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은정은 더 이상 얘기를 나누고 싶지 않다는 듯 고개를 숙인 채 소호랑의 털을 쓰다듬기 시작했다.하지만 박수혁은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아니, 포기할 수 없었다.3년 동안 소은정에게 줬던 상처를 생각해서라도 이대로 물러설 수 없었다.박수혁은 애써 미소를 지으며 주머니에서 사진 한 장을 꺼냈다. 소은정을 향해 뻗은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사진 속 여자 너 맞지? 네가 날 구했었다고... 왜 말 안 했어?”그의 목숨을 구해주고 홀연히 사라진 여자가 소은정이라는 걸 알았다면 무턱대고 사랑한다며 달려드는 소은정을 의심하지도 않았을 테고 결혼생활이 이렇게 허무하게 끝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사진을 힐끗 쳐다보던 소은정의 표정이 어색하게 굳었다. 박수혁의 눈동자에 담긴 미안함과 죄책감을 확인한 소은정이 피식 미소를 지었다.아... 그래서... 내 마음을 되돌리려고 한 거였어? 내가 당신을 구해준 것 때문에?“나 아니야.”그런 거라면 죽는 한이 있어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유럽에서 있었던 일은 그저 전부 한여름 밤의 꿈으로 묻어두고 싶었다.하지만 박수혁이 소은정의 말을 믿을 리가 없었다.“이게 네가 아니라고? 말이 되는 소리를 해!”거짓말! 왜 거짓말을 하는 거야!비수가 가슴을 찔러 피가 뚝뚝 흐르는 기분이었다.“당신이 잘못 본 거야. 사진 속 여자는 내가 아니야.”소은정이 담담하게 웃으며 반박했다. 어차피 오래전 묻어버린 기억, 오직 그녀만 소중하게 간직해 온 기억이다. 마지막으로 지키고 있던 자존심까지 짓밟히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헤어지기로 한 이상, 첫 만남이 언제인지 따위가 뭐가 중요할까.소은정의 고집에 이글거리던 박수혁의 눈빛이 차갑게 식어버렸다. 소은정이 인정하지 않는 이상 억지로 강요할 수도 없는 노릇. 어차피 앞으로 시간은 많으니 지금까지의 실수를 천천히 만회하고 싶었다.그는 다시 사진을 주머니에 넣었다.“그래. 네가 아니라고 해도 상관없어. 어차피 너에 대한 내 마음은 이거랑 상관없으니까.”박수혁은 기다란 손가락을 뻗
무슨 얘기를 나누는지 궁금해 문에 귀를 바짝 대고 있었지만 쓸데없이 좋은 방음 때문에 한 마디도 듣지 못한 소은해는 여간 답답한 게 아니었다.게다가 진심이라니. 도대체 무슨 소리일까?“별거 아니야. 집에 가려면 얼마나 더 걸려?”“2, 3일 정도?”소은해의 대답에 소은정이 미간을 찌푸렸다. 아직도 2,3일 동안이나 박수혁과 같은 공간에 있어야 한다니...이때 소은정의 품에 안긴 소호랑이 시무룩한 표정으로 말했다.“아빠가 가버렸어. 아빠... 왠지 슬퍼 보여...”“아빠라니? 설마 박수혁을 말하는 거야?”소은정이 커다래진 눈으로 물었다.“엄마가 아빠 고백을 거절해서 너무 슬퍼 보였어요.”소호랑의 말에 소은해가 성큼성큼 다가가더니 소호랑의 목덜미를 덥석 잡아당겼다.“뭐? 야, 너 박수혁 싫어했잖아. 갑자기 아빠라니 그게 무슨 소리야? 너 어디 고장 난 거 아니지?”네 다리를 버둥거리던 소호랑이 고개를 홱 돌렸다.“고장 난 거 아니거든요? 은찬님이 AI 로봇으로서 사람을 더 객관적으로 판단해야 한다며 프로그램을 다시 수정해 주셨어요. 그동안은 신나리 그 여자가 사적인 감정을 담아 아빠를 싫어하도록 프로그램을 수정해서 그런 거였다고요.”“오빠도 참... 이렇게 마음대로 프로그램을 수정해도 되는 거야?”소호랑이 수염을 씰룩거리며 말했다.