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야. 내가 실수로 넘어진 거야.”“거짓말하지 마. 예전에 넌 10센티미터 되는 힐을 신고도 넘어진 적이 없었어.”‘지금에 와서 이렇게 쉽게 넘어진다고?’지난번에 강이한이 이유영에게 보여준 소은지의 사진에서도 소은지는 머리에 다섯 바늘 꿰맸다고 했다.‘그럼, 이번에는?’“유영아. 아무것도 묻지 말고 그저 이렇게 날 안아주면 안 돼?!”“은지야!”“내 몸에 상처를 못 본 척해줘. 내게 조금의 체면이라도 남겨줘. 응?”나긋나긋한 소은지의 말투에는 애잔한 기도가 깃들어 있었다.소은지는 이유영이 자기의 안식처가 되었으면 했지만, 또 반대로 이유영이 아무것도 물어보지 않았으면 했다.소은지가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으니, 이유영도 대충 마음속에 결론이 섰다!그리고 소은지가 엔데스 명우의 곁에 있으면서 두 사람 사이에 일어난 구체적인 일은 알 수 없었지만, 소은지가 온몸으로 엔데스 명우와 투쟁하고 있다는 것을 이유영은 알 수 있었다.“네가 떠날 수 있게 내가 안배해 줄게!”이유영은 쉰 목소리로 말했다.그녀는 소은지를 더는 엔데스 명우의 손에 놔둘 수 없었다. 이렇게 놔뒀다가 정말 소은지가 죽을까 봐 이유영은 걱정이 되었다!“나 안 떠날 거야!”“은지야!”이유영은 조급한 말투로 말했다.하지만 소은지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유영아, 너 그거 알아? 난 모든 것을 잃었어. 전부 다 그 사람이 망가뜨린 거야. 난 그 사람을 가만 놔두지 않을 거야!”“...”이 순간, 소은지의 말투 속에는 온통 증오로 가득했다. 마치 엔데스 명우를 찢어버리고 싶은 그런 증오였다.이유영의 마음속 소은지는 높은 곳에 서 있는 빛나는 여자였다. 그녀에게서 나는 빛은 모든 사람의 마음을 밝히곤 하였다.혼인 속에서 고통을 받은 사람들은 소은지 때문에 구원과 해방을 받을 수 있었다.소은지의 사전에는 증오가 없었으며 그녀는 온전히 제일 공정하고 정직한 방식으로 혼인 속에 갇힌 피해자들을 구해주었다.‘그런 은지가 어떻게 짓밟힘을 당할 수 있지? 은지가 누굴 증오하다
“은지야!”이유영은 가슴이 답답해 났다.“됐어. 괜찮아. 조용히 하고 날 좀 제대로 안아줘. 응?”이유영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소은지는 그녀의 말을 끊어버렸다.그리고 날씬한 허리에 힘을 더 주었다.이유영은 소은지를 안았다...이유영은 그녀가 자존심이 센 걸 알기에 지금 소은지는 엔데스 명우와 있은 일은 자기에게 알려주기 싫어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결국 이유영은 자기가 어떻게 계화정에서 걸어 나왔는지 모른다. 그녀는 엔데스 명우에게 전화를 걸어 예원산장에서 만나자고 약속했다.햇빛 아래, 트레이닝 복을 입고 골프채를 휘두르는 순간, 엔데스 명우의 행동에서 우러나온 우아함은 사람을 숨이 막히게 했다.처음 엔데스 명우를 만났을 때부터, 이유영은 하나님이 엔데스 명우를 말이 안 될 정도로 편애한다고 생각했다.엔데스 명우는 우아하게 골프채를 옆에 있는 하인에게 건네주고는 이유영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왔다.그는 입가에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난 당신이 지금 나랑 그 여자의 일에 끼어들 시간이 없는 줄 알았어요.”엔데스 명우는 이유영이 계화정에서 나온 것을 이미 안 눈치였다.이유영은 입술을 꾹 오므리며 그를 바라보았다.그리고 그녀의 눈 밑에는 쌀쌀한 기운이 맴돌았다.이유영은 앞에 놓인 레몬 물을 한 모금 마셨는데 식감이 별로 좋지 않아서 불쾌해하며 컵을 내려놓았다.그녀는 단도직입적으로 말을 꺼냈다.“말해봐요. 어떻게 하면 은지를 놓아줄 건가요?!”“결혼 얘기는 이미 깨졌고 당신의 이 작은 몸뚱아리가... 내게 뭘 가져다줄 수 있는데요!?”엔데스 명우는 비꼬며 말했다.이 말을 들은 이유영은 기분이 나빴다.말하려면 제대로 하지 왜 매번 남의 인생을 공격하는 말을 하는지, 정말 정이 뚝 떨어졌다.이유영은 그의 이 점이 유독 싫었다.“당신이 원하는 게 뭔데요?”“그 여자가 당신한테 엄청 중요한가 보네요!”이 말을 하는 엔데스 명우의 말투는 아주 복잡했다.이유영은 입술을 꾹 다문 채 대답하지 않았다.소은지가 그녀의
