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미는 유건의 반응을 놓치지 않았다. ‘효과가 있네!’ 여자의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겉으로는 태연한 척 물었다. “유건 씨, 덥죠?” 유건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럼, 외투라도 벗어요.” 자리에서 일어난 소미는 유건 옆으로 다가간 뒤, 자연스럽게 그의 셔츠 깃을 잡았다. 하지만, 그녀의 손목이 단단하게 붙잡혔다. 깊은 눈매 속에서 강렬한 열기가 일렁였고, 유건이 내뱉는 숨조차 뜨거웠다. “뭐 하려고?” 남자의 묵직한 저음이 공간을 울렸다. 소미는 가슴이 미친 듯이 뛰었다. ‘됐어, 이제 거의 다 왔어!’ 그녀는 일부러 몸을 가까이 붙이며, 나른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외투 벗는 거 도와주려고요.” 여자의 손목이 더욱 세게 조여졌다. “아야...” 소미는 순식간에 중심을 잃고, 남자의 품 안으로 떨어졌다. 결국, 소미는 유건의 다리 위에 앉게 되었다. ‘이거야! 완벽해!’ 기회를 놓치지 않은 소미는 곧바로 두 팔을 남자의 목에 감았다. 부드러운 살갗이 살짝 닿자, 유건은 순간적으로 정신이 번쩍 들었다. 목이 바짝 타들어 가는 듯한 갈증... 그러자 목젖이 위아래로 출렁였다. “유건 씨...” 눈앞의 여자가 붉은 입술을 살며시 벌렸다. 유건은 마치 무언가에 홀린 듯 손을 뻗어 소미의 턱을 받쳤다. 손끝이 여자의 입술에 닿았다. ‘이상하다... 너무 두꺼운데?’ 남자의 눈썹이 살짝 찌푸려졌다. 유건의 손가락을 떼어, 다시 한번 여자의 지문을 확인했다. ‘진한 립스틱 자국... 이런 거, 정말 싫어.’ 하지만, 소미는 이미 기쁨에 들떠 있었다. 유건의 반응이 생각했던 대로 흘러가고 있다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유건 씨, 키스해 줘요.” 너무나 직설적인 말. 그녀는 더 이상 돌려 말하지 않았다. 그제야, 유건도 이 상황이 어딘가 이상하다는 걸 깨달았다. 그는 시선을 가늘게 뜨며 생각했다. ‘내가 아무리 남자여도, 밥 먹다
말로 해도 안 듣는다면, 힘으로라도 떼어내는 수밖에. 유건은 갑자기 상체를 일으키며 팔을 뻗었다. 남자의 움직임에 소미는 중심을 잃었고, ‘턱’ 소리와 함께 의자에 그대로 주저앉았다. “아...” 그녀는 두 손으로 테이블을 짚으며 황급히 균형을 잡았다. 그리고 믿을 수 없다는 듯, 두 눈을 크게 떴다. ‘날 떼어냈다고?' 유건은 억눌린 듯한 거친 숨을 내쉬었다. 목젖이 한 차례 위아래로 움직였다. “널 다치게 하고 싶지 않아. 하지만, 나를 가지고 노는 건 절대 용서 못 해.” 차가운 한마디를 남긴 채, 그는 곧장 몸을 돌려 문을 향해 걸어갔다. “유건 씨!” 소미는 황급히 일어나 뒤따르려 하는데, 너무 급한 나머지 의자 다리에 발이 걸려 그대로 바닥에 엎어졌다. “유건 씨, 유건 씨!!” 그녀는 바닥을 치며 이를 악물었다. ‘이렇게까지 됐는데... 방금 분명... 반응했잖아? 그런데도 끝까지 버틴다고?' ...시연은 BLUE 앞에서 핸드폰을 쥐고 서 있었다. “왜 하필 이런 곳에서 보자고 한 거지?” 통화 상대는 장미리였다. [쓸데없는 질문 말고, 부명주의 유품이 필요하지 않아?]낮은 목소리로 쏘아붙였다. “필요하면 자꾸 말 돌리지 말고 들어와.” 뚝- 전화가 끊겼다. 시연은 순간 얼어붙었다. 그녀는 오늘 오후, 장미리에게서 전화를 받았다. [네 엄마의 유품이 아직 우리 집에 남아 있어. 가져갈래?] 만약 그냥 자신의 물건이었다면, 시연은 단 1초도 고민하지 않고 거절했을 것이다. 하지만 어머니의 유품은 다르다. 이미 어머니를 잃었고, 남겨진 물건들은 시연이 가진 엄마에 대한 유일한 기억이자 유품이었다. 그녀는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그냥 물건만 받으면 돼. 설마 장미리가 날 어쩌기야 하겠어?’ 결국, 시연은 클럽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약속한 VIP 룸 앞에 도착하자, 시연은 문을 두드렸다. 그러나,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 살짝 불안해진
