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주일 뒤, 이유영은 유전자 검사 센터의 전화를 받았다. 전화 안에서 직원분은 이유영에게 말했다.“진 여사님 안녕하세요. 검사 결과가 나왔습니다. 진시아 씨와 여사님은 전혀 혈연관계가 없으십니다. 그리고 진동욱 씨의 수치는 여사님과 고도로 일치하며 혈족관계가 있습니다!”“...”이 말을 들은 이유영은 굳어져 버렸다!그 후 이유영은 전화에 대고 말했다.“감사합니다.”전에 유전자 검사에 손을 쓴 사람이 있는 것 때문에 이유영은 이번에 비밀리에 유전자 검사 샘플을 택배로 센터로 보내기 전에 특별히 허위 신분을 사용하였다.역시 전에 검사 결과는 누군가가 손을 쓴 것이 분명했다.전화를 끊은 후 이유영은 바로 정국진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 시간에 정국진은 회사에 있었으며 그동안 로열 글로벌 내부에서는 대폭적인 인사 변동이 있었다.이뿐만 아니라 정국진은 갑자기 회장 자리로 돌아왔으며 갑자기 회사의 일에 관여하기 시작했다!서주의 프로젝트에 대해 정국진이 나서서 정리를 하는 것도 모자라 한 기업에 직격탄을 날려 그 회사를 파산하기 직전에 이르게까지 했다...정국진이 이렇게까지 독하게 손을 쓴 것을 보면 이 기업의 배후 사람이 그 당시 일에 엮인 사람인 것이 분명했다.“유영아.”그토록 기세등등한 정국진은 이유영의 전화를 받은 순간, 그의 말투 속에는 온통 온화함과 자상함이었다.“외삼촌, 얘기 드릴게 한 가지 있어요.”“뭔데?”“제가 회사로 찾아갈게요.”“그래.”전화를 끊은 이유영은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주방에서 나온 임소미는 이유영이 외출하려는 것을 보고 물었다.“유영아, 어디 가?”“네. 저 회사에 잠깐 다녀오려고요.”“아. 잠시만, 이걸 진우한테 가져다줘.”말을 마친 임소미는 손에 든 도시락통을 이유영에게 건네주었다.이유영은 임소미가 건네준 도시락통을 보고 잠시 멈칫했다!그녀는 원래 임소미에게 이렇게 고생하실 필요가 없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임소미의 행복이 가득 찬 눈을 보고는 입가까지 나온 말들을 다시 꾹 삼켜버
사실 이 2년 동안, 이유영 어깨의 부담이 크다는 것을 정국진도 보아낼 수 있었다. 이유영의 제일 큰 소원은 최대한 시간을 내서 아이의 곁에 있어 주는 것이었다.하지만 정국진의 건강 상태 때문에 철이 들고 마음이 착한 이유영은 이 일을 계속 마음속에만 담아두고 휴가 때만 퀘벡으로 가서 아이와 함께하곤 하였다.요 며칠 정국진이 계속 회사에 나왔으니, 이유영도 회사에 나올 생각이 없었으며 매일 아이의 곁에 붙어있었다.하지만 지금은 저녁까지 기다릴 수 없는 걸 보니 중대한 일인 것이 분명했다!“이온유의 일이에요.”이 말을 할 때 이유영은 목이 조금 잠겨 있었다.“...”이 말에 정국진은 순간 표정이 굳어졌다.정국진은 이유영이 전에 유전자 검사를 한 적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때 결과에서 이유영과 이온유가 혈족관계가 있다고 나왔다. 지금 와서 보면 그 검사 결과에 누군가가 비밀리에 손을 쓴 것이 분명했다!정국진은 한숨을 한번 내쉬었다.“우리 주변에 심란한 일이 한두 개가 아니네. 네가 줄곧 매사에 조심한 것이 옳았네!”아마도 한지음 때문인지 이유영은 줄곧 이온유의 일에 대해서는 매우 무관심한 태도였다.하지만 무관심한 건 맞지만 이번 일에 뒤에서 누군가가 손을 쓴 것이 분명했다! 이유영은 정국진을 보며 말했다.“저는 누가 한 짓인지 알아내고 싶어요!”“누가 있겠어? 서주 쪽에서 벌인 일 빼고는 그럴 사람이 없어!”서주!이 말을 들은 이유영은 표정이 또다시 굳어졌다.틀림없었다...일이 이 지경에 이른 이상 두 사람도 이유영과 강이한의 사이가 오늘 이 상황에까지 이른 것은 다 서주라는 곳과 떼어낼 수 없는 관계가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분노가 솟구쳐 올랐다!사람에게는 다 성질이 있었다. 특히 이유영은 한지음의 일이 있고 난 뒤, 그녀는 누군가가 뒤에서 몰래 자기를 계산하는 것을 제일 못 견뎠다.하지만 이번 일의 배후 사람은 정말 선을 넘은 게 분명했다.“전 도대체 누가 한 짓인지 알아내야겠어요.”이유영의 뜻은
