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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 Chapters of 사랑의 덫에 빠진 운명: Chapter 121 - Chapter 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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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1화

어렵게 맞이한 휴일이었지만, 시연은 여전히 바빴다. 이미 맡아둔 번역 원고는 모두 마무리했고, 오늘은 편집장을 만나러 가야 했다. ‘그리고, 이제 이 아르바이트도 그만둬야겠어.’ 이제 은범의 마음을 확실히 알게 된 이상, 시연은 은범의 마음을 끊어내기 위해 더 이상 그의 호의를 받을 수 없었다. ‘게다가, 곧 시험 준비도 해야 하고, 양 교수님 쪽 일까지 맡으면 더 바빠질 테니까.’ 편집장은 아쉬워했고, 시연이 찾아간 임진아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진아가 신경 쓰는 부분은 좀 달랐다. “노은범 쪽은, 진짜로 아무 희망도 없는 거야?” 이 일에 대해, 진성빈이 진작에 진아에게 말해주었다. 그제야 진아도 알게 되었다. 바로 은범이 지난 몇 년간 전혀 행복하지 않았다는 걸. 시연은 가만히 눈을 감았다가, 단호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 사람 집안에서 날 받아줄 리 없어. 똑같은 아픔을 이미 한 번 겪었어. 두 번 겪고 싶진 않아.”이 말의 무게를 진아만큼 잘 아는 사람도 없었다. 그 시절, 시연이 어떻게 버텨냈는지 곁에서 지켜본 사람이 바로 진아였다. “그래, 우리 일에 집중하자. 장래의 지시연 교수님!” “헤헤, 좋아!” 하지만, 지금 공부가 우선이기 전에 해결해야 할 큰 문제가 있었다. 바로 시연의 배 속의 아이... 여러 번 고민하고 또 고민한 끝에, 시연은 결정을 내렸다. ‘이 아이는 지우자. 아이에게 미안함은 있지만, 이대로 남겨두는 게 꼭 좋은 일일까?’ ‘건강할지 아닐지도 모르고, 아버지는 아예 존재하지 않으니까.’ ‘아마 이 아이도, 세상에 태어나길 원하지 않을지도 몰라.’ 지금의 상황은 유건이 강제로 임신중절수술을 강요하던 그때와는 달랐다. 이번에는 시연이 스스로 결정한 것이었다. 병원도 직접 알아보고, 사전 예약도 마쳤다. 오늘은 우선 검사를 받아야 하고 검사 결과는 당일 안에 바로 나온다. 시연은 진료실 앞 긴 의자에 앉아 결과를 기다렸다. 그 시각, 병원 복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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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2화

시연이 고개를 들었는데, 정말 유건이었다. 그녀는 두 눈에 의문을 가득 담은 채 남자를 바라봤다. ‘이 사람이 왜 여기 있어?’ 유건은 주변을 둘러보더니,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그 사람 어디 있어?” ‘응?’ 시연은 더욱 당황했다. ‘그 사람? 누굴 말하는 거지?’ 주변을 살폈지만, 자신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유건의 심장은 더 격렬하게 타올랐다. “이런 일에 노은범은 안 따라왔어?” ‘아...’ 시연은 순간적으로 깨달았다. 유건은 시연이 임신한 아이가 은범의 아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저기요, 내 말 좀 들어봐요...” “뭘 듣는데?” 유건은 이미 화가 머리끝까지 난 상태였다. 시연이 무슨 말을 하든, 그의 신경을 자극할 뿐이었다. “노은범이 싫어해서 그래? 우주처럼 될까 봐? 그래서 네 몸 상태도 무시하고 억지로 지우라고 한 거야?” “아니에요...” “아니, 뭐가 아니야?” 시연은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주저했다.