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은 조금씩 조금씩 흘렀다.강이한이 하도 철저하게 준비를 한 탓에 정씨 가문은... 월이의 소식을 조금이라도 얻어내지 못했다. 이유영은 온 파리에 있는 병원들을 다 뒤져보았지만 없었다.월이에 관한 단서가 하나도 없었다.이유영은 어수선한 옷차림으로 마치 미친 사람처럼 병원의 구석구석을 다 뒤졌다. 그녀의 모습은 낭패하고 절망적이었다.또 병원 한 집을 찾아보고 나온 이유영은 마치 영혼을 잃어버린 것만 같았다.박연준의 차가 병원 앞에 세워져 있었다. 차에서 내린 박연준은 넋을 잃은 이유영을 보았다.지금 그녀의 몸에서는 아름다움이라고는 일도 찾아볼 수 없었다.그저 무궁무진한 절망만 있었다. 만약... 이때 오직 이유영의 목숨으로 월이가 무사한 것을 바꿀 수 있다고 하면... 그럼 그녀는 정말 추호의 망설임도 없이 자신의 목숨을 내놓았을 것이었다.그녀는 미친 듯이 강이한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전화기가 꺼져있다는 말을 들은 뒤부터 그녀는 또 미친 듯이 그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이유영은 강이한에게 월이의 신분을 인정하였으며 게다가 최후의 타협까지 하였다.[내가 적합성 검사를 할게. 내가 그 아이를 살릴게.]이 메시지를 보낼 때 이유영의 마음이 얼마나 절망스러웠는지 아무도 모를 것이었다.그녀는 타협했다.결국 강이한에게 타협하고 말았다.강이한더러 자기 딸을 건드리지 말아 달라고 하기 위해, 한지음에 관한 일체를 그토록 증오했던 이유영은 결국 강이한에게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다른 한편, 강이한은 이미 검사 결과를 손에 쥐었다.“도련님.”이정은 엄숙하면서도 심각한 표정으로 강이한을 바라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검사 결과에는 둘 다 적합하다고 나왔다!그랬다. 월이는 강이한의 딸이 맞았고 월이와 이온유의 골수도 적합하다고 나왔다...강이한은 친자 확인 검사 보고서를 보면서 눈빛에는... 다정함이 역력했다가 또 짙은 몸부림이 보이기도 했다.‘이 여자는 도대체 언제부터 이렇게 거짓말만 내뱉은 거지?’그 순간 병상에 누워있던 월이는 또다시
간호사는 월이를 달래주며 밥을 먹이려고 하였다.“이쁜 아기야, 딱 한 입만 먹을까? 이렇게 아무것도 안 먹으면 안 돼.”이렇게 아무것도 안 먹고 버티고 있다가는 아이에게 문제가 생길까 봐 걱정이었다.강이한을 본 간호사는 깜짝 놀랐다.“강 도련님.”간호사는 일어서며 말했다.하지만 강이한은 마치 간호사를 못 본 것처럼 앞으로 다가가 병상에 누워있는 월이를 바라보았다. 간호사는 손을 내밀어 그릇을 그의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다.그러자 강이한은 자리게 앉았다.그릇에 있는 음식은 아이가 먹기 딱 좋은 음식이었지만 입맛에 잘 맞는 것인지는 모른다. 어찌 됐든 정씨 가문에서 월이를 애지중지하는 정도를 보면 아이를 엄청 알뜰하게 키웠을 게 뻔했다.강이한은 그릇에서 음식을 한술 떠서 월이의 입가에 대며 말했다.“아, 입 벌려.”꼬맹이는 더 세게 훌쩍거렸으며 더 세게 울었다.이토록 아담한 몸뚱이를 한 꼬맹이가 어디서 난 힘으로 이렇게 난리를 피우는지 정말 신기할 정도였다. 월이는 아직도 말을 듣지 않았다.강이한은 울고 있는 월이의 모습을 보며 말했다.“그만 울어. 울지 마. 밥만 다 먹으면 널 데리고 엄마 찾으러 갈게.”“엄마. 엄마한테 갈래요. 엄마.”꼬맹이는 계속해서 엉엉 울었다. 하지만 강이한이 계속해서 말했다.“밥 안 먹으면 엄마 찾으러 안 갈 거야.”꼬맹이는 순간 똘망똘망한 눈으로 강이한을 경계하면서 쳐다보았다.그의 말을 믿지 않는 것이 분명했다.이렇게 어린아이가 벌써 깊은 경계심을 가진 것을 봐서 이유영의 경계심을 물려받은 것이 아닌지 정말 의심이 들 정도였다.‘아마도 물려받은 거겠지?’“입 벌려!”강이한은 월이를 보며 말했다.사실 그는 아이와 어울리는 법을 잘 모른다. 특히 월이는 이온유와 달랐다. 이온유는 강이한을 엄청나게 의지했다. 그래서 그는 언제나 부드럽게 이온유를 대할 수 있었다.하지만 눈앞에 있는 얼굴이 손바닥만 한 월이의 두 눈에서 경계심을 본 순간 강이한은 막막해졌다.“먹자.”그는 열심히 다정하게 눈앞에