여진우가 몸을 돌려 회장 사무실로 들어가자, 정국진은 아까 이유영에게 들려있던 도시락통이 여진우의 품에 안겨있는 것을 보았다.“유영이가 방금 네게 뭐라고 했어?”조금 전, 블라인드를 투과해 정국진은 밖에서 일어난 일을 다 본 게 분명했다.이유영이 바로 전에 자신의 귀에 대고 한 말을 떠올리자, 여진우의 안색은 조금 어두워졌다.“당신들은 나를 찾아내고 날 안 믿는 거예요?”이 말을 들은 정국진은 순간 표정이 굳어져 버렸다.그러고는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는 다소 어이없다는 듯이 말했다.“너도 유영이를 이해해 줘야 해. 이 2년 동안, 유영이도 돌아온 후로 부담이 컸어. 주변에 일어난 일들은 다 그 아이가 못 보던 것들이어서 이토록 경비심이 강한 거야. 너도 이해해 줘!”여진우는 미간을 찌푸렸다.파리에 온 후로, 그는 정씨 가문의 모든 사람에 대해서 뒷조사했었다. 그래서 이유영의 상황도... 당연히 잘 알았다.청하시에 있을 때, 대학교를 졸업하고부터 이유영은 줄곧 강이한이 곁에 두고 기르는 카나리아에 불과했다!가정주부인 그녀는 남편에게 배신을 당한 뒤, 아주 힘겹게 자기 노력으로 다시 일어섰다. 그 과정 중의 아픔과 고통은 아마 한 여자에게 있어서, 경험해 본 사람만 알 것이었다.하지만 이유영은 남들보다 더 빠르게 걸었고 더 높이 섰다.특히 이 2년 동안 정국진의 몸 상태가 별로 좋지 않았다.그래서 이유영은 아담한 체구와 작은 어깨로 거의 모든 부담을 다 자기 몸에 껴안았다. 아마도 한밤중이 되어야만 그녀는 낮에 사람들을 마주할 때의 가면을 벗어내고 자기의 귀여운 잠옷으로 갈아입고는 자신만의 공간에서 약한 모습을 드러낼 수 있었다.“서주 쪽에는...”정국진은 잠시 생각하더니 안절부절못하며 여진우를 바라보았다.여진우의 미간은 더욱 세게 찌푸려졌다!그리고 여진우는 입을 열었다.“죄송해요!”“...”이 말을 들은 정국진은 가슴이 한데 쪼여 드는 것만 같았다.다음 순간, 여진우는 계속해서 말했다.“아마 저는 유영이를 위해 부담을 나눠
“아니야. 내가 실수로 넘어진 거야.”“거짓말하지 마. 예전에 넌 10센티미터 되는 힐을 신고도 넘어진 적이 없었어.”‘지금에 와서 이렇게 쉽게 넘어진다고?’지난번에 강이한이 이유영에게 보여준 소은지의 사진에서도 소은지는 머리에 다섯 바늘 꿰맸다고 했다.‘그럼, 이번에는?’“유영아. 아무것도 묻지 말고 그저 이렇게 날 안아주면 안 돼?!”“은지야!”“내 몸에 상처를 못 본 척해줘. 내게 조금의 체면이라도 남겨줘. 응?”나긋나긋한 소은지의 말투에는 애잔한 기도가 깃들어 있었다.소은지는 이유영이 자기의 안식처가 되었으면 했지만, 또 반대로 이유영이 아무것도 물어보지 않았으면 했다.소은지가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으니, 이유영도 대충 마음속에 결론이 섰다!그리고 소은지가 엔데스 명우의 곁에 있으면서 두 사람 사이에 일어난 구체적인 일은 알 수 없었지만, 소은지가 온몸으로 엔데스 명우와 투쟁하고 있다는 것을 이유영은 알 수 있었다.“네가 떠날 수 있게 내가 안배해 줄게!”이유영은 쉰 목소리로 말했다.그녀는 소은지를 더는 엔데스 명우의 손에 놔둘 수 없었다. 이렇게 놔뒀다가 정말 소은지가 죽을까 봐 이유영은 걱정이 되었다!“나 안 떠날 거야!”“은지야!”이유영은 조급한 말투로 말했다.하지만 소은지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유영아, 너 그거 알아? 난 모든 것을 잃었어. 전부 다 그 사람이 망가뜨린 거야. 난 그 사람을 가만 놔두지 않을 거야!”“...”이 순간, 소은지의 말투 속에는 온통 증오로 가득했다. 마치 엔데스 명우를 찢어버리고 싶은 그런 증오였다.이유영의 마음속 소은지는 높은 곳에 서 있는 빛나는 여자였다. 그녀에게서 나는 빛은 모든 사람의 마음을 밝히곤 하였다.혼인 속에서 고통을 받은 사람들은 소은지 때문에 구원과 해방을 받을 수 있었다.소은지의 사전에는 증오가 없었으며 그녀는 온전히 제일 공정하고 정직한 방식으로 혼인 속에 갇힌 피해자들을 구해주었다.‘그런 은지가 어떻게 짓밟힘을 당할 수 있지? 은지가 누굴 증오하다
“은지야!”이유영은 가슴이 답답해 났다.“됐어. 괜찮아. 조용히 하고 날 좀 제대로 안아줘. 응?”이유영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소은지는 그녀의 말을 끊어버렸다.그리고 날씬한 허리에 힘을 더 주었다.이유영은 소은지를 안았다...이유영은 그녀가 자존심이 센 걸 알기에 지금 소은지는 엔데스 명우와 있은 일은 자기에게 알려주기 싫어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결국 이유영은 자기가 어떻게 계화정에서 걸어 나왔는지 모른다. 그녀는 엔데스 명우에게 전화를 걸어 예원산장에서 만나자고 약속했다.햇빛 아래, 트레이닝 복을 입고 골프채를 휘두르는 순간, 엔데스 명우의 행동에서 우러나온 우아함은 사람을 숨이 막히게 했다.처음 엔데스 명우를 만났을 때부터, 이유영은 하나님이 엔데스 명우를 말이 안 될 정도로 편애한다고 생각했다.엔데스 명우는 우아하게 골프채를 옆에 있는 하인에게 건네주고는 이유영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왔다.