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걸려온 전화를 전미연이 신경질적으로 통화 수락을 눌렀다.“준호야, 준호야! 당장 이쪽으로 와! 나 굴욕 당했다고!”핸드폰에 대고 고래고래 소리지르는 전미연. 하지만 저쪽에서 뭐라 하자 낯빛이 확 바뀌면서 꺽 멈추더니, 한참 뒤에야 꽥 소리질렀다.“야! 심준호! 나 네 숙모야! 어떻게 나한태 이래?”이내 씩씩거리며 전화를 끊어버리는 전미연. 아마도 심준호 쪽에서 말이 곱게 나오지 않은 모양이었다.“딱 기다려요. 해찬이 설득시킬 테니까.”노기 가득찬 눈으로 전미연이 강하리를 죽일 듯이 한 번 노려보고는, 벌떡 일어나 카페를 나갔다.구승훈이 나타난 시점부터 강하리는 줄곧 말이 없었다.창피함? 어색함? 무슨 느낌인지 감조차 오지 않았다.전미연이 안겨준 굴욕감 하나만은 뚜렷했다.이런 상황을 진중히 고려해보지 못한 자신의 치기에 대한 경종이기도 했다.“왜? 속상해? 저런 수모를 당하고도 주씨 가문에 들어가고 싶어?”괘씸하리만치 담담한 구승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강하리가 고개를 돌렸다. 구승훈을 향해 화살촉 같은 눈빛을 쏘아보냈다.“그러는 그쪽은 즐거우세요?”“즐겁다기보다는 약간, 그렇게 충고했는데 기어이 비집고 들으가더니 쌤통이다, 뭐 이런 생각.”거리낌 없이 직설을 날리는 구승훈.“주씨 집안은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보수적이야. 네 과거로는 그 집 문턱을 넘을 수가 없어.”구승훈의 입가에 보일듯말듯 미소가 걸렸다.“사실 헤어진다 해도 별 거 아니지 않아? 세상에 너랑 잘 맞는 좋은 남자가 널렸을 건데.”“누가 헤여진가 그래요!”강하리가 냉소를 지으며 밖을 향해 걸어갔다.구승훈이 표정을 굳히며 따라가려다가, 곧 다시 돌아서서 탁자에 어질러진 사진들을 주섬주섬 챙겼다.본의는 아니지만, 강하리와의 첫 투샷들이었다.한편, 눈시울이 붉어진 강하리가 빠른 걸음으로 카페를 벗어나 차에 올랐다.이제 주해찬에게 막 마음이 열리기 시작했고, 진심으로 갈 데까지 가 보려고 마음먹었는데.이런 방식으로 끝낸다니 분하고 억울했다.주
더없는 진심이 담긴 약속이었다.그러나 똑같은 말을 전에도 들어본 강하리한테는 그저 우스갯소리로 들릴 뿐.몸부림치며 구승훈의 품에서 벗어나 원망스런 눈길로 그를 노려보았다.“제발, 저 좀 놔주면 안 돼요?”구승훈이 멈칫했다. 무너져내리는 표정을 간신히 갈무리하며 강하리를 바라보았다.“내가 안 놔줘서 너한테 생긴 일이라고 생각하는 거야?”“그걸 말이라고 물어봐요? 사진 찍히게 만든 장본인이 누군데!”강하리가 원한 가득 담아 소리질렀다.아득한 주씨 가문 문턱이 언젠가는 마주해야만 하는 관문인 건 사실이지만.구승훈이 자꾸 들러붙지만 않았다면, 적어도 이런 말도 안 되는 건덕지는 안 잡혔을 터.“내가 없으면 주씨 가문에서 두 팔 활짝 열고 어서오세요 우리 며늘님, 이럴 것 같아? 상황 파악 좀 제대로 하라고!”“안 나가면 내가 나갑니다 내가!”운전석 문을 열어젖히는 강하리를 구승훈이 와락 잡았다.“어디 가! 새 차 버릴 거야?”“폐기처분할 겁니다. 더러워졌으니까요!”말문이 꺽 막힌 구승훈. 한참만에야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그냥 내가 만만하지, 강하리.”결국 구승훈이 차에서 내렸고, 차 문까지 잠근 강하리는 그제야 등받이에 털썩 쓰러져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온 몸의 힘을 다 쓴 듯한 무기력감이 전신을 휘감았다.……영혼 빠진 얼굴로 집에 들어서는 강하리를 본 손연지가 기겁을 하며, 소파에서 벌떡 일어나 달려왔다.“왜, 왜 이래? 강하리! 하리야! 무슨 일이야 이게!”붉어진 눈시울로 강하리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아냐, 아무것도.”“아니긴 뭐가 아니야! 아까 해찬 선배가 전화왔었어. 하리 괜찮냐고.”오는 도중 주해찬이 다시 걸어온 전화를 받지 않은 강하리였다.하도 머릿속이 복잡해 받을 상황이 아니다보니.“일단 좀 씻을게. 씻고나서 얘기해.”도망치듯 욕실로 들어간 강하리가 핸드폰을 꺼냈다.주해찬의 부재중 전화가 수두룩히 들어와 있었다.통화를 누르자마자 1초도 안 돼 주해찬이 전화를 받았다.“하리야, 괜찮아?”걱정
