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 여사님, 상황 파악이 덜 되셨네요. 대체 누가 누구한테 들러붙는다고요?”구승훈이 코웃음을 쳤다.“그게 무슨…….”“하루가 멀다하게 강하리 만나러 연성에 찾아온 게 누군데.”“그건-.”“심지어 정월 초하루에까지도 강하리 보러 왔더라고요. 가문 설연회 다 때려치고.”“…….”“그게 강하리가 오라고 떼를 써서 되는 일이란 말씀은 못 하시겠죠?”구승훈이 한 마디씩 할 때마다 석연란의 얼굴은 점점 더 흙빛이 되어갔다.“강하리 탓만 하지 마시고 아들 간수나 잘 좀 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구승훈이 쐐기를 마지막으로, 석연란은 멍청한 표정이 되어 꺽꺽거렸다.“어머니!”급급히 달려왔다가 구승훈의 말을 들은 주해찬의 얼굴도 일그러졌다.자리를 비우는 게 아니었는데. 강하리를 혼자 놔 두는 게 아니었는데.“지금 여기서 뭐 하시는 거예요!”“아, 아무것도 아니야 아들. 마침 하리 양이 보이길래 인사나 한 번 하려고 온 거야.”급조한 티를 팍팍 풍기는 석연란의 해명이 통할 리 없었다.자신의 어머니의 위인을 너무나도 잘 알고있는 주해찬이기도 했으니 말이다.강하리를 만나지 말라고 바가지 긁다 못해, 급기야 직접 따지러 온 게 분명했다.“강하리 일은 참견 마시라고 했잖아요!”“얘가! 그게 엄마한테 할 소리야?”“선배, 저 좀 피곤해서 먼저 들어가 볼게요.”3파전이 모자 다툼으로 번질 각이 보이자, 강하리가 다급히 입을 열었다.강하리를 돌아본 주해찬이 뭐라 하려고 입을 열려다가, 그녀의 허리춤에 놓인 구승훈의 손을 보고는 대뜸 강하리를 확 낚아챘다.‘이 새끼가!’뿔난 구승훈이 다시 강하리를 잡아끌려고 손을 뻗었다.그리고, 서늘한 그녀의 눈길에 도로 거둬들였다.“하리야, 할 얘기가 있어. 잠시만 기다려 줄래?”주해찬이 강하리와 눈높이를 맞추고는, 미안함 가득 담긴 절절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그와 동시에 점점 구겨지는 석연란의 얼굴을 본 강하리가 애써 웃었다.“그, 선배. 나중에 전화로 하면 안 될까요? 저 진짜 너무 피곤해서요.”
여젼히 휘영청 밝은 보름달.연회장의 열기가 멀어져갔다.호텔 로비를 지나는 내내, 강하리는 연회장에 내버려 두고 나온 주해찬이 걱정되었다.사실 따지고 보면 잘못한 것 없이 상처만 받은 해찬 선배였다.사귀자고 한 이도, 먼저 이별 통보를 한 이도 강하리 자신이었으니 말이다.호텔 게이트를 나오는 순간까지 걱정 가득한 강하리의 얼굴에 구승훈이 미간을 구겼다.언짢음 한 가득 담아 구승훈이 뭐라고 하려던 찰나.그들 앞에 차 한 대가 멈춰섰고, 진태형이 차에서 내려 두 사람에게 다가왔다.“하리 양, 연회에서 있었던 일 전해들었어요. 그냥 무시해 버려요. 살다 보면 별별 인간이 다 있고, 모든 사람과 사이좋게 지낼 수는 없으니까요.”강하리가 움찔했다. 진태형이 자신을 위로해줄 거란 생각은 못 해봤는데.“네, 부장님.”강하리가 깍듯히 대답하고는 잠시 멈췄다가 다시 말을 이러갔다.“하지만 사람들 눈에 보이는 제 과거가 있는데, 그런 부분은 어떻게…….”“하리 양이 외교부에 들어오는 데 걸림돌이 될 일은 없을 겁니다. 구 대표님께서 자초지종을 다 얘기해 주셨어요.”또 한 번 움찔한 강하리.저도 모르게 구승훈을 휙 돌아보았다. 어깨를 얄미운 각도로 으쓱이는 구승훈이 보였다.그 둘을 번갈아 보던 진태형이 웃음을 터트렸다. “피곤할 텐데 일찍 들어가 봐요. 내일 일정도 오늘 못지 않게 빡세니까요.”말을 마친 진태형이 호텔 안으로 들어갔다.한참을 말 없이 서 있던 강하리가 입을 열었다.“진 부장님께 뭐라고 얘기한 거예요?”“뭐 그냥, 우리 둘이 정식으로 사귄다고.”구승훈의 대답에 강하리는 순식간에 만감이 교차하는 기분이었다.그건 그거고, 고마운 건 고마운 거다.“감사해요.”구승훈이 입을 벙긋거리다가 도로 닫았다.‘내가 원하는 건 감사하단 말이 아니라고’가 입 안에서 맴돌다가 그대로 삼켜졌다.강하리의 입에서 ‘그럼 안 감사한 걸로 할께요’라도 나올까 봐서.긴말 필요 없이, 바로 지금 강하리가 해줄 수 있는 대가를 제시하는 게 훨 나을지도.