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하지만... 이건 내가 스스로 결정했어요.” “확실해?” 유건은 단 한 마디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지우면, 넌 평생 다시는 엄마가 되지 못할 수도 있어.” 유건의 시선이 시연의 아랫배로 향했다. “만약, 이 아이가 건강하고 똑똑한 아이라면?” 시연의 온몸이 굳어버렸다. ‘...어떻게 알았지? 검사 결과는 오늘 오후에 나왔을 텐데...’ 시연이 얼어붙은 사이, 유건은 그녀의 손을 붙잡고 밖으로 향했다. “집으로 가자.” ...차 안, 시연은 창문에 비친 남자의 얼굴을 바라봤다. ‘힘들게 내린 결정이었는데... 이 사람이 막으러 올 줄은 몰랐어.’ ‘이번에 못 하면, 다음엔 용기를 낼 수 있을까?’ ‘내 배도 점점 불러올 거고, 그때가 되면 더 이상 포기할 수도 없을 텐데...’ 본가에 도착한 후, 시연은 차에서 내리자마자 문을 닫았다. 그런데, 유건은 아무 말도 없이 차를 돌려 떠나버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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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3화

이달 근무도 얼마 남지 않았다. ‘할아버지의 수술을 내가 있는 동안 확실히 마무리해야 해.’ 그렇게 결심한 시연은 곧장 양석현 교수에게 부탁했고, 다행히도 그는 흔쾌히 허락해 주었다.“고맙습니다, 교수님.” 기쁜 마음으로 본가로 돌아온 시연은 이 소식을 고상훈에게 알렸다. 마침 유건도 집에 있었다. 그는 고상훈과 바둑을 두고 있었는데, 알고 보니 고상훈이 일부러 전화를 걸어 손자를 일찍 불러들였다고 했다. 시연의 말을 들은 고상훈이 말했다. “할아버지, 시연이가 수술 준비 다 해뒀어요. 최대한 이른 날짜로 정하죠.” “굳이 서두를 필요는 없지.” 고상훈은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그때,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고, 이호민이 팔에 뭔가를 한가득 안고 들어왔다. 마치 화보 같기도 하고, 잡지 같기도 한 책자들을 탁자 위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어르신, 여기 있습니다.” 그러고는 유건과 시연을 한 번씩 쓱 바라봤다. “두 분이 잘 살펴보세요.” ‘두 분...?’‘뭐지?’ 둘은 서로를 마주보며 어리둥절했다. 고상훈은 빙긋이 웃으며 설명했다. “여기 웨딩드레스 스타일이랑 결혼식 장소 후보들이 있으니까 둘이 잘 골라봐.” 그러더니, 손짓하며 덧붙였다. “특히 시연이가 원하는 걸로 고르면 돼. 유건이, 넌 옆에서 잘 도와주고.” 한 마디 한 마디, 시연은 다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런데 할아버지가 하신 말씀의 뜻은...’ 그녀는 유건을 바라봤다. 유건 역시 같은 표정이었다. 1초, 2초... “할아버지.” 유건이 눈썹을 찌푸리며 깊이 숨을 들이쉬었다. “혹시... 저희 결혼식을 치르시겠다는 말씀인가요?” “당연하지!” 고상훈이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이미 다 정해진 일이잖아. 새삼스럽게 물어볼 게 뭐 있어?” 그는 시연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너희 둘, 혼인 신고한 지도 꽤 됐는데, 내 건강 때문에 결혼식을 미뤘잖아. 그동안 시연이 맘고생 많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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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4화