”강하리, 이제 어떡할 거야?”가까스로 화를 다스린 손연지가 강하리를 안쓰럽게 바라보았다.“모르겠어. 선배가 소식 기다리라고 했으니까 일단 기다려 봐야지.”강하리가 씁쓸하게 고개를 저었다.평범한 집안이면 또 몰라도 상대는 권세 높은 명문가였다.손연지가 강하리를 꼭 껴안았다.“됐어. 다 필요 없고 한 잔 때리자.”벌떡 일어나 방에 들어간 손연지가 와인 한 병과 와인잔을 들고 돌아왔다.“짜잔. 우리 아빠 와인 캐비닛에서 어렵게 빼내온 건데, 들키기 전에 증거 인멸을 하는 거야!”강하리가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고마워, 연지야.”“으악! 닭살! 너 지금 나 손발 오그라뜨리고 와인 독차지하려고 이러는 거지! 정의의 심판을 받아랏!”권선징악을 외치며 손연지가 달려들었고, 둘이 소파에서 한바탕 간지럼 난투극을 펼쳤다.비명과 웃음소리가 사라질 때쯤, 엉키고 막혔던 강하리의 마음도 한결 후련해졌다.붉은색 액체가 찰랑거리는 두 잔이 쨍 부딪쳤다.“강하리, 앞으로 꽃길만 걷는 거야.”진심 가득 담은 손연지의 축배사에 강하리는 콧잔등이 시큰해났다.“응, 우리 모두 꽃길만 걷자.”“하리야, 나 설 연휴 때 내려가지 말고 그냥 너랑 여기서 보낼까?”주해찬이 오기로 했었지만, 상황상 아무래도 물 건너간 것 같았다.“괜찮아. 혼자 설 지낸 게 한두 해도 아닌데 뭘.”“아니면 나랑 같이 우리 집에 내려가는 건 어때?”“병원에서 엄마랑 지내려고.”손연지가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달마저 빛이 바래가는 늦은 밤.손연지는 꿈나라로 간 지 오랬고, 강하리 혼자 거실 창가에 오도카니 서 있었다.갑자기 핸드폰이 울렸다. 낯선 보경 지역 전화번호였다.누군지 대략 감이 온 강하리는 깊게 심호흡을 한 뒤, 통화 버튼을 눌렀다.“안녕하세요, 하리 양. 해찬이 엄마입니다.”주해찬처럼 부드럽고 따뜻한 목소리.핸드폰을 쥔 강하리의 손에 바싹 힘이 들어갔다.“우선 먼저 해찬이 이모의 미행과 무예의 호출에 사과드려요. 죄송합니다.”강하리가 쓴웃음을 지었다
”선배? 얼굴에 또…….”대답 대신 다가온 주해찬이 강하리의 두 손을 꼭 잡았다.“하리야, 나는 너를 위해서 모든 걸 버릴 수 있어.”강하리의 두 눈을 지그시 바라보는 주해찬의 눈에는 전에 없던 뜨거운 것이 일렁이고 있었다.“너는?”못박힌 듯 굳어진 강하리.“선배 나는…….”저도 모르게 씁쓸한 미소가 피어올랐다.“그렇게는 못 할 것 같아요. 미안해요 선배.”겨우 되찾은 자유로운 생활.병상에 누워계신 엄마.엄마 생명줄인 치료비를 벌 수 있는 직장.강하리는 그 모든 걸 버릴 자신이 없었다.또한, 주해찬이 고작 자신 때문에 모든 걸 버리게 할 수가 없었다.감당 못할 대가를 치른 뒤 남는 거라곤 풀썩이는 먼지 뿐인 사랑, 그건 강하리가 바라는 사랑이 아니었다.“하지만 하리야, 시작하자고 한 건 너잖아.”주해찬의 다급한 목소리에 하리는 후회가 들기 시작했다.주제넘게 시작하는 게 아니었는데.“맞아요. 제가 성급했어요. 정말 미안해요, 선배.”첫 걸음에 쓰라린 고배를 머금은 두 사람이었다.“다른 방법은 없는 걸까? 꼭…… 헤어져야만 하는 거야?”주해찬이 강하리에게 묻는 건지, 자기 자신에게 묻는 건지 모를 말을 중얼거리듯 던졌다.강하리는 대답할 수가 없었다. 대신 고개를 푹 숙였다.주해찬의 눈에 고통스러운 빛이 스쳐지났다.하지만 이내 빙그레 웃었다.“미안해. 잘 해결하겠단 약속 못 지켰네.”강하리의 머리를 쓰다듬으려 들었던 손이 허공에 멈췄다가 내려졌다.“하지만 다른 약속은 꼭 지킬게. 설날에 같이 있어주겠다던 약속.”강하리가 뭐라 하려던 순간.“하리야, 기다려달라는 염치 없는 말은 하지 않을게. 다만.”주해찬의 목소리가 전에 없이 경건했다.“내가 가문의 허락을 받아냈을 때, 그때 네가 혼자라면 나한테 돌아와 줘.”“……선배.”강하리가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나는 그럴 가치가 없는 사람이에요.”“내가 있다면 있는 거야, 하리야.”미소를 지어보인 주해찬이 돌아서 멀어져갔다.강하리는 그 자리에 미동도 없
”분명 예전에는 행복했잖아. 우리 둘은.”한참동안 말이 없던 구승훈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행복했다고 한 적 없는데요.”“뭐라고?”“뭔가 제대로 착각하고 계신 모양인데, 나는 승훈 씨와 함꼐 있는 매 순간이 고통이었어요.”말을 마친 강하리가 그대로 아파트에 들어갔다.손 끝이 미세하게 떨렸다.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여전히 너무나도 손쉽게 자신의 마음속에 파문을 일으키는 구승훈이었다.주해찬과 헤어진 울적함도 압도적으로 밀어낼 만큼.그만큼 너무나도 쉽게 자신에게 고통을 줄 수 있는 사람이기도 했다.그 고통을 같이 있는 매 순간마다 받았었다.행복했었다고?무슨 얼어죽일 놈의 행복?새장에 같힌 카나리아의 행복?아니면 송유라와의 투샷을 직관하는 행복?