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배, 선배는 더 좋은 여자를 만나야 해요.”“최고로 좋은 여자를 이미 만나버려서 안 될 것 같네.”“…….”강하리가 입을 다물었다.이렇게까지 말이 나온 이상, 무슨 설득도 소용없을 것 같았다.“거참 뒤끝 거창하기도 해라. 이미 헤어진 마당에 빠릿빠릿하게 좀 끝냅시다.”어느새 구승훈이 썩소를 지으며 다가와 있었다.“……지는.”주해찬의 입에서 비꼬듯 흘러나온 냉담한 말 한 마디에, 구승훈과 강하리가 서로 다른 의미로 움찔했다.강하리는 선배한테서 처음 듣는 경박한 말투라서.구승훈은 자신을 노려보는 주해찬의 눈길이, 자신에게 마음이 떠났다고 말하던 강하리의 눈빛과 묘하게 닮아서.말문이 꺽 막힌 주해찬의 얼굴색이 급 어두워졌다.그러거나 말거나, 말을 마친 주해찬은 강하리에게 “해피뉴이어”를 남기고는 그대로 떠나갔다.멀어져가는 주해찬의 뒷모습을 응시하며, 강하리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눈알 빠져나오겠네. 어깨도 나보다는 한참 좁구만 뭐.”투덜거리는 구승훈. 강하리가 휙 돌아 그를 노려보았다.“자뻑 하나는 인정해 드리죠.”“됐고, 뭐 먹고싶어?”구승훈이 아랑곳 않고 강하리의 손을 잡아 주차장으로 향했다.물론, 1초만에 강하리가 손목을 비틀어 빠져나왔지만.“아무거나요.”도통 밥 먹을 기분이 아니었다.연회를 빌어 주해찬과 확실하게 얘기를 끝내려고 했는데.석연란이 없었더라도 그럴 계획이었다. 딴 것보다 주해찬의 앞길을 더이상 막고싶지 않아서였다.헤어진 뒤에도 자신을 바라보는 주해찬의 눈길을 마주할 때마다, 양심이 따끔거리는 느낌이 들던 강하리였다.어디 내놔도 손색이 없을 명문가 훈남 능력자 도련님을 별볼일 없는 자신이 꿰차고 있단 생각에 말이다. 차에 올라서도 강하리의 머릿속은 온통 주해찬 생각 뿐이었다.빠밤 빰 빰! 갑자기 커진 차 안 음악소리.화들짝 놀란 강하리가 구승훈을 쨰릿 노려보았다.“미친 거 아니에요?”구승훈이 입가에 알지 못 할 웃음을 지었다.화려한 불빛이 수놓은 보경시의 밤거리.맛집들과 예쁜 커피숍이
구승훈이 그 자리에 굳어졌다.기회를 줬다고? 언제…….‘아…….’지난번에 보경시에서 강하리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송유라를 기소하게 내버려두면 생각해 보겠다던.곧 심장이 터질 듯 후회가 구승훈을 꽉 채웠다.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왜 그게 송유라를 향한 원한이라고만 생각했을까.왜 단 한 번도, 그게 자신을 향한 마지막 한 가닥의 기대라곤 생각을 못 했을까.그러고 보니 그 전에도 기회는 여러 번 있었다.송유라를 멀리하면 생각해 보겠다고 입버릇처럼 말하던 강하리.그러가다 결국, 송유라를 내버려두면 생각해 보겠다고.그러나 자신은 어땠던가.“멀리해라”가 “내버려 둬라”가 되는, 그 차이도 못 알아채고.그게 점점 희미해지는 강하리의 기대와 마음인 줄도 모르고.벼랑끝에 선 기회의 마지막 순간까지도, 협의서를 내밀며 고소 취하를 들먹이지 않았던가.“그 얘긴 그만하고, 얼른 밥 먹어요 우리.”휘몰아치는 감정을 먼저 추스린 건 강하리였다.그만큼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는 반증이기도 했다.상처투성이가 되었다가 아문 가슴은 더 딱딱해질 수밖에 없는 법.살을 깎아내는 고통으로 겨우 벗어난 악연인데. 오직 자신을 위해 사는 인생은 이제 막 시작했는데.구승훈에게서 미움이 서서히 사라지고, 이제는 고마운 마음이 들기 시작하는 시점.사랑했던 만큼 컸던 미움마저 빠져나간, 텅 빈 방 안 같은 마음.거기에 다시 채워지는 것이 자신을 사무치게 괴롭혔던 감정이고 싶지는 않았다.묵묵부답이던 구승훈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고.그렇게 그들은 너무나도 평범한, 어떤 가정식 레스토랑에 마주 앉게 되었다.강하리가 말없이 메뉴를 고르고 웨이터를 불렀다.주문한 요리들을 위에터에게 읊는 강하리의 목소리에 구승훈의 눈에 희미한 빛이 감돌았다.“다 기억하네.”느닷없는 구승훈의 목소리에 강하리가 벙찐 표정이 되었다가, 곧 무슨 뜻인지 알아챘다.물 흐르듯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구승훈이 즐겨 먹는 요리로만 주문했던 것.“네 뭐, 하도 습관이 돼서.”구승훈과 외식할 때마다 달
