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은정의 의아한 눈빛에 박수혁은 코를 만지며 어색하게 시선을 피하더니 남자들을 향해 짜증스레 소리쳤다.“조용히 해!”박수혁의 포스에 모두들 입을 다물었지만 다들 어떻게든 소은정의 얼굴을 보겠다고 고개를 쑥 내밀고 있었다.“안녕하세요. 목숨 걸고 절 구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소은정이 싱긋 미소를 지었다. 말로만 하는 인사치레가 아니라 정말 진심으로 하는 말이었다. 그들이 아니었다면 그녀는 이미 이름 모를 섬에서 싸늘한 주검이 되었을 테니까.“에이, 별말씀을요. 형수님, 그거 아십니까? 제가 아는 사람들 중 해적 두목에게 총구를 겨누고 살아남은 사람은 수혁 형님과 형수님뿐입니다!”“그러니까요. 두 분 정말 천생연분이십니다!”......가장 앞에 선 군의관 한연우가 한발 앞으로 다가갔다.“진료 시작해야 하거든? 다들 좀 조용히 하지?”그리고 고개를 돌려 박수혁에게 말했다.“애들 데리고 나가.”박수혁은 아직도 마음이 놓이지 않는 듯 소은정을 힐끗 바라보았지만 결국 한연우의 말을 따랐다.“소은해 씨도 나가세요. 정신 사나우니까!”한연우의 호통에 고소해 죽겠다는 표정을 짓던 소은해도 시무룩한 얼굴로 방을 나섰다.소은정이 깨어나지 않았을 때는 박수혁 동료들의 등쌀에 밀려났지만 소은정이 깬 지금도 찬밥 신세라니.방금 전까지 시끌벅적하던 방이 조용해졌다.“선생님, 잘 부탁드려요.”소은정의 미소에 한연우는 소은정의 상처를 살피며 무심한 듯 말했다.“생각했던 거랑 많이 다르시네요?”“어떻게 생각하셨는데요?”“기사에서 봤던 소은정 씨는 SC그룹 금지옥엽 외동딸, 제멋대로인 성격처럼 보였거든요. 뭐 수혁이도 소은정 씨가 고집이 세다고 말한 적도 있었고.”한연우의 돌직구에 소은정은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이런 말까지 말한 걸 보면 꽤 돈독한 사이인 듯 싶었다.하지만 박수혁에 대해 더 얘기하고 싶지 않았던 소은정은 바로 화제를 돌렸다.“저랑 같이 있었던 박우혁은 어떻게 됐어요?”“잘 먹고 잘 자고 잘 지내고 있습니다. 수혁이한테 한
그 말에 소은정은 가슴이 덜컹 내려앉는 것 같고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녀는 감정을 감추기 위해 바로 고개를 숙였다.이 빚을 도대체 어떻게 갚아야 할까... 한연우까지 나가고 나니 방은 다시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소은정이 착잡한 표정으로 앉아있던 그때, 방문이 열리더니 소은해가 고개를 쏙 내밀었다.방 안에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한 뒤에야 들어온 소은해는 바로 불만을 쏟아냈다.“참나, 저 사람들 완전 막무가내인 거 알아? 네 곁에 있지도 못하게 한다니까. 참나, 네 생명의 은인만 아니었으면 콱 때려주는 건데.”프로 용병들을 어떻게 때려주겠다고 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우스꽝스러운 소은해의 표정이 소은정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아빠랑 오빠들은 괜찮아?”“은찬이 형은 지금 여기 있어. 형 아니었으면 네 위치를 찾지 못했을 거야. 그 잘난 머리가 우리한테 도움이 되는 날이 다 있네.”소은해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역시, 오빠라면 내 위치를 찾아줄 줄 알았어!“은호 형은 뭐 괜찮고. 아빠는 충격으로 쓰러지셔서 입원하셨어.”“뭐?”아버지의 소식에 소은정의 눈동자가 커다래졌다.“괜찮을 리가 있겠어? 네가 실종되고 나서 며칠이 흘러도 소식 하나 안 들려오니까 전 재산을 기부하고 자연인으로 사시겠다는 걸 우리가 겨우 말렸다니까!”......소은해의 말에 소은정이 조심스럽게 물었다.“그래서? 우리 집... 정말 파산한 건 아니지?”그깟 돈이야 다시 벌면 되지만 괜히 아쉬운 마음이었다.“이 오빠가 누구냐? 목숨 걸고 막았지. 우리 동생 거지꼴 되는 걸 내가 어떻게 봐!”소은해가 그녀의 어깨를 토닥였다.소은정은 그제야 자신의 상태를 살펴보았다. 지저분하던 옷과 몸이 깔끔하게 정리된 상태였다. 뭐 오빠들이 여직원들한테 시킨 거겠지 싶어 별로 개의치 않았다.“그런데... 박수혁 그 인간이 왜 여기 있어?”“왜긴 왜야. 뻔뻔하니까 버티고 있는 거지!”소은해가 코웃음을 치며 대답했다.바로 이때 방으로 들어오며 마침 그 말을 들은 소은찬
