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승훈이 그 자리에 굳어졌다.기회를 줬다고? 언제…….‘아…….’지난번에 보경시에서 강하리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송유라를 기소하게 내버려두면 생각해 보겠다던.곧 심장이 터질 듯 후회가 구승훈을 꽉 채웠다.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왜 그게 송유라를 향한 원한이라고만 생각했을까.왜 단 한 번도, 그게 자신을 향한 마지막 한 가닥의 기대라곤 생각을 못 했을까.그러고 보니 그 전에도 기회는 여러 번 있었다.송유라를 멀리하면 생각해 보겠다고 입버릇처럼 말하던 강하리.그러가다 결국, 송유라를 내버려두면 생각해 보겠다고.그러나 자신은 어땠던가.“멀리해라”가 “내버려 둬라”가 되는, 그 차이도 못 알아채고.그게 점점 희미해지는 강하리의 기대와 마음인 줄도 모르고.벼랑끝에 선 기회의 마지막 순간까지도, 협의서를 내밀며 고소 취하를 들먹이지 않았던가.“그 얘긴 그만하고, 얼른 밥 먹어요 우리.”휘몰아치는 감정을 먼저 추스린 건 강하리였다.그만큼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는 반증이기도 했다.상처투성이가 되었다가 아문 가슴은 더 딱딱해질 수밖에 없는 법.살을 깎아내는 고통으로 겨우 벗어난 악연인데. 오직 자신을 위해 사는 인생은 이제 막 시작했는데.구승훈에게서 미움이 서서히 사라지고, 이제는 고마운 마음이 들기 시작하는 시점.사랑했던 만큼 컸던 미움마저 빠져나간, 텅 빈 방 안 같은 마음.거기에 다시 채워지는 것이 자신을 사무치게 괴롭혔던 감정이고 싶지는 않았다.묵묵부답이던 구승훈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고.그렇게 그들은 너무나도 평범한, 어떤 가정식 레스토랑에 마주 앉게 되었다.강하리가 말없이 메뉴를 고르고 웨이터를 불렀다.주문한 요리들을 위에터에게 읊는 강하리의 목소리에 구승훈의 눈에 희미한 빛이 감돌았다.“다 기억하네.”느닷없는 구승훈의 목소리에 강하리가 벙찐 표정이 되었다가, 곧 무슨 뜻인지 알아챘다.물 흐르듯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구승훈이 즐겨 먹는 요리로만 주문했던 것.“네 뭐, 하도 습관이 돼서.”구승훈과 외식할 때마다 달
힐끔.또 힐끔.불안에 찬 강하리의 눈길이 자꾸자꾸 구승훈을 향한다.반면 당사자는 운전대를 잡은 채, 초 집중 모드로 앞쪽만 주시하는 중.“뭘 그렇게 흘겨봐. 앞으로 오랫동안 더 봐야 할 얼굴 싹 다 닳을라.”열 다섯번째인가로 강하리가 이쪽을 흘끔거리는 순간, 구승훈이 느긋하게 입을 열었다.“대체 무슨 속셈인가요?” 강하리가 냉랭하게 되물었다.기존의 수법들과는 너무나도 다른 구승훈의 행보에, 경계심으로 온 몸이 빳빳하게 굳어있는 그녀였다.“그냥 호텔에 데려다주는 것 뿐이야. 약속했잖아. 털끝 하나 안 건드린다고.”온통 불신으로 가득 찬 강하리의 눈초리에 구승훈이 말을 이었다.“뭔데 그 눈빛은. 내가 여자에 미친 놈도 아니고.”“그러기엔 전과가 너무 화려하셔서요.”구승훈이 흥, 콧방귀를 뀌었다.“무척이나 그러고 싶다만, 이제부터 너한테 강박은 안 하려고. 나도 기본 매너 쯤은 있는 놈이라고.”퍽이나.강하리가 눈을 희번득였다.다행인지 불행인지 별 탈 없이, 구승훈의 차가 강하리가 묵고있는 호텔 앞에 멈춰섰다.안도의 숨을 내 쉬며 강하리가 차에서 내리려는 순간.“그 뭐야. 내가 호텔 예약을 안 했거든.”……어쩐지, 그러면 그렇지.“예약해드릴게요. 설 연휴 기간이라 빈 방 많을 겁니다.”“하룻밤만 재워주면 안 돼?”뻔뻔스럽기 짝이 없는 음성에 강하리가 하, 헛웃음을 터트렸다.“얼굴값 좀 하시죠.”냉랭하게 한 마디를 남긴 강하리가 차 문을 열고 내렸다.의외로 잡거나 쫓아가지 않는 구승훈. 대신 차에서 내려 담배 한 대를 붙였다.방으로 돌아온 강하리가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욕실에 들어갔다.샤워를 마치고 나오니 핸드폰에 메시지 한 장이 와 있었다.[그래 뭐. 맞아. 나 같은 건 이 한겨울 밤에 얼어 죽어도 싸지.]낯선 번호였지만 발신자가 누구인지는 발 뒤꿈치로 생각해도 알 수 있었다.습, 짧은 숨을 들이쉰 강하리가 창가로 다가갔다.휘오오오-.창 밖으로 매섭게 몰아치는 북풍의 날카로운 울부짖음이 지나갔다.아래쪽을
