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강 부장의 은밀한 임신: Chapter 361 - Chapter 370

990 Chapters

제361화

강하리가 입을 떼기도 전, 사진이 구승훈 앞으로 끌려갔다.황급히 사진을 뺏으려고 손을 뻗었지만 구승훈이 피했다.“내놔요!”강하리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구승훈이 떠나기 바로 전, 엄마한테 졸라 찍은 자신의 사진이었다.사진을 주기도 전에 구승훈이 가 버린 탓에 결국 자신에게 남겨졌지만.다시 만났을 때, 생소하기 짝이 없던 구승훈이 생각났다.자신과 하늘과 땅 차이가 되어버린.저도 모르게 씁쓸함이 밀려왔다.다시 뻗은 강하리의 손을 구승훈이 또 피해버렸다.“왜? 내가 못 볼 거라도 있어?”구승훈의 입가가 얄밉게 위로 휘어진다.하지만 사진에 눈길이 간 순간, 구승훈은 웃을 수가 없게 되었다.사진 속, 꽃밭 속 소녀.눈 속에 반짝이는 빛까지 사진에 오롯이 담겨있었다.새하얀 도라지꽃이 만개한 꽃밭 속에서, 꽃보다도 더 환한 웃음을 짓고있었다.왜인지 눈에 익은 도라지 꽃밭.그리고 갑자기 먹먹해오는 가슴.“이거 어디서 찍은 거야?”“어릴 적 살던 집 앞에서요.”무표정으로 사진을 휙 낚아챈 강하리가 냉랭하게 대답했다.차가운 음성 속에 자신만이 알고있는 긴장감 한 가락이 감춰져 있었다.그랬다. 구승훈이 알아볼까 봐 긴장해졌다.우습게도.“집 앞에 도라지를 심었었어? 도라지꽃 좋아해?”긴강했던 게 무색할 만큼 허무한 구승훈의 한 마디.‘그래. 나 같은 건 진작 잊은 거야.’강하리는 속으로 헛웃음을 흘렸다.눈 앞에 떡하니 서 있는 사람도 못 알아보는데, 고작 어릴 적 사진 한 장으로 알아봤을 리가.“아니요. 자주 봐서 익숙한 것 뿐입니다.”“그럼 좋아하는 게 뭔데?”이 능구렁이 같은 남자가 또 은근슬쩍 수작질을 시작한다.“그쪽이 눈앞에서 사라지는 거요.”구승훈이 흥, 콧방귀를 뀌고는, 다시 사진 속 강하리를 향해 시선을 내렸다.이렇게 환하게 웃는 강하리를 본 적이 있던가.저도 모르게 손을 내밀어, 사진 속 강하리의 얼굴을 슥 매만졌다.“인기 많았겠네. 이렇게 예뻐서.”“만지지 마요!”사진을 확 앗아가는 강하리.“야
Read more