월이는 고작 어린아이일 뿐이었다.어려서부터 줄곧 친숙한 사람들의 따뜻한 보살핌을 받았던 월이가 지금 갑자기 낯선 환경에 덩그러니 놓이니 엄청나게 두려워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강이한은 아픈 이맛살을 주물럭거렸다.그는 그저 머리가 띵해 나는 것만 같았다.의사가 들어오면서 심각한 얼굴로 강이한에게 말을 건넸다.“강이한 씨, 이쪽으로 와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이온유의 주치의가 그를 불렀다.강이한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서면서 무의식적으로 침대 위에 있는 월이를 한눈 보고는 끝내 몸을 돌렸다.문 앞에서 이정을 스쳐 지나갈 때 강이한이 입을 열었다.“쟤한테 뭐 좀 먹여.”“네.”이정은 고개를 끄덕이었지만 눈빛은... 점점 더 심각해졌다.빠른 걸음으로 떠나는 강이한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이정은 몸을 돌려 병실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침대 위에서 끊임없이 울고 있는 꼬맹이를 보다가 또 책상 위에 놓여있는 한 술도 안 먹은 죽을 보았다.“우리 월이.”이정은 침대 위에 앉고는 연민이 가득한 눈빛으로 울고 있는 꼬맹이를 바라보았다.그리고 그는 작은 소리로 말했다.“우리 먼저 뭐 좀 먹을까요?”월이는 여전히 울음을 그치지 않았다.“입맛에 안 맞아요?”“외할머니가 보고 싶어. 엄마가 보고 싶어.”이소월은 애잔한 말투로 말했다.외할머니가 보고 싶다는 말과 엄마가 보고 싶다는 말, 이 두 마디는 요 며칠 동안 이소월이 제일 많이 한 말이었다.“그럼 우리 먼저 밥부터 먹고 밥 다 먹으면 삼촌이 월이 데리고 엄마 찾으러 갈까요?”“싫어. 싫어!”꼬맹이는 난리를 피웠다.이 수작은 이소월에게 전혀 먹히지 않았다. 월이는... 이유영과 임소미를 만나지 않으면 밥도 안 먹었다.지금 밖에는 파리가 한창 난리가 나고 있었다.정씨 가문은 더더욱 파리를 전부 뒤집어엎었다.이러다가는 결국 이곳까지 찾아올 게 분명했다. 그때가 되면 어떤 장면이 일어날지 이정은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그의 눈빛에는 걱정이 점점 짙어
‘이 아이를 돌려보내라고? 그럼 우리 온유는... 살길이 없어지는 거잖아.’강이한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이유영이 이소월을 데려가기만 하면 수술할 기회가 절대 다시 오지 않을 것이었다.이정이 말을 꺼냈다.“하지만 이 아이를 여기에 남겨둔다고 해도 수술할 수 있는 몸 상태가 아닙니다. 이 아이는 도련님의 친딸인데 아이가 불쌍하지도 않습니까?”이소월이 딱하다는 소리인지 아니면 아이가 강이한 같은 아버지를 둔 것이 불쌍하다는 소리인지는 알 수 없었다.원래도 싸늘했던 강이한의 눈빛은 순간 이정을 바라보면서 더욱 어둡고 무섭게 변했다.맞는 말이었다.이정이 말한 것도 다 사실이었다. 이소월을 여기에 남겨둔다고 한들 어쩔 수 없었다. 아이가 여전히 밥을 먹지 않으니 이런 몸 상태로는 전혀 수술을 받을 수 없었다.심지어 이렇게 나갔다가는 정말 무슨 큰일이 일어날지도 모른다.강이한은 두 눈을 꾹 감았다.그 순간 그의 마음속에서는 도대체 어떤 감정들이 용솟음치고 있었는지 아무도 모른다. 한참이 지나서야... 그는 다시 눈을 떴다.병상 위에서 다시 울다 잠든 꼬맹이의 모습을 보면서, 눈물이 눈가에 주렁주렁 맺혀있는 아이의 모습은 정말 이정의 말대로 가엽기 그지없었다.순간 그의 머릿속에는 이온유의 창백한 모습이 떠올랐다.결국, 강이한은 몸을 돌리면서 이정에게 말했다.“의사 보고 얘한테 영양제 좀 놓아달라고 해.”“...”‘이래도 이소월을 돌려보내지 않겠다는 거야? 이 아이는... 엄연히 도련님의 친딸이잖아. 이 지경에 이르렀다 해도 여전히 마음을 바꾸지 않겠다는 거야?’비록 지금 이온유의 목숨이 위태한 것은 사실이지만 강이한의 이 결정은 이정을 깜짝 놀라게 했다....미쳤다.제대로 미쳤다.꼬박 3일 동안 이유영은 눈을 붙인 적이 없었다. 눈을 감기만 하면 월이가 수술대에 누워있는 모습이 떠오르곤 하였다.마치 전생의 이유영처럼, 그때... 그녀는 전혀 반항할 힘이 없었다. 더군다나 아이인 월이는 더 말할 것도 없었다.이런 생각이 들자 이
여진우와 박연준은 거의 앞뒤로 아이의 행방을 알아냈다.먹구름으로 뒤덮였던 이유영의 세상은 마치 이 순간에 확 밝아진 것만 같았다.차 안에서 그녀는 작은 손으로 박연준의 코트를 꽉 쥐었다. 박연준이 그녀에게 말을 건넸다.“강이한이 월이와 유전자 검사를 진행했다고 해. 그리고 이온유와 적합성 검사도 진행했대.”“사실 하나 마나 이젠 다 상관이 없어!”이유영은 스스로 다 인정하였다.강이한이 핸드폰을 열기만 하면 볼 수 있는 것들이었다.하지만 그는 이온유에게 수술을 시켜주기 위해 거의 모든 연락 방식을 다 끊어놓았다. 이유영이 무슨 방법을 쓰든 간에 다 그에게 연락이 닿지 않았다.강이한은 정말 사람을 절망하고 또 분노하게 했다.강이한과 월이의 행방을 알아낸 지금, 그녀의 머릿속에서 제일 많이 떠오른 생각은 그놈을 보자마자 바로 죽여버리겠다는 것이였다. 그녀가 이런 말을 하면 아무도 믿지 않을 것이었다.“조금 전 강이한이 병원 사람을 시켜 월이에게 영양제를 놓았다고 해!”“...”이 말을 들은 순간 이유영의 안색은 확 변했다.