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 강하리? 왜... 왜 그래, 하리야? 응?”갑자기 깬 강하리 때문에 한 번 놀라고, 흘러내린 눈물 때문에 또 한 번 놀랐다.당황함과 걱정, 놀람으로 더듬거리는 구승훈의 목소리.구승훈의 목소리에 강하리는 정신이 퍼뜩 들었다.급급히 고개를 돌려 눈물을 쓱 훔쳤다.“열두 시가 지났네요. 얼른 가요.”시간을 확인하며 한 마디 던지고는, 노트북을 내려놓고 황급히 욕실로 뛰쳐들어갔다.찬 물을 틀어 한참 동안이나 세수를 했지만, 눈시울은 여전히 불그스름했다.너무나도 생생했다. 꿈 속에서 심연으로 내리꽂히던 추락감과 출렁이는 파도, 입과 코로 마구마구 밀려드는 바닷물에 숨이 콱 막혀오던 그 느낌까지.눈을 뜨는 순간, 죽음의 문턱에 다다른 듯한 공포는 사라졌지만.악몽 같은 그 날의 기억이 또 뇌리를 엄습했다.바다 추락 사건 이후, 종종 자신을 괴롭히던 악몽이었다.떨쳐낼래야 떨쳐낼 수가 없는 그 악몽에 익숙해졌다고 생각했었는데.눈을 뜬 순간, 꿈의 끝자락에 보인 구승훈의 얼굴에, 그 끔찍한 꿈이 현실이 되는 느낌이 들었다.찬 물로 얼굴을 몇 번 더 문지른 강하리가 몸을 일으키자, 욕실 문 앞에 서 있는 구승훈의 모습이 거울에 비쳤다.“안 좋은 꿈이라도 꾼 거야?”한껏 좁혀진 구승훈의 미간에 주름이 깊게 져 있었다.“…아니에요. 아무것도.”“아무것도 아닌 거야, 아무것도 말해주기 싫은 거야?”구승훈의 목소리가 한껏 가라앉았다.“진짜 별거 아니에요. 들어가 봐요.”구차하기 짝이 없는 변명.사실 변명이랄 것도 없이, 강하리의 표정만 봐도 말하기가 싫단 걸 알아챌 수 있는 구승훈이었다.동시에 화가 살짝 치밀었다아니, 오늘 분위기 좋았잖아.밥도 같이 먹고, 머리도 말려주게 했고, 방 안에 있게도 해 줬잖아.왜 다시 예전으로 돌아간 건데. 대체 왜.“하리야.”화를 꾹 누른 채, 구승훈이 다시 입을 열었다.“내가 또 뭐 잘못한 거라도 있어?”“묻지 마요, 좀.”“그럼 잘 됐네. 어차피 걱정되던 차였는데. 나 안 가.”배 째라
“이렇게 무턱대고 찾아오면 강하리만 난감할 뿐이란 걸 잘 알 텐데.”구승훈의 입에서 서늘한 음성이 흘러나온다.“집사람들 단속이나 잘 좀 하고 찾아오든가. 아니면 멀찍이 떨어져 있지 좀?”“그러는 구 대표님은 집안 사람들 허락 받고 이리 들러붙는 겁니까?”주해찬이 차가운 시선으로 맞받아쳤다. 구승훈이 움찔했다.그 모습에 냉소를 짓는 주해찬.“아니면, 집안 사람들과 하리를 대면시킬 생각조차 안 해 보신 겁니까?”구승훈의 표정이 점점 더 거칠어졌다.“이렇게 들러붙는 목적이 결혼 생각조차 없는 애인이라니, 가소롭기 짝이 없군요.”“입 조심해라.”성난 야수를 닮은 구승훈의 으르렁거림이 잇새로 새어나왔다.“난 구 대표님과 다릅니다. 하리를 위해서라면 곁에 꼭 붙어있을 수도 있고-.”주해찬이 개의치 않고 말을 이어나갔다.“영영 멀찍이 떨어질 수도 있거든요. 그쪽은 그게 안 되잖아요.”“듣던 중 반가운 소리군. 포기하겠다는 뜻인가?”구승훈이 차갑게 콧방귀를 뀌고는 강하리의 방 문을 두드렸다.한 참이나 두드렸지만 잠잠하기만 했다. 아무 반응이 없었다.거의 동시에, 두 남자의 머릿속에 쎄한 느낌이 자나갔다. 두 미간이 동시에 좁아졌다.“1206번 손님 찾으러 오셨어요? 아침 일찍 외출하셨습니다.”지나가던 호텔 직원 하나가 일러주었다.“몇 시 쯤에 나갔습니까?”주해찬이 급급히 또 물었다.“글쎄요. 대여섯 시 쯤으로 기억합니다만.”구승훈의 얼굴이 흙빛이 되었다.일곱 시 즈음부터 강하리의 방 문앞에서 서성이고 있었는데.한 시간이나 더 일찍 나가버렸을 줄이야.한 동안, 두 남자가 묵묵히 그 자리를 지켰다.“...아침 드시겠습니까?”손에 든 도시락을 내미는 주해찬.“너나 많이 드세요.”잔뜩 부아가 난 목소리로 한 마디를 남긴 채, 구승훈이 휙 돌아서 멀어져갔다.사실 강하리의 이른 외출은 두 남자를 피하려는 의도가 전혀 없었다.밤샘 작업을 마치고 바로 호텔을 나선 것 뿐.회의장에라도 나가보려고 그 쪽으로 가다가, 모닝 운동을 하러
