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강서희는 울먹이는 목소리로 진영숙을 불렀다.이시욱이 말했다.“한지음 씨, 이만 가시죠.”“가긴 어딜 가?”이때 계단 입구에서 강이한의 싸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혼란스럽던 현장이 갑자기 조용해졌다.그가 집사에게 눈짓하자 집사가 남은 손님들을 밖으로 안내했다.그 과정에서 강이한은 싸늘한 시선으로 현장을 바라만 보고 있을 뿐이었다.재미난 구경거리가 생겼다고 지켜보던 손님들도 그에게서 느껴지는 위험한 기운을 보고 급급히 현장을 떠났다.손님들이 모두 떠나고 집안 사람들만 남게 되자 강이한은 살기가 가득 담긴 눈으로 강서희를 노려보았다.“엄마….”강서희가 어깨를 움찔하며 진영숙에게 달라붙었다.그녀는 현재까지도 강이한이 왜 자신을 그런 눈으로 보는지 이해하지 못했다.진영숙은 습관적으로 강서희의 어깨를 다독였다.“괜찮아, 엄마 여기 있잖아.”순간 강서희는 놀란 어린아이처럼 진영숙의 품을 파고들며 안정을 찾았다.옆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왕숙은 뭔가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끼고 노부인에게 말했다.“피곤하실 텐데 이만 들어가서 쉬실까요?”“그래.”노부인은 안 그래도 엉망이 된 현장을 보고 짜증이 치밀었기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집으로 들어갔다.진영숙은 천천히 계단을 내려오는 강이한을 보고 뭔가 일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느꼈다.강이한의 살기 번뜩이는 눈은 강서희를 잡아먹을 것처럼 쳐다보고 있었다.그 시각 현장에는 강서희와 진영숙, 한지음, 이시욱만 남아 있었다.집사를 비롯한 남은 고용인들은 이미 자리를 비운 상태였다.강서희와 진영숙도 강이한의 상태가 이상하다는 것을 뒤늦게 느꼈고 시력을 잃은 한지음도 뭔가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꼈다.“오빠….”강이한이 진영숙의 앞으로 다가왔을 때, 강서희는 날카로운 그의 시선을 보고 심장이 멎을 것 같았다.“왜 이러는 거니?”진영숙이 긴장한 목소리로 물었다.비록 강서희에게 불만이 많았지만 강이한의 상태를 보고 저도 모르게 강서희를 감싸안았다.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갑자기 손을 뻗은
강서희는 강이한을 빤히 바라보며 뭐라고 말하려다가 시선이 그의 손에 들린 카드에 닿았다.그 순간 그녀의 얼굴은 창백하게 질렸다.“오빠… 그게 아니라….”그녀는 당황한 목소리로 어떻게든 변명하려고 했다.이성은 지금 당장 부인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었지만 카드를 본 순간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서 말조차 제대로 할 수 없었다.그녀는 흔들리는 눈으로 무섭게 굳은 강이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짝!강이한은 그대로 카드를 그녀의 얼굴에 던졌다.진영숙은 바닥에 떨어진 카드를 발견하고 주섬주섬 다가갔다. 강서희는 황급히 손을 뻗어 카드를 손에 쥐고 뒤로 숨겼다.“그런 거 아니야. 내 말 좀 들어봐, 오빠.”그녀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진영숙도 뭔가 이상함을 느끼고 강이한에게 물었다.“저게 뭐야?”대체 저 카드가 뭐기에 강이한을 이토록 이성을 잃게 만든 걸까?“오빠.”“그래, 어디 변명 좀 해봐.”강이한은 싸늘한 눈으로 강서희를 바라보며 말했다.강서희는 언제나 자상하기만 하던 오빠가 악귀처럼 변한 모습을 보고 저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 하지만 그런 초라한 모습도 강이한의 연민을 자극하지는 못했다.