“은찬님께서 그러셨어요. 어른들의 편견에 흔들리면 안 된다고요!”서로 시선을 마주치던 소은정과 소은해가 동시에 한숨을 푹 쉬었다. 어차피 두 사람이 소은찬을 이길 수 있을 리가 없으니까 받아들일 수밖에.밀려오는 피곤함에 소은정은 다시 침대에 누웠다. 며칠 내내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느라 느끼지 못했던 작은 상처들과 마지막에 입은 총상이 욱신거렸다.게다가 박수혁의 말까지 자꾸 귓가에 맴돌며 그녀의 마음을 혼란스럽게 만들었지만 밀려오는 약기운에 곧 스르륵 눈을 감았다.밤새 섬에서 있었던 총격전과 유럽에서 겪었던 테러 장면들이 무한대로 반복되는 악몽에 시달린 소은정이 번쩍 눈을 떴다. 밤새 눈 한 번 붙이
전화를 끊은 소은해는 불만 섞인 표정으로 박수혁을 바라보았다.“또 뭔데?”전에는 박수혁에게 무슨 말이라도 할라치면 박수혁의 옛 동료들이 우르르 몰려든 탓에 웬만큼 참았지만 이제 박수혁 혼자만 남았으니 두려울 게 없었다. 용병들에게 들려 나갔던 일만 생각하면 아직도 이가 갈리는 소은해였다.“제가 잘 아는 정신과 의사가 있습니다. 제가 연락해 드리죠.”박수혁이 직접 추천하는 정신과 의사라면 그 실력은 의심할 바가 없을 테지만 소은해는 단칼에 거절했다.“형이 알아서 할 테니까 넌 신경 꺼.”박수혁이 다시 설득하려 했지만 소은찬도 박수혁의 제안을 거절했다. 정신과 상담이란 한 인간의 밑바닥까지 보여줘야 하는 프라이빗한 치료다. 소은정이 그런 모습을 박수혁에게 보여주길 바라지 않는다는 걸 세 사람 모두 잘 알고 있었다.깊은 밤.소은해가 소은정 방 밖에 있는 소파에서 눈을 붙이고 있자 박수혁은 몰래 소은정의 방 안으로 들어갔다.잔뜩 긴장한 표정이었다가... 두려운 표정이었다가... 다시 평온해지는 소은정의 표정에 박수혁의 마음은 무거워졌다.강한 척, 담담한 척하느라 얼마나 힘들었을까...이때 끙끙대던 소은정이 천천히 눈을 뜨더니 웅얼거렸다.“물...”박수혁이 건넨 따뜻한 물을 몇 모금 마시고 정신을 차린 소은정은 그제야 그녀에게 물을 전해 준 사람이 박수혁임을 발견했다.소은정이 입을 벙긋거리자 박수혁은 그녀의 말을 제대로 듣기 위해 살짝 다가갔다.“박수혁...”순간, 박수혁의 가슴이 일렁거렸다.“응, 은정아, 나야. 왜?”잠이 덜 깬 소은정이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당장 나가...”마지막 힘을 쥐어짠 듯 이 말을 끝으로 소은정은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 다시 혼자 남겨진 박수혁의 표정이 무겁게 가라앉았다.박수혁의 무거운 마음과 방안의 적막은 칠흑 같은 어둠마저 잠식해 버리려는 듯 점점 더 커다래졌다.그는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흐트러진 소은정의 머리카락을 정리해 주었다.“그래...”이틀 후, 드디어 크루즈가 한국에 도착하고 소은해
이 너튜브 계정은 비록 업로드 속도는 빠르지 않았지만 몇백만의 팔로워를 자랑하고 있었다. 박우혁의 잘생긴 얼굴도 한몫했지만 인기를 끌고 있는 진짜 이유는 바로 그 어떤 조작도 없는 리얼한 앵글 덕분이었다.1달이나 새로운 콘텐츠가 업로드되지 않자 다들 박우혁이 무슨 사고라도 당한 게 아닐까 팬들의 걱정의 목소리가 점점 더 높아지던 그때, 새로운 영상이 업로드되었고 곧 큰 파장을 일으켰다.단 몇 분뿐인 영상이 이토록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이유는 두 가지. 대서양의 이름 모를 섬에서 살고 있는 야인들의 존재 그리고 박우혁과 함께 있는 소은정 때문이었다.소은정은 비행기 추락 사고로 실종된 상태. 