‘그 따위 행복, 개나 줘버리라고.’저만치, 도망치듯 엘리베이터에 들어서는 강하리의 모습이 구승훈의 눈동자에 맺혔다.저도 모르게 서글픈 외마디 헛웃음을 뱉어냈다.‘고슴도치도 아니고, 어떻게 매번 이렇게 아프게 찔러대냐고.’지금껏 강하리를 쫄래쫄래 따라다닌 자신이 우스꽝스러웠다.한참을 어둠 속에 서 있던 구승훈이 차에 올랐다.조수석에 고이 눕혀놓은 리시안셔스 꽃다발이 하등 쓸모없게 보였다.그걸 집어든 구승훈은 유리창을 내려, 가차없이 밖에 던져버렸다.……섣달 그믐날.대양그룹 연성지사 주차장에 세워져 있는 평범하기 그지없는 차 한 대.너무나도 평범한 나머지, 며칠째 타는 이도 내리는 이도 없이 매일 주차장만 들락거리는 수상쩍은 차란 걸 발견한 사람이 없었다.거기에는 구승훈이 타고있었다.강하리가 주해찬과 헤어진 그 날 이후로 매일 퇴근하자마자 대양지사에 와서는, 회사에서 나오는 강하리를 따라 집까지 바래다주고 소리 없이 떠나가기를 반복해 온 구승훈이었다.왜 그러는지는 구승훈 스스로도 몰랐다.하지만 한 가지는 명확했다. 하루라고 강하리를 못 보면 불편해 견딜 수가 없단 것.이윽고 주차장에 나타난 강하리가 차에 타자, 기다렸단 듯 구승훈이 시동을 걸었다.능숙하게 일정 거리를 유지
병원으로 가는 도중, 주해찬이 전화를 걸어왔다.“하리야, 미안. 오늘 일이 바빠서 못 갈 것 같아.”“아니에요 선배. 즐거운 설날 되셔요.”급급히 대답한 강하리가 몇 마디 더 나누려는 주해찬의 전화를 그대로 끊어버리고는풀악셀을 밟았다.갑자기 속도를 올린 강하리의 차가 미친듯이 도로를 질주했다.‘젠장, 들킨 건가?’그 뒤를 따르던 구승훈이 속으로 욕을 뱉었다.걱정과는 달리, 구승훈의 차는 안중에도 없이 병원에 도착한 강하리는 부리나케 정서원의 병실로 달려갔다.검진이 그때까지 이어지고 있었다.“선생님, 우리 엄마 깨어났어요?”다급한 강하리의 질문에 의사가 감개무량한 눈빛을 보냈다.“아직 깨어나신 건 아니지만 가능성이 큽니다. 외부의 자극에 꽤 적극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어요. 이쪽으로 와서 어머님을 불러보세요. 아마 목소리에 반응하실 겁니다.”삽시에 강하리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다급히 정서원의 머리맡에 다가가 떨리는 목소리로 불렀다.“엄마, 들려요? 나 하리예요. 엄마…….”저도 모르게 왈칵 터져나온 눈물에 눈 앞이 흐려지기 시작했다.하지만 시야가 흐려지기 직전에 똑똑히 보았다.두 번째로 엄마를 불렀을 때, 엄마의 손가락이 까닥, 움직이는 걸.순간, 더는 걷잡을 길 없이 눈물이 펑펑 쏟아지기 시작했다.“엄마! 들려요? 나 하리예요 엄마! 얼른 깨어나요 네? 엄마아아-.”정서원의 손을 꼭 잡은 채, 강하리가 병상에 엎드려 엉엉 목놓아 울었다.그 모습이 막 뒤따라 들어온 구승훈의 눈동자에 오롯이 박혔다.엄마 손을 꼭 잡은 채, 어린애마냥 우는 강하리.회한과 죄책감이 구승훈의 마음속에서 휘몰아쳤다.3년동안 엄마 얘기를 입 밖에 비친 적이 없던 강하리였다.사전조사 때, 강하리 엄마가 사고로 병원에 누워있단 얘기를 들은 게 다였다.강하리가 그토록 돈에 집착했던 게 엄마를 살리기 위해서란 걸 이제서야 절실히 깨달았다.그동안 혼자 엄마 의료 비용을 부담하느라 얼마나 힘들었을까.그런 강하리를 약값으로 협박하고, 급기야는 거액의 위약
”딱 오늘만, 오늘만 안 놓을게. 이대로 좀 있자.”머리 위로 묵직한 남자의 음성이 내려왔다.결국 강하리는 그 품 안을 벗어나지 못했다.넓은 남자의 품에 고개가 기대지자, 걷잡을 수 없이 또 눈물이 쏟아지기 시작했다.그렇게 감정의 의미를 따질 수 없는 눈물이 남자의 옷깃을 적시기 시작했다.구승훈의 마음까지도 슴뻑 적시기 시작했다.문득 구승훈은, 강하리가 이렇게 여린 여자였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억센 모습으로 감싸고 있었을 뿐.“오늘까지만 우는 거다. 앞으로는 그럴 일 없을 거야.”구승훈은 두 팔을 벌려 강하리를 품 속에 감싸안았다.얼마 못 가 울음을 그친 강하리가 구승훈의 품 속을 빠져나갔다.의외로 순순히 강하리를 놔 주는 구승훈.“저녁 안 먹었지?”떡국 끓이려다가 그 길로 달려나왔으니 배가 고플 법도 했지만, 강하리는 지금 엄마 곁을 떠나고 싶지 않았다.“괜찮으니까 신경 쓰지 마요.”“밥 갖다 줄 테니까 여기서 먹어.”“아니에요. 좀 있다 집에 가서 먹으려고요.”구승훈은 슬슬 짜증이 밀려오기 시작했다.아니, 아까 품에 안겨있던 순하디 순한 양은 어디 가고 웬 거절봇이?밥 한 끼 먹이는 게 뭐가 이리 힘들어.내가 주는 밥에는 독이라도 탔다는 거야 뭐야.“네가 뭐라든 가져올 테니까 먹든 버리든 맘대로 해.”퉁명스런 한 마디를 남긴 구승훈이 저 쪽으로 걸어가 어데론가 전화하기 시작했다.덕분에 또 나오려던 강하리의 거절이 쏙 들어갔다.맘대로 하라지.한 번 고집을 피우면 하늘이 무너지지 않는 이상 꺾지 않는 게 저 사람이니까.강하리는 다시 병상 머리맡에 앉아 엄마 손을 꼭 잡아쥐었다.이윽고 통화를 마친 구승훈이 돌아왔다.“본가에 가 봐야 할 것 같아. 거기 끝나면 올게.”매년 구씨 가문 본가에서 열리는 그믐 연회는 구씨 집안 사람들이 꼭 참석해야 하는 식사 자리였다.이미 재촉 전화를 수십 통이나 받은 구승훈인지라 더이상 미룰 수가 없었다.“안 와도 돼요.”아까와는 완전 딴 사람이 된 것 같은 냉랭한 거절.구승