제362화

연말을 앞두고 주해찬이 급작스레 바빠지기 시작했다.새해맞이 외빈 영접에 문지방이 닳도록 외교부에 들락거렸다.강하리 또한 만만치 않았다. 초창기인 데다가 연말이라 예상외로 많은 업무들이 손을 거쳐야 하다 보니 잠꼬대로 브리핑 자료를 외울 지경이었다.평일 주말 할것 없이 둘 다 일에 매진하는 통에 만나려고 해도 시간 조율이 도톻 되지 않았다.밤 늦은 시간에 영통이나 전화 통화를 하는 게 전부.이날도 늦은 퇴근을 마친 강하리에게 낯선 번호로 전화가 들어왔다.고객사 쪽에서 온 전화가 아닌가 싶어 냉큼 받았지만, 웬 낯선 여인의 부드러운 음성이었다.“하리 양 맞죠? 갑자기 전화해서 죄송한데, 좀 만나볼 수 있을까요?”고객사라 하기엔 너무나도 비즈니스 톤이 아닌 목소리.“아참, 제 소개를 깜빡했네요. 저는 해찬이 이모예요.”잠시 멍해졌던 강하리가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네, 위치 말씀해 주시면 제가 그쪽으로 가겠습니다.”여인이 알려준 한 카페에 도착하자, 검은 정장 차림의 건장한 사내 하나가 막아섰다.“강하리 씨 맞으시죠? 죄송하지만 핸드폰은 반입 안되십니다.”강하리의 미간을 살짝 찌푸려졌다.“왜죠?”“카페를 대절할 만큼 극비리에 진행될 거라서요. 핸드폰 외 기타 촬영 또는 녹음 가능한 기기도 가지고 들어가실 수 없습니다. 협조 부탁드립니다.”남자는 깍듯하지만, 가차 없는 말투로 대답했다.강하리는 순순히 핸드폰을 내놓는 대신 뒤로 두 걸음 물러섰다.“제가 잘못 찾아온 것 같네요. 전 남자친구 가족분을 만나러 온 거지, 무슨 기밀회의 같은 데 참석하러 온 게 아니라서요.”“들어오라고 해요.”안쪽에서 여인의 담담한 음성이 들려오자 그제야 정장남이 비켜섰다.휑한 카페 안, 차분한 걸음으로 들어간 강하리는, 우아한 자태로 앉아 스푼으로 커피를 휘젓고 있는 한 여인의 맞은편에 멈춰섰다.“앉아요.”눈을 내리깐 채, 하인에게 분부하듯 고개만 까닥인 여인.강하리가 자리에 앉자, 그제야 여인의 눈길이 강하리를 위아래로 훑기 시작했다.
Read more

제363화

”우리 해찬이가 만나는 여자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했던 것 뿐이에요.”여인이 뻔뻔스럽게 대꾸했다.“그랬는데 웬걸, 굉장하더라고요. 해찬이와 연애한답시고 딴 남자와 별 짓을 다 하더군요. 하리 양 같은 여자를 뭐라고 하는지 알아요?”여인의 입가에 차가운 미소가 걸렸다.“창녀라고 하죠. 우리 해찬이 빛나는 인생에 먹칠하기 딱 좋은.”강하리는 주먹을 꽉 쥐었다. 손톱이 살을 파고 들어갔다.“우리 해찬이, 업무에 티끌만 한 실수 한 번 없던 애예요. 그랬던 애가 하리 양 때문에 가장 중요한 외교부 회의까지 결석했다고요!”날 선 여인의 음성이 이어졌다.“구승훈 대표 정부 노릇 하면서 익힌 수단들을 남김없이 쓴 모양인데, 인정할께요. 어떤 의미로는 하리 양 참 대단해요. 하지만 그게 다예요. 우리 주씨 집안은, 하리 양처럼 천박한 여자는 절대 용납 못 합니다!”“어이구야. 겨 뭍은 개 흉보는 똥 뭍은 개를 이렇게 직관하다니.”느닷없이 끼어든 남자의 서늘한 목소리.강하리의 낯빛이 확 바뀌었다.차갑고 고고한 기운을 뿜어내며 이쪽으로 다가오는 한 남자.“준호네 집에서 본 이후로 처음 뵙네요, 전 여사님.”“아 네, 오랜만이네요 구 대표님.”심씨 가문 큰 사모님, 전미연이 차갑게 흥, 콧방귀를 뀌었다.“마침 잘 오셨어요. 이 파렴치한 여자가 얼마나 낯짝이 두꺼운지 봐 두세요. 괜히 또 속지 마시고요.”구승훈이 입가가 조소적으로 말려 올라갔다.“낯짝 두꺼운 걸로 치면 세컨드에서 정실 자리 꿰찬 전 여사님을 이길 사람은 없을 것 같은데요.”“뭐라고요?”전미연의 표정이 마구 일그러졌다.“맞잖아요. 심씨 가문 소실이 정실로 탈바꿈한 사건, 꽤 컸었는데. 설마 세월이 지나 싹 잊혀졌다고 여기신 건 아니죠?”“이보세요 구 대표님!”전미연의 악에 받친 음성이 카패에 울려퍼졌다.“아무리 그래도 제가 윗어른인데 그런 망발을-.”“아까부터 자꾸 윗어른을 들먹이시는데.”윗어른에 대한 존중 따윈 1도 없는 구승훈의 말이 가차없이 전미연의 말을 잘랐다.“
Read more

