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하리!”뚝. 뚜- 뚜-구승훈의 목소리가 들리기 바쁘게 전화를 끊어버리는 강하리.구승훈은 간병인 아줌마한테서 빌린 핸드폰을 쥔 채 쓴 입맛만 다셨다.‘이젠 이름조차도 부르지 말라는 건가.’“언제 그랬어요? 보경시에 데려갈 거라고?”“어제 여기가 안전하지 않다면서 보경시 병원 알아본다 그러셨어요. 그 사람들 미친 거 아니에요? 착한 하리 아가씨를 어떻게 그렇게 모욕할 수가 있는 걸까요.”아줌마가 혀를 쯧쯧 찼다.“오늘 병원에는 왔었고요?”아려오는 가슴을 갈무리하며 구승훈이 핸드폰을 돌려주었다.“오늘 안 오신댔어요. 어제 퇴근하고 다녀가셨는데, 주현 도련님이라는 남자분이 따라와서는 일 얘기를 한답시고 이글거리는 눈길로 우리 하리 아가씨를 위아래로 훓어보는데, 옆에 제가 다 부담스러웠지 뭐예요.”지나가는 얘기 같은 아줌마의 수다였지만, 구승훈은 귀가 번쩍 뜨였다.“정주현이요?”하지만 곧 피식 웃었다.“용을 쓰네요 참. 어차피 퇴짜 맞을 건데.”“하이고, 대표님이야말로 퇴짜 맞으신 거 아니에요? 핸드폰을 다 빌려쓰시고.”아줌마가 안쓰럽다는 눈길로 구승훈을 흘겨보았다.“……놀래켜 주려고 그랬던 겁니다.”겨우 한 마디 해명했지만, 아줌마에게 씨알도 안 먹혔다.“퍽이나요. 아가씨가 대표님 번호 차단하셨단 거 다 아는데요 뭘.”“…….”도망치듯 병원에서 나와버린 구승훈.그 길로 대양 지사로 찾아갔다.하지만 거기에도 강하리는 없었다. 띠꺼운 표정으로 마중 나온 정주현만 있을 뿐.“구 대표님께서 여긴 어쩐 일로?”말투마저 퉁명스러운 정주현. “환영하지 않음”을 온 몸으로 고스란히 내비치고 있었다.“강하리는?”“말이 짧으시네?”정주현이 입가를 삐뚜름히 올렸다.“내가 왜 그걸 알려줘야 하죠?”“이제 막 연성에 자리잡은 회사 치곤 태도가 영 맘에 안 드는데.”구승훈의 표정이 살벌해지기 시작했다.“하지만 강 경리가 있다면 곧 일떠서겠죠.”한 마디도 지지 않는 정주현.“그게 강하리를 끌어온 이유야? 정주현, 니들이 무슨 꿍꿍
송씨 집안에 들인다?참 하찮은 조건이기도 해라.“어려서부터 아빠도, 동생도 없는데 무슨 소리세요. 이제 와서 그 토 나오는 수작질은 집어치우시죠.”“하리야! 내가 이렇게 빌게. 직접 도와주지 않아도 돼! 구승훈에게 좋은 말 몇 마디라도…….”송동혁은 정말이지, 쓸 수 있는 방법은 다 동원했었다.한 치의 오차도 없는 계산이라고 생각했지만, 심준호가 한 수 위였다.일이 난 뒤에도 모진 애를 쓰며 송유라를 구제해내려고 했지만, 독한 구승훈이 아예 정신병원에 처넣어버렸고.병원에 갇힌 그날 밤, 송유라는 정신줄을 놓아버렸다.‘하긴, 거기가 좀 살벌해야지.’강하리가 희미하게 입꼬리를 올렸다.“왜 구승훈에게 직접 찾아가지 않으신 거죠? 그쪽 따님을 보배처럼 아끼던 거 아니었나요?”“우리를 만나줘야 뭐든 해볼 거 아니야.”송동혁이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 쉬었다.“아, 그래서 만만한 게 나다, 이 말씀이신가요?”강하리의 눈매가 갑자기 예리해졌다.“예전 그쪽이 했던 짓들 다 까발라 버려요 확?”이미 나락으로 떨어진 명성에 사생아 타이틀까지 덮씌워지는 건 정말 싫었지만.이미 나락으로 떨어진 이상, 더 잃을 명성이 없는 그녀이기도 했다.더 갈구면 당장이라도 터질 듯 팽팽한 그녀의 태도에 송동혁의 얼굴에서 핏기가 쏙 빠져나갔다.“진짜야! 내가 한 약속들 다 진짜라고! 공식적으로 하리 네가 내 딸이라고 밝힐 수도 있단 말이다!”“당신 같은 쓰레기의 딸 노릇을 내가 원할 것 같냐고! 당장 꺼져!”날카롭게 외친 강하리가 차에 올라탔다.부아앙!미친듯이 차가 사라졌고, 송동혁이 선 자리엔 차가 지나간 먼지만이 풀럭거렸다.멍해 굳어졌던 송동혁이 음침한 낯빛으로 바뀌더니 어딘가에 전화했다.……보경시.공항에서 나온 강하리 앞에 주해찬이 서 있었다.“선배.”주해찬이 자연스레 그녀의 손에서 캐리어를 받아쥔다.“피곤하지?”“아직은 괜찮아요.”“인터넷에 올라왔던 기사들, 신경쓰지 마. 다 네가 잘나서 꼬이는 것들이니까. 알았지?”“그럼요 선배.
