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이유영은 정말 강이한을 죽여버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다. 강이한은 서재욱의 많은 프로젝트를 빼앗아 가 사람을 어안이 벙벙하게 만들었다.게다가 서재욱이 절대 생각지 못한 건 강이한이 이유영에게 복수를 하기 위해 자기한테까지 그런 짓을 했다는 것이었다.“보아하니 강이한은 아직도 당신을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 모르네요.”한참 지나 서재욱은 이 한마디로 원인을 총괄했다.“...”이 말을 들은 이유영은 제자리에 굳어져 버렸다!‘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 모른다고?’비록 이유영은 진작에 마음속으로 이 점을 잘 알고 있었지만, 현재 서재욱의 입에서 이 얘기를 듣자니, 이유영은 정말 속이 말이 아니었다.서재욱이 말한 것처럼 강이한은 종래로 어떻게 타인을 사랑해야 하는지 모른다. 강이한은 사랑을 모를 뿐만 아니라 사랑을 줄 줄도 몰랐다.그의 사랑은... 소유였고 상해였고 또 파멸이었다.“그렇다고 해도 당신은 아직도 그 사람과 함께 하려고 고민 중인가요?”“난 종래로 그 사람과 함께 할 생각이 없었어요!”“그럼, 왜 연준이를...”돌고 돌아 또다시 박연준한테 돌아왔다!솔직히 말해서 지금 서재욱이 느낀 건, 이유영은 강이한 때문에 박연준을 포기한 것이었다.하지만 서재욱의 마음속에서 박연준은 강이한보다 백배 더 나은 사람이었다.“연준 씨는 친구 하기에 아주 적절한 사람이에요. 하지만 재욱 씨, 저랑 그 사람 사이는 당신 본 것처럼 간단하지 않아요.”이 말을 들은 서재욱은 침묵했다.이 사람들의 관계가 간단하지 않다는 것을 서재욱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일이 이 지경까지 이른 줄 전혀 생각지 못했다.서재욱은 한숨을 내쉬었다.“어휴!”서재욱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이유영은 깊게 숨을 한 모금 들이켜고 말했다.“연준 씨와 강이한의 원한은 일찍이 서주에서부터 시작되었어요.”“서주요?”“네.”이유영은 고개를 끄덕이었다.‘엄청나게 먼 얘기지.’서주라는 곳에 대해 서재욱도 낯설지 않았다. 서재욱 같은 상업적인 거두들은 각국의 형
“재욱 씨, 먼저 청하시로 돌아가세요. 여기는 제가 알아서 잘 처리할게요.”이유영은 박연준의 얘기를 그만하고 싶어 화제를 돌려 서재욱에게 말했다.이건 이유영과 강이한 두 사람 사이의 대결이었다!그리고 이유영은 고개를 숙일 수 없었다.서재욱은 고개를 끄덕이었다.“그래요.”이 순간 서재욱이 승낙한 건 이유영을 난처하게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유영이 떠나려고 한 순간, 김연우가 황급히 들어오며 말했다.“대표님, 큰일 났습니다!”이 말을 할 때 김연우는 무의식적으로 이유영을 쳐다보았다.이유영의 마음도 김연우의 말과 함께 쪼여 들었다.서재욱은 이유영을 보더니 김연우에게 물었다.“또 강이한 그놈이야!?”“네!”이유영은 화가 치밀어 올랐다.강이한은 지금 그녀를 한 발 한 발 몰아쳤으며 그녀에게 숨을 돌릴 기회도 주지 않았다.이유영은 이마를 짚으며 말했다.“재욱 씨, 이 일도 제가 잘 처리할게요. 제가 죄송해요.”죄송하다는 말은 이미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어쨌든 강이한이 이번에 서재그룹에 미친 실질적인 손해는 이유영이 보상해 줄 수 있는 정도가 아니었다.이유영이 유일하게 할 수 있는 해결 방법은 최대한 빨리 이 일을 제대로 수습하는 것이었다.그녀가 일어난 순간, 서재욱이 입을 열었다.“당신과 강이한 사이는 참으로 악연이네요!”“...”이 말을 들은 이유영은 발걸음마저 멈칫했다.‘그래, 악연이네! 이 악연은 시작되고부터 끝까지 다 이토록 끈질기게 엮이다니.’그러니 다들 여자보고 남편을 잘 보고 만나라고 하는 것이었다.그렇지 않으면 여자가 끝이라고 말하면 남자가 끈질기게 달라붙어 영원히 편안하지 못하게 할 것이었다....이유영은 무슨 정신으로 엔젤 국제호텔에서 나왔는지 모른다.호텔 앞에는 강이한의 롤스로이스가 세워져 있었다. 차창을 절반 내린 사이로 강이한의 매섭고 뚜렷한 옆모습이 보였다!아무리 먼 거리를 사이 두고 있었지만, 이유영은 강이한의 몸에서 나는 위험한 기운이 느껴졌다.심호흡을 여러 번 했지만, 이유영은
