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리야! 괜찮냐?”헐레벌떡 달려온 박근형 교수가 걱정 가득한 얼굴로 강하리를 위아래로 훑었다.“저 괜찮아요, 교수님.”강하리의 확답을 들은 박근형은 안도의 표정이 되었다가, 곧 이어 분개했다.“정신 나간 놈! 여기서 이런 짓을 벌이다니!”“교수님, 걱정 마세요. 절대 그냥 넘어가지 않겠습니다.”심준호가 서늘한 음성으로 거들었다.“외교부의 치욕입니다. 바로 데려가세요.”진태형 역시 차갑게 가라앉은 얼굴이었다.소문의 터지면 외교부의 위상에 큰 타격을 줄 게 뻔했으니 말이다.진태형은 옆의 사람에게 몇 마디 분부한 뒤, 고개를 돌려 강하리를 바라보았다.“하리 양, 이번 일은-.”“소문내지 않을테니 걱정 마세요 부장님. 저 역시 외교부 사람이니까요. 자기 얼굴에 먹칠하는 일은 안 합니다.”“정말 미안해요. 꼭 제대로 처리해서 하리 양에게 알려줄게요.”진태형은 미안함 가득 담아 사과하고는 급급히 자리를 떴다.이번 일로 한동안 바쁘게 보낼 건 확정된 것 같았다.연회장 휴식실.사건을 일으킨 두 사람을 경찰에 넘긴 뒤, 심준호가 찾아왔다.“많이 놀랐죠?”아까의 차가운 얼굴은 오간데 없고, 걱정 가득한 눈길로 강하리를 바라보았다.“조금은요.”방금 같은 순간에 안 놀랐다면 거짓말일 터.심준호의 눈에 안쓰러운 빛이 스쳐지났다.왜 자꾸 강하리에게만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 무슨 죄가 있다고.“그 두 사람, 반드시 마땅한 대가를 치르게 해 줄 거예요.”강하리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괜찮아? 진통제라도 갖다줄까?”심준호의 눈길이 한껏 어두운 얼굴로 묵묵히 앉아있는 구승훈에게 향했다.“네가 안 왔다면 좀 괜찮았을지도.”부르퉁한 소리에 심준호가 눈을 희번득였다.‘지금 저게 무슨 뜻이지? 강하리와 단둘이 있을 기회가 날아갔다고 나무라는 거?에라이, 더러워서 내가 간다. 더러워서.’심준호가 나갔고, 휴식실에는 구승훈과 강하리 단 둘이 남게 되었다.한동안의 어색한 침묵이 흐르고.“아파요? 의사가 남기고 간 진통제 있는데 드실래요?”
강하리의 물음에 구승훈은 살짝 불쾌해졌다.“내가 그 정도로 시비를 안 가리는 사람으로 보여?”‘아닌가요’가 입가에서 맴돌았지만, 강하리는 꾹 참고 다시 집어넣었다.이제 와서 다시 이 문제로 다투는 건 아무 의미도 없었다.구승훈이 일어서서 강하리 앞으로 다가왔다.“걱정 마. 정말 걔가 한 거면, 너를 절대 막아서지 않을 테니까.”강하리는 대답이 없었다.사실 별 기대도 없었다.이런 승낙을 하도 많이 들어왔지만, 매번 실망만 안겨줬으니 말이다.“일단 호텔로 돌아가요.”강하리가 밖으로 나갔다.구승훈은 할 말이 있는 듯 보였으나, 별 말 없이 강하리의 뒤를 따라갔다.외교부 주차장으로 가는 길.은은한 달빛에 앞뒤로 서서 걸어가는 두 사람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구승훈의 눈가에 앞서서 걸어가는 강하리가 오롯이 맺혔다. 왠지 두 사람 사이의 거리가 넘을 수 없는 커다란 골짜기처럼 느껴졌다.그리고 그러한 기분은 그를 몹시 불편하게 했다.재빠른 걸음으로 나아가, 강하리와 나란히 걷기 시작했다.옆을 다 막고 선 웅장한 남자의 몸집에 강하리가 미간을 찌푸렸다.“좀 떨어져 줄래요?”구승훈을 밀어봤지만 꿈쩍도 않는다.대답도 없었고.이윽고 구승훈의 차 앞에 도착한 강하리가 손을 내밀었다.“차 키 줘요.”하지만 구승훈은 대답도 없이 바로 운전석에 올라탔다.강하리고 별다른 말 없이 차에 올라탔고.그렇게 침묵 속에서 차가 호텔에 도착했다.구승훈을 1204호에 데려다준 강하리가 돌아서려는 순간, 구승훈이 그녀를 끌어당겼다.“나 배고파.”“배달 시켜줄게요.”“같이 먹자. 너도 별로 먹은 게 없잖아.”“아닙니다. 전 입맛이 없어서요.”“밥은 먹어야 할 거 아니야. 그러다 몸 상해.”“배고프면 어련히 알아서 먹지 않을라고요.”“밥을 다 먹으면 씻어야 하는데 이 팔로 씻을 수가 없잖아.”강하리의 눈길이 구승훈의 팔에 감긴, 별로 두텁지가 않은 붕대에 멈췄다.“나도 팔 다쳐봤거든요. 어디서 엄살이에요.”구승훈이 움찔했다.그러고 보니,