익히 들어오긴 했지만, 강하리가 백아영을 실제로 만난 건 처음이었다.이름부터가 젊음으로 차 넘치는 백아영 전 외교부장은, 칠순 넘은 은빛 나이에도 불구하고 눈에서 맑은 정기가 돌고있었다.이쪽의 눈빛을 느꼈을까, 진태형이 고개를 돌려 이쪽을 바라보았다.그 눈길을 따라 백아영의 눈길도 이쪽을 향한 순간.강하리의 얼굴에 눈길이 닿은 백아영이 넋이 나간 표정이 되었다.“부장님, 이쪽이 바로 준호가 입에 달고 다니던 강하리 양입니다.”진태형의 소개에 정신이 퍼뜩 든 백아영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준호한테서 얘기 많이 들었어요, 하리 양. 진작 만나보려고 했는데 이렇게나 오래 걸렸네요.”백아영의 따뜻한 눈빛 속에, 한 줌의 감회가 스쳐지났다. 마치 강하리에게서 다른 사람의 모습이 보이는 것처럼.그리고 이어 콧등이 시큰해왔다.준호가 몇 번이고 입에 올렸을 때도 반신반의하던 백아영이었다.그러나 강하리의 실물을 보는 순간, 한 가지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내 딸이…… 살아 돌아왔어.’정말이지 닮아도 이렇게 닮을 수가 없다.마찬가지로 예쁘고 똑 부러지던 딸의 모습을 한 아이가, 햇살처럼 활짝 웃는다.“백 부장님, 티비에서 보던 것보다 훨씬 아름다우세요.”“엄마”가 아니라 “부장님”으로 불리는 순간, 현실로 되돌아온 약간의 허망함을 갈무리하며, 백아영이 강하리의 두 손을 꼭 잡아쥐었다. “하리 양이야말로 정말 예쁘네요. 시간 날 때 집에 한 번 밥 먹으러 와요.”“네! 꼭 찾아뵙겠습니다!”“부장님, 하리 양이 오늘 회의 번역 전담입니다.”진태형의 귀띔에 그제야 백아영이 강하리의 손을 놓았다.“아, 그래요? 많이 바쁠 텐데, 내가 괜히 하리 양 시간을 잡아먹은 게 아닌지 모르겠네요. 오늘 회의 잘 부탁드려요.”“아닙니다. 그럼 먼저 가 보겠습니다.”깍듯이 인사를 마친 강하리가 박근형과 함께 멀어져갔다.백아영의 눈길은 강하리의 뒷모습에서 떠날 줄을 몰랐다.“태형 씨, 혹시 그럴 가능성은 없을까요? 하리 양이…….”“저도 혹시나 해서
외교부 소속 호텔에서 열린 연회.강하리는 입장하는 대로 인파에 둘러싸였다.독보적으로 예쁘기도 했지만, 박근형의 뒤를 이를 사람이란 소문이 퍼진 탓도 있었다.“하리야, 어떻게 왔어? 그러잖아도 전화해볼까 망설이던 참이었는데.”주해찬이 눈을 빛내며 다가왔다.“교수님이 외교부 모임이라고 하셔서요. 한 번 와보고 싶었어요.”“진작 알았더라면 데리러 갔을텐데.”“그럼 하리는 해찬이 너한테 맡길테니 잘 챙겨줘야 한다?”박근형 교수가 웃으며 한 마디 끼어들고는 둘을 남긴 채 안쪽으로 들어갔다.한편 연회장 저쪽 켠.도란도란 얘기를 나누는 주해찬과 강하리를 아니꼬운 눈길로 바라보는 한 여인이 있었다.“연란 씨, 저 쪽이 해찬이 여자친구야?”그 옆으로는 우아한 차림의 부인들이 모여있었다.누군가의 물음에 주해찬의 어머니, 석연란의 미간이 순간 구겨졌다.하지만 이내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그럴 리가. 우리 해찬이가 아무나 사귈 사람도 아니고.”말 속에 숨은 뜻을 알아챘다는 듯, 주위의 부인들이 고개를 끄덕인다.“그나저나 진짜 예쁘긴 한 걸. 여자인 내가 봐도 감탄이 나올 정돈데 해찬이는 오죽하겠어. 안 그래요?”석연란의 입가에 맺혔던 미소가 살짝 흐트러졌다.“해찬이 대학 후배야. 해찬이가 워낙 착해서 딴 사람 잘 챙겨주잖아.”그 말에 묘한 웃음이 서리는 주위 부인들.착해서 그런 거라고?해찬이 눈길이 저 아가씨에게서 떨어질 줄을 모르는데?수상해지는 분위기를 감지한 석연란이 몰래 주먹을 꽉 쥐었다.참다 못해 결국, 주해찬이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 강하리에게 다가갔다.막 손연지와 통화를 끝낸 강하리가 고개를 돌리자, 한 여인이 꼿꼿하게 서 있는 게 보였다.주해찬을 어느 정도 닮은 인상에 누군지 대뜸 짐작이 갔다.“안녕하세요 사모님.”“처음 보네요. 사진보다 훨씬 예쁘네.”치가 떨렸지만 석연란의 목소리는 온화하기만 했다.“감사합니다.”“이렇게 예쁜 아가씨가 남자가 모자라진 않을 거고. 그러니까 우리 해찬이 좀