제364화

갑자기 걸려온 전화를 전미연이 신경질적으로 통화 수락을 눌렀다.“준호야, 준호야! 당장 이쪽으로 와! 나 굴욕 당했다고!”핸드폰에 대고 고래고래 소리지르는 전미연. 하지만 저쪽에서 뭐라 하자 낯빛이 확 바뀌면서 꺽 멈추더니, 한참 뒤에야 꽥 소리질렀다.“야! 심준호! 나 네 숙모야! 어떻게 나한태 이래?”이내 씩씩거리며 전화를 끊어버리는 전미연. 아마도 심준호 쪽에서 말이 곱게 나오지 않은 모양이었다.“딱 기다려요. 해찬이 설득시킬 테니까.”노기 가득찬 눈으로 전미연이 강하리를 죽일 듯이 한 번 노려보고는, 벌떡 일어나 카페를 나갔다.구승훈이 나타난 시점부터 강하리는 줄곧 말이 없었다.창피함? 어색함? 무슨 느낌인지 감조차 오지 않았다.전미연이 안겨준 굴욕감 하나만은 뚜렷했다.이런 상황을 진중히 고려해보지 못한 자신의 치기에 대한 경종이기도 했다.“왜? 속상해? 저런 수모를 당하고도 주씨 가문에 들어가고 싶어?”괘씸하리만치 담담한 구승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강하리가 고개를 돌렸다. 구승훈을 향해 화살촉 같은 눈빛을 쏘아보냈다.“그러는 그쪽은 즐거우세요?”“즐겁다기보다는 약간, 그렇게 충고했는데 기어이 비집고 들으가더니 쌤통이다, 뭐 이런 생각.”거리낌 없이 직설을 날리는 구승훈.“주씨 집안은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보수적이야. 네 과거로는 그 집 문턱을 넘을 수가 없어.”구승훈의 입가에 보일듯말듯 미소가 걸렸다.“사실 헤어진다 해도 별 거 아니지 않아? 세상에 너랑 잘 맞는 좋은 남자가 널렸을 건데.”“누가 헤여진가 그래요!”강하리가 냉소를 지으며 밖을 향해 걸어갔다.구승훈이 표정을 굳히며 따라가려다가, 곧 다시 돌아서서 탁자에 어질러진 사진들을 주섬주섬 챙겼다.본의는 아니지만, 강하리와의 첫 투샷들이었다.한편, 눈시울이 붉어진 강하리가 빠른 걸음으로 카페를 벗어나 차에 올랐다.이제 주해찬에게 막 마음이 열리기 시작했고, 진심으로 갈 데까지 가 보려고 마음먹었는데.이런 방식으로 끝낸다니 분하고 억울했다.주
Read more

