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 부장의 은밀한 임신의 모든 챕터: 챕터 391 - 챕터 400

990 챕터

제391화

“네.”강하리는 대답을 회피하지 않았다.구승훈은 심장이 짓눌려져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강하리가 정말 자신을 10년이나 좋아했다니!몇 번씩이나 자신의 울화를 부른 그 연적 새끼가.강하리를 뺏길까 봐 노심초사했던 그 사람이.그게 우습게도 자기 자신이었다니.“왜……. 여태 말 안 했어.”강하리가 웃었다.“그럴 필요가 없어서요. 나 좋아하지도 않는데 말해 뭐 해요? 내 비천함을 더 돋보이려고? 아니면, 내 감정을 더 짓밟게 하려고요? 차라리 그냥 거래였으면 좋았겠네요.”“물론, 지금은 거래마저도 아니지만요.”“강하리!”구승훈의 눈이 벌개졌다. 강하리의 말 한 마디마디가 비수가 되어 그의 가슴에 꽂혔다.아픈 나머지 가슴이 쪼그라드는 느낌이었다.“나 좋아한 거 맞잖아!”강하리가 말이 없어졌다. 주위에는 온통 호기심의 눈길을 기웃거리는 사람들이었다. 그녀는 더이상 구승훈과 실랑이를 벌이고 싶지 않았다.말없이 돌아서 병실로 들어가는 강하리를 구승훈이 성큼성큼 따라갔다.안 따라가면 강하리가 사라지기라도 할 것처럼.“승훈 씨.”병실에 들어가서야 강하리가 입을 열었다.“네, 좋아했던 거 맞아요.”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말투.하지만 그와는 별개로 그녀의 마음 속 상처는 다시 헤집어지기 시작했다. 까이고 벌려져 다시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내 어린 시절 꿈이었어요. 승훈 씨한테 좀만 더 가까이 가려고 내 자존심을 찢고 뭉개고, 내 자신을 먼지만큼 웅크렸어요. 하지만 그게 내 실책이었죠. 너무 나를 보잘것없게 만들어서, 승훈 씨한테 보이지도 않았으니까.”별것 아닌 듯 얘기하지만, 그녀는 눈 앞이 뿌옇게 흐려지기 시작했다.“그래서 포기했어요. 너무 힘들어서. 그때 내 마음은 먼지처럼 흩어진 지 오래요. 그러니까 죽기 살기로 승훈 씨 곁을 떠나려고 했겠죠. 미련이 조금도 안 남았으니까.”뜨거운 것이 들끓던 구승훈의 눈이 점차 식어갔다.나중에는 얼음장처럼 찬 기운만 남긴 채 빛을 잃었다.이토록 괴로워 보긴 처음이었다.마음 뿐만 아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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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92화

강하리가 긴 숨을 내 쉬었다.상처를 헤집을 땐 그렇게 아프던 것이, 다 털어놓고 보니 오히려 후련했다.허망했던 그 사랑도 이젠 털어버릴 수 있을 것 같았다.“승훈 씨가 도와준다면 너무 감사하겠지만, 안 그래도 전 할 말 없어요. 들어가 보세요.”“내가 잘 처리할게.”구승훈의 묵직한 대답이 돌아왔다.꺼졌던 불씨를 살리려면 자그마한 불꽃이라도 튀어야 할 것 아닌가.그 불꽃을 꺼버리려는 자를 싸고 돌 수는 없는 노릇.“전에 나한테 썼다던 그 편지 좀 볼 수 있을까?”“없어요. 태워버렸거든요.”“야 이…….”구승훈의 얼굴이 흙빛이 되었다.“태워…… 태워버렸다고? 그 손글씨로 쓴 편지를?”“네.”확인 말살을 하는 외마디 대답에 구승훈의 표정에 쩌적 금이 갔다.‘이런 거였구나. 원하는 걸 얻을 수 없는 기분이.’“독한 여자 같으니라고.”한 마디를 남긴 채, 구승훈이 병실을 나섰다.병실 문 앞, 갑자기 문이 열리며 나오는 구승훈의 모습에, 문 앞에서 귀를 쫑긋 세우고 있던 손연지와 노민우가 흠칫 뒤로 한 발작 물러섰다.그들을 못 본 양, 구승훈이 뚜벅뚜벅 발걸음을 옮겨 멀어져갔다.넓디넓은 그의 어깨가 오늘따라 뭐에 짓눌린 듯 무거워 보였다.차에 오른 뒤에도 그 묵직한 짓눌림은 사라지지 않았다.답답한 가슴에서 심술 비슷한 게 피어올랐다.나한테 쓴 편지인데. 수취인이 아직 보지도 못 했는데.그걸 그렇게 태워버리면 어떡하냐고.한참을 그러고 있다가, 구승훈은 핸드폰을 꺼내 승재에게 전화했다.“오늘 병원에서 난동 피우던 것들 다 찾아내서 기소해. 거리에서 찌라시 뿌리던 그 놈들도 모조리. 잡아서 심문할 수 있는 놈들 있으면 다 잡아들이고. 강하리 세컨드 설이 깡그리 사라지게 작업해. 온라인이든 오프라인이든.”멍해졌던 승재가 바삐 고개를 끄덕였다.“그나저나 형, 장진영과 송동혁이 회사 문 앞에서 지키고 있는데-.”“쫒아버려. 버티면 때리고.”그대로 통화를 마친 구승훈이 차를 몰아 회사로 질주했다.“구 대표님! 대표님! 우리 유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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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93화