이유영은 분노에 붉게 물든 엔데스 명우의 두 눈을 보며 전혀 두렵지 않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그 여자가 당신의 마음속에서 너무 아름다워서, 아름다운 나머지... 당신의 이성을 눈멀게 했어요!”“이유영, 그만 얘기하라니까!”“은지를 놔줘요.”“절대 어림도 없어!”엔데스 명우의 말투는 몇 푼 더 심각해졌다.두 사람의 눈이 마주친 순간, 그 누구도 물러서지 않았다!이유영의 태도는 아주 명확했다. 엔데스 명우가 소은지를 놔주기만 한다면 그녀는 엔데스 명우가 달라는 모든 것을 줄 수 있었다. 하지만 엔데스 명우의 태도도 똑같았다!이유영이 지금 무슨 조건을 내놓든 간에 그는 절대로 소은지를 가만히 놔둘 생각이 없었다.“당신은 당신 주변의 문제들부터 먼저 생각해. 강이한이 갑자기 서재욱한테 시비를 걸었어!”“...”“고작 짧디짧은 일주일 내에 강이한은 서재그룹의 치명적인 프로젝트를 몇 개 빼앗아 갔어! 이유영, 당신도 고상한 사람이 아니잖아. 박연준을 위해 당신도 무고한 사람을 끌어들인 거 아니야?”“...”이유영은 가슴이 확 세게 쪼여 드는 것만 같았다!“그게 무슨 말이에요?”‘강이한이 왜...’이 일주일 동안, 강이한이 이유영의 눈앞에 나타나지 않아서 그녀는 유전자 검사 결과를 보고 강이한이 현실을 인정하고 내려놓은 줄 알았다! 이제 더 이상 그와 상관이 없을 줄 알았지, 이렇게 비밀리에 서재욱에게 손을 쓸 줄은 전혀 생각하지도 못했다!‘이런 빌어 죽일 놈!’이유영은 화가 나서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우린 같은 부류의 사람이야!”엔데스 명우는 비꼬면서 이유영을 보며 말했다.이유영은 세게 입술을 오므리고는 순간... 뭐라고 반막할 말이 없었다.이유영은 이 2년 동안 박연준과 지내면서 그와 실질적으로 관계를 맺진 않았으니, 박연준의 아이라고 말하면 강이한이 안 믿을 게 너무 뻔했다.게다가 아이가 진짜 박연준의 아이였다면 애초에 숨길 필요도 없었다. 이런 이유는 아마 강이한에게는 전혀 설득력이 없었다!하지만 급한 나머지 서재욱을
이유영은 이온유에게 눈길조차 한번 주지 않았다.예전에 한지음이 자기 동생인 줄 알았을 때, 이유영은 자기가, 이 아이의 유일한 가족일 수도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아이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한지음이 동생이 아니라는 것을 안 지금은 더욱 말할 것이 없었다.이온유는 집사가 데리고 위층으로 올라갔다.거실에 강이한과 이유영 두 사람만 남았을 때, 강이한의 안색은 조금 어둡게 변했다.“애한테 좀 잘해주면 안 돼?”여기서 애는 이온유를 말하는 것이었다.이온유가 조심스럽게 이유영을 보는 눈길을 보니 강이한은 속이 말이 아니었다. 이온유는.. 아직 아이에 불과했다. 아무리 낯선 사람이라고 해도 이렇게 대하면 안 되는 것이었다.하지만 강이한의 생각이 틀렸다.만약 진짜 생판 남이라면 이유영은 이렇게까지 하진 않았을 것이었다. 그녀는 아마 아이에게 다정하게, 열정적으로 대했을 것이었다.하지만 이온유가 마침 한지음의 딸이라는 이유로 이유영은 아이에게 정이 일도 가지 않았던 것이었다.“서재욱의 프로젝트들을 그에게 돌려줘!”이유영은 강이한의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한지음이라는 화제를 놓고 두 사람은 예전에도 많이 싸웠었다. 지금은 사랑하는 사이도 아니고, 감정도 남아 있지 않으니, 이유영은 오히려 싸우고 싶지 않았다.강이한의 눈 밑에는 싸늘한 기운이 역력했다!“그 사람이 당신에게 그렇게 중요해?”“어찌 됐든, 내 아이의 아버지잖아!”“...”’이 말이 끝나자, 강이한 눈 밑의 분노는 더욱 거세졌다.그는 몇 발짝 내디뎌 이유영의 곁에 다가와서는 그녀를 덥석 소파에서 집어 들었다. 그녀의 아담한 몸은 순간 공중에 붕 떴으며 강이한에게 세게 잡혔다!강이한은 온몸에서 분노가 활활 타올랐으며 그 분노는 마치 모든 것을 불태울 것만 같았다.강이한은 노호했다.“이유영, 당신의 마음은 어디로 갔어!?”“진작에 이미 불에 타버렸어!”“...”이 말을 들은 강이한은 그저 숨이 턱턱 막히는 것만 같았다.“너...”심장이 끊임없이 쿵쾅거렸다.이유영의 막연한
“우리 재결합해!”“당신 꿈도 꾸지 마!”강이한이 재결합 얘기를 꺼낸 순간, 이유영은 생각도 하지 않고 바로 거절했다.‘강이한이... 재결합을 제안하다니!? 이 남자도 참 웃기네. 허허.’강이한은 이유영을 바라보았다.“그래. 그럼, 서재그룹이 파산하는 소식을 기다리고 있어.”“너...!”이유영은 열이 받았다!전생이든 이번 생이든, 이유영은 강이한이 뼛속까지 무지막지하게 얘기가 안 통하는 사람이라고 생각되었다. 정말 뻔뻔하기 그지없었다.“왜? 싫어?”“당신도 알잖아. 우리 사이는 진작에 불가능해!”이유영이 이혼을 제기한 순간부터 두 사람은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는 사이가 되었다.강이한은 지금 서주의 젊은 주인일 뿐만 아니라 신씨 가문의 약혼녀까지 두었다.근데 지금 여기서 이유영에게 재결합을 제안하다니!?이유영은 이 상황이 그저 웃기기만 했다.