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배? 얼굴에 또…….”대답 대신 다가온 주해찬이 강하리의 두 손을 꼭 잡았다.“하리야, 나는 너를 위해서 모든 걸 버릴 수 있어.”강하리의 두 눈을 지그시 바라보는 주해찬의 눈에는 전에 없던 뜨거운 것이 일렁이고 있었다.“너는?”못박힌 듯 굳어진 강하리.“선배 나는…….”저도 모르게 씁쓸한 미소가 피어올랐다.“그렇게는 못 할 것 같아요. 미안해요 선배.”겨우 되찾은 자유로운 생활.병상에 누워계신 엄마.엄마 생명줄인 치료비를 벌 수 있는 직장.강하리는 그 모든 걸 버릴 자신이 없었다.또한, 주해찬이 고작 자신 때문에 모든 걸 버리게 할 수가 없었다.감당 못할 대가를 치른 뒤 남는 거라곤 풀썩이는 먼지 뿐인 사랑, 그건 강하리가 바라는 사랑이 아니었다.“하지만 하리야, 시작하자고 한 건 너잖아.”주해찬의 다급한 목소리에 하리는 후회가 들기 시작했다.주제넘게 시작하는 게 아니었는데.“맞아요. 제가 성급했어요. 정말 미안해요, 선배.”첫 걸음에 쓰라린 고배를 머금은 두 사람이었다.“다른 방법은 없는 걸까? 꼭…… 헤어져야만 하는 거야?”주해찬이 강하리에게 묻는 건지, 자기 자신에게 묻는 건지 모를 말을 중얼거리듯 던졌다.강하리는 대답할 수가 없었다. 대신 고개를 푹 숙였다.주해찬의 눈에 고통스러운 빛이 스쳐지났다.하지만 이내 빙그레 웃었다.“미안해. 잘 해결하겠단 약속 못 지켰네.”강하리의 머리를 쓰다듬으려 들었던 손이 허공에 멈췄다가 내려졌다.“하지만 다른 약속은 꼭 지킬게. 설날에 같이 있어주겠다던 약속.”강하리가 뭐라 하려던 순간.“하리야, 기다려달라는 염치 없는 말은 하지 않을게. 다만.”주해찬의 목소리가 전에 없이 경건했다.“내가 가문의 허락을 받아냈을 때, 그때 네가 혼자라면 나한테 돌아와 줘.”“……선배.”강하리가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나는 그럴 가치가 없는 사람이에요.”“내가 있다면 있는 거야, 하리야.”미소를 지어보인 주해찬이 돌아서 멀어져갔다.강하리는 그 자리에 미동도 없
”분명 예전에는 행복했잖아. 우리 둘은.”한참동안 말이 없던 구승훈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행복했다고 한 적 없는데요.”“뭐라고?”“뭔가 제대로 착각하고 계신 모양인데, 나는 승훈 씨와 함꼐 있는 매 순간이 고통이었어요.”말을 마친 강하리가 그대로 아파트에 들어갔다.손 끝이 미세하게 떨렸다.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여전히 너무나도 손쉽게 자신의 마음속에 파문을 일으키는 구승훈이었다.주해찬과 헤어진 울적함도 압도적으로 밀어낼 만큼.그만큼 너무나도 쉽게 자신에게 고통을 줄 수 있는 사람이기도 했다.그 고통을 같이 있는 매 순간마다 받았었다.행복했었다고?무슨 얼어죽일 놈의 행복?새장에 같힌 카나리아의 행복?아니면 송유라와의 투샷을 직관하는 행복?‘그 따위 행복, 개나 줘버리라고.’저만치, 도망치듯 엘리베이터에 들어서는 강하리의 모습이 구승훈의 눈동자에 맺혔다.저도 모르게 서글픈 외마디 헛웃음을 뱉어냈다.‘고슴도치도 아니고, 어떻게 매번 이렇게 아프게 찔러대냐고.’지금껏 강하리를 쫄래쫄래 따라다닌 자신이 우스꽝스러웠다.한참을 어둠 속에 서 있던 구승훈이 차에 올랐다.조수석에 고이 눕혀놓은 리시안셔스 꽃다발이 하등 쓸모없게 보였다.그걸 집어든 구승훈은 유리창을 내려, 가차없이 밖에 던져버렸다.……섣달 그믐날.대양그룹 연성지사 주차장에 세워져 있는 평범하기 그지없는 차 한 대.너무나도 평범한 나머지, 며칠째 타는 이도 내리는 이도 없이 매일 주차장만 들락거리는 수상쩍은 차란 걸 발견한 사람이 없었다.거기에는 구승훈이 타고있었다.강하리가 주해찬과 헤어진 그 날 이후로 매일 퇴근하자마자 대양지사에 와서는, 회사에서 나오는 강하리를 따라 집까지 바래다주고 소리 없이 떠나가기를 반복해 온 구승훈이었다.왜 그러는지는 구승훈 스스로도 몰랐다.하지만 한 가지는 명확했다. 하루라고 강하리를 못 보면 불편해 견딜 수가 없단 것.이윽고 주차장에 나타난 강하리가 차에 타자, 기다렸단 듯 구승훈이 시동을 걸었다.능숙하게 일정 거리를 유지