세 남매가 대화를 나누던 그때, 누군가 방문을 두드렸다.소은찬은 연구할 게 있다며 눈치껏 일어섰지만 소은해는 못된 시누이처럼 팔짱을 끼더니 고개를 쳐들었다.“넌 또 뭐야?”박우혁이었다. 섬에서는 워낙 꼬질꼬질한 모습으로 있었고 워낙 상황이 긴박했던지라 제대로 살펴보지 않았지만 샤워를 마치고 옷까지 멀끔하게 갈아입으니 사람이 아예 달라 보였다.흰 피부, 박수혁과 어딘가 비슷한 이목구비, 귀티가 좔좔 흐르는 누가 봐도 재벌 2세의 모습이었다.“깼어? 내가 얼마나 걱정했는 줄 알아?”호들갑을 떨며 달려오는 박우혁의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소은해는 눈을 흘겼다.박우혁이 무사한 모습을 보니 소은정도 기쁘긴 마찬가지였다. 단 며칠 전에 알게 된 사람이지만 죽을 고비를 몇 번이나 함께 넘기다 보니 묘한 전우애 같은 감정이 피어올랐다.“걱정? 아주 잘 먹고 잘 자서 신수가 훤해졌네 뭐.”“무슨 소리야!”박우혁이 볼을 만지며 소리쳤다.“그런데 너 박수혁이랑 아무 사이도 아니라면서?”소은정이 눈썹을 씰룩거리며 묻자 박우혁이 어색하게 미소를 지었다.“일... 일부러 속이려던 건 아니야. 여기저기 오지만 다녔지만 나도 인터넷 기사는 보고 산다고. 두 사람 이혼한 사이인 거 뻔히 아는데 내가 전 남편 조카라는 걸 알면 날 버리고 갈까 봐...”박우혁의 변명에 소은해가 코웃음을 쳤다.“그래. 살고 싶으면 그렇게 하는 게 맞지. 솔직하게 말했으면 무조건 버리고 갔을 테니까.”“에이 형, 은정 누나 그런 사람 아니에요. 일촉즉발의 순간, 제 앞을 막아서는데... 와 저도 진짜 반할 뻔했다니까요.”박우혁이 넉살 좋은 얼굴로 말했다.“우리 은정이가 워낙 착하긴 하지.”만족스러운 미소를 짓던 소은해는 갑자기 진지한 표정을 짓더니 고개를 홱 돌렸다.“야, 그래도 앞으로는 절대 그러지 마. 위험한 상황이 생기면 무조건 너부터 챙기라고!”긴박했던 상황이 다시 떠오르며 소은정의 코끝이 시큰해졌다. 그녀가 대답하려던 순간, 박우혁이 가슴을 두드리며 말했다.“
박우혁의 말에 소은정은 머리가 지끈거렸다.박우혁을 평생 먹여살리겠다고 한 건 그가 가난한 모험가일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박수혁의 조카라는 걸 알았다면 절대 그런 약속 따위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그게...”이때 소은해가 소은정의 말을 잘랐다.“야, 우리 집안 삥 뜯으려고 작정했어? 참나, 어이가 없어서.”하지만 박우혁은 소은해의 냉대에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듯 싱글벙글이었다.“형, 저 아직 젊잖아요. 저한테 투자하시면 무조건 버는 장사입니다. 그리고 사실 저 제가 벌 정도는 벌 수 있어요. 그냥 누나 곁에 평생 있고 싶어서...”박우혁의 말에 박수혁의 표정이 순식간에 차가워졌다.“꿈 깨. 너 그 섬에서 머리라도 다친 거 아니야? 어디 우리 은정이 혼삿길을 막으려고!”소은해도 불쾌하다는 말투로 쏘아붙였다.“다들 그만해. 그리고 오빠, 내가 그런 말을 한 건 맞아.”소은정이 인정하자 박수혁의 눈동자가 반짝 빛났지만 다음 순간 곧 실망감으로 어두워지고 말았다.“하지만 그건 네가 박수혁 조카인 걸 몰랐을 때고. 이번에 태한그룹 쪽에서 지불한 인건비, 해적들에게 준 몸값까지 내가 2배로 갚아줄 테니까 이쯤에서 퉁 치자? 재벌 2세 도련님까지 스폰해 주고 싶지 않아..”말을 마친 소은정이 고개를 들어 박수혁을 바라보았다. 어떻게 갚아야 할지 모를 은혜라면 돈으로 갚는 게 가장 깔끔하다는 생각에서 한 말이었다. 하지만 소은정의 제안에도 박수혁은 침묵으로 일관했다. 분위기가 어색하게 가라앉자 소은정이 입술을 꽉 깨물었다.이 정도로는 부족한가?“아, 운산 프로젝트에서 얻은 수익도 전부 태한그룹에 넘기는 걸로.”소은정이 시험 조로 조건을 하나 덧붙였다.몇천 억대의 대형 프로젝트의 수익까지 내놓았다. 이 정도면 만족하겠지.“내가 원하는 게 겨우 그런 거라고 생각해?”박수혁은 이를 악물고 물었다.뭐야? 이걸로도 부족하다고? 하, 내 목숨 값이 이렇게 비쌌었나...소은정이 미간을 찌푸리고 박우혁도 눈치를 보며 입을 열었다.“삼촌, 그냥
사랑, 걱정, 그리움, 섭섭함, 모든 감정을 담아 내뱉은 말이었다.박수혁의 말에 가뜩이나 창백하던 소은정의 얼굴빛이 더 새하얗게 질렸다.뭐야? 내가 잘못 들은 건가?보고 싶었다고? 쓰레기처럼 미련 없이 버려놓고 이제 와서 보고 싶다고?박수혁... 당신 도대체 원하는 게 뭐야?충격, 의아함, 분노, 자조...박수혁은 소은정의 눈동자에 비치는 감정 하나하나를 읽으려 애썼다. 그 감정들 사이에 혐오가 없어 안심하는 자기 자신의 모습에 헛웃음이 터져 나올 것만 같았다.박수혁은 소은정의 머리카락을 향해 조심스럽게 손을 뻗었지만 뒤로 물러서는 소은정의 모습에 어색하게 손을 거두었다.박우혁이 어깨에 기댈 때도 평온하던 그녀인데... 이 정도 접촉도 싫은 건가?마음이 아팠지만 애써 아무렇지 않은 듯 웃어 보였다.