그는 입가에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난 당신이 지금 나랑 그 여자의 일에 끼어들 시간이 없는 줄 알았어요.”엔데스 명우는 이유영이 계화정에서 나온 것을 이미 안 눈치였다.이유영은 입술을 꾹 오므리며 그를 바라보았다.그리고 그녀의 눈 밑에는 쌀쌀한 기운이 맴돌았다.이유영은 앞에 놓인 레몬 물을 한 모금 마셨는데 식감이 별로 좋지 않아서 불쾌해하며 컵을 내려놓았다.그녀는 단도직입적으로 말을 꺼냈다.“말해봐요. 어떻게 하면 은지를 놓아줄 건가요?!”“결혼 얘기는 이미 깨졌고 당신의 이 작은 몸뚱아리가... 내게 뭘 가져다줄 수 있는데요!?”엔데스 명우는 비꼬며 말했다.이 말을 들은 이유영은 기분이 나빴다.말하려면 제대로 하지 왜 매번 남의 인생을 공격하는 말을 하는지, 정말 정이 뚝 떨어졌다.이유영은 그의 이 점이 유독 싫었다.“당신이 원하는 게 뭔데요?”“그 여자가 당신한테 엄청 중요한가 보네요!”이 말을 하는 엔데스 명우의 말투는 아주 복잡했다.이유영은 입술을 꾹 다문 채 대답하지 않았다.소은지가 그녀의
이유영은 분노에 붉게 물든 엔데스 명우의 두 눈을 보며 전혀 두렵지 않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그 여자가 당신의 마음속에서 너무 아름다워서, 아름다운 나머지... 당신의 이성을 눈멀게 했어요!”“이유영, 그만 얘기하라니까!”“은지를 놔줘요.”“절대 어림도 없어!”엔데스 명우의 말투는 몇 푼 더 심각해졌다.두 사람의 눈이 마주친 순간, 그 누구도 물러서지 않았다!이유영의 태도는 아주 명확했다. 엔데스 명우가 소은지를 놔주기만 한다면 그녀는 엔데스 명우가 달라는 모든 것을 줄 수 있었다. 하지만 엔데스 명우의 태도도 똑같았다!이유영이 지금 무슨 조건을 내놓든 간에 그는 절대로 소은지를 가만히 놔둘 생각이 없었다.“당신은 당신 주변의 문제들부터 먼저 생각해. 강이한이 갑자기 서재욱한테 시비를 걸었어!”“...”“고작 짧디짧은 일주일 내에 강이한은 서재그룹의 치명적인 프로젝트를 몇 개 빼앗아 갔어! 이유영, 당신도 고상한 사람이 아니잖아. 박연준을 위해 당신도 무고한 사람을 끌어들인 거 아니야?”“...”이유영은 가슴이 확 세게 쪼여 드는 것만 같았다!“그게 무슨 말이에요?”‘강이한이 왜...’이 일주일 동안, 강이한이 이유영의 눈앞에 나타나지 않아서 그녀는 유전자 검사 결과를 보고 강이한이 현실을 인정하고 내려놓은 줄 알았다! 이제 더 이상 그와 상관이 없을 줄 알았지, 이렇게 비밀리에 서재욱에게 손을 쓸 줄은 전혀 생각하지도 못했다!‘이런 빌어 죽일 놈!’이유영은 화가 나서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우린 같은 부류의 사람이야!”엔데스 명우는 비꼬면서 이유영을 보며 말했다.이유영은 세게 입술을 오므리고는 순간... 뭐라고 반막할 말이 없었다.이유영은 이 2년 동안 박연준과 지내면서 그와 실질적으로 관계를 맺진 않았으니, 박연준의 아이라고 말하면 강이한이 안 믿을 게 너무 뻔했다.게다가 아이가 진짜 박연준의 아이였다면 애초에 숨길 필요도 없었다. 이런 이유는 아마 강이한에게는 전혀 설득력이 없었다!하지만 급한 나머지 서재욱을
이유영은 이온유에게 눈길조차 한번 주지 않았다.예전에 한지음이 자기 동생인 줄 알았을 때, 이유영은 자기가, 이 아이의 유일한 가족일 수도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아이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한지음이 동생이 아니라는 것을 안 지금은 더욱 말할 것이 없었다.이온유는 집사가 데리고 위층으로 올라갔다.거실에 강이한과 이유영 두 사람만 남았을 때, 강이한의 안색은 조금 어둡게 변했다.“애한테 좀 잘해주면 안 돼?”여기서 애는 이온유를 말하는 것이었다.이온유가 조심스럽게 이유영을 보는 눈길을 보니 강이한은 속이 말이 아니었다. 이온유는.. 아직 아이에 불과했다. 아무리 낯선 사람이라고 해도 이렇게 대하면 안 되는 것이었다.하지만 강이한의 생각이 틀렸다.만약 진짜 생판 남이라면 이유영은 이렇게까지 하진 않았을 것이었다. 그녀는 아마 아이에게 다정하게, 열정적으로 대했을 것이었다.하지만 이온유가 마침 한지음의 딸이라는 이유로 이유영은 아이에게 정이 일도 가지 않았던 것이었다.“서재욱의 프로젝트들을 그에게 돌려줘!”이유영은 강이한의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한지음이라는 화제를 놓고 두 사람은 예전에도 많이 싸웠었다. 지금은 사랑하는 사이도 아니고, 감정도 남아 있지 않으니, 이유영은 오히려 싸우고 싶지 않았다.강이한의 눈 밑에는 싸늘한 기운이 역력했다!“그 사람이 당신에게 그렇게 중요해?”“어찌 됐든, 내 아이의 아버지잖아!”“...”’이 말이 끝나자, 강이한 눈 밑의 분노는 더욱 거세졌다.그는 몇 발짝 내디뎌 이유영의 곁에 다가와서는 그녀를 덥석 소파에서 집어 들었다. 그녀의 아담한 몸은 순간 공중에 붕 떴으며 강이한에게 세게 잡혔다!강이한은 온몸에서 분노가 활활 타올랐으며 그 분노는 마치 모든 것을 불태울 것만 같았다.강이한은 노호했다.“이유영, 당신의 마음은 어디로 갔어!?”“진작에 이미 불에 타버렸어!”“...”이 말을 들은 강이한은 그저 숨이 턱턱 막히는 것만 같았다.“너...”심장이 끊임없이 쿵쾅거렸다.이유영의 막연한