구승훈의 차가 도로 위를 질주했다.“구승훈! 대체 뭐 하려는 거야!”그 안에는 엄마 걱정에 화가 머리끝까지 솟구친 강하리가 있었고.행여 강하리가 뛰어내리기라도 할까 봐 차 문을 구승훈이 모두 잠가버린 상태였다. 심지어 창문도 락을 걸어버렸다.차가 달리는 내내 구승훈의 핸드폰은 쉴 새 없이 울려댔다.구씨 가문 사람들이 걸어온 전화, 그리고 송유라가 걸어온 전화.구승훈은 하나도 받지 않았다. 급기야는 무음모드로 바꿔버렸다.강하리도 잠잠해졌다.시내를 벗어난 구승훈의 차가 어느 한적한 산길을 달리기 시작했다.척박해진 주위 풍경에 강하리의 관자놀이가 꿈틀했다.입을 떼는 순간.끼익-!차가 멈춰섰고 차 문이 열렸다.“내려.”덤덤한 구승훈의 목소리.“이건 도대체…….”야밤에 산꼭대기라니. 것도 구승훈과 단 둘이.이 남자가 자신을 해치지 않는단 걸 몰랐더라면 경찰에 신고하기 딱 좋은 시간과 장소였다.“그믐밤 같이 보내는 게 소원 아니었어?”남자의 눈 속엔 알지 못할 감정이 언뜰거렸다.‘같이 보내준다 뿐이겠어. 이런 것도 해줄 수가 있다고.’펑-!때마침 눈부신 빛 한 줄기가 허공을 가르며 솟아오르더니, 거대한 민들레 송이 같은 불꽃이 강하리의 눈 앞에 만개했다.쏟아져내리는 오색찬란한 빛이 멍해진 강하리의 얼굴을 채색으로 수놓았다.곧 꼬리에 꼬리를 물고 하늘로 솟아로른 빛줄기들이 앞다투어 피어나기 시작했다.퍼엉! 펑! 퍼펑!불꽃놀이를 너무나도 좋아하던 강하리였다.순간이지만 눈부신 아름다움이 너무 좋았었다.넋을 놓은 채, 밤하늘을 바라보았다.그런 강하리를 구승훈이 바라보고 있었다.강하리의 눈동자 속에 피어나는 빛이 사진 속 그것과 너무 닮았다.저도 모르게 손가락을 뻗어 강하리의 눈가를 훔쳤다.흠칫 놀라며 구승훈을 돌아보는 강하리.“마음에 들어?”구승훈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피어났다.“……플러팅 수법이 꽤 다양하시네요.”“…….”구승훈의 입가에 맺혔던 미소가 그대로 쩌적 굳었다.“야 강하리! 나한테서 이런 대우는
그가 말을 마치자마자 진료실 문이 안에서 열렸고 강하리가 휠체어를 밀며 천천히 나왔다.구승훈과 마주친 것이 놀랍지도 않은 듯한 그녀의 표정엔 그 어떤 변화도 없었다.그저 조시욱을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가요. 오늘 조 회장님께서 건강검진 있다고 하지 않았어요? 같이 가봐요.” 그러자 조시욱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그 말을 아직 기억하고 있었어? 우리 할아버지가 아시게 되면 분명 오늘 밤 내내 그 얘기만 하실걸.”강하리는 여전히 미소를 머금고 있었지만 아무도 보지 못하는 그늘진 표정 속 그 웃음은 희미하기 짝이 없었다.“하리야.”구승훈이 낮은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그러자 조시욱은 발걸음을 멈추고 아래를 내려다보며 물었다.“둘이 잠깐 이야기할래?”하지만 구승훈은 이미 그녀에게 다가와 무릎을 꿇고 앉았다.그러고는 방금 깁스를 푼 그녀의 팔을 조심스레 감싸 쥐었다.“아직도 아파?”단 한 마디였지만 거기에 담긴 감정은 지독할 정도로 절절했다.그러나 강하리의 마음속엔 이 말이 오히려 조롱처럼 다가왔고 그동안 꾹 눌러왔던 분노와 상처가 그 순간 와르르 무너져버렸다.그녀는 눈가가 시큰해지며 치밀어 오르는 감정에 숨이 턱 막혔다.‘아프냐고? 정말 이젠 웃기지도 않네. 사고가 난 지 벌써 한 달이 지났는데 이 자식은 이제 와서 상처가 다 아물어갈 무렵에야 묻네. 아프냐고?’구승훈의 긴 손가락은 그녀의 손목을 조심스럽게 감싸고 있었지만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그는 망설이다가 감싸진 붕대를 살짝 만지려 했으나 강하리는 재빨리 팔을 빼냈다.“손대지 마요.”강하리의 붉어졌던 눈가는 이미 차갑게 식어 있었고 마음은 이미 굳어진 상태였다.“역겨워요.”구승훈의 손은 허공에 멈춰 선 채 얼어붙었고 그는 마치 부서질 듯한 표정으로 강하리를 바라보았다.“그때 내가 몇 초 망설였다는 이유로 그래? 하리야, 설마 진심으로 내가 임희주를 선택할 거라고 생각해?”강하리는 눈을 내리깔며 감정을 숨겼고 가슴 깊숙이 파고든 통증도 억눌렀다.그러고는 쓴웃