제365화

더없는 진심이 담긴 약속이었다.그러나 똑같은 말을 전에도 들어본 강하리한테는 그저 우스갯소리로 들릴 뿐.몸부림치며 구승훈의 품에서 벗어나 원망스런 눈길로 그를 노려보았다.“제발, 저 좀 놔주면 안 돼요?”구승훈이 멈칫했다. 무너져내리는 표정을 간신히 갈무리하며 강하리를 바라보았다.“내가 안 놔줘서 너한테 생긴 일이라고 생각하는 거야?”“그걸 말이라고 물어봐요? 사진 찍히게 만든 장본인이 누군데!”강하리가 원한 가득 담아 소리질렀다.아득한 주씨 가문 문턱이 언젠가는 마주해야만 하는 관문인 건 사실이지만.구승훈이 자꾸 들러붙지만 않았다면, 적어도 이런 말도 안 되는 건덕지는 안 잡혔을 터.“내가 없으면 주씨 가문에서 두 팔 활짝 열고 어서오세요 우리 며늘님, 이럴 것 같아? 상황 파악 좀 제대로 하라고!”“안 나가면 내가 나갑니다 내가!”운전석 문을 열어젖히는 강하리를 구승훈이 와락 잡았다.“어디 가! 새 차 버릴 거야?”“폐기처분할 겁니다. 더러워졌으니까요!”말문이 꺽 막힌 구승훈. 한참만에야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그냥 내가 만만하지, 강하리.”결국 구승훈이 차에서 내렸고, 차 문까지 잠근 강하리는 그제야 등받이에 털썩 쓰러져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온 몸의 힘을 다 쓴 듯한 무기력감이 전신을 휘감았다.……영혼 빠진 얼굴로 집에 들어서는 강하리를 본 손연지가 기겁을 하며, 소파에서 벌떡 일어나 달려왔다.“왜, 왜 이래? 강하리! 하리야! 무슨 일이야 이게!”붉어진 눈시울로 강하리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아냐, 아무것도.”“아니긴 뭐가 아니야! 아까 해찬 선배가 전화왔었어. 하리 괜찮냐고.”오는 도중 주해찬이 다시 걸어온 전화를 받지 않은 강하리였다.하도 머릿속이 복잡해 받을 상황이 아니다보니.“일단 좀 씻을게. 씻고나서 얘기해.”도망치듯 욕실로 들어간 강하리가 핸드폰을 꺼냈다.주해찬의 부재중 전화가 수두룩히 들어와 있었다.통화를 누르자마자 1초도 안 돼 주해찬이 전화를 받았다.“하리야, 괜찮아?”걱정
Read more

제366화

”강하리, 이제 어떡할 거야?”가까스로 화를 다스린 손연지가 강하리를 안쓰럽게 바라보았다.“모르겠어. 선배가 소식 기다리라고 했으니까 일단 기다려 봐야지.”강하리가 씁쓸하게 고개를 저었다.평범한 집안이면 또 몰라도 상대는 권세 높은 명문가였다.손연지가 강하리를 꼭 껴안았다.“됐어. 다 필요 없고 한 잔 때리자.”벌떡 일어나 방에 들어간 손연지가 와인 한 병과 와인잔을 들고 돌아왔다.“짜잔. 우리 아빠 와인 캐비닛에서 어렵게 빼내온 건데, 들키기 전에 증거 인멸을 하는 거야!”강하리가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고마워, 연지야.”“으악! 닭살! 너 지금 나 손발 오그라뜨리고 와인 독차지하려고 이러는 거지! 정의의 심판을 받아랏!”권선징악을 외치며 손연지가 달려들었고, 둘이 소파에서 한바탕 간지럼 난투극을 펼쳤다.비명과 웃음소리가 사라질 때쯤, 엉키고 막혔던 강하리의 마음도 한결 후련해졌다.붉은색 액체가 찰랑거리는 두 잔이 쨍 부딪쳤다.“강하리, 앞으로 꽃길만 걷는 거야.”진심 가득 담은 손연지의 축배사에 강하리는 콧잔등이 시큰해났다.“응, 우리 모두 꽃길만 걷자.”“하리야, 나 설 연휴 때 내려가지 말고 그냥 너랑 여기서 보낼까?”주해찬이 오기로 했었지만, 상황상 아무래도 물 건너간 것 같았다.“괜찮아. 혼자 설 지낸 게 한두 해도 아닌데 뭘.”“아니면 나랑 같이 우리 집에 내려가는 건 어때?”“병원에서 엄마랑 지내려고.”손연지가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달마저 빛이 바래가는 늦은 밤.손연지는 꿈나라로 간 지 오랬고, 강하리 혼자 거실 창가에 오도카니 서 있었다.갑자기 핸드폰이 울렸다. 낯선 보경 지역 전화번호였다.누군지 대략 감이 온 강하리는 깊게 심호흡을 한 뒤, 통화 버튼을 눌렀다.“안녕하세요, 하리 양. 해찬이 엄마입니다.”주해찬처럼 부드럽고 따뜻한 목소리.핸드폰을 쥔 강하리의 손에 바싹 힘이 들어갔다.“우선 먼저 해찬이 이모의 미행과 무예의 호출에 사과드려요. 죄송합니다.”강하리가 쓴웃음을 지었다
Read more