“그냥, 자꾸 신세지는 게 싫어서요.”신세를 지다보면 점점 갚아야 할 게 많아지고.갚을 수 없을 정도로 많아지면 어쩔 수 없이 양보를 해야 하는 법.뭔가를 양보해야 할 때까지 신세를 키우고 싶지 않은 강하리였다.“알았어요. 사람 필요하면 전화해요.”“네. 고맙습니다.”문가에 서서 두 사람의 통화를 들은 구승훈의 얼굴이 어두워졌다.그냥... 신세를 지기 싫어서 그런 거였어?냉소를 지은 구승훈이 외투를 벗어놓고는 어딘가로 전화했다.“송유라 쪽에 사람 더 보내서 24시간 밀착 감시해.”핸드폰 너머 승재가 흠칫했다.“응? 또 무슨 일이 생긴 거야?”구승훈이 단답형으로 대답하고는 전화를 끊었다.룸서비스로 차려진 음식들이 꽤 먹음직스러웠지만, 구승훈은 전혀 생각이 없었다.“건너와서 같이 밥 먹어.”결국 강하리에게 전화했다.-배 안 고프다니까요.“신세 지기 싫다며. 당장 건너와.”-...네.얼마 못 가 구승훈 앞에 나타난 강하리.테이블에는 강하리가 시킨 음식 외에 디저트 몇 접시가 더 놓여있었다.강하리가 구승훈 맞은켠에 앉았고, 그렇게 조용하기 짝이 없는 식사가 시작되었다.평화는 오래 가지 못했다.“씻는 거 좀 도와줘.”식사를 마친 뒤, 구승훈의 뻔뻔한 음성에 강하리의 얼굴이 일그러졌다.“그건 안될 것 같네요. 알아서 해결하세요.”가차없는 강하리의 대답에 구승훈의 낯색이 또 어두워졌지만, 군소리 없이 욕실에 들어갔다.한참 후, 씻고 나온 구승훈. 팔에 감긴 붕대 한 귀퉁이가 축축하게 젖어있었다.강하리의 미간이 순식간에 구겨졌다.팔이 부러져서 완전히 못 쓰게 된 것도 아니고!“일부러 이러시는 거에요?”“돌봐주겠다며. 인내심이 이것밖에 안 돼?”구승훈이 픽 웃는다.강하리는 치가 떨렸지만 꾹 참고, 구급상자에서 새 붕대를 꺼냈다.“이리 와요. 붕대 바꿔줄게요.”얌전히 다가와 옆에 앉는 구승훈.막 욕실에서 나온 터라, 몸에는 목욕가운 한 벌밖에 걸친 게 없었다.그걸 구승훈은 활짝 열어졎혀, 윗통을 완전히 드러냈다.
강하리는 말 없이 구승훈의 손을 쳐냈다.“약부터 드세요. 연락처 차단 해제했으니까 일 있으면 전화하고요.”구승훈이 다시 강하리의 손을 부여잡으려는 찰나.핸드폰이 울리며 액정에 발신인이 떴다.[송유라 간호인]동시에 두 사람이 그 자리에 굳어졌다.잠시 후, 강하리가 한 번 웃고는 돌아서 밖으로 나가려고 했고.구승훈은 수신 거부를 눌러버리고는 강유라를 붙잡았다.“대답부터 좀.”핸드폰이 재촉하듯 또 울려댔다.“전화부터 받으세요.”“...오늘 일은 네 편이니까 걱정하지 마.”강하리는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믿을 수 있으면 여기까지 올 리가 없었지.구승훈이 그걸 눈치챘는지 미간을 좁힌다.“못 믿겠다는 거야?”“믿고 말고를 떠나서, 아무튼, 오늘 일은 고마웠어요.”대답을 피하는 강하리. 구승훈의 얼굴이 어두워졌다.하지만 자꾸 울려대는 핸드폰을 놔둘 수는 없는 노릇.구승훈이 통화 수락을 눌렀다.“대표님! 유라 아가씨가... 발작한 환자가 휘드르는 칼에 찔려 응급실로 실려갔어요!”구승훈이 흠칫했다. 저도 모르게 눈이 부릅떠졌다.지극히 무의식적인 행동.그리고 바로 다음 순간, 아차 싶었다.강하리를 돌아보니 역시나, 냉소를 머금고 있었다.핸드폰 저 편에서 쩌렁쩌렁 고함을 지르는 소리를 강하리가 못 들을 리 없었다.“여보세요? 대표님? 제 말 들리세요?”영문도 모른 채 다그치는 핸드폰 저 편 간병인.“날붙이를 금지하라고 몇 번을 당부했는데, 대체 일을 어떻게 해먹는 거야!”구승훈의 언성이 삽시간에 높아졌다.그 노기충천한 목소리에 얼어붙었는지, 한참을 말이 없던 간병인이 꺽꺽거리며 말을 이었다.“그, 그게... 오늘 방문 공연이 있단 걸 들으시고 가 보겠다고 하도 떼를 쓰셔서 모셔갔는데, 마침 거기 한 간병인이 환자에게 과일을 깎아주고 있어서요...”강하리가 휙 돌아서 밖으로 나가버렸다.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구승훈은 지끈거리는 미간을 집게손가락으로 꾹 집었다.그 뒤에 간병인의 말은 더이상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흐지부지