하지만 말이 실종이지 며칠이 지나도 소식 하나 들리지 않으니 사람들은 소은정이 이미 사망했을 것이라 확신하고 있었다. 그런데 멀쩡히 살아있다니!소은정이 앵글에 잡히는 횟수는 손에 꼽을 정도였지만 비 오는 밤, 야인들에게 쫓기는 그 스릴 넘치는 모습은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숨이 턱 끝까지 차오를 정도로 정신없이 도망치는 모습. 그리고 함정에 떨어지려는 일촉즉발의 순간, 그녀의 팔을 잡아당긴 박우혁...그리고 그 뒤로 넘어지고 다쳐도 동료에게 민폐를 끼치지 않기 위해 신음 소리 하나 내지 않는 소은정의 모습에 시청자들은 입을 떡 벌렸다.영상은 그들이 해적을 만나기 전 엉망이 된 옷차림으로 바다를 향해 달려가는 모습으로 끝을 맺었다.위기에서 벗어난 뒤 살았다는 안도감에 보여준 맑고 청량한 미소...그리고 박우혁이 부르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린 순간, 마침 바닷바람이 불어오며 머리카락이 휘날리는 장면은 이온음료 CF라도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영상은 업로드된 지 단 한 시간만에 500만 뷰를 돌파했다.“헐! 은정 언니! 살아있었어!”“역시 무사할 줄 알았어요!”“예쁜 사람은 저렇게 망가져도 이쁘구나... CF인 줄?”“나 왜 주책 맞게 눈물이 나지?”“다른 승객들은 어떻게 된 거죠?”“저런 상황에서 둘만 있으면 마음이 싹 트지 않기도 힘들겠
소란스러운 소리에 소은정이 미간을 찌푸렸다.“뭐야? 유라 목소리 아니야?”소은정의 말에 소은해가 미심쩍다는 표정을 지었다.“그래?”병실 문을 연 순간, 한유라, 김하늘, 성강희까지 우르르 병실 안으로 들어왔다.세 사람은 눈시울이 붉어진 채로 한참 동안 아무 말 없이 소은정을 바라보았다.“은정아...”한유라가 먼저 소은정에게 달려갔다.김하늘도 다가가려는 순간, 소은해가 그녀의 옷자락을 잡았다.“한 명, 한 명씩 가. 아직 상처도 채 안 나았다고!”김하늘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다쳤어?”품에서 훌쩍이는 한유라의 등을 토닥이던 소은정이 싱긋 미소 지었다.“별거 아니야. 거의 다 나았어!”성강희도 그 동안 마음 고생이 심했는지 핼쑥해진 얼굴이었다. 소은정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던 성강희는 털썩 주저앉더니 흐느끼기 시작했다.어색한 얼굴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소찬식은 큼큼 헛기침을 하더니 소호랑을 안고 병실을 나섰다. 소은해도 한참을 고개를 젓더니 그 뒤를 따라나섰다.김하늘이 성강희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야, 초상났어? 무사히 돌아왔잖아! 울긴 왜 울어!”성강희는 소은정의 옷자락을 잡아당기며 흐느꼈다.“난 진짜... 너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긴 줄 알고...”겨우 감정을 추슬렀던 한유라도 다시 울음을 터트리기 시작했다.“이 나쁜 계집애야! 무사히 살아 돌아왔으면서 어떻게 우리한테 말 한마디 없을 수 있어! 우리가 얼마나 걱정했는 줄 알아?”진심으로 그녀를 걱정하는 모습에 소은정의 코끝이 시큰해졌다.“미안... 다 낫고 건강한 모습으로 다시 나타나고 싶었어.”항상 차분하던 김하늘도 눈시울을 붉혔다.“괜찮아. 무사히 돌아왔으면 됐어. 앞으로는 좋은 일만 있을 거야.”눈물의 상봉을 마치고 세 사람은 그동안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캐묻기 시작했고 소은정은 모든 걸 솔직하게 대답해 주었다.흥미진진한 표정의 한유라, 김하늘과 달리 성강희의 표정은 점점 더 어두워져 갔다.분위기를 띄우기 위해 무용담을 자랑하 듯 괜히 더 오버