귓가에 울리는, 너무나도 익숙한 목소리에 강하리는 돌아볼 필요도 없이 누군지 알 수 있었다.바로 그 품 안에서 벗어나려고 친 몸부림은 허사로 돌아갔고.“구 대표님?”석연란이 약간 놀란 듯 눈을 치켜떴다.“석 여사님처럼 높, 으, 신, 분이 절 알아보시다니. 좀 의외인데요.”구승훈의 말에 석연란의 입매가 쩍 굳었다.이 상류사회에서 구승훈을 몰라보는 사람이 있기나 할까.저 말의 뜻은, 주씨 가문이 상류 축에 끼지 못 한다고 비꼬는 뜻이었다.물론 주씨 가문이 기둥 굵은 가문임에는 틀림없지만.가문 내력 특성상, 사람들 눈에 고고하게 비치는 기타 가문에 반해, 배후에서 힘을 쓰는 은둔형 가문으로 자리매김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었다.“아무리 구 대표님이라도 나이도 어리신 분이, 지금 보경시에서 우리 주씨 가문에 도발하는 건가요?”석연란의 음성이 딱딱하게 굳어지기 시작했다.하지만 그 반항은 구승훈의 말 한 마디에 힘없이 무너져 버렸다.“도발하면 어쩔 건데요?”절대적인 실력의 구씨 가문 앞에 지역 우세란 부질없는 것.아무리 보경시가 권력의 집중지라고 해도, 구씨 가문 실세를 건드리려면 오랜 시간 고심해봐야 할 터였다.하지만 이대로 넘어가기엔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고작 강하리 같은 비천한 여자 때문에 자기 아들이 수렁에 빠지는 걸 지켜볼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오늘 연회는 외교부 내부 모임인데, 구 대표님이 여기엔 어쩐 일이신지요?” 순간 구승훈의 표정이 차갑게 가라앉았다.“석 여사님이 대체 무슨 역량으로 강하리를 외교부에 못 들어가게 할지 지켜보려고 와 본 겁니다.”석연란의 눈이 크게 부릅떠졌다.“진태형 현 외교부장과 박근형 교수의 각광을 받고있는 사람을 주씨 가문에서 대체 무슨 수로 막을지를요.”얼굴이 빳빳하게 굳은 석영란.그냥 강하리가 제풀에 놀라 도망가게 하려고 놓은 으름장일 뿐이었다.물론 주씨 가문에 그럴 역량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그 역량이 석영란 그녀의 힘으로 휘두를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아니, 이보세요 구
“석 여사님, 상황 파악이 덜 되셨네요. 대체 누가 누구한테 들러붙는다고요?”구승훈이 코웃음을 쳤다.“그게 무슨…….”“하루가 멀다하게 강하리 만나러 연성에 찾아온 게 누군데.”“그건-.”“심지어 정월 초하루에까지도 강하리 보러 왔더라고요. 가문 설연회 다 때려치고.”“…….”“그게 강하리가 오라고 떼를 써서 되는 일이란 말씀은 못 하시겠죠?”구승훈이 한 마디씩 할 때마다 석연란의 얼굴은 점점 더 흙빛이 되어갔다.“강하리 탓만 하지 마시고 아들 간수나 잘 좀 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구승훈이 쐐기를 마지막으로, 석연란은 멍청한 표정이 되어 꺽꺽거렸다.“어머니!”급급히 달려왔다가 구승훈의 말을 들은 주해찬의 얼굴도 일그러졌다.자리를 비우는 게 아니었는데. 강하리를 혼자 놔 두는 게 아니었는데.“지금 여기서 뭐 하시는 거예요!”“아, 아무것도 아니야 아들. 마침 하리 양이 보이길래 인사나 한 번 하려고 온 거야.”급조한 티를 팍팍 풍기는 석연란의 해명이 통할 리 없었다.자신의 어머니의 위인을 너무나도 잘 알고있는 주해찬이기도 했으니 말이다.강하리를 만나지 말라고 바가지 긁다 못해, 급기야 직접 따지러 온 게 분명했다.“강하리 일은 참견 마시라고 했잖아요!”“얘가! 그게 엄마한테 할 소리야?”“선배, 저 좀 피곤해서 먼저 들어가 볼게요.”3파전이 모자 다툼으로 번질 각이 보이자, 강하리가 다급히 입을 열었다.강하리를 돌아본 주해찬이 뭐라 하려고 입을 열려다가, 그녀의 허리춤에 놓인 구승훈의 손을 보고는 대뜸 강하리를 확 낚아챘다.‘이 새끼가!’뿔난 구승훈이 다시 강하리를 잡아끌려고 손을 뻗었다.그리고, 서늘한 그녀의 눈길에 도로 거둬들였다.“하리야, 할 얘기가 있어. 잠시만 기다려 줄래?”주해찬이 강하리와 눈높이를 맞추고는, 미안함 가득 담긴 절절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그와 동시에 점점 구겨지는 석연란의 얼굴을 본 강하리가 애써 웃었다.“그, 선배. 나중에 전화로 하면 안 될까요? 저 진짜 너무 피곤해서요.”
