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혼 후 나는 재벌이 되었다의 모든 챕터: 챕터 281 - 챕터 290

2631 챕터

제281화 형수님이라고 불러

소은정의 방, 티끌 하나 없이 깔끔한 방에서 눈을 뜬 소은정이 상황 파악을 끝내기도 전에 소은해의 오버스러운 목소리가 귀를 찔렀다.“은정아!”그 소리에 귀가 웅웅거렸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왠지 친숙하게 느껴졌다. 푸른 하늘에 걸린 흰 구름,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따스한 햇살, 그리고 귓가에 들리는 조용한 파도 소리...모든 게 현실이라고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아름다웠다.붕대를 칭칭 감은 두 손, 코끝을 자극하는 소독수 냄새... 절경인 바깥세상과 다른 현실을 인지한 소은정은 이런 생각이 들었다.아, 살았구나.“은정아, 난 정말 네가 어떻게 되는 줄 알고.... 뭐 갖고 싶은 거 없어? 뭐든 말만 해! 오빠가 다 사줄게!”턱 끝까지 내려온 다스서클과 까칠한 수염. 항상 완벽한 자기관리를 자랑하던 소은해였지만 지금은 꼴이 말이 아니었다.그 모습에 마음이 아팠지만 괜히 농담을 던지며 미소를 지었다.“그래. 한두 푼으로 안 끝날 거니까 각오해.”소은해가 고개를 끄덕이던 그때 누군가 방문을 벌컥 열었다.“은정아...”박수혁이 조심스러운 표정으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린 소은정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헬리콥터에서 내려오는 박수혁의 모습... 너무 비현실적이라 죽기 전 마지막 환상이라도 보는 건 줄 알았다. 그런데 그게 현실이었다니.그리고 그 해적들 틈에서 어떻게 그녀를 구한 걸까? 수많은 질문이 입가에 맴돌았지만 정작 밖으로 나온 말은 형식적인 인사의 말뿐이었다.“도와줘서 고마워. 큰 신세 졌네.”소은정의 말에 그녀를 향해 뻗으려던 박수혁의 손이 허공에서 어색하게 움직임을 멈추었다.은정이에게 난... 아제 남보다 못한 존재인 건가?눈동자에 실망감이 스쳐지났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 다가갔다.“뭐 어디 불편한 데는 없어? 배고프진 않아?”“어, 괜찮아.”예상치 못한 박수혁의 태도에 소은정의 형식적인 미소가 어색하게 굳었다. 박수혁에게 대답한 그녀는 바로 고개를 돌려 소은해에게 말했다.“오빠, 나 물 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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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82화 소중한 사람이라고 했으니까

소은정의 의아한 눈빛에 박수혁은 코를 만지며 어색하게 시선을 피하더니 남자들을 향해 짜증스레 소리쳤다.“조용히 해!”박수혁의 포스에 모두들 입을 다물었지만 다들 어떻게든 소은정의 얼굴을 보겠다고 고개를 쑥 내밀고 있었다.“안녕하세요. 목숨 걸고 절 구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소은정이 싱긋 미소를 지었다. 말로만 하는 인사치레가 아니라 정말 진심으로 하는 말이었다. 그들이 아니었다면 그녀는 이미 이름 모를 섬에서 싸늘한 주검이 되었을 테니까.“에이, 별말씀을요. 형수님, 그거 아십니까? 제가 아는 사람들 중 해적 두목에게 총구를 겨누고 살아남은 사람은 수혁 형님과 형수님뿐입니다!”“그러니까요. 두 분 정말 천생연분이십니다!”......가장 앞에 선 군의관 한연우가 한발 앞으로 다가갔다.“진료 시작해야 하거든? 다들 좀 조용히 하지?”그리고 고개를 돌려 박수혁에게 말했다.“애들 데리고 나가.”박수혁은 아직도 마음이 놓이지 않는 듯 소은정을 힐끗 바라보았지만 결국 한연우의 말을 따랐다.“소은해 씨도 나가세요. 정신 사나우니까!”한연우의 호통에 고소해 죽겠다는 표정을 짓던 소은해도 시무룩한 얼굴로 방을 나섰다.소은정이 깨어나지 않았을 때는 박수혁 동료들의 등쌀에 밀려났지만 소은정이 깬 지금도 찬밥 신세라니.방금 전까지 시끌벅적하던 방이 조용해졌다.“선생님, 잘 부탁드려요.”소은정의 미소에 한연우는 소은정의 상처를 살피며 무심한 듯 말했다.“생각했던 거랑 많이 다르시네요?”“어떻게 생각하셨는데요?”“기사에서 봤던 소은정 씨는 SC그룹 금지옥엽 외동딸, 제멋대로인 성격처럼 보였거든요. 뭐 수혁이도 소은정 씨가 고집이 세다고 말한 적도 있었고.”한연우의 돌직구에 소은정은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이런 말까지 말한 걸 보면 꽤 돈독한 사이인 듯 싶었다.하지만 박수혁에 대해 더 얘기하고 싶지 않았던 소은정은 바로 화제를 돌렸다.“저랑 같이 있었던 박우혁은 어떻게 됐어요?”“잘 먹고 잘 자고 잘 지내고 있습니다. 수혁이한테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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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83화 파산은 아니지?