영상이 업로드되고 며칠이 흘렀지만 그 화제성은 시들해지긴커녕 일파만파 퍼져나갔다.건강을 회복하고 퇴원 수속을 마친 소은정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꽁꽁 가렸음에도 병원 문을 나서자마자 바로 기자들에게 둘러싸이고 말았다.수많은 카메라와 마이크가 오직 소은정만을 바라보고 있었다.“소은정 대표님, 영상 내용 전부 사실입니까?”“큰 사고를 겪고도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으셨는데 하실 말씀 없으십니까?”“이번 비행기 추락 사고가 정말 사고라고 생각하십니까?”“생사를 함께 한 박우혁 씨와 따로 연락을 주고받고 계십니까?”......경호원들이 바로 다가와 소은정과 소은해의 앞을 막아섰다. 점점 더 몰려드는 인파들에 소은해는 짜증이 치밀었지만 대중 앞에 서는 게 직업인 소은해는 이들이 결코 쉽게 물러나지 않을 것이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소은해는 소은정을 품에 안은 채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갔다. 이때 소은정이 갑자기 발걸음을 멈추었다.푹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든 그녀는 슬픈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제 무사귀환을 축하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하지만... 저와 같은 비행기에 동승했던 30여 명의 승객들은 아직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다른 승객분들의 가족들을 생각해서라도 이번 사건으로 지나친 관심은 지양해 주시기 바랍니다.”목소리는 살짝 쉬었지만 말투만은 명확했다. 말을 마친 소은정은 기자들을 향해, 다른 승객들의 가족들을 향해 정중하게 인사를 올렸다.방금 전까지 북적이던 분위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소은정의 발언에 대해 네티즌들은 칭찬 일색이었다.“이런 일에서 인성이 보이는 법. 자기도 힘들 텐데 다른 피해자 가족들의 마음을 헤아리다니.”“언니, 저랑 결혼해 주세요!”“이번 비행기 추락 사고 피해자 가족입니다. 저희 엄마도 소은정 대표님처럼 어딘가에 조난당했다고... 언젠가 돌아오실 거라 믿습니다. 소은정 대표님, 어서 건강을 회복하세요. 당신은 저희들의 유일한 희망입니다.”......피해자 가족이 남긴 댓글에 좋아요가 가장 많이 클릭되고 역시 그
트렁크를 들고 그 뒤를 따르던 이한석은 쓸쓸한 박수혁의 뒷모습을 발견하고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대표님, 이 기사 휴대폰은 이만...”이 기사는 박수혁이 이대로 휴대폰을 바닥에 부수지는 않을까 걱정스러운 표정이었다.이한석 번호도 소은정이 알고 있을 거란 생각에 다른 사람의 휴대폰으로 전화를 한 건데...어쩌저찌 해도 생명을 구해준 은인이니 통화는 할 수 있을 줄 알았다.그런데 이름을 듣자마자 바로 전화를 끊어버리다니.박수혁은 통화기록을 지우고 이한석에게 휴대폰을 던져주었고 이 기사에게 휴대폰을 돌려준 이한석이 바로 그 뒤를 따랐다.“대표님, 오늘 밤 윤 화백님의 미술 전시 레스토랑 개업 파티가 열립니다. 대표님도 초대되셨는데...”한편, 소은정의 본가.