“...”강이한의 손은 더 아래쪽으로 이동했다!“아니면 여기?”참다 참다 더 이상 참지 못한 이유영은 짝 소리와 함께 강이한의 뺨을 때렸다.분노에 꽉 찬 이유영은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당신이 무슨 자격으로 나한테 따져?”솔직히 말해서 이 세상에서 이유영에게 해명을 달라고 따는 사람 중에서 제일 그럴 자격이 없는 사람이 바로 강이한이였다.하지만 강이한은 자신의 처지도 잘 몰랐다.그의 안색은 싸늘하고 위험했다.“당신 정말 그만해!”“박연준이 왜 파리를 떠났고 서주 하프항까지 잃은 줄 알아!?”“...”“서주 하프항이라고 알아?”이유영의 안 좋던 안색은 순간 더욱 어두워졌다.강이한이 생각하기를 이유영이 분노하면서 되물을 줄 알았을 때, 이유영은 그저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당신이랑 그 사람 사이의 원한은 나랑 상관이 없어!”서주는 이유영이 언급할 이슈가 아니었다.두 사람이 서주에서 무슨 원한이 있었든 간에 이유영은 다 물어볼 생각이 없었다. 그녀는 이 사람들이 자기를 그 속에 끌어넣는 것이 싫었다.“하, 하긴. 이제 당신한테 서재욱이 생겼으니, 박연준이 어떻게 해서 서주 하프항을 잃어버렸는지가 왜 중요하겠어?”강이한은 비꼬며 말했다.이유영의 분노는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으며 강이한을 바라보는 눈빛은 어둡기 그지없었다.하지만 그녀가 변명하지 않는 모습에 강이한은 더욱 마음이 심란해졌다. 게다가 서재욱이 파리에 도착하자마자 이유영이 대 아침부터 달려온 것을 생각하자 강이한은 더욱 미칠 것만 같았다.강이한이 이번 생으로 건너올 기회를 얻은 건 이유영이 자기를 어떻게 배신하는가를 보려고 온 것이 아니었다!공기는 쥐 죽은 듯이 고요했으며 강이한만 조용히 미쳐갔다......파리의 많은 것들은 다 베일에 싸여있었다.모든 사람은 다 가면을 쓴 것만 같았으며 보기에는 완벽해 보이지만 가면 뒤에는 어떤 음흉한 모습이 숨겨져 있는지 아무도 몰랐다.도원산에서, 강이한이 윗몸을 벌거벗은 채 차에서 내린 순간, 밖에서 대기하던 집사와 도우
도원산에 왜 이유영의 옷이 있는지에 대해 그녀는 한 글자도 물어보지 않았다...강이한이 지금 무엇을 하든, 이유영은 전혀 관심이 없었다.강이한은 그녀를 보며 말했다.“먼저 엄수현 보고 당신 상태를 좀 봐달라고 할게.”아까 강이한은 선명하게 이상함을 느꼈다!너무 급하게 한 나머지, 이성을 잃었으니 더 세게 해서 이유영을 다치게 한 것이 분명했다.이유영은 몸을 반대편으로 돌리면서 싸늘하게 외쳤다.“나가!’이유영은 강이한이 꼴도 보기 싫었다.강이한은 나가지 않고 침대맡에 앉고는 입을 열었다.“유영아, 내가 박연준을 네 곁에서 밀어낼 수 있는 것처럼 다른 사람도 마찬가지로 다 쫓아낼 수 있어! 나 말고 당신은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어.”강이한은 담배 한 대에 불을 붙이고는 말했다.그의 말이 끝나자, 순간 이유영의 온몸이 굳어지는 것을 볼 수 있었다.얼굴색도 하얗게 질렸다.박연준... 그와 박연준 사이의 원한에 대해 이유영은 더 말하고 싶지 않았다. 두 사람 사이의 일은 두 사람이 알아서 처리하면 됐지, 그녀는 그 사이에 끼고 싶지 않았다.하지만 서재욱은...“당신 말대로 난 더 이상 서재욱과 어떠한 왕래도 하지 않을게.”“난 당신을 원해!”그는 아주 기세등등하게 세 단어를 내뱉었다.전에 박연준을 그녀의 세상에서 내쫓은 건 다 이유영을 갖기 위해서였다.“그건 불가능해!”“서재그룹은 얼마 버티지 못할 거야.”“...”이유영은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으며 눈빛에는 울화가 가득했다.강이한이 이토록 뻔뻔하게 나올 줄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서재욱과 왕래를 하지 않는 것도 모자라 자기와 같이 있어 달라고? 이런 뻔뻔한 수단은 아마 이놈만 할 수 있는 짓이야.’“강이한 당신을 뭐라고 말하면 좋을까?”‘뻔뻔하다고 해야 하나?’하지만 이건 뻔뻔한 것을 떠나서 완전... 형용할 수 없는 정도였다.“걱정하지 마, 난 그 아이를 내 친자식처럼 대할 수 있어.”“하!”이유영은 비꼬는 웃음을 지었다.그녀는 아니꼽게 말했다.“전에 나랑
