반응을 보이거나 자세히 볼 틈도 주지 않고 곧바로 손을 뻗어 버튼을 눌렀다.엘리베이터 문이 다시 닫힐 때까지 성유리는 내내 움직이지 않고 그의 품에 바짝 붙어 있었고 그 얌전한 모습이 박한빈은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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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7화

그녀는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나쁜 놈.” 성유리가 이를 악물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자 그녀의 목을 물어뜯으려던 남자는 그 말에 잠시 움직임을 멈췄다.이윽고 시선을 들어보니 성유리의 립스틱은 다 번져 있었고 흘리는 눈물로 아이라인도 살짝 번져 있었으며 머리는 헝클어져 볼품없는 상태가 되어있었다.속눈썹에 맺힌 그녀의 눈물을 보는 순간 박한빈의 심장이 철렁하며 곧 천천히 움직임을 늦추더니 팔로 그녀의 뒤통수를 감싸고 그대로 키스했다.전보다 한결 부드럽고 다정한 키스에 성유리도 아까처럼 거부감을 느끼지 않는 듯했다.그녀가 고통스러워하는 것을 보면 박한빈도 기분이 좋지 않았다.성유리의 태도가 한풀 꺾이는 듯해 보이자 박한빈도 이성을 되찾았다.하지만 박한빈이 제대로 말하려는 순간, 성유리가 갑자기 입을 벌리고 그의 입술을 세게 콱 깨물었다!...“대표님.”벌써 하루가 지났고, 서훈은 말하면서도 이따금 시선이 그의 입술로 향했다.박한빈의 뺨에 남은 손바닥 자국도 눈에 띄었지만 입술에 남은 피멍보다는 아니었다.단순한 손바닥 자국이었으면 사람들이 박씨 집안에 내부 갈등이라도 있는 건 아닌지 의심했겠지만 입술에 남긴 흔적이라면 말이 달라진다.이 두 가지 흔적을 동시에 남길만한 사람은 여자밖에 없었다.하지만 박한빈은 이혼한 지 두 달이 다 되어가는데 이런 흔적을 남길 사람이... 누가 있을까?“무슨 일이야?”박한빈의 목소리가 들리자 서훈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답했다.“사모님께서 오셨어요.”“무슨 일로 왔대?”“대표님께 전해줄 게 있다고 응접실에서 기다리고 계세요.”“만날 시간 없어. 난...”“뭐가 바빠서 날 볼 시간도 없어?”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오자 박한빈의 이마가 찡그려졌다.서훈은 황급히 뒤를 돌아보았다.“사모님, 대표님께서...”“얼굴이 왜 그래?”김서영은 이내 그의 몰골을 보고는 눈빛이 어두워졌다.“너 연애하니?”“아니요.”“그럼 얼굴에 난 상처는 어떻게 된 거야?”“실수로 부딪혔어요.”박한빈은 무심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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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8화

날이 어두워지고 밖은 이미 불이 켜져 있었다. 화려한 네온사인과 저녁 러시아워의 붉은 불빛이 어우러져 번잡하고 차가운 이 도시를 대표하는 하나의 모습을 만들어냈다.지화그룹 건물은 도시 한가운데 자리 잡고 있었고 천장부터 바닥까지 내려오는 통유리창은 액자처럼 사람들이 감상할 수 있도록 이 모든 것을 담고 있었다.박한빈은 그 자리에 서서 무표정하게 바라보고만 있었다.라이터를 손에 쥐고 거듭 스위치를 누를 때마다 파란 불꽃이 튀어나왔다가 사그라들었다.한번 또 한 번...박한빈은 이젠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별로 없었다.지금 떠오르는 건 그저 웃지 않던 얼굴과 자신에게 엄격했던 모습,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기 몸조차 가누지 못하고 병상에 누워 있던 모습뿐이었다.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박한빈은 겨우 열두 살이었다.부자의 유대감은 별로 없었지만 그의 기억 속에서 그는 적어도 평범한 아버지였고 어머니와는 그래도 사랑하는 사이였다.그게 아니고서야 어머니는 왜 그렇게 오랫동안 그의 곁을 지켰을까.처음 그에게 성유리와 결혼하라고 한 것도 아버지의 유언에 따르기 위해서였다.하지만 지금은 모든 것이 무너지고 그는 자신이 거짓말투성이인 세상 속에서 살아온 것 같았다.마지막으로 라이터 스위치를 똑딱이던 박한빈은 라이터를 책상 쪽으로 던지고는 뒤돌아 걸어 나갔다.오 기사는 이미 아래층에서 기다리고 있었다.그는 박한빈이 나오는 것을 보자마자 정중하게 다가갔지만 박한빈은 눈길도 주지 않고 곧장 운전석으로 향했다.오 기사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박한빈은 이미 액셀을 밟았고 곧바로 시월 파크에 도착했다.하지만 박한빈이 안으로 들어서자 칠흑 같은 공허함만이 그를 반길 뿐이었다.불을 켜고 보니 성유리가 없을 뿐만 아니라 집안까지 깨끗하게 치워져 있었다.어젯밤 성유리가 자신을 물었기에 그는 쉽게 그녀를 놓아주지 않았고 마지막은 욕실에서 끝냈다.박한빈은 성유리가 울면서 고개를 흔들며 놓아달라고 애원하면서도 그의 요구대로 숱한 말들을 뱉었던 게 선명하게 떠올랐다.적어도 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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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9화