순식간에 구승훈이 뒤로 빠졌다.노기에 찬 눈길로 구승훈을 노려보는 강하리.“미쳤어요? 방키 놔두고 당장 나가요!”차가운 음성에도 아랑곳 없이 구승훈이 픽 웃었다.“네가 준 거잖아. 왜 나한테 뭐라 하는데.”호주머니에서 나온 그의 손에는 1204라고 적힌 방 키가 들려있었다.“인심 썼다. 여기 잠자리가 불편하면 내 방에 가서 자도록.”그리고, 아니나 다를가, 베개가 그의 얼굴에 날아들었다.“꺼지라고!”잽싸게 베개를 받아든 구승훈이 조심히 침대맡에 내려놓았다.이쯤하면 목적은 이룬 셈, 치고 빠질 때가 되었다.아침부터 보이지 않는 강하리가 걱정돼서 와 본 것 뿐이니까.딴 마음은 없었다. 음, 없는 거다.“잘 자. 좋은 꿈 꿔.”나지막이 속삭이는, 성X경 뺨치는 꿀 중저음과 함께 강하리를 한 번 꼬옥 안아주고는, 그녀가 어쩔 새도 없이 바람처럼 사라져 버렸다.멍해진 표정으로 강하리가 구승훈이 사라진 문 쪽을 바라보았다....이틀 간의 준비 끝에, 정상회담이 성대한 막을 올렸다.세련된 옷차림의 강하리가 회의장 곳곳을 누비고 다녔고.결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는 박근형 교수의 입가에는 흡족한 미소가 떠나질 않았다.그 모습은 실시간 방송을 타고 온 세상에 전해졌고 세간의 감탄을 자아냈다.[정삼회당 최강 미모 통역사]실시간 검색 1위를 차지한 타이틀.생방송으로 화면에 비친 강하리의 모습을 바라보는 한 남자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피어있었다.‘잘 하네, 강하리.’후우, 구승훈이 빨았던 담배 한 모금을 뱉었다.찬란한 빛이 나는 강하리였고, 온 회의장이 그녀의 메인 스테이지였다.하지만 구승훈은 마냥 기쁠 수가 없었다.높이 날아오를 수록 그와는 점점 멀어질 강하리니까.한 순간, 그녀가 너무 잘되지 말았으면 하는 생각이 불쑥 쳐들었지만.강하리의 행보를 막을 수 없단 걸 잘 알고있는 구승훈이었다.성황리에 막을 내린 정상회담 후, 어김없이 축하연이 열렸다.강하리가 극구 참석을 사양했지만, 박근형의 엄근진 모드에 결국 백기를 들고 말았
“뭐 하는 짓이에요!”“보면 몰라? 춤 추러.”가까스로 신형을 멈춰세운 강하리가 구승훈의 발을 콱 밟았다.“쓰읍!”짧은 들숨이 저절로 쉬어진 구승훈, 대신 더 거칠게 강하리의 허리를 끌어당겼다.“이 씹, 또 밟기만 해 봐.”원하신다면야.강하리가 더 힘을 실어 또 내리 밟았다.구승훈의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졌다.“그만 밟으라고! 이 독한 여자야!”“이것부터 놓으시죠! 양아치 씨!”“놓으면 주해찬과 붙어서 알콩달콩 춤 출 거잖아!”다급한 마음에 본심이 나와버렸다.강하리의 입매가 한껏 굳어졌다.“안 될 거라도 있나요?”“당연히 안 되... 아니야. 되는데.”급히 말을 바꾸는 구승훈.“그러지 마. 부탁이야.”살짝 비참하게까지 들리는 구승훈의 음성이었다.“...안 춥니다. 안 춰요! 선배랑도, 그쪽이랑도! 됐어요?”구승훈의 팔에서 빠져나온 강하리는 뒤도 안 돌아보고 연회장 안쪽으로 사라졌다.그 뒷모습을 말없이 노려보던 구승훈은 한 참이 지나서야 쩔뚝거리며, 강하리가 사라진 쪽으로 걸어갔다.“미안해요 선배.”주해찬의 곁으로 다가간 강하리가 사과의 눈빛을 보냈다.한숨을 푹 내 쉰 주해찬은, 더이상 춤 얘기를 꺼내지 않았다.연회장 안의 분위기는 점점 더 무르익어갔고.강하리의 주위에 몰려드는 사람도 점점 더 늘어갔다.처음에는 한 둘씩 인사하러 오던 데로부터, 급기야는 무리를 지어 강하리를 에워싸고 찬사를 무더기로 쏟아냈다.일찍부터 외교부의 될성부른 후지기수란 소문이 돈 데다, 오늘 강하리의 활약을 모두가 직관한 터라 너도나도 앞다투어 강하리의 주위에 몰려들어 잔을 부딪쳤다.강하리는 서서히 머리가 어지러워나기 시작했다.건배라고 해 봤자 조금씩 홀짝대는 정도였지만, 건배하러 오는 사람들이 하도 많은지라 벌써 위스키 잔을 세 번이나 새 걸로 바꾼 강하리였다.결국 잔을 내려놓고 세면실을 향해 걸어간 강하리.그 뒷모습을 응시하는 구승훈의 미간이 좁혀졌다.찬 물로 얼굴을 씻어낸 강하리는 그제야 정신이 좀 드는 것 같았다.돌아서