구승훈의 시선은 줄곧 조시욱과 강하리의 뒷모습을 좇고 있었다.두 사람이 병원 진료동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끝까지 지켜본 뒤에야 그는 마침내 앞에 서 있는 여자를 돌아보았다.“석 여사님, 무슨 일이라도 있으신가요?”석미연은 여전히 온몸을 값비싼 명품으로 휘감은 채 늘 그렇듯 강하리에 대한 반감이 가득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승훈 씨, 나한테 그렇게 차갑게 굴 필요 없잖아. 우리 사이에 무슨 깊은 앙금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예전에 좀 불편했던 일도 다 그 여우 같은 강하리 때문이잖아. 안 그래?”석연란의 비아냥 섞인 말투에 구승훈의 눈빛이 즉시 어두워졌다.“석 여사님, 우리 사이가 그렇게 친했었나요? 감히 승훈 씨라고 부를 정도로요?” 그는 날카롭게 말을 이었다.“그리고 강하리는 분명히 심씨 가문의 당당한 맏딸입니다. 그런 사람을 여우니 뭐니 부르는 석 여사님은 남의 가정 깨고 들어온 입장인데... 여사님 같은 사람이야말로 여우가 아닌가요? 주제 파악은 하셔야죠.”그 말은 단 한 치의 여지도 없이 날카롭고 무례했다.원래 석미연은 구승훈과 적당히 말 섞으며 거리를 좁히고 싶었다.조시욱이 강하리 곁에 있는 건 그냥 잠시 눈먼 남자의 실수라 여겼다.하지만 만약 자신이 심연청을 구승훈에게 시집보낼 수만 있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강하리가 갖지 못한 남자, 강하리를 버린 남자가 결국은 심연청과 결혼하는 거라면 그보다 통쾌한 복수는 없을 터였다.그런데 뜻밖에도 구승훈은 말을 시작하자마자 그녀를 뼈도 못 추릴 정도로 심한 말을 뱉었다.“구승훈, 감히 나한테 그런 말을 해?”그녀가 이를 악물며 소리치자 구승훈은 더는 감정을 숨기지 않고 냉정한 눈빛을 드러냈다.“제가 사람 보는 눈이 없는 건가요. 아니면 석 여사님이 스스로를 너무 과대평가하시는 건가요? 제가 다시 기억나게 해드릴까요? 과거에 당신들과 당신 동생들이 벌인 짓들... 제 손에는 아직도 증거들이 수두룩하죠.”그렇게 말하고 그는 더는 미련 없이 병원 안으로 걸음을 옮겼고 석연란은 그
천아름은 강하리의 휠체어를 밀며 복도를 따라나섰다.그런데 하필 엘리베이터 앞에 도착하자마자 위층에서 내려오는 구승훈과 준봉을 마주쳤다.이번엔 강하리도 굳이 피하려 들진 않았다.에비뉴 대표실이 이곳에 있는 이상 앞으로 구승훈과는 자주 마주치게 될 터였다.자꾸 피하는 게 오히려 더 부자연스러울 뿐이었다.엘리베이터 안은 고요했고 기계 소리만이 낮게 울릴 뿐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강하리는 내내 핸드폰을 들여다보며 조시욱과 메시지를 주고받고 있었고 구승훈은 묵묵히 그녀의 행동 하나하나를 바라보았다.핸드폰 화면 안, 조시욱과의 채팅창은 대화가 빼곡히 쌓여 있었다.그걸 보는 순간 구승훈은 입안부터 가슴까지 다 쓰려왔다.‘매일 같이 이렇게 대화를 주고받는 걸까?’그는 참다못해 먼저 입을 열었다.“속은 좀 괜찮아졌어?”강하리는 문자를 입력하던 손끝을 멈칫하더니 대꾸하지 않았다.구승훈은 짧게 웃음을 흘렸다.“조시욱이랑 있으면... 토할 일은 없나 보네?”그 말에 강하리는 피식 웃었다.“구승훈 씨, 원하는 대답이 뭔데요? 말해봐요. 제가 맞춰줄게요.”그는 입술을 꾹 다물었고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말해봤자 자존심만 더 상할 뿐이었다.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천아름이 먼저 휠체어를 밀고 나섰고 밖에서는 이미 조시욱이 기다리고 있었다.그 모습을 바라보던 준봉은 구승훈을 흘끗 보더니 조용히 한숨을 쉬었다.그러자 구승훈이 문득 입을 열었다.“점심 약속 취소해.”그리고는 아무 말 없이 조시욱의 차를 따라나섰다.차 안.조시욱은 조심스럽게 달콤한 디저트를 하나 꺼내 그녀에게 내밀었다.“이거 좀 먹어. 깁스 풀고 나서 맛있는 거 사줄게.”디저트를 바라보던 강하리는 마침내 입을 열었다.“시욱 선배, 난... 나 오늘 오후에 F 국으로 출장 가요. 갖고 싶은 거 있으면 말해요. 사 올게요.”그는 그녀의 말을 가로막듯 웃으며 말했다.강하리는 입술을 굳게 다물고 디저트도 받지 않았다. “제가 지금 무슨 얘기 하려는지 알겠죠.”조시욱은 웃