“유영아, 우린... 하나잖아.”강이한의 말투는 그윽했다.“...”‘하나라고!?’사람들은 부부가 결합하는 순간부터 하나라고 말하기도 했다.하지만 이 두 사람의 하나는 정말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다른 조건으로 바꿔봐!”화를 낸 뒤 이유영의 분노는 오히려 가라앉았다.강이한은 이유영의 굳건한 태도를 보며 눈빛이 조금 어두워졌다.“난 다른 조건은 없어!”맞는 말이었다.강이한은 생을 건너서 온 것이었다. 바라는 건... 오직 이유영 하나뿐이었지 다른 바라는 건 없었다.이유영은 자리에서 일어서며 냉랭하게 강이한을 보며 입을 열었다.“그럼, 나도 이제 더 이상 당신과 할 말이 없어!”이 말만 남기고 그녀는 뒤돌아서 자리를 떴다.하지만 두 발짝 걸어 나갔을 때 뒤에서 강이한의 목소리가 들렸다.“이유영, 내가 만약 작정하고 정말 서재욱을 건드린다면 당신이 로열 글로벌을 다 쏟아붓는다고 해도 지켜낼 수 없을 거야.”“...”이유영은 이 말에 마음이 썰렁해졌다.제 자리에 선 채 저도 모르게 멈칫거렸다.강이한이 한 말은 사실인 게 분명했다!강이한이 서주에서의 신분을 이유영도
강이한은 온몸의 피가 차가워지는 것만 같았다!한참 동안 그는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이정이 왔을 때 이유영은 이미 떠났다. 이정은 안색이 별로 안 좋은 강이한을 보며 말했다.“도련님.”강이한은 조금 정신을 되찾았지만, 온몸은 여전히 오한이 났다!입을 여는 순간 그의 말에는 알아들을 수 없는 무거움과 고통이 담겨있었다.“네가 말해봐. 난 지금 이유영을 강요하는 것 외에 무슨 방법이 더 있어?”‘그래. 무슨 방법이 더 있을까?’이유영은 전 천하의 모든 사람에게 웃음을 지을 수 있었지만 유독 강이한에게는 쌀쌀하게 대했다. 심지어 그녀와 같은 방을 쓰는 것은 지나친 욕망이 되었다.강이한은 그녀를 강요하는 것 외에 그녀를 자기 곁에 남게 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강이한은 평생 이토록 무기력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 그는 이유영에 대해... 정말 아무런 방법이 없었다.강이한은 이유영을 사랑하지만, 그녀를 다치게 했다! 근데도 그녀를 놓아줄 수 없었다...게다가 지금 그녀를 곁에 남게 하는 것을 바라는 것조차 사치였다. 그녀를 해치는 방식으로 곁에 남게 할 수밖에 없었다....이유영은 머리가 띵해 나는 것만 같았다!강이한과 서재욱, 원래 서로 접점이 없던 두 사람이 지금은... 서로 물어뜯고 있었다.그 흉악한 정도는 멀리 떨어져 있는 청하시에서 일어난 일 때문에, 지금 파리에 덩달아 파동을 일으키는 지경이었다.정국진은 이유영을 보며 물었다.“강이한이 왜 갑자기 아무 상관 없는 서재그룹을 적대시하는 거야?”정국진도 이미 이상한 낌새를 느꼈다.그동안 기분이 제일 좋은 건 정국진과 임소미 두 사람이었다. 집에 경사가 났으니, 이유영도 기분이 좋았다.하지만 지금 그녀는 소은지의 일에 도움이 안 될 뿐만 아니라 강이한이 이런 짓까지 벌이니 이유영은 정말 미쳐 돌아버릴 것만 같았다.“그게, 이것도 다 저 때문이에요!”이유영은 억울하다는 듯이 정국진을 바라보았다.정국진은 일이 이유영 때문에 생겼다는 소리를 듣더니 순간 표정이
아이의 정체를 강이한에게 알려주자니 이유영은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하지만 그와 재결합하는 건 더욱 싫었다!하지만 현재 일이 이 지경에 이른 이상, 얼른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어쨌든 서재욱은 무고하니까...“제가 생각해 보고 알아서 처리할게요.”이유영은 잠시 생각하더니 말을 내뱉었다.정국진의 눈 밑은 살짝 어두워졌다.따라서 이유영의 눈 밑도 몇 점 더 그윽해졌다.“유영아.”“네?”“너랑 강이한 사이의 감정 문제는 그 누구도 너희들을 도울 수 없어!”감정 문제는 결코 당사자들이 해결해야만 하는 문제였다.이 점에 대해 이유영도 잘 알고 있었다.지금 외삼촌과 외숙모는 친정 부모라고 그녀가 괴롭힘을 당하지 않게 보호해 주고 있었다. 하지만 감정 문제에서, 이유영 자신 빼고 그 누구도 대신 해결해 줄 수 없었다.이유영은 정말 속으로 짜증 나 죽을 것만 같았다.아이를 파리로 데려오는 것은 그녀가 예전부터 꿈꿔온 일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아이를 파리로 데려오기만 하면 아이를 곁을 잘 지켜줄 수 있을 줄 알았다.하지만 지금 일이 이렇게 될 줄... 전혀 몰랐다.귀찮은 일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기에 그녀는 회사에 나가지 않아도 아이의 곁을 지켜줄 시간이 나지 않았다!