“아니야!”강이한은 이미 등골에 땀이 송골송골 돋았다.서주에 있는 동안, 강이한의 마음이 얼마나 괴로웠는지 아무도 모른다. 그는 이유영이 자기와 같은 상황이 아니길 바랐다.만약 정말로 자기와 똑같은 거라면 그럼 이유영은... 두 사람 사이의 아픔과 미움에 대해 이유영은 절대로 내려놓을 수 없을 것이었다.하지만 진실은 정말로 이유영이 생각한 그런 것이 아니었다.근데 홍문동에서 일어난 화재를 떠 올리면 강이한 입가에 나온 해명은 또 아무런 신빙성이 없어지곤 하였다!그녀가 실명했던 것도 진짜였고 임신했던 것도 진짜였으며, 심지어 배 속의 아이마저 그때의 화재에서 같이 불타버린 것도 진짜였다.그건 전생이 이유영이 그와 함께하면서 지불한 대가였다.그녀가 생의 마지막을 어떻게 보냈든, 지난번의 생에서 겪었던 고통은 다 변하지 않는 사실이었다.이유영의 목에 있는 화상 상처들을 보며, 강이한은 이유영이 그 당시 도대체 어떤 고통을 감당했을지 전혀 상상할 수 없었다.“더 이상 서재욱을 괴롭히지 마. 내 감정에 있어서 난 진작에 아무런 선택도 할 수 없게 되었어.”이유영의 말투는 유달리 평온했다.하지만 그 평온함에는 허전함이 있었다.강이한은 자기 가슴이 더욱 턱턱 막히는 것만 같았다.천만 가지 생각 끝에 강이한은 입을 열었다.“난 당신이 나랑 같이 이곳에서 살기만 바라. 다른 건 요구 안 할게!”그랬다. 이유영을 원하던 데서... 같이 살면 되는 것으로 변했다.이런 전변은 강이한에 있어서 양보나 마찬가지였다.“난 당신이랑 같이 살 리 없어.”이유영이 대답했다.‘절대 그럴 리 없지. 같이 살면서 강이한이 이온유를 어떻게 아끼는지를 보라고!?’“이건 내 최후의 양보야!”원래 아픔을 곁들인 강이한의 말투는 순식간에 싸늘해졌다.이유영의 마음은 그의 말투보다 백배 더 차가웠다....엄수현은 와서 이유영에게 간단하게 검사를 해주었다. 한 의사로서 환자의 여러 가지 병 증세를 봤었다고 해도 그녀는 이유영을 보고 깜짝 놀랐다!방에서 나올 때 엄수
도원산의 밤은 아주 평온했다. 게다가 곤충의 울음소리, 대자연의 소리는 저도 모르게 사람을 안심시켰다.하지만 이유영은 지극히 피곤한 정도가 아니면 절대로 이곳에서 깊이 잠들 수 없었다.도대체 언제부터 시작된 것인지 모르지만, 강이한이 있는 곳이라면 아무리 조용한 곳이라고 해도 그녀의 심란한 마음을 억누를 수 없었다.잠결에 이유영은 누군가가 자신을 건드리는 것을 느꼈다.피곤한 채로 두 눈을 뜨자, 어둡고 따듯한 불빛 아래 강이한의 뚜렷한 옆모습은 아주 온화하게 보였다.마치 천사처럼 아름다운 것 같았다...하지만 순간 이유영은 정신이 번쩍 들었으며 피곤함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고 그녀는 경계하면서 강이한을 쳐다보았다.특히 강이한의 움직임을 느낀 순간 그녀는 정신이 들면서 분노가 차올랐다.또렷한 짝 소리와 함께 이유영은 강이한의 뺨을 세게 내리쳤다. 공기는... 순간 얼어붙었다!창밖 곤충의 울음소리는 이 순간에 더욱 선명하게 느껴졌다.심지어 이런 상황에서 방안은 고요한 나머지 바늘이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조차 선명하게 들릴 정도였다!“당신, 이 미친놈!”이유영은 노호했다.차 안에서의 장면이 부단히 그녀의 머릿속에서 떠 올랐다. 그녀는 눈앞의 강이한을 매섭게 노려보며 마치 그를 찢어버릴 것만 같았다.강이한은 손에 연고를 들고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특히 그녀가 매서운 눈빛으로 그를 바라볼 때 강이한은 웃었다. 그 웃음은... 그토록 싸늘했다.“왜? 만지면 안 돼?”입을 연 강이한의 말에는 온통 풍자였다.이유영이 조용하게 있을 때 강이한이 느낀 양심의 가책만큼, 이유영이 경계하는 눈빛으로 강이한을 바라볼 때, 강이한은 그만큼 이유영을 길들여 주고 싶었다.‘만지면 안 돼? 그럼, 누가 당신을 만질 수 있는데? 서재욱? 아니면 박연준...?’강이한의 비꼬는 미소를 보며 이유영의 두 눈은 더욱 분노로 가득 찼다.이유영이 다시 손을 들어 강이한의 뺨을 내리치려고 할 때, 강이한은 그녀의 손을 덥석 잡았다.“한 대로 모자라?”“날 만지지 마
여진우는 심지어 정씨 저택에 들어가 살기까지 했다!“유영아, 당신 외삼촌은 참으로 여우 같은 사람이야. 네가 서재욱의 아이를 낳은 걸 알면서도 여진우를 백산 별장에서 지내게 들이다니. 참으로 완벽한 수를 뒀네.”강이한의 말투는 쌀쌀맞았다.하지만 그보다 더 쌀쌀한 건... 이유영의 마음이었다. 강이한의 눈을 바라보며 이유영은 입술을 꾹 다문 채 아무 대답하지 않았다.이유영의 침묵은 강이한이 보기엔 묵인하는 거랑 마찬가지였다.쿵 소리와 함께 강이한은 문을 박차고 나갔다.이유영은 침대에 앉은 채 오랫동안 가만히 있었다. 그녀의 안색은 점점 어두워졌고 점점 싸늘해졌다.이것이 바로 그녀와 강이한의 관계였다.전생이든 아니면 이번 생이든, 두 사람 사이의 이런 모순은 도무지 피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오해! 해명할 수 없는 오해, 해명해도 믿지 않는 오해, 이것이 바로 두 사람 사이 모순의 관건이었다. 도대체 마음속으로 편애하는 건지 아니면... 다른 것인지, 이유영은 더 이상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이유영이 강이한에 대한 사랑과 온도는 바로 이런 것들 때문에 조금씩 조금씩 식은 것이었다.이유영은 최익준에게 전화를 걸었다.