병원으로 가는 도중, 주해찬이 전화를 걸어왔다.“하리야, 미안. 오늘 일이 바빠서 못 갈 것 같아.”“아니에요 선배. 즐거운 설날 되셔요.”급급히 대답한 강하리가 몇 마디 더 나누려는 주해찬의 전화를 그대로 끊어버리고는풀악셀을 밟았다.갑자기 속도를 올린 강하리의 차가 미친듯이 도로를 질주했다.‘젠장, 들킨 건가?’그 뒤를 따르던 구승훈이 속으로 욕을 뱉었다.걱정과는 달리, 구승훈의 차는 안중에도 없이 병원에 도착한 강하리는 부리나케 정서원의 병실로 달려갔다.검진이 그때까지 이어지고 있었다.“선생님, 우리 엄마 깨어났어요?”다급한 강하리의 질문에 의사가 감개무량한 눈빛을 보냈다.“아직 깨어나신 건 아니지만 가능성이 큽니다. 외부의 자극에 꽤 적극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어요. 이쪽으로 와서 어머님을 불러보세요. 아마 목소리에 반응하실 겁니다.”삽시에 강하리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다급히 정서원의 머리맡에 다가가 떨리는 목소리로 불렀다.“엄마, 들려요? 나 하리예요. 엄마…….”저도 모르게 왈칵 터져나온 눈물에 눈 앞이 흐려지기 시작했다.하지만 시야가 흐려지기 직전에 똑똑히 보았다.두 번째로 엄마를 불렀을 때, 엄마의 손가락이 까닥, 움직이는 걸.순간, 더는 걷잡을 길 없이 눈물이 펑펑 쏟아지기 시작했다.“엄마! 들려요? 나 하리예요 엄마! 얼른 깨어나요 네? 엄마아아-.”정서원의 손을 꼭 잡은 채, 강하리가 병상에 엎드려 엉엉 목놓아 울었다.그 모습이 막 뒤따라 들어온 구승훈의 눈동자에 오롯이 박혔다.엄마 손을 꼭 잡은 채, 어린애마냥 우는 강하리.회한과 죄책감이 구승훈의 마음속에서 휘몰아쳤다.3년동안 엄마 얘기를 입 밖에 비친 적이 없던 강하리였다.사전조사 때, 강하리 엄마가 사고로 병원에 누워있단 얘기를 들은 게 다였다.강하리가 그토록 돈에 집착했던 게 엄마를 살리기 위해서란 걸 이제서야 절실히 깨달았다.그동안 혼자 엄마 의료 비용을 부담하느라 얼마나 힘들었을까.그런 강하리를 약값으로 협박하고, 급기야는 거액의 위약
”딱 오늘만, 오늘만 안 놓을게. 이대로 좀 있자.”머리 위로 묵직한 남자의 음성이 내려왔다.결국 강하리는 그 품 안을 벗어나지 못했다.넓은 남자의 품에 고개가 기대지자, 걷잡을 수 없이 또 눈물이 쏟아지기 시작했다.그렇게 감정의 의미를 따질 수 없는 눈물이 남자의 옷깃을 적시기 시작했다.구승훈의 마음까지도 슴뻑 적시기 시작했다.문득 구승훈은, 강하리가 이렇게 여린 여자였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억센 모습으로 감싸고 있었을 뿐.“오늘까지만 우는 거다. 앞으로는 그럴 일 없을 거야.”구승훈은 두 팔을 벌려 강하리를 품 속에 감싸안았다.얼마 못 가 울음을 그친 강하리가 구승훈의 품 속을 빠져나갔다.의외로 순순히 강하리를 놔 주는 구승훈.“저녁 안 먹었지?”떡국 끓이려다가 그 길로 달려나왔으니 배가 고플 법도 했지만, 강하리는 지금 엄마 곁을 떠나고 싶지 않았다.“괜찮으니까 신경 쓰지 마요.”“밥 갖다 줄 테니까 여기서 먹어.”“아니에요. 좀 있다 집에 가서 먹으려고요.”구승훈은 슬슬 짜증이 밀려오기 시작했다.아니, 아까 품에 안겨있던 순하디 순한 양은 어디 가고 웬 거절봇이?밥 한 끼 먹이는 게 뭐가 이리 힘들어.내가 주는 밥에는 독이라도 탔다는 거야 뭐야.“네가 뭐라든 가져올 테니까 먹든 버리든 맘대로 해.”퉁명스런 한 마디를 남긴 구승훈이 저 쪽으로 걸어가 어데론가 전화하기 시작했다.덕분에 또 나오려던 강하리의 거절이 쏙 들어갔다.맘대로 하라지.한 번 고집을 피우면 하늘이 무너지지 않는 이상 꺾지 않는 게 저 사람이니까.강하리는 다시 병상 머리맡에 앉아 엄마 손을 꼭 잡아쥐었다.이윽고 통화를 마친 구승훈이 돌아왔다.“본가에 가 봐야 할 것 같아. 거기 끝나면 올게.”매년 구씨 가문 본가에서 열리는 그믐 연회는 구씨 집안 사람들이 꼭 참석해야 하는 식사 자리였다.이미 재촉 전화를 수십 통이나 받은 구승훈인지라 더이상 미룰 수가 없었다.“안 와도 돼요.”아까와는 완전 딴 사람이 된 것 같은 냉랭한 거절.구승
구승훈의 차가 도로 위를 질주했다.“구승훈! 대체 뭐 하려는 거야!”그 안에는 엄마 걱정에 화가 머리끝까지 솟구친 강하리가 있었고.행여 강하리가 뛰어내리기라도 할까 봐 차 문을 구승훈이 모두 잠가버린 상태였다. 심지어 창문도 락을 걸어버렸다.차가 달리는 내내 구승훈의 핸드폰은 쉴 새 없이 울려댔다.구씨 가문 사람들이 걸어온 전화, 그리고 송유라가 걸어온 전화.구승훈은 하나도 받지 않았다. 급기야는 무음모드로 바꿔버렸다.강하리도 잠잠해졌다.시내를 벗어난 구승훈의 차가 어느 한적한 산길을 달리기 시작했다.척박해진 주위 풍경에 강하리의 관자놀이가 꿈틀했다.입을 떼는 순간.끼익-!차가 멈춰섰고 차 문이 열렸다.“내려.”덤덤한 구승훈의 목소리.“이건 도대체…….”야밤에 산꼭대기라니. 것도 구승훈과 단 둘이.이 남자가 자신을 해치지 않는단 걸 몰랐더라면 경찰에 신고하기 딱 좋은 시간과 장소였다.