“우리 재결합해!”“당신 꿈도 꾸지 마!”강이한이 재결합 얘기를 꺼낸 순간, 이유영은 생각도 하지 않고 바로 거절했다.‘강이한이... 재결합을 제안하다니!? 이 남자도 참 웃기네. 허허.’강이한은 이유영을 바라보았다.“그래. 그럼, 서재그룹이 파산하는 소식을 기다리고 있어.”“너...!”이유영은 열이 받았다!전생이든 이번 생이든, 이유영은 강이한이 뼛속까지 무지막지하게 얘기가 안 통하는 사람이라고 생각되었다. 정말 뻔뻔하기 그지없었다.“왜? 싫어?”“당신도 알잖아. 우리 사이는 진작에 불가능해!”이유영이 이혼을 제기한 순간부터 두 사람은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는 사이가 되었다.강이한은 지금 서주의 젊은 주인일 뿐만 아니라 신씨 가문의 약혼녀까지 두었다.근데 지금 여기서 이유영에게 재결합을 제안하다니!?이유영은 이 상황이 그저 웃기기만 했다.“유영아, 우린... 하나잖아.”강이한의 말투는 그윽했다.“...”‘하나라고!?’사람들은 부부가 결합하는 순간부터 하나라고 말하기도 했다.하지만 이 두 사람의 하나는 정말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다른 조건으로 바꿔봐!”화를 낸 뒤 이유영의 분노는 오히려 가라앉았다.강이한은 이유영의 굳건한 태도를 보며 눈빛이 조금 어두워졌다.“난 다른 조건은 없어!”맞는 말이었다.강이한은 생을 건너서 온 것이었다. 바라는 건... 오직 이유영 하나뿐이었지 다른 바라는 건 없었다.이유영은 자리에서 일어서며 냉랭하게 강이한을 보며 입을 열었다.“그럼, 나도 이제 더 이상 당신과 할 말이 없어!”이 말만 남기고 그녀는 뒤돌아서 자리를 떴다.하지만 두 발짝 걸어 나갔을 때 뒤에서 강이한의 목소리가 들렸다.“이유영, 내가 만약 작정하고 정말 서재욱을 건드린다면 당신이 로열 글로벌을 다 쏟아붓는다고 해도 지켜낼 수 없을 거야.”“...”이유영은 이 말에 마음이 썰렁해졌다.제 자리에 선 채 저도 모르게 멈칫거렸다.강이한이 한 말은 사실인 게 분명했다!강이한이 서주에서의 신분을 이유영도
서주가 이런 상황인데도 강이한은 굳이 파리로 찾아갔다.이유영 때문만은 아니었다. 또 다른 이유는 아마도 아이 때문이었을 것이다. 지난번 사건 이후, 아이의 마음속에서 강이한은 어떤 존재로 비치고 있을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이정은 깊게 숨을 고르며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아가씨를 보셨습니까?”소월이...강이한의 머릿속에는 자신을 보자마자 이유영 품으로 달려갔던 작은 아이의 얼굴이 떠올랐다. 월이는 두려움에 가득 찬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강이한의 가슴은 답답함으로 꽉 찼다.아무리 숨을 고르려 해도 가슴 깊은 곳의 통증은 가라앉지 않았다.소파에 몸을 기댄 채 담배를 하나 피워 물며 무겁게 말했다.“그 사람... 소식은 들었어?”강이한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그 사람에 관해 묻기 시작하자 이정은 고개를 끄덕이며 강이한 가까이 다가가서 말했다.“염 선생님은 지금 우천에 머물고 있습니다.”“우천?”“네, 주소는 이미 알아냈습니다. 몇 년간 그곳에서 은거하며 지내고 계셨습니다.”염 선생님은 명망 높은 의학자였다. 그는 70세에 서주 국제병원에서 은퇴한 후 행방을 감추었는데 그의 진료는 항상 예약이 어려웠으며 그의 손을 거친 환자는 어떤 이유로 실명을 겪더라도 결국 시력을 회복했다는 소문이 있었다.강이한은 이 사람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과거 그는 한지음을 데려가려 했었다. 하지만 그때는 염 선생님이 이미 은퇴한 후라, 아무리 애를 써도 그의 행방을 찾을 수 없었다.그런데 지금, 드디어 찾아내게 되었다. 강이한은 이유영과 함께 전생을 경험했기에, 이유영이 무엇을 가장 두려워하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이유영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바로 어둠이었다. 수술을 계속 미뤄왔던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차라리 흐릿하게나마 보이는 것을 선택했다.수술이 실패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무서웠기 때문이다. 만약 수술이 실패한다면, 평생 어둠 속에 갇히게 될 터였다.이유영은 이미 한 번 어둠 속에서 그 모든 고통과 무력함을