그녀가 파자마를 입고 계단을 내려왔을 때, 이온유가 물컵을 들고 물을 마시고 있는 것을 보았다. 이유영을 보자마자 꼬맹이의 눈에는 두려운 기운이 드러났다.이유영은 이온유에게 눈길 한번 주고는 바로 눈길을 거두었다.하지만 입구까지 걸어갔을 때 뒤에서 쾅 소리와 함께 무언가가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이유영이 고개를 돌려 보니 이온유가 손에 든 물컵을 바닥에 떨군 것을 보았다. 유리 조각이 사방에 튀었으며 꼬맹이의 종아리에는 한 줄기 자국이 긁혀져 피가 났다.“흑, 흑...”순간, 이온유는 울음을 터트렸다!소리를 들은 도우미들은 얼른 달려 나왔다. 그리고 이온유가 다친 모습을 보더니 현장은 순간 아수라장이 되었다.강이한도 소란을 듣고 내려왔다.그가 다급하게 이온유에게 달려가는 모습을 본 이유영은 눈에 가시가 든 것처럼 거슬렸다.
이유영이 백산 별장으로 돌아왔을 때, 여진우는 아직 깨어있었으며 마침 통화 중이었다. 전화에 대고 서주 얘기를 하는 그의 안색은 별로 좋지 않았다.이유영의 마음은 다시 목구멍까지 차올랐다.여진우는 급히 전화 반대편의 사람에게 몇 마디 한 후 전화를 끊고는 이유영을 향해 걸어왔다.“왜 이렇게 늦게 들어왔어? 그리고 너 옷차림이...”‘심지어 잠옷을 입고 있네!?’“서주 쪽에 또 무슨 문제가 생겼어?”이유영은 여진우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고 도리어 그에게 되물었다.서주 얘기가 나오자, 여진우는 미간을 찡그렸다.여진우는 입을 놀리기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파리에 돌아온 후의 신분 변화에 대해 그는 여태까지도 아직 어색해했다.그런 여진우가 유일하게 말을 많이 하는 상대는 아무래도 이유영이었다. 그랑 똑같이 생긴 이유영은 태어나기 전부터 한 공간에 같이 있었던 존재이기에 아무리 몇십 년간 서로 떨어져서 지냈다고 해도 두 사람 사이에는 아직도 케미가 남아있는 것만 같이 저도 모르게 서로에게 마음이 끌리곤 하였다.“별로 큰 문제가 아니야. 걱정하지 마.”여진우가 말했다.“강이한 때문이야?”이 질문을 할 때 이유영의 말투는 점점 날카로워졌다!“그 자식이 널 협박해?”여진우는 거의 이를 꽉 깨물며 이유영에게 물었다.“...”여진우의 눈 밑에 반짝이는 독기를 본 순간, 이유영은 입가에 씩 미소를 짓고는 손을 내밀어 여진우의 얼굴을 어루만졌다.“너...”“걱정하지 마. 나랑 그 인간은 이 몇 년 동안 계속 이렇게 지내왔어. 나도 이젠 익숙해.”전과 다른 건 예전에는 사이가 엮어있는 관계였다면 지금 아무런 사이가 없는 관계였다. 그래서 강이한의 행동은 마음이 이미 다 식어버린 이유영을 다치게 할 수 없었다.여진우는 이유영의 말을 듣더니, 저도 모르게 분노와 애틋한 감정이 살짝 드러났다.여진우는 사람을 시켜 이유영이 강이한과 함께 하면서 그동안 도대체 어떤 날을 보냈는지 알아보라고 했다.“그 사람의 협박에 넘어가지 마. 그 사람은 지금 미친
이유영이 집으로 돌아온 뒤, 임소미는 사람을 시켜 조사를 시작했고 이유영이 강이한 곁에서 결코 평온한 시간을 보내지 못했다는 사실을 이내 알게 되었다. 하지만 어느 정도였는지는 알지 못했다.며칠 동안 진영숙의 광기에 가까운 모습을 목격한 뒤에야 그녀는 대략 짐작할 수 있었다. 그녀의 남편이 왜 서주로 떠나서 죽음을 가장했는지를.모두 이 여자 때문이었다. 진영숙이 그토록 괴롭게 만들었던 것이다.남편뿐만 아니라 지금 강이한의 행방조차 그녀는 알지 못했다. 여자로서 그 책임은 결코 작지 않았다.임소미는 감정을 가라앉힌 후에야 이유영에게 조심스레 말했다. 진영숙이 사실은 월이를 데려가려 했다는 것을.“며칠 동안 데려가겠다고 했다고요?”“그래서 내가 화가 났던 거야.”진영숙의 행동을 보면 며칠은 말뿐인 핑계였다.그녀가 했던 말을 떠올리며 임소미는 차가운 웃음을 지었다.‘이제 아무것도 없고 오직 손녀만 남았다고? 과연 손녀의 의미를 알고는 있는 사람인가?’이유영은 말없이 얼굴을 굳혔다.진영숙은 아이를 사랑해서가 아니라 집착하고 있었던 것이다.“유영아, 이번 일은 그녀에게 연민을 가질 필요 없어.”임소미의 목소리엔 단단한 결심과 냉기가 섞여 있었다.진영숙은 자신이 모든 걸 잃었기 때문에 아이라도 데려가고 싶다고 했지만 그런 상실에 대해 임소미는 전혀 동정하지 않았다.“알겠어요, 엄마. 제가 처리할게요.”이유영은 어머니를 안심시켰지만 그녀의 목소리 역시 차가웠다.“어떻게 처리할 거니?”‘어떻게 처리할까?’이유영의 눈빛이 점점 깊어졌다.그녀는 당연히 생각한 방법이 있었다.임소미를 진정시킨 뒤, 이유영은 백산 별장을 나섰고 밖에선 지혁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아가씨.”“풍산 그룹으로 가요.”이름을 입에 올리는 것조차 마음이 무거웠다. 가능하다면 평생 다시는 가고 싶지 않은 곳이었다.그곳은 과거가 덕지덕지 붙은 장소였고 이유영은 그것들과 멀어지고 싶었다.“윙윙윙.”그때, 휴대전화가 울렸다.발신자는 박연준이었고 이유영은 망설임