남자는 실망 가득한 얼굴로 바닥에서 카드를 손으로 가리고 있는 강서희를 바라보았다.‘너였구나! 모든 게 너였어!’이때, 머릿속에 이유영이 했던 말들이 떠올랐다. “난 당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어.”“그 카드 진작에 잃어버렸다고!”“내가 한 게 아니야!”그는 한 번도 그녀에게 제대로 해명할 기회조차 준 적이 없었다.그녀는 매번 아니라고 했지만 한 번도 그 말을 믿지 않았다. 그는 단지 자신이 조사한 증거들만 믿었다.가장 중요한 증거라고 생각했던 카드가 강서희의 화장대에서 발견될 줄을 누가 알았을까!“그거 이리 줘!”상황을 지켜보던 진영숙이 무릎을 굽히고 강서희의 손에서 카드를 빼앗았다.강서희는 바둥거리다가 결국 카드를 진영숙의 손에 빼앗기고 말았다.진영숙은 카드를 들고 이리저리 훑어보았지만 딱히 문제점을 발견하지 못했다.“그냥 평범
강이한도 아무 생각 없이 화장대 서랍을 뒤지다가 거기서 카드를 발견하게 될 줄은 몰랐을 것이다.“왜 말이 없어?”강이한은 입가에 싸늘한 미소를 머금고 강서희를 노려보며 물었다.강서희는 겁에 질린 눈으로 강이한을 바라보고 있었다.조급해진 진영숙이 강서희를 다그쳤다.“빨리 말해. 이 카드가 왜 너한테 있어?”예전에 이유영과 강서희의 관계로 봤을 때 이유영이 자발적으로 강서희에게 카드를 건넸을 리는 없었다.설마 도둑질이라도 한 걸까?그럴 가능성이 떠오르자 진영숙은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다.“그건… 한지음한테 받은 거야.”드디어 강서희가 입을 열었다.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한지음을 바라보았다.‘그래! 한지음을 물고 늘어지는 거야.’어차피 지금 이 상황에 무슨 말을 해도 강이한은 자신을 믿어주지 않을 것 같았기에 혼자 죽기 싫어서 한 말이었다.그 말이 끝나기 바쁘게 무거운 정적이 돌았다.강서희에게로 쏠렸던 강이한 모자의 시선이 한지음에게로 쏠렸다. 공허한 눈동자에 하얀 원피스를 입고 얼굴이 창백하게 질린 모습은 마치 금방 세상에 내려온 천사 같았다.시선을 느낀 그녀는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이한 오빠, 저 말을 믿나요? 내가 무슨 수로 언니한테 접근해서 카드를 가져왔겠어요?”부드러운 그 한 마디는 강서희의 해명을 완전히 거짓말로 만들었다.한지음이 이렇게 되기 전까지 이유영에게 접근할 기회조차 없었다는 것은 모두가 다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그래서 굳이 한지음이 나서서 해명할 이유도 없었다.강서희는 그 말을 듣자마자 눈시울이 시뻘겋게 붉어졌다.“한지음, 이 카드 네가 나한테 준 거 맞잖아. 계속 아니라고 할 거야?”그녀는 협박이 다분한 말투로 한지음을 재촉했다.어차피 그 수많은 일들은 둘이 손을 잡고 완성한 것들이었다.그러니 강서희는 절대 혼자 뒤집어쓸 생각이 없었다.짝!말이 끝나기 바쁘게 아찔한 소리와 함께 강서희의 고개가 돌아갔다.남자는 더는 참지 못하겠다는 듯이 분노한 목소리로 고함쳤다.“아직도
강이한은 가슴이 철렁하며 흔들리는 표정을 감추지 못한 채로 고개를 돌렸다.그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무슨 일인데?”“화재예요. 임강구 소방서가 출동했는데 인력이 부족하여 중심가 쪽에 있는 소방서까지 출동했다고 합니다.”그 말이 끝나기 바쁘게 이시욱의 귓가에 싸늘한 바람이 불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강이한은 이미 대문을 뛰쳐나가고 있었다.이시욱도 다급히 그의 뒤를 따랐다.잠시 후, 거리로 나가자 긴장감 넘치는 경적 소리가 거리에 울려퍼지기 시작했다.현장에 남은 진영숙과 강서희, 그리고 한지음은 구치소에 화재가 발생했다는 얘기를 듣고 가슴이 울렁거렸다.강서희는 저도 모르게 한지음을 바라보았다. 눈빛을 읽을 수는 없었지만 한지음의 입가에 걸린 비릿한 미소를 그녀는 놓치지 않았다.강서희는 저도 모르게 등골에 소름이 돋았다.한편.운전대를 잡은 강이한은 미친 듯이 거리를 질주하고 있었다.