강하리가 주먹을 꽉 쥐었다.가슴속에서 모든 감정이 북받쳐올라 뒤엉켰다.하지만 그녀가 반응을 보이기도 전, 구승훈이 물러났다.그러더니, 강하리를 이끌고 호텔 안으로 저벅저벅 걸어 들어갔다.이윽고 구승훈이 멈춰선 한 방 앞, 강하리가 움찔했다.그건 다름아닌 그녀가 묵고있는 방이었다.“설마 프런트 직원과 짜고친 거예요?”구승훈이 웃으며 카드키를 가져다 댔다.띠리릭!경쾌한 울림과 함께 문이 그대로 열렸고, 구승훈이 굳어진 강하리를 이끌고 방 안에 들어섰다.강하리의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당장 내 방에서 나가요!”“왜 이래. 네가 들어와서 자라고 했잖아.”물고 늘어지기를 시전하는 구승훈.대답 대신, 침대 머리맡에 놓였던 베개가 날아왔다.웃으며 베개를 받아쥔 구승훈이 도로 침대에 놓으며 말했다.“소파에서 잘게.”“아닙니다. 내가 나갈게요 내가 나가.”돌아서서 나가려는 강하리를 구승훈이 다시 잡았다.“급하긴. 털끝 하나 안 건드린단 약속, 아직 유효하다고.”차라리 팥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라.강하리가 불신과 분노로 찬 눈길로 구승훈을 노려보았다.“그냥 옆에만 있고 싶을 뿐이야. 물론-.”길게 말을 늘여뜨린 구승훈이 반 박자 쉬었다가 은근한 말투로 다시 입을 열었다.“네가 원한다면 오늘 밤 이 몸을 너한테 줄 수도 있고.”얼굴이 확 달아오른 강하리. 애꿎은 베개가 다시 허공을 가로질러 구승훈에게 날아갔다.“이 변태가! 꺼져!”“농담이야 농담.”가볍게 다시 베개를 받아쥔 구승훈.“나 이 옆 방이야. 열두 시까지만 여기 있으면서 너랑 보름달 보다가 사라져 줄게. 응?”강하리의 의심의 눈초리가 잔뜩 치켜올랐다.“정말 방 예약한 거예요?”증명이라도 하듯, 구승훈이 카드키 하나를 또 꺼내들었다.“씻고 올게. 기다려.”강하리의 대답이 나오기도 전, 구승훈이 방 문을 열고 나가버렸다.그 통에 강하리의 목구멍까지 차 올랐던 “아니 됐어요”가 갈 길을 잃고 입가에서 맴돌았다.벙찐 얼굴로 구승훈이 사라진 문을 바라보던 강하리가 한
”당신이 왜 하리 방에…….”주해찬은 어지간히 놀란 모양인지, 표정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았다.물론 그건 구승훈도 마찬가지였지만.“내가 할 소린데. 해찬 도련님은 이 야밤에 어쩐 일이실까.”“하리한테 사과하러 온 겁니다.”“이 한밤중에? 시커먼 속이 다 보이는데 지금 그걸 믿으라고?”“속 시커먼 건 그쪽이고!”강하리가 다가오기도 전, 둘은 이미 손찌검이 붙었다.날아오는 주해찬의 주먹을 반쯤 피하던 구승훈이 움찔했다.바로 뒤쪽에선 아연실색한 얼굴을 한 강하리가 달려오고 있었고.주먹은 그와 강하리를 가로지르는 궤도로 날아오고 있었다.더 생각할 겨를도 없이, 구승훈이 그대로 우뚝 멈췄다.퍼억!주먹이 무서운 속도로 구승훈의 안면에 꽂혔다.“꺅!”비틀거리는 구승훈. 강하리가 비명을 질렀고, 주해찬도 그 자리에 얼어붙어 버렸다.구승훈과 주먹질이 오간 적 있는 주해찬인지라, 얼마든지 피할 수 있었단 걸 잘 알고있었다.그런데 왜…….그제야 구승훈의 어깨너머로,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은 강하리가 보였다.경악과 공포로 치켜뜬 그녀의 두 눈도.아…….“……고의로 그런 게 아니야, 하리야.”얼빠진 얼굴이 된 주해찬의 입에서 짧은 변명이 튀어나왔다.강하리의 관자놀이가 툭툭 튀었다.“알아요. 선배, 늦었으니까 일단 오늘은 그냥 가 줘요.”낯빛이 확 바뀐 주해찬이 다시 입을 벙긋거렸지만.이쪽을 지그시 응시하는 강하리의 눈길에, 힘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주해찬이 돌아간 뒤.구승훈이 어두운 얼굴을 한 채 소파에 걸터앉아 있었고.“미친 거 아니에요? 왜 안 피해요?”부어오른 구승훈의 얼굴에 약을 발라주며, 강하리가 구승훈을 노려보고 있었다.“……못 피한 거야.”겨우 한 마디 뱉은 구승훈. 그게 강하리의 화를 더 돋구었다.“개뿔! 그쪽 피지컬을 내가 모르는 것도 아니고!”욕을 뱉은 강하리가 성에 차지 않았는지, 구승훈의 다리를 콱 걷어찼다.구두 굽이 아닌 맨발이라 별 대미지는 없었지만, 구승훈의 표정은 더 구겨졌다.“오늘 내