남자의 따뜻한 손끝이 이유영의 눈가를 살며시 스쳤다.아주 조심스럽게...이유영은 마치 그 온기가 자신을 태우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가슴이 답답하고 무거웠다.여진우가 부드럽게 말했다.“의사 말로는 상황이 심각하대. 이번엔 제발 말 좀 들어줘, 응?”“응.”그동안 가족들은 계속해서 이유영이 빨리 수술을 받아야 한다고 말했었다. 하지만 그때마다 이유영은 전생에 겪었던 어둠 속에서의 공포가 아직도 마음에 남아 있어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이유영은 다시 과거의 어둠 속으로 빠지기 싫었기에 항상 핑계를 대며 수술을 미뤘다.사실은... 두려움 때문이었다.눈 수술은 본래 위험이 따르는 일이었다. 실패라도 한다면 이유영에게 남는 것은 끝없는 어둠뿐이었다.그 고통은 전생에 이미 충분히 겪었다.그렇기에 이유영은 다시는 그런 어둠 속에서 단 한 순간도 살고 싶지 않았다.그 어둠은.마치 악마의 동굴과 같았다. 그곳에서는 어떤 출구도 찾을 수 없었다. 그 고통이 얼마나 깊은지, 그것은 경험해 본 사람만이 알 수 있는 일이었다.“유영아.”“응?”“수술 전까지는 최대한 마음을 가볍게 가져봐. 그러면 수술에도 좋을 거야.”여진우의 말은 단호하고도 확신에 찬 목소리였다.그는 마치 곧 기증자를 찾을 수 있을 것 같은 말투였다.여진우가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순간, 이유영이 갑자기 그의 손을 붙잡았다.“왜?”여진우가 고개를 숙이며 물었다.이유영이 조용히 말했다.“모든 건 자연스러운 흐름에 맡기자, 알겠지?”이유영의 목소리는 단호했다.여진우는 잠시 멈칫하며 이유영을 바라보았다. 그는 이유영이 왜 이런 말을 하는지 알고 있었다.정씨 가문의 영향력을 생각하면 최상의 수술 환경을 준비하는 건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하지만 이유영이 지금까지 고집을 꺾지 않았던 이유는 바로 그것 때문이었다.이유영은 너무 많은 고난을 겪었다.강이한, 한지음, 이온유... 이들은 모두 이유영의 인생에서 잊을 수 없는 고통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놀랍게도 이유영은 이런 고
여진우가 돌아왔을 때, 강이한은 여전히 정원 한가운데 서 있었고 떠날 기미를 전혀 보이지 않았다. 여진우는 미간을 찌푸리며 무심코 집 안쪽을 힐끗 보았다.여진우는 주먹을 가볍게 쥔 채 천천히 강이한에게 걸어갔다. 두 사람이 마주 선 순간, 공기는 팽팽하게 얼어붙었다.“지금 상황에 여기까지 올 여유가 있다니, 놀라운 일이군.”여진우가 말했다.서주의 상황은 어떠한가? 정국진이 발을 뗀 이후 이유영은 서주와 거리를 두었지만 여진우만큼은 그곳의 변화를 속속들이 알고 있었다.지금 서주는 강이한과 박연준에게 얼마나 중요한 시기인지.서주의 혼란 속에서도 강이한은 이곳까지 올 결심을 한 것이다.강이한은 여진우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은 이유영을 떠올리게 할 만큼 닮아 있었다. 그 얼굴을 보며 강이한의 눈빛에는 복잡한 감정이 스쳤다.전생에, 강이한은 이유영과 여진우가 남매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사실 조금만 더 주의 깊게 봤더라면 그들의 닮은 점을 쉽게 알아차렸을 것이다.그랬다면 서주에서 여진우를 만났을 때 이유영이 세상에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바로 알았을지도 모른다.“널 과소평가했어. 이렇게 빠져나올 줄이야!”강이한은 서주를 언급하며 말했다.여진우가 만약 능력이 없었다면, 이번 서주 사태는 여진우에게도 큰 위기가 되었을 것이다.하지만... 여진우는 담담히 말했다.“인생은 많은 선택지로 이루어져 있지만 때로는 중요한 것 중 일부를 포기해야 해!”여진우의 말은 깊은 의미를 담고 있었다.강이한은 여진우의 말을 곱씹으며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중요한데 포기한다고?여진우는 강이한이 말할 틈을 주지 않고 이어갔다.“하지만 너한텐 포기라는 건 없어 보이네.”“...”“예를 들면, 이온유...”이온유. 그렇다.강이한과 이유영 사이의 핵심 갈등은 연서였고 그 문제를 가로막는 가장 큰 존재는 바로 이온유였다.강이한은 여진우를 바라보며 입술을 다물었다.여진우는 더는 말을 덧붙이지 않고 등을 돌려 집 안으로 걸어가며 조용히 말했다.“서주로