”“알겠어요. 고마워요 준호 씨.”일찍 쉬라는 당부를 남긴 심준호가 떠났다.달콤하고 고소한 케이크 덕분이었을까, 또 잠이 안 올까 걱정했던 게 무색하게 강하리는 누운 지 얼마 안 가 바로 단잠에 빠졌다.이틑날 아침.박근형의 전화가 들어왔다.“가해자 공직 박탈과 채용 금지가 공지될 거라고 하더라. 대외적으론 품행 문제로 알려질 거고. 이해해 주려무나.”“그럼요 교수님.”“그리고 진 부장이 사적 관계를 좀 동용해서, 너 괴롭힌 자들을 보경시에서 쫓아냈다고 하더구나.”강하리가 움찔했다.진태형 부장이 그렇게까지나 힘을 써 줬다고?“사실 이번 회의 총괄을 하리 너에게 맡긴 데에도 진 부장이 힘 많이 썼어. 하리야, 열심히 해야 한다?”박 교수의 타이름에 강하리가 저도 몰래 고개를 끄덕였다.통화를 마친 한참 뒤까지도 강하리는 실감이 되지 않았다.진 부장이 왜 그렇게까지 자신에게 힘써주는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한참을 생각해도 감이 잡히질 않자, 강하리는 감사의 마음이라도 전하려고 진태형에게 전화했다.웬걸, 전화를 받은 진태형은 온통 강하리를 위로하는 말 뿐이었다.‘이게 아닌데.’고맙다는 말은 뻥긋도 못 한 채, 강하리는 몸둘 바를 몰랐다.과분한 애정인 것 같아 그저 한없이 고마울 따름이었다.“고맙습니다 부장님. 다음번에 올 때 꼭 정식으로 찾아뵙겠습니다.”“하하! 기다리고 있을게요, 하리 양.”통화를 마친 강하리는 바로 연성으로 돌아갈 짐을 싸기 시작했다.연성시 공항 터미널.비행모드를 끄자마자 간병인 아줌마의 전화가 들어왔다.설마? 엄마가 위독해진 거?가슴이 철렁 내려앉은 강하리. 급급히 전화를 받았다.“아가씨, 어머님이 깨어나셨어요! 어서 와 보세요!”기쁨에 떨리는 아줌마의 목소리였다.강하리의 머릿속이 웅 울렸다.문득 엄마가 사무치게 보고싶었다. 저도 모르게 발걸음이 빨라졌다.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엄마가 계신 병실 문 앞이었다.떨리는 손으로 강하리가 문 손잡이를 돌렸다.아늑한 병실. 그리고 조금은 멍한 얼굴로
구승훈에게 한 번, 힐끔 눈길을 준 강하리가 병실로 들어가려 몸을 돌렸다.그녀를 급급히 붙잡는 구승훈.“하리야! 송유라가-.”“죽었어요?”강하리의 물음에 말문이 꺽 막힌 구승훈의 얼굴이 시퍼래졌다.“...다 나으면 외국에 보낼 거야.”“아, 고작 외국이었어요? 난 또 천국에라도 보내는 줄.”강하리가 픽 웃었다.구승훈의 이마에 핏줄이 푸뜰 뛰었다.“아, 아니지. 사탄도 울고 갈 애가 천국에 어떻게 가.”혼잣말처럼 중얼거린 강하리가 구승훈을 향해 냉소를 지었다.“알아서들 하세요. 나랑은 상관 없는 일이니까.”“강하리!”구승훈이 쓴 맛이 감도는 침을 삼켰다.“송유라와 더이상 엮이겠다는 뜻이 아니야! 그냥... 죽는 걸 놔둘 수가 없어서-.”“그러면 지금 여기 계실 게 아니라, 송유라 곁에 가 지켜주셔야죠.”구승훈은 왠지 어깨가 점점 처지는 기분이었다. 힘이 점점 더 빠지는 것만 같았다.보경시까지 쫄래쫄래 따라가 명예도 지켜주고 심지어는 칼까지 막아줬는데.송유라가 죽는 걸 방관할 수가 없는 것 때문에 말짱 도루묵이 된단 말인가.“야 강하리, 너는 양심도 없냐?”구승훈의 입에서 앙탈 비슷한 말투가 저절로 튀어나왔다.“없는 걸로 쳐요. 전 괜찮으니까.”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은 강하리의 표정에 구승훈이 벙어리가 되었다.한 참이 지나서야.“어머니 깨셨다면서. 축하해.”겨우 한 마디 꺼낸 구승훈.“네. 감사합니다.”짤막한 강하리의 대답.“온 김에 한 번 뵐 수-.”“없어요.”한 수 더 친 구승훈의 말에 더 짧게 끊어버리는 강하리.이 양아치가 몇 년 간의 약값이 어디서 온 건지 떠벌이기라도 할까 봐서였다.말을 마친 강하리는 바로 병실로 들어가 문을 닫아버렸다.또 혼자 문 앞에 덩그러니 남겨진 구승훈은 착잡하기 그지없었다.가슴이 답답해났고 짜증이 솟구쳤다.정신없이 달려가는 강하리를 쫓아왔고.유리창 너머로 정신없이 펑펑 우는 강하리를 지켜보기도 했다.하지만 그 결과는 병실 문도 못 들어서는 신세.어젯밤