힐끔.또 힐끔.불안에 찬 강하리의 눈길이 자꾸자꾸 구승훈을 향한다.반면 당사자는 운전대를 잡은 채, 초 집중 모드로 앞쪽만 주시하는 중.“뭘 그렇게 흘겨봐. 앞으로 오랫동안 더 봐야 할 얼굴 싹 다 닳을라.”열 다섯번째인가로 강하리가 이쪽을 흘끔거리는 순간, 구승훈이 느긋하게 입을 열었다.“대체 무슨 속셈인가요?” 강하리가 냉랭하게 되물었다.기존의 수법들과는 너무나도 다른 구승훈의 행보에, 경계심으로 온 몸이 빳빳하게 굳어있는 그녀였다.“그냥 호텔에 데려다주는 것 뿐이야. 약속했잖아. 털끝 하나 안 건드린다고.”온통 불신으로 가득 찬 강하리의 눈초리에 구승훈이 말을 이었다.“뭔데 그 눈빛은. 내가 여자에 미친 놈도 아니고.”“그러기엔 전과가 너무 화려하셔서요.”구승훈이 흥, 콧방귀를 뀌었다.“무척이나 그러고 싶다만, 이제부터 너한테 강박은 안 하려고. 나도 기본 매너 쯤은 있는 놈이라고.”퍽이나.강하리가 눈을 희번득였다.다행인지 불행인지 별 탈 없이, 구승훈의 차가 강하리가 묵고있는 호텔 앞에 멈춰섰다.안도의 숨을 내 쉬며 강하리가 차에서 내리려는 순간.“그 뭐야. 내가 호텔 예약을 안 했거든.”……어쩐지, 그러면 그렇지.“예약해드릴게요. 설 연휴 기간이라 빈 방 많을 겁니다.”“하룻밤만 재워주면 안 돼?”뻔뻔스럽기 짝이 없는 음성에 강하리가 하, 헛웃음을 터트렸다.“얼굴값 좀 하시죠.”냉랭하게 한 마디를 남긴 강하리가 차 문을 열고 내렸다.의외로 잡거나 쫓아가지 않는 구승훈. 대신 차에서 내려 담배 한 대를 붙였다.방으로 돌아온 강하리가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욕실에 들어갔다.샤워를 마치고 나오니 핸드폰에 메시지 한 장이 와 있었다.[그래 뭐. 맞아. 나 같은 건 이 한겨울 밤에 얼어 죽어도 싸지.]낯선 번호였지만 발신자가 누구인지는 발 뒤꿈치로 생각해도 알 수 있었다.습, 짧은 숨을 들이쉰 강하리가 창가로 다가갔다.휘오오오-.창 밖으로 매섭게 몰아치는 북풍의 날카로운 울부짖음이 지나갔다.아래쪽을
강하리가 주먹을 꽉 쥐었다.가슴속에서 모든 감정이 북받쳐올라 뒤엉켰다.하지만 그녀가 반응을 보이기도 전, 구승훈이 물러났다.그러더니, 강하리를 이끌고 호텔 안으로 저벅저벅 걸어 들어갔다.이윽고 구승훈이 멈춰선 한 방 앞, 강하리가 움찔했다.그건 다름아닌 그녀가 묵고있는 방이었다.“설마 프런트 직원과 짜고친 거예요?”구승훈이 웃으며 카드키를 가져다 댔다.띠리릭!경쾌한 울림과 함께 문이 그대로 열렸고, 구승훈이 굳어진 강하리를 이끌고 방 안에 들어섰다.강하리의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당장 내 방에서 나가요!”“왜 이래. 네가 들어와서 자라고 했잖아.”물고 늘어지기를 시전하는 구승훈.대답 대신, 침대 머리맡에 놓였던 베개가 날아왔다.웃으며 베개를 받아쥔 구승훈이 도로 침대에 놓으며 말했다.“소파에서 잘게.”“아닙니다. 내가 나갈게요 내가 나가.”돌아서서 나가려는 강하리를 구승훈이 다시 잡았다.“급하긴. 털끝 하나 안 건드린단 약속, 아직 유효하다고.”차라리 팥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라.강하리가 불신과 분노로 찬 눈길로 구승훈을 노려보았다.“그냥 옆에만 있고 싶을 뿐이야. 물론-.”길게 말을 늘여뜨린 구승훈이 반 박자 쉬었다가 은근한 말투로 다시 입을 열었다.“네가 원한다면 오늘 밤 이 몸을 너한테 줄 수도 있고.”얼굴이 확 달아오른 강하리. 애꿎은 베개가 다시 허공을 가로질러 구승훈에게 날아갔다.“이 변태가! 꺼져!”“농담이야 농담.”가볍게 다시 베개를 받아쥔 구승훈.“나 이 옆 방이야. 열두 시까지만 여기 있으면서 너랑 보름달 보다가 사라져 줄게. 응?”강하리의 의심의 눈초리가 잔뜩 치켜올랐다.“정말 방 예약한 거예요?”증명이라도 하듯, 구승훈이 카드키 하나를 또 꺼내들었다.“씻고 올게. 기다려.”강하리의 대답이 나오기도 전, 구승훈이 방 문을 열고 나가버렸다.그 통에 강하리의 목구멍까지 차 올랐던 “아니 됐어요”가 갈 길을 잃고 입가에서 맴돌았다.벙찐 얼굴로 구승훈이 사라진 문을 바라보던 강하리가 한
”당신이 왜 하리 방에…….”주해찬은 어지간히 놀란 모양인지, 표정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았다.물론 그건 구승훈도 마찬가지였지만.“내가 할 소린데. 해찬 도련님은 이 야밤에 어쩐 일이실까.”“하리한테 사과하러 온 겁니다.”“이 한밤중에? 시커먼 속이 다 보이는데 지금 그걸 믿으라고?”“속 시커먼 건 그쪽이고!”강하리가 다가오기도 전, 둘은 이미 손찌검이 붙었다.날아오는 주해찬의 주먹을 반쯤 피하던 구승훈이 움찔했다.바로 뒤쪽에선 아연실색한 얼굴을 한 강하리가 달려오고 있었고.주먹은 그와 강하리를 가로지르는 궤도로 날아오고 있었다.더 생각할 겨를도 없이, 구승훈이 그대로 우뚝 멈췄다.퍼억!주먹이 무서운 속도로 구승훈의 안면에 꽂혔다.