“가, 강하리? 왜... 왜 그래, 하리야? 응?”갑자기 깬 강하리 때문에 한 번 놀라고, 흘러내린 눈물 때문에 또 한 번 놀랐다.당황함과 걱정, 놀람으로 더듬거리는 구승훈의 목소리.구승훈의 목소리에 강하리는 정신이 퍼뜩 들었다.급급히 고개를 돌려 눈물을 쓱 훔쳤다.“열두 시가 지났네요. 얼른 가요.”시간을 확인하며 한 마디 던지고는, 노트북을 내려놓고 황급히 욕실로 뛰쳐들어갔다.찬 물을 틀어 한참 동안이나 세수를 했지만, 눈시울은 여전히 불그스름했다.너무나도 생생했다. 꿈 속에서 심연으로 내리꽂히던 추락감과 출렁이는 파도, 입과 코로 마구마구 밀려드는 바닷물에 숨이 콱 막혀오던 그 느낌까지.눈을 뜨는 순간, 죽음의 문턱에 다다른 듯한 공포는 사라졌지만.악몽 같은 그 날의 기억이 또 뇌리를 엄습했다.바다 추락 사건 이후, 종종 자신을 괴롭히던 악몽이었다.떨쳐낼래야 떨쳐낼 수가 없는 그 악몽에 익숙해졌다고 생각했었는데.눈을 뜬 순간, 꿈의 끝자락에 보인 구승훈의 얼굴에, 그 끔찍한 꿈이 현실이 되는 느낌이 들었다.찬 물로 얼굴을 몇 번 더 문지른 강하리가 몸을 일으키자, 욕실 문 앞에 서 있는 구승훈의 모습이 거울에 비쳤다.“안 좋은 꿈이라도 꾼 거야?”한껏 좁혀진 구승훈의 미간에 주름이 깊게 져 있었다.“…아니에요. 아무것도.”“아무것도 아닌 거야, 아무것도 말해주기 싫은 거야?”구승훈의 목소리가 한껏 가라앉았다.“진짜 별거 아니에요. 들어가 봐요.”구차하기 짝이 없는 변명.사실 변명이랄 것도 없이, 강하리의 표정만 봐도 말하기가 싫단 걸 알아챌 수 있는 구승훈이었다.동시에 화가 살짝 치밀었다아니, 오늘 분위기 좋았잖아.밥도 같이 먹고, 머리도 말려주게 했고, 방 안에 있게도 해 줬잖아.왜 다시 예전으로 돌아간 건데. 대체 왜.“하리야.”화를 꾹 누른 채, 구승훈이 다시 입을 열었다.“내가 또 뭐 잘못한 거라도 있어?”“묻지 마요, 좀.”“그럼 잘 됐네. 어차피 걱정되던 차였는데. 나 안 가.”배 째라
“이렇게 무턱대고 찾아오면 강하리만 난감할 뿐이란 걸 잘 알 텐데.”구승훈의 입에서 서늘한 음성이 흘러나온다.“집사람들 단속이나 잘 좀 하고 찾아오든가. 아니면 멀찍이 떨어져 있지 좀?”“그러는 구 대표님은 집안 사람들 허락 받고 이리 들러붙는 겁니까?”주해찬이 차가운 시선으로 맞받아쳤다. 구승훈이 움찔했다.그 모습에 냉소를 짓는 주해찬.“아니면, 집안 사람들과 하리를 대면시킬 생각조차 안 해 보신 겁니까?”구승훈의 표정이 점점 더 거칠어졌다.“이렇게 들러붙는 목적이 결혼 생각조차 없는 애인이라니, 가소롭기 짝이 없군요.”“입 조심해라.”성난 야수를 닮은 구승훈의 으르렁거림이 잇새로 새어나왔다.“난 구 대표님과 다릅니다. 하리를 위해서라면 곁에 꼭 붙어있을 수도 있고-.”주해찬이 개의치 않고 말을 이어나갔다.“영영 멀찍이 떨어질 수도 있거든요. 그쪽은 그게 안 되잖아요.”“듣던 중 반가운 소리군. 포기하겠다는 뜻인가?”구승훈이 차갑게 콧방귀를 뀌고는 강하리의 방 문을 두드렸다.한 참이나 두드렸지만 잠잠하기만 했다. 아무 반응이 없었다.거의 동시에, 두 남자의 머릿속에 쎄한 느낌이 자나갔다. 두 미간이 동시에 좁아졌다.“1206번 손님 찾으러 오셨어요? 아침 일찍 외출하셨습니다.”지나가던 호텔 직원 하나가 일러주었다.“몇 시 쯤에 나갔습니까?”주해찬이 급급히 또 물었다.“글쎄요. 대여섯 시 쯤으로 기억합니다만.”구승훈의 얼굴이 흙빛이 되었다.일곱 시 즈음부터 강하리의 방 문앞에서 서성이고 있었는데.한 시간이나 더 일찍 나가버렸을 줄이야.한 동안, 두 남자가 묵묵히 그 자리를 지켰다.“...아침 드시겠습니까?”손에 든 도시락을 내미는 주해찬.“너나 많이 드세요.”잔뜩 부아가 난 목소리로 한 마디를 남긴 채, 구승훈이 휙 돌아서 멀어져갔다.사실 강하리의 이른 외출은 두 남자를 피하려는 의도가 전혀 없었다.밤샘 작업을 마치고 바로 호텔을 나선 것 뿐.회의장에라도 나가보려고 그 쪽으로 가다가, 모닝 운동을 하러
순식간에 구승훈이 뒤로 빠졌다.노기에 찬 눈길로 구승훈을 노려보는 강하리.“미쳤어요? 방키 놔두고 당장 나가요!”차가운 음성에도 아랑곳 없이 구승훈이 픽 웃었다.“네가 준 거잖아. 왜 나한테 뭐라 하는데.”호주머니에서 나온 그의 손에는 1204라고 적힌 방 키가 들려있었다.“인심 썼다. 여기 잠자리가 불편하면 내 방에 가서 자도록.”그리고, 아니나 다를가, 베개가 그의 얼굴에 날아들었다.“꺼지라고!”잽싸게 베개를 받아든 구승훈이 조심히 침대맡에 내려놓았다.이쯤하면 목적은 이룬 셈, 치고 빠질 때가 되었다.아침부터 보이지 않는 강하리가 걱정돼서 와 본 것 뿐이니까.딴 마음은 없었다. 음, 없는 거다.“잘 자. 좋은 꿈 꿔.”나지막이 속삭이는, 성X경 뺨치는 꿀 중저음과 함께 강하리를 한 번 꼬옥 안아주고는, 그녀가 어쩔 새도 없이 바람처럼 사라져 버렸다.멍해진 표정으로 강하리가 구승훈이 사라진 문 쪽을 바라보았다....이틀 간의 준비 끝에, 정상회담이 성대한 막을 올렸다.세련된 옷차림의 강하리가 회의장 곳곳을 누비고 다녔고.결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는 박근형 교수의 입가에는 흡족한 미소가 떠나질 않았다.