“그믐밤 같이 보내는 게 소원 아니었어?”남자의 눈 속엔 알지 못할 감정이 언뜰거렸다.‘같이 보내준다 뿐이겠어. 이런 것도 해줄 수가 있다고.’펑-!때마침 눈부신 빛 한 줄기가 허공을 가르며 솟아오르더니, 거대한 민들레 송이 같은 불꽃이 강하리의 눈 앞에 만개했다.쏟아져내리는 오색찬란한 빛이 멍해진 강하리의 얼굴을 채색으로 수놓았다.곧 꼬리에 꼬리를 물고 하늘로 솟아로른 빛줄기들이 앞다투어 피어나기 시작했다.퍼엉! 펑! 퍼펑!불꽃놀이를 너무나도 좋아하던 강하리였다.순간이지만 눈부신 아름다움이 너무 좋았었다.넋을 놓은 채, 밤하늘을 바라보았다.그런 강하리를 구승훈이 바라보고 있었다.강하리의 눈동자 속에 피어나는 빛이 사진 속 그것과 너무 닮았다.저도 모르게 손가락을 뻗어 강하리의 눈가를 훔쳤다.흠칫 놀라며 구승훈을 돌아보는 강하리.“마음에 들어?”구승훈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피어났다.“……플러팅 수법이 꽤 다양하시네요.”“…….”구승훈의 입가에 맺혔던 미소가 그대로 쩌적 굳었다.“야 강하리! 나한테서 이런 대우는
몸부림치는 강하리를 구승훈이 옴짝달싹 몾 하게 붙들었다.콰직!비릿한 피 냄새가 둘의 입술 사이를 꽉 메웠다.하지만 구승훈은 아픔 따윈 잊은 듯, 강하리의 입술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그렇게 몇 분 동안이나 지난 뒤.드디어 구승훈의 입술이 강하리에게서 떨어졌다. 혀를 내밀어 피투성이가 된 입술을 슥 핥는 모습이 그토록 뇌쇄적이었다.다음 순간 그의 뺨에 강하리의 손바닥이 날아들었다.“이, 이 양아치가 끝끝내…….”치미는 화를 주체하지 못해 말을 더듬는 강하리.“주해찬도 못 해주는 것도 해 줬는데, 주해찬이 받은 걸 나도 받는 게 뭐가 문제야.”구승훈의 동기는 예상외로 간단했다.며칠 전, 주해찬이 강하리와 둘이 있을 때 했을 거라고 예상했던 그 키스.생각날 때마다 질투가 나 구승훈을 미치게 했던 그 상상 속 입맞춤.그걸 강하리에게서 오롯이 받아내고 싶었다.“받긴 뭘 받았다는 거예욧!”강하리가 구승훈의 다리를 콱 걷어찼다.“안 했어?”“뭐를요!”잔뜩 화가 난 얼굴의 강하리, 하지만 그 속에 뜨끔한 기색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순도 백 프로 ‘이 새끼가 돌았나’란 표정.“안 했으면 됐어.”다리가 아픈 것도 잊은 듯 구승훈이 씩 웃는다.그런 구승훈을 째릿 노려본 강하리가 산 아래로 걸어 내려가기 시작했다.“어디 가!”“병원!”강하리의 몸이 붕 떴다. 다음 순간은 구승훈의 차 안이었다.죽일 듯이 구승훈을 노려보는 강하리의 눈빛. 하지만 상대는 왠지 너무나도 기분이 좋아보였다.당장이라도 콧노래를 흥얼거릴 것만 같은 얼굴을 하고서 말이다.병원에 도착했을 때는 자정을 훌쩍 넘긴 시간이었다.차가 멈춰서자마자 강하리가 도망치듯 차에서 내렸다.“강하리, 불침번 서자.”“꺼지라고 쫌!”병실 앞에서 썩 즐겁지 않은 짧은 대화가 오갔고, 강하리가 병실 문을 열고 들어섰다.그런 강하리의 태도는 전혀 개의치 않은 듯 구승훈이 느긋하게 말을 이어갔다.“저쪽 탕비실에 전자레인지도 있던데 도시락은 먹기 전에 좀 데우고. 추우니까 주해찬이
꽤 좋았던 구승훈의 기분이 순식간에 나락으로 떨어졌다.“뭐라고?”강하리가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같은 말 두 번씩 시킬 거예요?”그리고는 구승훈의 손을 탁 쳐냈다.이 두 사람 때문에 기분 잡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는데.너무 익숙히 봐 와서 무던하다고 생각했는데.자신에게서 떨어지자마자 송유라와 함꼐 있는 구승훈을 보니 토가 나올 것 같았다.빠른 걸음으로 병원 입구를 향해 발걸음을 옮기는 강하리.따라온 구승훈이 입을 열었다.“송유라가 다짜고짜 끌어안은 거야.”강하리의 발걸음은 멈추지 않았다.“왜 해명하세요? 끌어안은 게 뭐 대수라고. 둘이 입을 맞춰도 나랑은 아무 상관 없는 일이잖아요. 대신 내 앞에서 그러지만은 말아줘요. 토 나오니까.”삽시에 두 사람 사이에 철벽을 치는 강하리의 말투.“정말 대수롭지 않은 거야?”“내가 왜요?”“강 부장님, 죄송해요. 오빠가 너무 보고싶어서 그만……. 다 제 탓이에요. 오빠한테 그러지 마요.”송유라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강하리는 속이 더 뒤집히는 것만 같았다. 재빨리 병원 문을 열었다.“강하리!”노기에 찬 구승훈의 부름소리.“봤을 거 아니야. 내가 밀어내는 거.”그냥 핑곗거리다. 