“정 선생임...”강이한은 믿기 어렵다는 듯 정국진을 바라보았다.강이한이 정국진의 입에서 그런 말을 들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정국진은 냉정하게 말했다.“설마 또 ‘그저 아이일 뿐’이라는 말을 꺼내려는 건 아니겠지?”과거에.강이한은 이유영 앞에서 여러 차례 그저 아이일 뿐이라는 말을 강조해 왔다.그저 아이일 뿐이니까 이유영이 모든 걸 감당해야 한다는 뜻인가? 월이가 희생해도 괜찮다는 의미였던 걸까?그 순간.정국진의 한 마디 한 마디는 강이한의 가슴에 무거운 돌처럼 내려앉았고, 날카로운 칼날처럼 그의 마음을 깊이 찔러 들어왔다.누구나 이성적으로는 옳고 그름을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자기 일이 되면 감정은 편애를 피할 수 없다.그리고 강이한의 편애는 분명히 한지음과 한지음의 딸에게 쏠려 있었다.그는 당시 상황에서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고 믿었다. 하지만 그것은 오로지 자기 입장에서만 내린 판단이었을 뿐이었다. 이유영과 아이에게는 그의 모든 행동이 도저히 용서받을 수 없는 일이었다.“강이한, 이번이 마지막이다.”정국진은 강경하고도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당장 여기서 떠나!”그의 말투에는 명백한 경고와 위협이 담겨 있었다.정국진은 말을 마치고 자리를 떠났다.강이한은 그 자리에서 한동안 멍하니 서 있었다.정국진이 이렇게 많은 말을 하는 것은 극히 드문 일이었다. 하지만 긴 대화 속에서 드러난 결론은 단 하나였다.강이한에게 소중한 사람들이라고 해서 이유영과 월이가 그들을 받아들여야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처음부터 끝까지.한지음도, 한지음의 딸도 그저 강이한에게 중요한 존재일 뿐이었다.월이와 이유영은 어떤 의무도 없었고 받아들일 이유도 없었다.하지만 강이한은?그는 도대체 왜 그랬던 걸까? 강이한과 이유영의 관계는 어쩌다가 여기까지 오게 된 걸까?...백산 별장.임소미는 아이를 안고 집 안을 천천히 걸으며 달래고 있었다. 아이의 감정은 이제서야 조금씩 진정되고 있었다.월이는 강이한의 딸이었다. 그러나 그를 본
강이한은 눈썹을 찌푸린 채, 여전히 이유영과 임소미가 사라진 방향을 응시하고 있었다.“그만 쳐다봐!”정국진이 말했다.정국진의 목소리는 예전보다 훨씬 날카롭고 단호했다. 외조카와 친딸의 무게는 결코 같을 수 없었다.많은 일이 있었다. 비록 이유영이 서주에서 돌아온 후 별다른 이야기를 하지 않았더라도 정국진은 여진우를 통해 모든 상황을 알고 있었다.그렇기에 지금 정국진의 태도는 과거와는 완전히 다를 수밖에 없었다.강이한은 정국진을 쳐다보며 조용히 말했다.“방금...”“네가 본 대로다. 유영이의 시력은 급격히 악화했고 의사 말로는 수술하지 않으면 시력을 잃는 건 시간문제라고 하더군.”정국진의 차가운 말이 강이한을 가로막았다.강이한은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과 숨 막히는 답답함에 사로잡혔다.이유영이...“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요?”“유영이 엄마 말로는, 박연준이 유영이를 알프산으로 데려갔다더군.”알프산? 강이한의 표정이 굳었다.“...”박연준이 이유영을 알프산으로 데려갔다는 사실을 들은 순간, 강이한의 마음은 불안과 긴장으로 가득했었다.이유영의 몸 상태로는 그런 추운 지역이 적합하지 않다는 것을 그는 본능적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예상하지 못했다. 문제가 단순히 추위뿐만 아니라 두 눈까지도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는.“눈부신 설원과 강한 햇빛이 유영이의 눈에 치명적인 자극과 손상을 남겼어. 지금 시력이 이렇게 된 것도 그 탓이지.”정국진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강이한은 이미 느끼고 있던 가슴속 고통이 정국진의 이 말로 인해 더욱 심해졌다.결국... 박연준이 이유영을 알프산으로 데려간 탓에 그녀의 시력이 이렇게 빠르게 악화한 것인가? 이 사실을 깨달은 순간, 강이한은 마치 폭풍우가 휘몰아치듯 혼란스러웠다. 얼어붙은 광기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 같았다.정국진은 강이한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다시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다시 찾아오지 마라.”기회는 이미 넘칠 만큼 주어졌다. 강이한은 그 소중한 기회를 스스로 놓치고 말았을