“... 아의야.”“네, 엄마.”“가... 하, 의.”“네 엄마. 저 여깄어요.”병실 안.강하리가 굳은 엄마의 손가락을 꼭꼭 눌러주고 있었다.정서원의 눈길은 그런 딸의 얼굴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이따금씩 딸을 불러보려 입을 열었지만, 하도 오래 쓰지 않은 혀가 말을 잘 듣지 않았다.하지만 그러면 어떠랴. 엄마가 깨어났는데.따뜻하게 웃으며 이렇게 부를 수도 있는데.강하리는 엄마의 부름소리가 들릴 때마다 또랑또랑 대답해 주었다.문득, 엄마가 반대쪽 손을 들어 병실문 유리창에 비치는 뒷모습을 가리켰다.강하리는 문득 코끝이 찡해났다.엄마 옆에 기대앉아 그 뒷모습을 한참이나 멍하니 바라보았다.구승훈이 아직 안 간 건 진작부터 알고있었다.그렇다고 달라지는 게 뭐가 있을까.송유라가 일이 생기기만 하면 둘의 관계에 깊은 골짜기가 쩍쩍 파이는데.정승처럼 병실 문앞을 지키고있는 구승훈.그 앞에 한 인영이 나타났다. 구승훈을 보고는 흠칫했다.늦게나마 소식을 듣자마자 만사를 제치고 부랴부랴 달려온 손연지였다.“안녕하세요 구 대표님.”구승훈이 송유라를 정신병원에 보낸 걸 알고있는지라, 모처럼 구승훈을 향해 날을 세우지 않는 손연지.구승훈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이 없었다.왜 안 들어가냐고 물으려다가 꾹 참은 손연지가 구승훈을 에돌아 병실 문을 떼고 들어섰다.닫히는 문틈으로 강하리의 목소리가 새어나왔다.아마 네가 어떻게 왔냐고 묻는 말일 거다.이윽고 즐거운 웃음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온다.구승훈은 꿈쩍도 않고, 병실 안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서 있었다.“형! 역시 여기 있었네.”승재가 부랴부랴 달려왔다.“송유라가 또 날뛰고 있어. 형 만나겠다면서 병실 안을 다 뒤집어놨어.”“송씨 집안 그 메디컬사 자금 지원 끊어버려.”구승훈이 서늘한 목소리로 분부를 내렸다.강하리에게 진 빚을 송유라가 갚지 못한다면, 그 집안이라도 대신 갚아 줘야지.누군가는 갚아야 하는 거니까.승재가 멈칫했다가 조심스레 다시 입을 열었다.“형, 그러잖아도
구승훈이 냉소를 머금었다. 몸에서 차가운 기운이 피어나기 시작했다.아예 강하리와 완전히 갈라서라는 건가?“아닐 거야 형. 누군가가 연지 씨한테 덤터기 씌운 게 분명해.”승재가 급급히 덧붙였다.구승훈은 말없이 꾹 닫힌 병실문을 바라보다가, 한쪽 켠으로 멀어져갔다.“저 두 사람 나와 보라고 해.”구승훈이 모퉁이를 돌아 사라지자, 승재가 병실 문을 가볍게 두드렸다.유리창으로 승재를 본 강하리가 문을 열었다.“승재 씨? 어쩐 일이에요?”의아한 강하리의 얼굴. 승재의 표정은 어둡기만 했다.“강 부장, 잠시 나와볼 수 있을까요?”거절하려던 강하리가 승재의 어두운 얼굴을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병실을 나와 문을 닫으려는 순간.“연지 씨도 함께요.”강하리가 멈칫했다. 연지는 왜?갑자기 불안한 느낌이 급습했다.“뭐가 잘못된 거예요?”“일단 같이 저 쪽으로 가서 천천히 얘기해요.”강하리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연지를 불렀다.세 사람은 병원을 나서 근처 한 카페에 들어갔다.구석진 자리에 한없이 어둡기만 한 얼굴을 한 구승훈이 보이자, 강하리의 발걸음이 멈칫했다.“이번에는 수작질 아니에요! 진짜 중요한 일이에요!”승재를 돌아보자 황급히 손사래를 치는 승재.그제야 강하리는 손연지를 이끌고 구승훈의 맞은편에 가서 앉았다.“무슨 일이죠?”구승훈 옆에 앉은 승재가 자초지종을 얘기하기 시작했다.불쑥 튀어나오는 자신의 이름에 손연지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무슨 그런 미친! 내가 왜 돈까지 들여가며 그 싸구려 년을 죽여야 해요? 정신병원에 처박혀서 찌그러지는 걸 보는 게 더 후련한데?”승재의 미간이 꿈틀했고, 강하리는 구승훈을 돌아보았다.손연지는 어젯저녁에 보경시에서 있었던 일을 몰랐다.때문에 자연스레 송유라의 말로가 정신병원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거고.하지만 강하리 자신은 너무나 잘 알고있었다.지옥 끝에서라도 수작질을 꾸밀 송유라란 걸.타이밍 역시 너무나도 공교로웠다. 어제 구승훈과 그런 얘기를 하기 바쁘게 단서들이 손연지를 향하다니.