“농담한 거 아니야. 네가 실종되고 나서... 나도 정말... 힘들었어. 네가 이대로 영원히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세상이 무너지는 기분이었어. 우리가 너무... 너무 성급하게 이혼을 결정한 건 아닐까?”박수혁의 말에 소은정이 고개를 돌렸다. 타오르는 불길처럼 뜨거운 눈빛에 소은정은 흠칫 놀랄 수밖에 없었다.저 열렬한 눈빛... 그녀가 아주 익숙한 감정, 바로 사랑이었다.순간, 호수처럼 고요하던 소은정의 마음에 돌멩이가 떨어진 듯 은은한 파장이 일었다. 하지만 그것도 순간일 뿐, 소은정은 다시 차가운 표정으로 피식 웃었다.“경솔? 3년 전에 우리가 결혼했던 거. 그런 걸 경솔하다고 하는 거야. 당신한테 이혼은 하루 만에 내린 결정일지 모르지만 난 3년 내내 고민하고 또 고민하고 결심한 거야. 나한테 이혼은 구원이나 마찬가지였다고.”소은정의 말에 박수혁의 몸이 흠칫 굳었다. 부드러운 미소가 굳고 상처를 받은 눈동자로 슬프게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소은정은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돈이라면 박수혁이 얼마를 원한다 해도 목숨 값이라 생각하고 기꺼이 내주겠지만 다시 그 지옥으로 들어가고 싶진 않았다.“은정아, 한 번만 더
소은정은 더 이상 얘기를 나누고 싶지 않다는 듯 고개를 숙인 채 소호랑의 털을 쓰다듬기 시작했다.하지만 박수혁은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아니, 포기할 수 없었다.3년 동안 소은정에게 줬던 상처를 생각해서라도 이대로 물러설 수 없었다.박수혁은 애써 미소를 지으며 주머니에서 사진 한 장을 꺼냈다. 소은정을 향해 뻗은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사진 속 여자 너 맞지? 네가 날 구했었다고... 왜 말 안 했어?”그의 목숨을 구해주고 홀연히 사라진 여자가 소은정이라는 걸 알았다면 무턱대고 사랑한다며 달려드는 소은정을 의심하지도 않았을 테고 결혼생활이 이렇게 허무하게 끝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사진을 힐끗 쳐다보던 소은정의 표정이 어색하게 굳었다. 박수혁의 눈동자에 담긴 미안함과 죄책감을 확인한 소은정이 피식 미소를 지었다.아... 그래서... 내 마음을 되돌리려고 한 거였어? 내가 당신을 구해준 것 때문에?“나 아니야.”그런 거라면 죽는 한이 있어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유럽에서 있었던 일은 그저 전부 한여름 밤의 꿈으로 묻어두고 싶었다.하지만 박수혁이 소은정의 말을 믿을 리가 없었다.“이게 네가 아니라고? 말이 되는 소리를 해!”거짓말! 왜 거짓말을 하는 거야!비수가 가슴을 찔러 피가 뚝뚝 흐르는 기분이었다.“당신이 잘못 본 거야. 사진 속 여자는 내가 아니야.”소은정이 담담하게 웃으며 반박했다. 어차피 오래전 묻어버린 기억, 오직 그녀만 소중하게 간직해 온 기억이다. 마지막으로 지키고 있던 자존심까지 짓밟히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헤어지기로 한 이상, 첫 만남이 언제인지 따위가 뭐가 중요할까.소은정의 고집에 이글거리던 박수혁의 눈빛이 차갑게 식어버렸다. 소은정이 인정하지 않는 이상 억지로 강요할 수도 없는 노릇. 어차피 앞으로 시간은 많으니 지금까지의 실수를 천천히 만회하고 싶었다.그는 다시 사진을 주머니에 넣었다.“그래. 네가 아니라고 해도 상관없어. 어차피 너에 대한 내 마음은 이거랑 상관없으니까.”박수혁은 기다란 손가락을 뻗
무슨 얘기를 나누는지 궁금해 문에 귀를 바짝 대고 있었지만 쓸데없이 좋은 방음 때문에 한 마디도 듣지 못한 소은해는 여간 답답한 게 아니었다.게다가 진심이라니. 도대체 무슨 소리일까?“별거 아니야. 집에 가려면 얼마나 더 걸려?”“2, 3일 정도?”소은해의 대답에 소은정이 미간을 찌푸렸다. 아직도 2,3일 동안이나 박수혁과 같은 공간에 있어야 한다니...이때 소은정의 품에 안긴 소호랑이 시무룩한 표정으로 말했다.“아빠가 가버렸어. 아빠... 왠지 슬퍼 보여...”“아빠라니? 설마 박수혁을 말하는 거야?”소은정이 커다래진 눈으로 물었다.“엄마가 아빠 고백을 거절해서 너무 슬퍼 보였어요.”소호랑의 말에 소은해가 성큼성큼 다가가더니 소호랑의 목덜미를 덥석 잡아당겼다.“뭐? 야, 너 박수혁 싫어했잖아. 갑자기 아빠라니 그게 무슨 소리야? 너 어디 고장 난 거 아니지?”네 다리를 버둥거리던 소호랑이 고개를 홱 돌렸다.“고장 난 거 아니거든요? 은찬님이 AI 로봇으로서 사람을 더 객관적으로 판단해야 한다며 프로그램을 다시 수정해 주셨어요. 