그 모습은 실시간 방송을 타고 온 세상에 전해졌고 세간의 감탄을 자아냈다.[정삼회당 최강 미모 통역사]실시간 검색 1위를 차지한 타이틀.생방송으로 화면에 비친 강하리의 모습을 바라보는 한 남자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피어있었다.‘잘 하네, 강하리.’후우, 구승훈이 빨았던 담배 한 모금을 뱉었다.찬란한 빛이 나는 강하리였고, 온 회의장이 그녀의 메인 스테이지였다.하지만 구승훈은 마냥 기쁠 수가 없었다.높이 날아오를 수록 그와는 점점 멀어질 강하리니까.한 순간, 그녀가 너무 잘되지 말았으면 하는 생각이 불쑥 쳐들었지만.강하리의 행보를 막을 수 없단 걸 잘 알고있는 구승훈이었다.성황리에 막을 내린 정상회담 후, 어김없이 축하연이 열렸다.강하리가 극구 참석을 사양했지만, 박근형의 엄근진 모드에 결국 백기를 들고 말았
“뭐 하는 짓이에요!”“보면 몰라? 춤 추러.”가까스로 신형을 멈춰세운 강하리가 구승훈의 발을 콱 밟았다.“쓰읍!”짧은 들숨이 저절로 쉬어진 구승훈, 대신 더 거칠게 강하리의 허리를 끌어당겼다.“이 씹, 또 밟기만 해 봐.”원하신다면야.강하리가 더 힘을 실어 또 내리 밟았다.구승훈의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졌다.“그만 밟으라고! 이 독한 여자야!”“이것부터 놓으시죠! 양아치 씨!”“놓으면 주해찬과 붙어서 알콩달콩 춤 출 거잖아!”다급한 마음에 본심이 나와버렸다.강하리의 입매가 한껏 굳어졌다.“안 될 거라도 있나요?”“당연히 안 되... 아니야. 되는데.”급히 말을 바꾸는 구승훈.“그러지 마. 부탁이야.”살짝 비참하게까지 들리는 구승훈의 음성이었다.“...안 춥니다. 안 춰요! 선배랑도, 그쪽이랑도! 됐어요?”구승훈의 팔에서 빠져나온 강하리는 뒤도 안 돌아보고 연회장 안쪽으로 사라졌다.그 뒷모습을 말없이 노려보던 구승훈은 한 참이 지나서야 쩔뚝거리며, 강하리가 사라진 쪽으로 걸어갔다.“미안해요 선배.”주해찬의 곁으로 다가간 강하리가 사과의 눈빛을 보냈다.한숨을 푹 내 쉰 주해찬은, 더이상 춤 얘기를 꺼내지 않았다.연회장 안의 분위기는 점점 더 무르익어갔고.강하리의 주위에 몰려드는 사람도 점점 더 늘어갔다.처음에는 한 둘씩 인사하러 오던 데로부터, 급기야는 무리를 지어 강하리를 에워싸고 찬사를 무더기로 쏟아냈다.일찍부터 외교부의 될성부른 후지기수란 소문이 돈 데다, 오늘 강하리의 활약을 모두가 직관한 터라 너도나도 앞다투어 강하리의 주위에 몰려들어 잔을 부딪쳤다.강하리는 서서히 머리가 어지러워나기 시작했다.건배라고 해 봤자 조금씩 홀짝대는 정도였지만, 건배하러 오는 사람들이 하도 많은지라 벌써 위스키 잔을 세 번이나 새 걸로 바꾼 강하리였다.결국 잔을 내려놓고 세면실을 향해 걸어간 강하리.그 뒷모습을 응시하는 구승훈의 미간이 좁혀졌다.찬 물로 얼굴을 씻어낸 강하리는 그제야 정신이 좀 드는 것 같았다.돌아서
주해찬의 표정이 확 바뀌며 핸들을 꺾었지만 그래도 피할 수 없었다.그는 무의식적으로 강하리를 보호했고 강하리의 시선은 다가오는 차에 고정된 듯 움직이지 않았다.구승훈의 차다.차 번호판도 똑같았다.구승훈이 B시에 올 때마다 몰던 차였다.순식간에 강하리의 얼굴은 창백해지고 곧 눈앞이 핑글 돌았다....강하리가 다시 눈을 떴을 때 침대 옆에 앉아 있는 구승훈이 보였다.“좀 어때? 어디 불편한 데는 없어?”강하리는 멍한 표정으로 옆에 앉은 남자를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구승훈, 당신이야?”구승훈의 시선이 무겁게 가라앉았고 의심을 받은 그의 눈동자가 싸늘하게 식었다.“하리야, 너 정말 나라고 의심하는 거야?”입술을 달싹이며 그를 바라보는 강하리는 알 수 없는 감정이 밀려왔다.의심하고 싶지 않았지만 그 차는 분명 구승훈의 것이었다.하지만 구승훈이 아니라고 말할 때 오히려 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서늘한 구승훈의 시선을 피하며 나지막이 물었다.“선배는?”구승훈이 피식 웃었다.“네가 신경 쓰는 건 주해찬밖에 없지?”강하리는 잠시 침묵했다.“날 구해준 사람이야.”그녀의 손목을 잡고 있던 구승훈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내가 널 구해준 적은 없어? 하리야, 너 정말 사람 마음 아프게 한다.”강하리는 그의 손에서 손을 빼냈다.지금은 그와 이런 얘기를 하고 싶지 않았다.주해찬이 그녀의 몸을 감쌌기에 그는 꽤 심하게 다쳤을 거다.처음부터 주해찬에겐 미안한 것투성이였다.오랜 시간 동안 그의 헌신적인 모습을 보면서도 그에게 해줄 대답이 없었다.게다가 구승훈의 차로 교통사고까지 났으니 마음속에는 죄책감이 커져만 갔다.“선배는 어떻게 됐어?”여전히 똑같은 말에 구승훈은 아무 말 없이 그녀를 바라봤다.주해찬의 상태는 좋지 않았다.목숨은 건졌지만 그가 깨어날 수 있을지는 여전히 미지수였다.지금 강하리의 태도로 볼 때, 주해찬이 자신을 구하려다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그녀가 어떻게 행동할지 정말 알 수 없