“강하리!”뚝. 뚜- 뚜-구승훈의 목소리가 들리기 바쁘게 전화를 끊어버리는 강하리.구승훈은 간병인 아줌마한테서 빌린 핸드폰을 쥔 채 쓴 입맛만 다셨다.‘이젠 이름조차도 부르지 말라는 건가.’“언제 그랬어요? 보경시에 데려갈 거라고?”“어제 여기가 안전하지 않다면서 보경시 병원 알아본다 그러셨어요. 그 사람들 미친 거 아니에요? 착한 하리 아가씨를 어떻게 그렇게 모욕할 수가 있는 걸까요.”아줌마가 혀를 쯧쯧 찼다.“오늘 병원에는 왔었고요?”아려오는 가슴을 갈무리하며 구승훈이 핸드폰을 돌려주었다.“오늘 안 오신댔어요. 어제 퇴근하고 다녀가셨는데, 주현 도련님이라는 남자분이 따라와서는 일 얘기를 한답시고 이글거리는 눈길로 우리 하리 아가씨를 위아래로 훓어보는데, 옆에 제가 다 부담스러웠지 뭐예요.”지나가는 얘기 같은 아줌마의 수다였지만, 구승훈은 귀가 번쩍 뜨였다.“정주현이요?”하지만 곧 피식 웃었다.“용을 쓰네요 참. 어차피 퇴짜 맞을 건데.”“하이고, 대표님이야말로 퇴짜 맞으신 거 아니에요? 핸드폰을 다 빌려쓰시고.”아줌마가 안쓰럽다는 눈길로 구승훈을 흘겨보았다.“……놀래켜 주려고 그랬던 겁니다.”겨우 한 마디 해명했지만, 아줌마에게 씨알도 안 먹혔다.“퍽이나요. 아가씨가 대표님 번호 차단하셨단 거 다 아는데요 뭘.”“…….”도망치듯 병원에서 나와버린 구승훈.그 길로 대양 지사로 찾아갔다.하지만 거기에도 강하리는 없었다. 띠꺼운 표정으로 마중 나온 정주현만 있을 뿐.“구 대표님께서 여긴 어쩐 일로?”말투마저 퉁명스러운 정주현. “환영하지 않음”을 온 몸으로 고스란히 내비치고 있었다.“강하리는?”“말이 짧으시네?”정주현이 입가를 삐뚜름히 올렸다.“내가 왜 그걸 알려줘야 하죠?”“이제 막 연성에 자리잡은 회사 치곤 태도가 영 맘에 안 드는데.”구승훈의 표정이 살벌해지기 시작했다.“하지만 강 경리가 있다면 곧 일떠서겠죠.”한 마디도 지지 않는 정주현.“그게 강하리를 끌어온 이유야? 정주현, 니들이 무슨 꿍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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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94화