그동안은 신나리 그 여자가 사적인 감정을 담아 아빠를 싫어하도록 프로그램을 수정해서 그런 거였다고요.”“오빠도 참... 이렇게 마음대로 프로그램을 수정해도 되는 거야?”소호랑이 수염을 씰룩거리며 말했다.“은찬님께서 그러셨어요. 어른들의 편견에 흔들리면 안 된다고요!”서로 시선을 마주치던 소은정과 소은해가 동시에 한숨을 푹 쉬었다. 어차피 두 사람이 소은찬을 이길 수 있을 리가 없으니까 받아들일 수밖에.밀려오는 피곤함에 소은정은 다시 침대에 누웠다. 며칠 내내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느라 느끼지 못했던 작은 상처들과 마지막에 입은 총상이 욱신거렸다.게다가 박수혁의 말까지 자꾸 귓가에 맴돌며 그녀의 마음을 혼란스럽게 만들었지만 밀려오는 약기운에 곧 스르륵 눈을 감았다.밤새 섬에서 있었던 총격전과 유럽에서 겪었던 테러 장면들이 무한대로 반복되는 악몽에 시달린 소은정이 번쩍 눈을 떴다. 밤새 눈 한 번 붙이
전화를 끊은 소은해는 불만 섞인 표정으로 박수혁을 바라보았다.“또 뭔데?”전에는 박수혁에게 무슨 말이라도 할라치면 박수혁의 옛 동료들이 우르르 몰려든 탓에 웬만큼 참았지만 이제 박수혁 혼자만 남았으니 두려울 게 없었다. 용병들에게 들려 나갔던 일만 생각하면 아직도 이가 갈리는 소은해였다.“제가 잘 아는 정신과 의사가 있습니다. 제가 연락해 드리죠.”박수혁이 직접 추천하는 정신과 의사라면 그 실력은 의심할 바가 없을 테지만 소은해는 단칼에 거절했다.“형이 알아서 할 테니까 넌 신경 꺼.”박수혁이 다시 설득하려 했지만 소은찬도 박수혁의 제안을 거절했다. 정신과 상담이란 한 인간의 밑바닥까지 보여줘야 하는 프라이빗한 치료다. 소은정이 그런 모습을 박수혁에게 보여주길 바라지 않는다는 걸 세 사람 모두 잘 알고 있었다.깊은 밤.소은해가 소은정 방 밖에 있는 소파에서 눈을 붙이고 있자 박수혁은 몰래 소은정의 방 안으로 들어갔다.잔뜩 긴장한 표정이었다가... 두려운 표정이었다가... 다시 평온해지는 소은정의 표정에 박수혁의 마음은 무거워졌다.강한 척, 담담한 척하느라 얼마나 힘들었을까...이때 끙끙대던 소은정이 천천히 눈을 뜨더니 웅얼거렸다.“물...”박수혁이 건넨 따뜻한 물을 몇 모금 마시고 정신을 차린 소은정은 그제야 그녀에게 물을 전해 준 사람이 박수혁임을 발견했다.소은정이 입을 벙긋거리자 박수혁은 그녀의 말을 제대로 듣기 위해 살짝 다가갔다.“박수혁...”순간, 박수혁의 가슴이 일렁거렸다.“응, 은정아, 나야. 왜?”잠이 덜 깬 소은정이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당장 나가...”마지막 힘을 쥐어짠 듯 이 말을 끝으로 소은정은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 다시 혼자 남겨진 박수혁의 표정이 무겁게 가라앉았다.박수혁의 무거운 마음과 방안의 적막은 칠흑 같은 어둠마저 잠식해 버리려는 듯 점점 더 커다래졌다.그는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흐트러진 소은정의 머리카락을 정리해 주었다.“그래...”이틀 후, 드디어 크루즈가 한국에 도착하고 소은해
오랜만에 만난 두 사람은 서로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렸다.문준서는 그녀의 눈물을 보고 죄책감에 얼굴을 들 수 없었다.새봄이가 점차 울음이 잦아들자 그는 고개를 숙이고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었다.새봄이는 길게 심호흡하고 감정을 식혔다.준서에게는 묻고 싶은 게 정말 많았다.문준서는 울어서 빨갛게 부은 새봄이의 눈을 보고 웃으며 말했다.“커피 계속 마실 거야? 안 마실 거면 우리 집에 올래? 내가 맛있는 커피 만들어 줄게!”새봄이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준서는 소녀의 손을 잡고 핸드백을 챙긴 뒤, 밖으로 나갔다.커피숍 직원들마저 잘 어울리는 한 쌍이라고 부러운 눈빛을 보냈다.새봄이는 그와 손을 잡고 걷고 있자 저도 모르게 가슴이 설레었다.어릴 때는 항상 손을 잡고 다녔는데 지금은 어딘가 어색했다.어린 문준서는 항상 새봄이를 우선으로 생각했는데 지금도 그럴까?문준서는 소녀가 기억하는 어린 준서가 아니었다. 그의 거대한 뒷모습은 왠지 모를 안정감을 주었다.문준서가 웃으며 소녀에게 물었다.“뭘 그렇게 뚫어지게 봐?”“키 몇이야?”“192, 만족해?”새봄이는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끼며 고개를 돌렸다.“내가 키 큰 사람 별로라고 하면 뼈라도 깎을 거야?”문준서는 웃으며 소녀의 손을 잡아끌었다.“응. 네가 집도해.”