뒤에서 다른 운전자들의 욕설이 들려왔지만 그는 질주를 멈추지 않았다.가는 길에도 급박한 소방차의 경적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강이한은 시뻘겋게 충혈된 눈으로 전방을 주시하고 있었지만 운전대를 잡은 손은 사시나무 떨듯이 떨리고 있었다.“유영아….”그는 애달픈 목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괜찮아. 괜찮을 거야!’하지만 긴박한 소방차의 경적소리는 화재가 결코 작지 않다는 사실만 일깨워주고 있었다.왜 갑자기 화재가 난 거지?갑자기 머릿속에 떠오른 익숙한 장면이 있었다. 하지만 그곳은 구치소가 아니라 그와 그녀의 집이었다.어떻게 된 거지?머리가 울렁거리면서 시야가 흐려지고 신호등도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20분 뒤, 강이한은 휘청거리며 차에서 내렸다. 하늘을 뒤덮은 검은 연기와 급하게 물을 뿌리는 소방대원들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하지만 불바다가 된 구치소의 불길은 전혀 수그러들 기미가 보이지 않고 오히려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현장에는 폴리스라인이 쳐졌고 현장은 아수라장이었다.강이한은 가슴에서 피가 흘러내리는 것 같았다. 그는 더 이상 주저
쾅 하는 소리와 함께 사내는 머리를 바닥에 부딪히며 쓰러졌다.혼란스러운 현장에서 비명 소리가 들려왔지만 그에게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다시 눈을 뜬 그는 멍하니 불길을 쳐다보며 이유영의 얼굴을 떠올렸다.“대표님!”이시욱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을 때, 그는 다시 의식을 잃고 말았다.온몸에 힘이 풀리고 끝없이 밑으로 추락하고 있었다.그는 눈을 뜨려고 애를 썼다.‘정신 차려, 가서 유영이를 구해야 해!’하지만 어둠 속에서 무형의 큰 손이 그의 뒷덜미를 잡고 계속 아래로 잡아당기고 있었다.그리고 강이한은 아주 기나긴 꿈을 꾸었다.꿈속에서 그는 교실 앞 창가에 서 있었다. 교실 안에는 조용히 책을 읽고 있는 가녀린 소녀가 보였다.다시 장면이 바뀌고 그는 이유영과 함께 학교 식당에서 같이 밥을 먹고 있었다. 어쩜 이렇게 사랑스러운 사람이 있을까?그가 장미 한 송이를 그녀에게 선물했을 때, 그녀는 환한 미소를 지었다. 그 순간 그는 평생 이 소녀의 웃음을 지켜주어야겠다고 다짐했다.결국 그녀는 그가 사준 아름다운 웨딩드레스를 입고 결혼식장으로 입장했다. 그때의 강이한은 자상했고 이유영의 미소는 눈부셨다.장면이 다시 바뀌더니 그는 불타는 홍문동 별장 앞에 서 있었다.그는 미친 사람처럼 안으로 달려들어가려고 했지만 옆에 있던 사람들이 그를 막아섰다.“불길이 이렇게 거센데 이유영 씨는 진작에 사망했을 거예요. 지금 들어가셔도 소용없다고요.”“아니야. 거짓말이야!”평생 함께하겠다고 약속했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는 결국 사랑하는 여자를 지켜주지 못했다.“그냥 죽게 내버려 둬. 온몸이 불에 탔을 거야. 살아남아도 고통스러울 뿐이라고!”“안 돼!”비명소리와 함께 강이한은 감고 있던 눈을 떴다.병상을 지키던 진영숙이 화들짝 놀라며 그를 바라보았다.“이한아.”강이한은 주변을 둘러보고 거친 숨을 토해냈다.“아!”머리가 빠개질 것처럼 아파왔다.“어디가 아픈데? 엄마한테 말해봐.”진영숙은 고통스러운 그의 표정을 보며 걱정 어린 말투로 물었