여젼히 휘영청 밝은 보름달.연회장의 열기가 멀어져갔다.호텔 로비를 지나는 내내, 강하리는 연회장에 내버려 두고 나온 주해찬이 걱정되었다.사실 따지고 보면 잘못한 것 없이 상처만 받은 해찬 선배였다.사귀자고 한 이도, 먼저 이별 통보를 한 이도 강하리 자신이었으니 말이다.호텔 게이트를 나오는 순간까지 걱정 가득한 강하리의 얼굴에 구승훈이 미간을 구겼다.언짢음 한 가득 담아 구승훈이 뭐라고 하려던 찰나.그들 앞에 차 한 대가 멈춰섰고, 진태형이 차에서 내려 두 사람에게 다가왔다.“하리 양, 연회에서 있었던 일 전해들었어요. 그냥 무시해 버려요. 살다 보면 별별 인간이 다 있고, 모든 사람과 사이좋게 지낼 수는 없으니까요.”강하리가 움찔했다. 진태형이 자신을 위로해줄 거란 생각은 못 해봤는데.“네, 부장님.”강하리가 깍듯히 대답하고는 잠시 멈췄다가 다시 말을 이러갔다.“하지만 사람들 눈에 보이는 제 과거가 있는데, 그런 부분은 어떻게…….”“하리 양이 외교부에 들어오는 데 걸림돌이 될 일은 없을 겁니다. 구 대표님께서 자초지종을 다 얘기해 주셨어요.”또 한 번 움찔한 강하리.저도 모르게 구승훈을 휙 돌아보았다. 어깨를 얄미운 각도로 으쓱이는 구승훈이 보였다.그 둘을 번갈아 보던 진태형이 웃음을 터트렸다. “피곤할 텐데 일찍 들어가 봐요. 내일 일정도 오늘 못지 않게 빡세니까요.”말을 마친 진태형이 호텔 안으로 들어갔다.한참을 말 없이 서 있던 강하리가 입을 열었다.“진 부장님께 뭐라고 얘기한 거예요?”“뭐 그냥, 우리 둘이 정식으로 사귄다고.”구승훈의 대답에 강하리는 순식간에 만감이 교차하는 기분이었다.그건 그거고, 고마운 건 고마운 거다.“감사해요.”구승훈이 입을 벙긋거리다가 도로 닫았다.‘내가 원하는 건 감사하단 말이 아니라고’가 입 안에서 맴돌다가 그대로 삼켜졌다.강하리의 입에서 ‘그럼 안 감사한 걸로 할께요’라도 나올까 봐서.긴말 필요 없이, 바로 지금 강하리가 해줄 수 있는 대가를 제시하는 게 훨 나을지도.
”선배, 선배는 더 좋은 여자를 만나야 해요.”“최고로 좋은 여자를 이미 만나버려서 안 될 것 같네.”“…….”강하리가 입을 다물었다.이렇게까지 말이 나온 이상, 무슨 설득도 소용없을 것 같았다.“거참 뒤끝 거창하기도 해라. 이미 헤어진 마당에 빠릿빠릿하게 좀 끝냅시다.”어느새 구승훈이 썩소를 지으며 다가와 있었다.“……지는.”주해찬의 입에서 비꼬듯 흘러나온 냉담한 말 한 마디에, 구승훈과 강하리가 서로 다른 의미로 움찔했다.강하리는 선배한테서 처음 듣는 경박한 말투라서.구승훈은 자신을 노려보는 주해찬의 눈길이, 자신에게 마음이 떠났다고 말하던 강하리의 눈빛과 묘하게 닮아서.말문이 꺽 막힌 주해찬의 얼굴색이 급 어두워졌다.그러거나 말거나, 말을 마친 주해찬은 강하리에게 “해피뉴이어”를 남기고는 그대로 떠나갔다.멀어져가는 주해찬의 뒷모습을 응시하며, 강하리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눈알 빠져나오겠네. 어깨도 나보다는 한참 좁구만 뭐.”투덜거리는 구승훈. 강하리가 휙 돌아 그를 노려보았다.“자뻑 하나는 인정해 드리죠.”“됐고, 뭐 먹고싶어?”구승훈이 아랑곳 않고 강하리의 손을 잡아 주차장으로 향했다.물론, 1초만에 강하리가 손목을 비틀어 빠져나왔지만.“아무거나요.”도통 밥 먹을 기분이 아니었다.연회를 빌어 주해찬과 확실하게 얘기를 끝내려고 했는데.석연란이 없었더라도 그럴 계획이었다. 딴 것보다 주해찬의 앞길을 더이상 막고싶지 않아서였다.헤어진 뒤에도 자신을 바라보는 주해찬의 눈길을 마주할 때마다, 양심이 따끔거리는 느낌이 들던 강하리였다.어디 내놔도 손색이 없을 명문가 훈남 능력자 도련님을 별볼일 없는 자신이 꿰차고 있단 생각에 말이다. 차에 올라서도 강하리의 머릿속은 온통 주해찬 생각 뿐이었다.빠밤 빰 빰! 갑자기 커진 차 안 음악소리.화들짝 놀란 강하리가 구승훈을 쨰릿 노려보았다.“미친 거 아니에요?”구승훈이 입가에 알지 못 할 웃음을 지었다.화려한 불빛이 수놓은 보경시의 밤거리.맛집들과 예쁜 커피숍이
강하리의 눈빛이 번쩍이며 구승훈의 말에 담긴 의미를 순식간에 알아차렸다.그가 오늘 인터넷 속 모두가 보는 앞에서 그녀에게 매달리는 역할을 자처했으니 이젠 그녀가 자신을 데려가야 한다는 말이었다.강하리는 구승훈의 목에 팔을 걸고 자기 앞으로 끌어당기며 속삭였다.“보답이라, 문제없지. 구 대표님이 우선 그 쓸데없는 여자들 먼저 해결하면!”이번 일에 진시연이 연루되지 않았을 리가 없다.석미란이 심준호에게 고소당한 이후 석연란조차 한동안 잠잠했고 그녀가 대외적으로 자신에 대한 악담을 퍼뜨릴지 몰라도 온라인에 증거를 남기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그러니 누가 이 모든 일을 주도하고 있는지 한눈에 알 수 있었다.개자식, 하여간 여자가 너무 많이 꼬인다.강하리는 계속해서 구승훈과 사무실에서 꽁냥거리진 않았다.집에 손연지가 있었기에 가는 길에 백아영에게 전화를 건 강하리는 구승훈을 따라 별장으로 돌아왔다.