이유영에게는 참으로 견디기 힘든 시간이었다.그녀는 임소미의 품에 파고들며 가느다란 팔로 어머니의 허리를 꼭 안았다.“엄마, 미안해요. 제가 잘못했어요.”그녀는 진심으로 반성하고 있었다.오래전 소은지는 이렇게 말했었다. 강이한은 연애 상대론 괜찮지만 결혼은 다르다고.그때 변호사였던 소은지는 경제력이나 사회적 지위가 맞지 않는 결혼이 얼마나 불행한지를 잘 알고 있었다.그래서 그녀가 강이한과 결혼을 결심했을 때, 소은지는 그녀를 말렸었다. 소은지는 그녀의 결혼을 말렸던 유일한 사람이었다.결국 소은지의 말은 모두 옳았음이 증명됐다.끝났다고 믿었던 그 관계는 여전히 그녀의 삶에 깊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고 심지어 가족들까지도 그 여파에 시달리고 있었다.그때, 등에 따뜻한 손길이 느껴졌다.“괜찮아. 엄마가 있잖아. 앞으로는 아무도 너를 괴롭히지 못할 거야.”이유영은 말없이 고개를 숙였고 눈물이 눈가에 가득 차올랐다. 참으려 해도 눈물이 뺨을 따라 끝없이 흘러내렸다.예전에도 어머니는 그녀를 이렇게 품어주었다. 하지만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후, 그녀의 세계는 완전히 무너져 버렸고 그 이후로 어떤 일이 일어나면 모두 혼자 견뎌야만 했다.임소미가 감싸안아 주자 이유영의 마음은 다시금 따뜻함으로 물들어갔다.그리고 이 감정은 그녀의 마음 깊은 곳을 더욱 단단하게 만들었다.“앞으로는 아무도 엄마를 괴롭히지 못하게 할 거예요.”그녀가 말한 '아무도'는 명백히 진영숙을 가리키고 있었다.그렇게 오랫동안 떨어져 지낸 사람에게서 다시 이런 고통이 돌아올 줄은 몰랐다.“엄마가 널 지켜줄게. 꼭 지켜줄게.”임소미는 그 말을 반복하듯 속삭였다.오늘 밤, 임소미의 마음속에 일어난 파장은 누구도 헤아릴 수 없었다.진영숙이 막말을 퍼붓고 손까지 쓰는 모습을 보며 이유영이 강씨 가문에서 겪었을 고통이 얼마나 컸을지를 임소미는 문득 깨달았다.사모님의 우아한 모습은 진영숙에게서 찾아보기 힘들었다.불편한 감정이 들 때마다 손부터 나가는 사람이었고 그런 사람과 살아야
이유영이 돌아오고 그녀는 진영숙과 임소미 사이에서 벌어진 격렬한 장면을 목격하게 되었다. 두 명의 도우미가 진영숙을 붙잡아 끌어내고 있었다.임소미의 얼굴은 창백했고 가슴은 거세게 요동치고 있었다.그녀는 순간적으로 분노가 솟구쳤다.임소미는 이유영을 보자마자 재빨리 붙잡고 말했다.“너 먼저 위로 올라가.”“무슨 일이 있었어?”이유영이 물었다.정씨 가문에 돌아온 지 오래된 만큼 그녀는 자신의 어머니가 어떤 사람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우아하고 온화한 사람인 만큼 지금 이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분명히 알 수 있었다.임소미가 대답하기도 전에 진영숙이 화를 내며 소리쳤다.“이유영, 넌 누가 너한테 눈을 기증해 줬는지 모르지? 강이한이 네게 빚을 졌다고 하지만 사실은...”“입 다물어!”진영숙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임소미가 단호하게 그녀의 말을 끊었다.이유영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조용히 서 있었고 진영숙은 여전히 무언가 더 말하고 싶어 했지만 더는 이어가지 않았다.그녀는 분노로 가득 찬 눈으로 이유영을 노려보았고 그 눈빛엔 전례 없는 증오가 서려 있었다.예전에 강이한과 결혼했을 때도 진영숙은 이유영을 이런 눈빛으로 바라보았다.한 번도 따뜻한 시선을 준 적이 없었다.그리고 지금, 용성시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리며 그 증오가 더욱 깊어진 듯했다.“유영아, 너 먼저 위로 올라가.”“엄마.”“올라가!”임소미는 이유영의 말을 끝까지 듣지 않고 격하게 소리쳤다.임소미가 이런 식으로 이유영에게 말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지금의 상황이 임소미에게 얼마나 큰 충격이었는지 그대로 드러났다.이유영은 무언가 더 묻고 싶었지만 눈앞에서 벌어진 상황에 말문이 막혀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뒤돌아 안으로 들어갔다.그 순간, 진영숙은 자신을 붙잡고 있던 도우미들의 손을 뿌리치고 이유영의 뒷모습을 향해 소리쳤다.“이유영, 강이한은 너에게 빚진 게 없어. 강이한은 오히려 너 때문에 모든 걸 잃었어. 너야말로 가장 잔인한 사람이야. 네 눈조차..