강이한은 다음 날 저녁이 되어서야 의식을 회복했다.비가 내린 뒤의 창밖은 습윤한 공기가 물씬 풍겼다.눈을 뜬 순간 다시 아팠던 기억이 떠올라 숨이 막혀왔다.진영숙은 병상 옆 의자에 기댄 채 잠들어 있다가 소리를 듣고 잠에서 깼다.강이한은 주섬주섬 외투를 챙기고 밖으로 나가고 있었다.놀란 진영숙이 다급히 따라가며 물었다.“이한아, 이 상태로 어딜 간다는 거야?”하지만 강이한은 아무런 대답도 없이 곧장 엘리베이터로 달려갔다.아들과 시선이 마주친 순간, 진영숙은 절망이 가득 담긴 그의 눈동자를 보고 저도 모르게 입을 다물었다.그녀는 잠시 후에야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고 말했다.“엄마랑 같이 가자. 이한아!”진영숙은 다급히 강이한의 뒤를 따랐지만 강이한은 엄마에게 시선 한번 주지 않았다.진영숙은 다급히 뒤를 따르며 이시욱에게 전화를 걸었다.“네, 사모님.”“이한이 밖으로 나갔어. 빨리 좀 막아줘.”진영숙은 떨리는 목소리로 이시욱에게 말했다.이틀이라는 시간이 지나고 청하시의 모든 것이 바뀌었다. 이미 세간에는 이유영이 사망했다는 기사가 떠돌고 있었다.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강이한은 환자복을 입은 채, 맨발로 밖으로 뛰어나갔다.연락을 받고 달려온 이시욱은 정신이 나간 듯한 그의 모습에 조심스럽게 그의 앞을 막아섰다.“대표님.”그의 현재 상태로 봐서 아마 진실을 받아들이기 힘들 것이다.하지만 가지 못하게 막는 것도 불가능했다.이시욱은 상사의 눈에 가득 담긴 절망을 보고 천천히 손을 내렸고 강이한은 허겁지겁 밖으로 향했다.이시욱은 조용히 그의 뒤를 따랐다.잠시 후, 그들을 태운 차가 임강구의 구치소에 도착했다.차에서 내린 강이한은 불에 타서 폐허가 되어버린 구치소 현장을 보고 다리에 힘이 풀렸다.건물은 이미 무너진 상태였고 매캐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강이한은 멍한 얼굴로 안으로 들어갔다.‘유영이를 만나야 해. 저렇게 더러운 곳에 유영이를 둘 수는 없어.’이시욱이 다가가서 그에게 말했다.“대표님, 이유영 씨는 이미 여기 없
그는 온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이시욱은 고개를 떨리고 긴장된 목소리로 말했다.“정국진 회장이 직접 오셔서 유골함을 가지고 출국했습니다. 어젯밤에 유골함을 가지고 떠날 때, 대표님께 다시는 파리로 와서 이유영 씨를 찾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이유영 씨는 생전에 그토록 청하를 떠나고 싶어했고 대표님을 만나고 싶어하지 않을 거라고 했습니다.”청하시는 이유영이 가장 오래 생활한 곳이었다. 하지만 죽는 순간에도 벗어나고 싶었던 곳이기도 했다.이곳이 그녀에게 남긴 건 끝없는 절망뿐이었다.찬바람이 불어와 얼굴을 때렸다.강이한은 멍하니 서서 온몸의 피가 식어가는 것을 느꼈다. ‘또 늦었구나. 지난 생에도 이번 생에도 난 너를 아프게만 했구나.’그는 고개를 떨구고 두 손을 바라보았다. 양손으로 그녀를 벼랑 끝까지 몰아세운 건 강이한 자신이었다.‘내가 또 내 손으로 너를 지옥으로 보냈구나.’“악!”그는 상처 입은 야수처럼 하늘을 바라보고 고함을 질렀다.이유영은 미련 없이 떠났다.어쩌면 화재에 불탄 건 그녀뿐만이 아니라 사랑과 집념, 그리고 끝없는 후회일 수도 있었다.강이한이 다시 의식을 회복했을 때, 그는 이미 병실에 누워 있었다. 이시욱이 병실을 지키고 있었고 진영숙은 그의 옆에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이한아.”눈을 뜬 아들을 보고 진영숙은 애통한 얼굴로 아들의 손을 잡았다.강이한은 싸늘하게 그 손길을 뿌리치고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언제지?”그는 무감각한 목소리로 이시욱에게 물었다.이시욱은 잠깐 당황하다가 이내 눈치를 채고 무거운 표정으로 말했다.“조금 전 입수한 소식에 따르면 정국진 회장은 오늘 장례식을 올리고 이미 무덤에 이유영 씨를 모셨다고 합니다.”결국 그는 마지막으로 이유영을 보내줄 기회조차 갖지 못했다.병실 분위기가 순식간에 냉각되었다.진영숙은 아들이 빨리 정신을 차리기를 바랐지만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기에 머리가 아팠다. 안 그래도 집안이 혼란스러운데 더 큰일이 벌어질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진영숙은 다소