송씨 집안에 들인다?참 하찮은 조건이기도 해라.“어려서부터 아빠도, 동생도 없는데 무슨 소리세요. 이제 와서 그 토 나오는 수작질은 집어치우시죠.”“하리야! 내가 이렇게 빌게. 직접 도와주지 않아도 돼! 구승훈에게 좋은 말 몇 마디라도…….”송동혁은 정말이지, 쓸 수 있는 방법은 다 동원했었다.한 치의 오차도 없는 계산이라고 생각했지만, 심준호가 한 수 위였다.일이 난 뒤에도 모진 애를 쓰며 송유라를 구제해내려고 했지만, 독한 구승훈이 아예 정신병원에 처넣어버렸고.병원에 갇힌 그날 밤, 송유라는 정신줄을 놓아버렸다.‘하긴, 거기가 좀 살벌해야지.’강하리가 희미하게 입꼬리를 올렸다.“왜 구승훈에게 직접 찾아가지 않으신 거죠? 그쪽 따님을 보배처럼 아끼던 거 아니었나요?”“우리를 만나줘야 뭐든 해볼 거 아니야.”송동혁이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 쉬었다.“아, 그래서 만만한 게 나다, 이 말씀이신가요?”강하리의 눈매가 갑자기 예리해졌다.“예전 그쪽이 했던 짓들 다 까발라 버려요 확?”이미 나락으로 떨어진 명성에 사생아 타이틀까지 덮씌워지는 건 정말 싫었지만.이미 나락으로 떨어진 이상, 더 잃을 명성이 없는 그녀이기도 했다.더 갈구면 당장이라도 터질 듯 팽팽한 그녀의 태도에 송동혁의 얼굴에서 핏기가 쏙 빠져나갔다.“진짜야! 내가 한 약속들 다 진짜라고! 공식적으로 하리 네가 내 딸이라고 밝힐 수도 있단 말이다!”“당신 같은 쓰레기의 딸 노릇을 내가 원할 것 같냐고! 당장 꺼져!”날카롭게 외친 강하리가 차에 올라탔다.부아앙!미친듯이 차가 사라졌고, 송동혁이 선 자리엔 차가 지나간 먼지만이 풀럭거렸다.멍해 굳어졌던 송동혁이 음침한 낯빛으로 바뀌더니 어딘가에 전화했다.……보경시.공항에서 나온 강하리 앞에 주해찬이 서 있었다.“선배.”주해찬이 자연스레 그녀의 손에서 캐리어를 받아쥔다.“피곤하지?”“아직은 괜찮아요.”“인터넷에 올라왔던 기사들, 신경쓰지 마. 다 네가 잘나서 꼬이는 것들이니까. 알았지?”“그럼요 선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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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95화

익히 들어오긴 했지만, 강하리가 백아영을 실제로 만난 건 처음이었다.이름부터가 젊음으로 차 넘치는 백아영 전 외교부장은, 칠순 넘은 은빛 나이에도 불구하고 눈에서 맑은 정기가 돌고있었다.이쪽의 눈빛을 느꼈을까, 진태형이 고개를 돌려 이쪽을 바라보았다.그 눈길을 따라 백아영의 눈길도 이쪽을 향한 순간.강하리의 얼굴에 눈길이 닿은 백아영이 넋이 나간 표정이 되었다.“부장님, 이쪽이 바로 준호가 입에 달고 다니던 강하리 양입니다.”진태형의 소개에 정신이 퍼뜩 든 백아영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준호한테서 얘기 많이 들었어요, 하리 양. 진작 만나보려고 했는데 이렇게나 오래 걸렸네요.”백아영의 따뜻한 눈빛 속에, 한 줌의 감회가 스쳐지났다. 마치 강하리에게서 다른 사람의 모습이 보이는 것처럼.그리고 이어 콧등이 시큰해왔다.준호가 몇 번이고 입에 올렸을 때도 반신반의하던 백아영이었다.그러나 강하리의 실물을 보는 순간, 한 가지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내 딸이…… 살아 돌아왔어.’정말이지 닮아도 이렇게 닮을 수가 없다.마찬가지로 예쁘고 똑 부러지던 딸의 모습을 한 아이가, 햇살처럼 활짝 웃는다.“백 부장님, 티비에서 보던 것보다 훨씬 아름다우세요.”“엄마”가 아니라 “부장님”으로 불리는 순간, 현실로 되돌아온 약간의 허망함을 갈무리하며, 백아영이 강하리의 두 손을 꼭 잡아쥐었다. “하리 양이야말로 정말 예쁘네요. 시간 날 때 집에 한 번 밥 먹으러 와요.”“네! 꼭 찾아뵙겠습니다!”“부장님, 하리 양이 오늘 회의 번역 전담입니다.”진태형의 귀띔에 그제야 백아영이 강하리의 손을 놓았다.“아, 그래요? 많이 바쁠 텐데, 내가 괜히 하리 양 시간을 잡아먹은 게 아닌지 모르겠네요. 오늘 회의 잘 부탁드려요.”“아닙니다. 그럼 먼저 가 보겠습니다.”깍듯이 인사를 마친 강하리가 박근형과 함께 멀어져갔다.백아영의 눈길은 강하리의 뒷모습에서 떠날 줄을 몰랐다.“태형 씨, 혹시 그럴 가능성은 없을까요? 하리 양이…….”“저도 혹시나 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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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96화