유건은 화가 나면 날수록, 겉으로는 더욱 차분해졌다. 그는 비웃듯 짧게 웃으며 낮게 말했다. “지한아, 속도 올려.” “네, 형님.” 지한이 즉시 액셀을 밟으며 차의 속도를 높였다. 차창 넘어, 유건은 시연이 진광수의 차에 타는 모습을 보았다. ‘대체 무슨 짓을 하려는 거야?’ ‘내가 네 밥을 굶겼어? 아니면 돈이 부족했어?’ ‘왜 또 남자를 끌어들이는 거지?’ ‘설마 돈이 필요해서?’ ‘돈이 필요하면 나한테 말하면 될 거 아니야!’ 그리고 남자의 눈앞이 순간적으로 뜨거워졌다. ‘그 배 속에 있는 아이는?’ ‘아, 맞다. 내가 막지 않았으면, 벌써 없앴겠지.’ ‘지시연은 자기 몸속에 있는 생명을 그렇게까지 없애고 싶어 했던 사람이잖아.’ ‘그러면ㅎ, 이다음은...?’ 유건의 머릿속이 새까맣게 타들어 갔다. ‘진광수 같은 늙고 더러운 놈이, 지시연에게 무슨 짓을 할지 단순히 상상만으로도... 미칠 것 같아!’운전석에서 지한이 눈치를 살폈다. 한순간도 표정을 유지하지 못하는 유건의 얼굴. 그러다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형님, 이거 뭔가 이상합니다.” “...뭐?” 유건은 싸늘하게 입술을 비틀었다. “지시연 편드는 거야? 그러면 어디 한번 말해봐. 뭐가 이상한데?” 지한은 짧게 숨을 들이마시며 말했다. “진광수 나이가 몇인데요? 외모는 말할 것도 없고, 돈? 형님보다 많을 리도 없잖아요.” 말 한마디, 한마디가 다 맞는 말이었다. 그래서 유건은 더 화가 났다. ‘결혼식은 거부하면서, 고작 그런 놈한테 안기는 건가?’ 순간...‘아니, 뭔가 이상해.’ 유건의 머릿속이 다시 맑아졌다. 남자는 질투 때문에 흐려진 시야가, 이제야 제대로 보였다. ‘지한 말이 맞네. 지시연이 지금 저럴 이유가 없는데?’ ‘나를 싫어하는 건 알겠어. 하지만, 노은범도 있는데, 왜?’ “지한, 차 돌려. 당장 따라가!” “네, 형님!” 그러나, 차를 돌려 돌아
진광수는 낮은 목소리로 웃으며 고개를 숙여 시연의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었다. 시연의 체취를 맡으며 깊게 숨을 들이마시더니, 만족스러운 듯 입가를 비틀었다. “음... 좋군. 아주 좋아.” 늙은 남자의 시선은 마치 진귀한 보물을 보는 듯 반짝였지만, 서두르지 않았다. 진광수는 손가락 끝으로 시연의 뺨을 어루만지며, 낮고 끈적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천천히 하면 돼. 어차피 넌 결국 내 것이 될 테니까... 후후, 제대로 맛보게 해주지.” 듣기만 해도 역겨워 속이 뒤집힐 것 같은 음담패설. 시연은 속으로 외쳤다. ‘어떡하지? 오늘 밤... 정말 벗어날 방법이 없는 거야?’ “시연아, 한 번만 맛보자. 응?” 불쾌한 입김이 얼굴 가까이 다가오더니, 굴곡진 주름투성이 얼굴이 시연의 눈앞으로 바짝 붙었다. 순간, 그녀에게 본능적인 공포가 밀려왔다. “싫어! 살려주세요! 제발, 누구 없어요? 도와주세요! 아, 오지 마! 안 돼!” 여자는 죽어라 소리쳤다. “닥쳐!” 진광수는 화들짝 놀라며 시연의 입을 거칠게 틀어막았다. 시연의 비명이 너무 컸다. 비록 이곳이 최고급 호텔의 스위트룸이라 해도, 이 정도면 밖에서도 들릴 지경이었다. 시연은 필사적으로 몸부림쳤다. 그녀는 말을 듣기는커녕 더욱 저항하며 고개를 흔들자, 진광수는 조급한 듯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근처에 있던 수건을 집어 시연의 입에 쑤셔 넣었다. “으으...!” 여자의 비명이 단번에 막혔다. 진광수는 헐떡이며 땀을 훔치더니, 낮게 중얼거렸다. “뭐야, 왜 이렇게 말을 안 들어? 장미리가 준 약... 효과가 좋다더니, 왜 가만히 있질 않지?” ‘...뭐?’ 시연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이 모든 게... 장미리 짓이라고?’ ‘그렇다면 애초에 나에게 줄‘우리 엄마의 유품' 같은 건 없었고.’ ‘나를 이곳으로 유인해 오려고 쓰는 미끼에 불과했어!’ ‘나는... 나는 어쩜 이렇게 바보 같을 수 있을까...’ 시연에게는
지한 일행은 서로 눈빛을 주고받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세 사람은 동시에 고유건의 앞을 막아섰다. “형님! 이러다 진짜 사고 납니다!” 고급스러운 분위기를 풍기던 남자가, 지금은 피범벅이 되어 있었다. 그 모습은 소름 끼칠 정도였다. “맞아요, 형님! 이런 쓰레기한테 이 정도까지 손을 더럽힐 필요 없어요!” 하지만 그런 말에도 유건의 얼굴엔 여전히 감정이 없었다. 그러자 정기환이 번뜩이는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형님! 시연 씨가 좀 이상해요. 계속 ‘이상한 소리’를 내던데...” 시연이라는 이름이 나오자, 유건의 눈빛이 변했다. 발을 거두다가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세게 걷어찼다. “으악!” 세 사람은 동시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시연 씨가 제일 효과적이네.’ “시연아.” 유건은 몸을 돌려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는 조심스럽게 안아 올리고, 시연을 덮고 있던 재킷 한쪽을 젖혀 손발의 결박을 풀어주었다. “괜찮아?” 기환이 거짓말을 한 게 아니었다. 시연은 확실히 이상했다. 얼굴이 붉어지고, 입을 벌린 채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그녀가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목말라... 