한편, 강이한의 본가.강서희는 예전부터 집에서 오빠를 기다리는 것을 좋아했다.그런데 이유영과 결혼한 뒤로 오빠는 본가에 자주 발을 들이지 않았다.지금도 강서희는 이틀 동안 집에서 오빠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유영의 사망소식이 공개된지도 벌써 이틀이 지났다. 소방대원이 의식을 잃은 그녀를 구조해 밖으로 끌고 나왔지만 결국 병원으로 옮겨진지 한 시간 만에 사망했다고 한다.파리에서 귀국한 정국진이 그녀를 그 자리에서 화장해서 파리로 데려갔다고 했다.강서희는 이유영이 저주스러웠다. 강이한의 마음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 여자였기 때문이었다.하지만 지금은 딱히 기쁨이 느껴지지 않았다.사랑하는 오빠가 죽은 여자를 위해 곧 그녀에게 어떤 처벌을 가할지 상상이 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그녀는 오빠가 보고 싶었지만 동시에 그가 돌아와서 자신의 숨통을 조일까 봐 두렵기도 했다.어쩌면 강이한은 이유영을 보낸 분노와 한을 강서희에게 풀지도 모른다.“아가씨, 오렌지 좀 드셔보세요. 달아요.”왕숙은 손질한 과일을 들고 강서희에게 다가가며 안타까운 말투로 말했다.최근 이틀 사이 강서희는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는 왕숙이 만든 디저트마저 거부하고 방에만 틀어박혀 있었다.“안 먹어.”강서희는 짜증스럽게 대꾸했다.“아가씨, 이렇게 안 드시면 큰일나요. 건강을 챙기셔야죠.”“차라리 불타 죽은 사람이 나였으면 좋겠어.”강서희가 울먹이며 말했다.죽은 사람은 아무것도 느끼지 못할 테지만 살아남은 사람은 고통 속에 살아가야 한다고 생각하니 절망이 찾아왔다.놀란 왕숙이 다급히 말했다.“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다시는 그런 말하지 말아요.”죽고 싶다는 강서희의 말에 왕숙은 당황했다.그녀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강서희를 위로했다.“뭘 그렇게 걱정해요? 사람은 이미 죽었는데 도련님이 설마 죽은 여자를 위해 아가씨한테 해를 가하겠어요?”강서희는 착잡한 얼굴로 고개를 돌려 왕숙을 바라보며 말했다.“아줌마, 오빠가 그 카드를 내 방에서 발견했다는 게 뭘 의미하는
소은지의 냉정한 태도와 엔데스 명우의 거칠고 격렬한 분노는 극명한 대조를 보였다. 소은지는 지나칠 정도로 차분하고 무관심해 보였다.엔데스 가문의 일원으로 수많은 일들을 경험해 온 엔데스 명우조차도 지금 소은지가 풍기는 차가움에 섬뜩해질 정도였다.“정말 냉정한 사람이네.”남자는 한 글자 한 글자 천천히 내뱉으며 목소리에는 위험이 가득했다.소은지는 차분히 답했다.“미안하지만, 나와 상관없는 사람이나 일에 대해선 공감이 잘 안돼.”일이 직접 자신의 삶에 닥치지 않는 한, 그 감정을 완벽히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이건 냉정함이나 무관심의 문제가 아니었다. 게다가 소은지는 설선비, 설유나와 특별한 관계도 없었다.그들 사이에 관계가 있다고 해도 결코 유쾌한 사이는 아니었다.그러니 설선비와 설유나가 죽음을 맞이했을 때, 소은지는 그저 냉정했을 뿐이다.더군다나, 소은지와 엔데스 명우 사이에 있었던 수많은 일들을 생각하면, 설선비와 설유나가 겪은 일에 어떠한 연민이나 슬픔도 느낄 수 없었다.그 순간, 갑자기 목덜미에 강렬한 힘이 느껴졌다. 엔데스 명우의 손은 마치 소은지의 목을 으스러뜨릴 듯 강하게 조였다.분명한 건, 엔데스 명우는 설선비와 설유나의 죽음이 모두 소은지의 탓이라고 믿고 있었다.설선비는 소은지의 고소로 궁지에 몰려 죽게 된 것이었고 설유나는 소은지의 외면으로 죽음을 맞이했다고 생각했다.“소은지, 너 같은 여자는 이 세상에 존재할 가치도 없어!”남자의 목소리는 칼날처럼 날카롭고 잔혹했다.팍!뺨을 세게 내려치는 소리가 공기를 갈랐다. 모든 것이 멈춰버린 듯 공간은 순식간에 정적에 휩싸였다.엔데스 명우가 손을 놓는 순간, 소은지는 다시 자세를 바로잡고 앉았다.