”선배, 선배는 더 좋은 여자를 만나야 해요.”“최고로 좋은 여자를 이미 만나버려서 안 될 것 같네.”“…….”강하리가 입을 다물었다.이렇게까지 말이 나온 이상, 무슨 설득도 소용없을 것 같았다.“거참 뒤끝 거창하기도 해라. 이미 헤어진 마당에 빠릿빠릿하게 좀 끝냅시다.”어느새 구승훈이 썩소를 지으며 다가와 있었다.“……지는.”주해찬의 입에서 비꼬듯 흘러나온 냉담한 말 한 마디에, 구승훈과 강하리가 서로 다른 의미로 움찔했다.강하리는 선배한테서 처음 듣는 경박한 말투라서.구승훈은 자신을 노려보는 주해찬의 눈길이, 자신에게 마음이 떠났다고 말하던 강하리의 눈빛과 묘하게 닮아서.말문이 꺽 막힌 주해찬의 얼굴색이 급 어두워졌다.그러거나 말거나, 말을 마친 주해찬은 강하리에게 “해피뉴이어”를 남기고는 그대로 떠나갔다.멀어져가는 주해찬의 뒷모습을 응시하며, 강하리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눈알 빠져나오겠네. 어깨도 나보다는 한참 좁구만 뭐.”투덜거리는 구승훈. 강하리가 휙 돌아 그를 노려보았다.“자뻑 하나는 인정해 드리죠.”“됐고, 뭐 먹고싶어?”구승훈이 아랑곳 않고 강하리의 손을 잡아 주차장으로 향했다.물론, 1초만에 강하리가 손목을 비틀어 빠져나왔지만.“아무거나요.”도통 밥 먹을 기분이 아니었다.연회를 빌어 주해찬과 확실하게 얘기를 끝내려고 했는데.석연란이 없었더라도 그럴 계획이었다. 딴 것보다 주해찬의 앞길을 더이상 막고싶지 않아서였다.헤어진 뒤에도 자신을 바라보는 주해찬의 눈길을 마주할 때마다, 양심이 따끔거리는 느낌이 들던 강하리였다.어디 내놔도 손색이 없을 명문가 훈남 능력자 도련님을 별볼일 없는 자신이 꿰차고 있단 생각에 말이다. 차에 올라서도 강하리의 머릿속은 온통 주해찬 생각 뿐이었다.빠밤 빰 빰! 갑자기 커진 차 안 음악소리.화들짝 놀란 강하리가 구승훈을 쨰릿 노려보았다.“미친 거 아니에요?”구승훈이 입가에 알지 못 할 웃음을 지었다.화려한 불빛이 수놓은 보경시의 밤거리.맛집들과 예쁜 커피숍이
구승훈이 그 자리에 굳어졌다.기회를 줬다고? 언제…….‘아…….’지난번에 보경시에서 강하리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송유라를 기소하게 내버려두면 생각해 보겠다던.곧 심장이 터질 듯 후회가 구승훈을 꽉 채웠다.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왜 그게 송유라를 향한 원한이라고만 생각했을까.왜 단 한 번도, 그게 자신을 향한 마지막 한 가닥의 기대라곤 생각을 못 했을까.그러고 보니 그 전에도 기회는 여러 번 있었다.송유라를 멀리하면 생각해 보겠다고 입버릇처럼 말하던 강하리.그러가다 결국, 송유라를 내버려두면 생각해 보겠다고.그러나 자신은 어땠던가.“멀리해라”가 “내버려 둬라”가 되는, 그 차이도 못 알아채고.그게 점점 희미해지는 강하리의 기대와 마음인 줄도 모르고.벼랑끝에 선 기회의 마지막 순간까지도, 협의서를 내밀며 고소 취하를 들먹이지 않았던가.“그 얘긴 그만하고, 얼른 밥 먹어요 우리.”휘몰아치는 감정을 먼저 추스린 건 강하리였다.그만큼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는 반증이기도 했다.상처투성이가 되었다가 아문 가슴은 더 딱딱해질 수밖에 없는 법.살을 깎아내는 고통으로 겨우 벗어난 악연인데. 오직 자신을 위해 사는 인생은 이제 막 시작했는데.구승훈에게서 미움이 서서히 사라지고, 이제는 고마운 마음이 들기 시작하는 시점.사랑했던 만큼 컸던 미움마저 빠져나간, 텅 빈 방 안 같은 마음.거기에 다시 채워지는 것이 자신을 사무치게 괴롭혔던 감정이고 싶지는 않았다.묵묵부답이던 구승훈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고.그렇게 그들은 너무나도 평범한, 어떤 가정식 레스토랑에 마주 앉게 되었다.강하리가 말없이 메뉴를 고르고 웨이터를 불렀다.주문한 요리들을 위에터에게 읊는 강하리의 목소리에 구승훈의 눈에 희미한 빛이 감돌았다.“다 기억하네.”느닷없는 구승훈의 목소리에 강하리가 벙찐 표정이 되었다가, 곧 무슨 뜻인지 알아챘다.물 흐르듯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구승훈이 즐겨 먹는 요리로만 주문했던 것.“네 뭐, 하도 습관이 돼서.”구승훈과 외식할 때마다 달