쓰라린 고통이 찾아온 건, 강하리의 외침소리가 구승훈의 귀에 들어온 뒤었다.동시에 구승훈의 반대쪽 손이 번개같이 날아가 사내의 손에 든 비수를 낚아챘다.“말해. 누가 시켰어.”“구승훈, 내가 누군지나 알아?”사내가 표독스런 눈길로 구승훈을 응시했다.“내 알 바 아니고. 이쪽이었지?”“끄아악!”강하리에게 닿았던 손이 비수에 관통된 사내의 처절한 울부짖음이 세면실에 울려퍼졌다.무슨 일인가 싶어 세면실 밖에서 웅성거리던 사람들이 흠칫 놀라며 뒤로 물러섰다.단숨에 사내를 쳐 기절시킨 구승훈의 야수 같은 눈길이, 파랗게 질린 고이선을 향했다.“다신 이러지 말라고 분명 경고했을 텐데.”“구, 구 대표님, 유라 지금 무슨 꼴인지나 아세요? 정신이 반쯤 나가서, 온종일 한 마디만 중얼거려요. 대표님이 지켜줄 거라고요! 지금 이 순간까지도요! 저 천박한 년이 대체 뭐라고 유라를 정신병원에까지 넣으신 거에요? 네?”떨리는 목소리로 주절이는 고이선의 말에 구승훈이 움찔했다.다른 게 아니라, 답을 얻어서였다.고이선이 스스로 주제넘는 짓을 또 벌인 건 아닐 테고.누군가가 부추긴 게 분명했다.고이선이야 그냥 제 딴에는 베프를 위한 일이라고만 생각했겠지만.그 머리에선 이런 악독한 계략이 나올 수가 없었다.“머리가 나쁘니까 별 멍청한 짓을 다 도맡아 하는군.”구승훈이 사시나무 떨듯 온 몸을 떠는 고이선을 한 켠으로 밀어버렸다.그떄 마침 심준호가 뛰어들어왔고, 고이선이 동아줄이라도 잡은 듯 그에게 허둥지둥 뛰어갔다.“삼촌! 삼촌! 저 좀 구해줘요! 저 천한 년이...”“닥쳐!”심준호가 서늘한 눈길로 고이선을 흘끔 쳐다보고는 뒤에 따라온 경비원들에게 손짓했다.“당장 경찰서로 데려가요. 둘 다.”“사... 삼촌?”고이선의 얼굴에 피어올랐던 한 줄기 희망이 그대로 폭삭 무너졌다.“삼촌! 어떻게 나한테 이래요? 나 이선이라고요! 삼촌 조카딸 고이선! 이거 놔아아악!”고이선의 비명이 멀어졌고, 축 늘어진 사내도 끌려나갔다.심준호의 미간에 깊은 주름
“하리야! 괜찮냐?”헐레벌떡 달려온 박근형 교수가 걱정 가득한 얼굴로 강하리를 위아래로 훑었다.“저 괜찮아요, 교수님.”강하리의 확답을 들은 박근형은 안도의 표정이 되었다가, 곧 이어 분개했다.“정신 나간 놈! 여기서 이런 짓을 벌이다니!”“교수님, 걱정 마세요. 절대 그냥 넘어가지 않겠습니다.”심준호가 서늘한 음성으로 거들었다.“외교부의 치욕입니다. 바로 데려가세요.”진태형 역시 차갑게 가라앉은 얼굴이었다.소문의 터지면 외교부의 위상에 큰 타격을 줄 게 뻔했으니 말이다.진태형은 옆의 사람에게 몇 마디 분부한 뒤, 고개를 돌려 강하리를 바라보았다.“하리 양, 이번 일은-.”“소문내지 않을테니 걱정 마세요 부장님. 저 역시 외교부 사람이니까요. 자기 얼굴에 먹칠하는 일은 안 합니다.”“정말 미안해요. 꼭 제대로 처리해서 하리 양에게 알려줄게요.”진태형은 미안함 가득 담아 사과하고는 급급히 자리를 떴다.이번 일로 한동안 바쁘게 보낼 건 확정된 것 같았다.연회장 휴식실.사건을 일으킨 두 사람을 경찰에 넘긴 뒤, 심준호가 찾아왔다.“많이 놀랐죠?”아까의 차가운 얼굴은 오간데 없고, 걱정 가득한 눈길로 강하리를 바라보았다.“조금은요.”방금 같은 순간에 안 놀랐다면 거짓말일 터.심준호의 눈에 안쓰러운 빛이 스쳐지났다.왜 자꾸 강하리에게만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 무슨 죄가 있다고.“그 두 사람, 반드시 마땅한 대가를 치르게 해 줄 거예요.”강하리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괜찮아? 진통제라도 갖다줄까?”심준호의 눈길이 한껏 어두운 얼굴로 묵묵히 앉아있는 구승훈에게 향했다.“네가 안 왔다면 좀 괜찮았을지도.”부르퉁한 소리에 심준호가 눈을 희번득였다.‘지금 저게 무슨 뜻이지? 강하리와 단둘이 있을 기회가 날아갔다고 나무라는 거?에라이, 더러워서 내가 간다. 더러워서.’심준호가 나갔고, 휴식실에는 구승훈과 강하리 단 둘이 남게 되었다.한동안의 어색한 침묵이 흐르고.“아파요? 의사가 남기고 간 진통제 있는데 드실래요?”