구승훈은 강하리를 다소 시무룩한 표정으로 바라보면서도 결국 순순히 입을 다물었고 손연지는 구승훈을 보고 웃었다.구승훈은 굳어진 표정으로 두 사람을 따라 계단을 내려가다가 모퉁이에 다다랐을 때 갑자기 강하리를 한 손으로 잡아당긴 뒤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오늘 밤에 보상해 줄 거야?”강하리는 순간 조금 전 당황스러운 장면이 떠올랐고 손연지가 지금 슬픈 상황에서 상처에 소금을 뿌리고 싶지 않았다.“가만히 있어.”구승훈의 입술이 그녀의 귀에 닿았다.“그러면 손으로만 하는 건?”남자의 손이 그녀의 허리를 가로질러 그녀가 승낙할 때까지 놓아주지 않겠다는 듯이 꽉 감싸자 강하리는 결국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이따가 내려가선 얌전히 있어.”구승훈은 눈썹을 치켜올렸다.“아내 말은 들어야지.”손연지는 식사 내내 먹는 둥 마는 둥 했고 식사가 끝날 무렵 강하리의 휴대폰이 갑자기 울렸다.노민우였다.강하리는 손연지를 바라보며 바로 전화를 끊었고 손연지는 못 본 척했지만 표정이 한층 어두워졌다.하지만 잠시 후 구승훈의 휴대폰도 울렸고 그는 눈썹을 치켜들며 전화를 집어 든 뒤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걸어 나갔다.바깥에 도착하고 나서야 구승훈은 휴대폰을 들여다보았다.노민우가 아닌 노민준의 전화였고 그는 뒤를 돌아보고는 전화를 받았다.“그 주사 효과가 어때?”구승훈의 입꼬리가 올라갔다.“괜찮아. 지난 이틀 동안 상태가 전보다 훨씬 안정됐어.”거짓말이 아니었다. 구승훈은 노민준이 건넨 주사를 맞고 나서부터 지난 이틀 동안 단 한 번의 이상도 느끼지 못했고 그것이 그가 오늘 유난히 기분이 좋았던 이유였다.노민준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내가 포기하지 말라고 했잖아.”짧게 대꾸한 구승훈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말을 마친 노민준이 잠시 멈칫했다.“참, 내 동생이 할 말이 있대.”곧이어 저쪽에서 노민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승훈아, 손연지는 지금 어때?”구승훈은 눈썹을 치켜올렸다.“네 여자를 왜 나한테 물어봐?”“승훈아, 나도 네가 강하리 씨
강하리는 사실 자신이 꽤 한심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거듭되는 상처에도 수없이 용서했다.마치 구승훈이 없으면 모든 게 그대로 멈춰버릴 듯이.구승훈이 사라져도 세상은 여전히 잘 돌아가지만 구승훈이 없는 세상이 되어버리고 그건 그녀가 원하는 게 아니었다.“또 무슨 일이 생기면 난 당해도 싸.”강하리는 손연지 쪽으로 고개를 돌렸고 손연지는 다가와 강하리를 껴안았다.“구승훈 이 개자식이 전생에 우주라도 구한 거야?”강하리는 미소를 지으며 손연지의 어깨에 기대었다. 의지하는 것처럼 보여도 사실은 위로에 가까웠다.“그러는 넌, 대체 무슨 일인데?”자기 일을 언급하자 손연지는 순식간에 흥미가 사라진 표정이었다.“별건 아니야. 사실... 하리야, 나 임신했었어.”강하리는 깜짝 놀랐다.“뭐? 그래서? 지금은 어떤데? 아기는?”손연지의 눈시울이 붉어졌다.“임신 사실을 알았을 때 노민우는 다른 여자와 약혼하고 있었어. 노민우에게 말할 생각도 없었고 사실 아이도 남길 생각 없었어. 노씨 가문이나 노민우에겐 관심 없어. 40일이 될 때까지 기다렸다가 수술하려고 했는데 그날 밤 내가 당직일 때 노민우 약혼녀가 병원에 찾아와 사람들이 다 보는 앞에서 난동을 부렸어. 병원에서도 노씨 가문에 밉보일 수 없어서 날 해고했어.”강하리의 표정이 차가워졌다.“그러고 나서?”손연지의 얼굴에는 여전히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그리고 다음 날 아이를 지웠는데 노민우가 어떻게 알았는지 낙태한 걸 알고는 나한테 화를 냈어.”강하리의 가슴에 고통이 밀려왔다.노민우가 약혼한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그때 손연지에게 연락했을 때만 해도 그녀는 멀쩡했었다.고작 얼마나 됐다고 노민우 그 개자식이 손연지를 이렇게 힘들게 한 건지!“왜 나한테 말 안 했어?”손연지는 입꼬리를 끌어당기며 웃었다.“말해도 달라질 게 뭐가 있어. 그래도 노민우를 그냥 두지는 않았어. 자기가 뭐라고 나한테 화를 내? 약혼까지 했는데 내가 아이를 낳길 바라는 것도 아니고. 그래서 노씨 가문에 찾아가서 업무에