너무 목이 말라...” 그러면서 시연은 무의식적으로 유건의 품에 몸을 기댔다. 여자의 몸은 부드럽고, 따뜻하고... 그 순간, 유건도 깨달았다. 자기 몸에 남아 있던 약기운이 완전히 사라진 것이 아니었다는 걸. 그저 시연을 보호해야 한다는 생각에 잊고 있었을 뿐. 그런데 지금... 여자의 열기와 향기에 자극받아 유건의 몸이 다시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유건의 혈관 속 피가 미친 듯이 돌고, 근육이 달궈졌다. 마치 불 속에 서 있는 듯했다. 그러자 유건은 망설임 없이 시연을 담요째 안아 들고는, 낮고 단호한 목소리로 지시했다. “지한아, 방 잡아.” “네, 형님.” 상황을 본 세 사람은 더 이상 묻지도 따지지도 않았다. 이제 무슨 일이 벌어질지는 불 보듯 뻔했다. 곧 방이 준비되었고,
유건은 침대 가장자리에 앉아 가늘게 떨리는 시연의 속눈썹을 바라보며 웃음을 참았다.“시연아, 일어나.”“음...”시연은 마치 이제 막 그의 부름에 깬 듯 천천히 눈을 떴다. 흔들리는 눈빛, 정면으로 유건을 바라볼 용기가 없었다.그녀는 무슨 말을 할지 몰라 입술을 우물거리며 망설였지만 결국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깼으면 세수하고 준비해. 할아버지가 집에서 우리 기다리고 계셔.”“네.”시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유건을 올려다보았다. 그가 움직이지 않자 재촉했다.“나 옷 갈아입어야 하니까 나가요.”그 짧은 말 두 마디에 여자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유건은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나왔다. ‘아직도 나를 부끄러워하는 걸까? 어젯밤 일도 있었는데, 이제 와서 새삼스레?’‘봤을 뿐만이 아니라...’‘응, 입술도 포개었고... 그리고 또...’그러나 그는 순순히 일어나 문쪽으로 향했다. “알았어, 나간다.”유건은 문을 닫으면서 틈 사이로 시연이 이불을 들추고 침대에서 내려오는 모습을 보았다.그는 작게 웃었다. ‘이렇게 부끄러워해?’‘그런데 이 여자, 예전에 다른 남자와도 이랬을까?’그는 갑자기 가슴 한가운데가 묵직하게 내려앉았다.‘쯧, 별 쓸데없는 생각을 다 하네.’유건의 얼굴이 싸늘해졌다. ‘앞으로는 그런 일 없을 거야. 이제 지시연에게 마지막 남자는 나야!’‘이제부터 시연이 내 곁에 있는 한, 다른 남자는 감히 시연에게 손끝 하나 대지 못할 거니까.’‘과거는 과거일 뿐이야. 나는 여자의 과거는 묻지 않는 사람이니까.’‘나도 그런 사소한 걸 따지는 시시한 남자가 아니니까.’...옷을 갈아입으면서 시연은 자신의 몸이 개운하다는 걸 깨달았다. 따로 씻을 필요도 없었다.희미한 기억 속에서도 분명했다. 즉, 어젯밤에 끝난 후 유건이 시연을 욕실로 안아가 직접 씻겨줬다는 것.시연은 주먹을 꼭 쥐었다.‘고유건은 틀림없이 세심하고 배려심이 깊지만, 이 남자는 내...’옷을 다 갈아입고 방을 나서자, 유건이 보온병을 시연에게 건넸
차 안은 숨 막힐 듯 고요했다.유건은 감정을 지운 얼굴로 시연을 바라봤다.‘이 여자, 내 속을 긁어놓으려고 태어난 거야?’‘예전엔 결혼하기 싫다고 하니 화를 내고, 이제는 막상 결혼하려고 하니 또 화를 낸다?’남자의 냉랭한 태도에 시연은 자신이 뭘 잘못했는지 알 수 없었다.‘내가 더 이상 신경 안 쓰기로 했으면 됐잖아. 대체 뭐가 문제야?’“지시연.”유건은 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화를 삼키며 막 입을 열려던 찰나, 핸드폰이 울렸다.고상훈이었고, 유건과 시연에게 서둘러 돌아오라는 전화였다.[어디쯤이냐? 밥 먹으러 온다며?]“할아버지, 거의 도착했어요.”유건이 전화를 끊을 때쯤, 차는 이미 본가 정문 앞에 도착했다.유건의 눈빛이 깊어졌고, 목소리는 한층 차가웠다. “일단 식사부터 하자.”“네, 알겠어요.”...오늘 고상훈의 기력은 제법 좋아 보였다. 최근에는 식욕도 돌아온 듯했다.유건과 시연은 고상훈과 함께 식사를 마쳤고, 식사 후 시연은 고상훈이 약을 챙겨 먹는 것까지 확인했다.이후 유건과 고상훈이 따로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시연은 혼자 방으로 돌아왔다.어젯밤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해 시연의 몸이 축 늘어졌다. 샤워를 마치고 소파에 기대자마자 곧 깊은 잠에 빠졌다.시연이가 다시 눈을 떴을 때, 이미 창밖은 어둠이 내려앉아 있었다.그녀는 벌써 일곱 시가 넘은 것을 핸드폰으로 확인하고 깜짝 놀랐다.그 순간, 방 문이 열렸다. 시연이 고개를 들자, 유건이 들어오는 모습이 보였다.“깼어?”“네.”유건은 불을 켰고, 방 안이 환해졌다.시연은 이마를 찌푸리며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알람 맞추는 걸 깜빡했네요. 할아버지 배고프시겠어요.”“움직이지 마.”유건이 그녀의 어깨를 눌러 다시 소파에 앉혔다. “일어나지 않아도 돼. 할아버지 식사도 하셨고, 약도 드셨어.”“아, 다행이에요.”시연은 안도하면서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유건은 그녀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배 안 고파?”유건의 질