그 말에 소은정은 가슴이 덜컹 내려앉는 것 같고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녀는 감정을 감추기 위해 바로 고개를 숙였다.이 빚을 도대체 어떻게 갚아야 할까... 한연우까지 나가고 나니 방은 다시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소은정이 착잡한 표정으로 앉아있던 그때, 방문이 열리더니 소은해가 고개를 쏙 내밀었다.방 안에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한 뒤에야 들어온 소은해는 바로 불만을 쏟아냈다.“참나, 저 사람들 완전 막무가내인 거 알아? 네 곁에 있지도 못하게 한다니까. 참나, 네 생명의 은인만 아니었으면 콱 때려주는 건데.”프로 용병들을 어떻게 때려주겠다고 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우스꽝스러운 소은해의 표정이 소은정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아빠랑 오빠들은 괜찮아?”“은찬이 형은 지금 여기 있어. 형 아니었으면 네 위치를 찾지 못했을 거야. 그 잘난 머리가 우리한테 도움이 되는 날이 다 있네.”소은해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역시, 오빠라면 내 위치를 찾아줄 줄 알았어!“은호 형은 뭐 괜찮고. 아빠는 충격으로 쓰러지셔서 입원하셨어.”“뭐?”아버지의 소식에 소은정의 눈동자가 커다래졌다.“괜찮을 리가 있겠어? 네가 실종되고 나서 며칠이 흘러도 소식 하나 안 들려오니까 전 재산을 기부하고 자연인으로 사시겠다는 걸 우리가 겨우 말렸다니까!”......소은해의 말에 소은정이 조심스럽게 물었다.“그래서? 우리 집... 정말 파산한 건 아니지?”그깟 돈이야 다시 벌면 되지만 괜히 아쉬운 마음이었다.“이 오빠가 누구냐? 목숨 걸고 막았지. 우리 동생 거지꼴 되는 걸 내가 어떻게 봐!”소은해가 그녀의 어깨를 토닥였다.소은정은 그제야 자신의 상태를 살펴보았다. 지저분하던 옷과 몸이 깔끔하게 정리된 상태였다. 뭐 오빠들이 여직원들한테 시킨 거겠지 싶어 별로 개의치 않았다.“그런데... 박수혁 그 인간이 왜 여기 있어?”“왜긴 왜야. 뻔뻔하니까 버티고 있는 거지!”소은해가 코웃음을 치며 대답했다.바로 이때 방으로 들어오며 마침 그 말을 들은 소은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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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84화 마음대로 해