송유라와 확실이 선을 긋는 게 아닌.안 그랬다면 송유라가 안으려 할 때 열 번 피하고도 남았을 거다.휙 돌아선 강하리가 송유라에게 시선을 던졌다.“되도 않는 그 클리셰 순진녀 연기는 넣어두시고. 구승훈 넘겨줬으니까 잘해 봐. 화이팅.”병원 안으로 강하리가 사라졌고, 구승훈의 얼굴은 점점 더 어두워졌다.“미안해요 오빠, 이럴 줄은 몰랐는데.”구승훈의 차가운 눈길이 어쩔바를 몰라하는 송유라의 표정에 멈췄다.“뭘 몰랐다는 거지? 의도한 대로 아주 잘 된 것 같은데.” “0아니에요 오빠! 나는 정말…… 오빠가 너무 보고싶었을 뿐이에요.”“앞으로 나 찾지 마. 부탁할 거 있으면 안현우한테 말하고. 우리 둘의 어렸을 때 추억이 네 치트키가 아니란 걸 명심해.”송유라의 얼굴이 창백해졌다.성형수술 뒤 이마에 남
눈물이 송유라의 볼을 타고 주르륵 흘러내렸다.차에 타는 구승훈의 유리창을 애처롭게 두드렸다.하지만 그녀의 울음소리는 소음차단 성능이 좋은 유리창에 막혔고.구승훈은 송유라를 보는 척도 않은 채 담배 한 대를 꺼내 물었다.골치가 아파왔다. 방금전 강하리의 얼굴이 자꾸 떠오르면서 가슴이 답답해났다.여태껏 따라다니면서 수발을 들어준 게 무색해지는 순간이었다.송유라한에 화이팅을 외치다니.구승훈은 강하리를 어떻게 대했으면 좋을지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차 밖에서 나지막한 울음소리가 계속 들려오고 있었다.이대로 확 가 버리고 싶은 생각이 머리끝까지 치솟았지만, 구승훈은 창문을 내렸다.“타. 데려다줄게.”송유라를 내버려뒀다가 강하리한테 무슨 패악질을 할지 걱정이 되어서였다.적어도 자신이 보는 앞에 있는 편이 나았다.구승훈의 목소리에 울음을 뚝 그친 강유라.“오빠, 나 용서해주는 거예요?”차 보닛을 에돌아 차에 타려던 송유라가 그 자리에 굳어졌다.조수석 문이 잠겨져 있었던 것.“뒤에 타.”송유라의 얼굴이 무너져내리기 시작했다.항상 그녀 차지였던 구승훈의 옆자리.그걸 지금 구승훈이 빼앗아갔다.“조수석은 내 자린데…….”얼빠진 듯 되뇌이는 송유라의 말에 구승훈의 미간이 짜증으로 구겨졌다.“안 탈 거면 알아서 돌아가든가.”이를 꽉 악문 채, 송유라가 뒷좌석에 탔다.……병실로 올라가는 길에 강하리는 손연지의 전화를 받았다.엄마가 깨어날 것 같다는 소식에 자기 일처럼 기뻐하며, 지금 당장 연성으로 올라오겠다는 걸 겨우 말렸다.손연지와 한참 수다를 떨고나자 그제야 강하리는 기분이 좀 풀리는 느낌이었다.“아 맞다, 요즘 구승재가 계속 나한테 고등학교 때 네가 좋아한 애가 누군지 물어보고 있어. 구승훈이 시킨 거 아냐?”“글쎼.”“나 진짜 입이 근질거려 죽을 뻔했다니까 글쎄? 구승훈에게 확 알려줘 버리는 건 어때? 그 애가 지란 걸 알면 무슨 표정을 지을지 궁금해 미치겠어.”강하리가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절대 그러지 마. 그러잖아도
주해찬의 표정이 확 바뀌며 핸들을 꺾었지만 그래도 피할 수 없었다.그는 무의식적으로 강하리를 보호했고 강하리의 시선은 다가오는 차에 고정된 듯 움직이지 않았다.구승훈의 차다.차 번호판도 똑같았다.구승훈이 B시에 올 때마다 몰던 차였다.순식간에 강하리의 얼굴은 창백해지고 곧 눈앞이 핑글 돌았다....강하리가 다시 눈을 떴을 때 침대 옆에 앉아 있는 구승훈이 보였다.“좀 어때? 어디 불편한 데는 없어?”강하리는 멍한 표정으로 옆에 앉은 남자를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구승훈, 당신이야?”구승훈의 시선이 무겁게 가라앉았고 의심을 받은 그의 눈동자가 싸늘하게 식었다.“하리야, 너 정말 나라고 의심하는 거야?”입술을 달싹이며 그를 바라보는 강하리는 알 수 없는 감정이 밀려왔다.의심하고 싶지 않았지만 그 차는 분명 구승훈의 것이었다.하지만 구승훈이 아니라고 말할 때 오히려 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서늘한 구승훈의 시선을 피하며 나지막이 물었다.“선배는?”구승훈이 피식 웃었다.“네가 신경 쓰는 건 주해찬밖에 없지?”강하리는 잠시 침묵했다.“날 구해준 사람이야.”그녀의 손목을 잡고 있던 구승훈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내가 널 구해준 적은 없어? 하리야, 너 정말 사람 마음 아프게 한다.”강하리는 그의 손에서 손을 빼냈다.지금은 그와 이런 얘기를 하고 싶지 않았다.주해찬이 그녀의 몸을 감쌌기에 그는 꽤 심하게 다쳤을 거다.처음부터 주해찬에겐 미안한 것투성이였다.오랜 시간 동안 그의 헌신적인 모습을 보면서도 그에게 해줄 대답이 없었다.게다가 구승훈의 차로 교통사고까지 났으니 마음속에는 죄책감이 커져만 갔다.“선배는 어떻게 됐어?”여전히 똑같은 말에 구승훈은 아무 말 없이 그녀를 바라봤다.주해찬의 상태는 좋지 않았다.목숨은 건졌지만 그가 깨어날 수 있을지는 여전히 미지수였다.지금 강하리의 태도로 볼 때, 주해찬이 자신을 구하려다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그녀가 어떻게 행동할지 정말 알 수 없