이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도 소은지는 흔들림 없는 고요한 기운을 유지하고 있었다. 소은지에게는 조금의 동요도, 당황스러움도 보이지 않았다.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며 숨을 삼켰다. 현장에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미 엔데스 명우의 사람들에게 통제당한 상태였다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의 마음속에서 너무나도 중요한 존재가 되었을 때, 그 사람에 대한 소식이 진짜든 가짜든 간에 상대방은 긴장하기 마련이다.의심할 여지가 없었다.박연준의 사람들은 이온유가 강이한에게 있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알고 있었다. 만약 강이한이 이 소식을 접하게 된다면, 과연 어떻게 반응할까?아마도 강이한은 그의 사람들로부터 어떤 이야기를 들어도 의심을 지우지 못할 것이다. 박연준은 강이한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강이한이 가진 가장 큰 약점이 무엇인지도 정확히 알고 있었기에 이런 식으로 소식을 흘리기로 결심한 것이었다.“명심하겠습니다!”문기원은 고개를 깊이 숙이며 대답했다.박연준은 낮고 깊은 목소리로 말했다.“유영이를 강이한의 곁에 둘 순 없다.”강이한을 찾을 수 없다면, 그가 스스로 모습을 드러내도록 만들어야만 했다.그동안 서주가 강이한에게 어떤 의미였는지, 박연준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어떤 일이 있어도 이유영을 서주의 소용돌이에 더 깊이 휘말리게 할 수는 없었다. 이미 이유영을 그곳으로 끌어들인 것만으로도 박연준은 마음 깊이 후회하고 있었기에 더 이상 이유영을 위험에 노출시키고 싶지 않았다.강이한의 주변은 결코 안전하지 않을 것이다.“알겠습니다.”문기원은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 역시 박연준의 의도를 잘 이해하고 있었다.비록 박연준은 말로 드러내진 않았지만, 문기원은 오랜 세월 박연준의 곁에서 함께하며 박연준이 이유영을 끌어들인 일을 후회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사람은 종종 되돌릴 수 없는 상황에 처하고 나서야 자신의 마음을 깨닫게 된다.박연준 역시 그랬다.그리고 강이한 또한 마찬가지였다....현재 서주는 마치 시간이 멈춘 듯 정체된 상태였다. 많은 이들이 강이한을 찾고 있었지만, 그는 세상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진 듯 보였다.한편, 파리에서도 큰 사건이 벌어졌다.설유나는 엔데스 명우가 적합한 기증자를 찾기도 전에 결국 세상을 떠났다.반산월.남자는 핏발 선 눈으로 소은지를 노
이렇게 오랜 시간 동안 이유영의 곁에 머물러 있겠다고?이것은 이유영이 도저히 믿기 힘든 일이었다. 하지만 강이한은 자기 말이 진심임을 결국 행동으로 보여주었다. 하루, 이틀, 사흘... 일주일이 지나고 심지어 보름이 지나도 강이한은 떠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그저 말없이 이유영의 곁을 지키고 있었다.강이한의 존재는 너무나 자연스러워졌다. 하지만 이유영은 여전히 파리에 있는 가족들에게 연락조차 할 수 없었고 서주의 상황도 여전히 알 수 없었다.강이한은 매일 외출했지만, 소문으로만 듣던 그 의사는 고집이 워낙 세서 끝내 마음을 열지 않았다.우천시에서 보름이 지나도록 이유영은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못한 채, 다른 의사들로부터 상태를 유지하는 데 그쳤다.강이한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 의사를 데려오겠다는 각오로 노력하고 있었다....한편, 서주에서 박연준이 강이한이 이유영을 데려갔다는 소식을 들은 지 벌써 일주일이 흘렀다. 