주해찬의 표정이 잠시 번뜩이다가 미소를 지으며 정양철에게로 향했다.“아저씨, 오랜만이네요.”정양철의 얼굴에 서늘한 기운이 감돌았다가 이내 평소 모습으로 돌아왔다.“해찬아, 여긴 무슨 일이야?”주해찬이 미소를 지었다.“친구 데려다주고 나오는데 여기서 아저씨랑 만났네요.”정양철은 고개를 끄덕이며 더 말을 이어가지 않았다.“그럼 가서 일 봐. 난 아직 할 일이 남아서.”“알았어요.”주해찬은 그 말을 하고 돌아서서 문을 나섰다.정양철은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전화기를 꽉 쥐었다.한편 주해찬은 안에서 나오기 바쁘게 훅 안도하듯 한숨을 내쉬었다.그는 정신을 차리지 못한 채 한참 동안 멍한 표정으로 길가에 서 있었다.방금 정양철이 한 말은 무슨 뜻이었을까, 강하리나 구승훈과 무슨 일이 있는 걸까?손을 댔다고 했는데, 무슨 짓을 한 걸까.정주현에게 선을 긋던 강아리의 모습과 연관 짓자 주해찬은 문득 무언가를 떠올렸다.그는 다소 창백한 얼굴로 휴대전화를 바라보며 한참을 망설이다가 강하리에게 전화를 걸었다.강하리가 샤워하러 가려는데 갑자기 전화벨이 울렸다.“선배?”하지만 강하리가 전화를 받을 때 주해찬은 갑자기 마음을 바꿨다.적어도 제대로 알아보고 강하리에게 알려줘야지 무턱대고 말하는 건 무책임한 행동이었다.“아니야, 그냥 내일 나랑 같이 팔찌 가지러 가자고.”“선배, 나 혼자 갈 수 있어요.” 강하리가 여전히 거절하려는데 주해찬이 말을 막았다.“그렇게 하는 걸로 하고 오늘 밤엔 일찍 쉬어.”주해찬은 그렇게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다음 날 이른 아침, 준봉은 구승훈의 전화를 받고 강하리에게 아침을 가져다주었다.그런데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려는 순간, 강하리 방 앞에 두 사람이 수상하게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두 사람은 그를 보자마자 뒤돌아 복도 쪽으로 달려갔고 준봉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곧장 그들을 쫓아갔다.일직 강하리가 묵고 있는 호텔 아래층에 도착한 주해찬은 표정이 좋지 않았다.어젯밤 정양철의 그 말 때문에 거의 밤을 새
준봉이 가볍게 목을 가다듬었다.“대표님께서 마실 것 가져다드리래요.”말을 마친 준봉은 강하리에게 밀크티 한 잔을 건넸고 강하리는 눈앞에 놓인 밀크티를 보고 화를 내며 다시 한번 문을 닫았다.주해찬은 방에 앉아서 쓴웃음을 지었다.“내가 안 가면 조금 있다가 또 올걸.”주해찬은 말을 마치며 자리에서 일어나 문밖으로 나갔다.“오늘 밤 모임이 있어서 이만 가볼게.”강하리는 입술을 달싹였다.“죄송해요, 선배.”구승훈이 이러면 주해찬뿐만 아니라 강하리도 난처했다.주해찬은 손을 들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려다가 문득 어젯밤 무의식적으로 뒤로 물러났던 모습이 떠올라 결국 포기했다.준봉은 강하리의 방에서 나오는 주해찬을 바라보며 조용히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그렇지 않았다면 다음에 문을 두드리러 갈 때 또 어떤 핑계를 대야 할지 몰랐을 것이다.주해찬이 나오며 준봉을 보고 웃었다.“구 대표님한테 그럴 필요 없다고 전해요. 하리가 원하면 아무리 문을 두드려도 소용없고 하리가 원하지 않는다면 나도 절대 함부로 하지 않는다고요.”준봉은 주해찬을 바라보기만 했다.“안녕히 가세요, 주해찬 씨.”주해찬은 강하리를 힐끗 쳐다보며 작별 인사를 속삭인 뒤 곧장 돌아섰다.주해찬이 떠난 뒤에야 준봉은 다시 구승훈에게 전화를 걸었고 구승훈은 짧게 대답한 뒤 전화를 끊었다.차는 경찰서를 향해 빠르게 달렸고 통화를 마친 그는 앞에서 운전하고 있는 구승재를 바라보았다.“목란정원 쪽 상황은 어때요?”“우리 쪽 사람들이 들어갔는데 안에 연정이가 없었대. 그리고 사람들이 들어갈 때 꼭 큰어머니가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순조롭게 들어갔대.”시선을 내려 염주를 만지작거리던 구승훈이 차갑게 웃었다.“역시.”구승재가 얼굴을 찡그렸다.“역시 뭐?”구승훈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눈빛만 더욱 짙어질 뿐이었다.어젯밤에 그녀는 일부러 그를 그곳으로 유인한 거다.연정이 사건은 여초연이 한 짓이다.염주를 만지작거리던 구승훈의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뒤틀렸다.하지만 잠시 후 그는