천아름은 눈을 깜빡이며 말없이 웃었고 그 반응만으로도 이미 모든 걸 인정한 셈이었다.하지만 곧 그녀는 덧붙였다.“먼저 말해두지만 나도 미리 알았던 건 아니야. 그 사진들은 우리가 올라온 직후에 구승훈이 보낸 거야.”강하리는 여전히 입을 다문 채 천아름을 바라봤다.그 시선에 살짝 기가 죽으려던 찰나 강하리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왜 미리 말 안 했어?”천아름은 입을 삐죽 내밀며 대답했다.“말했으면... 네가 그 사진들을 제대로 썼을까?”강하리는 천천히 창밖을 바라봤다.이 각도에서 에비뉴와 정안 타워를 잇는 공중 회랑을 보는 건 그녀도 처음이었다.다섯 개의 회랑은 같은 위치에 놓인 게 아니라 높낮이와 간격이 제각각이었고 그 불규칙한 배치가 위에서 보면 iw라는 문양을 이루고 있었다.이미 회랑에 심어졌던 꽃들은 시들어 있었지만 강하리는 그곳에 자란 꽃들이 전부 리시안셔스였다는 걸 알아볼 수 있었다.강하리는 시선을 거두며 말했다.“이젠 더 이상 구승훈과 어떤 연결고리도 남기고 싶지 않아.”서로의 감정이 남아 있는 듯 없는 듯 얽히고설킨 관계... 그녀는 그런 관계를 다시는 반복하고 싶지 않았다.말을 마친 그녀는 조용히 휠체어를 돌려 자료를 보러 이동했다.천아름은 커피잔을 들고 그녀 옆으로 와 책상에 걸터앉았고 창밖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솔직히 너희 둘 일에 내가 뭐라고 말하긴 어렵지만 이번 일은 구승훈 잘못이 맞고... 난 내 친구가 또 상처받는 꼴 못 보니까 절대 너한테 구승훈의 편을 들 생각 없어. 근데 말이야...”그녀는 말을 잠시 멈췄다.“이번처럼 구승훈이 뭔가 너한테 건넸다면... 넌 받을 건 받아. 그건 걔가 너한테 진짜로 빚진 거니까.”강하리는 작게 웃었다.“그 사람 도움 없이도 난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야. 왜 굳이 기대야 해?”이야기를 끝낸 그녀는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근데 이것 말고도 있지? 송지은이 회의에서 그렇게 된 것도... 구승훈이 일부러 남겨둔 거지? 내가 송지은을 이용해서 회사에서 위신을 올
에비뉴 그룹이 결국 강하리 손에 들어가자 송지은의 속엔 쌓여 있던 불만은 점점 더 커져만 갔다.그는 몇몇 임원들과 은밀히 손을 잡고 이번 회의 자리에서 강하리에게 본때를 보여주려 했다.강하리는 미소를 머금고 그를 바라봤다.“송 부장님, 진심으로 의견을 내고 싶으신 건가요? 아니면... 직권 남용하고 싶은 건가요?”그러자 송지은의 얼굴이 그 자리에서 굳어졌다.“강 대표님, 지금 무슨 뜻이죠?”강하리는 옆에 앉아 있던 비서실장에게 눈빛을 보냈다.비서실장은 곧바로 자료를 띄웠고 화면에 나타난 건 한 프라이빗 레스토랑에서 찍힌 사진이었다.송지은이 막 추천했다던 신인 여배우와 다정하게 식사하고 있는 장면이었다.그 여배우는 거의 그의 무릎 위에 앉을 듯 그에게 바짝 기대 있었다.송지은은 이마에 핏대가 서며 말했다.“업무 미팅하면서 밥 한 끼 먹는 게 무슨 문제죠?”강하리는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다음 사진이 화면에 떠오르자 회의실 분위기가 미묘하게 흔들렸다.사진 속 송지은은 그 신인 여배우의 허리를 감싸안고 호텔로 들어가고 있었다.“식사 후엔 호텔 코스로 이어지셨군요. 송 부장님?”강하리의 그 한마디에 누군가 큰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천아름은 다리를 꼬고 앉아 회의실 전면을 향해 무심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그 웃음소리가 송지은에게 더없이 굴욕적이었다.강하리는 더는 그를 쳐다보지도 않고 회의실 안의 다른 인물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그녀의 눈빛은 여전히 여유로웠지만 시선은 절대 가볍지 않았다.“또 누구였죠? 추천한 연예인들 리스트... 누구 누구있었죠”말이 떨어지자 회의실 안 사람들 사이로 묘한 침묵이 흘렀고 서로 눈치를 보던 그들은 이내 입을 닫았다.오늘 강하리는 확실히 준비하고 왔다.이번 판에서 잘 되면 본때 보여주는 걸로 끝이지만 잘못 건드리면 누군가는 직장을 잃게 될 게 뻔했다.방금 송지은이 어떤 꼴을 당했는지 모두가 생생히 봤으니 더 이상 나설 사람은 없었다.회의실은 고요했다.강하리는 시선을 천천히 회의실을 훑다