세 남매가 대화를 나누던 그때, 누군가 방문을 두드렸다.소은찬은 연구할 게 있다며 눈치껏 일어섰지만 소은해는 못된 시누이처럼 팔짱을 끼더니 고개를 쳐들었다.“넌 또 뭐야?”박우혁이었다. 섬에서는 워낙 꼬질꼬질한 모습으로 있었고 워낙 상황이 긴박했던지라 제대로 살펴보지 않았지만 샤워를 마치고 옷까지 멀끔하게 갈아입으니 사람이 아예 달라 보였다.흰 피부, 박수혁과 어딘가 비슷한 이목구비, 귀티가 좔좔 흐르는 누가 봐도 재벌 2세의 모습이었다.“깼어? 내가 얼마나 걱정했는 줄 알아?”호들갑을 떨며 달려오는 박우혁의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소은해는 눈을 흘겼다.박우혁이 무사한 모습을 보니 소은정도 기쁘긴 마찬가지였다. 단 며칠 전에 알게 된 사람이지만 죽을 고비를 몇 번이나 함께 넘기다 보니 묘한 전우애 같은 감정이 피어올랐다.“걱정? 아주 잘 먹고 잘 자서 신수가 훤해졌네 뭐.”“무슨 소리야!”박우혁이 볼을 만지며 소리쳤다.“그런데 너 박수혁이랑 아무 사이도 아니라면서?”소은정이 눈썹을 씰룩거리며 묻자 박우혁이 어색하게 미소를 지었다.“일... 일부러 속이려던 건 아니야. 여기저기 오지만 다녔지만 나도 인터넷 기사는 보고 산다고. 두 사람 이혼한 사이인 거 뻔히 아는데 내가 전 남편 조카라는 걸 알면 날 버리고 갈까 봐...”박우혁의 변명에 소은해가 코웃음을 쳤다.“그래. 살고 싶으면 그렇게 하는 게 맞지. 솔직하게 말했으면 무조건 버리고 갔을 테니까.”“에이 형, 은정 누나 그런 사람 아니에요. 일촉즉발의 순간, 제 앞을 막아서는데... 와 저도 진짜 반할 뻔했다니까요.”박우혁이 넉살 좋은 얼굴로 말했다.“우리 은정이가 워낙 착하긴 하지.”만족스러운 미소를 짓던 소은해는 갑자기 진지한 표정을 짓더니 고개를 홱 돌렸다.“야, 그래도 앞으로는 절대 그러지 마. 위험한 상황이 생기면 무조건 너부터 챙기라고!”긴박했던 상황이 다시 떠오르며 소은정의 코끝이 시큰해졌다. 그녀가 대답하려던 순간, 박우혁이 가슴을 두드리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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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85화 널 원해

박우혁의 말에 소은정은 머리가 지끈거렸다.박우혁을 평생 먹여살리겠다고 한 건 그가 가난한 모험가일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박수혁의 조카라는 걸 알았다면 절대 그런 약속 따위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그게...”이때 소은해가 소은정의 말을 잘랐다.“야, 우리 집안 삥 뜯으려고 작정했어? 참나, 어이가 없어서.”하지만 박우혁은 소은해의 냉대에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듯 싱글벙글이었다.“형, 저 아직 젊잖아요. 저한테 투자하시면 무조건 버는 장사입니다. 그리고 사실 저 제가 벌 정도는 벌 수 있어요. 그냥 누나 곁에 평생 있고 싶어서...”박우혁의 말에 박수혁의 표정이 순식간에 차가워졌다.“꿈 깨. 너 그 섬에서 머리라도 다친 거 아니야? 어디 우리 은정이 혼삿길을 막으려고!”소은해도 불쾌하다는 말투로 쏘아붙였다.“다들 그만해. 그리고 오빠, 내가 그런 말을 한 건 맞아.”소은정이 인정하자 박수혁의 눈동자가 반짝 빛났지만 다음 순간 곧 실망감으로 어두워지고 말았다.“하지만 그건 네가 박수혁 조카인 걸 몰랐을 때고. 이번에 태한그룹 쪽에서 지불한 인건비, 해적들에게 준 몸값까지 내가 2배로 갚아줄 테니까 이쯤에서 퉁 치자? 재벌 2세 도련님까지 스폰해 주고 싶지 않아..”말을 마친 소은정이 고개를 들어 박수혁을 바라보았다. 어떻게 갚아야 할지 모를 은혜라면 돈으로 갚는 게 가장 깔끔하다는 생각에서 한 말이었다. 하지만 소은정의 제안에도 박수혁은 침묵으로 일관했다. 분위기가 어색하게 가라앉자 소은정이 입술을 꽉 깨물었다.이 정도로는 부족한가?“아, 운산 프로젝트에서 얻은 수익도 전부 태한그룹에 넘기는 걸로.”소은정이 시험 조로 조건을 하나 덧붙였다.몇천 억대의 대형 프로젝트의 수익까지 내놓았다. 이 정도면 만족하겠지.“내가 원하는 게 겨우 그런 거라고 생각해?”박수혁은 이를 악물고 물었다.뭐야? 이걸로도 부족하다고? 하, 내 목숨 값이 이렇게 비쌌었나...소은정이 미간을 찌푸리고 박우혁도 눈치를 보며 입을 열었다.“삼촌, 그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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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86화 한 번만 더 기회를 줘