제367화

”선배? 얼굴에 또…….”대답 대신 다가온 주해찬이 강하리의 두 손을 꼭 잡았다.“하리야, 나는 너를 위해서 모든 걸 버릴 수 있어.”강하리의 두 눈을 지그시 바라보는 주해찬의 눈에는 전에 없던 뜨거운 것이 일렁이고 있었다.“너는?”못박힌 듯 굳어진 강하리.“선배 나는…….”저도 모르게 씁쓸한 미소가 피어올랐다.“그렇게는 못 할 것 같아요. 미안해요 선배.”겨우 되찾은 자유로운 생활.병상에 누워계신 엄마.엄마 생명줄인 치료비를 벌 수 있는 직장.강하리는 그 모든 걸 버릴 자신이 없었다.또한, 주해찬이 고작 자신 때문에 모든 걸 버리게 할 수가 없었다.감당 못할 대가를 치른 뒤 남는 거라곤 풀썩이는 먼지 뿐인 사랑, 그건 강하리가 바라는 사랑이 아니었다.“하지만 하리야, 시작하자고 한 건 너잖아.”주해찬의 다급한 목소리에 하리는 후회가 들기 시작했다.주제넘게 시작하는 게 아니었는데.“맞아요. 제가 성급했어요. 정말 미안해요, 선배.”첫 걸음에 쓰라린 고배를 머금은 두 사람이었다.“다른 방법은 없는 걸까? 꼭…… 헤어져야만 하는 거야?”주해찬이 강하리에게 묻는 건지, 자기 자신에게 묻는 건지 모를 말을 중얼거리듯 던졌다.강하리는 대답할 수가 없었다. 대신 고개를 푹 숙였다.주해찬의 눈에 고통스러운 빛이 스쳐지났다.하지만 이내 빙그레 웃었다.“미안해. 잘 해결하겠단 약속 못 지켰네.”강하리의 머리를 쓰다듬으려 들었던 손이 허공에 멈췄다가 내려졌다.“하지만 다른 약속은 꼭 지킬게. 설날에 같이 있어주겠다던 약속.”강하리가 뭐라 하려던 순간.“하리야, 기다려달라는 염치 없는 말은 하지 않을게. 다만.”주해찬의 목소리가 전에 없이 경건했다.“내가 가문의 허락을 받아냈을 때, 그때 네가 혼자라면 나한테 돌아와 줘.”“……선배.”강하리가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나는 그럴 가치가 없는 사람이에요.”“내가 있다면 있는 거야, 하리야.”미소를 지어보인 주해찬이 돌아서 멀어져갔다.강하리는 그 자리에 미동도 없
Read more