박한빈은 높은 자리에 있으면서 수많은 유혹을 받아왔고 눈앞에 있는 여자는 그중에서도 가장 하수였다.그래서 그는 그녀를 쳐다보지도 않고 바로 성유리에게 전화를 걸었다.신호음은 들리는데 받는 사람이 없자 박한빈의 얼굴이 점점 더 어둡게 일그러졌다.그의 뒤에 서 있던 여자는 무시하는 그의 태도에 조금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하지만 박한빈의 차와 한눈에 봐도 돈이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그의 옷을 보며 여자는 결국 용기를 내어 앞으로 다가갔다.“성유리 씨랑은 무슨 관계예요? 친구? 근데 지금 그쪽 전화 받을 시간이 있겠어요? 이 시간까지 집에 안 들어왔다는 건 남자랑 데이트하러 간 것 같은데? 미리 알려주는데 그 여자 보이는 것만큼 그렇게 단순하지 않아요. 뒤에서 얼마나 방탕하게 노는데, 내가 아침에 글쎄...”여자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박한빈의 시선이 이쪽으로 향했고 차갑고 매서운 눈빛은 마치 보이지 않는 손으로 여자의 목을 조르는 것 같아 그녀는 뒷말을 그대로 삼켜버렸다.그녀도 나름 많은 사람을 만나봤다고 자부하며 지독하게 싸우는 양아치들도 본 적이 있지만 눈빛 하나로 이토록 강한 위압감을 느낀 건 처음이었다.마치 그녀가 한 마디만 더하면 그가 정말로 죽일 것 같았다!박한빈은 그녀를 힐끗 쳐다보고는 시선을 거둔 뒤 곧바로 열쇠 전문 업체에 전화를 걸었다.기사가 와서 집주인이나 임대인인 걸 증명할 서류를 보여줘야 문을 열 수 있지만 그가 도착하고 박한빈은 별말 없이 지니고 있던 모든 현금을 던져준 뒤 덤덤하게 담배에 불을 붙였다.“열어.”기사는 이곳의 집 몇 채나 살 수 있는 그의 시계를 슬쩍 보고는 얼른 돈을 받고 문을 열었다.지난번에 성유리에게 잠금장치를 바꾸라고 충고했는데 그녀는 듣지 않은 것 같았다.느슨해진 열쇠 구멍은 기사가 별 힘을 들이지 않고도 열 수 있었고 박한빈의 성의가 있으니 특별히 도어락으로 바꿔주기까지 했다.박한빈은 내내 아무 말도 없었고 그가 일을 마치자 곧바로 문을 열고 들어가더니 그대로 닫아버렸다.문밖에 있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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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0화

박한빈은 휴대폰 화면을 먼저 흘깃 쳐다본 뒤 이렇게 물었다.“어디 갔었어?”성유리는 입술을 달싹였다.“왜 멋대로 열쇠를 바꿔요?”“대답부터 해.”박한빈은 표정이 좋지 않았다.성유리는 그와 끝까지 따지고 들려다 한참을 그와 눈을 마주친 뒤 마침내 말을 꺼냈다.“병원에요.”박한빈의 표정이 살짝 변하며 그의 시선이 그녀를 훑어보았다.성유리는 그의 눈빛을 알아채지 못하고 말을 이어갔다.“오늘 오후에 엄마가 깨어났다고 하던데 내가 갔을 때는 다시 잠들어 있어서 다시 깨어나면 볼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계속 기다렸어요.”나지막한 성유리의 목소리엔 실망감이 담겨 있었다.얼음장 같던 박한빈의 표정이 조금 풀리더니 이내 다른 생각이 떠올랐다.“그럼 전화는 왜 안 받아?”“무음으로 해놔서 못 봤어요.”말을 마친 성유리가 물었다.“이제 들어가도 돼요?”그제야 박한빈은 몸을 옆으로 돌려 성유리가 들어갈 수 있는 공간을 만들었다.성유리는 허리를 굽혀 신발을 갈아 신은 뒤 들고 있던 에코백을 내려놓고는 다시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그래서 당신은 여기서 뭐 하는 건데요?”박한빈도 모른다.그저 시월 파크에 혼자 있기 싫고 도연제로 돌아가고 싶지도 않아 한참을 차를 몰고 달리다 보니 어느새 이곳에 도착해 있었다.“나 배고파.” 박한빈이 갑자기 말했다.“네?”“뭐 좀 먹고 싶어.”그 말과 함께 박한빈은 식탁 바로 옆에 있는 의자를 꺼내 앉았다.비좁은 성유리 집에 고작 60센티미터 남짓한 식탁 앞에 앉으니 그는 다리조차 제대로 뻗을 수 없었다.하지만 그는 불편한 기색이 없었고 성유리가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자 고개를 들어 그녀를 쳐다봤다.왜 아직도 먹을 것을 준비해 주지 않냐고 다그치는 눈빛이었다.성유리는 도우미가 음식을 다 준비해 주는 도연제로 돌아가라고 말하려 했지만 이쯤 되니 너무 피곤해서 더 이상 그와 다툴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그녀는 휴대폰을 꺼냈다.“뭐 먹고 싶어요? 배달시킬게요.”“배달 얼마나 걸리는데? 난 지금 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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