새봄이도 덩달아 웃었다.10여 년을 떨어져 지내다 보니 처음에는 정말 보고 싶었지만 점차 감정은 옅어져 갔다. 매번 부모님에게 준서의 안부를 물을 때면 그들은 머리만 흔들었다.그 뒤로 새봄이는 더 이상 준서를 찾지 않았다.말없이 사라진 그를 원망한 적도 있었다.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면 그가 해외에서 무사히 지냈으면 하는 바람이 더 컸던 것 같았다.문준서는 길가에 세워진 스포츠카로 다가갔다.차도 주인을 닮아 검은색으로 차분하고 화려하지 않은 디자인이었다.처음 그와 눈이 마주쳤을 때, 새봄이는 그가 문준서라는 것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티없이 맑고 순수했던 눈동자는 어릴 때와 비교해 변한 게 전혀 없었다.하지만 소녀
새봄이가 떠난 뒤로 전동하는 한숨을 달고 살았다. 옆에서 지켜보는 소은정은 어이가 없었다.학교 생활은 생각했던 것보다 따분하지 않았다.어릴 때부터 곱게 자란 새봄이지만 거만하지 않고 성격이 활발했기에 많은 친구를 사귀었다.아이는 가끔 친구들을 집에 초대해서 파티를 벌였다.그리고 혼자 있는 시간도 충분히 즐겼다.가끔 센 강변에 가서 산책도 하고 석양을 감상하며 오리에게 먹이를 주기도 했다.그런데 가끔 혼자 있을 때면 누군가가 지켜보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하지만 크게 걱정하지는 않았다. 주변에 수시로 경호원들이 지키고 있었기 때문이다.새봄이는 아이스크림을 들고 홀로 석양 아래에서 산책을 즐겼다. 손에는 엄마를 위해 준비한 선물인 한정판 명품백이 들려 있었다.이목구비가 화려한 동양소녀가 길을 걷고 있자 무수히 많은 시선들이 따라다녔다.하지만 프랑스의 치안은 별로 좋지 못했다.새봄이가 아이스크림을 먹는 사이 녹색 트레이닝복을 입은 남자가 소녀의 핸드백을 가로채서 사람들 틈으로 도주했다.놀란 새봄이는 다급히 남자의 뒤를 따라가며 소리쳤다.“도둑이야!”안타깝게도 유럽에서 비슷한 사건은 비일비재하게 벌어졌다.아무도 핸드백을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싶지 않아했다.새봄이는 자신이 안전하다는 것을 알기에 끝까지 남자를 쫓아갔다.수염이 덥수룩한 남자는 뒤를 돌아보며 뭐라고 욕설을 지껄이더니 골목으로 진입했다.새봄이가 쫓아갔을 때, 남자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소녀가 망연자실한 얼굴로 서 있을 때, 갑자기 옆 골목에서 사람이 튀어나왔다.남자는 바로 새봄이의 목을 노리고 달려들었지만 손이 소녀에게 닿기도 전에 누군가가 달려와서 남자를 걷어찼다.새봄이는 겁에 질린 얼굴로 뒤를 돌아보았다.훤칠하고 잘생긴 동양인 남자가 등 뒤에 서 있었다.어딘가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검은 정장을 입은 남자가 새봄이의 앞으로 다가갔다.그에게서 익숙한 우드향이 풍겼다.그는 천천히 소녀를 향해 손을 뻗었다. 손가락이 가늘고 예쁜 손이었다.녹색 트레이닝복을 입은 강
전동하는 그날 밤 새봄이에게 해외유학 얘기를 꺼냈다.새봄이는 고민도 해보지 않고 바로 동의했다.어디에 가고 싶냐고 물었더니 프랑스만 제외하고 아무데나 괜찮다고 했다.전동하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준서 때문에 프랑스에 가기 싫은 거야?”새봄이가 눈시울을 붉히며 말했다.“걔가 누군데? 하나도 기억 안 나! 걔 얘기하지 마!”아이는 억울함을 토로했다.줄곧 아이의 옆을 지켜주던 오빠는 어느 날 갑자기 사라졌다.마치 꿈을 꾼 것 같았다.더 이상 아이의 뒤꽁무니를 따라다니던 오빠는 없었다.아이는 준서가 보고 싶었지만 준서는 떠날 때 편지 한장 남기지 않았다.전동하는 안쓰러운 표정으로 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새봄이도 이제 컸잖아. 준서도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어. 연락이 없던 것도 그럴만한 사정이 있어서였어. 나중에 준서 만나도 너무 준서를 욕하지 마.”새봄이는 고집스럽게 고개를 돌려버렸다.부모의 사랑만 받고 자란 아이는 갑작스러운 이별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가끔 딸이 울기라도 하면 전동하는 항상 달려와서 딸을 위로해 주었다.태어날 때부터 다이아수저를 물고 태어난 아이는 누구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었다.그런데 어느 날 오빠가 보고 싶었던 아이가 준서에게 전화를 걸었을 때, 없는 번호라고 나왔다.아이는 버려진 느낌을 받았다.출국이 결정되었으니 전동하는 아이가 다닐 학교를 알아보았다.