“꺅!”비틀거리는 구승훈. 강하리가 비명을 질렀고, 주해찬도 그 자리에 얼어붙어 버렸다.구승훈과 주먹질이 오간 적 있는 주해찬인지라, 얼마든지 피할 수 있었단 걸 잘 알고있었다.그런데 왜…….그제야 구승훈의 어깨너머로,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은 강하리가 보였다.경악과 공포로 치켜뜬 그녀의 두 눈도.아…….“……고의로 그런 게 아니야, 하리야.”얼빠진 얼굴이 된 주해찬의 입에서 짧은 변명이 튀어나왔다.강하리의 관자놀이가 툭툭 튀었다.“알아요. 선배, 늦었으니까 일단 오늘은 그냥 가 줘요.”낯빛이 확 바뀐 주해찬이 다시 입을 벙긋거렸지만.이쪽을 지그시 응시하는 강하리의 눈길에, 힘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주해찬이 돌아간 뒤.구승훈이 어두운 얼굴을 한 채 소파에 걸터앉아 있었고.“미친 거 아니에요? 왜 안 피해요?”부어오른 구승훈의 얼굴에 약을 발라주며, 강하리가 구승훈을 노려보고 있었다.“……못 피한 거야.”겨우 한 마디 뱉은 구승훈. 그게 강하리의 화를 더 돋구었다.“개뿔! 그쪽 피지컬을 내가 모르는 것도 아니고!”욕을 뱉은 강하리가 성에 차지 않았는지, 구승훈의 다리를 콱 걷어찼다.구두 굽이 아닌 맨발이라 별 대미지는 없었지만, 구승훈의 표정은 더 구겨졌다.“오늘 내
“가, 강하리? 왜... 왜 그래, 하리야? 응?”갑자기 깬 강하리 때문에 한 번 놀라고, 흘러내린 눈물 때문에 또 한 번 놀랐다.당황함과 걱정, 놀람으로 더듬거리는 구승훈의 목소리.구승훈의 목소리에 강하리는 정신이 퍼뜩 들었다.급급히 고개를 돌려 눈물을 쓱 훔쳤다.“열두 시가 지났네요. 얼른 가요.”시간을 확인하며 한 마디 던지고는, 노트북을 내려놓고 황급히 욕실로 뛰쳐들어갔다.찬 물을 틀어 한참 동안이나 세수를 했지만, 눈시울은 여전히 불그스름했다.너무나도 생생했다. 꿈 속에서 심연으로 내리꽂히던 추락감과 출렁이는 파도, 입과 코로 마구마구 밀려드는 바닷물에 숨이 콱 막혀오던 그 느낌까지.눈을 뜨는 순간, 죽음의 문턱에 다다른 듯한 공포는 사라졌지만.악몽 같은 그 날의 기억이 또 뇌리를 엄습했다.바다 추락 사건 이후, 종종 자신을 괴롭히던 악몽이었다.떨쳐낼래야 떨쳐낼 수가 없는 그 악몽에 익숙해졌다고 생각했었는데.눈을 뜬 순간, 꿈의 끝자락에 보인 구승훈의 얼굴에, 그 끔찍한 꿈이 현실이 되는 느낌이 들었다.찬 물로 얼굴을 몇 번 더 문지른 강하리가 몸을 일으키자, 욕실 문 앞에 서 있는 구승훈의 모습이 거울에 비쳤다.“안 좋은 꿈이라도 꾼 거야?”한껏 좁혀진 구승훈의 미간에 주름이 깊게 져 있었다.“…아니에요. 아무것도.”“아무것도 아닌 거야, 아무것도 말해주기 싫은 거야?”구승훈의 목소리가 한껏 가라앉았다.“진짜 별거 아니에요. 들어가 봐요.”구차하기 짝이 없는 변명.사실 변명이랄 것도 없이, 강하리의 표정만 봐도 말하기가 싫단 걸 알아챌 수 있는 구승훈이었다.동시에 화가 살짝 치밀었다아니, 오늘 분위기 좋았잖아.밥도 같이 먹고, 머리도 말려주게 했고, 방 안에 있게도 해 줬잖아.왜 다시 예전으로 돌아간 건데. 대체 왜.“하리야.”화를 꾹 누른 채, 구승훈이 다시 입을 열었다.“내가 또 뭐 잘못한 거라도 있어?”“묻지 마요, 좀.”“그럼 잘 됐네. 어차피 걱정되던 차였는데. 나 안 가.”배 째라
“이렇게 무턱대고 찾아오면 강하리만 난감할 뿐이란 걸 잘 알 텐데.”구승훈의 입에서 서늘한 음성이 흘러나온다.“집사람들 단속이나 잘 좀 하고 찾아오든가. 아니면 멀찍이 떨어져 있지 좀?”“그러는 구 대표님은 집안 사람들 허락 받고 이리 들러붙는 겁니까?”주해찬이 차가운 시선으로 맞받아쳤다. 구승훈이 움찔했다.그 모습에 냉소를 짓는 주해찬.“아니면, 집안 사람들과 하리를 대면시킬 생각조차 안 해 보신 겁니까?”구승훈의 표정이 점점 더 거칠어졌다.“이렇게 들러붙는 목적이 결혼 생각조차 없는 애인이라니, 가소롭기 짝이 없군요.”“입 조심해라.”성난 야수를 닮은 구승훈의 으르렁거림이 잇새로 새어나왔다.“난 구 대표님과 다릅니다. 하리를 위해서라면 곁에 꼭 붙어있을 수도 있고-.”주해찬이 개의치 않고 말을 이어나갔다.“영영 멀찍이 떨어질 수도 있거든요. 그쪽은 그게 안 되잖아요.”“듣던 중 반가운 소리군. 포기하겠다는 뜻인가?”구승훈이 차갑게 콧방귀를 뀌고는 강하리의 방 문을 두드렸다.한 참이나 두드렸지만 잠잠하기만 했다. 아무 반응이 없었다.거의 동시에, 두 남자의 머릿속에 쎄한 느낌이 자나갔다. 두 미간이 동시에 좁아졌다.“1206번 손님 찾으러 오셨어요? 아침 일찍 외출하셨습니다.”지나가던 호텔 직원 하나가 일러주었다.“몇 시 쯤에 나갔습니까?”주해찬이 급급히 또 물었다.“글쎄요. 대여섯 시 쯤으로 기억합니다만.”구승훈의 얼굴이 흙빛이 되었다.일곱 시 즈음부터 강하리의 방 문앞에서 서성이고 있었는데.한 시간이나 더 일찍 나가버렸을 줄이야.한 동안, 두 남자가 묵묵히 그 자리를 지켰다.“...아침 드시겠습니까?”손에 든 도시락을 내미는 주해찬.“너나 많이 드세요.”잔뜩 부아가 난 목소리로 한 마디를 남긴 채, 구승훈이 휙 돌아서 멀어져갔다.사실 강하리의 이른 외출은 두 남자를 피하려는 의도가 전혀 없었다.밤샘 작업을 마치고 바로 호텔을 나선 것 뿐.회의장에라도 나가보려고 그 쪽으로 가다가, 모닝 운동을 하러