이 모든 것은 다 강이한 때문에 일어난 것이었다.“저도 알고 있어요.”이유영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애써 가슴속의 짜증을 꾹꾹 눌렀다.외출할 때, 이유영은 아이를 안고 있는 임소미의 안색이 훨씬 좋아진 것을 보았다...진실을 알고 난 후 2년 동안, 외삼촌과 외숙모 두 사람은 정말 고달픈 시간을 보냈다. 드디어 지금 일이 다 잘 풀렸다.이유영이 집에 있고, 여진우도 되찾았으며 외손녀도 곁에 있으니, 임소미에게 있어서 지금이 최고의 삶이 아닐 수 없었다.“엄마, 엄마!”꼬맹이는 이유영을 보자마자 그녀에게 손을 내밀어 안아달라고 했다.아이를 본 순간, 이유영의 마음속에는 더욱 만감이 교차했다.“엄마.”“어디 나가려고?”“네.”“요즘 회사에도 안 나가는 것 같더니, 도
분명한 건, 여진우가 있으면 이유영을 보호해 줄 사람이 한 명 더 늘어난다는 것이었다.이것은 이유영의 키와도 관련이 있었다. 전에 임소미와 정국진은 아담한 이유영을 보면 자꾸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아무리 그녀가 독립적으로 로열 글로벌을 관리할 수 있었지만 두 사람은 여전히 시시때때로 겁을 먹곤 하였다.지금 여진우의 복귀는 마치 그들에게 안정제를 놓아준 것처럼, 그들이 없어진다고 해도 여진우가 이유영을 잘 보호해 줄 수 있을 것만 같았다.“아직 제대로 걷진 못하네요.”바닥에 내려놓은 월이가 뒤뚱뒤뚱하는 것을 보니 이유영은 그저 자기 딸이 너무 귀엽게만 느껴졌다.임소미가 말했다.“아직 잠이 다 안 깨서 그래.”“오. 그래요.”임소미의 대답을 듣자, 아이를 바라보는 이유영의 눈빛은 더욱 부드러워졌다.하지만 마음속으로는 아이에게 미안하기도 했다. 어쨌든 아이가 자라는 과정에 이유영은 아이의 곁을 많이 지켜주지 못했다.“저 잠깐 나갔다 올게요. 금방이면 돌아와요.”“일찍이 돌아와. 지금 월이가 얼마나 너를 찾는데. 널 못 보면 또 안 자겠다고 난리 일 걸.”“네. 알겠어요.”이유영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뒤돌아서 나갔다.도원산에서, 이온유는 놀이동산의 한쪽에서 놀고 있었고 강이한은 옆의 작은 테이블 앞에 앉아 손에 든 서류들을 보고 있었다.이유영은 바람처럼 가뿐한 아이를 딱 한 눈 보고는 눈길을 돌렸다.“오늘 학교에 안 가?”이유영의 말투는 별로 좋지 않았다.집사는 이에 깜짝 놀랐다.그는 무의식적으로 멀지 않은 곳에서 재미나게 노는 이온유를 바라보며 눈 밑에는 일말의 연민이 스쳐 지나갔다.“사모님, 오늘 주말입니다.”비록 집사의 말투는 공손했지만, 그 속에는 분노가 조금 담겨있었다.이유영도 그걸 알아들었다.전에 반산월에 있을 때도 비록 우지와 우현은 이유영과 한지음 사이의 원한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이온유를 좋아하지 않을 수 없었다.게다가 아무것도 모르는 도원산의 사람들은 이온유를 더 좋아할 게 뻔했다.그래서 이유영의 싸늘한 말
이유영이 집으로 돌아온 뒤, 임소미는 사람을 시켜 조사를 시작했고 이유영이 강이한 곁에서 결코 평온한 시간을 보내지 못했다는 사실을 이내 알게 되었다. 하지만 어느 정도였는지는 알지 못했다.며칠 동안 진영숙의 광기에 가까운 모습을 목격한 뒤에야 그녀는 대략 짐작할 수 있었다. 그녀의 남편이 왜 서주로 떠나서 죽음을 가장했는지를.모두 이 여자 때문이었다. 진영숙이 그토록 괴롭게 만들었던 것이다.남편뿐만 아니라 지금 강이한의 행방조차 그녀는 알지 못했다. 여자로서 그 책임은 결코 작지 않았다.임소미는 감정을 가라앉힌 후에야 이유영에게 조심스레 말했다. 진영숙이 사실은 월이를 데려가려 했다는 것을.“며칠 동안 데려가겠다고 했다고요?”“그래서 내가 화가 났던 거야.”진영숙의 행동을 보면 며칠은 말뿐인 핑계였다.그녀가 했던 말을 떠올리며 임소미는 차가운 웃음을 지었다.‘이제 아무것도 없고 오직 손녀만 남았다고? 과연 손녀의 의미를 알고는 있는 사람인가?’이유영은 말없이 얼굴을 굳혔다.진영숙은 아이를 사랑해서가 아니라 집착하고 있었던 것이다.“유영아, 이번 일은 그녀에게 연민을 가질 필요 없어.”임소미의 목소리엔 단단한 결심과 냉기가 섞여 있었다.진영숙은 자신이 모든 걸 잃었기 때문에 아이라도 데려가고 싶다고 했지만 그런 상실에 대해 임소미는 전혀 동정하지 않았다.“알겠어요, 엄마. 제가 처리할게요.”이유영은 어머니를 안심시켰지만 그녀의 목소리 역시 차가웠다.“어떻게 처리할 거니?”‘어떻게 처리할까?’이유영의 눈빛이 점점 깊어졌다.그녀는 당연히 생각한 방법이 있었다.임소미를 진정시킨 뒤, 이유영은 백산 별장을 나섰고 밖에선 지혁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아가씨.”“풍산 그룹으로 가요.”이름을 입에 올리는 것조차 마음이 무거웠다. 가능하다면 평생 다시는 가고 싶지 않은 곳이었다.그곳은 과거가 덕지덕지 붙은 장소였고 이유영은 그것들과 멀어지고 싶었다.“윙윙윙.”그때, 휴대전화가 울렸다.발신자는 박연준이었고 이유영은 망설임