결국 새봄이는 유럽을 선택했다.마치 누군가가 거기서 자신을 기다리는 것처럼.떠나기 전, 아이는 일곱 남자친구와 작별인사를 나누었다.아이가 출국하는 날, 온가족이 나와서 새봄이를 배웅햇다.새봄이는 딱히 슬프거나 아쉬운 티를 내지 않았다. 마치 부모님 손을 잡고 해외여행을 가는 것처럼 자연스러웠다.아이는 활짝 웃으면서 가족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전동하와 소은정은 영지까지 데리고 같이 프랑스로 출국하기로 했다.일가족이 탑승수속을 마치고 돌아서는데 뒤에서 급박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새봄아!”고개를 돌리자 하얗게 질린 얼굴로 허겁지겁 이쪽
눈 깜짝할 사이에 새봄이는 어엿한 숙녀로 자라났다.고등학교에 들어가자마자 그녀에게는 남자친구가 생겼다.새봄이는 집으로 돌아와서 이 소식을 소은정에게 알렸다.소은정은 딱히 말리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어렸을 때 이런저런 경험을 다 해보는 게 아이에게 좋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그리고 새봄이가 진심일 거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하지만 이 사실을 알게 된 전동하는 밤새 잠을 이룰 수 없었다.그는 아이와 대화를 나눠봐야겠다고 마음먹었다.새봄이의 반응은 시큰둥했다.“친구들이 다들 남자친구를 사귀는데 나만 솔로면 유행에 뒤떨어지잖아. 그래서 만나보기로 했어. 그리고 너무 이른 나이도 아니잖아! 중학교 때부터 연애하는 애들도 많다고!”전동하는 인내심 있게 아이를 타일렀다.“그래도 넌 아직 너무 어려. 밖으로 나가 사람들과 더 많이 접촉해 보면 알게 될 거야. 남자는 다 믿을 놈이 못 돼….”“그럼 엄마가 아빠를 만난 것도 사랑에 눈이 멀어서 만난 거겠네?”어릴 때부터 말싸움에는 절대 지지 않던 새봄이는 미소가 소은정을 닮은 예쁘고 사랑스러운 소녀로 성장했다.그리고 총기 있는 눈동자와 말빨, 그리고 큰 키는 전동하를 많이 닮았다.소은정은 어디 하나 빠지지 않는 딸이 나중에 남자 여럿을 울릴 거라는 것을 알기에 아이에게는 사랑을 하면 꼭 아빠랑 엄마처럼 서로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라고 강조했다.새봄이는 전동하가 말이 없자 달려가서 그의 팔짱을 꼈다.“아빠, 걱정하지 마. 그냥 연애는 어떤 느낌인가 궁금해서 해보는 거야.”“그래서 그 남자친구는… 어떤 사람이야?”“어느 남자친구를 말하는 거야?”전동하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물었다.“몇이나 사귀었는데?”“다른 애들은 다 한명하고만 사귀는데 난 다른 애들 따라하기 싫어. 그래서 하루에 한 명, 일주일에 일곱 명이야! 주일을 정해서 따로 만나!”새봄이가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전동하는 입을 뻐금거리며 한참을 말을 잇지 못했다.그래도 다행인 건 사랑에 깊이 빠지는 스타일은 아니라는 점이랄까.
다른 CCTV에서 정황이 포착되었다. 직원이 그쪽으로 다가가다가 발을 헛디디며 하마터면 술잔을 쏟을 뻔한 정황이었는데 그때 잔을 안쪽으로 옮기며 위치가 바뀐 것 같았다.독극물 검사결과도 나왔다.청산가리였다.심청하의 몸에서 나온 독극물과 약병에 있던 독극물 성분이 일치했다.살인을 계획했던 심청하가 제 꾀에 당한 상황이었다.아마 그녀는 죽을 때까지 어디서 문제가 생겼는지 몰랐을 것이다.형사들은 밤을 새워 CCTV를 확인하면서 이 약병의 출처가 남유주의 큰어머니라는 사실을 밝혀냈다.그렇게 큰어머니가 경찰에 소환되었다.큰어머니는 숨김없이 사건의 경과를 진술했는데 심청하에게 협박을 당했다는 내용이었다.하지만 사람을 해치고 싶지 않아서 넘어지는 틈을 타 약병을 바닥에 버렸다고 했다.심청하가 포기를 못하고 스스로 행동에 옮기다가 제 꾀에 당했다는 말도 했다.형사가 인상을 찌푸리며 그녀에게 물었다.“그랬다는 증거 있나요?”“당연히 있죠.”큰어머니는 딸인 남연을 호출했다.“형사님이 묻는 대로 사실을 대답해! 떨지 말고!”남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핸드폰을 꺼냈다.그리고 차 안에서 심청하와 대화했던 녹음을 재생했다.“그 여자가 아빠랑 엄마를 죽이겠다며 협박했어요. 그 파티 초대장은 제가 거금을 주고 산 거예요. 우린 태한그룹 사모님과 친척관계에요. 평소에 왕래는 하지 않지만 사람을 죽이고 싶지는 않았다고요!”남연은 울음을 터뜨리며 말했다.“형사님, 제가 아는 건 다 얘기했어요.”형사는 그녀의 진술에서 이상한 점을 포착했다.“전에 남유주 씨를 해하려 한 적이 있죠?”“그래! 너도 직접 남유주를 죽이려고 했잖아? 그건 왜 쏙 빼고 말해?”녹음본에 담겼던 심청하의 목소리였다.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 파일은 편집을 거치지 않았다.남연은 고개를 푹 숙이고 사실을 털어놓았다.“그것도 심청하가 협박해서 했어요. 하지만 언니 앞에서 이미 잘못을 인정했고 사과도 했어요. 언니는 저를 용서했고요.”형사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이건 박수혁 대표와