외교부 소속 호텔에서 열린 연회.강하리는 입장하는 대로 인파에 둘러싸였다.독보적으로 예쁘기도 했지만, 박근형의 뒤를 이를 사람이란 소문이 퍼진 탓도 있었다.“하리야, 어떻게 왔어? 그러잖아도 전화해볼까 망설이던 참이었는데.”주해찬이 눈을 빛내며 다가왔다.“교수님이 외교부 모임이라고 하셔서요. 한 번 와보고 싶었어요.”“진작 알았더라면 데리러 갔을텐데.”“그럼 하리는 해찬이 너한테 맡길테니 잘 챙겨줘야 한다?”박근형 교수가 웃으며 한 마디 끼어들고는 둘을 남긴 채 안쪽으로 들어갔다.한편 연회장 저쪽 켠.도란도란 얘기를 나누는 주해찬과 강하리를 아니꼬운 눈길로 바라보는 한 여인이 있었다.“연란 씨, 저 쪽이 해찬이 여자친구야?”그 옆으로는 우아한 차림의 부인들이 모여있었다.누군가의 물음에 주해찬의 어머니, 석연란의 미간이 순간 구겨졌다.하지만 이내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그럴 리가. 우리 해찬이가 아무나 사귈 사람도 아니고.”말 속에 숨은 뜻을 알아챘다는 듯, 주위의 부인들이 고개를 끄덕인다.“그나저나 진짜 예쁘긴 한 걸. 여자인 내가 봐도 감탄이 나올 정돈데 해찬이는 오죽하겠어. 안 그래요?”석연란의 입가에 맺혔던 미소가 살짝 흐트러졌다.“해찬이 대학 후배야. 해찬이가 워낙 착해서 딴 사람 잘 챙겨주잖아.”그 말에 묘한 웃음이 서리는 주위 부인들.착해서 그런 거라고?해찬이 눈길이 저 아가씨에게서 떨어질 줄을 모르는데?수상해지는 분위기를 감지한 석연란이 몰래 주먹을 꽉 쥐었다.참다 못해 결국, 주해찬이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 강하리에게 다가갔다.막 손연지와 통화를 끝낸 강하리가 고개를 돌리자, 한 여인이 꼿꼿하게 서 있는 게 보였다.주해찬을 어느 정도 닮은 인상에 누군지 대뜸 짐작이 갔다.“안녕하세요 사모님.”“처음 보네요. 사진보다 훨씬 예쁘네.”치가 떨렸지만 석연란의 목소리는 온화하기만 했다.“감사합니다.”“이렇게 예쁜 아가씨가 남자가 모자라진 않을 거고. 그러니까 우리 해찬이 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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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97화

귓가에 울리는, 너무나도 익숙한 목소리에 강하리는 돌아볼 필요도 없이 누군지 알 수 있었다.바로 그 품 안에서 벗어나려고 친 몸부림은 허사로 돌아갔고.“구 대표님?”석연란이 약간 놀란 듯 눈을 치켜떴다.“석 여사님처럼 높, 으, 신, 분이 절 알아보시다니. 좀 의외인데요.”구승훈의 말에 석연란의 입매가 쩍 굳었다.이 상류사회에서 구승훈을 몰라보는 사람이 있기나 할까.저 말의 뜻은, 주씨 가문이 상류 축에 끼지 못 한다고 비꼬는 뜻이었다.물론 주씨 가문이 기둥 굵은 가문임에는 틀림없지만.가문 내력 특성상, 사람들 눈에 고고하게 비치는 기타 가문에 반해, 배후에서 힘을 쓰는 은둔형 가문으로 자리매김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었다.“아무리 구 대표님이라도 나이도 어리신 분이, 지금 보경시에서 우리 주씨 가문에 도발하는 건가요?”석연란의 음성이 딱딱하게 굳어지기 시작했다.하지만 그 반항은 구승훈의 말 한 마디에 힘없이 무너져 버렸다.“도발하면 어쩔 건데요?”절대적인 실력의 구씨 가문 앞에 지역 우세란 부질없는 것.아무리 보경시가 권력의 집중지라고 해도, 구씨 가문 실세를 건드리려면 오랜 시간 고심해봐야 할 터였다.하지만 이대로 넘어가기엔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고작 강하리 같은 비천한 여자 때문에 자기 아들이 수렁에 빠지는 걸 지켜볼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오늘 연회는 외교부 내부 모임인데, 구 대표님이 여기엔 어쩐 일이신지요?” 순간 구승훈의 표정이 차갑게 가라앉았다.“석 여사님이 대체 무슨 역량으로 강하리를 외교부에 못 들어가게 할지 지켜보려고 와 본 겁니다.”석연란의 눈이 크게 부릅떠졌다.“진태형 현 외교부장과 박근형 교수의 각광을 받고있는 사람을 주씨 가문에서 대체 무슨 수로 막을지를요.”얼굴이 빳빳하게 굳은 석영란.그냥 강하리가 제풀에 놀라 도망가게 하려고 놓은 으름장일 뿐이었다.물론 주씨 가문에 그럴 역량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그 역량이 석영란 그녀의 힘으로 휘두를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아니, 이보세요 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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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98화