임소미는 혈압이 치솟았고 화가 극에 달한 상태였다.“내 말이 틀렸나요?”“틀렸냐고? 제대로 된 일을 한 적은 있고? 당신만 제대로 된 선택을 했더라면 유영이와 강이한이 이렇게까지 망가지진 않았을 거야.”임소미는 참았던 감정을 폭발시키며 격렬히 외쳤다.진영숙의 얼굴이 순간 굳어졌다.임소미의 말이 맞았다. 진영숙은 두 사람 관계에서 많은 잘못을 했다.하지만 지금은 모든 게 달라졌다.강이한은 사라졌고 강서희도 여전히 세상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에게 남은 건 오직 월이 뿐이었다.오늘 이곳에 와서 월이를 보게 된 순간, 월이를 자신의 곁에 두고 싶다는 생각이 더욱 강하게 자리 잡았다.“사람 불러!”임소미가 크게 외치자 집사들과 도우미들이 급히 달려왔다.“이 여자를 당장 내쫓아!”“당신이 감히 그럴 수 있을까?”“뭐라고?”임소미는 잠시 귀를 의심했다.‘이 여자는 지금 도대체 뭐 하려는 걸까?’조금 전 아이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을 보며 아이에게 조금의 정이라도 남아 있는 줄 알았다.하지만 모든 것은 착각에 불과했다.결국 그녀는 후회라는 감정을 모르는 인간이었다.진영숙이 오늘 여기 온 것도, 월이에게 다정하게 굴었던 것도 결국 아무것도 남지 않았기 때문에 한 마지막 발악이었다.그녀의 말은 그저 그럴싸한 포장일 뿐 사실은 월이를 자신의 곁으로 끌어들이고 싶은 마음뿐이었다.그리고 뻔뻔하게도 무례하기까지 했다.진영숙은 임소미의 눈을 응시했다. 조금 전까지 남아 있던 따뜻함은 온데간데없고 그 자리에 남은 것은 매서운 날카로움뿐이었다.그녀는 침착하게 말했다.“우리 아들이 왜 서주를 떠났는지 내가 정말 모를 거라고 생각했어? 임소미, 당신들은 정말 단 한치의 양심 가책도 못 느꼈어?”왜 강이한이 서주를 떠났는지 시간대와 상황을 조합해 보면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추측이 사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확신을 가졌다.특히 떠나기 전, 시윤이 건넨 말이 결정적이었다. 이유영이 용성시에서 수술을 받았던 그 시기에 강이한은 서주에
강이한은 그렇게 어둠 속에서 절망의 고통을 몸소 겪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괴로워도 수술을 받겠다는 생각은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한때 이유영이 어둠 속에서 얼마나 무섭고 무력했는지를 그는 이제서야 조금씩 체감하고 있었다....파리에서 진영숙은 다시 백산 별장을 찾았다. 여전히 강이한의 소식은 들리지 않았고 시윤은 강이한이 이정과 신시욱을 데리고 떠났다고 말했다.그 두 사람의 능력을 생각하면 강이한이 스스로 나타나지 않는 한 그 누구도 그를 찾을 수 없을 것이다.진영숙은 어머니로서 절망에 가까운 마음으로 그를 수소문했지만 아무리 애를 써도 그의 행방을 찾을 수 없었다.그리고 알면 알수록 그녀의 마음은 점점 더 불편해졌다.“정말이지, 당신은...”백산 별정까지 찾아온 진영숙의 뻔뻔함에 임소미는 답답함을 참지 못하고 굳은 표정으로 응수했다.진영숙은 한때 유능한 여성이었고 그런 그녀에게 감히 저런 얼굴을 하는 사람은 없었기에 그녀에겐 익숙하지 않은 대우였다.“저는 아무것도 없어요. 저 좀 봐주세요.”그녀의 목소리에는 전에는 없던 고통이 서려 있었다.그렇다. 지금의 진영숙에겐 주변에 기댈 친척도 함께할 가족도 없었다. 그녀의 앞에 있는 건 손녀인 월이 뿐이었다.오늘도 그녀는 월이를 위해 여러 장난감을 준비해 왔지만 임소미는 그 모든 행동이 불쾌하게만 느껴졌다.“당신도 어머니였잖아요. 제 마음이 얼마나 불편한지 알잖아요.”임소미는 차가운 목소리로 잘라 말했다.‘봐준다고? 당신이었으면 그렇게 할 수 있을까?’이유영이 강이한과 결혼했을 때, 진영숙은 그녀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심지어 뱃속의 아이조차 받아들이지 않았었다. 그런 사람이 지금 이토록 헌신적인 할머니 행세를 하니 임소미는 화가 났다.누구에게 보여주기 위한 연극으로밖에 안 보였다.진영숙의 눈엔 고통이 어렸다.“저는 정말 생각하지 못했어요.”임소미의 말에 그녀는 도무지 어떤 대답을 해야 할지 몰랐다.아무리 자존심 강한 진영숙이라 해도 진실을 알게 된 지금, 과거