그리고 이유영의 두 눈이 완전히 실명했을 수도 있다는 소식도 전해 들었다.정국진 쪽에서 들려온 소식에 의하면 그 원인은 알프산에서 있었던 일 때문이라고 했다.“아직도 소식이 없니?”서재 안, 박연준의 목소리에는 날카로운 기운이 서려 있었다.문기원이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아직 없습니다.”이유영의 소식은 단 한 마디도 들려오지 않았다. 강이한이 이렇게까지 할 줄이야. 박연준은 예상하지 못했다. 서주가 이렇게 혼란스러운 와중에 강이한이 이유영을 데리고 사라질 줄은.게다가 벌써 보름 가까이 아무 소식도 없이 사라졌다.“대체 어디로 데려간 걸까?”박연준은 미간을 짙게 찌푸리며 중얼거렸다.이 소식을 들은 일주일 동안, 박연준은 밤마다 뒤척이며 이유영의 걱정에 한시도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이유영의 시력이 원래부터 좋지 않았다. 만약 알프산의 사건으로 인해 시력이 급격히 더 나빠진 것이라면...박연준은 그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점점 조여 왔다.“찾아볼 곳은 다 뒤졌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아무런 단서도 찾지 못했습니다.”박
강이한은 알아챘다. 이유영이 일부러 강이한을 자극하고 있다는 걸.강이한의 불같은 성격을 알기에 일부러 화를 돋워 강이한을 떠나보내려는 의도였다.이유영은 더 이상 강이한을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아니, 그의 존재 자체를 잊어버리고 싶었다.“네가 무슨 말을 하든 난 절대 떠나지 않을 거야.”“...”강이한이 설마 다 알아챈 건가?“10년이란 세월이야.”강이한은 10년이라는 시간 속에서는 어떤 관계도 서로를 모를 수 없다고 말했다.10년이었다.그들의 관계가 어떻게 시작됐든 강이한은 이유영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이유영은 묵묵히 침묵을 지켰다.점심 식사.무거운 침묵 속에서 점심시간이 흘렀다. 이유영이 가장 좋아하던 우천시의 지역 요리였지만 강이한과 함께 있다는 이유로 모든 음식이 무미건조하게 느껴졌다.말을 너무 많이 했던 걸까? 이유영은 오후 내내 강이한과 대화하려 하지 않았다. 강이한이 무슨 말을 해도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이유영은 철저히 강이한을 무시하고 있었다.강이한은 우천시에서 가장 유명한 간식거리들을 사왔다. 우천시에 오면 꼭 먹어야 한다며 음식을 내밀었지만, 이유영은 한 입도 손대지 않았다.“유영아.”강이한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이유영을 바라보며 가슴이 점점 더 답답해졌다.강이한도 알고 있었다.이유영과 얽힌 수많은 일들만으로도 이유영에게 용서를 구할 수 없다는 것을. 게다가 지금은 연서의 사건까지 얽혀 있으니...이유영의 마음속 상처는 단시간에 치유될 수 없을 만큼 깊었다.“좋은 기분을 유지하지 않으면 눈도 빨리 낫지 않을 거야. 그러면 내 곁에서 빨리 벗어나지도 못할 거야. 잘 생각해 봐.”“...”강이한은 말하면서 싸늘한 기운을 뿜어냈다. 이 남자는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걸까? 강이한과 잘 지내지 않으면 강이한을 떠날 수 없다는 뜻인 건가?아니면 이유영의 눈이 다 나을 때까지 계속 곁에 있겠다는 뜻인 건가?“흥!”이유영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비웃는 듯한 냉소를 흘리며 말했다.“그럴 시간이 있긴