“석 여사님, 상황 파악이 덜 되셨네요. 대체 누가 누구한테 들러붙는다고요?”구승훈이 코웃음을 쳤다.“그게 무슨…….”“하루가 멀다하게 강하리 만나러 연성에 찾아온 게 누군데.”“그건-.”“심지어 정월 초하루에까지도 강하리 보러 왔더라고요. 가문 설연회 다 때려치고.”“…….”“그게 강하리가 오라고 떼를 써서 되는 일이란 말씀은 못 하시겠죠?”구승훈이 한 마디씩 할 때마다 석연란의 얼굴은 점점 더 흙빛이 되어갔다.“강하리 탓만 하지 마시고 아들 간수나 잘 좀 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구승훈이 쐐기를 마지막으로, 석연란은 멍청한 표정이 되어 꺽꺽거렸다.“어머니!”급급히 달려왔다가 구승훈의 말을 들은 주해찬의 얼굴도 일그러졌다.자리를 비우는 게 아니었는데. 강하리를 혼자 놔 두는 게 아니었는데.“지금 여기서 뭐 하시는 거예요!”“아, 아무것도 아니야 아들. 마침 하리 양이 보이길래 인사나 한 번 하려고 온 거야.”급조한 티를 팍팍 풍기는 석연란의 해명이 통할 리 없었다.자신의 어머니의 위인을 너무나도 잘 알고있는 주해찬이기도 했으니 말이다.강하리를 만나지 말라고 바가지 긁다 못해, 급기야 직접 따지러 온 게 분명했다.“강하리 일은 참견 마시라고 했잖아요!”“얘가! 그게 엄마한테 할 소리야?”“선배, 저 좀 피곤해서 먼저 들어가 볼게요.”3파전이 모자 다툼으로 번질 각이 보이자, 강하리가 다급히 입을 열었다.강하리를 돌아본 주해찬이 뭐라 하려고 입을 열려다가, 그녀의 허리춤에 놓인 구승훈의 손을 보고는 대뜸 강하리를 확 낚아챘다.‘이 새끼가!’뿔난 구승훈이 다시 강하리를 잡아끌려고 손을 뻗었다.그리고, 서늘한 그녀의 눈길에 도로 거둬들였다.“하리야, 할 얘기가 있어. 잠시만 기다려 줄래?”주해찬이 강하리와 눈높이를 맞추고는, 미안함 가득 담긴 절절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그와 동시에 점점 구겨지는 석연란의 얼굴을 본 강하리가 애써 웃었다.“그, 선배. 나중에 전화로 하면 안 될까요? 저 진짜 너무 피곤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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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99화