강하리의 물음에 구승훈은 살짝 불쾌해졌다.“내가 그 정도로 시비를 안 가리는 사람으로 보여?”‘아닌가요’가 입가에서 맴돌았지만, 강하리는 꾹 참고 다시 집어넣었다.이제 와서 다시 이 문제로 다투는 건 아무 의미도 없었다.구승훈이 일어서서 강하리 앞으로 다가왔다.“걱정 마. 정말 걔가 한 거면, 너를 절대 막아서지 않을 테니까.”강하리는 대답이 없었다.사실 별 기대도 없었다.이런 승낙을 하도 많이 들어왔지만, 매번 실망만 안겨줬으니 말이다.“일단 호텔로 돌아가요.”강하리가 밖으로 나갔다.구승훈은 할 말이 있는 듯 보였으나, 별 말 없이 강하리의 뒤를 따라갔다.외교부 주차장으로 가는 길.은은한 달빛에 앞뒤로 서서 걸어가는 두 사람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구승훈의 눈가에 앞서서 걸어가는 강하리가 오롯이 맺혔다. 왠지 두 사람 사이의 거리가 넘을 수 없는 커다란 골짜기처럼 느껴졌다.그리고 그러한 기분은 그를 몹시 불편하게 했다.재빠른 걸음으로 나아가, 강하리와 나란히 걷기 시작했다.옆을 다 막고 선 웅장한 남자의 몸집에 강하리가 미간을 찌푸렸다.“좀 떨어져 줄래요?”구승훈을 밀어봤지만 꿈쩍도 않는다.대답도 없었고.이윽고 구승훈의 차 앞에 도착한 강하리가 손을 내밀었다.“차 키 줘요.”하지만 구승훈은 대답도 없이 바로 운전석에 올라탔다.강하리고 별다른 말 없이 차에 올라탔고.그렇게 침묵 속에서 차가 호텔에 도착했다.구승훈을 1204호에 데려다준 강하리가 돌아서려는 순간, 구승훈이 그녀를 끌어당겼다.“나 배고파.”“배달 시켜줄게요.”“같이 먹자. 너도 별로 먹은 게 없잖아.”“아닙니다. 전 입맛이 없어서요.”“밥은 먹어야 할 거 아니야. 그러다 몸 상해.”“배고프면 어련히 알아서 먹지 않을라고요.”“밥을 다 먹으면 씻어야 하는데 이 팔로 씻을 수가 없잖아.”강하리의 눈길이 구승훈의 팔에 감긴, 별로 두텁지가 않은 붕대에 멈췄다.“나도 팔 다쳐봤거든요. 어디서 엄살이에요.”구승훈이 움찔했다.그러고 보니,
“그냥, 자꾸 신세지는 게 싫어서요.”신세를 지다보면 점점 갚아야 할 게 많아지고.갚을 수 없을 정도로 많아지면 어쩔 수 없이 양보를 해야 하는 법.뭔가를 양보해야 할 때까지 신세를 키우고 싶지 않은 강하리였다.“알았어요. 사람 필요하면 전화해요.”“네. 고맙습니다.”문가에 서서 두 사람의 통화를 들은 구승훈의 얼굴이 어두워졌다.그냥... 신세를 지기 싫어서 그런 거였어?냉소를 지은 구승훈이 외투를 벗어놓고는 어딘가로 전화했다.“송유라 쪽에 사람 더 보내서 24시간 밀착 감시해.”핸드폰 너머 승재가 흠칫했다.“응? 또 무슨 일이 생긴 거야?”구승훈이 단답형으로 대답하고는 전화를 끊었다.룸서비스로 차려진 음식들이 꽤 먹음직스러웠지만, 구승훈은 전혀 생각이 없었다.“건너와서 같이 밥 먹어.”결국 강하리에게 전화했다.-배 안 고프다니까요.“신세 지기 싫다며. 당장 건너와.”-...네.얼마 못 가 구승훈 앞에 나타난 강하리.테이블에는 강하리가 시킨 음식 외에 디저트 몇 접시가 더 놓여있었다.강하리가 구승훈 맞은켠에 앉았고, 그렇게 조용하기 짝이 없는 식사가 시작되었다.평화는 오래 가지 못했다.“씻는 거 좀 도와줘.”식사를 마친 뒤, 구승훈의 뻔뻔한 음성에 강하리의 얼굴이 일그러졌다.“그건 안될 것 같네요. 알아서 해결하세요.”가차없는 강하리의 대답에 구승훈의 낯색이 또 어두워졌지만, 군소리 없이 욕실에 들어갔다.한참 후, 씻고 나온 구승훈. 팔에 감긴 붕대 한 귀퉁이가 축축하게 젖어있었다.강하리의 미간이 순식간에 구겨졌다.팔이 부러져서 완전히 못 쓰게 된 것도 아니고!“일부러 이러시는 거에요?”“돌봐주겠다며. 인내심이 이것밖에 안 돼?”구승훈이 픽 웃는다.강하리는 치가 떨렸지만 꾹 참고, 구급상자에서 새 붕대를 꺼냈다.“이리 와요. 붕대 바꿔줄게요.”얌전히 다가와 옆에 앉는 구승훈.막 욕실에서 나온 터라, 몸에는 목욕가운 한 벌밖에 걸친 게 없었다.그걸 구승훈은 활짝 열어졎혀, 윗통을 완전히 드러냈다.