강하리의 눈빛이 번쩍이며 구승훈의 말에 담긴 의미를 순식간에 알아차렸다.그가 오늘 인터넷 속 모두가 보는 앞에서 그녀에게 매달리는 역할을 자처했으니 이젠 그녀가 자신을 데려가야 한다는 말이었다.강하리는 구승훈의 목에 팔을 걸고 자기 앞으로 끌어당기며 속삭였다.“보답이라, 문제없지. 구 대표님이 우선 그 쓸데없는 여자들 먼저 해결하면!”이번 일에 진시연이 연루되지 않았을 리가 없다.석미란이 심준호에게 고소당한 이후 석연란조차 한동안 잠잠했고 그녀가 대외적으로 자신에 대한 악담을 퍼뜨릴지 몰라도 온라인에 증거를 남기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그러니 누가 이 모든 일을 주도하고 있는지 한눈에 알 수 있었다.개자식, 하여간 여자가 너무 많이 꼬인다.강하리는 계속해서 구승훈과 사무실에서 꽁냥거리진 않았다.집에 손연지가 있었기에 가는 길에 백아영에게 전화를 건 강하리는 구승훈을 따라 별장으로 돌아왔다.어두운 별장을 보며 강하리는 손연지가 아직 자는 줄 알았다.그녀가 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 인공지능이 불을 켜자 갑자기 별장 전체가 환하게 밝아졌다.강하리가 가방을 내려놓고 손연지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위층으로 올라가려는 순간 갑자기 구승훈이 뒤에서 안았고 곧이어 그녀가 반응할 틈도 주지 않고 소파에 쓰러뜨렸다.강하리가 말하기도 전에 구승훈은 그녀의 입술을 막았고 남자의 손이 불순하게 그녀의 다리를 어루만졌다.“자기야, 다리 예쁘다.”강하리는 남자의 의도를 단번에 알아챘다.이 개자식!머릿속엔 그 짓밖에 없는 건지.얼굴이 화끈 달아오른 그녀는 손연지에 대해 말하는 것도 잊어버렸다.“당신... 읍...구승훈은 거침없이 그녀의 스타킹을 찢어버리고는 그녀의 손을 끌어 벨트로 가져갔다.“도와줘, 자기야.”강하리의 얼굴이 화끈거렸다.“일단 기다려.”구승훈은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종아리를 잡고 부드럽게 주물렀다.“못 기다려.”강하리는 그를 세게 밀었다.“아니, 내 말은...”“어머!”강하리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계단 너머에서 손연지
주해찬은 다소 침울한 표정으로 잠시 침묵을 지키더니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아니라고 하면 믿어줄래?”주해찬은 정말 강하리에게 계속 사실을 숨길 생각도, 진시연을 도울 생각도 없었다.그냥... 강하리가 곤경에 처했을 때 그때 나서서 도와주고 싶었을 뿐이었다.그러면 강하리의 마음속 망가진 그의 이미지를 조금이라도 되돌릴 수 있을 것 같아서.그런데 구승훈이 이토록 매몰차게 굴 줄은 몰랐다.아버지가 얼마나 깨끗하고 정직한 사람인지 장담할 수 없지만 적어도 부패한 관리들처럼 부정부패와 뇌물 수수를 일삼지는 않을 것이고 할아버지도 절대 이런 일이 일어나도록 가만둘 리 없었다.하지만 부패를 철저히 타도하는 지금 같은 시기에 작은 선물을 몇 개 받은 것만으로도 큰 문제가 된다.게다가 구승훈은 그 증거를 노골적으로 인터넷에 올렸고 관련 부서에 실명으로 가차 없이 신고했다.구승훈은 결코 자신을 감추는 사람이 아니었다.그가 원하는 건 주해찬의 타협과 강하리 앞에서 완전히 신뢰를 잃는 것이었다.사실 구승훈이 처음 병원에서 그를 떠봤을 때부터 쉽게 놓아주지 않을 거라는 걸 잘 알았다.다만 줄곧 비현실적인 희망을 붙잡고 있었는데 지금 이 순간이 되어서야 주해찬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그의 완전한 패배라는 걸.“미안해, 하리야. 엄마한테 사과하라고 할게. 그리고... 인터넷에 너에 대한 루머를 유포한 것도 이모가 한 짓이야. 이모한테도 사과하라고 할게. 그리고 하리야, 내 다리...”주해찬은 말하며 심호흡하듯 잠시 멈춘 뒤 다시 말을 이어갔다.“사실 거의 다 나았어.”강하리는 당황했고 주해찬은 다시 입을 열었다.“미안해. 조금만 더 나랑 같이 있어 주길 바라서, 구승훈이랑 다시 만나서 네가 또 상처받을까 봐 내가...”“선배.” 강하리가 갑자기 주해찬의 말을 가로챘다.“고마워요.”그녀가 고맙다고 말할 거라곤 상상조차 못 했다.강하리가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예전에 여러 번 날 도와주고 날 이렇게 생각해 주고 지금도 날 위해 나서서 진실을
두 사람 관계에 있어서 누가 봐도 을인 모습이었다.사무실에 있던 몇몇 기자들은 서로 눈치만 봤다.에비뉴와 정안그룹이 강하리 명의로 되어 있다고?그렇다면 강하리 혼자서도 B시 재벌과 맞먹는 것 아닌가.여러 기자가 모두 멍한 표정으로 구승훈을 바라봤다.구씨 가문의 권력자 구승훈이 자신은 아내 덕분에 먹고 사는 놈이라고 말하다니, 그것도 제법 자랑스러워하는 듯했다.“그러면 강 대표님이 구 대표님과 송유라 씨 사이에 개입했다는 건...”구승훈의 눈빛이 어두워졌다.“제가 우리 강 대표님과 언제 만났는지 아세요?”기자는 고개를 저었고 구승훈은 오른손 손가락으로 왼쪽 약지에 낀 반지를 살며시 돌리면서 시선을 내리깔고 웃었다.“아홉살 때 만났어요. 그 여자가... 제 삶의 유일한 구원이었죠.”구승훈은 복잡한 감정이 가득한 눈빛으로 카메라를 바라보았다.“자기야, 미안해. 오랜 세월 많이 힘들었지? 오늘 여기서 맹세할게. 나 구승훈은 평생 강하리의 것이란 걸.”강하리는 화면 속 구승훈을 바라보다가 갑자기 코끝이 시큰거렸다.개자식, 인터뷰만 할 것이지 왜 저런 말을 해서는.하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구승훈의 말에 그녀의 마음속에 작게나마 남아있던 불편함이 말끔히 사라졌다는 걸.