힐끔.또 힐끔.불안에 찬 강하리의 눈길이 자꾸자꾸 구승훈을 향한다.반면 당사자는 운전대를 잡은 채, 초 집중 모드로 앞쪽만 주시하는 중.“뭘 그렇게 흘겨봐. 앞으로 오랫동안 더 봐야 할 얼굴 싹 다 닳을라.”열 다섯번째인가로 강하리가 이쪽을 흘끔거리는 순간, 구승훈이 느긋하게 입을 열었다.“대체 무슨 속셈인가요?” 강하리가 냉랭하게 되물었다.기존의 수법들과는 너무나도 다른 구승훈의 행보에, 경계심으로 온 몸이 빳빳하게 굳어있는 그녀였다.“그냥 호텔에 데려다주는 것 뿐이야. 약속했잖아. 털끝 하나 안 건드린다고.”온통 불신으로 가득 찬 강하리의 눈초리에 구승훈이 말을 이었다.“뭔데 그 눈빛은. 내가 여자에 미친 놈도 아니고.”“그러기엔 전과가 너무 화려하셔서요.”구승훈이 흥, 콧방귀를 뀌었다.“무척이나 그러고 싶다만, 이제부터 너한테 강박은 안 하려고. 나도 기본 매너 쯤은 있는 놈이라고.”퍽이나.강하리가 눈을 희번득였다.다행인지 불행인지 별 탈 없이, 구승훈의 차가 강하리가 묵고있는 호텔 앞에 멈춰섰다.안도의 숨을 내 쉬며 강하리가 차에서 내리려는 순간.“그 뭐야. 내가 호텔 예약을 안 했거든.”……어쩐지, 그러면 그렇지.“예약해드릴게요. 설 연휴 기간이라 빈 방 많을 겁니다.”“하룻밤만 재워주면 안 돼?”뻔뻔스럽기 짝이 없는 음성에 강하리가 하, 헛웃음을 터트렸다.“얼굴값 좀 하시죠.”냉랭하게 한 마디를 남긴 강하리가 차 문을 열고 내렸다.의외로 잡거나 쫓아가지 않는 구승훈. 대신 차에서 내려 담배 한 대를 붙였다.방으로 돌아온 강하리가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욕실에 들어갔다.샤워를 마치고 나오니 핸드폰에 메시지 한 장이 와 있었다.[그래 뭐. 맞아. 나 같은 건 이 한겨울 밤에 얼어 죽어도 싸지.]낯선 번호였지만 발신자가 누구인지는 발 뒤꿈치로 생각해도 알 수 있었다.습, 짧은 숨을 들이쉰 강하리가 창가로 다가갔다.휘오오오-.창 밖으로 매섭게 몰아치는 북풍의 날카로운 울부짖음이 지나갔다.아래쪽을
강하리가 주먹을 꽉 쥐었다.가슴속에서 모든 감정이 북받쳐올라 뒤엉켰다.하지만 그녀가 반응을 보이기도 전, 구승훈이 물러났다.그러더니, 강하리를 이끌고 호텔 안으로 저벅저벅 걸어 들어갔다.이윽고 구승훈이 멈춰선 한 방 앞, 강하리가 움찔했다.그건 다름아닌 그녀가 묵고있는 방이었다.“설마 프런트 직원과 짜고친 거예요?”구승훈이 웃으며 카드키를 가져다 댔다.띠리릭!경쾌한 울림과 함께 문이 그대로 열렸고, 구승훈이 굳어진 강하리를 이끌고 방 안에 들어섰다.강하리의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당장 내 방에서 나가요!”“왜 이래. 네가 들어와서 자라고 했잖아.”물고 늘어지기를 시전하는 구승훈.대답 대신, 침대 머리맡에 놓였던 베개가 날아왔다.웃으며 베개를 받아쥔 구승훈이 도로 침대에 놓으며 말했다.“소파에서 잘게.”“아닙니다. 내가 나갈게요 내가 나가.”돌아서서 나가려는 강하리를 구승훈이 다시 잡았다.“급하긴. 털끝 하나 안 건드린단 약속, 아직 유효하다고.”차라리 팥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라.강하리가 불신과 분노로 찬 눈길로 구승훈을 노려보았다.“그냥 옆에만 있고 싶을 뿐이야. 물론-.”길게 말을 늘여뜨린 구승훈이 반 박자 쉬었다가 은근한 말투로 다시 입을 열었다.“네가 원한다면 오늘 밤 이 몸을 너한테 줄 수도 있고.”얼굴이 확 달아오른 강하리. 애꿎은 베개가 다시 허공을 가로질러 구승훈에게 날아갔다.“이 변태가! 꺼져!”“농담이야 농담.”가볍게 다시 베개를 받아쥔 구승훈.“나 이 옆 방이야. 열두 시까지만 여기 있으면서 너랑 보름달 보다가 사라져 줄게. 응?”강하리의 의심의 눈초리가 잔뜩 치켜올랐다.“정말 방 예약한 거예요?”증명이라도 하듯, 구승훈이 카드키 하나를 또 꺼내들었다.“씻고 올게. 기다려.”강하리의 대답이 나오기도 전, 구승훈이 방 문을 열고 나가버렸다.그 통에 강하리의 목구멍까지 차 올랐던 “아니 됐어요”가 갈 길을 잃고 입가에서 맴돌았다.벙찐 얼굴로 구승훈이 사라진 문을 바라보던 강하리가 한
”당신이 왜 하리 방에…….”주해찬은 어지간히 놀란 모양인지, 표정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았다.물론 그건 구승훈도 마찬가지였지만.“내가 할 소린데. 해찬 도련님은 이 야밤에 어쩐 일이실까.”“하리한테 사과하러 온 겁니다.”“이 한밤중에? 시커먼 속이 다 보이는데 지금 그걸 믿으라고?”“속 시커먼 건 그쪽이고!”강하리가 다가오기도 전, 둘은 이미 손찌검이 붙었다.날아오는 주해찬의 주먹을 반쯤 피하던 구승훈이 움찔했다.바로 뒤쪽에선 아연실색한 얼굴을 한 강하리가 달려오고 있었고.주먹은 그와 강하리를 가로지르는 궤도로 날아오고 있었다.더 생각할 겨를도 없이, 구승훈이 그대로 우뚝 멈췄다.퍼억!주먹이 무서운 속도로 구승훈의 안면에 꽂혔다.“꺅!”비틀거리는 구승훈. 강하리가 비명을 질렀고, 주해찬도 그 자리에 얼어붙어 버렸다.구승훈과 주먹질이 오간 적 있는 주해찬인지라, 얼마든지 피할 수 있었단 걸 잘 알고있었다.그런데 왜…….그제야 구승훈의 어깨너머로,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은 강하리가 보였다.