정주현은 다소 시무룩한 표정으로 뒤를 돌아보았다.강하리가 뭔가 숨기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본인이 말하지 않으니 더 물어볼 수도 없어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방금 강하리 씨 데려다줬어. 웬일로 아들이 보고 싶어서 그래?”연미숙이 잠시 멈칫했다.“이 자식, 누가 보면 내가 평소에 너한테 관심 없는 줄 알겠다.”정주현은 연미숙 앞에서 늘 장난기 가득한 모습을 보였다. “그래그래, 관심 많은 거 알겠으니까 무슨 일인데 그래?”연미숙은 잠시 침묵했다.“강하리한테 같이 밥 먹자고 해.”차라리 말하지 않으면 좋았을걸. 그 말을 꺼내니 정주현은 더 우울해졌다.“엄마, 강하리 씨 바빠. 그렇게 할 일이 없으면 친구들이나 만나지 강하리는 왜?”연미숙이 웃었다.“우리 아들이 입이 닳도록 칭찬하는 여자를 내가 좀 만나면 안 돼?”정주현이 입을 삐죽거렸다.“영감탱이가 엄마처럼 정신 차렸으면 강하리가 며느리 됐을 텐데.”연미숙의 얼굴에 머금었던 미소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하루 종일 밖에 돌아다니지 말고 빨리 돌아와.”그렇게 말하고 전화를 끊은 후, 그녀의 눈에는 악의에 찬 눈빛만이 번쩍였다.강하리는 정주현을 배웅하고 창가에 서서 생각에 잠겼다.주해찬은 그녀의 뒤에 서서 물었다. “일부러 주현 씨랑 거리를 두는 거야? 무슨 문제라도 있어?”정신을 차린 강하리는 그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이렇게 말했다.“선배, 난 신경 쓰지 말고 가서 일 봐요.”주해찬은 그녀가 말하지 않으려는 것을 보며 다소 무력하고 씁쓸한 마음이 들었다.만약 이 순간 그녀의 곁에 있던 사람이 구승훈이었다면 그녀는 바로 말하지 않았을까?아니면 구승훈은 굳이 묻지 않아도 그녀가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알고 있었을까?질투가 안 난다면 거짓말이다. 분명 그가 구승훈보다 먼저 강하리를 좋아했는데.“하리야, 가능하면 나도 네가 기댈 곳이 되어주고 싶어.”강하리의 표정은 굳어졌고 말투에는 분명하게 선을 긋고 거리를 두는 게 느껴졌다.“선배, 정말 고맙지만 지금은 그럴 기분이
여초연이 얼마나 치밀하게 움직이는 사람인지 구승훈이 제일 잘 안다.정말 여초연이 연정이를 데려갔다면 그렇게 쉽게 꼬리를 드러내지 않았을 테고 초조했던 그는 계속해서 그녀가 먼저 빈틈을 보이길 기다릴 수가 없었다.그래서 소란을 일으킨 뒤 그녀의 움직임을 주시할 생각이었다.그녀의 수단으로 봤을 때 누군가 자기를 지켜보는 걸 모를 리 없었다.그런데도 오늘 대놓고 이곳으로 왔다는 건 의심을 잠재우기 위해 그를 유인한 걸까?그렇다면 연정이에게 일어난 일이 그녀와 관련이 있다는 것이 더 분명해지지 않나?어쨌든 구승훈은 연정이를 먼저 생각해야 했다.연정이가 정말 그녀의 손에 있고 막다른 길에 이른 그녀가 무슨 짓을 할까 봐 두려웠다.그래서 조심할 수밖에 없다.그 시각 목란정원에서 여초연은 복도에서 누군가와 휴대폰을 들고 영상통화를 하고 있었는데 상대는 여자아이를 안고 있었다. 이쪽의 깊은 밤과 달리 저쪽은 태양이 밝게 빛나고 있었다.강하리는 다음 날 주해찬과 함께 B시로 갔다.비행기에서 막 내린 두 사람은 입국 게이트에서 정주현이 신나게 손을 흔드는 모습을 보았다.“강하리 씨, 드디어 왔네요!”강하리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며 주해찬을 흘깃 쳐다보았다.주해찬은 무기력하게 어깨를 으쓱했다.“어쩔 수 없었어. 계속 물어보니까 시간을 알려줄 수밖에.”정주현은 곧바로 불만을 터뜨렸다. “강하리 씨, B시로 오면 알려준다면서 이러는 건 아니죠!”강하리는 힘없이 웃었다.“가요.”그러던 중 정주현은 강하리와 함께 일하고 싶다는 걸 다시 한번 언급했지만 강하리는 여전히 부정적인 태도를 유지했다.정주현은 인상을 찌푸리며 강하리를 바라보았다. “하리 씨, 그래도 우리 같이 일한 적이 있는데 이러면 대양그룹에 불만이 있는 것 같잖아요.”강하리는 잠시 침묵했다.“정 회장님이 절 찾아오라고 시켰어요?”정주현은 부인하지 않았다.“영감탱이한테 불만 있는 건 아니죠? 지난번에 구정우 도와줘서 그래요?”강하리는 침묵하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정주현은 그