강하리의 눈빛이 번쩍이며 구승훈의 말에 담긴 의미를 순식간에 알아차렸다.그가 오늘 인터넷 속 모두가 보는 앞에서 그녀에게 매달리는 역할을 자처했으니 이젠 그녀가 자신을 데려가야 한다는 말이었다.강하리는 구승훈의 목에 팔을 걸고 자기 앞으로 끌어당기며 속삭였다.“보답이라, 문제없지. 구 대표님이 우선 그 쓸데없는 여자들 먼저 해결하면!”이번 일에 진시연이 연루되지 않았을 리가 없다.석미란이 심준호에게 고소당한 이후 석연란조차 한동안 잠잠했고 그녀가 대외적으로 자신에 대한 악담을 퍼뜨릴지 몰라도 온라인에 증거를 남기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그러니 누가 이 모든 일을 주도하고 있는지 한눈에 알 수 있었다.개자식, 하여간 여자가 너무 많이 꼬인다.강하리는 계속해서 구승훈과 사무실에서 꽁냥거리진 않았다.집에 손연지가 있었기에 가는 길에 백아영에게 전화를 건 강하리는 구승훈을 따라 별장으로 돌아왔다.어두운 별장을 보며 강하리는 손연지가 아직 자는 줄 알았다.그녀가 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 인공지능이 불을 켜자 갑자기 별장 전체가 환하게 밝아졌다.강하리가 가방을 내려놓고 손연지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위층으로 올라가려는 순간 갑자기 구승훈이 뒤에서 안았고 곧이어 그녀가 반응할 틈도 주지 않고 소파에 쓰러뜨렸다.강하리가 말하기도 전에 구승훈은 그녀의 입술을 막았고 남자의 손이 불순하게 그녀의 다리를 어루만졌다.“자기야, 다리 예쁘다.”강하리는 남자의 의도를 단번에 알아챘다.이 개자식!머릿속엔 그 짓밖에 없는 건지.얼굴이 화끈 달아오른 그녀는 손연지에 대해 말하는 것도 잊어버렸다.“당신... 읍...구승훈은 거침없이 그녀의 스타킹을 찢어버리고는 그녀의 손을 끌어 벨트로 가져갔다.“도와줘, 자기야.”강하리의 얼굴이 화끈거렸다.“일단 기다려.”구승훈은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종아리를 잡고 부드럽게 주물렀다.“못 기다려.”강하리는 그를 세게 밀었다.“아니, 내 말은...”“어머!”강하리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계단 너머에서 손연지
주해찬은 다소 침울한 표정으로 잠시 침묵을 지키더니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아니라고 하면 믿어줄래?”주해찬은 정말 강하리에게 계속 사실을 숨길 생각도, 진시연을 도울 생각도 없었다.그냥... 강하리가 곤경에 처했을 때 그때 나서서 도와주고 싶었을 뿐이었다.그러면 강하리의 마음속 망가진 그의 이미지를 조금이라도 되돌릴 수 있을 것 같아서.그런데 구승훈이 이토록 매몰차게 굴 줄은 몰랐다.아버지가 얼마나 깨끗하고 정직한 사람인지 장담할 수 없지만 적어도 부패한 관리들처럼 부정부패와 뇌물 수수를 일삼지는 않을 것이고 할아버지도 절대 이런 일이 일어나도록 가만둘 리 없었다.하지만 부패를 철저히 타도하는 지금 같은 시기에 작은 선물을 몇 개 받은 것만으로도 큰 문제가 된다.게다가 구승훈은 그 증거를 노골적으로 인터넷에 올렸고 관련 부서에 실명으로 가차 없이 신고했다.구승훈은 결코 자신을 감추는 사람이 아니었다.그가 원하는 건 주해찬의 타협과 강하리 앞에서 완전히 신뢰를 잃는 것이었다.사실 구승훈이 처음 병원에서 그를 떠봤을 때부터 쉽게 놓아주지 않을 거라는 걸 잘 알았다.다만 줄곧 비현실적인 희망을 붙잡고 있었는데 지금 이 순간이 되어서야 주해찬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그의 완전한 패배라는 걸.“미안해, 하리야. 엄마한테 사과하라고 할게. 그리고... 인터넷에 너에 대한 루머를 유포한 것도 이모가 한 짓이야. 이모한테도 사과하라고 할게. 그리고 하리야, 내 다리...”주해찬은 말하며 심호흡하듯 잠시 멈춘 뒤 다시 말을 이어갔다.“사실 거의 다 나았어.”강하리는 당황했고 주해찬은 다시 입을 열었다.“미안해. 조금만 더 나랑 같이 있어 주길 바라서, 구승훈이랑 다시 만나서 네가 또 상처받을까 봐 내가...”“선배.” 강하리가 갑자기 주해찬의 말을 가로챘다.“고마워요.”그녀가 고맙다고 말할 거라곤 상상조차 못 했다.강하리가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예전에 여러 번 날 도와주고 날 이렇게 생각해 주고 지금도 날 위해 나서서 진실을