이유영에게는 참으로 견디기 힘든 시간이었다.그녀는 임소미의 품에 파고들며 가느다란 팔로 어머니의 허리를 꼭 안았다.“엄마, 미안해요. 제가 잘못했어요.”그녀는 진심으로 반성하고 있었다.오래전 소은지는 이렇게 말했었다. 강이한은 연애 상대론 괜찮지만 결혼은 다르다고.그때 변호사였던 소은지는 경제력이나 사회적 지위가 맞지 않는 결혼이 얼마나 불행한지를 잘 알고 있었다.그래서 그녀가 강이한과 결혼을 결심했을 때, 소은지는 그녀를 말렸었다. 소은지는 그녀의 결혼을 말렸던 유일한 사람이었다.결국 소은지의 말은 모두 옳았음이 증명됐다.끝났다고 믿었던 그 관계는 여전히 그녀의 삶에 깊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고 심지어 가족들까지도 그 여파에 시달리고 있었다.그때, 등에 따뜻한 손길이 느껴졌다.“괜찮아. 엄마가 있잖아. 앞으로는 아무도 너를 괴롭히지 못할 거야.”이유영은 말없이 고개를 숙였고 눈물이 눈가에 가득 차올랐다. 참으려 해도 눈물이 뺨을 따라 끝없이 흘러내렸다.예전에도 어머니는 그녀를 이렇게 품어주었다. 하지만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후, 그녀의 세계는 완전히 무너져 버렸고 그 이후로 어떤 일이 일어나면 모두 혼자 견뎌야만 했다.임소미가 감싸안아 주자 이유영의 마음은 다시금 따뜻함으로 물들어갔다.그리고 이 감정은 그녀의 마음 깊은 곳을 더욱 단단하게 만들었다.“앞으로는 아무도 엄마를 괴롭히지 못하게 할 거예요.”그녀가 말한 '아무도'는 명백히 진영숙을 가리키고 있었다.그렇게 오랫동안 떨어져 지낸 사람에게서 다시 이런 고통이 돌아올 줄은 몰랐다.“엄마가 널 지켜줄게. 꼭 지켜줄게.”임소미는 그 말을 반복하듯 속삭였다.오늘 밤, 임소미의 마음속에 일어난 파장은 누구도 헤아릴 수 없었다.진영숙이 막말을 퍼붓고 손까지 쓰는 모습을 보며 이유영이 강씨 가문에서 겪었을 고통이 얼마나 컸을지를 임소미는 문득 깨달았다.사모님의 우아한 모습은 진영숙에게서 찾아보기 힘들었다.불편한 감정이 들 때마다 손부터 나가는 사람이었고 그런 사람과 살아야
이유영이 돌아오고 그녀는 진영숙과 임소미 사이에서 벌어진 격렬한 장면을 목격하게 되었다. 두 명의 도우미가 진영숙을 붙잡아 끌어내고 있었다.임소미의 얼굴은 창백했고 가슴은 거세게 요동치고 있었다.그녀는 순간적으로 분노가 솟구쳤다.임소미는 이유영을 보자마자 재빨리 붙잡고 말했다.“너 먼저 위로 올라가.”“무슨 일이 있었어?”이유영이 물었다.정씨 가문에 돌아온 지 오래된 만큼 그녀는 자신의 어머니가 어떤 사람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우아하고 온화한 사람인 만큼 지금 이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분명히 알 수 있었다.임소미가 대답하기도 전에 진영숙이 화를 내며 소리쳤다.“이유영, 넌 누가 너한테 눈을 기증해 줬는지 모르지? 강이한이 네게 빚을 졌다고 하지만 사실은...”“입 다물어!”진영숙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임소미가 단호하게 그녀의 말을 끊었다.이유영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조용히 서 있었고 진영숙은 여전히 무언가 더 말하고 싶어 했지만 더는 이어가지 않았다.그녀는 분노로 가득 찬 눈으로 이유영을 노려보았고 그 눈빛엔 전례 없는 증오가 서려 있었다.예전에 강이한과 결혼했을 때도 진영숙은 이유영을 이런 눈빛으로 바라보았다.한 번도 따뜻한 시선을 준 적이 없었다.그리고 지금, 용성시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리며 그 증오가 더욱 깊어진 듯했다.“유영아, 너 먼저 위로 올라가.”“엄마.”“올라가!”임소미는 이유영의 말을 끝까지 듣지 않고 격하게 소리쳤다.임소미가 이런 식으로 이유영에게 말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지금의 상황이 임소미에게 얼마나 큰 충격이었는지 그대로 드러났다.이유영은 무언가 더 묻고 싶었지만 눈앞에서 벌어진 상황에 말문이 막혀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뒤돌아 안으로 들어갔다.그 순간, 진영숙은 자신을 붙잡고 있던 도우미들의 손을 뿌리치고 이유영의 뒷모습을 향해 소리쳤다.“이유영, 강이한은 너에게 빚진 게 없어. 강이한은 오히려 너 때문에 모든 걸 잃었어. 너야말로 가장 잔인한 사람이야. 네 눈조차..