경악과 공포로 치켜뜬 그녀의 두 눈도.아…….“……고의로 그런 게 아니야, 하리야.”얼빠진 얼굴이 된 주해찬의 입에서 짧은 변명이 튀어나왔다.강하리의 관자놀이가 툭툭 튀었다.“알아요. 선배, 늦었으니까 일단 오늘은 그냥 가 줘요.”낯빛이 확 바뀐 주해찬이 다시 입을 벙긋거렸지만.이쪽을 지그시 응시하는 강하리의 눈길에, 힘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주해찬이 돌아간 뒤.구승훈이 어두운 얼굴을 한 채 소파에 걸터앉아 있었고.“미친 거 아니에요? 왜 안 피해요?”부어오른 구승훈의 얼굴에 약을 발라주며, 강하리가 구승훈을 노려보고 있었다.“……못 피한 거야.”겨우 한 마디 뱉은 구승훈. 그게 강하리의 화를 더 돋구었다.“개뿔! 그쪽 피지컬을 내가 모르는 것도 아니고!”욕을 뱉은 강하리가 성에 차지 않았는지, 구승훈의 다리를 콱 걷어찼다.구두 굽이 아닌 맨발이라 별 대미지는 없었지만, 구승훈의 표정은 더 구겨졌다.“오늘 내
“가, 강하리? 왜... 왜 그래, 하리야? 응?”갑자기 깬 강하리 때문에 한 번 놀라고, 흘러내린 눈물 때문에 또 한 번 놀랐다.당황함과 걱정, 놀람으로 더듬거리는 구승훈의 목소리.구승훈의 목소리에 강하리는 정신이 퍼뜩 들었다.급급히 고개를 돌려 눈물을 쓱 훔쳤다.“열두 시가 지났네요. 얼른 가요.”시간을 확인하며 한 마디 던지고는, 노트북을 내려놓고 황급히 욕실로 뛰쳐들어갔다.찬 물을 틀어 한참 동안이나 세수를 했지만, 눈시울은 여전히 불그스름했다.너무나도 생생했다. 꿈 속에서 심연으로 내리꽂히던 추락감과 출렁이는 파도, 입과 코로 마구마구 밀려드는 바닷물에 숨이 콱 막혀오던 그 느낌까지.눈을 뜨는 순간, 죽음의 문턱에 다다른 듯한 공포는 사라졌지만.악몽 같은 그 날의 기억이 또 뇌리를 엄습했다.바다 추락 사건 이후, 종종 자신을 괴롭히던 악몽이었다.떨쳐낼래야 떨쳐낼 수가 없는 그 악몽에 익숙해졌다고 생각했었는데.눈을 뜬 순간, 꿈의 끝자락에 보인 구승훈의 얼굴에, 그 끔찍한 꿈이 현실이 되는 느낌이 들었다.찬 물로 얼굴을 몇 번 더 문지른 강하리가 몸을 일으키자, 욕실 문 앞에 서 있는 구승훈의 모습이 거울에 비쳤다.“안 좋은 꿈이라도 꾼 거야?”한껏 좁혀진 구승훈의 미간에 주름이 깊게 져 있었다.“…아니에요. 아무것도.”“아무것도 아닌 거야, 아무것도 말해주기 싫은 거야?”구승훈의 목소리가 한껏 가라앉았다.“진짜 별거 아니에요. 들어가 봐요.”구차하기 짝이 없는 변명.사실 변명이랄 것도 없이, 강하리의 표정만 봐도 말하기가 싫단 걸 알아챌 수 있는 구승훈이었다.동시에 화가 살짝 치밀었다아니, 오늘 분위기 좋았잖아.밥도 같이 먹고, 머리도 말려주게 했고, 방 안에 있게도 해 줬잖아.왜 다시 예전으로 돌아간 건데. 대체 왜.“하리야.”화를 꾹 누른 채, 구승훈이 다시 입을 열었다.“내가 또 뭐 잘못한 거라도 있어?”“묻지 마요, 좀.”“그럼 잘 됐네. 어차피 걱정되던 차였는데. 나 안 가.”배 째라
손연지는 잠시 멍하니 서 있다가 꽤 시간이 지난 후에야 겨우 노민우를 밀어냈다.“너 진짜 병 있는 거 아니야?”노민우는 한 손으로 그녀를 문에 다시 밀어붙이며 장난스럽게 웃었다.“넌 내가 병이 있다는 걸 항상 알고 있었잖아?”손연지는 이를 악물며 갑자기 예전에 노민우가 뻔뻔하게 산부인과를 예약하고 다녔던 일이 떠올랐다.“아쉽네. 그럼 난 상종 안 하는데.”노민우는 혀를 차며 웃었다.“그럼 내가 안 하는 거 너도 잘 알고 있지 않나?”손연지는 잠시 생각하더니 웃으면서 말했다.“너 두세 달 동안 안 했던 거 아니야?”노민우는 이 말을 듣자마자 갑자기 이빨이 아픈 듯한 기분이 들었다.그는 손연지의 두 손을 잡고 다른 한 손을 재빨리 손연지의 코트 주머니 속으로 집어넣어 작은 전기충격기를 꺼냈다.그 물건을 보고 노민우는 갑자기 머리가 띵 했다.예전에 그가 그녀의 스폰서가 되어주겠다고 했을 때 손연지는 노민우를 오랫동안 무시했다.후에 노민우가 손연지를 찾으러 갔을 때 전기충격기에 다쳤다.그때 아주 중요한 부분을 맞고 두세 달 동안 문제가 생겼었는데 결국은 그의 형이 약을 처방해 주고 나서야 회복할 수 있었다.그 일 때문에 형은 그에게 계속 영양제를 먹으라고 했었다.“너 아직도 이거 갖고 있었어?”손연지는 그를 발로 차며 말했다.“다시 넣어둬.”노민우는 그걸 주머니에 넣으며 말끝을 흐렸다.“잠깐만 얘기 끝내고 돌려줄게.”“얘기할 것도 없어.”노민우는 혀를 차며 말했다.“조금만 얘기해 얘기 끝내고 손 좀 놔줄게. 그때 넌 날 때리지는 마.”손연지는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해봐.”노민우는 그녀를 조심스럽게 놓아주었지만 그가 손을 내리자마자 손연지는 그의 다리를 차버렸고 노민우는 반사적으로 몇 걸음 물러섰다.“손연지, 약속을 어기는 거야?”“누가 먼저 안 지켰는데?”손연지는 발그레해진 손목을 문지르며 말했고 노민우는 재빨리 그녀에게 다가가서 그 손목을 살펴보며 물었다.“아파?”“당연하지. 네가 바바 안