어두운 별장을 보며 강하리는 손연지가 아직 자는 줄 알았다.그녀가 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 인공지능이 불을 켜자 갑자기 별장 전체가 환하게 밝아졌다.강하리가 가방을 내려놓고 손연지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위층으로 올라가려는 순간 갑자기 구승훈이 뒤에서 안았고 곧이어 그녀가 반응할 틈도 주지 않고 소파에 쓰러뜨렸다.강하리가 말하기도 전에 구승훈은 그녀의 입술을 막았고 남자의 손이 불순하게 그녀의 다리를 어루만졌다.“자기야, 다리 예쁘다.”강하리는 남자의 의도를 단번에 알아챘다.이 개자식!머릿속엔 그 짓밖에 없는 건지.얼굴이 화끈 달아오른 그녀는 손연지에 대해 말하는 것도 잊어버렸다.“당신... 읍...구승훈은 거침없이 그녀의 스타킹을 찢어버리고는 그녀의 손을 끌어 벨트로 가져갔다.“도와줘, 자기야.”강하리의 얼굴이 화끈거렸다.“일단 기다려.”구승훈은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종아리를 잡고 부드럽게 주물렀다.“못 기다려.”강하리는 그를 세게 밀었다.“아니, 내 말은...”“어머!”강하리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계단 너머에서 손연지
주해찬은 다소 침울한 표정으로 잠시 침묵을 지키더니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아니라고 하면 믿어줄래?”주해찬은 정말 강하리에게 계속 사실을 숨길 생각도, 진시연을 도울 생각도 없었다.그냥... 강하리가 곤경에 처했을 때 그때 나서서 도와주고 싶었을 뿐이었다.그러면 강하리의 마음속 망가진 그의 이미지를 조금이라도 되돌릴 수 있을 것 같아서.그런데 구승훈이 이토록 매몰차게 굴 줄은 몰랐다.아버지가 얼마나 깨끗하고 정직한 사람인지 장담할 수 없지만 적어도 부패한 관리들처럼 부정부패와 뇌물 수수를 일삼지는 않을 것이고 할아버지도 절대 이런 일이 일어나도록 가만둘 리 없었다.하지만 부패를 철저히 타도하는 지금 같은 시기에 작은 선물을 몇 개 받은 것만으로도 큰 문제가 된다.게다가 구승훈은 그 증거를 노골적으로 인터넷에 올렸고 관련 부서에 실명으로 가차 없이 신고했다.구승훈은 결코 자신을 감추는 사람이 아니었다.그가 원하는 건 주해찬의 타협과 강하리 앞에서 완전히 신뢰를 잃는 것이었다.사실 구승훈이 처음 병원에서 그를 떠봤을 때부터 쉽게 놓아주지 않을 거라는 걸 잘 알았다.다만 줄곧 비현실적인 희망을 붙잡고 있었는데 지금 이 순간이 되어서야 주해찬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그의 완전한 패배라는 걸.“미안해, 하리야. 엄마한테 사과하라고 할게. 그리고... 인터넷에 너에 대한 루머를 유포한 것도 이모가 한 짓이야. 이모한테도 사과하라고 할게. 그리고 하리야, 내 다리...”주해찬은 말하며 심호흡하듯 잠시 멈춘 뒤 다시 말을 이어갔다.“사실 거의 다 나았어.”강하리는 당황했고 주해찬은 다시 입을 열었다.“미안해. 조금만 더 나랑 같이 있어 주길 바라서, 구승훈이랑 다시 만나서 네가 또 상처받을까 봐 내가...”“선배.” 강하리가 갑자기 주해찬의 말을 가로챘다.“고마워요.”그녀가 고맙다고 말할 거라곤 상상조차 못 했다.강하리가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예전에 여러 번 날 도와주고 날 이렇게 생각해 주고 지금도 날 위해 나서서 진실을
두 사람 관계에 있어서 누가 봐도 을인 모습이었다.사무실에 있던 몇몇 기자들은 서로 눈치만 봤다.에비뉴와 정안그룹이 강하리 명의로 되어 있다고?그렇다면 강하리 혼자서도 B시 재벌과 맞먹는 것 아닌가.여러 기자가 모두 멍한 표정으로 구승훈을 바라봤다.구씨 가문의 권력자 구승훈이 자신은 아내 덕분에 먹고 사는 놈이라고 말하다니, 그것도 제법 자랑스러워하는 듯했다.“그러면 강 대표님이 구 대표님과 송유라 씨 사이에 개입했다는 건...”구승훈의 눈빛이 어두워졌다.“제가 우리 강 대표님과 언제 만났는지 아세요?”기자는 고개를 저었고 구승훈은 오른손 손가락으로 왼쪽 약지에 낀 반지를 살며시 돌리면서 시선을 내리깔고 웃었다.“아홉살 때 만났어요. 그 여자가... 제 삶의 유일한 구원이었죠.”구승훈은 복잡한 감정이 가득한 눈빛으로 카메라를 바라보았다.“자기야, 미안해. 오랜 세월 많이 힘들었지? 오늘 여기서 맹세할게. 나 구승훈은 평생 강하리의 것이란 걸.”강하리는 화면 속 구승훈을 바라보다가 갑자기 코끝이 시큰거렸다.개자식, 인터뷰만 할 것이지 왜 저런 말을 해서는.하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구승훈의 말에 그녀의 마음속에 작게나마 남아있던 불편함이 말끔히 사라졌다는 걸.