순식간에 구승훈이 뒤로 빠졌다.노기에 찬 눈길로 구승훈을 노려보는 강하리.“미쳤어요? 방키 놔두고 당장 나가요!”차가운 음성에도 아랑곳 없이 구승훈이 픽 웃었다.“네가 준 거잖아. 왜 나한테 뭐라 하는데.”호주머니에서 나온 그의 손에는 1204라고 적힌 방 키가 들려있었다.“인심 썼다. 여기 잠자리가 불편하면 내 방에 가서 자도록.”그리고, 아니나 다를가, 베개가 그의 얼굴에 날아들었다.“꺼지라고!”잽싸게 베개를 받아든 구승훈이 조심히 침대맡에 내려놓았다.이쯤하면 목적은 이룬 셈, 치고 빠질 때가 되었다.아침부터 보이지 않는 강하리가 걱정돼서 와 본 것 뿐이니까.딴 마음은 없었다. 음, 없는 거다.“잘 자. 좋은 꿈 꿔.”나지막이 속삭이는, 성X경 뺨치는 꿀 중저음과 함께 강하리를 한 번 꼬옥 안아주고는, 그녀가 어쩔 새도 없이 바람처럼 사라져 버렸다.멍해진 표정으로 강하리가 구승훈이 사라진 문 쪽을 바라보았다....이틀 간의 준비 끝에, 정상회담이 성대한 막을 올렸다.세련된 옷차림의 강하리가 회의장 곳곳을 누비고 다녔고.결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는 박근형 교수의 입가에는 흡족한 미소가 떠나질 않았다.그 모습은 실시간 방송을 타고 온 세상에 전해졌고 세간의 감탄을 자아냈다.[정삼회당 최강 미모 통역사]실시간 검색 1위를 차지한 타이틀.생방송으로 화면에 비친 강하리의 모습을 바라보는 한 남자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피어있었다.‘잘 하네, 강하리.’후우, 구승훈이 빨았던 담배 한 모금을 뱉었다.찬란한 빛이 나는 강하리였고, 온 회의장이 그녀의 메인 스테이지였다.하지만 구승훈은 마냥 기쁠 수가 없었다.높이 날아오를 수록 그와는 점점 멀어질 강하리니까.한 순간, 그녀가 너무 잘되지 말았으면 하는 생각이 불쑥 쳐들었지만.강하리의 행보를 막을 수 없단 걸 잘 알고있는 구승훈이었다.성황리에 막을 내린 정상회담 후, 어김없이 축하연이 열렸다.강하리가 극구 참석을 사양했지만, 박근형의 엄근진 모드에 결국 백기를 들고 말았
구승훈은 강하리를 다소 시무룩한 표정으로 바라보면서도 결국 순순히 입을 다물었고 손연지는 구승훈을 보고 웃었다.구승훈은 굳어진 표정으로 두 사람을 따라 계단을 내려가다가 모퉁이에 다다랐을 때 갑자기 강하리를 한 손으로 잡아당긴 뒤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오늘 밤에 보상해 줄 거야?”강하리는 순간 조금 전 당황스러운 장면이 떠올랐고 손연지가 지금 슬픈 상황에서 상처에 소금을 뿌리고 싶지 않았다.“가만히 있어.”구승훈의 입술이 그녀의 귀에 닿았다.“그러면 손으로만 하는 건?”남자의 손이 그녀의 허리를 가로질러 그녀가 승낙할 때까지 놓아주지 않겠다는 듯이 꽉 감싸자 강하리는 결국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이따가 내려가선 얌전히 있어.”구승훈은 눈썹을 치켜올렸다.“아내 말은 들어야지.”손연지는 식사 내내 먹는 둥 마는 둥 했고 식사가 끝날 무렵 강하리의 휴대폰이 갑자기 울렸다.노민우였다.강하리는 손연지를 바라보며 바로 전화를 끊었고 손연지는 못 본 척했지만 표정이 한층 어두워졌다.하지만 잠시 후 구승훈의 휴대폰도 울렸고 그는 눈썹을 치켜들며 전화를 집어 든 뒤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걸어 나갔다.바깥에 도착하고 나서야 구승훈은 휴대폰을 들여다보았다.노민우가 아닌 노민준의 전화였고 그는 뒤를 돌아보고는 전화를 받았다.“그 주사 효과가 어때?”구승훈의 입꼬리가 올라갔다.“괜찮아. 지난 이틀 동안 상태가 전보다 훨씬 안정됐어.”거짓말이 아니었다. 구승훈은 노민준이 건넨 주사를 맞고 나서부터 지난 이틀 동안 단 한 번의 이상도 느끼지 못했고 그것이 그가 오늘 유난히 기분이 좋았던 이유였다.노민준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내가 포기하지 말라고 했잖아.”짧게 대꾸한 구승훈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말을 마친 노민준이 잠시 멈칫했다.“참, 내 동생이 할 말이 있대.”곧이어 저쪽에서 노민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승훈아, 손연지는 지금 어때?”구승훈은 눈썹을 치켜올렸다.“네 여자를 왜 나한테 물어봐?”“승훈아, 나도 네가 강하리 씨