시연은 여전히 유건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 없어서 입술을 꼭 다물고 말없이 고민하다가 겨우 입을 뗐다.“당신도 알잖아요... 내 일...”그녀가 말하는 건, 자신의 ‘깨끗하지 못한’ 과거였다.‘그때 고유건이 얼마나 나를 경멸했는지,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어.’유건의 눈빛이 어두워졌다. 전혀 신경 쓰이지 않는다면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그런데도 그는 시연을 원했다.“누구에게나 과거는 있는 법이야. 네가 그렇듯이, 나도 있어. 그러니, 이제 서로 빚진 거 없어. 그러니까 우리도 이제 더 이상 서로를 탓하지 말자.”“아니에요. 우리는 달라요.”시연은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여자의 행동이 유건의 화를 돋웠다. 그는 이를 악물고 낮은 목소리로 되물었다.“뭐가 다르다는 거야?”“나... 내 아이...”시연은 두 손을 아랫배 위에 올렸다.‘아. 말하는 건 바로 이것이었어?’유건의 시선이 그녀의 배로 향하며 표정은 단호하고 진지했다.“지시연, 잘 들어. 이 말은 단 한 번만 할 거야.”“오늘부터 내가 이 아이의 아버지야. 나는 생부가 누구인지 알고 싶지 않아. 그리고 너도 다시는 내 앞에서 그 얘기를 하지 마.”시연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머릿속이 텅 빈 듯, 그저 멍하니 남자를 바라볼 뿐이었다.“동의해?”유건은 그녀를 깊이 응시하며 눈빛에는 긴장과 함께 알 수 없는 기대가 스며 있었다.“나...”“싫다고 하면 안 돼.”시연이 입을 떼려는 순간, 남자의 목소리가 단호하게 끊었다.그리고 다음 순간, 유건은 한 손으로 시연의 뒷머리를 감싸고, 다른 한 손으로 턱을 받쳐 올리더니, 눈을 감고 그녀에게 입을 맞췄다.깊고도 길게 이어진 입맞춤.서로의 숨결이 얽히고, 두근거리는 심장이 귓가에 선명히 울렸다.시연은 점점 힘이 풀려, 유건의 품에 푹 안겼다.유건도 시연을 품에 꼭 안으며, 손가락 끝으로 여자의 뺨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그는 낮고 거친 목소리로 속삭였다.“말해. 동의한다고.”“...그래요.”시연은 마치 홀린
그날 밤.임진아는 다급히 시연이 사는 곳으로 찾아왔다.“야... 이게 뭐야? 진짜로 나온 거야?”짐이 구석구석 정리되어 있었지만, 분위기는 익숙하면서도 낯설었다.시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피식 웃었다.“응, 가짜로는 안 되지. 진짜로 나온 거야.”진아는 멍하니 둘러보다가 툭 내뱉었다.“근데 두 사람... 싸우는 거 하루 이틀도 아니잖아. 근데 매번 이러다가 또 돌아갔잖아. 이번엔 진짜야?”시연은 잠깐 말이 없다가, 고개를 숙이며 조용히 말했다.“응, 이번엔 진짜야.”그리고, 은범의 병실에서 벌어졌던 일을 털어놨다.“뭐??!”진아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자리에 벌떡 일어났다.“야, 그래서! 도대체 왜 그 침대에 누워 있었던 건데? 은범이가 널 안은 것도 아니고, 설마 네가 알아서 올라간 거야? 도무지 기억 안 나?”시연은 진아를 쳐다보며 한쪽 눈썹을 올렸다.“기억 상실 드립은 그만. 너 로맨스 소설을 너무 많이 봤나 보지?”“하긴...” 진아는 입을 삐죽였다. ‘그럴 리가 없지. 시연이가 은범한테 그런 마음 있을 리 없어.’“그럼... 진짜로 뭔가 이상한 거 아냐?”시연은 말없이 일어났다. 안방에서 두 개의 종이봉투를 들고 나왔다.“그건 또 뭐야?”“은범이 어머니가 준 거야. 임부복.”“뭐...?”진아는 순간 말을 잇지 못했다. “헐... 그 아줌마? 그 아줌마가 임부복을 챙겨줘? 몰라보게 바뀌었네... 예전엔 널 사람 취급도 안 하더니.”곧바로 뭔가 떠오른 듯, 진아가 눈을 가늘게 떴다.“시연아... 설마... 노은범 어머니가... 널 침대에 올려놓은 거 아니야?”시연은 작게 웃었다. 표정은 여유로웠지만, 그 안엔 감정이 억눌려 있었다.“그럴지도. 확실한 증거는 없지만, 요즘 지나치게 친절하더라.”“세상에... 역겨워! 전엔 널 그렇게 무시하고 수치 주던 인간이, 이제 와서 태도를 바꾼다고? 자기 아들을 살릴 사람이라고 생각하니까 눈이 돌아간 모양이지?” 진아는 잔뜩 찡그린 얼굴로 외쳤다.“그래서..