주해찬의 표정이 잠시 번뜩이다가 미소를 지으며 정양철에게로 향했다.“아저씨, 오랜만이네요.”정양철의 얼굴에 서늘한 기운이 감돌았다가 이내 평소 모습으로 돌아왔다.“해찬아, 여긴 무슨 일이야?”주해찬이 미소를 지었다.“친구 데려다주고 나오는데 여기서 아저씨랑 만났네요.”정양철은 고개를 끄덕이며 더 말을 이어가지 않았다.“그럼 가서 일 봐. 난 아직 할 일이 남아서.”“알았어요.”주해찬은 그 말을 하고 돌아서서 문을 나섰다.정양철은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전화기를 꽉 쥐었다.한편 주해찬은 안에서 나오기 바쁘게 훅 안도하듯 한숨을 내쉬었다.그는 정신을 차리지 못한 채 한참 동안 멍한 표정으로 길가에 서 있었다.방금 정양철이 한 말은 무슨 뜻이었을까, 강하리나 구승훈과 무슨 일이 있는 걸까?손을 댔다고 했는데, 무슨 짓을 한 걸까.정주현에게 선을 긋던 강아리의 모습과 연관 짓자 주해찬은 문득 무언가를 떠올렸다.그는 다소 창백한 얼굴로 휴대전화를 바라보며 한참을 망설이다가 강하리에게 전화를 걸었다.강하리가 샤워하러 가려는데 갑자기 전화벨이 울렸다.“선배?”하지만 강하리가 전화를 받을 때 주해찬은 갑자기 마음을 바꿨다.적어도 제대로 알아보고 강하리에게 알려줘야지 무턱대고 말하는 건 무책임한 행동이었다.“아니야, 그냥 내일 나랑 같이 팔찌 가지러 가자고.”“선배, 나 혼자 갈 수 있어요.” 강하리가 여전히 거절하려는데 주해찬이 말을 막았다.“그렇게 하는 걸로 하고 오늘 밤엔 일찍 쉬어.”주해찬은 그렇게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다음 날 이른 아침, 준봉은 구승훈의 전화를 받고 강하리에게 아침을 가져다주었다.그런데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려는 순간, 강하리 방 앞에 두 사람이 수상하게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두 사람은 그를 보자마자 뒤돌아 복도 쪽으로 달려갔고 준봉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곧장 그들을 쫓아갔다.일직 강하리가 묵고 있는 호텔 아래층에 도착한 주해찬은 표정이 좋지 않았다.어젯밤 정양철의 그 말 때문에 거의 밤을 새
준봉이 가볍게 목을 가다듬었다.“대표님께서 마실 것 가져다드리래요.”말을 마친 준봉은 강하리에게 밀크티 한 잔을 건넸고 강하리는 눈앞에 놓인 밀크티를 보고 화를 내며 다시 한번 문을 닫았다.주해찬은 방에 앉아서 쓴웃음을 지었다.“내가 안 가면 조금 있다가 또 올걸.”주해찬은 말을 마치며 자리에서 일어나 문밖으로 나갔다.“오늘 밤 모임이 있어서 이만 가볼게.”강하리는 입술을 달싹였다.“죄송해요, 선배.”구승훈이 이러면 주해찬뿐만 아니라 강하리도 난처했다.주해찬은 손을 들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려다가 문득 어젯밤 무의식적으로 뒤로 물러났던 모습이 떠올라 결국 포기했다.준봉은 강하리의 방에서 나오는 주해찬을 바라보며 조용히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그렇지 않았다면 다음에 문을 두드리러 갈 때 또 어떤 핑계를 대야 할지 몰랐을 것이다.주해찬이 나오며 준봉을 보고 웃었다.“구 대표님한테 그럴 필요 없다고 전해요. 하리가 원하면 아무리 문을 두드려도 소용없고 하리가 원하지 않는다면 나도 절대 함부로 하지 않는다고요.”준봉은 주해찬을 바라보기만 했다.“안녕히 가세요, 주해찬 씨.”주해찬은 강하리를 힐끗 쳐다보며 작별 인사를 속삭인 뒤 곧장 돌아섰다.주해찬이 떠난 뒤에야 준봉은 다시 구승훈에게 전화를 걸었고 구승훈은 짧게 대답한 뒤 전화를 끊었다.차는 경찰서를 향해 빠르게 달렸고 통화를 마친 그는 앞에서 운전하고 있는 구승재를 바라보았다.“목란정원 쪽 상황은 어때요?”“우리 쪽 사람들이 들어갔는데 안에 연정이가 없었대. 그리고 사람들이 들어갈 때 꼭 큰어머니가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순조롭게 들어갔대.”시선을 내려 염주를 만지작거리던 구승훈이 차갑게 웃었다.“역시.”구승재가 얼굴을 찡그렸다.“역시 뭐?”구승훈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눈빛만 더욱 짙어질 뿐이었다.어젯밤에 그녀는 일부러 그를 그곳으로 유인한 거다.연정이 사건은 여초연이 한 짓이다.염주를 만지작거리던 구승훈의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뒤틀렸다.하지만 잠시 후 그는