강하리는 사실 자신이 꽤 한심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거듭되는 상처에도 수없이 용서했다.마치 구승훈이 없으면 모든 게 그대로 멈춰버릴 듯이.구승훈이 사라져도 세상은 여전히 잘 돌아가지만 구승훈이 없는 세상이 되어버리고 그건 그녀가 원하는 게 아니었다.“또 무슨 일이 생기면 난 당해도 싸.”강하리는 손연지 쪽으로 고개를 돌렸고 손연지는 다가와 강하리를 껴안았다.“구승훈 이 개자식이 전생에 우주라도 구한 거야?”강하리는 미소를 지으며 손연지의 어깨에 기대었다. 의지하는 것처럼 보여도 사실은 위로에 가까웠다.“그러는 넌, 대체 무슨 일인데?”자기 일을 언급하자 손연지는 순식간에 흥미가 사라진 표정이었다.“별건 아니야. 사실... 하리야, 나 임신했었어.”강하리는 깜짝 놀랐다.“뭐? 그래서? 지금은 어떤데? 아기는?”손연지의 눈시울이 붉어졌다.“임신 사실을 알았을 때 노민우는 다른 여자와 약혼하고 있었어. 노민우에게 말할 생각도 없었고 사실 아이도 남길 생각 없었어. 노씨 가문이나 노민우에겐 관심 없어. 40일이 될 때까지 기다렸다가 수술하려고 했는데 그날 밤 내가 당직일 때 노민우 약혼녀가 병원에 찾아와 사람들이 다 보는 앞에서 난동을 부렸어. 병원에서도 노씨 가문에 밉보일 수 없어서 날 해고했어.”강하리의 표정이 차가워졌다.“그러고 나서?”손연지의 얼굴에는 여전히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그리고 다음 날 아이를 지웠는데 노민우가 어떻게 알았는지 낙태한 걸 알고는 나한테 화를 냈어.”강하리의 가슴에 고통이 밀려왔다.노민우가 약혼한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그때 손연지에게 연락했을 때만 해도 그녀는 멀쩡했었다.고작 얼마나 됐다고 노민우 그 개자식이 손연지를 이렇게 힘들게 한 건지!“왜 나한테 말 안 했어?”손연지는 입꼬리를 끌어당기며 웃었다.“말해도 달라질 게 뭐가 있어. 그래도 노민우를 그냥 두지는 않았어. 자기가 뭐라고 나한테 화를 내? 약혼까지 했는데 내가 아이를 낳길 바라는 것도 아니고. 그래서 노씨 가문에 찾아가서 업무에
강하리의 눈빛이 번쩍이며 구승훈의 말에 담긴 의미를 순식간에 알아차렸다.그가 오늘 인터넷 속 모두가 보는 앞에서 그녀에게 매달리는 역할을 자처했으니 이젠 그녀가 자신을 데려가야 한다는 말이었다.강하리는 구승훈의 목에 팔을 걸고 자기 앞으로 끌어당기며 속삭였다.“보답이라, 문제없지. 구 대표님이 우선 그 쓸데없는 여자들 먼저 해결하면!”이번 일에 진시연이 연루되지 않았을 리가 없다.석미란이 심준호에게 고소당한 이후 석연란조차 한동안 잠잠했고 그녀가 대외적으로 자신에 대한 악담을 퍼뜨릴지 몰라도 온라인에 증거를 남기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그러니 누가 이 모든 일을 주도하고 있는지 한눈에 알 수 있었다.개자식, 하여간 여자가 너무 많이 꼬인다.강하리는 계속해서 구승훈과 사무실에서 꽁냥거리진 않았다.집에 손연지가 있었기에 가는 길에 백아영에게 전화를 건 강하리는 구승훈을 따라 별장으로 돌아왔다.어두운 별장을 보며 강하리는 손연지가 아직 자는 줄 알았다.그녀가 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 인공지능이 불을 켜자 갑자기 별장 전체가 환하게 밝아졌다.강하리가 가방을 내려놓고 손연지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위층으로 올라가려는 순간 갑자기 구승훈이 뒤에서 안았고 곧이어 그녀가 반응할 틈도 주지 않고 소파에 쓰러뜨렸다.강하리가 말하기도 전에 구승훈은 그녀의 입술을 막았고 남자의 손이 불순하게 그녀의 다리를 어루만졌다.“자기야, 다리 예쁘다.”강하리는 남자의 의도를 단번에 알아챘다.이 개자식!머릿속엔 그 짓밖에 없는 건지.얼굴이 화끈 달아오른 그녀는 손연지에 대해 말하는 것도 잊어버렸다.“당신... 읍...구승훈은 거침없이 그녀의 스타킹을 찢어버리고는 그녀의 손을 끌어 벨트로 가져갔다.“도와줘, 자기야.”강하리의 얼굴이 화끈거렸다.“일단 기다려.”구승훈은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종아리를 잡고 부드럽게 주물렀다.“못 기다려.”강하리는 그를 세게 밀었다.“아니, 내 말은...”“어머!”강하리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계단 너머에서 손연지