그녀는 이해가 안 간다는 얼굴로 박연준을 보며 물었다.“그게 무슨 뜻이야?”이 순간 박연준이 한 말에 대해 이유영은 아직 제대로 읽어내지 못했다.박연준은 쏜살같이 차를 몰았다.“월이가 줄곧 밥을 안 먹었다고 해. 하지만 강이한은... 그래도 이온유에게 수술을 시켜줄 생각이야!”“...”원래도 안 좋던 이유영의 안색은 순간 더욱 어두워졌다.‘월이가 밥을 안 먹었다고? 며칠이 지났지?’이유영은 월이가 도대체 강이한에게 잡혀간 지 며칠이 되었는지 까먹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동안 강이한의 곁에 있으면서 아이는 줄곧 밥 먹는 것을 거부하였다.‘이런 상황에서 강이한은 여전히 월이를 갖고... 이온유에게 수술을 시켜주겠다는 거야?’“강이한은 이미 월이가 자기 친딸이라는 것을 알았지? 그렇지?”이유영은 자신의 목소리가 안 들리는 것처럼 물었다.“맞아!”“...”이유영은 단 한 번도 잿빛이 어떤 것을 의미하는지를 생
“어느 정도 진행되었어?”강이한이 말한 것은 이소월에게 주사를 놓는 일이었다.“...”바로 이때 이온유를 담당하고 있던 간호사가 부랴부랴 달아오면서 말했다.“강이한 씨, 큰일 났습니다. 이온유 아가씨 쪽으로 갑자기 많은 사람이 나타나서 억지로 아가씨의 병실로 쳐들어갔습니다.”“...”“...”강이한과 이정 두 사람은 모두 말문이 막혔다.강이한은 온몸을 파르르 떨면서 무엇인가를 생각하더니 안색이 확 변했다.그러고는 빠른 걸음으로 이온유의 병실을 향해 걸어갔다. 코너를 돌자마자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박연준이 경호원 2명을 바닥에 내동댕이친 모습이었다.그리고 이유영은 위험한 기운이 가득한 채 병실 문을 열었다.그녀의 뒤에는 여진우와 정씨 가문의 최익준 등 사람들도 와 있었다.‘유영이 손에 든 반짝이는 것이 무엇이지?’불빛에 반사되면서 차가운 빛을 보였다.“이유영!”강이한은 크게 고함을 질렀다.모든 분노에 찬 눈빛은 다 강이한 쪽으로 몰렸다. 강이한은 미친 듯이 병실 앞으로 걸어갔다.병실 앞에 도착하기 일보 직전, 여진우가 소리 없이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여진우의 몸뚱이를 넘어서 병실 안이 보였다. 그러자 이유영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이온유의 수액을 단번에 확 잡아당겨 버린 것을 볼 수 있었다.“이유영!”강이한은 심장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으며 이유영을 보며 고함을 질렀다.하지만 이유영은 마치 이성을 잃은 것처럼 다음 순간 그녀의 손은... 산소 호흡기를 향해 내밀어졌다.“멈춰. 당신 그 손 멈추라고!”강이한은 미친 것처럼 여진우를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 하지만 여진우는 번개처럼 상대방의 공격을 휙 피했다.빈틈을 타서 강이한은 병실 안으로 들어가려고 했으나 또다시 여진우에게 가로막혔다.“너도 아픈 것을 알아?”“이유영, 당장 멈추지 못해? 평생 당신 아이를 못 보게 될 줄 알아!”말이 끝나자 이유영의 손동작은 더욱 거침이 없었다.강이한은 숨이 턱턱 막혔다.“무슨 일 있으면 나한테 화풀어. 나한테!”그랬다. 강이한
임소미와 정국진은 이미 월이를 성공적으로 구해냈다. 그러니... 조금 전 이유영, 박연준과 여진우 등 사람들이 이온유 쪽으로 온 것은 강이한을 다른 쪽으로 유인하기 위한 계략이었다.정국진은 실망으로 가득 찬 싸늘하고 심오한 눈빛으로 강이한을 바라보았다.이유영은 냉철하게 강이한을 휙 밀쳐냈다. 그 순간... 강이한 힘을 모조리 잃어버리고 바닥에 축 늘어졌다.이유영이 발걸음을 뗀 순간 강이한이 입을 열며 말했다.“당신이 미워할 거면 나만 미워해. 그들과는 상관이 없어...”여기서 말한 그들은 한지음과 이온유를 말한 것이었다.이유영은 강이한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고 바로 임소미를 향해 걸어갔다. 몸부림친 것 때문에 얼굴이 시뻘게진 월이는 지금 부들부들 떨면서 임소미의 품에 안겨있었다.이유영을 본 순간 월이의 두 눈에는 눈물이 핑 돌았다. 월이는 두 팔을 벌리면서 이유영에게 안기려고 들었다.이유영은 월이를 넘겨받았다. 꼬맹이는 훌쩍훌쩍하고 있었는데 그 모습은 딱 봐도 적지 않게 놀란 것이 분명했다.이유영은 조심스럽게 월이를 품속으로 끌어안았으며 소리없이... 눈물을 흘렸다.“일단 나가자.”임소미는 이유영을 보며 말했다.나머지 일들은 정국진과 여진우에게 다 맡기면 되었다. 그들이 강이한을 어떻게 처리하든 그건 다 이유영이 마주해야 할 일이 아니었다.이유영은 임소미의 발걸음을 따라 복도의 끝머리로 걸어갔다.강이한은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한테 눈길조차 한 번 주지 않은 이유영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 순간 그녀의 뒷모습은 살짝 떨려있었으며 동시에 무궁무진한 굳건함도 깃들어있었다.한순간 강이한은 마치 심장이 세게 베인 것만 같이 느껴졌다.그에게 아프냐고 물으면 대답은 당연했다.숨이 막힐 정도로 아팠다.가슴속에서... 한 가지 목소리가 끊임없이 그에게... ‘이유영을 잃었어, 영원히 잃었어.’라고 말해주고 있었다....박연준은 임소미와 이유영을 데리고 먼저 자리를 떴다.현장에는 강이한, 정국진, 여진우만 남았다. 복도의 분위기는 극도로 얼