여젼히 휘영청 밝은 보름달.연회장의 열기가 멀어져갔다.호텔 로비를 지나는 내내, 강하리는 연회장에 내버려 두고 나온 주해찬이 걱정되었다.사실 따지고 보면 잘못한 것 없이 상처만 받은 해찬 선배였다.사귀자고 한 이도, 먼저 이별 통보를 한 이도 강하리 자신이었으니 말이다.호텔 게이트를 나오는 순간까지 걱정 가득한 강하리의 얼굴에 구승훈이 미간을 구겼다.언짢음 한 가득 담아 구승훈이 뭐라고 하려던 찰나.그들 앞에 차 한 대가 멈춰섰고, 진태형이 차에서 내려 두 사람에게 다가왔다.“하리 양, 연회에서 있었던 일 전해들었어요. 그냥 무시해 버려요. 살다 보면 별별 인간이 다 있고, 모든 사람과 사이좋게 지낼 수는 없으니까요.”강하리가 움찔했다. 진태형이 자신을 위로해줄 거란 생각은 못 해봤는데.“네, 부장님.”강하리가 깍듯히 대답하고는 잠시 멈췄다가 다시 말을 이러갔다.“하지만 사람들 눈에 보이는 제 과거가 있는데, 그런 부분은 어떻게…….”“하리 양이 외교부에 들어오는 데 걸림돌이 될 일은 없을 겁니다. 구 대표님께서 자초지종을 다 얘기해 주셨어요.”또 한 번 움찔한 강하리.저도 모르게 구승훈을 휙 돌아보았다. 어깨를 얄미운 각도로 으쓱이는 구승훈이 보였다.그 둘을 번갈아 보던 진태형이 웃음을 터트렸다. “피곤할 텐데 일찍 들어가 봐요. 내일 일정도 오늘 못지 않게 빡세니까요.”말을 마친 진태형이 호텔 안으로 들어갔다.한참을 말 없이 서 있던 강하리가 입을 열었다.“진 부장님께 뭐라고 얘기한 거예요?”“뭐 그냥, 우리 둘이 정식으로 사귄다고.”구승훈의 대답에 강하리는 순식간에 만감이 교차하는 기분이었다.그건 그거고, 고마운 건 고마운 거다.“감사해요.”구승훈이 입을 벙긋거리다가 도로 닫았다.‘내가 원하는 건 감사하단 말이 아니라고’가 입 안에서 맴돌다가 그대로 삼켜졌다.강하리의 입에서 ‘그럼 안 감사한 걸로 할께요’라도 나올까 봐서.긴말 필요 없이, 바로 지금 강하리가 해줄 수 있는 대가를 제시하는 게 훨 나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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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00화

”선배, 선배는 더 좋은 여자를 만나야 해요.”“최고로 좋은 여자를 이미 만나버려서 안 될 것 같네.”“…….”강하리가 입을 다물었다.이렇게까지 말이 나온 이상, 무슨 설득도 소용없을 것 같았다.“거참 뒤끝 거창하기도 해라. 이미 헤어진 마당에 빠릿빠릿하게 좀 끝냅시다.”어느새 구승훈이 썩소를 지으며 다가와 있었다.“……지는.”주해찬의 입에서 비꼬듯 흘러나온 냉담한 말 한 마디에, 구승훈과 강하리가 서로 다른 의미로 움찔했다.강하리는 선배한테서 처음 듣는 경박한 말투라서.구승훈은 자신을 노려보는 주해찬의 눈길이, 자신에게 마음이 떠났다고 말하던 강하리의 눈빛과 묘하게 닮아서.말문이 꺽 막힌 주해찬의 얼굴색이 급 어두워졌다.그러거나 말거나, 말을 마친 주해찬은 강하리에게 “해피뉴이어”를 남기고는 그대로 떠나갔다.멀어져가는 주해찬의 뒷모습을 응시하며, 강하리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눈알 빠져나오겠네. 어깨도 나보다는 한참 좁구만 뭐.”투덜거리는 구승훈. 강하리가 휙 돌아 그를 노려보았다.“자뻑 하나는 인정해 드리죠.”“됐고, 뭐 먹고싶어?”구승훈이 아랑곳 않고 강하리의 손을 잡아 주차장으로 향했다.물론, 1초만에 강하리가 손목을 비틀어 빠져나왔지만.“아무거나요.”도통 밥 먹을 기분이 아니었다.연회를 빌어 주해찬과 확실하게 얘기를 끝내려고 했는데.석연란이 없었더라도 그럴 계획이었다. 딴 것보다 주해찬의 앞길을 더이상 막고싶지 않아서였다.헤어진 뒤에도 자신을 바라보는 주해찬의 눈길을 마주할 때마다, 양심이 따끔거리는 느낌이 들던 강하리였다.어디 내놔도 손색이 없을 명문가 훈남 능력자 도련님을 별볼일 없는 자신이 꿰차고 있단 생각에 말이다. 차에 올라서도 강하리의 머릿속은 온통 주해찬 생각 뿐이었다.빠밤 빰 빰! 갑자기 커진 차 안 음악소리.화들짝 놀란 강하리가 구승훈을 쨰릿 노려보았다.“미친 거 아니에요?”구승훈이 입가에 알지 못 할 웃음을 지었다.화려한 불빛이 수놓은 보경시의 밤거리.맛집들과 예쁜 커피숍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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