“놔둬. 우리 고 대표, 요즘 상태 안 좋아. 그냥... 내버려둬.”...차 안.지한이 조심스럽게 운전대를 잡으며 물었다.“형님, 어디로 모실까요?”유건은 창밖을 바라보며 턱을 괴었다. 목소리는 평소보다 훨씬 낮고 무심했다.“갈 데가 어디 있겠냐. 본가로 가자.”“네, 형님.”지한은 운전대를 돌리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래도 결국 돌아가시긴 하네... 형수님 그런 식으로 떠났는데, 형님은... 아직 포기 못하셨구나.’ ...고씨 가문 본가.차에서 내리자마자, 유건은 곧장 현관을 박차고 들어갔다. 걸음은 빠르고, 눈빛은 날카로웠다.하지만 집 안은 조용했고, 시연은 없었다.유건은 믿기지 않는 듯 곧장 위층으로 올라갔다. 안방, 서재, 게스트룸, 드레스룸...어디에도 시연은 없었다.‘정말 가버린 거야?’순간, 머릿속이 하얘졌다. 허겁지겁 계단을 내려와 왕성애와 이호민을 불러세웠다.“지시연, 어딨습니까?”넥타이를 세차게 잡아당기는 그의 목소리엔 급박함이 섞여 있었다. “예...?”이호민은 순간 얼이 빠졌다. “사모님요? 나가셨는데요... 도련님이 나가라고 하셨잖아요.”“내가?”“네... 저희도 다 들었어요. 기환이가 전화했을 때, ‘앞으로 그 여자 일로 날 귀찮게 하지 마’라고... 그 말, 솔직히 ‘더 이상 상관 없다’는 뜻 아니었나요?”“이모님, 그런 말씀은 하지 마세요.”유건의 미간이 깊게 찌푸려졌다. “제가... 그랬다고요?”왕성애가 나섰다.“네, 저도 들었는걸요. ‘앞으로 그 여자 일로 날 귀찮게 하지 마’라는 게, 무슨 뜻인 줄 모르세요? 도련님, 그건 사모님을 쫓아내는 말이었다고요.” 유건은 할 말이 막혀 입술을 꾹 다물었다. ‘진짜... 그랬나?’ 그 순간이 떠올랐다. 기환이 급하게 전화했을 때, 술에 올라 충동적으로 내뱉은 말.그 한마디가 시연을 보낸 거였다.“됐어요. 알겠어요.”짧게 대답한 유건은 더 이상 말하지 않고 계단을 올라갔다.“도련님!”이호민이 다급히
“고... 고 대표님...”무대에서 내려온 댄서가 입술을 깨물며 조심스레 다가왔다. 목소리는 부끄러움과 설렘이 섞여, 낮게 떨렸다.“제... 예명은 시연이에요.”뚝-순간, 공기 자체가 얼어붙은 듯했다. 주변의 시끄러운 음악, 사람들의 웃음소리까지.‘시연... 시연이라니...’유건은 천천히 그 이름을 되뇌었다.입꼬리는 올라갔지만, 그것이 웃음인지, 비웃음인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그래, 시연이구나.”목소리는 가볍지만, 그 안에 도사린 감정은 날이 서 있었다. 유건의 손끝이 떨리는 것을 가까이서 본 지하는 알아챘다.“고 대표님... 감사해요. 오늘... 무대를 봐주셔서요. 제가 한 잔 드릴게요.” 여자는 작게 고개를 숙이며 술병을 들었다.“고 대표님... 어느 잔이... 쓰시던 건가요?”그 말의 의미는 명확했다. 같은 잔으로, 같은 술을, 같이 나누자는 은근한 제안.지하와 강석, 정빈은 아무 말 없이 그 장면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거, 일 터지겠는데...’유건은 천천히 턱을 들어, 가장 가까이 있는 잔을 가리켰다. “저거.”“네, 고 대표님.”여자는 긴장한 손으로 잔을 집으려 했다. 하지만 손이 닿기 직전, 유건의 손이 그녀의 손목을 단단히 움켜쥐었다. 탁-그대로 테이블 위로 꾹 눌렀다.“고... 고 대표님?”눈을 동그랗게 뜬 그녀는 순간적으로 얼어붙었다. 유건은 피식 웃었고, 웃음 끝에 감도는 건 조롱과 냉기였다.“너, 누구야?”“네...?”“아무나 내 잔에 손을 얹어도 된다고 생각했어? 내가 개나 소나 ‘고 대표님’이라고 부르면 상대해 줄 거라고 생각했냐고.” “저... 죄송합니다...”여자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뭐야, 분명 아까까지는 이런 분위기가 아니었는데?’ “꺼져.”낮고 가라앉은 유건의 목소리. 그러나 그 말은 날카롭고 차갑게 뼛속까지 파고들었다.“네...?”“꺼지라고.”쾅!술잔이 바닥에 내던져졌고, 깨진 유리 조각이 사방으로 튀었다.“꺅!”여자가