정주현은 다소 시무룩한 표정으로 뒤를 돌아보았다.강하리가 뭔가 숨기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본인이 말하지 않으니 더 물어볼 수도 없어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방금 강하리 씨 데려다줬어. 웬일로 아들이 보고 싶어서 그래?”연미숙이 잠시 멈칫했다.“이 자식, 누가 보면 내가 평소에 너한테 관심 없는 줄 알겠다.”정주현은 연미숙 앞에서 늘 장난기 가득한 모습을 보였다. “그래그래, 관심 많은 거 알겠으니까 무슨 일인데 그래?”연미숙은 잠시 침묵했다.“강하리한테 같이 밥 먹자고 해.”차라리 말하지 않으면 좋았을걸. 그 말을 꺼내니 정주현은 더 우울해졌다.“엄마, 강하리 씨 바빠. 그렇게 할 일이 없으면 친구들이나 만나지 강하리는 왜?”연미숙이 웃었다.“우리 아들이 입이 닳도록 칭찬하는 여자를 내가 좀 만나면 안 돼?”정주현이 입을 삐죽거렸다.“영감탱이가 엄마처럼 정신 차렸으면 강하리가 며느리 됐을 텐데.”연미숙의 얼굴에 머금었던 미소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하루 종일 밖에 돌아다니지 말고 빨리 돌아와.”그렇게 말하고 전화를 끊은 후, 그녀의 눈에는 악의에 찬 눈빛만이 번쩍였다.강하리는 정주현을 배웅하고 창가에 서서 생각에 잠겼다.주해찬은 그녀의 뒤에 서서 물었다. “일부러 주현 씨랑 거리를 두는 거야? 무슨 문제라도 있어?”정신을 차린 강하리는 그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이렇게 말했다.“선배, 난 신경 쓰지 말고 가서 일 봐요.”주해찬은 그녀가 말하지 않으려는 것을 보며 다소 무력하고 씁쓸한 마음이 들었다.만약 이 순간 그녀의 곁에 있던 사람이 구승훈이었다면 그녀는 바로 말하지 않았을까?아니면 구승훈은 굳이 묻지 않아도 그녀가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알고 있었을까?질투가 안 난다면 거짓말이다. 분명 그가 구승훈보다 먼저 강하리를 좋아했는데.“하리야, 가능하면 나도 네가 기댈 곳이 되어주고 싶어.”강하리의 표정은 굳어졌고 말투에는 분명하게 선을 긋고 거리를 두는 게 느껴졌다.“선배, 정말 고맙지만 지금은 그럴 기분이
여초연이 얼마나 치밀하게 움직이는 사람인지 구승훈이 제일 잘 안다.정말 여초연이 연정이를 데려갔다면 그렇게 쉽게 꼬리를 드러내지 않았을 테고 초조했던 그는 계속해서 그녀가 먼저 빈틈을 보이길 기다릴 수가 없었다.그래서 소란을 일으킨 뒤 그녀의 움직임을 주시할 생각이었다.그녀의 수단으로 봤을 때 누군가 자기를 지켜보는 걸 모를 리 없었다.그런데도 오늘 대놓고 이곳으로 왔다는 건 의심을 잠재우기 위해 그를 유인한 걸까?그렇다면 연정이에게 일어난 일이 그녀와 관련이 있다는 것이 더 분명해지지 않나?어쨌든 구승훈은 연정이를 먼저 생각해야 했다.연정이가 정말 그녀의 손에 있고 막다른 길에 이른 그녀가 무슨 짓을 할까 봐 두려웠다.그래서 조심할 수밖에 없다.그 시각 목란정원에서 여초연은 복도에서 누군가와 휴대폰을 들고 영상통화를 하고 있었는데 상대는 여자아이를 안고 있었다. 이쪽의 깊은 밤과 달리 저쪽은 태양이 밝게 빛나고 있었다.강하리는 다음 날 주해찬과 함께 B시로 갔다.비행기에서 막 내린 두 사람은 입국 게이트에서 정주현이 신나게 손을 흔드는 모습을 보았다.“강하리 씨, 드디어 왔네요!”강하리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며 주해찬을 흘깃 쳐다보았다.주해찬은 무기력하게 어깨를 으쓱했다.“어쩔 수 없었어. 계속 물어보니까 시간을 알려줄 수밖에.”정주현은 곧바로 불만을 터뜨렸다. “강하리 씨, B시로 오면 알려준다면서 이러는 건 아니죠!”강하리는 힘없이 웃었다.“가요.”그러던 중 정주현은 강하리와 함께 일하고 싶다는 걸 다시 한번 언급했지만 강하리는 여전히 부정적인 태도를 유지했다.정주현은 인상을 찌푸리며 강하리를 바라보았다. “하리 씨, 그래도 우리 같이 일한 적이 있는데 이러면 대양그룹에 불만이 있는 것 같잖아요.”강하리는 잠시 침묵했다.“정 회장님이 절 찾아오라고 시켰어요?”정주현은 부인하지 않았다.“영감탱이한테 불만 있는 건 아니죠? 지난번에 구정우 도와줘서 그래요?”강하리는 침묵하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정주현은 그