두 사람 관계에 있어서 누가 봐도 을인 모습이었다.사무실에 있던 몇몇 기자들은 서로 눈치만 봤다.에비뉴와 정안그룹이 강하리 명의로 되어 있다고?그렇다면 강하리 혼자서도 B시 재벌과 맞먹는 것 아닌가.여러 기자가 모두 멍한 표정으로 구승훈을 바라봤다.구씨 가문의 권력자 구승훈이 자신은 아내 덕분에 먹고 사는 놈이라고 말하다니, 그것도 제법 자랑스러워하는 듯했다.“그러면 강 대표님이 구 대표님과 송유라 씨 사이에 개입했다는 건...”구승훈의 눈빛이 어두워졌다.“제가 우리 강 대표님과 언제 만났는지 아세요?”기자는 고개를 저었고 구승훈은 오른손 손가락으로 왼쪽 약지에 낀 반지를 살며시 돌리면서 시선을 내리깔고 웃었다.“아홉살 때 만났어요. 그 여자가... 제 삶의 유일한 구원이었죠.”구승훈은 복잡한 감정이 가득한 눈빛으로 카메라를 바라보았다.“자기야, 미안해. 오랜 세월 많이 힘들었지? 오늘 여기서 맹세할게. 나 구승훈은 평생 강하리의 것이란 걸.”강하리는 화면 속 구승훈을 바라보다가 갑자기 코끝이 시큰거렸다.개자식, 인터뷰만 할 것이지 왜 저런 말을 해서는.하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구승훈의 말에 그녀의 마음속에 작게나마 남아있던 불편함이 말끔히 사라졌다는 걸.인터넷에 그 많은 루머들이 떠돌아다녀도 언제나 그녀를 감싸줄 사람이 있었다.구승훈의 인터뷰는 곧 화제성을 끌어모았고 강하리를 욕하던 사람들은 모두 흔적도 없이 사라진 채 댓글 창에는 축복의 글이 가득했다.강하리는 휴대폰에 달린 축복의 댓글을 바라보다가 자신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그녀는 휴대폰을 들고 구승훈에게 전화를 걸었고 구승훈의 목소리에는 미소가 묻어났다.“강 대표님, 나 보고 싶어?”강하리는 입술을 달싹이며 웃었다.“오늘 밤 일찍 돌아가서 맛있는 거 해줄게.”구승훈은 눈썹을 치켜올렸다.“맛있는 음식만 있어?” 강하리는 멈칫했다.“또 뭘 원해?”“다리. 자기야, 한번 해보자.”강하리는 이를 갈며 그냥 전화를 끊었고 구승훈은 끊어진 전화를 바라보며
구승훈의 눈빛이 어두워졌다.정양철은 죽었지만 애초에 그가 강하리 어머니에게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는 여전히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였다.이대로 알 수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이 시점에 정양철과 관련된 또 다른 단서가 나올 줄이야.“확실해요?”“물론이죠.”구승훈은 전화를 끊고 심준호에게 연락했고 그와 대화를 마친 뒤 밖을 향해 말했다.“시작하지.”잠시 후 비서가 기자 10여 명을 데리고 구승훈의 사무실로 들어왔다.나문빈이 홈페이지를 정상으로 되돌리자 강하리를 욕하던 사람들은 모두 SNS로 옮겨갔고 과거 여러 번 검색어에 오르며 욕을 먹었던 흑역사도 전부 밝혀졌다.SNS에서 누군가가 돈으로 사주했는지 갈수록 심한 욕설을 퍼붓고 있었다.안예서는 점점 더 고조되는 SNS의 화제성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계약서를 하나하나 처리하는 강하리를 보며 조금은 불안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대표님, 이걸 제대로 밝힐 방법을 찾아야겠어요.”강하리는 고개도 들지 않았다.“그럴 필요 없어. 욕하다 지치면 자연스레 그만두겠지.”안예서가 다소 우울한 표정으로 강하리를 설득하려는 그녀는 이미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었다.“안진 그룹 총괄팀장과 약속 잡아줘.”안예서는 다소 무력한 한숨을 내쉬며 뒤돌아 사무실을 나섰다.그녀가 사무실을 나간 뒤에야 강하리는 휴대전화를 집어 들었고 손가락이 SNS 아이콘 위에서 잠시 멈칫하다 클릭했다.하지만 들어가서 보니 그녀를 욕하는 내용은 사라지고 안예서가 말했던 것들도 전부 보이지 않았다.대신 라이브 방송 하나가 떠서 클릭해 본 강하리는 깜짝 놀랐다.구승훈이었다.뒤에 비치는 장소는 그의 사무실 같았다.남자는 검은 셔츠를 입은 채 느긋하게 의자에 기대어 손가락엔 어느새 반지를 끼고 있었다.자세히 보면 그녀가 끼고 있는 반지와 같은 모델이지만 다이아몬드가 그렇게 크지 않을 뿐이었다.강하리는 무의식적으로 손가락에 낀 반지로 시선을 옮겼고 그 시각 왠지 모르게 인터넷에서 자신에 대해 뭐라고 말하든 다 상관없는 것처럼 느껴졌다.무슨
구승훈은 휴대폰 메시지를 보고 자신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밤에 보상해 줄래?]손연지가 왔다며 허튼수작 부리지 말라고 답장하려던 찰나 갑자기 전화벨이 울렸고 안예서의 초조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대표님, 큰일 났어요.”강하리는 잠시 멈칫했다.“뭔데, 천천히 얘기해 봐.”“오늘 아침 일찍 우리 회사 홍보 사이트가 해킹됐는데 사이트에 온통 대표님이 스폰 받았다는 이상한 댓글이 가득해요.”안예서는 다소 격앙된 목소리로 말했고 강하리는 표정이 점점 굳어갔다.“알겠어.”전화를 끊고 회사 사이트에 들어가니 그녀의 눈에 온통 적나라한 욕설들이 가득 들어왔다.스폰을 받았다는 사람도 있고 몸을 대주고 높은 자리로 올라갔다는 말도 있었다.심지어 구승훈과 송유라 관계를 그녀가 망쳤다는 사람도 있었다.송유라가 세상을 떠난 지 거의 1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그녀의 팬들이 불쑥불쑥 튀어나왔고 지금 JM의 사이트에도 그들이 가득했다.[내연녀는 내연녀지. 