구승훈의 주변에 우중충한 공기가 감돌았고 차가운 시선은 올곧게 주해찬에게 향했다.가까이 다가온 주해찬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그에게 주먹을 날렸다.구승훈은 조금도 피할 생각 없이 그대로 얻어맞은 뒤 이윽고 주해찬의 손목에 주먹을 내리쳤다.그 손이 조금 전 강하리의 입술에 닿았다. 구승훈은 그의 뼈를 부러뜨릴 기세로 달려들었다.주해찬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고 눈에서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구승훈, 하리가 얼마나 고통스러워했는지 알아? 병원에서 그 며칠을 어떻게 보냈는지 알아? 네가 뭔데 계속해서 걔한테 상처를 줘, 네가 뭐라고 걔한테 그런 식으로 강요해!”강하리가 병원에서 지냈던 걸 언급하자 구승훈의 표정이 굳어졌다.당연히 그는 그녀가 그 시간을 어떻게 보냈는지 알고 있었다.매일 의사가 진정제를 놓아야 겨우 잠을 잘 수 있었다.심한 우울증이었다.노민준이 그날 했던 말을 그는 여태 기억하고 있었다.“이러면 언제든 극단적인 선택을 할 위험이 있어. 이젠 살아갈 의욕을 완전히 잃었어.”구승훈의 몸이 경직되었지만 꿋꿋하게 받아쳤다.“주해찬 당신이 뭔데 나랑 하리 사이에 끼어들어?”주해찬은 입가에 무심한 미소를 지었다.“내가 아무리 그냥 선배라도 걔가 너한테 괴롭힘당하는 걸 그냥 두고 볼 수는 없어.”“정말 그냥 선배가 되고 싶은 거야? 주해찬, 네 개수작을 모를 것 같아? 이 기회를 이용하려는 거잖아.”잠시 멈칫하던 주해찬은 더 이상 자신의 마음을 숨기지 않았다.“내가 아무리 이용하는 거라고 해도 억지로 강요하는 너보다 나아. 구승훈, 사람 존중하는 방법부터 배우고 다시 하리 앞에 나타나. 그전까지 넌 자격 없으니까.”주해찬은 말을 마치고 곧장 차 쪽으로 몸을 돌렸다.비를 맞으며 서 있던 구승훈은 한참이 지나서 옅은 웃음을 터뜨렸다.자격이 없다고...맞는 말이긴 한데 그럼 주해찬은 자격이 있다는 말인가?그는 입가를 가볍게 문지르며 위쪽을 올려다보았다.강하리는 주방에 약을 먹으러 가다가 비속에 서 있는 구승훈을 보게 될 줄은 몰랐
가서 팔찌를 가지고 백아영의 생일을 보낸 후 출국할 생각이었고 그 외 일은 지금 당장 처리할 기분이 아니었다.구승훈이 무슨 말을 하려는데 손연지의 집 밑에 우산을 쓴 남자가 서 있는 것을 보았다.주해찬이었다.비 오는 밤, 가로등에 반사된 남자의 모습은 약간 서늘한 기운을 풍겼다.구승훈이 피식 웃었다.“무척 적극적이네.”강하리는 입술을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강렬한 불빛이 주해찬에게 비추자 뒤를 돌아본 그가 구승훈의 차에서 내려 걸어오는 강하리를 발견했다.구승훈은 보지 못한 듯 강하리를 향해 걸어가는 그의 입꼬리가 살며시 올라갔다.검은 우산이 머리 위로 드리워지며 주해찬의 낮은 톤 목소리가 흘러나왔다.“걱정돼서 보러 왔어.”강하리는 입술을 달싹이며 웃었다.“난 괜찮아요. 걱정시켜서 미안해요.”그때 주해찬이 차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하리 데려다주셔서 감사합니다, 구 대표님.”구승훈은 고개를 숙이고 담배에 불을 붙인 뒤 가벼운 웃음을 내뱉으며 주해찬을 향해 시선을 들어 올렸다.“주해찬 씨가 뭐라고 저한테 감사 인사를 하는 거죠?”주해찬의 얼굴에는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하리의 선배로서요.”그는 말을 마치고 고개를 돌려 강하리를 바라보았다.“시간도 늦었는데 일찍 집에 가서 쉬어.”강하리가 고개를 끄덕이자 주해찬이 우산을 들고 건물 쪽으로 따라나섰다.구승훈은 두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얼굴에 서리가 낀 것 같은 차가운 표정을 지었다.헤드라이트가 두 사람의 실루엣을 더욱 돋보이게 했다.비를 맞으며 우산 아래서 두 사람의 어깨는 단단히 맞닿은 것 같았다.건물 입구에 다다랐을 때야 강하리가 나지막이 말했다.“선배, 나 혼자 올라가면 돼요.”주해찬의 시선이 강하리의 입술에 닿았다.입술이 어딘가 부딪힌 것처럼 살이 갈라져 있었다.갈 때는 괜찮았는데 돌아올 땐 입술이 찢어진 채로 왔다.구승훈에 대한 강하리의 쌀쌀맞은 태도는 다 지켜보고 있었다.“구승훈이 강요했어?”주해찬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강하리는 몸이 굳어지더