“강하리, 오늘 웨딩 촬영하는 거 알고 있어?”강하리는 가볍게 헛기침을 하며 입고 있던 잠옷을 끌어 올렸다.“잠시 후에 파운데이션으로 가릴 거야.”손연지는 눈을 굴리며 한숨을 쉬었다.“그래. 난 더 이상 할 말이 없네.”강하리는 간단히 아침을 먹은 후 곧 심예진이 도착했다.그녀와 함께 온 사람들은 천아름 메이크업 아티스트 스타일리스트 그리고 웨딩드레스를 들고 온 일행이었다.강하리는 심예진을 보자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숙모 왔어요?”심예진은 살짝 놀란 듯한 표정을 지으며 눈을 깜빡였다.“나 부르는 거야?”강하리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럼요!”심예진은 맑은 눈으로 더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그냥 이모라고 불러. 심준호 오빠랑 나는 그런 사이 아니야. 난 심호준 씨를 그냥 오빠라고 생각해.”강하리는 가볍게 웃었을 뿐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메이크업은 생각보다 빠르게 끝났다.강하리는 피부가 좋아서 가볍게 파우더만 발라도 충분했지만 목에 남은 흔적을 가리는 데에는 꽤 시간이 걸렸다.천아름은 강하리의 앞에 다가와서 혀를 차며 말했다.“진지하게 남편 바꿀 생각 없어요? 며칠 전엔 손목이더니 오늘은 목이네요. 너 남편 인성이 있긴 있어요?”강하리의 입꼬리가 살짝 떨렸다.옆에서 노연정과 놀고 있던 손연지도 피식 웃으며 거들었다.“가끔은 하리가 구승훈 씨에게 잡아먹히지 않을까 걱정될 정도예요.”강하리는 웃으며 말했다.“설마요. 그 정도는 아니에요.”손연지는 한숨을 쉬었다.“사람이 너무 외모에 홀리면 안 돼요. 그 나쁜 남자가 잘생기긴 했지만…”그녀가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문 쪽에서 느긋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하지만 나보다 잘생기진 않았겠죠?”손연지는 몸을 굳히고 천천히 고개를 돌렸고 그곳에는 이미 문 앞에 서 있는 노민우가 있었다.그녀는 멍하니 노민우를 바라보다가 갑자기 눈동자가 흔들렸다.노민우는 한쪽 눈썹을 살짝 올리며 말했다.“왜? 보고 넋이라도 나간 거야?”그제야 정신이 든 듯 손연지는 시선을 피
구승훈은 휴대폰을 들고 침실을 나섰다.강하리는 침대에 누워 있었지만 좀처럼 잠이 들지 않았다.그녀는 단순히 시간을 확인하려고 휴대폰을 들었지만 한 시간 전에 걸려 온 낯선 번호의 부재중 전화가 눈에 들어왔다.강하리는 찌푸린 채 그 번호를 바라보다가 막 화면을 닫으려는 순간 새 메시지가 도착했다. [강하리 씨, 늦은 시간에 실례합니다. 하지만 구 대표님의 상태에 대해 꼭 말씀드려야 할 것 같아 연락드립니다. 대표님께서는 며칠 전 결혼 준비로 바쁘다며 모든 치료를 중단하셨습니다. 지금이 가장 중요한 단계인데 이대로 멈추면 그동안의 노력이 모두 물거품이 될 수도 있습니다. 제발 구 대표님을 설득해 치료를 계속받을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강하리는 휴대폰을 손에 쥔 채 손가락을 힘주어 움켜쥐었다.메시지에 보낸 사람의 이름은 없었지만 강하리는 그 사람이 누구인지 금세 알 수 있었다. 임희주 외에는 이런 말을 할 사람이 없었다.그녀는 잠시 시선을 떨구고 메시지를 바라보았다.‘구승훈이 정말로 모든 치료를 중단한 건가?’강하리는 잠시 침묵을 지킨 후 임희주에게 문자를 보냈다.[구승훈 씨가 치료를 중단한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을 거예요. 임 선생님도 치료 속도를 조절할 수 있다고 했잖아요? 결혼식이 끝난 후 다시 시작해도 문제없을 거라고 생각해요.]임희주의 답장이 곧바로 도착했다.[강하리 씨, 아직 저한테 화가 나신 건가요? 아니면 구 대표님이 치료를 거부하는 게 혹시 당신 때문인가요?]강하리는 메시지를 보자마자 휴대폰을 옆으로 던져 버렸고 더 이상 임희주와 얽히고 싶지 않았다.그녀는 방금 말한 대로 구승훈을 믿었다.구승훈은 그녀와 노연정을 위해서라도 자신의 몸을 함부로 다루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서산 퍼스트 빌리지 전체가 유난히 조용했고 창밖에는 정원의 희미한 가로등 몇 개만이 어둠을 비추고 있었다.구승훈은 창가에 서 있었고 그의 눈빛은 깊은 밤보다 더 어두웠다.그때 전화기 너머에서 구승재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형...큰어머님의 집사