인터넷에 그 많은 루머들이 떠돌아다녀도 언제나 그녀를 감싸줄 사람이 있었다.구승훈의 인터뷰는 곧 화제성을 끌어모았고 강하리를 욕하던 사람들은 모두 흔적도 없이 사라진 채 댓글 창에는 축복의 글이 가득했다.강하리는 휴대폰에 달린 축복의 댓글을 바라보다가 자신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그녀는 휴대폰을 들고 구승훈에게 전화를 걸었고 구승훈의 목소리에는 미소가 묻어났다.“강 대표님, 나 보고 싶어?”강하리는 입술을 달싹이며 웃었다.“오늘 밤 일찍 돌아가서 맛있는 거 해줄게.”구승훈은 눈썹을 치켜올렸다.“맛있는 음식만 있어?” 강하리는 멈칫했다.“또 뭘 원해?”“다리. 자기야, 한번 해보자.”강하리는 이를 갈며 그냥 전화를 끊었고 구승훈은 끊어진 전화를 바라보며
구승훈의 눈빛이 어두워졌다.정양철은 죽었지만 애초에 그가 강하리 어머니에게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는 여전히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였다.이대로 알 수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이 시점에 정양철과 관련된 또 다른 단서가 나올 줄이야.“확실해요?”“물론이죠.”구승훈은 전화를 끊고 심준호에게 연락했고 그와 대화를 마친 뒤 밖을 향해 말했다.“시작하지.”잠시 후 비서가 기자 10여 명을 데리고 구승훈의 사무실로 들어왔다.나문빈이 홈페이지를 정상으로 되돌리자 강하리를 욕하던 사람들은 모두 SNS로 옮겨갔고 과거 여러 번 검색어에 오르며 욕을 먹었던 흑역사도 전부 밝혀졌다.SNS에서 누군가가 돈으로 사주했는지 갈수록 심한 욕설을 퍼붓고 있었다.안예서는 점점 더 고조되는 SNS의 화제성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계약서를 하나하나 처리하는 강하리를 보며 조금은 불안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대표님, 이걸 제대로 밝힐 방법을 찾아야겠어요.”강하리는 고개도 들지 않았다.“그럴 필요 없어. 욕하다 지치면 자연스레 그만두겠지.”안예서가 다소 우울한 표정으로 강하리를 설득하려는 그녀는 이미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었다.“안진 그룹 총괄팀장과 약속 잡아줘.”안예서는 다소 무력한 한숨을 내쉬며 뒤돌아 사무실을 나섰다.그녀가 사무실을 나간 뒤에야 강하리는 휴대전화를 집어 들었고 손가락이 SNS 아이콘 위에서 잠시 멈칫하다 클릭했다.하지만 들어가서 보니 그녀를 욕하는 내용은 사라지고 안예서가 말했던 것들도 전부 보이지 않았다.대신 라이브 방송 하나가 떠서 클릭해 본 강하리는 깜짝 놀랐다.구승훈이었다.뒤에 비치는 장소는 그의 사무실 같았다.남자는 검은 셔츠를 입은 채 느긋하게 의자에 기대어 손가락엔 어느새 반지를 끼고 있었다.자세히 보면 그녀가 끼고 있는 반지와 같은 모델이지만 다이아몬드가 그렇게 크지 않을 뿐이었다.강하리는 무의식적으로 손가락에 낀 반지로 시선을 옮겼고 그 시각 왠지 모르게 인터넷에서 자신에 대해 뭐라고 말하든 다 상관없는 것처럼 느껴졌다.무슨
구승훈은 휴대폰 메시지를 보고 자신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밤에 보상해 줄래?]손연지가 왔다며 허튼수작 부리지 말라고 답장하려던 찰나 갑자기 전화벨이 울렸고 안예서의 초조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대표님, 큰일 났어요.”강하리는 잠시 멈칫했다.“뭔데, 천천히 얘기해 봐.”“오늘 아침 일찍 우리 회사 홍보 사이트가 해킹됐는데 사이트에 온통 대표님이 스폰 받았다는 이상한 댓글이 가득해요.”안예서는 다소 격앙된 목소리로 말했고 강하리는 표정이 점점 굳어갔다.“알겠어.”전화를 끊고 회사 사이트에 들어가니 그녀의 눈에 온통 적나라한 욕설들이 가득 들어왔다.스폰을 받았다는 사람도 있고 몸을 대주고 높은 자리로 올라갔다는 말도 있었다.심지어 구승훈과 송유라 관계를 그녀가 망쳤다는 사람도 있었다.송유라가 세상을 떠난 지 거의 1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그녀의 팬들이 불쑥불쑥 튀어나왔고 지금 JM의 사이트에도 그들이 가득했다.[내연녀는 내연녀지. 뭐라 해도 해명하지 못해.][그냥 내연녀도 아니고 몸 팔아서 JM 파트너 자리를 꿰찼는데 역겹지도 않아?][JM은 유엔 산하의 번역 회사인데 저런 사람이 대표야?][허, 어떻게 그 자리로 올라갔는지 누가 알겠어. 또 유엔에 어느 높으신 분을 모셨겠지.]강하리는 댓글을 하나하나 확인하며 휴대폰을 쥐고 있는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변해버렸다.