심청하는 한참 침묵하더니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무슨 방법을 쓰든 그 사람들과 걔를 만나게 해. 안 그러면 이 약은 네 부모님 배 속으로 들어갈 거야!”남연은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고개를 떨어뜨렸다.“알겠어요.”결국 그녀는 겁에 질린 얼굴로 명령을 받아들였다.며칠 뒤, 마침 좋은 기회가 찾아왔다.오늘은 자선회가 열리는 날이었는데 박수혁은 남유주의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 그녀와 함께 자선회에 참석했다.그리고 자선회에서 많은 보석과 골동품을 구매하며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자선회가 끝나고 파티가 이어졌다.남연의 부모는 힘겹게 초대장을 입수했다.심청하는 파티홀에서 이어질 장면을 기대하고 있었다.하지만 남연의 부모는 뒤늦게 파티에 참석했고 그들이 현장에 도착했을 때는 파티가 다 끝난 뒤였다.심청하는 분노를 주체할 수 없었다.이번 기회를 놓치면 다음에는 언제가 될지 장담할 수 없었다.SC그룹에서는 지분 사건으로 그들을 물고늘어질 것이다.본사에서 움직이기 전에 남유주를 제거해야 했다.잠시 후, 남유주의 큰어머니는 사람이 없는 곳에 숨어들었다.그리고 약을 꺼내 술병에 쏟아넣으려고 했다.마침 취객이 그녀의 어깨를 부딪히고 지나가며 그녀가 바닥에 쓰러졌다.남유주 큰어머니가 고통에 신음을 흘리자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되었다.약병은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구석진 곳으로 굴러갔다.심청하는 싸늘한 눈빛으로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정말 뭐 하나 일을 제대로 하는 게 없는 일가족이었다.남유주의 큰아버지는 얼굴이 하얗게 질려 다급히 다가가서 아내의 손을 잡고 구급차를 호출했다.호텔에 미리 대기하고 있던 의료진이 달려왔고 큰어머니를 들것에 실어 병원으로 호송했다.심청하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사람들이 모두 흩어지고 그녀는 구석진 곳으로 가서 아무도 안 보는 틈을 타 약병을 손에 쥐었다.그리고 기회를 봐서 약을 와인에 쏟고 흔들었다.모든 게 끝난 뒤, 심청하는 손에 난 땀을 닦았다.이미 살인을 하기로 마음먹은 그녀였지만 직접 모든 일을 끝내고 나니
남유주는 미소를 지으며 소은정과 박수혁 사이를 스스럼없이 얘기했다.남유주는 지나간 둘의 과거를 신경 쓰지 않았다.박수혁은 소은정에게 다른 마음이 없었고 그들은 각자 다른 사람과 행복한 삶을 살기로 했다.소은정은 미소를 지으며 남유주가 건넨 상자를 열었다.안에는 팔찌가 있었다, 반짝이며 아름다운 화려한 목걸이의 모든 보석은 정교하게 다듬어져 있었고 본연의 미와 섬세함의 아름다움을 결합하는 느낌이 들게 했다.그녀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몇 년 동안 이런 것을 모으기를 좋아했는데... 고마워요, 진짜 마음에 들어요." 남유주는 화해의 의미로 소은정에게 팔찌를 건넸다.소은정은 미소를 지으며 팔찌를 착용했다."과거는 과거일 뿐이니 우린 서로 용서하는 게 어때요?"소은정은 머리를 끄덕였다. 그녀의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안타깝게도 난 어떤 선물도 준비하지 못했네요…"그녀는 가방에서 계약서를 꺼내고 남유주에게 건넸다.남유주는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서류 내용을 살펴보았다."이게 뭐예요?""원래는 소찬학의 주식이었지만 몇 년 전에 회사 소유로 되었어요. 아빠가 나이도 있고 해서 주식 대신 배당금을 주기로 했었어요, 근데 더는 그 사람의 것이 아니니까, 아빠가 유주 씨한테 넘기고 싶다고 하더라고요. 우리가 주는 작은 선물이니까 받아줬으면 좋겠어요." 얼굴이 굳었던 남유주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그녀는 계약서를 다시 내밀었다."전 받지 않을래요.""유주 씨, 이게 얼마나 큰 돈인지 몰라요? 술집을 사려고 했던 거 아니었어요? 이 돈으로 그 건물 같은 거 열 개는 살 수 있어요."소은정은 인내심을 가지고 설명했다.남유주는 웃음을 참고 머리를 흔들었다."이걸 받으면 소찬학이 내 생부라는 것을 인정하는 거잖아요, 끊을 수 없는 혈연관계를 받아들여야 하고, 내가 관여하지 않은 과거의 강탈과 억압을 직면해야 해요. 태어난 이래로 부모가 없는 존재로 살아왔고, 아직 그것을 원하지 않아요. 나의 아버지로 인정하고 싶지도 않고 소씨 가문과 혈연적인 관계가