유건은 지하의 어깨에 팔을 걸쳤고, 약간 술에 취한 듯 입꼬리를 올렸다.“야, 그거 알아? 아까 무대 위에 있던 애, 나 걔한테 걸었다? 오늘의 ‘댄스 퀸’은 무조건 걔가 될 것 같았거든. 어때, 춤 괜찮았지?” 지하는 눈을 살짝 흘기며 잔을 들었다. ‘와... 진짜 맛이 갔구나.’ “응, 잘 추더라.”“그런데 유건아...” 무언가 진지하게 말을 꺼내려던 찰나, 벌떡 일어난 유건이 무대를 향해 우렁찬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좋아!”“잘한다! 브라보!”지하는 어이가 없어 술잔을 내려놨다. ‘진짜 망가졌네, 망가졌어.’무대가 끝났고, 분위기도 한풀 꺾였다. 유건은 흥이 남은 얼굴로 말했다.“자, 술 마시러 가자.”오늘은 일부러 룸을 잡지 않고, 메인 홀 자리에 앉았다. 유건이 일부러 ‘시끄럽고 복잡한 곳’에 머물고 싶어 했기 때문이다. ‘조용한 데 가면, 아무래도 생각이 많아질 테니까.’ 정빈은 이미 술을 채워두고 있었는데, 유건은 자리에 앉자마자 잔을 집어 단숨에 비웠다. 강석이 지하에게 눈짓을 보냈다. ‘어때? 얘기는 좀 들어봤어?’지하는 어깨를 으쓱였다. ‘방법이 없어. 지금은 완전히 벽이야, 벽.’그 순간, 클럽 매니저가 다가왔다.“고 대표님, 지하 도련님, 주 대표님, 강석 도련님, 반갑습니다.” 정중히 인사한 뒤, 본론으로 들어갔다.“아, 그리고 고 대표님, ‘댄스 배틀’ 결과 나왔습니다. 고 대표님이 베팅하신 8번 참가자가 오늘의 ‘댄스 퀸’으로 선정되었어요.”“그래?” 유건이 한쪽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 “역시 그럴 줄 알았다니까.”“상금은 현금으로 환전해 드릴까요, 아니면 칩으로 보관해 드릴까요?”“필요 없어.” 유건은 손을 툭 내저으며 말했다. “그냥 술값에 써. 테이블이나 돌리라고.”“감사합니다, 고 대표님.” 매니저는 바로 고개를 숙였다. ‘역시... 이런 분들한텐 돈보다 기분이지.’“그리고... 약속대로 오늘의 ‘댄스 퀸’이 술을 한 잔 따라드
“그렇게까지요...?”이호민은 더는 망설일 수 없었다. 바로 시연을 위해 차량을 호출했고, 기환은 말없이 그녀의 캐리어를 트렁크에 실었다.“집사님, 이모님, 기환 씨... 그동안 감사했어요. 저는 이만 가볼게요.”시연은 고개를 숙여 인사한 뒤, 조용히 차에 올랐다. 창문이 올라가며 그녀의 얼굴이 서서히 가려졌고, 차는 조용히 대문을 빠져나갔다.남겨진 세 사람은 말이 없었다. 대문 앞, 서로 눈을 바라보며 굳어 있었다.“기환아...” 이호민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넌 뭔가 알고 있는 거지?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그게...”기환은 한숨을 내쉬며, 하는 수 없다는 듯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꺼냈다. 병실에서 벌어진 일, 유건이 본 장면, 그리고 그 뒤에 생긴 오해까지... 사실대로, 차분히 말이다. “그래서, 그렇게 된 거예요.”이야기가 끝나자, 왕성애와 이호민은 동시에 외쳤다.“말도 안 돼! 사모님이 바람을 피워? 그건 아니지! 그럴 리 없어!”이호민의 얼굴이 붉어졌고, 왕성애는 황급히 팔짱을 풀며 어이없어했다.“사모님이 어떤 사람인데! 기환아, 정말 그 상황을 믿는 건 아니지?” “솔직히 말해서요...” 기환도 고개를 숙였다. “저도 믿고 싶진 않아요. 하지만... 형님이 두 눈으로 직접 보셨어요. 그 자리엔 저도 있었고요.”차 안.시연은 두 팔을 가볍게 끌어안았다. 차 안은 너무 조용했다. 조용해서, 오히려 더 춥게 느껴졌다.‘추워... 정말 추워.’몸이 추운 게 아니라, 마음 깊숙한 데서 올라오는 냉기가 뼈를 때렸다. 그 차가운 공기 속에서, 시연의 감정이 서서히 녹아내리고 있었다.심지어 눈을 감아도 ‘그 사람’의 목소리가 귓가를 때렸다.“앞으로 그 여자 일로 날 귀찮게 하지 마.”그 말은 정말이지 두 사람 사이에 마침표를 찍는 말이었다. ‘진짜... 끝이구나.’시연의 눈가가 점점 뜨거워졌고, 감정을 참으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눈물이 조용히 흘러나왔다