뭐라 해도 해명하지 못해.][그냥 내연녀도 아니고 몸 팔아서 JM 파트너 자리를 꿰찼는데 역겹지도 않아?][JM은 유엔 산하의 번역 회사인데 저런 사람이 대표야?][허, 어떻게 그 자리로 올라갔는지 누가 알겠어. 또 유엔에 어느 높으신 분을 모셨겠지.]강하리는 댓글을 하나하나 확인하며 휴대폰을 쥐고 있는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변해버렸다.심호흡하고 안으로 들어가 손연지에게 설명한 뒤 회사로 차를 몰고 가기까지 얼마나 걸렸는지 모르겠다.차 안에서 핸들을 잡은 강하리는 문득 비웃음이 터져 나왔다.이번에도 누가 자신을 노린 건지 짐작할 수 있었다.어제의 사건은 이미 지나간 일이고 나머지는 진태형의 해명을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보아하니 상대는 그녀를 가만히 내버려둘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강하리는 회사에 도착하자 사방에서 쏟아지는 시선을 느꼈지만 아무렇지 않다는 듯 곧장 엘리베이터로 들어갔다.꼭대기 층에 도착하자 안예서가 반갑게 맞이했다.“대표님, 괜찮으세요?”강하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강하리는 차 안에서 잠든 손연지를 바라보다가 노민우의 전화를 받았고 노민우의 목소리에는 약간의 불안함이 묻어났다.“강하리 씨, 손연지한테 연락이 왔어요?”“나랑 같이 있는데 무슨 일 있어요?”노민우는 순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지금은 나랑 얘기하고 싶지 않을 테니까 같이 있어 줘요.”강하리는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결국 어쩔 수 없이 말을 꺼냈다.“노민우 씨, 연지는 잘 우는 사람이 아닌데 내가 공항에 데리러 갔을 때 밤새 운 것 같았어요. 그쪽이 무슨 사정이 있든 연지를 이렇게 울렸으면 납득할 만한 이유를 설명해야 할 거예요.”노민우가 제대로 된 설명을 하지 않으면 연성으로 찾아갈 기세로 강하리는 유난히 단호하게 말했다.노민우는 다소 억울했지만 그래도 순순히 답했다.“걱정하지 말아요. 제가 손연지한테 다 설명할게요.”강하리는 손연지를 데리고 그녀와 구승훈의 저택으로 향했고 비몽사몽 눈을 뜬 손연지는 눈앞에 가득 찬 리시안셔스와 정원 뒤편에 있는 성처럼 생긴 저택 건물을 보았다.“세상에, 하리야. 여기가 너 사는 곳이야?”강하리는 그녀의 모습에 비로소 살짝 안도했다.“그런 셈이지.”손연지는 차 문을 열고 곧장 저택으로 향했다.위층과 아래층을 몇 번이나 돌아보더니 갑자기 나와서 강하리를 껴안았다.“자기, 날 먹여 살려줘. 마침 나도 일자리 잃었는데.”강하리의 얼굴에 머금었던 미소가 옅어졌다.“일자리를 잃었다니 무슨 말이야?”손연지는 조금 전까지만 해도 들떴던 마음이 한순간에 사라지고 우울한 한숨을 내쉬었다. “직업도 없고 일자리도 잃었어. 부모님도 나 때문에 창피당했고.”강하리는 미간을 찌푸렸고 손연지가 자세히 말하지 않았지만 대충 짐작할 수 있었기에 다가가 그녀를 안아주었다.“괜찮아, 내가 복수해 줄게.”손연지는 코끝이 시큰거렸다.“하리야, 역시 너밖에 없어. 개자식들은 하나같이 나쁜 놈들이야!”강하리는 손연지를 껴안고 위로하듯 속삭였다.더 이상 구체적인 질문은 하지 않은 채 객실로 데려가 샤워할 수 있도록 욕조
구승훈은 잠든 강하리의 얼굴을 보며 참지 못하고 다가가 입술에 뽀뽀했다.“자기야, 미안해.”강하리의 속눈썹이 두 번 파르르 떨리더니 굳게 감고 있던 그녀의 눈가가 시큰거렸다.구승훈은 오늘도 잠 못 이루는 밤이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강하리를 껴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잠이 들 줄이야.겨우 반쯤 잠이 들었을 때 문득 강하리의 말이 들리는 것 같았다.“구승훈, 나도 당신을 지켜주고 싶어.”구승훈은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 그대로 꿈속으로 빠져들어 갔다.다음 날 아침, 강하리가 잠에서 깨어나기도 전에 갑자기 휴대폰이 울렸다.손연지였다.슬쩍 확인한 강하리가 서둘러 전화기를 집어 들자 저쪽에서 손연지의 코 막힌 소리가 들려왔다.“하리야, 이틀만 거기로 놀러 가도 돼?”강하리는 당황했다.“당연하지. 언제 오는데? 내가 데리러 갈게.”“나 지금 B시에 있어.”강하리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고 구승훈은 끙 앓는 소리를 내며 고통스러운 얼굴로 몸을 움츠렸다.“자기야, 방금 남은 인생의 행복을 자기 손으로 망칠 뻔한 거 알아?”강하리의 얼굴이 순간 빨개졌다.“구승훈, 괜찮아?”구승훈이 그녀의 턱을 잡고 입술을 깨물었다.“안 괜찮아. 강 대표님이 호 불어줘.”농담하는 걸 보니 괜찮나 보다.“그러게 누가 함부로 뻗으래.”구승훈은 웃으며 그녀의 귀로 다가갔다.“오늘 밤 다리로 해볼까?”강하리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좀 진지하게 굴 수는 없어?”구승훈은 여전히 웃는 얼굴로 당당하게 말했다.“망가졌는지 확인해 봐야 하지 않겠어?”강하리는 손연지 때문에 그와 더 실랑이를 벌이기 싫어 침대에서 일어나 발코니로 향했다.“손연지, 너 지금 어디 있어?”“아침부터 내 앞에서 애정행각 벌이는 건 좀 아니지 않니?”농담이었지만 손연지의 기분은 여전히 좋지 않았기에 강하리는 얼굴을 찡그렸다.“어디야, 내가 데리러 갈게.” 손연지가 강하리에게 위치를 보냈고 강하리는 서둘러 샤워를 마친 뒤 문을 나섰다.구승훈이 그녀와 동행하려는데 구승재가 갑자기 회사