이정과 강이한 신변의 사람 몇 명이 앞으로 나섰다.“도련님.”“...”일어선 순간 강이한은 싸늘하게 이정을 한 눈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은 정말 깊은 못처럼 깊숙했다.이정은 살며시 고개를 숙였다.그리고 강이한의 몸에 있는 상처를 보자 가슴이 섬뜩하면서 긴장되었다.“바로 가서 의사 선생님을 모셔 오겠습니다.”이정은 강이한을 다치게 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 거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다.그러나 이 세상에 지금 이유영 말고 감히 그를 해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그는 오로지 이유영에게만 반격하지 않을 뿐이었다....백산 별장의 주방에서, 이유영은 조심스럽게 월이에게 죽을 먹이고 있었다. 꼬맹이는 그녀의 품에 안겨있었으며 이번 일 때문에 매우 놀란 것이 분명했다.그래서 이유영의 품에 안긴 후로부터 떨어지지 않으려고 했다.“월아, 외할머니한테 올까?”월이가 백산 별장에서 사라진 거라서 요 며칠 임소미도 덩달아 속이 말이 아니었다.당연히 이것들은 모두 강이한이 은밀히 꾸민 계략들 때문이었다.그게 아니면 이곳에서 감히 월이를 데려갈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임소미도 마음이 안 좋았다. 하지만 이토록 낭패한 이유영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그녀도 마음이 아팠다.“제가 할게요.”이유영의 말투는 아주 밋밋했다.그리고 배가 많이 고팠는지 월이는 이렇게 이유영의 품에서 죽을 두 그릇이나 비웠다. 하지만 월이에게 너무 많이 먹이면 또 안 되었다.천천히 조금씩 나아가야 했다.“엄마.”“엄마 어디 안 가.”이유영이 일어선 순간, 월이의 작은 팔은 바로 이유영의 목을 둘렀다.적잖게 겁을 먹은 것이 분명했다.이유영은 월이를 안고 살살 달래주었다.그녀의 머릿속은 지금 복잡하기 그지없었다. 현재... 그녀는 아이를 안아서 잘 위로해 주고 달래주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지금 그녀가 강이한을 얼마나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싶은지 아무도 모를 것이었다. 병원에서 찌른 그 한 칼은 강이한이 이유영에게 준 상처에 비하면 정말 아무것도
이유영이 집으로 돌아온 뒤, 임소미는 사람을 시켜 조사를 시작했고 이유영이 강이한 곁에서 결코 평온한 시간을 보내지 못했다는 사실을 이내 알게 되었다. 하지만 어느 정도였는지는 알지 못했다.며칠 동안 진영숙의 광기에 가까운 모습을 목격한 뒤에야 그녀는 대략 짐작할 수 있었다. 그녀의 남편이 왜 서주로 떠나서 죽음을 가장했는지를.모두 이 여자 때문이었다. 진영숙이 그토록 괴롭게 만들었던 것이다.남편뿐만 아니라 지금 강이한의 행방조차 그녀는 알지 못했다. 여자로서 그 책임은 결코 작지 않았다.임소미는 감정을 가라앉힌 후에야 이유영에게 조심스레 말했다. 진영숙이 사실은 월이를 데려가려 했다는 것을.“며칠 동안 데려가겠다고 했다고요?”“그래서 내가 화가 났던 거야.”진영숙의 행동을 보면 며칠은 말뿐인 핑계였다.그녀가 했던 말을 떠올리며 임소미는 차가운 웃음을 지었다.‘이제 아무것도 없고 오직 손녀만 남았다고? 과연 손녀의 의미를 알고는 있는 사람인가?’이유영은 말없이 얼굴을 굳혔다.진영숙은 아이를 사랑해서가 아니라 집착하고 있었던 것이다.“유영아, 이번 일은 그녀에게 연민을 가질 필요 없어.”임소미의 목소리엔 단단한 결심과 냉기가 섞여 있었다.진영숙은 자신이 모든 걸 잃었기 때문에 아이라도 데려가고 싶다고 했지만 그런 상실에 대해 임소미는 전혀 동정하지 않았다.“알겠어요, 엄마. 제가 처리할게요.”이유영은 어머니를 안심시켰지만 그녀의 목소리 역시 차가웠다.“어떻게 처리할 거니?”‘어떻게 처리할까?’이유영의 눈빛이 점점 깊어졌다.그녀는 당연히 생각한 방법이 있었다.임소미를 진정시킨 뒤, 이유영은 백산 별장을 나섰고 밖에선 지혁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아가씨.”“풍산 그룹으로 가요.”이름을 입에 올리는 것조차 마음이 무거웠다. 가능하다면 평생 다시는 가고 싶지 않은 곳이었다.그곳은 과거가 덕지덕지 붙은 장소였고 이유영은 그것들과 멀어지고 싶었다.“윙윙윙.”그때, 휴대전화가 울렸다.발신자는 박연준이었고 이유영은 망설임