“그동안 누가 임희주를 지원했는지 조사해 봐.”준봉은 재빨리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고 그러나 사무실 문을 나서기도 전에 구승훈이 다시 한마디 했다.“임희주와 여초연 씨의 관계를 확인해 줘.”...결혼식 준비는 차근차근 진행되고 있었다.심문석은 병원에 며칠 입원했다가 퇴원했고 결혼식의 모든 과정과 세부 사항을 직접 확인하고 싶어 했다.강하리는 처음에는 노인의 건강이 걱정되었지만 심문석이 바빠지자 오히려 더 건강해 보였고 그녀는 그가 바쁘게 지내는 것을 그대로 두었다.이 시기 구승훈은 유난히 바빠 보였다.매일 아침 일찍 나가서 밤늦게 돌아왔고 돌아올 때마다 얼굴에 피곤함을 숨기지 못했지만 강하리는 그가 돌아올 때마다 얼굴에 여유 있는 표정을 짓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시곗바늘은 이미 자정이 가까운 시간을 가리키고 있었다.강하리는 옆에 빈 침대에 잠시 눈을 두고 문을 열고 아래층으로 내려가 주방에서 우유 한 잔을 데웠다.서재의 불빛은 여전히 켜져 있었다.강하리는 서재 문 앞에서 잠시 망설이다가 문을 두드렸다.“들어와.”문을 열고 들어간 강하리는 우유를 책상 위에 놓았다.구승훈은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휴대폰 화면을 끄고 강하리를 바라보았다.“나에게 주는 거야?”구승훈이 그렇게 물었을 때 강하리는 그를 꾸짖을 줄 알았지만 의외로 그냥 ‘응’하고 대답한 후 그의 옆에 앉았다.“내가 도와줄 일이 있어?”구승훈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정말 도와줄 거야?”강하리는 눈썹을 치켜올리며 대답했다.“그냥 내 부하들이 일을 잘하고 있는지 살펴보러 온 거야.”구승훈은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맞아. 이제는 에비뉴와 정안 모두 강 부장이 최대 주주라서 그런 것들이 다 중요하겠지.”강하리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옆에 있는 의자 하나를 가져다 앉아 책상 위의 서류를 하나씩 넘기기 시작했다.그녀는 금세 서류에 몰입했고 구승훈은 그녀 옆에 앉아 있는데도 자꾸만 그녀에게 시선이 갔다.서재의 불빛은 따뜻하지 않았지만 강하리가 앉자 공간 곳곳이
차 안은 숨 막힐 듯한 정적에 휩싸였다.구승훈은 팔꿈치를 팔걸이에 올린 채 손가락 끝으로 가볍게 두드렸다.준봉은 그가 곧 움직일 거라 예상했다.심지어 M국으로 떠날 준비까지 마친 상태였지만 30분이 흘러도 구승훈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준봉이 막 입을 떼려던 순간 구승훈이 먼저 입을 열었다.“노진우에게 사람을 데리고 곧장 그 장소로 가라고 해. 그가 출발하면 구승재에게 연락해 조용히 그쪽으로 가게 해. 노진우가 움직이는 순간 구승재는 바깥을 봉쇄하도록 해.”준봉은 잠시 말을 잃었다.“대표님, 혹시 함정이라고 생각하시는 겁니까?”빛과 그림자가 교차하는 자리에서 몸을 기댄 구승훈은 표정을 읽기 어려웠다.그는 의심하는 것이 아니라 확신하고 있었다.여초연은 복수를 위해서라면 망설임이 없는 사람이었다.그가 아는 여초연이라면 일부러 그를 또 다른 함정으로 유인하려는 것이 아니라면 이렇게 쉽게 자신의 흔적을 드러낼 리 없었다.그때 노연정을 납치했던 일이 떠오르는 순간이었다.이 몇 년 간 여초연은 분명 자신의 세력을 키워왔을 것이다.그는 여초연을 항상 감시할 사람을 배치해 두었지만 그녀가 이를 눈치채지 못했을 리는 없었다. 그런데도 여초연은 별다른 은폐 없이 M국으로 갔고 유일하게 예상하지 못한 점은 나문빈이 너무 빨리 그녀의 위치를 파악했다는 사실이었다.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녀에게 가장 큰 손실은 단지 노연정을 곁에 두는 시간이 짧았고 그 사이 구승훈과 강하리는 오랜 시간 고통을 겪어야 했으며 결국 그녀가 계획한 대로 그 약물이 그의 몸에 투여되었다.여초연의 계획은 모든 것이 치밀하게 짜여 있었고 그랬다면 지금 이 순간 구승훈과 강하리가 점차 안정을 되찾아가고 있는 상황에서 여초연이 이렇게 허술한 실수를 저지를 리가 없다.게다가...구동근이 했던 말도 마음에 걸렸다.구승훈은 구동근과는 좋은 관계를 맺고 있지 않았지만 여초연보다는 그를 조금 더 신뢰하는 편이었다.한편 M국에서 여초연은 밤하늘에 반짝이는 별들을 바라보며 집사에게서 휴대폰을 건네