거침없이 내뱉는 심청하의 태도에 소찬식이 얼굴이 어둡게 변했다.옆에서 듣고 있던 소은정이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소씨 가문의 주식은 애초에 저희 집안 거에요. 그리고 둘째 삼촌이 직접 주식을 그룹 소유로 돌리겠다고 서명까지 했어요. 자기는 주식 배당만 챙기겠다고, 회사를 떠난 지금 삼촌한테 배당금을 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하게 여겨야죠. 이모가 한 계산은 너무 터무니없어요. 이 주식들은 재산 분할과 관련이 없어요. 설령 분할을 한다 해도, 먼저 그룹의 이익을 보호하는 게 우리의 원칙이고요."심청하는 얼굴이 이상하게 변했다."저는 어떻게 해요? 그이가 감옥에 가고, 우리는 손가락 빨면서 굶어 죽으라는 거예요? 주식을 전부 넘겨주세요, 그럼 더는 따지지 않을게요!" 그녀는 무례한 태도로 단호하게 앉아 있었다.소찬식의 표정이 음울하게 어두워졌다, 그는 복잡한 눈빛으로 그녀를 한번 쳐다보았다."그만 돌아가세요, 돌아가서 경찰 소식 기다리세요. 찬식이 회사 자금을 자기 돈처럼 써버렸고 수억 달러를 횡령했어요. 그럼에도 그룹이 이 돈에 대해 따지지 않는 것만으로도 고맙게 생각하세요. 어떻게 돈을, 주식을 요구할 수 있어요?" "나는 찬식 씨가 아니에요, 다른 사람들 사정은 모르겠고, 누가 날 어떻게 생각하든 관심없어요."그는 말을 마친 뒤 옆에 서 있는 집사에게 눈짓했다."손님을 내보내.""네."집사의 대답에, 심청하는 일어서서 조급하게 말했다. "아주버님, 그렇게 말씀하시지 마세요. 형제들끼리 어떻게 이렇게 매정하게 굴어요? 이 일을 언론에 알리면 어떻게 될지 저도 기대되네요, 아마 언론도 이 일에 엄청난 관심을 둘 것 같거든요!"소찬식의 표정은 신경질적으로 굳어졌다, 눈빛이 차갑고 어둡게 변했다.공기 안에는 침묵이 깔렸다.소은정은 갑작스럽게 직감했다. 심청하가 예전과는 분위기가 많이 달라진 것을 눈치챘다.하지만 그들은 타협할 수 없었다. 한 푼이라도 더 주면, 그녀는 주제 파악을 못 하고 더 달라고 요구할 것이다.그녀는 절대로 이번 한
심청하의 얼굴이 새파랗게 변했다."다 해봐야죠, 우선 믿을 만한 변호사를 찾아서 형량부터 줄여줘요."옆에서 듣고 있던 소은정이 참지 못하고 가볍게 웃으며 소리를 냈다.소은정이 입을 열었다."마침 잘 오셨어요, 우리도 지금 삼촌을 어떻게 구할지 토론하고 있었거든요!"심청하는 의아한 눈빛으로 소은정을 쳐다보았다. "그러면... 어떤 방법을 논의했는데?"전동하는 멋도 모르고 웃었다. 그는 소은정의 대답을 기다렸다.소은정은 청량한 목소리로 한숨을 쉬었다."사실 우리가 변호사를 찾아서 물어봤어요. 판결이 심하게 나면, 사형이 나올 수도 있다고 하더라고요, 어쨌든 두 사람을 죽인 거니까.그래도 방법이 있어요, 둘째 삼촌은 그때 혼인 상태였잖아요?법정에 나서서 전부 둘째 삼촌이 한 게 아니라고 증언하면 돼요. 삼촌은 줄곧 숙모랑 함께 있었고, 그런 일을 꾸밀 시간적 여유도 없었다고!"심청하는 갑자기 얼굴이 하얗게 질리더니 충격을 받은 표정으로 일어섰다."너... 나보고 거짓 증언을 하라는 거야, 말이 되니? 그거야말로 불법이야!"소은정은 차가운 눈빛으로 비웃었다."불법이라는 것도 알고 계셨네요? 근데 왜 저희 아버지한테 당당하게 그런 짓을 요구하는 거예요?"심청하는 그제야 자신이 소은정에게 당했다는 것을 깨달았다.화가 난 그녀의 얼굴이 붉어졌다."은정아, 너 말 이상하게 하는 구나, 내가 마음이 너무 급해서 나온 말을 꼬투리 잡는 거니? 그리고 너희 삼촌 아직 유죄 판결도 나지 않았어. 그러니까 우리가 조금 더 노력하면 돼."소은정은 눈썹을 찌푸렸다."그럼 혼자 잘 해보세요! 우린 응원이나 하고 있을게요!""너 지금 뭐하자는 거니?" 심청하는 화를 내며 소찬식을 바라보았다."진짜 이렇게 내버려두실 거예요?"소찬식의 눈빛이 어둡게 깔렸다."자기가 한 일에 대가를 치러야 하겠죠, 저희는 아무런 상관도 하지 않을 겁니다. 그러니 제수씨도 저희를 그만 찾아오세요."심청하는 소찬식의 태도가 이렇게 차갑고 딱딱할 줄은 몰랐다.그녀는 잠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