유건이 아침부터 사무실에 들어서자마자 전화가 울렸다. 전화기 화면에 뜬 발신자의 이름은 바로 ‘장소미’였다. 유건은 가볍게 눈썹을 찌푸렸지만, 곧바로 전화를 받았다. [유건 씨.] 소미의 목소리는 한껏 나긋했다. “우리 엄마가 오늘 저녁에 집으로 초대하고 싶대요. 시간 괜찮으세요?”거절당할까 봐, 그녀는 재빨리 덧붙였다. “사실 오늘이 엄마 생신이에요. 유건 씨가 와주면 엄청나게 좋아하실 거예요. 응? 와줄 거죠?” 유건은 핸드폰을 쥔 손에 살짝 힘을 주었다. “...알겠어. 갈게.” ...저녁, 장소미의 집. “엄마, 진짜 괜찮을까?” 긴장한 소미가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물었다. 장미리는 그런 딸을 힐끗 보더니, 한숨을 쉬었다. “이런 것도 못 참고 이렇게 조바심 내서 어쩌려고? 그렇게 정신없어서야 나중에 고씨 가문의 사모님 소리나 듣겠어?” “알았어요...” 소미는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그러더니, 테이블 위에 놓인 향로를 가리키며 조용히 물었다. “엄마, 근데 이거... 정말 효과 있어?” 그녀가 말한 것은 장미리가 직접 구해온 특제 향이었다. 장미리가 이걸 구하기 위해 돈도 꽤 들였고, 여러 사람을 통해 어렵게 손에 넣었다. 장미리는 입가에 자신만만한 미소를 띠었다. “걱정하지 마. 이건 옛날에 궁에서 전해 내려오던 비법이야. 몸에 해롭지도 않고, 서양 약보다 훨씬 강력하지.” 그녀는 향을 피운 후, 뚜껑을 덮고 코를 막았다. “자, 이제 우리 나가자. 아주머니들도 다 휴가 줘서 내보냈으니까, 잠시 후엔 이 집에 너랑 고 대표 둘뿐이겠네. 엄마가 장담하는데, 오늘 밤, 고 대표는 널 그냥 두지 않을걸?” “엄마!” 소미는 얼굴이 새빨개졌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부끄러워하긴.” 장미리는 입술을 비틀며 웃었다. “당장 지난번 로얄호텔 일만 봐도, 하룻밤 사이에 고 대표가 바로 청혼하지 않았어? 이번에도 네가 잘만 하면, 고 대표도 네 손아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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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5화

소미는 유건의 반응을 놓치지 않았다. ‘효과가 있네!’ 여자의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겉으로는 태연한 척 물었다. “유건 씨, 덥죠?” 유건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럼, 외투라도 벗어요.” 자리에서 일어난 소미는 유건 옆으로 다가간 뒤, 자연스럽게 그의 셔츠 깃을 잡았다. 하지만, 그녀의 손목이 단단하게 붙잡혔다. 깊은 눈매 속에서 강렬한 열기가 일렁였고, 유건이 내뱉는 숨조차 뜨거웠다. “뭐 하려고?” 남자의 묵직한 저음이 공간을 울렸다. 소미는 가슴이 미친 듯이 뛰었다. ‘됐어, 이제 거의 다 왔어!’ 그녀는 일부러 몸을 가까이 붙이며, 나른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외투 벗는 거 도와주려고요.” 여자의 손목이 더욱 세게 조여졌다. “아야...” 소미는 순식간에 중심을 잃고, 남자의 품 안으로 떨어졌다. 결국, 소미는 유건의 다리 위에 앉게 되었다. ‘이거야! 완벽해!’ 기회를 놓치지 않은 소미는 곧바로 두 팔을 남자의 목에 감았다. 부드러운 살갗이 살짝 닿자, 유건은 순간적으로 정신이 번쩍 들었다. 목이 바짝 타들어 가는 듯한 갈증... 그러자 목젖이 위아래로 출렁였다. “유건 씨...” 눈앞의 여자가 붉은 입술을 살며시 벌렸다. 유건은 마치 무언가에 홀린 듯 손을 뻗어 소미의 턱을 받쳤다. 손끝이 여자의 입술에 닿았다. ‘이상하다... 너무 두꺼운데?’ 남자의 눈썹이 살짝 찌푸려졌다. 유건의 손가락을 떼어, 다시 한번 여자의 지문을 확인했다. ‘진한 립스틱 자국... 이런 거, 정말 싫어.’ 하지만, 소미는 이미 기쁨에 들떠 있었다. 유건의 반응이 생각했던 대로 흘러가고 있다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유건 씨, 키스해 줘요.” 너무나 직설적인 말. 그녀는 더 이상 돌려 말하지 않았다. 그제야, 유건도 이 상황이 어딘가 이상하다는 걸 깨달았다. 그는 시선을 가늘게 뜨며 생각했다. ‘내가 아무리 남자여도, 밥 먹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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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6화