인터넷에 그 많은 루머들이 떠돌아다녀도 언제나 그녀를 감싸줄 사람이 있었다.구승훈의 인터뷰는 곧 화제성을 끌어모았고 강하리를 욕하던 사람들은 모두 흔적도 없이 사라진 채 댓글 창에는 축복의 글이 가득했다.강하리는 휴대폰에 달린 축복의 댓글을 바라보다가 자신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그녀는 휴대폰을 들고 구승훈에게 전화를 걸었고 구승훈의 목소리에는 미소가 묻어났다.“강 대표님, 나 보고 싶어?”강하리는 입술을 달싹이며 웃었다.“오늘 밤 일찍 돌아가서 맛있는 거 해줄게.”구승훈은 눈썹을 치켜올렸다.“맛있는 음식만 있어?” 강하리는 멈칫했다.“또 뭘 원해?”“다리. 자기야, 한번 해보자.”강하리는 이를 갈며 그냥 전화를 끊었고 구승훈은 끊어진 전화를 바라보며
구승훈의 눈빛이 어두워졌다.정양철은 죽었지만 애초에 그가 강하리 어머니에게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는 여전히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였다.이대로 알 수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이 시점에 정양철과 관련된 또 다른 단서가 나올 줄이야.“확실해요?”“물론이죠.”구승훈은 전화를 끊고 심준호에게 연락했고 그와 대화를 마친 뒤 밖을 향해 말했다.“시작하지.”잠시 후 비서가 기자 10여 명을 데리고 구승훈의 사무실로 들어왔다.나문빈이 홈페이지를 정상으로 되돌리자 강하리를 욕하던 사람들은 모두 SNS로 옮겨갔고 과거 여러 번 검색어에 오르며 욕을 먹었던 흑역사도 전부 밝혀졌다.SNS에서 누군가가 돈으로 사주했는지 갈수록 심한 욕설을 퍼붓고 있었다.안예서는 점점 더 고조되는 SNS의 화제성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계약서를 하나하나 처리하는 강하리를 보며 조금은 불안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대표님, 이걸 제대로 밝힐 방법을 찾아야겠어요.”강하리는 고개도 들지 않았다.“그럴 필요 없어. 욕하다 지치면 자연스레 그만두겠지.”안예서가 다소 우울한 표정으로 강하리를 설득하려는 그녀는 이미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었다.“안진 그룹 총괄팀장과 약속 잡아줘.”안예서는 다소 무력한 한숨을 내쉬며 뒤돌아 사무실을 나섰다.그녀가 사무실을 나간 뒤에야 강하리는 휴대전화를 집어 들었고 손가락이 SNS 아이콘 위에서 잠시 멈칫하다 클릭했다.하지만 들어가서 보니 그녀를 욕하는 내용은 사라지고 안예서가 말했던 것들도 전부 보이지 않았다.대신 라이브 방송 하나가 떠서 클릭해 본 강하리는 깜짝 놀랐다.구승훈이었다.뒤에 비치는 장소는 그의 사무실 같았다.남자는 검은 셔츠를 입은 채 느긋하게 의자에 기대어 손가락엔 어느새 반지를 끼고 있었다.자세히 보면 그녀가 끼고 있는 반지와 같은 모델이지만 다이아몬드가 그렇게 크지 않을 뿐이었다.강하리는 무의식적으로 손가락에 낀 반지로 시선을 옮겼고 그 시각 왠지 모르게 인터넷에서 자신에 대해 뭐라고 말하든 다 상관없는 것처럼 느껴졌다.무슨
구승훈은 휴대폰 메시지를 보고 자신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밤에 보상해 줄래?]손연지가 왔다며 허튼수작 부리지 말라고 답장하려던 찰나 갑자기 전화벨이 울렸고 안예서의 초조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대표님, 큰일 났어요.”강하리는 잠시 멈칫했다.“뭔데, 천천히 얘기해 봐.”“오늘 아침 일찍 우리 회사 홍보 사이트가 해킹됐는데 사이트에 온통 대표님이 스폰 받았다는 이상한 댓글이 가득해요.”안예서는 다소 격앙된 목소리로 말했고 강하리는 표정이 점점 굳어갔다.“알겠어.”전화를 끊고 회사 사이트에 들어가니 그녀의 눈에 온통 적나라한 욕설들이 가득 들어왔다.스폰을 받았다는 사람도 있고 몸을 대주고 높은 자리로 올라갔다는 말도 있었다.심지어 구승훈과 송유라 관계를 그녀가 망쳤다는 사람도 있었다.송유라가 세상을 떠난 지 거의 1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그녀의 팬들이 불쑥불쑥 튀어나왔고 지금 JM의 사이트에도 그들이 가득했다.[내연녀는 내연녀지. 뭐라 해도 해명하지 못해.][그냥 내연녀도 아니고 몸 팔아서 JM 파트너 자리를 꿰찼는데 역겹지도 않아?][JM은 유엔 산하의 번역 회사인데 저런 사람이 대표야?][허, 어떻게 그 자리로 올라갔는지 누가 알겠어. 또 유엔에 어느 높으신 분을 모셨겠지.]강하리는 댓글을 하나하나 확인하며 휴대폰을 쥐고 있는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변해버렸다.심호흡하고 안으로 들어가 손연지에게 설명한 뒤 회사로 차를 몰고 가기까지 얼마나 걸렸는지 모르겠다.차 안에서 핸들을 잡은 강하리는 문득 비웃음이 터져 나왔다.이번에도 누가 자신을 노린 건지 짐작할 수 있었다.