구승훈의 주변에 우중충한 공기가 감돌았고 차가운 시선은 올곧게 주해찬에게 향했다.가까이 다가온 주해찬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그에게 주먹을 날렸다.구승훈은 조금도 피할 생각 없이 그대로 얻어맞은 뒤 이윽고 주해찬의 손목에 주먹을 내리쳤다.그 손이 조금 전 강하리의 입술에 닿았다. 구승훈은 그의 뼈를 부러뜨릴 기세로 달려들었다.주해찬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고 눈에서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구승훈, 하리가 얼마나 고통스러워했는지 알아? 병원에서 그 며칠을 어떻게 보냈는지 알아? 네가 뭔데 계속해서 걔한테 상처를 줘, 네가 뭐라고 걔한테 그런 식으로 강요해!”강하리가 병원에서 지냈던 걸 언급하자 구승훈의 표정이 굳어졌다.당연히 그는 그녀가 그 시간을 어떻게 보냈는지 알고 있었다.매일 의사가 진정제를 놓아야 겨우 잠을 잘 수 있었다.심한 우울증이었다.노민준이 그날 했던 말을 그는 여태 기억하고 있었다.“이러면 언제든 극단적인 선택을 할 위험이 있어. 이젠 살아갈 의욕을 완전히 잃었어.”구승훈의 몸이 경직되었지만 꿋꿋하게 받아쳤다.“주해찬 당신이 뭔데 나랑 하리 사이에 끼어들어?”주해찬은 입가에 무심한 미소를 지었다.“내가 아무리 그냥 선배라도 걔가 너한테 괴롭힘당하는 걸 그냥 두고 볼 수는 없어.”“정말 그냥 선배가 되고 싶은 거야? 주해찬, 네 개수작을 모를 것 같아? 이 기회를 이용하려는 거잖아.”잠시 멈칫하던 주해찬은 더 이상 자신의 마음을 숨기지 않았다.“내가 아무리 이용하는 거라고 해도 억지로 강요하는 너보다 나아. 구승훈, 사람 존중하는 방법부터 배우고 다시 하리 앞에 나타나. 그전까지 넌 자격 없으니까.”주해찬은 말을 마치고 곧장 차 쪽으로 몸을 돌렸다.비를 맞으며 서 있던 구승훈은 한참이 지나서 옅은 웃음을 터뜨렸다.자격이 없다고...맞는 말이긴 한데 그럼 주해찬은 자격이 있다는 말인가?그는 입가를 가볍게 문지르며 위쪽을 올려다보았다.강하리는 주방에 약을 먹으러 가다가 비속에 서 있는 구승훈을 보게 될 줄은 몰랐
가서 팔찌를 가지고 백아영의 생일을 보낸 후 출국할 생각이었고 그 외 일은 지금 당장 처리할 기분이 아니었다.구승훈이 무슨 말을 하려는데 손연지의 집 밑에 우산을 쓴 남자가 서 있는 것을 보았다.주해찬이었다.비 오는 밤, 가로등에 반사된 남자의 모습은 약간 서늘한 기운을 풍겼다.구승훈이 피식 웃었다.“무척 적극적이네.”강하리는 입술을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강렬한 불빛이 주해찬에게 비추자 뒤를 돌아본 그가 구승훈의 차에서 내려 걸어오는 강하리를 발견했다.구승훈은 보지 못한 듯 강하리를 향해 걸어가는 그의 입꼬리가 살며시 올라갔다.검은 우산이 머리 위로 드리워지며 주해찬의 낮은 톤 목소리가 흘러나왔다.“걱정돼서 보러 왔어.”강하리는 입술을 달싹이며 웃었다.“난 괜찮아요. 걱정시켜서 미안해요.”그때 주해찬이 차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하리 데려다주셔서 감사합니다, 구 대표님.”구승훈은 고개를 숙이고 담배에 불을 붙인 뒤 가벼운 웃음을 내뱉으며 주해찬을 향해 시선을 들어 올렸다.“주해찬 씨가 뭐라고 저한테 감사 인사를 하는 거죠?”주해찬의 얼굴에는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하리의 선배로서요.”그는 말을 마치고 고개를 돌려 강하리를 바라보았다.“시간도 늦었는데 일찍 집에 가서 쉬어.”강하리가 고개를 끄덕이자 주해찬이 우산을 들고 건물 쪽으로 따라나섰다.구승훈은 두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얼굴에 서리가 낀 것 같은 차가운 표정을 지었다.헤드라이트가 두 사람의 실루엣을 더욱 돋보이게 했다.비를 맞으며 우산 아래서 두 사람의 어깨는 단단히 맞닿은 것 같았다.건물 입구에 다다랐을 때야 강하리가 나지막이 말했다.“선배, 나 혼자 올라가면 돼요.”주해찬의 시선이 강하리의 입술에 닿았다.입술이 어딘가 부딪힌 것처럼 살이 갈라져 있었다.갈 때는 괜찮았는데 돌아올 땐 입술이 찢어진 채로 왔다.구승훈에 대한 강하리의 쌀쌀맞은 태도는 다 지켜보고 있었다.“구승훈이 강요했어?”주해찬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강하리는 몸이 굳어지더