주해찬은 다소 침울한 표정으로 잠시 침묵을 지키더니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아니라고 하면 믿어줄래?”주해찬은 정말 강하리에게 계속 사실을 숨길 생각도, 진시연을 도울 생각도 없었다.그냥... 강하리가 곤경에 처했을 때 그때 나서서 도와주고 싶었을 뿐이었다.그러면 강하리의 마음속 망가진 그의 이미지를 조금이라도 되돌릴 수 있을 것 같아서.그런데 구승훈이 이토록 매몰차게 굴 줄은 몰랐다.아버지가 얼마나 깨끗하고 정직한 사람인지 장담할 수 없지만 적어도 부패한 관리들처럼 부정부패와 뇌물 수수를 일삼지는 않을 것이고 할아버지도 절대 이런 일이 일어나도록 가만둘 리 없었다.하지만 부패를 철저히 타도하는 지금 같은 시기에 작은 선물을 몇 개 받은 것만으로도 큰 문제가 된다.게다가 구승훈은 그 증거를 노골적으로 인터넷에 올렸고 관련 부서에 실명으로 가차 없이 신고했다.구승훈은 결코 자신을 감추는 사람이 아니었다.그가 원하는 건 주해찬의 타협과 강하리 앞에서 완전히 신뢰를 잃는 것이었다.사실 구승훈이 처음 병원에서 그를 떠봤을 때부터 쉽게 놓아주지 않을 거라는 걸 잘 알았다.다만 줄곧 비현실적인 희망을 붙잡고 있었는데 지금 이 순간이 되어서야 주해찬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그의 완전한 패배라는 걸.“미안해, 하리야. 엄마한테 사과하라고 할게. 그리고... 인터넷에 너에 대한 루머를 유포한 것도 이모가 한 짓이야. 이모한테도 사과하라고 할게. 그리고 하리야, 내 다리...”주해찬은 말하며 심호흡하듯 잠시 멈춘 뒤 다시 말을 이어갔다.“사실 거의 다 나았어.”강하리는 당황했고 주해찬은 다시 입을 열었다.“미안해. 조금만 더 나랑 같이 있어 주길 바라서, 구승훈이랑 다시 만나서 네가 또 상처받을까 봐 내가...”“선배.” 강하리가 갑자기 주해찬의 말을 가로챘다.“고마워요.”그녀가 고맙다고 말할 거라곤 상상조차 못 했다.강하리가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예전에 여러 번 날 도와주고 날 이렇게 생각해 주고 지금도 날 위해 나서서 진실을
두 사람 관계에 있어서 누가 봐도 을인 모습이었다.사무실에 있던 몇몇 기자들은 서로 눈치만 봤다.에비뉴와 정안그룹이 강하리 명의로 되어 있다고?그렇다면 강하리 혼자서도 B시 재벌과 맞먹는 것 아닌가.여러 기자가 모두 멍한 표정으로 구승훈을 바라봤다.구씨 가문의 권력자 구승훈이 자신은 아내 덕분에 먹고 사는 놈이라고 말하다니, 그것도 제법 자랑스러워하는 듯했다.“그러면 강 대표님이 구 대표님과 송유라 씨 사이에 개입했다는 건...”구승훈의 눈빛이 어두워졌다.“제가 우리 강 대표님과 언제 만났는지 아세요?”기자는 고개를 저었고 구승훈은 오른손 손가락으로 왼쪽 약지에 낀 반지를 살며시 돌리면서 시선을 내리깔고 웃었다.“아홉살 때 만났어요. 그 여자가... 제 삶의 유일한 구원이었죠.”구승훈은 복잡한 감정이 가득한 눈빛으로 카메라를 바라보았다.“자기야, 미안해. 오랜 세월 많이 힘들었지? 오늘 여기서 맹세할게. 나 구승훈은 평생 강하리의 것이란 걸.”강하리는 화면 속 구승훈을 바라보다가 갑자기 코끝이 시큰거렸다.개자식, 인터뷰만 할 것이지 왜 저런 말을 해서는.하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구승훈의 말에 그녀의 마음속에 작게나마 남아있던 불편함이 말끔히 사라졌다는 걸.인터넷에 그 많은 루머들이 떠돌아다녀도 언제나 그녀를 감싸줄 사람이 있었다.구승훈의 인터뷰는 곧 화제성을 끌어모았고 강하리를 욕하던 사람들은 모두 흔적도 없이 사라진 채 댓글 창에는 축복의 글이 가득했다.강하리는 휴대폰에 달린 축복의 댓글을 바라보다가 자신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그녀는 휴대폰을 들고 구승훈에게 전화를 걸었고 구승훈의 목소리에는 미소가 묻어났다.“강 대표님, 나 보고 싶어?”강하리는 입술을 달싹이며 웃었다.“오늘 밤 일찍 돌아가서 맛있는 거 해줄게.”구승훈은 눈썹을 치켜올렸다.“맛있는 음식만 있어?” 강하리는 멈칫했다.“또 뭘 원해?”“다리. 자기야, 한번 해보자.”강하리는 이를 갈며 그냥 전화를 끊었고 구승훈은 끊어진 전화를 바라보며