“사모님?”짐을 정리하던 시연의 방에 왕성애가 들어섰다. 뒤이어, 이호민도 들어왔다.요즘 병원 쪽에 매달려 있던 이호민은 부부 사이의 일이 이렇게까지 커진 줄 몰랐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에요?” 이호민은 바닥에 놓인 캐리어를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유건 도련님이 또 사모님을 속상하게 했나요? 괜찮아요, 사모님. 속상한 게 있으면 어르신께 말씀드리세요.”“어르신은 누구보다 사모님을 아끼시잖아요. 원래 부부는 조금씩 다투기도 해요. 집까지 나가는 건 아닌 것 같습니다.” 그는 손을 뻗어 캐리어를 대신 들려 했다.하지만 시연은 고개를 저었고, 쓴웃음과 함께 말했다.“집사님, 그게 아니에요. 유건 씨가 저를 속상하게 한 게 아니라... 제가 유건 씨 속을 뒤집어놨어요. 지금은... 절 보고 싶지도 않을 거예요.”이호민과 왕성애는 동시에 얼어붙었다.‘어떻게 된 거지...? 저런 말까지 나올 정도면,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시연은 캐리어 손잡이를 쥐고, 백팩을 둘러맸다. “이모님, 집사님... 그동안 감사했어요. 저, 이만 가볼게요.”그 말에, 왕성애와 이호민은 허겁지겁 따라나섰다. 두 사람은 계단을 내려가는 시연을 서둘러 붙잡았다.“사모님, 잠시만요. 너무 성급하게 생각하시는 거 아닐까요? 유건 도련님이 돌아오시면, 다시 얘기 나눠보는 건 어떠세요?” “맞아요. 도련님 성격 급한 거 사모님이 제일 잘 아시잖아요. 홧김에 한 말일 수도 있어요.”시연은 멈추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단호하게 말했다.“유건 씨가 돌아와서 저를 보면 더 화가 날 거예요. 전... 그걸 더 보고 싶지 않아요.”‘그 사람한테 더 미운 존재가 되기 전에 조용히 사라지는 게, 내가 그 사람한테 해줄 수 있는 마지막 예의야.’ 두 사람은 서로 눈을 마주쳤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도련님이 그렇게까지...’고씨 가문 본가 대문 앞. 그 순간, 정기환이 막 대문에 들어서고 있었다.“형수님?”그는 시연이 캐리어를 끌고
유건의 분노는, 무너지는 파도처럼 쏟아졌다.하지만, 시연은 물러서지도 피하지도 않았다. 그저 남자의 눈을 또렷하게 마주 보며 조용히 말했다.“지금... 많이 화났어요?”그 말에 유건은 순간 얼이 빠졌다. ‘뭐?!! 이 여자, 지금... 뭐라고 하는 거야?’ ‘이 상황에서 ‘많이 화났냐’고 묻는다고?’시연은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조용한 말투로 말을 이었다. 조금은 멍한 목소리에 아무 감정도 섞이지 않은 톤이었다.“잘 모르겠어요. 지금 내가 당신을 좋아하느냐 마느냐 하는 게... 그렇게 중요한 일이에요?” ‘그게 네 진실한 마음이라고?’ 유건은 순간 말문이 막혔고,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아니면...” 시연은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눈동자에 짙은 의문을 담았다. 진심에서 우러나온, 진짜 의문이었다.“당신은 고씨 가문의 도련님이고, 당연히 모든 걸 소유할 수 있는 사람이니까... 나는 법적으로 당신의 ‘아내’라는 타이틀이 있으니까...”“당신이 날 좋아하지 않더라도, 나는 무조건 당신을 좋아해야 하고, ‘배신’은 꿈도 꾸지 말아야 한다는 거예요?” ‘좋아해야 하고, 배신은 꿈도 꾸지 말아야 하냐고?’ 시연의 말이 유건의 가슴을 도려냈다.‘좋아하지 않았다는 거야? 그럼 우린 대체 뭐였지?’ “혼인 중에 외도라니, 네 진심이 그거였어?” 유건의 목소리는 저음으로 가라앉았지만, 안에 담긴 분노는 더 짙었다.“내 진심이... 그거였냐고요?” 시연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혼잣말처럼 말했다.그리고 문득, 아까 자신이 본 그 나비난 화분이 떠올랐다. 유건이 가장 먼저 들렀던 곳... 바로 장소미가 있는 곳. 시연은 아내였지만, 유건의 ‘첫 번째’가 아니었다. 늘 ‘두 번째’, 늘 ‘장소미의 다음’이었다.시연은 씁쓸하게 웃으며, 작게 중얼거렸다. “서로서로... 똑같지 뭐...”“뭐라고?” 유건이 날카롭게 물었다.“아...” 시연은 힘없이 웃었다. “맞아요, 당신 말이 맞아요.”‘이젠 굳이