한편 여초연은 거실 소파에 앉아있고 도우미가 옆에서 옷을 걸쳐주었다.“사모님, 시간이 늦었는데 일찍 쉬세요.”여초연은 밖의 하늘을 바라보다가 옷을 두른 채 일어나 문으로 걸어갔다.“승훈이는 요즘 어떻게 지내요?”도우미는 얼굴을 찡그렸다.“잘 지내지 못해요. 강하리라는 여자가 우리 집안을 어떻게 만들었는지 보세요. 어르신까지 들여보냈는데 큰 도련님은 대체 무슨 생각인지. 여자한테 홀딱 넘어간 게 틀림없어요.”여초연은 밖에서 내리는 비를 바라보면서 조금의 표정 변화도 없었다.“앞으로 그런 말 하지 마요. 승훈이가 좋아하는 사람이고 내 며느리니까.”도우미가 입술을 달싹였다.“그래도 구씨 집안이 그 여자 때문에 이 모양이 됐잖아요!”SH그룹이 합병되면서 구씨 집안은 뿌리 없는 나무처럼 흔들리고 있었다.도우미들의 일자리도 위협받는 상황에서 정작 여초연은 조금의 초조함도 보이지 않았다.“게다가 큰 도련님도 그 여자 때문에 사모님께 화를 냈잖아요.”여초연은 부드럽게 웃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돌아서서 우산을 들고 밖으로 걸어 나갔다.“따라오지 마요.”그녀가 속삭이자 도우미는 즉시 발걸음을 멈췄다.비 내리는 어느 날 밤, 검은색 승용차가 구씨 집안 저택에서 시내 반대편 목란정원을 향해 유유히 달렸다.목란정원은 여초연이 소유한 정원인데 그녀는 때때로 며칠씩 이곳에 오곤 했다.구승재는 그녀를 따라 목란정원 입구까지 갔다가 차를 멈췄다.그는 목란정원의 출입구를 바라보며 살짝 한숨을 내쉬었다.그동안 형의 지시로 구씨 저택에 머물면서 집안사람들을 돌보고 있었지만 사실은 여초연을 감시하는 것이었다.여초연의 차가 목란정원에 들어가는 것을 본 구승재는 휴대폰을 꺼내 구승훈에게 전화를 걸었다.고요한 밤, 구승훈의 휴대폰이 갑자기 울렸다.강하리의 몸이 굳어졌고 구승훈의 입술은 그녀의 귀에 닿은 상태였다.“전화 좀 받고 올게.”구승훈이 떠난 후 강하리 휴대폰도 울렸다.주해찬의 전화였다.“하리야, 비행기표 샀으니까 내일 데리러 갈게.”“그래요.
구승훈은 상처받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다가 가볍게 웃었다.“하리야, 넌 늘 그렇듯 매정하네.”강하리가 뒤돌아 휴대폰으로 택시를 부르려는데 구승훈이 그녀의 휴대폰을 움켜잡았다.“딱 하룻밤만. 너 안 건드릴게, 응?”강하리의 몸이 굳어졌고 구승훈은 그녀의 손을 더욱 꽉 잡았다.“하리야, 내 소원 들어주는 거라고 생각해. 네가 이 집에서 아이와 함께 지내는 모습을 몇 번이나 상상했는지 몰라. 여기가 우리 집이야.”강하리의 코끝이 시큰거렸지만 그래도 결국 구승훈의 손을 뿌리쳤다.너무도 분명한 그녀의 거절에 구승훈은 답답한 가슴에 고통이 밀려왔고 쓴웃음을 짓던 그는 더 그녀에게 강요하지 않았다.“샤워하고 나오면 다시 데려다줄게.”말을 마친 그는 돌아서서 화장실로 들어갔다.구승훈이 샤워를 마치고 나오는데 강하리는 통화 중이었다.발걸음이 멈칫한 그는 통화 상대가 주해찬이란 것을 알아차렸다.“선배, 전 괜찮아요.”“알았어, 항공편 예약해. 나도 같이 갈게.”강하리가 전화를 끊는데 구승훈이 갑자기 다가와 그녀를 껴안고 고개를 숙여 입 맞추었다.“구승훈!” 강하리는 그의 키스에 깜짝 놀라 그를 밀어내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구승훈은 점점 더 꽉 그녀를 붙잡았다.그는 강하리의 턱을 잡고 깊숙이 파고들며 조금의 부드러움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격렬하게, 마치 화풀이나 비난하듯 키스를 퍼부었다.강하리는 벽에 단단히 밀려서 몸부림을 치는 것조차 힘에 부쳤다.그녀가 다리를 들어 그의 아랫도리를 가격하려는데 구승훈이 먼저 그녀의 다리를 붙들었다.강하리가 입술을 꽉 깨물었지만 구승훈의 키스는 점점 더 격렬해졌다.힘의 격차로 인해 그녀는 반격할 방법이 없었다.강하리는 화가 나서 얼굴마저 하얗게 질렸고 구승훈은 실컷 헤집어놓은 뒤에야 그녀를 놓아주었다.강하리가 그의 뺨을 때렸고 이내 구승훈의 얼굴엔 손자국이 생겨났다.그러나 그의 손가락은 키스로 인해 부어오른 그녀의 입술을 부드럽게 쓸어내렸다.“하리야, 나 생각이 바뀌었어.”강하리가 멈칫했다.“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