구승훈의 목울대가 몇 번이나 꿈틀거리다가 겨우 가슴에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억누르고 강하리의 손가락을 잡은 채 다소 씁쓸하게 웃었다.“온실 속 화초가 아니야.”소중한 보물이다.이미 자신 때문에 너무 많은 고생을 한 그녀였기에 더는 그녀가 걱정하지 않기를 바랐고 그녀가 두려워하는 것도 더더욱 원치 않았다.그저 그녀가 밝게만 지내길 바랐다. 여초연도, 구동근도, 자신의 몸도 더는 그녀의 마음을 다치게 할 순 없었다.“자기야, 날 믿는다면 조금만 더 기다려줘. 잠깐만 기다리면 결과가 어떻게 되든 내가 전부 다 솔직하게 말할게. 알았지?”조금만 더 시간을 줘서 정상으로 돌아가거나 완전히 포기하게 됐을 때 모든 걸 이 여자에게 말할 거라고 다짐했다.강하리는 입술을 다물고 미소를 지었다.“알았어.”그렇게 말한 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옆으로 걸어갔고 구승훈은 다소 우울한 미소를 지었다.그는 강하리가 여전히 속상해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지만 그녀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구승훈은 안도하는 동시에 마음이 점점 더 씁쓸해졌다.여초연이 대체 얼마나 자신을 미워하는지 모르겠다.어쩌면 그녀의 말처럼 자신이 여초연의 인생을 망쳤으니 본인도 똑같게 망가뜨리겠다고 생각하는 걸지도.하지만 구승훈은 애초에 원하지도 않았고 이대로 그녀의 손에 망가질 생각도 없었다.그녀가 그를 낳은 이상 끈질기게 살아남을 거다.시선을 내린 구승훈이 노민준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치료하는 데 협조할게.]노민준은 곧장 전화를 걸었고 구승훈이 발코니로 가서 전화를 받으니 그의 무기력한 웃음소리가 들렸다.“잘 생각했어. 희망이 없는 건 아니야.”구승훈은 무심하게 대꾸했고 노민준은 약에 대한 이야기를 덧붙였다.웬일로 구승훈이 가만히 듣고만 있으니 전화를 끊기 전 노민준이 갑자기 물었다.“왜 갑자기 생각이 바뀐 거야?”구승훈은 방에서 침대에 앉아 책을 읽고 있는 강하리를 바라보며 입꼬리가 무의식적으로 올라갔다.“힘들게 얻은 지금의 일상을 놓치고 싶지 않아서겠지.”전화를 끊고 구
아직 해결되지 않은 갈등이 남아 있어도 기꺼이 노력해 보고 싶었다.받아들이고 이해하기 위한 노력을.강하리의 말에 심문석은 한심하다는 말만 되풀이했지만 저도 모르게 얼굴엔 웃음이 번졌고 벌써 결혼식 장소까지 고심하고 있었다.“너희 둘이 또 아이를 낳으면 그땐 할아버지가 키우마.”강하리의 표정이 잠깐 굳어졌다가 아무렇지 않은 듯 무심하게 대꾸하며 넘어갔다.식사를 마치고 떠나려는 구승훈을 보며 강하리가 물었다.“여기 안 있을 거야?”구승훈은 눈썹을 치켜올렸다.“나 보내기 싫어?”입술을 달싹이며 빤히 상대를 바라보던 강하리는 그의 눈빛에서 그동안 줄곧 그가 회피하던 답을 찾으려는 듯했다.비록 구승훈은 회사를 옮긴 지 얼마 되지 않아 바빠서 그런 거라고 했지만 강하리는 이 남자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아무리 바빠도 이렇게까지 욕구를 참는 사람이 아니었고 관계를 갖지 않아도 늘 그녀를 탐하는 사람이었다.하지만 요 며칠 그녀가 약에 취했을 때를 제외하고 말만 능글맞게 할 뿐이었다.강하리는 입술을 달싹이며 구승훈을 바라보다가 다가가 그의 손을 잡았다.“나랑 연정이가 같이 가도 돼?”멈칫한 구승훈이 여전히 장난기 가득한 미소를 지었다.“더 원하는 거야?”강하리가 웃었다.“응.”구승훈의 미소가 잠시 굳어졌고 그가 거절하기도 전에 강하리의 말이 다시 들렸다.“방금 그런 일을 겪고 나니까 좀 무서워. 구승훈, 여기 남던지 내가 따라갈게.”강하리가 말을 마치며 허리를 감싸자 구승훈의 목울대가 꿈틀거리며 낮은 웃음을 터뜨렸다.이걸 어떻게 거절하나.구승훈은 결국 남기로 했고 그가 이곳에 머물자 백아영은 연정이를 자신의 방으로 곧장 데리고 갔다.구승훈이 나가서 노민준에게 연락하고 돌아왔을 때 강하리는 이미 샤워를 끝낸 뒤였다.얇은 잠옷만 입고 있는 몸에는 구승훈이 새긴 흔적이 여전히 선명하게 남아있었다.구승훈은 문 앞에 서서 가슴에 팔짱을 낀 채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몸이 견딜 수 있겠어?”강하리는 아무 말 없이 화장대 거울로 가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