손연지는 강하리와 천아름의 손을 잡고 곧장 밖으로 나갔다.“이런 사람들한테 시간 낭비하지 말아요. 진짜 역겹다니까요.”천아름은 하이힐을 또각거리며 손연지를 따라가며 뒤를 돌아보며 날카롭게 던졌다.“여씨 가문의 두 분 내 가게에서 당장 꺼져요.”여명희는 순간 얼어붙었다.“천아름 씨, 미쳤어요? 이런 천한 년 하나 때문에 우리를 쫓아내겠다고요?”천아름은 걸음을 멈추고 피식 웃으며 말했다.“쫓아내는 게 아니라 블랙리스트에 올리는 거죠.”그러고는 매장 직원을 향해 손짓하며 덧붙였다.“앞으로 이 두 사람 내 모든 매장 출입 금지야. 알아들었지?”그러자 강하리가 가볍게 미소 지으며 말을 이었다.“두 분은 심 씨 가문 명의로 된 모든 장소에 출입할 수 없어요.”그렇게 단호하게 선언한 후 더 이상 그녀들에게 신경 쓰지 않고 손연지와 함께 매장을 빠져나왔다.밖으로 나온 뒤 손연지는 문득 걸음을 멈추더니 통유리 창에 몸을 기댄 채 안쪽을 몰래 들여다봤다.“하하. 저렇게 분노에 차서 발악하는 꼴을 보니까 속이 다 시원하네요.”그러더니 갑자기 강하리를 와락 껴안으며 말했다.“하리야, 정말 고마워! 네가 아니었으면 이 울분을 풀지도 못했을 거야. 너 모를 거야 그때 직장에서 쫓겨났을 때 내가 얼마나 억울했는지. 이쁜이 정말 고마워...”그러자 천아름이 가볍게 헛기침하며 말을 끊었다.“저기...나한테는 고맙다는 말 없어요?”손연지는 얼른 고개를 끄덕이며 활짝 웃었다.“고마워요!”천아름은 손연지에게 장난스럽게 윙크하며 웃었다. “고마운 마음을 어떻게 표현할래요? 결혼할래요? 내가 말인데 나랑 같이 지내면 앞으로 주얼리랑 옷은 내가 다 사줄게요.”“콜!”옆에서 듣고 있던 강하리는 입을 삐죽이며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손연지의 해맑은 웃음을 보자 결국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천아름 씨, 고마워요.”강하리가 진심을 담아 말했다.천아름은 손을 휘휘 저으며 시큰둥하게 답했다.“우리 사이에 무슨 고맙다는 말을 해요? 진짜로 고맙다면 당신 남편
여명주가 반박하려는 순간 강하리 뒤에서 한 여자가 걸어 나왔다.그녀는 다른 사람이 아닌 이 작업실의 주인인 천아름이었다.천아름은 짙은 눈동자와 붉은 입술 크고 우아한 웨이브 헤어 거기에 하이힐까지 착용하고 있었다.강하리 옆에 멈춰 선 천아름이 먼저 입을 열었다.“강하리 씨, 오랜만이에요.”강하리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를 바라보았다.사실 두 사람이 마주한 건 단 한 번뿐이었다.그때 경매장에서 스쳐 지나간 적은 있었지만 에비뉴를 인수하고 나서야 강하리는 그 두 개의 약혼반지가 사실 천아름의 작품이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단지 ‘에비뉴’라는 이름을 달고 있었을 뿐이었다.천아름은 조용히 강하리의 손목을 바라보다가 반지에 시선을 고정한 채 물었다.“여전히 마음에 드세요?”강하리는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정말 감사합니다.”천아름은 그녀의 손을 살짝 들어 올려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반지가 예쁜 게 아니라 사실은 당신의 손이 예쁜 거예요. 구승훈은 전생에 나라를 구했나 봐요.”그 순간 손연지가 눈을 반짝이며 맞장구쳤다.“맞아요!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구승훈 씨는 전생에 나라를 구했을 거예요. 아니면 어떻게 하리를 사로잡을 수 있었겠어요?”천아름은 손연지를 향해 윙크하며 장난스레 말했다.“역시 미녀끼리는 생각도 비슷하네요.”셋은 웃으며 대화를 나누었고 여명주는 그들 사이에서 철저히 외면당한 채 서 있었다.그녀의 얼굴은 점점 어두워졌다.‘이건 대놓고 날 무시하는 거잖아.’“천아름 씨, 이게 무슨 뜻이죠?”천아름은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비웃듯 입꼬리를 올렸다.“아직도 못 알아들었어요? 여명주 씨 B시에서는 당신네 가문이 모든 걸 좌지우지할 수 있다고 착각하지 마세요. 정말 그렇게 대단하다면 노민우 씨를 붙잡아다 가문 재정을 끊고 강제로 결혼이라도 시키시지 그러세요? 그런데 왜...”천아름은 옆에 있던 손연지를 바라보며 물었다.“이쁜 아가씨,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소연지입니다.”“아. 맞아요. 소연지