제368화

”분명 예전에는 행복했잖아. 우리 둘은.”한참동안 말이 없던 구승훈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행복했다고 한 적 없는데요.”“뭐라고?”“뭔가 제대로 착각하고 계신 모양인데, 나는 승훈 씨와 함꼐 있는 매 순간이 고통이었어요.”말을 마친 강하리가 그대로 아파트에 들어갔다.손 끝이 미세하게 떨렸다.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여전히 너무나도 손쉽게 자신의 마음속에 파문을 일으키는 구승훈이었다.주해찬과 헤어진 울적함도 압도적으로 밀어낼 만큼.그만큼 너무나도 쉽게 자신에게 고통을 줄 수 있는 사람이기도 했다.그 고통을 같이 있는 매 순간마다 받았었다.행복했었다고?무슨 얼어죽일 놈의 행복?새장에 같힌 카나리아의 행복?아니면 송유라와의 투샷을 직관하는 행복?‘그 따위 행복, 개나 줘버리라고.’저만치, 도망치듯 엘리베이터에 들어서는 강하리의 모습이 구승훈의 눈동자에 맺혔다.저도 모르게 서글픈 외마디 헛웃음을 뱉어냈다.‘고슴도치도 아니고, 어떻게 매번 이렇게 아프게 찔러대냐고.’지금껏 강하리를 쫄래쫄래 따라다닌 자신이 우스꽝스러웠다.한참을 어둠 속에 서 있던 구승훈이 차에 올랐다.조수석에 고이 눕혀놓은 리시안셔스 꽃다발이 하등 쓸모없게 보였다.그걸 집어든 구승훈은 유리창을 내려, 가차없이 밖에 던져버렸다.……섣달 그믐날.대양그룹 연성지사 주차장에 세워져 있는 평범하기 그지없는 차 한 대.너무나도 평범한 나머지, 며칠째 타는 이도 내리는 이도 없이 매일 주차장만 들락거리는 수상쩍은 차란 걸 발견한 사람이 없었다.거기에는 구승훈이 타고있었다.강하리가 주해찬과 헤어진 그 날 이후로 매일 퇴근하자마자 대양지사에 와서는, 회사에서 나오는 강하리를 따라 집까지 바래다주고 소리 없이 떠나가기를 반복해 온 구승훈이었다.왜 그러는지는 구승훈 스스로도 몰랐다.하지만 한 가지는 명확했다. 하루라고 강하리를 못 보면 불편해 견딜 수가 없단 것.이윽고 주차장에 나타난 강하리가 차에 타자, 기다렸단 듯 구승훈이 시동을 걸었다.능숙하게 일정 거리를 유지
Read more

제369화

병원으로 가는 도중, 주해찬이 전화를 걸어왔다.“하리야, 미안. 오늘 일이 바빠서 못 갈 것 같아.”“아니에요 선배. 즐거운 설날 되셔요.”급급히 대답한 강하리가 몇 마디 더 나누려는 주해찬의 전화를 그대로 끊어버리고는풀악셀을 밟았다.갑자기 속도를 올린 강하리의 차가 미친듯이 도로를 질주했다.‘젠장, 들킨 건가?’그 뒤를 따르던 구승훈이 속으로 욕을 뱉었다.걱정과는 달리, 구승훈의 차는 안중에도 없이 병원에 도착한 강하리는 부리나케 정서원의 병실로 달려갔다.검진이 그때까지 이어지고 있었다.“선생님, 우리 엄마 깨어났어요?”다급한 강하리의 질문에 의사가 감개무량한 눈빛을 보냈다.“아직 깨어나신 건 아니지만 가능성이 큽니다. 외부의 자극에 꽤 적극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어요. 이쪽으로 와서 어머님을 불러보세요. 아마 목소리에 반응하실 겁니다.”삽시에 강하리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다급히 정서원의 머리맡에 다가가 떨리는 목소리로 불렀다.“엄마, 들려요? 나 하리예요. 엄마…….”저도 모르게 왈칵 터져나온 눈물에 눈 앞이 흐려지기 시작했다.하지만 시야가 흐려지기 직전에 똑똑히 보았다.두 번째로 엄마를 불렀을 때, 엄마의 손가락이 까닥, 움직이는 걸.순간, 더는 걷잡을 길 없이 눈물이 펑펑 쏟아지기 시작했다.“엄마! 들려요? 나 하리예요 엄마! 얼른 깨어나요 네? 엄마아아-.”정서원의 손을 꼭 잡은 채, 강하리가 병상에 엎드려 엉엉 목놓아 울었다.그 모습이 막 뒤따라 들어온 구승훈의 눈동자에 오롯이 박혔다.엄마 손을 꼭 잡은 채, 어린애마냥 우는 강하리.회한과 죄책감이 구승훈의 마음속에서 휘몰아쳤다.3년동안 엄마 얘기를 입 밖에 비친 적이 없던 강하리였다.사전조사 때, 강하리 엄마가 사고로 병원에 누워있단 얘기를 들은 게 다였다.강하리가 그토록 돈에 집착했던 게 엄마를 살리기 위해서란 걸 이제서야 절실히 깨달았다.그동안 혼자 엄마 의료 비용을 부담하느라 얼마나 힘들었을까.그런 강하리를 약값으로 협박하고, 급기야는 거액의 위약
Read more