그녀는 어둠에 익숙해지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강이한을 떠난 뒤 어둠 속에서의 삶을 받아들이기 위해 스스로를 단련하고 있었다.신시욱과 이정은 잠시 서로를 바라보다 침묵에 잠겼다. 그 질문은 그들 사이에서도 너무나 무거운 것이었기 때문이었다.이유영이 그때 얼마나 오랜 시간을 그렇게 보냈는지, 사실 그들조차 정확히 기억하지 못했다. 다만 또렷하게 남아 있는 건 그녀가 깊은 괴로움 속에 잠겨 있었다는 사실뿐이었다.그리고 그녀가 괴로워할수록 사람들은 어둠 속에서의 고독이 얼마나 잔혹한 감정인지 조금씩 알아가기 시작했다.그녀는 깊은 절망 속에 빠져 있었다.그리고 지금의 강이한은 어쩌면 그때의 이유영보다 더한 심연 속에서 절망을 겪고 있었다. 그는 스스로를 벌하고 있었다. 그녀가 겪었던 고통을 똑같이 겪기 위해 같은 어둠 속에 몸을 던졌다.“선생님. 각막 이식 수술 관련 소식이 들어왔습니다.”신시욱은 조심스러운 어조로 입을 열었다. 우천시에 머무는 동안, 신시욱과 이정은 한 번도 수술 신청을 멈춘 적이 없었다.그들은 강이한을 잘 알고 있었다. 자존심이 강한 사람이었지만 이유영이 원하지 않는 일이라면 그도 절대 강행하지 않았다.이유영이 시력을 잃었을 때, 그녀는 가족들이 몰래 준비했던 이식 수술조차 그녀는 단호히 거절했었다.그리고 지금의 강이한도 마찬가지였다.오랫동안 기다려 온 기회 앞에서 강이한은 조용히 거절했다.“필요 없어. 다른 사람에게 양보해.”두 사람은 말문이 막혔다. 그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올 줄은 상상도 못 했던 두 사람은 호흡이 가빠지기 시작했다.‘필요 없다고? 그게 무슨 뜻이란 말인가?’“선생님.”신시욱의 목소리는 긴장감에 더욱 떨려왔다.그 어떤 강인한 남자라고 해도 이 순간 목소리에서 전해지는 떨림을 억누를 수 없었을 것이다.최근 며칠간 그가 어떻게 지내왔는지 두 사람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강이한은 자신을 벌하며 살고 있었고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정말 이미 충분했다.‘받아야 할 벌은 다 받았는데 왜 여전히 자신을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어둠 속에서 지낸 지 얼마나 오랜 시간이 지났을까?어둠 속에서 사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이제서야 알 것 같았다. 새들의 지저귐이 더 또렷하게 들리고 사소한 바람 소리 하나에도 감각이 예민해졌다.강이한은 우천시에 있는 주택 마당에 놓인 긴 의자에 앉아 있었다. 우천시에 오늘같이 이렇게 따스한 햇살이 비추던 때가 언제였던가?이정이 조심스레 다가와 담요를 덮어주며 말했다.“햇살은 있어도 아직은 쌀쌀하네요.”말은 없었지만 강이한은 이정의 발걸음 소리와 숨소리로 그가 신시욱이 아님을 알아차렸다.그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번졌다.그때의 이유영도 지금처럼 감각이 예민했을까?“이정.”“네.”“유영이는 이 마당이 어떤 모습인지 전혀 보지 못했겠지?”“네.” 이정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이유영은 이곳에서 몇 개월을 머물렀지만 실상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이 마당은 끝내 그녀에게 낯선 곳으로 남게 되었다.지금 그녀를 우천시로 다시 데려온다 한들 스스로 길을 찾아올 수도 없을 것이다.강이한은 낮게 중얼거렸다.“하지만 유영이는 이 마당에 뭐가 있는지는 알고 있었어.”그렇다. 보지 못했어도 그녀는 감각으로 모든 것을 구분했다. 마치 지금의 강이한처럼.이정이 조심스레 물었다.“이럴 가치가 있었습니까?”그가 이곳에 온 이후, 누군가가 처음으로 던진 질문이었다. 그는 말할 수 없이 쓸쓸한 미소를 지었다.“가치가 있었는지는 사람이 판단할 수 있는 게 아니야.”그것은 마음으로 느끼는 것이다.그리고 그는 알고 있었다. 자신이 이유영에게 진 빚은 결코 눈 한 쌍으로는 갚을 수 없다는 것을. 이건 가치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의 문제였다.예전에 어둠 속에서 더듬거리던 이유영의 손짓을 떠올리면 가슴이 미어졌다. 지금 자신이 어둠 속에서 겪고 있는 공포는 당시 그녀가 느낀 감정에 닿을 수조차 없었다.점심 식사 시간.“쨍그랑.”강이한이 손을 뻗는 순간, 접시와 그릇이 떨어지며 산산이 부서지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공기는 순간 얼어붙었다