어제의 사건은 이미 지나간 일이고 나머지는 진태형의 해명을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보아하니 상대는 그녀를 가만히 내버려둘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강하리는 회사에 도착하자 사방에서 쏟아지는 시선을 느꼈지만 아무렇지 않다는 듯 곧장 엘리베이터로 들어갔다.꼭대기 층에 도착하자 안예서가 반갑게 맞이했다.“대표님, 괜찮으세요?”강하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강하리는 차 안에서 잠든 손연지를 바라보다가 노민우의 전화를 받았고 노민우의 목소리에는 약간의 불안함이 묻어났다.“강하리 씨, 손연지한테 연락이 왔어요?”“나랑 같이 있는데 무슨 일 있어요?”노민우는 순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지금은 나랑 얘기하고 싶지 않을 테니까 같이 있어 줘요.”강하리는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결국 어쩔 수 없이 말을 꺼냈다.“노민우 씨, 연지는 잘 우는 사람이 아닌데 내가 공항에 데리러 갔을 때 밤새 운 것 같았어요. 그쪽이 무슨 사정이 있든 연지를 이렇게 울렸으면 납득할 만한 이유를 설명해야 할 거예요.”노민우가 제대로 된 설명을 하지 않으면 연성으로 찾아갈 기세로 강하리는 유난히 단호하게 말했다.노민우는 다소 억울했지만 그래도 순순히 답했다.“걱정하지 말아요. 제가 손연지한테 다 설명할게요.”강하리는 손연지를 데리고 그녀와 구승훈의 저택으로 향했고 비몽사몽 눈을 뜬 손연지는 눈앞에 가득 찬 리시안셔스와 정원 뒤편에 있는 성처럼 생긴 저택 건물을 보았다.“세상에, 하리야. 여기가 너 사는 곳이야?”강하리는 그녀의 모습에 비로소 살짝 안도했다.“그런 셈이지.”손연지는 차 문을 열고 곧장 저택으로 향했다.위층과 아래층을 몇 번이나 돌아보더니 갑자기 나와서 강하리를 껴안았다.“자기, 날 먹여 살려줘. 마침 나도 일자리 잃었는데.”강하리의 얼굴에 머금었던 미소가 옅어졌다.“일자리를 잃었다니 무슨 말이야?”손연지는 조금 전까지만 해도 들떴던 마음이 한순간에 사라지고 우울한 한숨을 내쉬었다. “직업도 없고 일자리도 잃었어. 부모님도 나 때문에 창피당했고.”강하리는 미간을 찌푸렸고 손연지가 자세히 말하지 않았지만 대충 짐작할 수 있었기에 다가가 그녀를 안아주었다.“괜찮아, 내가 복수해 줄게.”손연지는 코끝이 시큰거렸다.“하리야, 역시 너밖에 없어. 개자식들은 하나같이 나쁜 놈들이야!”강하리는 손연지를 껴안고 위로하듯 속삭였다.더 이상 구체적인 질문은 하지 않은 채 객실로 데려가 샤워할 수 있도록 욕조
구승훈은 잠든 강하리의 얼굴을 보며 참지 못하고 다가가 입술에 뽀뽀했다.“자기야, 미안해.”강하리의 속눈썹이 두 번 파르르 떨리더니 굳게 감고 있던 그녀의 눈가가 시큰거렸다.구승훈은 오늘도 잠 못 이루는 밤이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강하리를 껴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잠이 들 줄이야.겨우 반쯤 잠이 들었을 때 문득 강하리의 말이 들리는 것 같았다.“구승훈, 나도 당신을 지켜주고 싶어.”구승훈은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 그대로 꿈속으로 빠져들어 갔다.다음 날 아침, 강하리가 잠에서 깨어나기도 전에 갑자기 휴대폰이 울렸다.손연지였다.슬쩍 확인한 강하리가 서둘러 전화기를 집어 들자 저쪽에서 손연지의 코 막힌 소리가 들려왔다.“하리야, 이틀만 거기로 놀러 가도 돼?”강하리는 당황했다.“당연하지. 언제 오는데? 내가 데리러 갈게.”“나 지금 B시에 있어.”강하리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고 구승훈은 끙 앓는 소리를 내며 고통스러운 얼굴로 몸을 움츠렸다.“자기야, 방금 남은 인생의 행복을 자기 손으로 망칠 뻔한 거 알아?”강하리의 얼굴이 순간 빨개졌다.“구승훈, 괜찮아?”구승훈이 그녀의 턱을 잡고 입술을 깨물었다.“안 괜찮아. 강 대표님이 호 불어줘.”농담하는 걸 보니 괜찮나 보다.“그러게 누가 함부로 뻗으래.”구승훈은 웃으며 그녀의 귀로 다가갔다.“오늘 밤 다리로 해볼까?”강하리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좀 진지하게 굴 수는 없어?”구승훈은 여전히 웃는 얼굴로 당당하게 말했다.“망가졌는지 확인해 봐야 하지 않겠어?”강하리는 손연지 때문에 그와 더 실랑이를 벌이기 싫어 침대에서 일어나 발코니로 향했다.“손연지, 너 지금 어디 있어?”“아침부터 내 앞에서 애정행각 벌이는 건 좀 아니지 않니?”농담이었지만 손연지의 기분은 여전히 좋지 않았기에 강하리는 얼굴을 찡그렸다.“어디야, 내가 데리러 갈게.” 손연지가 강하리에게 위치를 보냈고 강하리는 서둘러 샤워를 마친 뒤 문을 나섰다.구승훈이 그녀와 동행하려는데 구승재가 갑자기 회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