이유영에게는 참으로 견디기 힘든 시간이었다.그녀는 임소미의 품에 파고들며 가느다란 팔로 어머니의 허리를 꼭 안았다.“엄마, 미안해요. 제가 잘못했어요.”그녀는 진심으로 반성하고 있었다.오래전 소은지는 이렇게 말했었다. 강이한은 연애 상대론 괜찮지만 결혼은 다르다고.그때 변호사였던 소은지는 경제력이나 사회적 지위가 맞지 않는 결혼이 얼마나 불행한지를 잘 알고 있었다.그래서 그녀가 강이한과 결혼을 결심했을 때, 소은지는 그녀를 말렸었다. 소은지는 그녀의 결혼을 말렸던 유일한 사람이었다.결국 소은지의 말은 모두 옳았음이 증명됐다.끝났다고 믿었던 그 관계는 여전히 그녀의 삶에 깊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고 심지어 가족들까지도 그 여파에 시달리고 있었다.그때, 등에 따뜻한 손길이 느껴졌다.“괜찮아. 엄마가 있잖아. 앞으로는 아무도 너를 괴롭히지 못할 거야.”이유영은 말없이 고개를 숙였고 눈물이 눈가에 가득 차올랐다. 참으려 해도 눈물이 뺨을 따라 끝없이 흘러내렸다.예전에도 어머니는 그녀를 이렇게 품어주었다. 하지만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후, 그녀의 세계는 완전히 무너져 버렸고 그 이후로 어떤 일이 일어나면 모두 혼자 견뎌야만 했다.임소미가 감싸안아 주자 이유영의 마음은 다시금 따뜻함으로 물들어갔다.그리고 이 감정은 그녀의 마음 깊은 곳을 더욱 단단하게 만들었다.“앞으로는 아무도 엄마를 괴롭히지 못하게 할 거예요.”그녀가 말한 '아무도'는 명백히 진영숙을 가리키고 있었다.그렇게 오랫동안 떨어져 지낸 사람에게서 다시 이런 고통이 돌아올 줄은 몰랐다.“엄마가 널 지켜줄게. 꼭 지켜줄게.”임소미는 그 말을 반복하듯 속삭였다.오늘 밤, 임소미의 마음속에 일어난 파장은 누구도 헤아릴 수 없었다.진영숙이 막말을 퍼붓고 손까지 쓰는 모습을 보며 이유영이 강씨 가문에서 겪었을 고통이 얼마나 컸을지를 임소미는 문득 깨달았다.사모님의 우아한 모습은 진영숙에게서 찾아보기 힘들었다.불편한 감정이 들 때마다 손부터 나가는 사람이었고 그런 사람과 살아야
이유영이 돌아오고 그녀는 진영숙과 임소미 사이에서 벌어진 격렬한 장면을 목격하게 되었다. 두 명의 도우미가 진영숙을 붙잡아 끌어내고 있었다.임소미의 얼굴은 창백했고 가슴은 거세게 요동치고 있었다.그녀는 순간적으로 분노가 솟구쳤다.임소미는 이유영을 보자마자 재빨리 붙잡고 말했다.“너 먼저 위로 올라가.”“무슨 일이 있었어?”이유영이 물었다.정씨 가문에 돌아온 지 오래된 만큼 그녀는 자신의 어머니가 어떤 사람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우아하고 온화한 사람인 만큼 지금 이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분명히 알 수 있었다.임소미가 대답하기도 전에 진영숙이 화를 내며 소리쳤다.“이유영, 넌 누가 너한테 눈을 기증해 줬는지 모르지? 강이한이 네게 빚을 졌다고 하지만 사실은...”“입 다물어!”진영숙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임소미가 단호하게 그녀의 말을 끊었다.이유영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조용히 서 있었고 진영숙은 여전히 무언가 더 말하고 싶어 했지만 더는 이어가지 않았다.그녀는 분노로 가득 찬 눈으로 이유영을 노려보았고 그 눈빛엔 전례 없는 증오가 서려 있었다.예전에 강이한과 결혼했을 때도 진영숙은 이유영을 이런 눈빛으로 바라보았다.한 번도 따뜻한 시선을 준 적이 없었다.그리고 지금, 용성시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리며 그 증오가 더욱 깊어진 듯했다.“유영아, 너 먼저 위로 올라가.”“엄마.”“올라가!”임소미는 이유영의 말을 끝까지 듣지 않고 격하게 소리쳤다.임소미가 이런 식으로 이유영에게 말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지금의 상황이 임소미에게 얼마나 큰 충격이었는지 그대로 드러났다.이유영은 무언가 더 묻고 싶었지만 눈앞에서 벌어진 상황에 말문이 막혀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뒤돌아 안으로 들어갔다.그 순간, 진영숙은 자신을 붙잡고 있던 도우미들의 손을 뿌리치고 이유영의 뒷모습을 향해 소리쳤다.“이유영, 강이한은 너에게 빚진 게 없어. 강이한은 오히려 너 때문에 모든 걸 잃었어. 너야말로 가장 잔인한 사람이야. 네 눈조차..