말로 해도 안 듣는다면, 힘으로라도 떼어내는 수밖에. 유건은 갑자기 상체를 일으키며 팔을 뻗었다. 남자의 움직임에 소미는 중심을 잃었고, ‘턱’ 소리와 함께 의자에 그대로 주저앉았다. “아...” 그녀는 두 손으로 테이블을 짚으며 황급히 균형을 잡았다. 그리고 믿을 수 없다는 듯, 두 눈을 크게 떴다. ‘날 떼어냈다고?' 유건은 억눌린 듯한 거친 숨을 내쉬었다. 목젖이 한 차례 위아래로 움직였다. “널 다치게 하고 싶지 않아. 하지만, 나를 가지고 노는 건 절대 용서 못 해.” 차가운 한마디를 남긴 채, 그는 곧장 몸을 돌려 문을 향해 걸어갔다. “유건 씨!” 소미는 황급히 일어나 뒤따르려 하는데, 너무 급한 나머지 의자 다리에 발이 걸려 그대로 바닥에 엎어졌다. “유건 씨, 유건 씨!!” 그녀는 바닥을 치며 이를 악물었다. ‘이렇게까지 됐는데... 방금 분명... 반응했잖아? 그런데도 끝까지 버틴다고?' ...시연은 BLUE 앞에서 핸드폰을 쥐고 서 있었다. “왜 하필 이런 곳에서 보자고 한 거지?” 통화 상대는 장미리였다. [쓸데없는 질문 말고, 부명주의 유품이 필요하지 않아?]낮은 목소리로 쏘아붙였다. “필요하면 자꾸 말 돌리지 말고 들어와.” 뚝- 전화가 끊겼다. 시연은 순간 얼어붙었다. 그녀는 오늘 오후, 장미리에게서 전화를 받았다. [네 엄마의 유품이 아직 우리 집에 남아 있어. 가져갈래?] 만약 그냥 자신의 물건이었다면, 시연은 단 1초도 고민하지 않고 거절했을 것이다. 하지만 어머니의 유품은 다르다. 이미 어머니를 잃었고, 남겨진 물건들은 시연이 가진 엄마에 대한 유일한 기억이자 유품이었다. 그녀는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그냥 물건만 받으면 돼. 설마 장미리가 날 어쩌기야 하겠어?’ 결국, 시연은 클럽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약속한 VIP 룸 앞에 도착하자, 시연은 문을 두드렸다. 그러나,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 살짝 불안해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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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7화

유건은 화가 나면 날수록, 겉으로는 더욱 차분해졌다. 그는 비웃듯 짧게 웃으며 낮게 말했다. “지한아, 속도 올려.” “네, 형님.” 지한이 즉시 액셀을 밟으며 차의 속도를 높였다. 차창 넘어, 유건은 시연이 진광수의 차에 타는 모습을 보았다. ‘대체 무슨 짓을 하려는 거야?’ ‘내가 네 밥을 굶겼어? 아니면 돈이 부족했어?’ ‘왜 또 남자를 끌어들이는 거지?’ ‘설마 돈이 필요해서?’ ‘돈이 필요하면 나한테 말하면 될 거 아니야!’ 그리고 남자의 눈앞이 순간적으로 뜨거워졌다. ‘그 배 속에 있는 아이는?’ ‘아, 맞다. 내가 막지 않았으면, 벌써 없앴겠지.’ ‘지시연은 자기 몸속에 있는 생명을 그렇게까지 없애고 싶어 했던 사람이잖아.’ ‘그러면ㅎ, 이다음은...?’ 유건의 머릿속이 새까맣게 타들어 갔다. ‘진광수 같은 늙고 더러운 놈이, 지시연에게 무슨 짓을 할지 단순히 상상만으로도... 미칠 것 같아!’운전석에서 지한이 눈치를 살폈다. 한순간도 표정을 유지하지 못하는 유건의 얼굴. 그러다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형님, 이거 뭔가 이상합니다.” “...뭐?” 유건은 싸늘하게 입술을 비틀었다. “지시연 편드는 거야? 그러면 어디 한번 말해봐. 뭐가 이상한데?” 지한은 짧게 숨을 들이마시며 말했다. “진광수 나이가 몇인데요? 외모는 말할 것도 없고, 돈? 형님보다 많을 리도 없잖아요.” 말 한마디, 한마디가 다 맞는 말이었다. 