구승훈의 눈빛이 어두워졌다.정양철은 죽었지만 애초에 그가 강하리 어머니에게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는 여전히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였다.이대로 알 수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이 시점에 정양철과 관련된 또 다른 단서가 나올 줄이야.“확실해요?”“물론이죠.”구승훈은 전화를 끊고 심준호에게 연락했고 그와 대화를 마친 뒤 밖을 향해 말했다.“시작하지.”잠시 후 비서가 기자 10여 명을 데리고 구승훈의 사무실로 들어왔다.나문빈이 홈페이지를 정상으로 되돌리자 강하리를 욕하던 사람들은 모두 SNS로 옮겨갔고 과거 여러 번 검색어에 오르며 욕을 먹었던 흑역사도 전부 밝혀졌다.SNS에서 누군가가 돈으로 사주했는지 갈수록 심한 욕설을 퍼붓고 있었다.안예서는 점점 더 고조되는 SNS의 화제성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계약서를 하나하나 처리하는 강하리를 보며 조금은 불안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대표님, 이걸 제대로 밝힐 방법을 찾아야겠어요.”강하리는 고개도 들지 않았다.“그럴 필요 없어. 욕하다 지치면 자연스레 그만두겠지.”안예서가 다소 우울한 표정으로 강하리를 설득하려는 그녀는 이미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었다.“안진 그룹 총괄팀장과 약속 잡아줘.”안예서는 다소 무력한 한숨을 내쉬며 뒤돌아 사무실을 나섰다.그녀가 사무실을 나간 뒤에야 강하리는 휴대전화를 집어 들었고 손가락이 SNS 아이콘 위에서 잠시 멈칫하다 클릭했다.하지만 들어가서 보니 그녀를 욕하는 내용은 사라지고 안예서가 말했던 것들도 전부 보이지 않았다.대신 라이브 방송 하나가 떠서 클릭해 본 강하리는 깜짝 놀랐다.구승훈이었다.뒤에 비치는 장소는 그의 사무실 같았다.남자는 검은 셔츠를 입은 채 느긋하게 의자에 기대어 손가락엔 어느새 반지를 끼고 있었다.자세히 보면 그녀가 끼고 있는 반지와 같은 모델이지만 다이아몬드가 그렇게 크지 않을 뿐이었다.강하리는 무의식적으로 손가락에 낀 반지로 시선을 옮겼고 그 시각 왠지 모르게 인터넷에서 자신에 대해 뭐라고 말하든 다 상관없는 것처럼 느껴졌다.무슨
구승훈은 휴대폰 메시지를 보고 자신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밤에 보상해 줄래?]손연지가 왔다며 허튼수작 부리지 말라고 답장하려던 찰나 갑자기 전화벨이 울렸고 안예서의 초조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대표님, 큰일 났어요.”강하리는 잠시 멈칫했다.“뭔데, 천천히 얘기해 봐.”“오늘 아침 일찍 우리 회사 홍보 사이트가 해킹됐는데 사이트에 온통 대표님이 스폰 받았다는 이상한 댓글이 가득해요.”안예서는 다소 격앙된 목소리로 말했고 강하리는 표정이 점점 굳어갔다.“알겠어.”전화를 끊고 회사 사이트에 들어가니 그녀의 눈에 온통 적나라한 욕설들이 가득 들어왔다.스폰을 받았다는 사람도 있고 몸을 대주고 높은 자리로 올라갔다는 말도 있었다.심지어 구승훈과 송유라 관계를 그녀가 망쳤다는 사람도 있었다.송유라가 세상을 떠난 지 거의 1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그녀의 팬들이 불쑥불쑥 튀어나왔고 지금 JM의 사이트에도 그들이 가득했다.[내연녀는 내연녀지. 뭐라 해도 해명하지 못해.][그냥 내연녀도 아니고 몸 팔아서 JM 파트너 자리를 꿰찼는데 역겹지도 않아?][JM은 유엔 산하의 번역 회사인데 저런 사람이 대표야?][허, 어떻게 그 자리로 올라갔는지 누가 알겠어. 또 유엔에 어느 높으신 분을 모셨겠지.]강하리는 댓글을 하나하나 확인하며 휴대폰을 쥐고 있는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변해버렸다.심호흡하고 안으로 들어가 손연지에게 설명한 뒤 회사로 차를 몰고 가기까지 얼마나 걸렸는지 모르겠다.차 안에서 핸들을 잡은 강하리는 문득 비웃음이 터져 나왔다.이번에도 누가 자신을 노린 건지 짐작할 수 있었다.어제의 사건은 이미 지나간 일이고 나머지는 진태형의 해명을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보아하니 상대는 그녀를 가만히 내버려둘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강하리는 회사에 도착하자 사방에서 쏟아지는 시선을 느꼈지만 아무렇지 않다는 듯 곧장 엘리베이터로 들어갔다.꼭대기 층에 도착하자 안예서가 반갑게 맞이했다.