강하리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간 후에야 구승훈은 다시 엘리베이터에 들어섰다.하지만 엘리베이터에 들어선 그의 얼굴에는 더 이상 익살스러운 미소가 남아 있지 않았다.“여진 쪽은 어떻게 됐어?”그가 낮은 목소리로 묻자 준봉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출시일이 확정됐습니다. 에비뉴보다 하루 빠릅니다.”구승훈은 손에 불경스러운 듯 염주를 굴리며 냉소를 지었다.“승재와 천아름 쪽에 협조 잘하라고 전해.”“네.”준봉이 재빨리 대답했고 잠시 망설이다가 말을 이었다.“대표님, 사실 이 일은 사모님께도 일부 알려드리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구승훈은 입술을 굳게 다물고 있다가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조용히 말했다.“그럴 필요 없어.”준봉은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구승훈은 항상 그랬다. 강하리를 도와주면서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겉으로는 무심한 척했다.‘정말 답답해.’여진 주얼리는 지난 몇 년간 에비뉴와 계속해서 대립해 왔다.겉보기에는 구씨 가문이나 강하리와 아무 관련 없는 작은 회사처럼 보이지만 이런 작은 회사들이 대형 브랜드의 모조품을 내놓는 건 흔한 일이었다.하지만 여진 주얼리는 단순한 모조품에 만족하지 않았다.작년에 해외에서 에비뉴 주얼리의 표절 사건이 터졌을 때 그 배후에는 여진 주얼리가 있었다.그 사건으로 여진 주얼리는 큰 이득을 봤고 에비뉴는 큰 타격을 입었다.그 후 여진 주얼리는 더욱 탐욕스러워졌다.사람이란 달콤한 맛을 보면 더 많은 것을 원하게 마련이다.여진 주얼리는 에비뉴에게 항상 위험 요소였다.구승훈은 에비뉴를 강하리에게 넘긴 이상 그녀에게 어떤 위험도 남기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대표님, 상대방의 배후 세력도 만만치 않은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이렇게 대놓고 에비뉴를 도발하지는 않았을 것이다.구승훈은 발걸음을 잠시 멈추고 그는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래서 뭐? 지금 내가 잃을 게 뭐가 있다고?”준봉은 놀라며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고 한참 후에야 조심스럽게 말했다.“대표님,
강하리가 때린 따귀는 아무런 예고도 없이 날아들었고 망설임도 주저함도 없이 강렬했다.그러자 구승훈의 뺨에는 순식간에 선명한 손자국이 남았다.천아름은 그대로 얼어붙었지만 이내 강하리를 향해 천천히 엄지를 들어 올려 보였다. ‘잘했어. 이런 쓰레기 같은 놈은 맞아야 해. 제대로 한 대쯤은 맞아 봐야 자기가 뭘 잘못했는지도 알지. 이제라도 자기 잘못을 좀 깨달아야 해.’천아름은 속으로 휘파람을 불며 통쾌해했다.한편 구승훈은 손등으로 뺨을 한 번 스치고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천천히 강하리 앞에 무릎을 꿇었다.그의 눈엔 고통이 어리어 있었다.“몸이 안 좋은 거야? 아니면...” 그는 목울대를 두 번 삼킨 뒤에야 겨우 말을 이었다. “아니면... 나를 봐서... 토한 거야?”강하리는 여전히 눈이 빨갛게 충혈돼 있었지만 더는 이 남자 앞에서 눈물 흘리고 싶지 않아 애써 참고 있었다.“다신 제 앞에 나타나지 마요.” 강하리의 차디찬 목소리가 들려왔다.그런데 구승훈의 눈에는 오히려 그 말이 묘하게 따뜻하게 비쳤다.지금 이 순간 그는 마음속에... 이상하게도 만족감이 들었다.‘적어도 하리 마음속에 아직 내가 있긴 한 거잖아. 미움이든 혐오든... 감정이 있는 한 아직 끝은 아니겠지.’그는 수트 안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조심스레 강하리의 입가를 닦아주었고 긴 손가락이 그녀의 입가를 스치고는 가볍게 떠났다.구승훈은 고개를 숙인 채 쓸쓸하게 웃었다.“불쾌하게 해서 미안해. 하지만... 하리야, 미안하지만 다신 안 나타날 수는 없을 거 같아. 난 그건 못 해.”그 말과 함께 그는 그녀의 눈가에 맺힌 눈물을 조심스레 닦아내고 자리에서 일어났고 천천히 화장실을 나갔다.순간, 화장실 안은 적막 속에 잠겼다.강하리는 다시금 구역질했고 천아름은 재빨리 그녀의 등을 다독였다.밖에서 구승훈은 그녀의 헛구역질 소리를 들으며 가슴이 답답하게 조여왔다.얼마 후, 급히 달려온 준봉의 목소리에 그가 정신을 차렸다.“대표님, 무슨 일 있었습니까?”