이유영은 자신의 몸에 강이한과 관련된 어떤 흔적도 남기고 싶지 않을 것이다.그녀는 남은 인생에서도 강이한과 어떤 방식으로든 다시 얽히는 일을 절대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월이의 일로 인해 그녀는 너무도 깊은 상처를 입었고 강이한을 평생 용서할 수 없었다.그런 사람의 눈을 자신이 기증받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그 결과는 상상조차 하기 싫었다.그리고 강이한 역시 그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그래서 그는 수술 전에 모든 철수 준비를 마친 것이고 이유영에게는 아무것도 알리지 말라고 지시했다.이미 많은 상처를 준 이후, 아무리 많은 것을 베푼다 해도 이유영의 용서를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을 것이다.자신과 이유영 사이에는 어떠한 선택지도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고 그래서 과감하게 그녀의 손을 놓은 것이다.‘이렇게 되면 두 사람 사이에 더 이상 빚진 것이 없게 되는 걸까?’하지만 단순히 눈을 기증했다고 해서 해결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유영아, 왜 강이한에 관해 묻는 거야? 혹시...”소은지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결국 그녀는 언제나 이유영 편이었다.특히 수술 전, 마지막으로 강이한을 마주했을 때 그가 남긴 말을 들은 후로 그녀조차도 강이한을 용서할 수 없다고 느꼈다.“나랑 장난해?”소은지의 말에 이유영의 표정은 단숨에 싸늘해졌다.그 차가운 기색을 확인한 소은지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그렇지 않아서 다행이야... 그래, 그렇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야.”소은지는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나는 그냥 권력에 그토록 집착했던 사람이 어떻게 갑자기 서주를 내려놓았는지 궁금했을 뿐이야.”“음모일지도 모르지.”소은지는 잠시 생각하다 이렇게 말했다. 그녀는 화제를 서둘러 다른 방향으로 돌리려 했다.“...”‘음모’라는 단어에 이유영은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소은지는 그녀의 웃음을 보고 또 한 번 안도했다.“ 월이 보러 왔을 때, 그 사람이 뭐라고 했는지 알아?”“뭐라고 했는데?”“일어날 일은 언제든지 다시
강이한은 서주에서의 모든 일을 철수하고 사라졌다. 그와 함께하던 사람들도 함께 자취를 감췄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이유영은 그저 강이한의 또 다른 속임수일 거라고 생각했다.강이한과 박연준, 두 사람은 누군가를 철저하게 속이는 데에 능숙한 사람들이었다.박연준은 진짜로 서주의 모든 것을 장악하고 있었고 진영숙은 파리에서 집요하게 강이한의 행방을 묻고 다녔다. 그걸 보며 이유영은 강이한이 정말로 사라졌다는 사실을 확신할 수 있었다.“무슨 생각해?”반산월에서 소은지는 이유영의 어두운 얼굴을 보고 조심스레 물었다.이유영은 고개를 들며 말했다.“은지야.”“응?”“어떻게 된 거라고 생각해?”서주의 현 상황은 여전히 알 수 없는 부분이 많았지만 최근 일련의 사건들을 거치며 이유영은 점점 확신에 가까워졌다.강이한은 정말 그의 사람들과 함께 자취를 감췄다. 그는 마치 세상에서 흔적 없이 사라진 듯했다.권력을 중시하던 인물이었기에 은둔은 아닐 것이 분명했다. 강이한은 모든 것을 내려놓고 홀로 조용히 지낼 성격이 아니었다.“뭐라고?”소은지는 이유영의 갑작스러운 질문을 이해하지 못한 듯 되물었다.이유영은 소은지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을 이어갔다.“강이한이... 정말 사라졌어.”“그래. 그 얘기 예전에도 했었잖아.”이유영이 이제서야 이 사실을 믿게 되었다는 것을 소은지는 알아챌 수 있었다.예전엔 믿지 않았던 이유영의 모습이었지만 이제는 완전히 달라졌다. 그녀는 강이한의 실종을 인정하고 있었다.강이한과 박연준은 이유영의 마음속에서 그리 좋은 사람들이 아니었다.연서의 사건이 터진 이후, 그녀는 두 사람을 음모로 가득 찬 사람들로 생각했고 그래서 처음 강이한이 사라졌다고 했을 때도 이유영은 그것을 단순한 음모의 연장이라 여겼다.두 사람은 늘 서로 무관한 척 행동했지만 그 뒤에는 누구도 상상 못 할 거대한 연관성이 있었던 것이다.신지수는 여러 번 전화를 걸어왔다.강이한이 서주를 떠난 후, 신씨 가문도 연쇄적으로 피해를 보았고 그녀는 그 일을 처리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