“대표님, 괜찮으세요?”강하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강하리는 차 안에서 잠든 손연지를 바라보다가 노민우의 전화를 받았고 노민우의 목소리에는 약간의 불안함이 묻어났다.“강하리 씨, 손연지한테 연락이 왔어요?”“나랑 같이 있는데 무슨 일 있어요?”노민우는 순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지금은 나랑 얘기하고 싶지 않을 테니까 같이 있어 줘요.”강하리는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결국 어쩔 수 없이 말을 꺼냈다.“노민우 씨, 연지는 잘 우는 사람이 아닌데 내가 공항에 데리러 갔을 때 밤새 운 것 같았어요. 그쪽이 무슨 사정이 있든 연지를 이렇게 울렸으면 납득할 만한 이유를 설명해야 할 거예요.”노민우가 제대로 된 설명을 하지 않으면 연성으로 찾아갈 기세로 강하리는 유난히 단호하게 말했다.노민우는 다소 억울했지만 그래도 순순히 답했다.“걱정하지 말아요. 제가 손연지한테 다 설명할게요.”강하리는 손연지를 데리고 그녀와 구승훈의 저택으로 향했고 비몽사몽 눈을 뜬 손연지는 눈앞에 가득 찬 리시안셔스와 정원 뒤편에 있는 성처럼 생긴 저택 건물을 보았다.“세상에, 하리야. 여기가 너 사는 곳이야?”강하리는 그녀의 모습에 비로소 살짝 안도했다.“그런 셈이지.”손연지는 차 문을 열고 곧장 저택으로 향했다.위층과 아래층을 몇 번이나 돌아보더니 갑자기 나와서 강하리를 껴안았다.“자기, 날 먹여 살려줘. 마침 나도 일자리 잃었는데.”강하리의 얼굴에 머금었던 미소가 옅어졌다.“일자리를 잃었다니 무슨 말이야?”손연지는 조금 전까지만 해도 들떴던 마음이 한순간에 사라지고 우울한 한숨을 내쉬었다. “직업도 없고 일자리도 잃었어. 부모님도 나 때문에 창피당했고.”강하리는 미간을 찌푸렸고 손연지가 자세히 말하지 않았지만 대충 짐작할 수 있었기에 다가가 그녀를 안아주었다.“괜찮아, 내가 복수해 줄게.”손연지는 코끝이 시큰거렸다.“하리야, 역시 너밖에 없어. 개자식들은 하나같이 나쁜 놈들이야!”강하리는 손연지를 껴안고 위로하듯 속삭였다.더 이상 구체적인 질문은 하지 않은 채 객실로 데려가 샤워할 수 있도록 욕조
구승훈은 잠든 강하리의 얼굴을 보며 참지 못하고 다가가 입술에 뽀뽀했다.“자기야, 미안해.”강하리의 속눈썹이 두 번 파르르 떨리더니 굳게 감고 있던 그녀의 눈가가 시큰거렸다.구승훈은 오늘도 잠 못 이루는 밤이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강하리를 껴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잠이 들 줄이야.겨우 반쯤 잠이 들었을 때 문득 강하리의 말이 들리는 것 같았다.“구승훈, 나도 당신을 지켜주고 싶어.”구승훈은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 그대로 꿈속으로 빠져들어 갔다.다음 날 아침, 강하리가 잠에서 깨어나기도 전에 갑자기 휴대폰이 울렸다.손연지였다.슬쩍 확인한 강하리가 서둘러 전화기를 집어 들자 저쪽에서 손연지의 코 막힌 소리가 들려왔다.“하리야, 이틀만 거기로 놀러 가도 돼?”강하리는 당황했다.“당연하지. 언제 오는데? 내가 데리러 갈게.”“나 지금 B시에 있어.”강하리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고 구승훈은 끙 앓는 소리를 내며 고통스러운 얼굴로 몸을 움츠렸다.“자기야, 방금 남은 인생의 행복을 자기 손으로 망칠 뻔한 거 알아?”강하리의 얼굴이 순간 빨개졌다.“구승훈, 괜찮아?”구승훈이 그녀의 턱을 잡고 입술을 깨물었다.“안 괜찮아. 강 대표님이 호 불어줘.”농담하는 걸 보니 괜찮나 보다.“그러게 누가 함부로 뻗으래.”구승훈은 웃으며 그녀의 귀로 다가갔다.“오늘 밤 다리로 해볼까?”강하리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좀 진지하게 굴 수는 없어?”구승훈은 여전히 웃는 얼굴로 당당하게 말했다.“망가졌는지 확인해 봐야 하지 않겠어?”강하리는 손연지 때문에 그와 더 실랑이를 벌이기 싫어 침대에서 일어나 발코니로 향했다.“손연지, 너 지금 어디 있어?”“아침부터 내 앞에서 애정행각 벌이는 건 좀 아니지 않니?”농담이었지만 손연지의 기분은 여전히 좋지 않았기에 강하리는 얼굴을 찡그렸다.“어디야, 내가 데리러 갈게.” 손연지가 강하리에게 위치를 보냈고 강하리는 서둘러 샤워를 마친 뒤 문을 나섰다.구승훈이 그녀와 동행하려는데 구승재가 갑자기 회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