심호흡하고 안으로 들어가 손연지에게 설명한 뒤 회사로 차를 몰고 가기까지 얼마나 걸렸는지 모르겠다.차 안에서 핸들을 잡은 강하리는 문득 비웃음이 터져 나왔다.이번에도 누가 자신을 노린 건지 짐작할 수 있었다.어제의 사건은 이미 지나간 일이고 나머지는 진태형의 해명을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보아하니 상대는 그녀를 가만히 내버려둘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강하리는 회사에 도착하자 사방에서 쏟아지는 시선을 느꼈지만 아무렇지 않다는 듯 곧장 엘리베이터로 들어갔다.꼭대기 층에 도착하자 안예서가 반갑게 맞이했다.“대표님, 괜찮으세요?”강하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강하리는 차 안에서 잠든 손연지를 바라보다가 노민우의 전화를 받았고 노민우의 목소리에는 약간의 불안함이 묻어났다.“강하리 씨, 손연지한테 연락이 왔어요?”“나랑 같이 있는데 무슨 일 있어요?”노민우는 순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지금은 나랑 얘기하고 싶지 않을 테니까 같이 있어 줘요.”강하리는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결국 어쩔 수 없이 말을 꺼냈다.“노민우 씨, 연지는 잘 우는 사람이 아닌데 내가 공항에 데리러 갔을 때 밤새 운 것 같았어요. 그쪽이 무슨 사정이 있든 연지를 이렇게 울렸으면 납득할 만한 이유를 설명해야 할 거예요.”노민우가 제대로 된 설명을 하지 않으면 연성으로 찾아갈 기세로 강하리는 유난히 단호하게 말했다.노민우는 다소 억울했지만 그래도 순순히 답했다.“걱정하지 말아요. 제가 손연지한테 다 설명할게요.”강하리는 손연지를 데리고 그녀와 구승훈의 저택으로 향했고 비몽사몽 눈을 뜬 손연지는 눈앞에 가득 찬 리시안셔스와 정원 뒤편에 있는 성처럼 생긴 저택 건물을 보았다.“세상에, 하리야. 여기가 너 사는 곳이야?”강하리는 그녀의 모습에 비로소 살짝 안도했다.“그런 셈이지.”손연지는 차 문을 열고 곧장 저택으로 향했다.위층과 아래층을 몇 번이나 돌아보더니 갑자기 나와서 강하리를 껴안았다.“자기, 날 먹여 살려줘. 마침 나도 일자리 잃었는데.”강하리의 얼굴에 머금었던 미소가 옅어졌다.“일자리를 잃었다니 무슨 말이야?”손연지는 조금 전까지만 해도 들떴던 마음이 한순간에 사라지고 우울한 한숨을 내쉬었다. “직업도 없고 일자리도 잃었어. 부모님도 나 때문에 창피당했고.”강하리는 미간을 찌푸렸고 손연지가 자세히 말하지 않았지만 대충 짐작할 수 있었기에 다가가 그녀를 안아주었다.“괜찮아, 내가 복수해 줄게.”손연지는 코끝이 시큰거렸다.“하리야, 역시 너밖에 없어. 개자식들은 하나같이 나쁜 놈들이야!”강하리는 손연지를 껴안고 위로하듯 속삭였다.더 이상 구체적인 질문은 하지 않은 채 객실로 데려가 샤워할 수 있도록 욕조
구승훈은 잠든 강하리의 얼굴을 보며 참지 못하고 다가가 입술에 뽀뽀했다.“자기야, 미안해.”강하리의 속눈썹이 두 번 파르르 떨리더니 굳게 감고 있던 그녀의 눈가가 시큰거렸다.구승훈은 오늘도 잠 못 이루는 밤이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강하리를 껴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잠이 들 줄이야.겨우 반쯤 잠이 들었을 때 문득 강하리의 말이 들리는 것 같았다.“구승훈, 나도 당신을 지켜주고 싶어.”구승훈은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 그대로 꿈속으로 빠져들어 갔다.다음 날 아침, 강하리가 잠에서 깨어나기도 전에 갑자기 휴대폰이 울렸다.손연지였다.슬쩍 확인한 강하리가 서둘러 전화기를 집어 들자 저쪽에서 손연지의 코 막힌 소리가 들려왔다.“하리야, 이틀만 거기로 놀러 가도 돼?”강하리는 당황했다.“당연하지. 언제 오는데? 내가 데리러 갈게.”“나 지금 B시에 있어.”강하리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고 구승훈은 끙 앓는 소리를 내며 고통스러운 얼굴로 몸을 움츠렸다.“자기야, 방금 남은 인생의 행복을 자기 손으로 망칠 뻔한 거 알아?”강하리의 얼굴이 순간 빨개졌다.“구승훈, 괜찮아?”구승훈이 그녀의 턱을 잡고 입술을 깨물었다.“안 괜찮아. 강 대표님이 호 불어줘.”농담하는 걸 보니 괜찮나 보다.“그러게 누가 함부로 뻗으래.”구승훈은 웃으며 그녀의 귀로 다가갔다.“오늘 밤 다리로 해볼까?”강하리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좀 진지하게 굴 수는 없어?”구승훈은 여전히 웃는 얼굴로 당당하게 말했다.“망가졌는지 확인해 봐야 하지 않겠어?”강하리는 손연지 때문에 그와 더 실랑이를 벌이기 싫어 침대에서 일어나 발코니로 향했다.“손연지, 너 지금 어디 있어?”“아침부터 내 앞에서 애정행각 벌이는 건 좀 아니지 않니?”농담이었지만 손연지의 기분은 여전히 좋지 않았기에 강하리는 얼굴을 찡그렸다.“어디야, 내가 데리러 갈게.” 손연지가 강하리에게 위치를 보냈고 강하리는 서둘러 샤워를 마친 뒤 문을 나섰다.구승훈이 그녀와 동행하려는데 구승재가 갑자기 회사