소은정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오늘 파티에 입을 드레스를 고르고 있었다. 사고 후 처음 공식적인 장소에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니 옷차림에도 특별히 신경을 써야 했다.박수혁의 전화를 매정하게 끊어버린 소은정은 자신이 정확한 선택을 한 것이라 마음을 다잡았다.목숨을 구해준 건 고마운 일이었지만 그걸 빌미로 재결합? 꿈 개!소은해는 스타일리스트처럼 소은정에게 신상 드레스들을 추천해 주었고 소찬식도 상자에 고이 간직해 둔 목걸이 하나를 꺼냈다.한바탕 방구석 패션쇼 치른 끝에 소은정은 연핑크톤의 드레스를 픽했다. 타이트한 라인이 완벽한 소은정의 몸매를 돋보이게 만들어 주었고 싱그러운 연핑크톤이 소은정의 청순한 얼굴에 러블리함을 한 스푼 더 얹어주었다.이때, 소찬식이 꺼낸 목걸이를 발견한 소은해의 눈빛이 흔들렸다.“아빠, 그건 우리 집안 며느리한테 주실 거라면서 똑같은 걸로 세 개 사신 거잖아요!”소은해의 질문에 소찬식이 괜히 눈을 흘겼다.“아무리 생각해도 너 좋다는 여자는 없을 것 같아서.”뭐야? 그러니까 내 거라는 거지?또 투닥대는 부자의 모습에 소은정은 소은해를 향해 혀를 내밀었다.“오빠, 좀 더 분발해야겠어...”어깨를 으쓱하던 소은해가 옷을 갈아입으려던 그때, 소은정이 고개를 저었
당황한 소은정이 자리를 피하려 했지만 박수혁이 성큼성큼 다가왔다. 항상 몸에 지니고 다녔는지 다시 주머니에서 사진을 꺼낸 박수혁은 사진과 그림을 번갈아 바라보았다.“어떻게 이런 일이...”“그 사진 자네가 가지고 갔나?”창백해진 박수혁을 향해 윤 화백이 물었다.박수혁은 고개를 돌려 소은정을 뚫어져라 바라보았지만 소은정은 일부러 그의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연핑크 원피스를 입은 소은정은 평소의 도도한 분위기와는 달리 훨씬 더 러블리한 모습이었다.“윤 화백님, 이 사진은...”“그래, 내가 찍은 거네. 저 아이가 자네를 구할 때 내가 바로 그 거리 맞은편에 있었거든. 내 인생의 역작이라 할 수 있지. 자네 이 그림 사지 않겠나?”윤 화백의 말에 사진과 그림 속 여자가 소은정이란 사실은 이미 밝혀진 거나 마찬가지, 게다가 박수혁에게 그림을 팔겠다고 하니 소은정이 다급하게 소리쳤다.“제가 먼저 사겠다고 했잖아요!”아까까지 절대 안 팔겠다고 하던 사람이 갑자기 이게 무슨 변덕이란 말인가?“글쎄 난 그림의 주인이 따로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윤 화백이 껄껄 웃었다.“윤 화백님, 얼마면 되겠습니까?”박수혁의 새카만 눈동자가 살짝 반짝였다.“500억. 지금 바로 입금해.”윤 화백이 손바닥을 내밀며 말했다.500억이라니!직장인인 이한석은 이 상황이 경악스러울 따름이었다. 아무리 윤 화백님의 작품이라지만 그림 한 장에 500억이라니...윤 화백은 싱글싱글 웃으며 고개를 돌려 소은정을 힐끗 바라보았다.“돈은 얘한테 입금해. 어차피 주인공은 저 아이니까.”이 영감탱이가 갑자기 노망이 났나. 왜 이래!화가 치민 소은정이 당장 자리를 뜨려던 그때, 박우혁이 다가왔다.“누나, 여기 있었어? 한참 찾... 어? 삼촌!”박우혁의 애교 넘치는 누나 소리에 박수혁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하지만 박우혁은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소은정의 팔짱까지 끼면서 말했다.“우리 밥 먹고 심야영화 보러 갈까?”“이쪽은...”묘한 삼각관계에 윤 화백의 눈빛이 의미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