임소미는 혈압이 치솟았고 화가 극에 달한 상태였다.“내 말이 틀렸나요?”“틀렸냐고? 제대로 된 일을 한 적은 있고? 당신만 제대로 된 선택을 했더라면 유영이와 강이한이 이렇게까지 망가지진 않았을 거야.”임소미는 참았던 감정을 폭발시키며 격렬히 외쳤다.진영숙의 얼굴이 순간 굳어졌다.임소미의 말이 맞았다. 진영숙은 두 사람 관계에서 많은 잘못을 했다.하지만 지금은 모든 게 달라졌다.강이한은 사라졌고 강서희도 여전히 세상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에게 남은 건 오직 월이 뿐이었다.오늘 이곳에 와서 월이를 보게 된 순간, 월이를 자신의 곁에 두고 싶다는 생각이 더욱 강하게 자리 잡았다.“사람 불러!”임소미가 크게 외치자 집사들과 도우미들이 급히 달려왔다.“이 여자를 당장 내쫓아!”“당신이 감히 그럴 수 있을까?”“뭐라고?”임소미는 잠시 귀를 의심했다.‘이 여자는 지금 도대체 뭐 하려는 걸까?’조금 전 아이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을 보며 아이에게 조금의 정이라도 남아 있는 줄 알았다.하지만 모든 것은 착각에 불과했다.결국 그녀는 후회라는 감정을 모르는 인간이었다.진영숙이 오늘 여기 온 것도, 월이에게 다정하게 굴었던 것도 결국 아무것도 남지 않았기 때문에 한 마지막 발악이었다.그녀의 말은 그저 그럴싸한 포장일 뿐 사실은 월이를 자신의 곁으로 끌어들이고 싶은 마음뿐이었다.그리고 뻔뻔하게도 무례하기까지 했다.진영숙은 임소미의 눈을 응시했다. 조금 전까지 남아 있던 따뜻함은 온데간데없고 그 자리에 남은 것은 매서운 날카로움뿐이었다.그녀는 침착하게 말했다.“우리 아들이 왜 서주를 떠났는지 내가 정말 모를 거라고 생각했어? 임소미, 당신들은 정말 단 한치의 양심 가책도 못 느꼈어?”왜 강이한이 서주를 떠났는지 시간대와 상황을 조합해 보면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추측이 사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확신을 가졌다.특히 떠나기 전, 시윤이 건넨 말이 결정적이었다. 이유영이 용성시에서 수술을 받았던 그 시기에 강이한은 서주에
강이한은 그렇게 어둠 속에서 절망의 고통을 몸소 겪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괴로워도 수술을 받겠다는 생각은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한때 이유영이 어둠 속에서 얼마나 무섭고 무력했는지를 그는 이제서야 조금씩 체감하고 있었다....파리에서 진영숙은 다시 백산 별장을 찾았다. 여전히 강이한의 소식은 들리지 않았고 시윤은 강이한이 이정과 신시욱을 데리고 떠났다고 말했다.그 두 사람의 능력을 생각하면 강이한이 스스로 나타나지 않는 한 그 누구도 그를 찾을 수 없을 것이다.진영숙은 어머니로서 절망에 가까운 마음으로 그를 수소문했지만 아무리 애를 써도 그의 행방을 찾을 수 없었다.그리고 알면 알수록 그녀의 마음은 점점 더 불편해졌다.“정말이지, 당신은...”백산 별정까지 찾아온 진영숙의 뻔뻔함에 임소미는 답답함을 참지 못하고 굳은 표정으로 응수했다.진영숙은 한때 유능한 여성이었고 그런 그녀에게 감히 저런 얼굴을 하는 사람은 없었기에 그녀에겐 익숙하지 않은 대우였다.“저는 아무것도 없어요. 저 좀 봐주세요.”그녀의 목소리에는 전에는 없던 고통이 서려 있었다.그렇다. 지금의 진영숙에겐 주변에 기댈 친척도 함께할 가족도 없었다. 그녀의 앞에 있는 건 손녀인 월이 뿐이었다.오늘도 그녀는 월이를 위해 여러 장난감을 준비해 왔지만 임소미는 그 모든 행동이 불쾌하게만 느껴졌다.“당신도 어머니였잖아요. 제 마음이 얼마나 불편한지 알잖아요.”임소미는 차가운 목소리로 잘라 말했다.‘봐준다고? 당신이었으면 그렇게 할 수 있을까?’이유영이 강이한과 결혼했을 때, 진영숙은 그녀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심지어 뱃속의 아이조차 받아들이지 않았었다. 그런 사람이 지금 이토록 헌신적인 할머니 행세를 하니 임소미는 화가 났다.누구에게 보여주기 위한 연극으로밖에 안 보였다.진영숙의 눈엔 고통이 어렸다.“저는 정말 생각하지 못했어요.”임소미의 말에 그녀는 도무지 어떤 대답을 해야 할지 몰랐다.아무리 자존심 강한 진영숙이라 해도 진실을 알게 된 지금, 과거