한편 여초연은 거실 소파에 앉아있고 도우미가 옆에서 옷을 걸쳐주었다.“사모님, 시간이 늦었는데 일찍 쉬세요.”여초연은 밖의 하늘을 바라보다가 옷을 두른 채 일어나 문으로 걸어갔다.“승훈이는 요즘 어떻게 지내요?”도우미는 얼굴을 찡그렸다.“잘 지내지 못해요. 강하리라는 여자가 우리 집안을 어떻게 만들었는지 보세요. 어르신까지 들여보냈는데 큰 도련님은 대체 무슨 생각인지. 여자한테 홀딱 넘어간 게 틀림없어요.”여초연은 밖에서 내리는 비를 바라보면서 조금의 표정 변화도 없었다.“앞으로 그런 말 하지 마요. 승훈이가 좋아하는 사람이고 내 며느리니까.”도우미가 입술을 달싹였다.“그래도 구씨 집안이 그 여자 때문에 이 모양이 됐잖아요!”SH그룹이 합병되면서 구씨 집안은 뿌리 없는 나무처럼 흔들리고 있었다.도우미들의 일자리도 위협받는 상황에서 정작 여초연은 조금의 초조함도 보이지 않았다.“게다가 큰 도련님도 그 여자 때문에 사모님께 화를 냈잖아요.”여초연은 부드럽게 웃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돌아서서 우산을 들고 밖으로 걸어 나갔다.“따라오지 마요.”그녀가 속삭이자 도우미는 즉시 발걸음을 멈췄다.비 내리는 어느 날 밤, 검은색 승용차가 구씨 집안 저택에서 시내 반대편 목란정원을 향해 유유히 달렸다.목란정원은 여초연이 소유한 정원인데 그녀는 때때로 며칠씩 이곳에 오곤 했다.구승재는 그녀를 따라 목란정원 입구까지 갔다가 차를 멈췄다.그는 목란정원의 출입구를 바라보며 살짝 한숨을 내쉬었다.그동안 형의 지시로 구씨 저택에 머물면서 집안사람들을 돌보고 있었지만 사실은 여초연을 감시하는 것이었다.여초연의 차가 목란정원에 들어가는 것을 본 구승재는 휴대폰을 꺼내 구승훈에게 전화를 걸었다.고요한 밤, 구승훈의 휴대폰이 갑자기 울렸다.강하리의 몸이 굳어졌고 구승훈의 입술은 그녀의 귀에 닿은 상태였다.“전화 좀 받고 올게.”구승훈이 떠난 후 강하리 휴대폰도 울렸다.주해찬의 전화였다.“하리야, 비행기표 샀으니까 내일 데리러 갈게.”“그래요.
구승훈은 상처받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다가 가볍게 웃었다.“하리야, 넌 늘 그렇듯 매정하네.”강하리가 뒤돌아 휴대폰으로 택시를 부르려는데 구승훈이 그녀의 휴대폰을 움켜잡았다.“딱 하룻밤만. 너 안 건드릴게, 응?”강하리의 몸이 굳어졌고 구승훈은 그녀의 손을 더욱 꽉 잡았다.“하리야, 내 소원 들어주는 거라고 생각해. 네가 이 집에서 아이와 함께 지내는 모습을 몇 번이나 상상했는지 몰라. 여기가 우리 집이야.”강하리의 코끝이 시큰거렸지만 그래도 결국 구승훈의 손을 뿌리쳤다.너무도 분명한 그녀의 거절에 구승훈은 답답한 가슴에 고통이 밀려왔고 쓴웃음을 짓던 그는 더 그녀에게 강요하지 않았다.“샤워하고 나오면 다시 데려다줄게.”말을 마친 그는 돌아서서 화장실로 들어갔다.구승훈이 샤워를 마치고 나오는데 강하리는 통화 중이었다.발걸음이 멈칫한 그는 통화 상대가 주해찬이란 것을 알아차렸다.“선배, 전 괜찮아요.”“알았어, 항공편 예약해. 나도 같이 갈게.”강하리가 전화를 끊는데 구승훈이 갑자기 다가와 그녀를 껴안고 고개를 숙여 입 맞추었다.“구승훈!” 강하리는 그의 키스에 깜짝 놀라 그를 밀어내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구승훈은 점점 더 꽉 그녀를 붙잡았다.그는 강하리의 턱을 잡고 깊숙이 파고들며 조금의 부드러움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격렬하게, 마치 화풀이나 비난하듯 키스를 퍼부었다.강하리는 벽에 단단히 밀려서 몸부림을 치는 것조차 힘에 부쳤다.그녀가 다리를 들어 그의 아랫도리를 가격하려는데 구승훈이 먼저 그녀의 다리를 붙들었다.강하리가 입술을 꽉 깨물었지만 구승훈의 키스는 점점 더 격렬해졌다.힘의 격차로 인해 그녀는 반격할 방법이 없었다.강하리는 화가 나서 얼굴마저 하얗게 질렸고 구승훈은 실컷 헤집어놓은 뒤에야 그녀를 놓아주었다.강하리가 그의 뺨을 때렸고 이내 구승훈의 얼굴엔 손자국이 생겨났다.그러나 그의 손가락은 키스로 인해 부어오른 그녀의 입술을 부드럽게 쓸어내렸다.“하리야, 나 생각이 바뀌었어.”강하리가 멈칫했다.“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