그래서 유건은 더 화가 났다. ‘결혼식은 거부하면서, 고작 그런 놈한테 안기는 건가?’ 순간...‘아니, 뭔가 이상해.’ 유건의 머릿속이 다시 맑아졌다. 남자는 질투 때문에 흐려진 시야가, 이제야 제대로 보였다. ‘지한 말이 맞네. 지시연이 지금 저럴 이유가 없는데?’ ‘나를 싫어하는 건 알겠어. 하지만, 노은범도 있는데, 왜?’ “지한, 차 돌려. 당장 따라가!” “네, 형님!” 그러나, 차를 돌려 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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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8화

진광수는 낮은 목소리로 웃으며 고개를 숙여 시연의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었다. 시연의 체취를 맡으며 깊게 숨을 들이마시더니, 만족스러운 듯 입가를 비틀었다. “음... 좋군. 아주 좋아.” 늙은 남자의 시선은 마치 진귀한 보물을 보는 듯 반짝였지만, 서두르지 않았다. 진광수는 손가락 끝으로 시연의 뺨을 어루만지며, 낮고 끈적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천천히 하면 돼. 어차피 넌 결국 내 것이 될 테니까... 후후, 제대로 맛보게 해주지.” 듣기만 해도 역겨워 속이 뒤집힐 것 같은 음담패설. 시연은 속으로 외쳤다. ‘어떡하지? 오늘 밤... 정말 벗어날 방법이 없는 거야?’ “시연아, 한 번만 맛보자. 응?” 불쾌한 입김이 얼굴 가까이 다가오더니, 굴곡진 주름투성이 얼굴이 시연의 눈앞으로 바짝 붙었다. 순간, 그녀에게 본능적인 공포가 밀려왔다. “싫어! 살려주세요! 제발, 누구 없어요? 도와주세요! 아, 오지 마! 안 돼!” 여자는 죽어라 소리쳤다. “닥쳐!” 진광수는 화들짝 놀라며 시연의 입을 거칠게 틀어막았다. 시연의 비명이 너무 컸다. 비록 이곳이 최고급 호텔의 스위트룸이라 해도, 이 정도면 밖에서도 들릴 지경이었다. 시연은 필사적으로 몸부림쳤다. 그녀는 말을 듣기는커녕 더욱 저항하며 고개를 흔들자, 진광수는 조급한 듯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근처에 있던 수건을 집어 시연의 입에 쑤셔 넣었다. “으으...!” 여자의 비명이 단번에 막혔다. 진광수는 헐떡이며 땀을 훔치더니, 낮게 중얼거렸다. “뭐야, 왜 이렇게 말을 안 들어? 장미리가 준 약... 효과가 좋다더니, 왜 가만히 있질 않지?” ‘...뭐?’ 시연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이 모든 게... 장미리 짓이라고?’ ‘그렇다면 애초에 나에게 줄‘우리 엄마의 유품' 같은 건 없었고.’ ‘나를 이곳으로 유인해 오려고 쓰는 미끼에 불과했어!’ ‘나는... 나는 어쩜 이렇게 바보 같을 수 있을까...’ 시연에게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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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9화

지한 일행은 서로 눈빛을 주고받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세 사람은 동시에 고유건의 앞을 막아섰다. “형님! 이러다 진짜 사고 납니다!” 고급스러운 분위기를 풍기던 남자가, 지금은 피범벅이 되어 있었다. 그 모습은 소름 끼칠 정도였다. “맞아요, 형님! 이런 쓰레기한테 이 정도까지 손을 더럽힐 필요 없어요!” 하지만 그런 말에도 유건의 얼굴엔 여전히 감정이 없었다. 그러자 정기환이 번뜩이는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형님! 시연 씨가 좀 이상해요. 계속 ‘이상한 소리’를 내던데...” 시연이라는 이름이 나오자, 유건의 눈빛이 변했다. 발을 거두다가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세게 걷어찼다. “으악!” 세 사람은 동시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시연 씨가 제일 효과적이네.’ “시연아.” 유건은 몸을 돌려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는 조심스럽게 안아 올리고, 시연을 덮고 있던 재킷 한쪽을 젖혀 손발의 결박을 풀어주었다. “괜찮아?” 기환이 거짓말을 한 게 아니었다. 시연은 확실히 이상했다. 얼굴이 붉어지고, 입을 벌린 채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그녀가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목말라... 너무 목이 말라...” 그러면서 시연은 무의식적으로 유건의 품에 몸을 기댔다. 여자의 몸은 부드럽고, 따뜻하고... 그 순간, 유건도 깨달았다. 자기 몸에 남아 있던 약기운이 완전히 사라진 것이 아니었다는 걸. 그저 시연을 보호해야 한다는 생각에 잊고 있었을 뿐. 그런데 지금... 여자의 열기와 향기에 자극받아 유건의 몸이 다시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유건의 혈관 속 피가 미친 듯이 돌고, 근육이 달궈졌다. 마치 불 속에 서 있는 듯했다. 그러자 유건은 망설임 없이 시연을 담요째 안아 들고는, 낮고 단호한 목소리로 지시했다. “지한아, 방 잡아.” “네, 형님.” 상황을 본 세 사람은 더 이상 묻지도 따지지도 않았다. 이제 무슨 일이 벌어질지는 불 보듯 뻔했다. 곧 방이 준비되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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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0화

유건은 침대 가장자리에 앉아 가늘게 떨리는 시연의 속눈썹을 바라보며 웃음을 참았다.“시연아, 일어나.”“음...”시연은 마치 이제 막 그의 부름에 깬 듯 천천히 눈을 떴다. 흔들리는 눈빛, 정면으로 유건을 바라볼 용기가 없었다.그녀는 무슨 말을 할지 몰라 입술을 우물거리며 망설였지만 결국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깼으면 세수하고 준비해. 할아버지가 집에서 우리 기다리고 계셔.”“네.”시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유건을 올려다보았다. 그가 움직이지 않자 재촉했다.“나 옷 갈아입어야 하니까 나가요.”그 짧은 말 두 마디에 여자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유건은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나왔다. ‘아직도 나를 부끄러워하는 걸까? 어젯밤 일도 있었는데, 이제 와서 새삼스레?’‘봤을 뿐만이 아니라...’‘응, 입술도 포개었고... 그리고 또...’그러나 그는 순순히 일어나 문쪽으로 향했다. “알았어, 나간다.”유건은 문을 닫으면서 틈 사이로 시연이 이불을 들추고 침대에서 내려오는 모습을 보았다.그는 작게 웃었다. ‘이렇게 부끄러워해?’‘그런데 이 여자, 예전에 다른 남자와도 이랬을까?’그는 갑자기 가슴 한가운데가 묵직하게 내려앉았다.‘쯧, 별 쓸데없는 생각을 다 하네.’유건의 얼굴이 싸늘해졌다. ‘앞으로는 그런 일 없을 거야. 이제 지시연에게 마지막 남자는 나야!’‘이제부터 시연이 내 곁에 있는 한, 다른 남자는 감히 시연에게 손끝 하나 대지 못할 거니까.’‘과거는 과거일 뿐이야. 나는 여자의 과거는 묻지 않는 사람이니까.’‘나도 그런 사소한 걸 따지는 시시한 남자가 아니니까.’...옷을 갈아입으면서 시연은 자신의 몸이 개운하다는 걸 깨달았다. 따로 씻을 필요도 없었다.희미한 기억 속에서도 분명했다. 즉, 어젯밤에 끝난 후 유건이 시연을 욕실로 안아가 직접 씻겨줬다는 것.시연은 주먹을 꼭 쥐었다.‘고유건은 틀림없이 세심하고 배려심이 깊지만, 이 남자는 내...’옷을 다 갈아입고 방을 나서자, 유건이 보온병을 시연에게 건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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