유건은 분명히 봤다. 두 눈으로, 직접. 그런데도 그는 아직도 무언가 기대하고 있었다.‘혹시, 내가 잘못 본 건 아닐까?’‘그게 정말... 단순한 우연이었을지도 몰라.’‘아니면, 어쩌면... 진짜로, 오해일 수도 있잖아.’되뇔수록, 마음은 더 복잡하게 일그러졌다. ‘고유건, 너 지금 뭐 하는 거야? 네 자존심은? 너답던 원칙은 다 어디로 갔어?’유건의 감정은 맹렬히 소용돌이쳤다. 그러는 사이 문밖의 시연은 아직 들어오지 않았다.그러다 유건의 시선이 책상 위 어딘가에 멈췄다. 작은 노트 하나.그 작은 책상은 시연의 것이었다. 평소에 시연이 쓰던 전공 서적과 자료들이 정리돼 있었고, 그 위에는 익숙하지 않은, 낯선 노트 한 권이 놓여 있었다.무심코 들춰본 노트 속. 글자와 숫자들이 정돈된 필체가 빼곡히 적혀 있었다.‘이건... 가계부?’두 페이지를 더 넘긴 순간, 유건의 눈빛이 싸늘하게 식었다. ‘장난해?’4000만 원, 우주의 첫 치료비. 그 뒤엔 우주의 식중독 입원비, 시연 어머니 묘지 이전 비용... 그녀가 ‘고씨 가문'에, 아니, 유건에게 ‘빚진’ 항목들만 정리된... ‘일종의 청구 리스트’였다.‘이게... 뭐야?!’순간, 유건의 심장이 ‘툭’하고 곤두박질쳤다. 그리고 분노가 밀물처럼 되살아났다.그중 한 줄에서 남자의 손가락이 멈췄다. 바로 시연 어머니 묘지 이전비였다. ‘묘지 이전? 그런 일이 있었던 거야?’ ‘그땐 우린 이미 결혼했는데... 난 아무것도 몰랐어!’‘저 여자는 단 한 마디도 나한테 말하지 않았어!’‘아니, 말하기조차 싫었던 거겠지. 나란 존재가 그 정도였다는 거잖아.’그러던 찰나,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울렸다.똑- 똑-유건은 고개도 들지 않고 말했다.“문 안 잠겼어.”밖에 있던 시연은 그 말에 미묘하게 인상을 찌푸렸다. ‘왜 저렇게 말투가...?’‘기분이 상했나, 저 정도로?’ 속으로 작게 숨을 내쉬며, 시연은 조용히 문을 열었다.유건은 작은 책상
‘정말... 그냥 가버린 거야?’시연은 멍하니 서 있었다. 유건이 걸어 나가는 뒷모습을 바라보며, 시연의 온몸이 서늘하게 식어갔다. ‘정말... 끝난 걸까?’ 무기력한 체념이 밀려오고, 그녀의 마음속은 새까맣게 비어버린 듯했다. 시연은 마침 잘못을 저지르고 버림받은 아이처럼 혼란스러웠고, 무서웠다. “형수님!”지한이 당황한 얼굴로 다가왔다. “멍하니 계시면 어떡해요! 형님 진짜 화나셨어요!”“지금 안 따라가면... 후회할지도 몰라요!”“아... 네!” 시연은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바로 허겁지겁 침대에서 내려오려 했지만, 발이 허공을 가로질렀다. “천천히요.” 지한이 팔을 내밀었다. 시연은 지한의 손을 잡고 균형을 잡으며 슬리퍼를 신었다.그때, 시연의 시선이 강수희에게 향했다. ‘왜... 내가 침대에 있었지? 대체 어떻게 된 거야?’강수희는 눈을 피하며 어색하게 웃었다. “시연아, 어서 가보렴. 고 대표님한테 잘 설명해. 오해일 뿐이잖니?”“네...” 시연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지만 더 묻지 않았다. 지금은 유건이 먼저니까 무조건 그를 잡아야 했다.하지만 병실을 나서자 유건의 차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형님, 본가로 가셨어요. 형수님도 어서 타세요.”“알겠어요.”...본가에 도착하자, 왕성애가 부리나케 달려 나왔다.“사모님, 도련님이랑 싸우셨어요? 도련님 얼굴이... 귀신 본 사람보다 더 창백하더라고요. 도련님의 그렇게 화난 얼굴을 본 게... 몇 년 만인지 몰라요.”시연은 말없이 웃었다. ‘내가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어... ‘다른 남자랑 침대에 있던 걸 들켰다’라고 할 수도 없잖아.’유건이 화내는 게 당연했다. 그리고 그 분노는 상상 이상으로 격렬했을 터.“이모님, 저 이만 올라가 볼게요.”“얼른 가봐요. 부부 싸움은 칼로 물 베기라잖아요. 얘기만 잘하면 다 풀릴 거예요.”시연은 고개를 끄덕이고 계단을 올랐다. 그런데 마주 내려오던 가사도우미들의 손에 익숙한 화분이 들려 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