사랑, 걱정, 그리움, 섭섭함, 모든 감정을 담아 내뱉은 말이었다.박수혁의 말에 가뜩이나 창백하던 소은정의 얼굴빛이 더 새하얗게 질렸다.뭐야? 내가 잘못 들은 건가?보고 싶었다고? 쓰레기처럼 미련 없이 버려놓고 이제 와서 보고 싶다고?박수혁... 당신 도대체 원하는 게 뭐야?충격, 의아함, 분노, 자조...박수혁은 소은정의 눈동자에 비치는 감정 하나하나를 읽으려 애썼다. 그 감정들 사이에 혐오가 없어 안심하는 자기 자신의 모습에 헛웃음이 터져 나올 것만 같았다.박수혁은 소은정의 머리카락을 향해 조심스럽게 손을 뻗었지만 뒤로 물러서는 소은정의 모습에 어색하게 손을 거두었다.박우혁이 어깨에 기댈 때도 평온하던 그녀인데... 이 정도 접촉도 싫은 건가?마음이 아팠지만 애써 아무렇지 않은 듯 웃어 보였다.“농담한 거 아니야. 네가 실종되고 나서... 나도 정말... 힘들었어. 네가 이대로 영원히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세상이 무너지는 기분이었어. 우리가 너무... 너무 성급하게 이혼을 결정한 건 아닐까?”박수혁의 말에 소은정이 고개를 돌렸다. 타오르는 불길처럼 뜨거운 눈빛에 소은정은 흠칫 놀랄 수밖에 없었다.저 열렬한 눈빛... 그녀가 아주 익숙한 감정, 바로 사랑이었다.순간, 호수처럼 고요하던 소은정의 마음에 돌멩이가 떨어진 듯 은은한 파장이 일었다. 하지만 그것도 순간일 뿐, 소은정은 다시 차가운 표정으로 피식 웃었다.“경솔? 3년 전에 우리가 결혼했던 거. 그런 걸 경솔하다고 하는 거야. 당신한테 이혼은 하루 만에 내린 결정일지 모르지만 난 3년 내내 고민하고 또 고민하고 결심한 거야. 나한테 이혼은 구원이나 마찬가지였다고.”소은정의 말에 박수혁의 몸이 흠칫 굳었다. 부드러운 미소가 굳고 상처를 받은 눈동자로 슬프게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소은정은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돈이라면 박수혁이 얼마를 원한다 해도 목숨 값이라 생각하고 기꺼이 내주겠지만 다시 그 지옥으로 들어가고 싶진 않았다.“은정아, 한 번만 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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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87화 그건 내가 아니야

소은정은 더 이상 얘기를 나누고 싶지 않다는 듯 고개를 숙인 채 소호랑의 털을 쓰다듬기 시작했다.하지만 박수혁은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아니, 포기할 수 없었다.3년 동안 소은정에게 줬던 상처를 생각해서라도 이대로 물러설 수 없었다.박수혁은 애써 미소를 지으며 주머니에서 사진 한 장을 꺼냈다. 소은정을 향해 뻗은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사진 속 여자 너 맞지? 네가 날 구했었다고... 왜 말 안 했어?”그의 목숨을 구해주고 홀연히 사라진 여자가 소은정이라는 걸 알았다면 무턱대고 사랑한다며 달려드는 소은정을 의심하지도 않았을 테고 결혼생활이 이렇게 허무하게 끝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사진을 힐끗 쳐다보던 소은정의 표정이 어색하게 굳었다. 박수혁의 눈동자에 담긴 미안함과 죄책감을 확인한 소은정이 피식 미소를 지었다.아... 그래서... 내 마음을 되돌리려고 한 거였어? 내가 당신을 구해준 것 때문에?“나 아니야.”그런 거라면 죽는 한이 있어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유럽에서 있었던 일은 그저 전부 한여름 밤의 꿈으로 묻어두고 싶었다.하지만 박수혁이 소은정의 말을 믿을 리가 없었다.“이게 네가 아니라고? 말이 되는 소리를 해!”거짓말! 왜 거짓말을 하는 거야!비수가 가슴을 찔러 피가 뚝뚝 흐르는 기분이었다.“당신이 잘못 본 거야. 사진 속 여자는 내가 아니야.”소은정이 담담하게 웃으며 반박했다. 어차피 오래전 묻어버린 기억, 오직 그녀만 소중하게 간직해 온 기억이다. 마지막으로 지키고 있던 자존심까지 짓밟히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헤어지기로 한 이상, 첫 만남이 언제인지 따위가 뭐가 중요할까.소은정의 고집에 이글거리던 박수혁의 눈빛이 차갑게 식어버렸다. 소은정이 인정하지 않는 이상 억지로 강요할 수도 없는 노릇. 어차피 앞으로 시간은 많으니 지금까지의 실수를 천천히 만회하고 싶었다.그는 다시 사진을 주머니에 넣었다.“그래. 네가 아니라고 해도 상관없어. 어차피 너에 대한 내 마음은 이거랑 상관없으니까.”박수혁은 기다란 손가락을 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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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88화 힘들어