이유영의 가슴은 철렁 내려앉았고 그대로 넘어질 것만 같았다. 그 순간, 허리에 전해진 강한 힘이 이유영을 단단히 붙잡아주었다.익숙한 기운이 스며들며 이유영을 감싸안았다.중심을 되찾는 순간, 이유영은 본능적으로 그를 밀쳐냈다. 그 사람은... 바로 강이한이었다. 자신이 가장 만나고 싶지 않은 남자.“와아아...”멀지 않은 곳에서 아이의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다.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리는 순간, 이유영의 차가운 눈빛은 순식간에 녹아내렸다. 이유영은 당황한 듯한 모습으로 서둘러 아이에게 달려갔다.“월이야, 월이야.”이유영은 아이를 품에 꼭 안았다.“엄마, 무서워요!”“괜찮아. 엄마가 여기 있잖아.”“나쁜 사람! 나쁜 사람이에요...”작은 아이는 두려운 목소리로 강이한을 보고 외쳤다.멀리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강이한은 아이의 입에서 '나쁜 사람'이라는 말이 터져 나오는 순간,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나쁜 사람... 이의 기억 속 자신은 그저 그런 존재일 뿐이었다.그래, 이게 바로 그가 아이에게 남긴 흔적이었다.이것이 바로 그의 존재가 남긴 기억이었다.“그래, 맞아. 저 사람은 나쁜 사람이야. 하지만 괜찮아. 엄마가 있으니까 아무 걱정하지 마.”어떤 나쁜 사람도 월이의 머리카락 한 올조차 다치지 않게 막아낼 수 있었다.이유영은 속으로 조용히 다짐했다.강이한은 멀리서 그들을 바라보며, 그 고요한 광경이 가슴을 날카롭게 찢어놓는 듯한 아픔을 느꼈다. 숨조차 쉴 수 없을 만큼의 고통이 밀려왔다. 그때, 소란을 들은 하인들과 집사들이 급히 현장으로 달려왔다. 그들 역시 강이한을 보자 긴장한 기색을 감출 수 없었다.이내 임소미와 정국진도 급히 현장에 도착했다.임소미는 강이한을 보자마자 적대감이 가득 묻어나는 목소리로 쏘아붙였다.“여긴 왜 온 거야?”임소미의 말투는 한 치의 호의도 담겨 있지 않았다.“유영이를 좀 봐.”정국진이 임소미에게 말했다.임소미는 강이한에 대한 불만이 아무리 많아도 이유영의 이름이 언급되자 그 감정을
임소미는 이유영이 백산 별장을 단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하도록 했다. 심지어 반산월로 돌아가는 것도 절대 용납하지 않았다.결국 이유영은 무력감 속에 남겨질 수밖에 없었다.서재에서 정국진은 이유영을 바라보며 말했다.“네 두 눈은 지금...”정국진의 목소리에는 멈춘 말 속에 깊은 안타까움이 묻어났고, 이유영은 그 감정을 생생히 느꼈다.“아빠...”“수술은 빨리 받는 게 좋겠다. 그래야 네 엄마도 마음이 놓일 테니까.”“하지만 저는...”“걱정할 필요 없다. 네게 가장 뛰어난 의사를 붙여줄 테니.”정국진은 이유영의 마음을 꿰뚫어 본 듯 이유영을 달래며 말했다.사실 정국진과 임소미는 누구보다도 긴장하고 걱정하고 있었다. 수술이 실패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 때문에 모든 준비를 더 철저하게 하고 있었다.“아빠...”“응?”“아빠... 저, 너무 무서워요.”그동안 가족들이 자신을 얼마나 걱정하는지 알면서도 지금 이 순간, 이유영은 두려움을 참지 못하고 가족들 앞에서 자신의 감정을 드러냈다.이유영은 정말로 무서웠다. 어둠 속에서 살아가는 그 고통을 다시는 경험하고 싶지 않았다.지금까지 그토록 자신의 두 눈을 지켜 왔건만 결국 일이 이 지경까지 이르렀다.마음속에서 숨 막히는 듯한 답답함이 밀려왔다.전생에서 눈을 떴을 때, 이유영을 감싼 건 끝없는 어둠뿐이었다. 그 공포와 혼란은 그녀를 미치게 할 지경이었다.지난 생에서 이유영이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그 어둠 속에 적응하려고 애쓰는 것뿐이었다.하지만 이번 생은 달랐다. 한순간에 어둠 속으로 떨어진 것이 아니라 서서히 시야가 어두워져 가는 과정을 느껴야 했다.그 느린 과정이 그녀에게는 더욱 고통스러웠다.“무서워하지 마라. 우리 모두 네 곁에서 함께할 거야.”“네...”이유영은 고개를 숙였고 눈물이 주르르 떨어졌다.그래, 두려워하지 말자. 이번 생은 전생과는 다르니까. 비록 전생의 운명을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더라도 이번에는 가족들이 곁에 있어.전생에는 어둠 속에서 이유영 곁에는 강이한