제370화

”딱 오늘만, 오늘만 안 놓을게. 이대로 좀 있자.”머리 위로 묵직한 남자의 음성이 내려왔다.결국 강하리는 그 품 안을 벗어나지 못했다.넓은 남자의 품에 고개가 기대지자, 걷잡을 수 없이 또 눈물이 쏟아지기 시작했다.그렇게 감정의 의미를 따질 수 없는 눈물이 남자의 옷깃을 적시기 시작했다.구승훈의 마음까지도 슴뻑 적시기 시작했다.문득 구승훈은, 강하리가 이렇게 여린 여자였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억센 모습으로 감싸고 있었을 뿐.“오늘까지만 우는 거다. 앞으로는 그럴 일 없을 거야.”구승훈은 두 팔을 벌려 강하리를 품 속에 감싸안았다.얼마 못 가 울음을 그친 강하리가 구승훈의 품 속을 빠져나갔다.의외로 순순히 강하리를 놔 주는 구승훈.“저녁 안 먹었지?”떡국 끓이려다가 그 길로 달려나왔으니 배가 고플 법도 했지만, 강하리는 지금 엄마 곁을 떠나고 싶지 않았다.“괜찮으니까 신경 쓰지 마요.”“밥 갖다 줄 테니까 여기서 먹어.”“아니에요. 좀 있다 집에 가서 먹으려고요.”구승훈은 슬슬 짜증이 밀려오기 시작했다.아니, 아까 품에 안겨있던 순하디 순한 양은 어디 가고 웬 거절봇이?밥 한 끼 먹이는 게 뭐가 이리 힘들어.내가 주는 밥에는 독이라도 탔다는 거야 뭐야.“네가 뭐라든 가져올 테니까 먹든 버리든 맘대로 해.”퉁명스런 한 마디를 남긴 구승훈이 저 쪽으로 걸어가 어데론가 전화하기 시작했다.덕분에 또 나오려던 강하리의 거절이 쏙 들어갔다.맘대로 하라지.한 번 고집을 피우면 하늘이 무너지지 않는 이상 꺾지 않는 게 저 사람이니까.강하리는 다시 병상 머리맡에 앉아 엄마 손을 꼭 잡아쥐었다.이윽고 통화를 마친 구승훈이 돌아왔다.“본가에 가 봐야 할 것 같아. 거기 끝나면 올게.”매년 구씨 가문 본가에서 열리는 그믐 연회는 구씨 집안 사람들이 꼭 참석해야 하는 식사 자리였다.이미 재촉 전화를 수십 통이나 받은 구승훈인지라 더이상 미룰 수가 없었다.“안 와도 돼요.”아까와는 완전 딴 사람이 된 것 같은 냉랭한 거절.구승
Read more
PREV
1
...
3536373839
...
99
SCAN CODE TO READ ON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