강하리는 안에서 밖을 바라보며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고 구승훈은 그 모습을 보며 저절로 입꼬리를 올렸다.“떠나기 아쉽네.”그가 나지막이 말했다.노민준은 갑자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잠시 침묵했지만 구승훈이 무엇을 아쉬워하는지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정 안 되겠으면 강하리 씨에게 솔직하게 말해. 그러면 강하리 씨도 기꺼이 너와 함께 돌아갈 거야. 그리고 계속 숨기기만 하면 강하리 씨도 불편할 거잖아?”구승훈은 잠시 침묵한 뒤 고개를 숙여 담배에 불을 붙였고 한참이 지나고서야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응.”그는 작업실 안에서 웃고 있는 강하리를 바라보며 결혼식이 끝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고 자신을 다잡았다.노민준은 더 할 말이 없었고 그때 서야 노민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구승훈, 손연지 씨 지금 어때?”구승훈은 피식 웃으며 되물었다.“궁금해?”노민우는 급히 두 번 응답했다.“그러면 직접 와서 보면 되잖아?”“손연지 씨는 앞에 나타나지 말라고 했어.”구승훈은 차가운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그러면 그때 내가 나가라고 했을 때는 왜 안 나갔어?”노민우는 한 박자 늦게 말했다.“그것도 그렇네.”구승훈은 더 이상 대답하지 않고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곧장 준봉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임희주를 철저히 조사해 줘.]강하리는 마침내 손연지에게 어울리는 주얼리를 골랐다.손연지는 몸에 맞춰보며 환하게 웃었지만 강하리는 그 웃음이 예전처럼 맑고 순수하지만은 않다는 걸 느꼈다.감정의 상처는 결국 스스로 치유해야 했고 강하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손연지 곁을 지켜주는 것뿐이었다.주얼리를 고른 뒤 강하리는 손연지와 함께 의류 브랜드 매장으로 향했다.“곧 결혼식인데 다른 건 안 고를 거야?”손연지가 물었다.강하리는 가볍게 기침하며 말했다.“구승훈이 몇 벌 주문해 놨고 또 에비뉴에서 우리 결혼식에 맞는 주얼리 세트를 준비해 줬어.”손연지는 이를 갈며 말했다.“그놈의 자본주의.”강하리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두 사람은 웃으며 의류
구승훈은 메시지를 보내고 나서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었다.“왜 갑자기 왔어?”강하리는 구승훈을 째려보며 말했다.“안 오면 당신이 예쁜 여자랑 데이트하는 거 못 볼 거 아냐?”구승훈은 눈썹을 치켜올리며 말했다.“질투나?”“아니.”그렇다고 말은 했지만 강하리의 목소리에는 질투의 냄새를 숨길 수 없었다.그녀는 실제로 구승훈과 임희주 사이에 아무 일이 있을 거로 의심하지는 않았다.그저... 다른 여자가 어떤 면에서 그녀의 남편을 더 잘 안다는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구승훈은 강하리의 손을 잡고 길게 뻗은 손가락으로 그녀의 손목에 남은 자국을 쓰다듬으며 말했다.“그럼 어쩌지? 오늘 밤 당신이 나를 침대에 묶어 두는 건 어때? 복수의 기회를 줄게.”강하리는 질색을 하며 손을 빼냈다.“염치를 좀 챙겨.”구승훈은 웃으며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휴대폰이 옷 속에서 가볍게 진동했지만 그는 그것을 확인하지 않고 그저 눈빛이 깊어졌다.마침내 강하리는 차를 개인 작업실 앞에 세웠고 구승훈이 주문한 주얼리를 오늘 착용해 보려고 했다.마침 이틀 후 손연지의 생일이었고 강하리는 손연지가 휴식 중인 틈을 타 그녀를 불러냈다.강하리가 차에서 내리자 손연지는 작업실의 큰 창문 앞에 앉아 멍하니 앉아 있었다.그녀는 강하리를 보고서야 마치 살아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구승훈은 손연지를 보고 미간을 찌푸렸다.“손연지 씨, 이렇게 한가해요?”손연지는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답했다.구승훈은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고 강하리를 따라 들어가자 직원이 다가왔다.“구승훈 씨, 주문하신 주얼리가 다 준비되었습니다.”구승훈은 대답하려던 찰나 휴대폰이 갑자기 울렸고 그는 휴대폰을 내려다보고 나서 직원에게 말했다.“주얼리는 내 아내에게 전달하세요.”그러고는 강하리를 향해 말했다.“전화 받고 올게. 주얼리 먼저 착용해 보고 안 맞으면 다시 수정해 달라고 하면 돼.”강하리는 그의 휴대폰 화면을 흘끗 보았는데 화면에 나타난 이름은 노민준이었다.강하리는 본능적으로 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