두 채의 30층이 넘는 오피스 빌딩 사이에는 다섯 층마다 하나씩 연결하는 공중 회랑이 있었다.회랑 위에는 각종 카페와 음식점이 입점해 있었고 그 주변에는 다양한 꽃들이 화사하게 장식되어 있었다.강하리는 사실 정안 타워에 자주 오지는 않았다.심지어 구승훈과 결혼을 앞두고 있던 그 시절에도 여기에는 발걸음을 거의 하지 않았다.솔직히 말해서 그녀보다 임희주가 더 자주 왔을지도 몰랐다.천아름은 강하리의 휠체어를 밀며 엘리베이터 앞에 서 있었다.주위를 한번 둘러보더니 그녀는 입꼬리를 삐죽이며 말했다.“구승훈이야 뭐 인간쓰레기지만 그래도 통 큰 건 인정해야겠네. 이렇게 큰 회사를 그냥 덜컥 넘겨주다니. 에비뉴 주얼리잖아? 보석 업계에선 꽤 이름 있는 브랜드인데. 이렇게 보면... 그 인간은 그렇게 나쁘진 않았던 것 같기도 하네. 그렇지?”강하리는 눈을 내리깔고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불과 한 달 남짓한 그 짧은 시간 사이에 구승훈이라는 존재가 자신에게서 너무도 멀어진 것만 같았다.그녀는 천천히 숨을 들이쉬며 입을 열었다.“오늘은 꼭 광고 모델 확정해야 해. 원래 계약하려던 사람이 며칠 전에 갑자기 마음을 바꿨어. 이유 알아봤어?”그러자 천아름은 짜증 섞인 표정으로 눈을 굴렸다. “이유야 뻔하지. 뺏긴 거지 뭐. 거의 계약 직전까지 갔는데... 갑자기 말을 바꾸더라.”“누가 뺏어갔는데?”강하리가 조용히 물었다.천아름이 막 입을 열려는 찰나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며칠 만에 마주친 구승훈이었다. 깔끔한 수트를 입고 있었지만 여전히 전해지는 그 특유의 냉기가 몸 전체에 감돌고 있었다.강하리는 구승훈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시선을 피했다.구승훈 역시 이 순간에 마주치게 될 줄은 몰랐던지 평소 차가운 눈빛은 놀랍게도 순식간에 사라졌다.그의 시선은 곧장 강하리에게 꽂혀 그 자리에서 떨어지지 않았다.휠체어에 앉아 있는 그녀는 아직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지만 얼굴빛은 생각보다 좋았다.홍조가 돌아 있었고 얼굴도 약간 도톰해진 듯했다.그는 기뻐해
항구에서 보경시로 돌아오자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했다.구승훈은 차에서 내리자마자 곧장 누군가의 사무실로 들어섰다.“어떻게 됐어?”그 말에 노진우는 고개도 들지 않고 리모컨부터 눌렀다. 그러자 벽에 걸려있던 TV가 켜지더니 영상이 재생되기 시작했다.화면 속에는 온몸에 상처투성이인 여초천이 이성을 잃은 채 날뛰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방 안의 가구를 부수며 바닥에서 뒹굴기 시작하더니 그럼에도 정신이 돌아오지 않았는지 그는 벽에 머리를 쾅쾅 들이박았다.여초연의 이마는 이미 피범벅이 된 상태였다.그 모습을 본 구승훈은 미간을 짚으며 말했다.“됐어. 그만해.”노진우가 어이없다는 듯이 웃으면서 말했다.“이렇게 끝내시겠다고요? 대표님께서 발작 났을 땐 이것보다 훨씬 심했어요. 제가 만든 약은 효과가 얼마 못 가거든요. 급하게 만든 거니까요. 하지만 대표님은 온 하루 동안 고통스러워하셨잖아요.”“게다가 대표님은 이 약 때문에 하리 씨 곁을 떠나야 했잖아요. 하리 씨가 그렇게 크게 다친 것도 다 이 약 때문인데 이제 와서 마음이 약해졌다고요?”구승훈은 고개를 푹 숙이더니 담배를 꺼내 거기에 불을 붙였다.“마음이 약해진 게 아니야. 저런 꼴을 보고 있으니까 그냥... 그때 내 모습이 떠올라서...”“생각할 때마다 너무 후회돼. 하리를 혼자 예식장에 두고 떠났던 거 말이야. 내가 어떻게 잡았는데 또다시 놓쳐버리다니...”“그런데 또 여초연이 저러고 있는 걸 보니까 한편으론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어. 그때 내가 하리를 밀어내지 않았더라면 하리가 내 저런 모습을 봐야 했을 수도 있잖아.”노진우는 순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한참 후에야 그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사실 제 책임도 좀 있어요. 제 대학 동기인 데다가 능력도 괜찮아 보여서 추천했었는데 배경을 제대로 조사하지 않았으니까요.”구승훈은 씁쓸하게 웃었다.“임희주가 아니었어도 이렇게 되었을 거야. 여초연이 날 가만 내버려뒀을 리 없으니까.”노진우의 눈빛이 미묘하게 흔들렸다.“하리 씨 쪽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