무슨 얘기를 나누는지 궁금해 문에 귀를 바짝 대고 있었지만 쓸데없이 좋은 방음 때문에 한 마디도 듣지 못한 소은해는 여간 답답한 게 아니었다.게다가 진심이라니. 도대체 무슨 소리일까?“별거 아니야. 집에 가려면 얼마나 더 걸려?”“2, 3일 정도?”소은해의 대답에 소은정이 미간을 찌푸렸다. 아직도 2,3일 동안이나 박수혁과 같은 공간에 있어야 한다니...이때 소은정의 품에 안긴 소호랑이 시무룩한 표정으로 말했다.“아빠가 가버렸어. 아빠... 왠지 슬퍼 보여...”“아빠라니? 설마 박수혁을 말하는 거야?”소은정이 커다래진 눈으로 물었다.“엄마가 아빠 고백을 거절해서 너무 슬퍼 보였어요.”소호랑의 말에 소은해가 성큼성큼 다가가더니 소호랑의 목덜미를 덥석 잡아당겼다.“뭐? 야, 너 박수혁 싫어했잖아. 갑자기 아빠라니 그게 무슨 소리야? 너 어디 고장 난 거 아니지?”네 다리를 버둥거리던 소호랑이 고개를 홱 돌렸다.“고장 난 거 아니거든요? 은찬님이 AI 로봇으로서 사람을 더 객관적으로 판단해야 한다며 프로그램을 다시 수정해 주셨어요. 그동안은 신나리 그 여자가 사적인 감정을 담아 아빠를 싫어하도록 프로그램을 수정해서 그런 거였다고요.”“오빠도 참... 이렇게 마음대로 프로그램을 수정해도 되는 거야?”소호랑이 수염을 씰룩거리며 말했다.“은찬님께서 그러셨어요. 어른들의 편견에 흔들리면 안 된다고요!”서로 시선을 마주치던 소은정과 소은해가 동시에 한숨을 푹 쉬었다. 어차피 두 사람이 소은찬을 이길 수 있을 리가 없으니까 받아들일 수밖에.밀려오는 피곤함에 소은정은 다시 침대에 누웠다. 며칠 내내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느라 느끼지 못했던 작은 상처들과 마지막에 입은 총상이 욱신거렸다.게다가 박수혁의 말까지 자꾸 귓가에 맴돌며 그녀의 마음을 혼란스럽게 만들었지만 밀려오는 약기운에 곧 스르륵 눈을 감았다.밤새 섬에서 있었던 총격전과 유럽에서 겪었던 테러 장면들이 무한대로 반복되는 악몽에 시달린 소은정이 번쩍 눈을 떴다. 밤새 눈 한 번 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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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89화 나가