그녀는 어둠에 익숙해지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강이한을 떠난 뒤 어둠 속에서의 삶을 받아들이기 위해 스스로를 단련하고 있었다.신시욱과 이정은 잠시 서로를 바라보다 침묵에 잠겼다. 그 질문은 그들 사이에서도 너무나 무거운 것이었기 때문이었다.이유영이 그때 얼마나 오랜 시간을 그렇게 보냈는지, 사실 그들조차 정확히 기억하지 못했다. 다만 또렷하게 남아 있는 건 그녀가 깊은 괴로움 속에 잠겨 있었다는 사실뿐이었다.그리고 그녀가 괴로워할수록 사람들은 어둠 속에서의 고독이 얼마나 잔혹한 감정인지 조금씩 알아가기 시작했다.그녀는 깊은 절망 속에 빠져 있었다.그리고 지금의 강이한은 어쩌면 그때의 이유영보다 더한 심연 속에서 절망을 겪고 있었다. 그는 스스로를 벌하고 있었다. 그녀가 겪었던 고통을 똑같이 겪기 위해 같은 어둠 속에 몸을 던졌다.“선생님. 각막 이식 수술 관련 소식이 들어왔습니다.”신시욱은 조심스러운 어조로 입을 열었다. 우천시에 머무는 동안, 신시욱과 이정은 한 번도 수술 신청을 멈춘 적이 없었다.그들은 강이한을 잘 알고 있었다. 자존심이 강한 사람이었지만 이유영이 원하지 않는 일이라면 그도 절대 강행하지 않았다.이유영이 시력을 잃었을 때, 그녀는 가족들이 몰래 준비했던 이식 수술조차 그녀는 단호히 거절했었다.그리고 지금의 강이한도 마찬가지였다.오랫동안 기다려 온 기회 앞에서 강이한은 조용히 거절했다.“필요 없어. 다른 사람에게 양보해.”두 사람은 말문이 막혔다. 그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올 줄은 상상도 못 했던 두 사람은 호흡이 가빠지기 시작했다.‘필요 없다고? 그게 무슨 뜻이란 말인가?’“선생님.”신시욱의 목소리는 긴장감에 더욱 떨려왔다.그 어떤 강인한 남자라고 해도 이 순간 목소리에서 전해지는 떨림을 억누를 수 없었을 것이다.최근 며칠간 그가 어떻게 지내왔는지 두 사람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강이한은 자신을 벌하며 살고 있었고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정말 이미 충분했다.‘받아야 할 벌은 다 받았는데 왜 여전히 자신을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어둠 속에서 지낸 지 얼마나 오랜 시간이 지났을까?어둠 속에서 사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이제서야 알 것 같았다. 새들의 지저귐이 더 또렷하게 들리고 사소한 바람 소리 하나에도 감각이 예민해졌다.강이한은 우천시에 있는 주택 마당에 놓인 긴 의자에 앉아 있었다. 우천시에 오늘같이 이렇게 따스한 햇살이 비추던 때가 언제였던가?이정이 조심스레 다가와 담요를 덮어주며 말했다.“햇살은 있어도 아직은 쌀쌀하네요.”말은 없었지만 강이한은 이정의 발걸음 소리와 숨소리로 그가 신시욱이 아님을 알아차렸다.그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번졌다.그때의 이유영도 지금처럼 감각이 예민했을까?“이정.”“네.”“유영이는 이 마당이 어떤 모습인지 전혀 보지 못했겠지?”“네.” 이정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이유영은 이곳에서 몇 개월을 머물렀지만 실상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이 마당은 끝내 그녀에게 낯선 곳으로 남게 되었다.지금 그녀를 우천시로 다시 데려온다 한들 스스로 길을 찾아올 수도 없을 것이다.강이한은 낮게 중얼거렸다.“하지만 유영이는 이 마당에 뭐가 있는지는 알고 있었어.”그렇다. 보지 못했어도 그녀는 감각으로 모든 것을 구분했다. 마치 지금의 강이한처럼.이정이 조심스레 물었다.“이럴 가치가 있었습니까?”그가 이곳에 온 이후, 누군가가 처음으로 던진 질문이었다. 그는 말할 수 없이 쓸쓸한 미소를 지었다.“가치가 있었는지는 사람이 판단할 수 있는 게 아니야.”그것은 마음으로 느끼는 것이다.그리고 그는 알고 있었다. 자신이 이유영에게 진 빚은 결코 눈 한 쌍으로는 갚을 수 없다는 것을. 이건 가치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의 문제였다.예전에 어둠 속에서 더듬거리던 이유영의 손짓을 떠올리면 가슴이 미어졌다. 지금 자신이 어둠 속에서 겪고 있는 공포는 당시 그녀가 느낀 감정에 닿을 수조차 없었다.점심 식사 시간.“쨍그랑.”강이한이 손을 뻗는 순간, 접시와 그릇이 떨어지며 산산이 부서지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공기는 순간 얼어붙었다