임소미는 혈압이 치솟았고 화가 극에 달한 상태였다.“내 말이 틀렸나요?”“틀렸냐고? 제대로 된 일을 한 적은 있고? 당신만 제대로 된 선택을 했더라면 유영이와 강이한이 이렇게까지 망가지진 않았을 거야.”임소미는 참았던 감정을 폭발시키며 격렬히 외쳤다.진영숙의 얼굴이 순간 굳어졌다.임소미의 말이 맞았다. 진영숙은 두 사람 관계에서 많은 잘못을 했다.하지만 지금은 모든 게 달라졌다.강이한은 사라졌고 강서희도 여전히 세상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에게 남은 건 오직 월이 뿐이었다.오늘 이곳에 와서 월이를 보게 된 순간, 월이를 자신의 곁에 두고 싶다는 생각이 더욱 강하게 자리 잡았다.“사람 불러!”임소미가 크게 외치자 집사들과 도우미들이 급히 달려왔다.“이 여자를 당장 내쫓아!”“당신이 감히 그럴 수 있을까?”“뭐라고?”임소미는 잠시 귀를 의심했다.‘이 여자는 지금 도대체 뭐 하려는 걸까?’조금 전 아이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을 보며 아이에게 조금의 정이라도 남아 있는 줄 알았다.하지만 모든 것은 착각에 불과했다.결국 그녀는 후회라는 감정을 모르는 인간이었다.진영숙이 오늘 여기 온 것도, 월이에게 다정하게 굴었던 것도 결국 아무것도 남지 않았기 때문에 한 마지막 발악이었다.그녀의 말은 그저 그럴싸한 포장일 뿐 사실은 월이를 자신의 곁으로 끌어들이고 싶은 마음뿐이었다.그리고 뻔뻔하게도 무례하기까지 했다.진영숙은 임소미의 눈을 응시했다. 조금 전까지 남아 있던 따뜻함은 온데간데없고 그 자리에 남은 것은 매서운 날카로움뿐이었다.그녀는 침착하게 말했다.“우리 아들이 왜 서주를 떠났는지 내가 정말 모를 거라고 생각했어? 임소미, 당신들은 정말 단 한치의 양심 가책도 못 느꼈어?”왜 강이한이 서주를 떠났는지 시간대와 상황을 조합해 보면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추측이 사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확신을 가졌다.특히 떠나기 전, 시윤이 건넨 말이 결정적이었다. 이유영이 용성시에서 수술을 받았던 그 시기에 강이한은 서주에
강이한은 그렇게 어둠 속에서 절망의 고통을 몸소 겪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괴로워도 수술을 받겠다는 생각은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한때 이유영이 어둠 속에서 얼마나 무섭고 무력했는지를 그는 이제서야 조금씩 체감하고 있었다....파리에서 진영숙은 다시 백산 별장을 찾았다. 여전히 강이한의 소식은 들리지 않았고 시윤은 강이한이 이정과 신시욱을 데리고 떠났다고 말했다.그 두 사람의 능력을 생각하면 강이한이 스스로 나타나지 않는 한 그 누구도 그를 찾을 수 없을 것이다.진영숙은 어머니로서 절망에 가까운 마음으로 그를 수소문했지만 아무리 애를 써도 그의 행방을 찾을 수 없었다.그리고 알면 알수록 그녀의 마음은 점점 더 불편해졌다.“정말이지, 당신은...”백산 별정까지 찾아온 진영숙의 뻔뻔함에 임소미는 답답함을 참지 못하고 굳은 표정으로 응수했다.진영숙은 한때 유능한 여성이었고 그런 그녀에게 감히 저런 얼굴을 하는 사람은 없었기에 그녀에겐 익숙하지 않은 대우였다.“저는 아무것도 없어요. 저 좀 봐주세요.”그녀의 목소리에는 전에는 없던 고통이 서려 있었다.그렇다. 지금의 진영숙에겐 주변에 기댈 친척도 함께할 가족도 없었다. 그녀의 앞에 있는 건 손녀인 월이 뿐이었다.오늘도 그녀는 월이를 위해 여러 장난감을 준비해 왔지만 임소미는 그 모든 행동이 불쾌하게만 느껴졌다.“당신도 어머니였잖아요. 제 마음이 얼마나 불편한지 알잖아요.”임소미는 차가운 목소리로 잘라 말했다.‘봐준다고? 당신이었으면 그렇게 할 수 있을까?’이유영이 강이한과 결혼했을 때, 진영숙은 그녀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심지어 뱃속의 아이조차 받아들이지 않았었다. 그런 사람이 지금 이토록 헌신적인 할머니 행세를 하니 임소미는 화가 났다.누구에게 보여주기 위한 연극으로밖에 안 보였다.진영숙의 눈엔 고통이 어렸다.“저는 정말 생각하지 못했어요.”임소미의 말에 그녀는 도무지 어떤 대답을 해야 할지 몰랐다.아무리 자존심 강한 진영숙이라 해도 진실을 알게 된 지금, 과거