전화를 끊은 소은해는 불만 섞인 표정으로 박수혁을 바라보았다.“또 뭔데?”전에는 박수혁에게 무슨 말이라도 할라치면 박수혁의 옛 동료들이 우르르 몰려든 탓에 웬만큼 참았지만 이제 박수혁 혼자만 남았으니 두려울 게 없었다. 용병들에게 들려 나갔던 일만 생각하면 아직도 이가 갈리는 소은해였다.“제가 잘 아는 정신과 의사가 있습니다. 제가 연락해 드리죠.”박수혁이 직접 추천하는 정신과 의사라면 그 실력은 의심할 바가 없을 테지만 소은해는 단칼에 거절했다.“형이 알아서 할 테니까 넌 신경 꺼.”박수혁이 다시 설득하려 했지만 소은찬도 박수혁의 제안을 거절했다. 정신과 상담이란 한 인간의 밑바닥까지 보여줘야 하는 프라이빗한 치료다. 소은정이 그런 모습을 박수혁에게 보여주길 바라지 않는다는 걸 세 사람 모두 잘 알고 있었다.깊은 밤.소은해가 소은정 방 밖에 있는 소파에서 눈을 붙이고 있자 박수혁은 몰래 소은정의 방 안으로 들어갔다.잔뜩 긴장한 표정이었다가... 두려운 표정이었다가... 다시 평온해지는 소은정의 표정에 박수혁의 마음은 무거워졌다.강한 척, 담담한 척하느라 얼마나 힘들었을까...이때 끙끙대던 소은정이 천천히 눈을 뜨더니 웅얼거렸다.“물...”박수혁이 건넨 따뜻한 물을 몇 모금 마시고 정신을 차린 소은정은 그제야 그녀에게 물을 전해 준 사람이 박수혁임을 발견했다.소은정이 입을 벙긋거리자 박수혁은 그녀의 말을 제대로 듣기 위해 살짝 다가갔다.“박수혁...”순간, 박수혁의 가슴이 일렁거렸다.“응, 은정아, 나야. 왜?”잠이 덜 깬 소은정이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당장 나가...”마지막 힘을 쥐어짠 듯 이 말을 끝으로 소은정은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 다시 혼자 남겨진 박수혁의 표정이 무겁게 가라앉았다.박수혁의 무거운 마음과 방안의 적막은 칠흑 같은 어둠마저 잠식해 버리려는 듯 점점 더 커다래졌다.그는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흐트러진 소은정의 머리카락을 정리해 주었다.“그래...”이틀 후, 드디어 크루즈가 한국에 도착하고 소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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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90화 소은

이 너튜브 계정은 비록 업로드 속도는 빠르지 않았지만 몇백만의 팔로워를 자랑하고 있었다. 박우혁의 잘생긴 얼굴도 한몫했지만 인기를 끌고 있는 진짜 이유는 바로 그 어떤 조작도 없는 리얼한 앵글 덕분이었다.1달이나 새로운 콘텐츠가 업로드되지 않자 다들 박우혁이 무슨 사고라도 당한 게 아닐까 팬들의 걱정의 목소리가 점점 더 높아지던 그때, 새로운 영상이 업로드되었고 곧 큰 파장을 일으켰다.단 몇 분뿐인 영상이 이토록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이유는 두 가지. 대서양의 이름 모를 섬에서 살고 있는 야인들의 존재 그리고 박우혁과 함께 있는 소은정 때문이었다.소은정은 비행기 추락 사고로 실종된 상태. 하지만 말이 실종이지 며칠이 지나도 소식 하나 들리지 않으니 사람들은 소은정이 이미 사망했을 것이라 확신하고 있었다. 그런데 멀쩡히 살아있다니!소은정이 앵글에 잡히는 횟수는 손에 꼽을 정도였지만 비 오는 밤, 야인들에게 쫓기는 그 스릴 넘치는 모습은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숨이 턱 끝까지 차오를 정도로 정신없이 도망치는 모습. 그리고 함정에 떨어지려는 일촉즉발의 순간, 그녀의 팔을 잡아당긴 박우혁...그리고 그 뒤로 넘어지고 다쳐도 동료에게 민폐를 끼치지 않기 위해 신음 소리 하나 내지 않는 소은정의 모습에 시청자들은 입을 떡 벌렸다.영상은 그들이 해적을 만나기 전 엉망이 된 옷차림으로 바다를 향해 달려가는 모습으로 끝을 맺었다.위기에서 벗어난 뒤 살았다는 안도감에 보여준 맑고 청량한 미소...그리고 박우혁이 부르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린 순간, 마침 바닷바람이 불어오며 머리카락이 휘날리는 장면은 이온음료 CF라도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영상은 업로드된 지 단 한 시간만에 500만 뷰를 돌파했다.“헐! 은정 언니! 살아있었어!”“역시 무사할 줄 알았어요!”“예쁜 사람은 저렇게 망가져도 이쁘구나... CF인 줄?”“나 왜 주책 맞게 눈물이 나지?”“다른 승객들은 어떻게 된 거죠?”“저런 상황에서 둘만 있으면 마음이 싹 트지 않기도 힘들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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