이유영은 자신의 몸에 강이한과 관련된 어떤 흔적도 남기고 싶지 않을 것이다.그녀는 남은 인생에서도 강이한과 어떤 방식으로든 다시 얽히는 일을 절대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월이의 일로 인해 그녀는 너무도 깊은 상처를 입었고 강이한을 평생 용서할 수 없었다.그런 사람의 눈을 자신이 기증받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그 결과는 상상조차 하기 싫었다.그리고 강이한 역시 그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그래서 그는 수술 전에 모든 철수 준비를 마친 것이고 이유영에게는 아무것도 알리지 말라고 지시했다.이미 많은 상처를 준 이후, 아무리 많은 것을 베푼다 해도 이유영의 용서를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을 것이다.자신과 이유영 사이에는 어떠한 선택지도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고 그래서 과감하게 그녀의 손을 놓은 것이다.‘이렇게 되면 두 사람 사이에 더 이상 빚진 것이 없게 되는 걸까?’하지만 단순히 눈을 기증했다고 해서 해결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유영아, 왜 강이한에 관해 묻는 거야? 혹시...”소은지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결국 그녀는 언제나 이유영 편이었다.특히 수술 전, 마지막으로 강이한을 마주했을 때 그가 남긴 말을 들은 후로 그녀조차도 강이한을 용서할 수 없다고 느꼈다.“나랑 장난해?”소은지의 말에 이유영의 표정은 단숨에 싸늘해졌다.그 차가운 기색을 확인한 소은지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그렇지 않아서 다행이야... 그래, 그렇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야.”소은지는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나는 그냥 권력에 그토록 집착했던 사람이 어떻게 갑자기 서주를 내려놓았는지 궁금했을 뿐이야.”“음모일지도 모르지.”소은지는 잠시 생각하다 이렇게 말했다. 그녀는 화제를 서둘러 다른 방향으로 돌리려 했다.“...”‘음모’라는 단어에 이유영은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소은지는 그녀의 웃음을 보고 또 한 번 안도했다.“ 월이 보러 왔을 때, 그 사람이 뭐라고 했는지 알아?”“뭐라고 했는데?”“일어날 일은 언제든지 다시
강이한은 서주에서의 모든 일을 철수하고 사라졌다. 그와 함께하던 사람들도 함께 자취를 감췄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이유영은 그저 강이한의 또 다른 속임수일 거라고 생각했다.강이한과 박연준, 두 사람은 누군가를 철저하게 속이는 데에 능숙한 사람들이었다.박연준은 진짜로 서주의 모든 것을 장악하고 있었고 진영숙은 파리에서 집요하게 강이한의 행방을 묻고 다녔다. 그걸 보며 이유영은 강이한이 정말로 사라졌다는 사실을 확신할 수 있었다.“무슨 생각해?”반산월에서 소은지는 이유영의 어두운 얼굴을 보고 조심스레 물었다.이유영은 고개를 들며 말했다.“은지야.”“응?”“어떻게 된 거라고 생각해?”서주의 현 상황은 여전히 알 수 없는 부분이 많았지만 최근 일련의 사건들을 거치며 이유영은 점점 확신에 가까워졌다.강이한은 정말 그의 사람들과 함께 자취를 감췄다. 그는 마치 세상에서 흔적 없이 사라진 듯했다.권력을 중시하던 인물이었기에 은둔은 아닐 것이 분명했다. 강이한은 모든 것을 내려놓고 홀로 조용히 지낼 성격이 아니었다.“뭐라고?”소은지는 이유영의 갑작스러운 질문을 이해하지 못한 듯 되물었다.이유영은 소은지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을 이어갔다.“강이한이... 정말 사라졌어.”“그래. 그 얘기 예전에도 했었잖아.”이유영이 이제서야 이 사실을 믿게 되었다는 것을 소은지는 알아챌 수 있었다.예전엔 믿지 않았던 이유영의 모습이었지만 이제는 완전히 달라졌다. 그녀는 강이한의 실종을 인정하고 있었다.강이한과 박연준은 이유영의 마음속에서 그리 좋은 사람들이 아니었다.연서의 사건이 터진 이후, 그녀는 두 사람을 음모로 가득 찬 사람들로 생각했고 그래서 처음 강이한이 사라졌다고 했을 때도 이유영은 그것을 단순한 음모의 연장이라 여겼다.두 사람은 늘 서로 무관한 척 행동했지만 그 뒤에는 누구도 상상 못 할 거대한 연관성이 있었던 것이다.신지수는 여러 번 전화를 걸어왔다.강이한이 서주를 떠난 후, 신씨 가문도 연쇄적으로 피해를 보았고 그녀는 그 일을 처리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