그녀는 어둠에 익숙해지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강이한을 떠난 뒤 어둠 속에서의 삶을 받아들이기 위해 스스로를 단련하고 있었다.신시욱과 이정은 잠시 서로를 바라보다 침묵에 잠겼다. 그 질문은 그들 사이에서도 너무나 무거운 것이었기 때문이었다.이유영이 그때 얼마나 오랜 시간을 그렇게 보냈는지, 사실 그들조차 정확히 기억하지 못했다. 다만 또렷하게 남아 있는 건 그녀가 깊은 괴로움 속에 잠겨 있었다는 사실뿐이었다.그리고 그녀가 괴로워할수록 사람들은 어둠 속에서의 고독이 얼마나 잔혹한 감정인지 조금씩 알아가기 시작했다.그녀는 깊은 절망 속에 빠져 있었다.그리고 지금의 강이한은 어쩌면 그때의 이유영보다 더한 심연 속에서 절망을 겪고 있었다. 그는 스스로를 벌하고 있었다. 그녀가 겪었던 고통을 똑같이 겪기 위해 같은 어둠 속에 몸을 던졌다.“선생님. 각막 이식 수술 관련 소식이 들어왔습니다.”신시욱은 조심스러운 어조로 입을 열었다. 우천시에 머무는 동안, 신시욱과 이정은 한 번도 수술 신청을 멈춘 적이 없었다.그들은 강이한을 잘 알고 있었다. 자존심이 강한 사람이었지만 이유영이 원하지 않는 일이라면 그도 절대 강행하지 않았다.이유영이 시력을 잃었을 때, 그녀는 가족들이 몰래 준비했던 이식 수술조차 그녀는 단호히 거절했었다.그리고 지금의 강이한도 마찬가지였다.오랫동안 기다려 온 기회 앞에서 강이한은 조용히 거절했다.“필요 없어. 다른 사람에게 양보해.”두 사람은 말문이 막혔다. 그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올 줄은 상상도 못 했던 두 사람은 호흡이 가빠지기 시작했다.‘필요 없다고? 그게 무슨 뜻이란 말인가?’“선생님.”신시욱의 목소리는 긴장감에 더욱 떨려왔다.그 어떤 강인한 남자라고 해도 이 순간 목소리에서 전해지는 떨림을 억누를 수 없었을 것이다.최근 며칠간 그가 어떻게 지내왔는지 두 사람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강이한은 자신을 벌하며 살고 있었고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정말 이미 충분했다.‘받아야 할 벌은 다 받았는데 왜 여전히 자신을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어둠 속에서 지낸 지 얼마나 오랜 시간이 지났을까?어둠 속에서 사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이제서야 알 것 같았다. 새들의 지저귐이 더 또렷하게 들리고 사소한 바람 소리 하나에도 감각이 예민해졌다.강이한은 우천시에 있는 주택 마당에 놓인 긴 의자에 앉아 있었다. 우천시에 오늘같이 이렇게 따스한 햇살이 비추던 때가 언제였던가?이정이 조심스레 다가와 담요를 덮어주며 말했다.“햇살은 있어도 아직은 쌀쌀하네요.”말은 없었지만 강이한은 이정의 발걸음 소리와 숨소리로 그가 신시욱이 아님을 알아차렸다.그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번졌다.그때의 이유영도 지금처럼 감각이 예민했을까?“이정.”“네.”“유영이는 이 마당이 어떤 모습인지 전혀 보지 못했겠지?”“네.” 이정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이유영은 이곳에서 몇 개월을 머물렀지만 실상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이 마당은 끝내 그녀에게 낯선 곳으로 남게 되었다.지금 그녀를 우천시로 다시 데려온다 한들 스스로 길을 찾아올 수도 없을 것이다.강이한은 낮게 중얼거렸다.“하지만 유영이는 이 마당에 뭐가 있는지는 알고 있었어.”그렇다. 보지 못했어도 그녀는 감각으로 모든 것을 구분했다. 마치 지금의 강이한처럼.이정이 조심스레 물었다.“이럴 가치가 있었습니까?”그가 이곳에 온 이후, 누군가가 처음으로 던진 질문이었다. 그는 말할 수 없이 쓸쓸한 미소를 지었다.“가치가 있었는지는 사람이 판단할 수 있는 게 아니야.”그것은 마음으로 느끼는 것이다.그리고 그는 알고 있었다. 자신이 이유영에게 진 빚은 결코 눈 한 쌍으로는 갚을 수 없다는 것을. 이건 가치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의 문제였다.예전에 어둠 속에서 더듬거리던 이유영의 손짓을 떠올리면 가슴이 미어졌다. 지금 자신이 어둠 속에서 겪고 있는 공포는 당시 그녀가 느낀 감정에 닿을 수조차 없었다.점심 식사 시간.“쨍그랑.”강이한이 손을 뻗는 순간, 접시와 그릇이 떨어지며 산산이 부서지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공기는 순간 얼어붙었다