이유영은 이제야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 시력이 급격히 나빠진 원인이 바로 알프산 방문 때문이라는 사실도.알프산을 다녀온 후 이유영의 시력은 점점 더 악화하였고 자극을 받은 듯한 이상 증상들이 서서히 나타났다.“강한 빛도 견디지 못하면서 어떻게 그런 곳에 갈 생각을 했니?”임소미는 완전히 화가 나 있었다.이제 이유영이 어디를 가든 임소미는 더 이상 허락하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그 장소가 이유영의 눈에 큰 해를 끼칠 수 있는 곳이라면 더욱더.“엄마, 정말 별일 아니에요...”이유영이 조용히 말했다.“더 이상 말하지 마!”임소미는 너무 화가 난 나머지 머리가 지끈거렸다.“잠깐 잊고 있었어요.”이유영은 진심으로 말했다.미리 알았더라면 절대로 가지 않았을 것이다.이전에도 의사가 주의를 당부한 적이 있었지만, 눈 덮인 곳에 갈 일이 거의 없었기에 점점 그 사실을 잊고 있었다.그러다 이번에 큰 자극을 받게 되었고 일이 이렇게까지 심각해질 줄은 이유영 자신도 몰랐다.“잊었다고? 그 잊음 때문에 평생 어둠 속에서 살아야 할 수도 있는데, 그걸 어떻게 잊을 수가 있니?”임소미의 목소리에는 분노를 넘어선 깊은 슬픔이 담겨 있었다.임소미의 다급한 목소리를 들으면서 이유영은 자신도 모르게 마음이 더 조급해졌다.“엄마, 미안해요!”“미안하다는 말은 필요 없어. 나는 네가 건강하게 지내는 것만 바랄 뿐이야, 알겠니?”그것이 바로 어머니의 마음이었다.어떤 상황에서도 자식이 잘 지내길 바랄 뿐이었다.이유영은 그 말에 가슴이 따뜻해졌다.이유영은 손을 뻗어 임소미의 가냘픈 허리를 감쌌다. 나이가 들었음에도 임소미는 여전히 이렇게 날씬하고 아름다웠다.임소미는 평소에도 관리를 열심히 하는 사람이었다.“알겠어요, 엄마. 화 풀어요, 네? 저, 수술받을게요.”“유영아...”“엄마, 이제 걱정하지 마세요, 네?”임소미의 품에 안긴 이유영은 마치 어린아이 같았다.임소미는 심장이 떨릴 정도로 안쓰러웠다.임소미는 이유영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우지는 빠르게 물을 닦아냈다.손바닥에 남은 차가운 물기는 이유영에게 시력이 점점 더 나빠지고 있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떠올리게 했다.언젠가 이유영의 두 눈은 완전히 어둠 속에 갇혀 아무것도 볼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그 공포는 마음 가장 깊은 곳에서 서서히 퍼져 나왔다.아침에 물 한 잔을 쏟은 이후, 이유영은 하루 종일 우지와 우현의 손길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옷을 갈아입고 세수를 하는 과정에서도 마찬가지였다.이유영은 이제 옷장 속에서 강렬하고 선명한 색깔의 옷들만 겨우 식별할 수 있었다.나머지 색깔들은 이미 모두 희미한 회색빛으로 뒤덮여 있었다.아침 식탁.우지는 조심스럽게 죽을 이유영 앞에 놓으며 말했다.“아가씨, 조심하세요. 아직 조금 뜨거울 수 있습니다.”그뿐만 아니라, 이유영이 숟가락을 집으려고 할 때, 우지는 바로 숟가락을 건네주었다.“고마워요.”이유영은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그러나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거센 혼란이 몰아치고 있었다.가슴은 답답하고 꽉 막힌 것 같았다.그때, 임소미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이유영은 전화를 받으며 말했다.“엄마.”“왜 아침 같이 먹으러 오지 않았어?”“좀 늦게 일어났어요. 엄마 먼저 드세요.”“그럼 오전에는 꼭 돌아와서 월이랑 같이 놀아 줘. 네가 이곳에 안 온다고 하면 월이가 속상해할 거야.”“네, 알겠어요.”월이의 이름이 언급되자 이유영은 가슴이 더 답답하고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월이의 이름을 떠올리는 순간, 이유영의 마음속에는 수술을 받아야 한다는 결심이 더욱 굳어졌다.전화를 끊고 난 후.이유영의 세계는 다시금 무거운 침묵에 휩싸였다.이유영은 곰곰이 생각했다. 여진우가 곁에 있어서 다행이었다. 만약 그마저 없었다면, 지금의 자신은 어떻게 버티고 있을까? 만약 임소미와 정국진에게 이유영만 존재했다면... 그들은 얼마나 더 힘들어하셨을까?다행스러움과 무거움이 동시에 몰려왔다.아침 식사 후.이유영은 운전기사의 차를 타고 백산 별장으로 돌아갔다.임소미는 이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