구승훈의 목울대가 몇 번이나 꿈틀거리다가 겨우 가슴에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억누르고 강하리의 손가락을 잡은 채 다소 씁쓸하게 웃었다.“온실 속 화초가 아니야.”소중한 보물이다.이미 자신 때문에 너무 많은 고생을 한 그녀였기에 더는 그녀가 걱정하지 않기를 바랐고 그녀가 두려워하는 것도 더더욱 원치 않았다.그저 그녀가 밝게만 지내길 바랐다. 여초연도, 구동근도, 자신의 몸도 더는 그녀의 마음을 다치게 할 순 없었다.“자기야, 날 믿는다면 조금만 더 기다려줘. 잠깐만 기다리면 결과가 어떻게 되든 내가 전부 다 솔직하게 말할게. 알았지?”조금만 더 시간을 줘서 정상으로 돌아가거나 완전히 포기하게 됐을 때 모든 걸 이 여자에게 말할 거라고 다짐했다.강하리는 입술을 다물고 미소를 지었다.“알았어.”그렇게 말한 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옆으로 걸어갔고 구승훈은 다소 우울한 미소를 지었다.그는 강하리가 여전히 속상해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지만 그녀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구승훈은 안도하는 동시에 마음이 점점 더 씁쓸해졌다.여초연이 대체 얼마나 자신을 미워하는지 모르겠다.어쩌면 그녀의 말처럼 자신이 여초연의 인생을 망쳤으니 본인도 똑같게 망가뜨리겠다고 생각하는 걸지도.하지만 구승훈은 애초에 원하지도 않았고 이대로 그녀의 손에 망가질 생각도 없었다.그녀가 그를 낳은 이상 끈질기게 살아남을 거다.시선을 내린 구승훈이 노민준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치료하는 데 협조할게.]노민준은 곧장 전화를 걸었고 구승훈이 발코니로 가서 전화를 받으니 그의 무기력한 웃음소리가 들렸다.“잘 생각했어. 희망이 없는 건 아니야.”구승훈은 무심하게 대꾸했고 노민준은 약에 대한 이야기를 덧붙였다.웬일로 구승훈이 가만히 듣고만 있으니 전화를 끊기 전 노민준이 갑자기 물었다.“왜 갑자기 생각이 바뀐 거야?”구승훈은 방에서 침대에 앉아 책을 읽고 있는 강하리를 바라보며 입꼬리가 무의식적으로 올라갔다.“힘들게 얻은 지금의 일상을 놓치고 싶지 않아서겠지.”전화를 끊고 구
아직 해결되지 않은 갈등이 남아 있어도 기꺼이 노력해 보고 싶었다.받아들이고 이해하기 위한 노력을.강하리의 말에 심문석은 한심하다는 말만 되풀이했지만 저도 모르게 얼굴엔 웃음이 번졌고 벌써 결혼식 장소까지 고심하고 있었다.“너희 둘이 또 아이를 낳으면 그땐 할아버지가 키우마.”강하리의 표정이 잠깐 굳어졌다가 아무렇지 않은 듯 무심하게 대꾸하며 넘어갔다.식사를 마치고 떠나려는 구승훈을 보며 강하리가 물었다.“여기 안 있을 거야?”구승훈은 눈썹을 치켜올렸다.“나 보내기 싫어?”입술을 달싹이며 빤히 상대를 바라보던 강하리는 그의 눈빛에서 그동안 줄곧 그가 회피하던 답을 찾으려는 듯했다.비록 구승훈은 회사를 옮긴 지 얼마 되지 않아 바빠서 그런 거라고 했지만 강하리는 이 남자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아무리 바빠도 이렇게까지 욕구를 참는 사람이 아니었고 관계를 갖지 않아도 늘 그녀를 탐하는 사람이었다.하지만 요 며칠 그녀가 약에 취했을 때를 제외하고 말만 능글맞게 할 뿐이었다.강하리는 입술을 달싹이며 구승훈을 바라보다가 다가가 그의 손을 잡았다.“나랑 연정이가 같이 가도 돼?”멈칫한 구승훈이 여전히 장난기 가득한 미소를 지었다.“더 원하는 거야?”강하리가 웃었다.“응.”구승훈의 미소가 잠시 굳어졌고 그가 거절하기도 전에 강하리의 말이 다시 들렸다.“방금 그런 일을 겪고 나니까 좀 무서워. 구승훈, 여기 남던지 내가 따라갈게.”강하리가 말을 마치며 허리를 감싸자 구승훈의 목울대가 꿈틀거리며 낮은 웃음을 터뜨렸다.이걸 어떻게 거절하나.구승훈은 결국 남기로 했고 그가 이곳에 머물자 백아영은 연정이를 자신의 방으로 곧장 데리고 갔다.구승훈이 나가서 노민준에게 연락하고 돌아왔을 때 강하리는 이미 샤워를 끝낸 뒤였다.얇은 잠옷만 입고 있는 몸에는 구승훈이 새긴 흔적이 여전히 선명하게 남아있었다.구승훈은 문 앞에 서서 가슴에 팔짱을 낀 채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몸이 견딜 수 있겠어?”강하리는 아무 말 없이 화장대 거울로 가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