이유영은 자신의 몸에 강이한과 관련된 어떤 흔적도 남기고 싶지 않을 것이다.그녀는 남은 인생에서도 강이한과 어떤 방식으로든 다시 얽히는 일을 절대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월이의 일로 인해 그녀는 너무도 깊은 상처를 입었고 강이한을 평생 용서할 수 없었다.그런 사람의 눈을 자신이 기증받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그 결과는 상상조차 하기 싫었다.그리고 강이한 역시 그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그래서 그는 수술 전에 모든 철수 준비를 마친 것이고 이유영에게는 아무것도 알리지 말라고 지시했다.이미 많은 상처를 준 이후, 아무리 많은 것을 베푼다 해도 이유영의 용서를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을 것이다.자신과 이유영 사이에는 어떠한 선택지도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고 그래서 과감하게 그녀의 손을 놓은 것이다.‘이렇게 되면 두 사람 사이에 더 이상 빚진 것이 없게 되는 걸까?’하지만 단순히 눈을 기증했다고 해서 해결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유영아, 왜 강이한에 관해 묻는 거야? 혹시...”소은지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결국 그녀는 언제나 이유영 편이었다.특히 수술 전, 마지막으로 강이한을 마주했을 때 그가 남긴 말을 들은 후로 그녀조차도 강이한을 용서할 수 없다고 느꼈다.“나랑 장난해?”소은지의 말에 이유영의 표정은 단숨에 싸늘해졌다.그 차가운 기색을 확인한 소은지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그렇지 않아서 다행이야... 그래, 그렇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야.”소은지는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나는 그냥 권력에 그토록 집착했던 사람이 어떻게 갑자기 서주를 내려놓았는지 궁금했을 뿐이야.”“음모일지도 모르지.”소은지는 잠시 생각하다 이렇게 말했다. 그녀는 화제를 서둘러 다른 방향으로 돌리려 했다.“...”‘음모’라는 단어에 이유영은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소은지는 그녀의 웃음을 보고 또 한 번 안도했다.“ 월이 보러 왔을 때, 그 사람이 뭐라고 했는지 알아?”“뭐라고 했는데?”“일어날 일은 언제든지 다시
강이한은 서주에서의 모든 일을 철수하고 사라졌다. 그와 함께하던 사람들도 함께 자취를 감췄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이유영은 그저 강이한의 또 다른 속임수일 거라고 생각했다.강이한과 박연준, 두 사람은 누군가를 철저하게 속이는 데에 능숙한 사람들이었다.박연준은 진짜로 서주의 모든 것을 장악하고 있었고 진영숙은 파리에서 집요하게 강이한의 행방을 묻고 다녔다. 그걸 보며 이유영은 강이한이 정말로 사라졌다는 사실을 확신할 수 있었다.“무슨 생각해?”반산월에서 소은지는 이유영의 어두운 얼굴을 보고 조심스레 물었다.이유영은 고개를 들며 말했다.“은지야.”“응?”“어떻게 된 거라고 생각해?”서주의 현 상황은 여전히 알 수 없는 부분이 많았지만 최근 일련의 사건들을 거치며 이유영은 점점 확신에 가까워졌다.강이한은 정말 그의 사람들과 함께 자취를 감췄다. 그는 마치 세상에서 흔적 없이 사라진 듯했다.권력을 중시하던 인물이었기에 은둔은 아닐 것이 분명했다. 강이한은 모든 것을 내려놓고 홀로 조용히 지낼 성격이 아니었다.“뭐라고?”소은지는 이유영의 갑작스러운 질문을 이해하지 못한 듯 되물었다.이유영은 소은지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을 이어갔다.“강이한이... 정말 사라졌어.”“그래. 그 얘기 예전에도 했었잖아.”이유영이 이제서야 이 사실을 믿게 되었다는 것을 소은지는 알아챌 수 있었다.예전엔 믿지 않았던 이유영의 모습이었지만 이제는 완전히 달라졌다. 그녀는 강이한의 실종을 인정하고 있었다.강이한과 박연준은 이유영의 마음속에서 그리 좋은 사람들이 아니었다.연서의 사건이 터진 이후, 그녀는 두 사람을 음모로 가득 찬 사람들로 생각했고 그래서 처음 강이한이 사라졌다고 했을 때도 이유영은 그것을 단순한 음모의 연장이라 여겼다.두 사람은 늘 서로 무관한 척 행동했지만 그 뒤에는 누구도 상상 못 할 거대한 연관성이 있었던 것이다.신지수는 여러 번 전화를 걸어왔다.강이한이 서주를 떠난 후, 신씨 가문도 연쇄적으로 피해를 보았고 그녀는 그 일을 처리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