이 정도도 못 견디겠다는 건가? 그렇다면 이유영은? 이유영은 이전에 강이한의 곁에서 얼마나 많은 것을 견디고 참아내야 했던가? 강이한은 그런 기억조차 없는 것처럼 보였다.이유영은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손 놔!”“네 상태가 나아지기만 하면, 네가 뭘 말하든 다 받아들일게!”강이한은 억누른 목소리로 말했다.모든 것은 이유영의 눈이 나아진 뒤로 미루어야 했다. 지금 이유영의 감정이 더 격해지면 안 됐다. 강이한은 진심으로 이유영이 걱정되었다.하지만 이유영은 이런 것을 전혀 개의치 않는 듯했다.강이한은 답답했다. 이유영을 도대체 어떻게 대해야 할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다.“이 손 놓으라고!”이유영의 목소리는 여전히 냉랭했다.강이한은 이유영의 완강한 모습을 바라보았다. 두 눈이 보이지 않아도 이유영의 단호하고 강한 의지는 뚜렷이 드러나 있었다.가장 진실된 이유영의 모습이었다. 그 순간, 강이한의 머릿속에 지난 생의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두 사람의 관계가 최악으로 치닫기 시작한 건 아마 이유영이 실명한 이후였던 것 같았다.실명하기 전까지는 어떤 상황에서도 강이한을 믿었다. 그때를 떠올릴수록 강이한의 마음은 점점 더 쓸쓸해졌다. 이유영이 말했듯 이유영은 강이한에게 정말 많은 기회를 주었었다. 하지만 강이한은 이유영이 준 기회들을 한 번도 소중하게 여겼던 적이 없었다.강이한 스스로가 그 기회를 놓친 것이다. 이유영을 조금도 탓할 수 없었다.“유영아!”강이한은 무언가 말하려 입술을 떼었지만, 목이 메어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이유영은 강이한의 손을 강하게 뿌리쳤다. 그러나 이유영이 다칠까 봐 강이한은 결국 손을 놓고 말았다.이유영은 더듬거리며 숟가락을 잡으려 했다.우지와 우현이 이유영을 돕기 위해 다가가려 했지만, 이유영은 냉랭하게 말했다.“모두 나가줘.”“아가씨!”“나 혼자 할 수 있어요.”이유영의 목소리는 약간 떨렸지만, 여전히 차가웠다. 우지와 우현은 더 이상 다가갈 수 없었다. 사람은 누구나 자존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유영아.”강이한은 따스하면서도 아린 눈빛으로 온전히 자신을 밀어내려는 이유영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유영을 떠올리면 가슴이 미어졌다.두 사람의 과거는 차마 떠올릴 수도 없을 만큼 뼈아픈 기억으로 남아 있었다. 더욱이 말로 꺼낼 수도 없는 상처였다.입 밖으로 꺼낼 때마다, 이미 아물어가는 흉터를 억지로 다시 뜯어내는 기분이었다. 칼에 찔리는 듯한 고통이 다시 스며들 뿐이었다.하지만 피할 수 없었고 그저 마주할 수밖에 없었다.“네 눈이 나으면... 그때 다시 이야기하자.”강이한은 무언가를 말하려다 결국 삼켜버렸다.그 목소리엔 쓸쓸함이 배어 있었다.이유영은 강이한의 말에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게다가 당장 의사를 만날 수도 없었다. 강이한의 말처럼, 그 의사는 정말 괴짜일지도 몰랐다.결국 오늘도 헛걸음이었던 건가?점심 식사 자리에서.“도와줄게.”이유영이 손을 뻗으려는 순간, 강이한이 이유영의 손목을 붙잡았다.그러나 이미 늦었다. 이유영 앞에 있던 컵이 손이 닿자마자 뒤집혀 버렸고 컵 안의 물이 사방으로 튀었다.우지와 우현이 서둘러 다가와 물잔을 정리했다.그 사이, 강이한은 이유영을 안아 들어 올렸다. 덕분에 이유영은 물이 쏟아지는 불상사를 피할 수 있었다.강이한은 이유영을 안은 순간, 이유영의 몸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을 똑똑히 느꼈다. 강이한을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던 말은 거짓말이 분명했다.어떻게 신경 쓰이지 않을 리가 있겠는가?“유영아.”이유영은 여전히 어둠을 두려워하고 있었다.지난 생에 어둠 속에서 살아가는 데 익숙해졌던 이유영도 여전히 어둠은 공포였다.사실, 어둠 속의 삶을 진심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누구나 찬란한 햇빛 아래서 살아가길 원하니까.다양한 색채를 보고 아름다운 풍경을 즐기면서 말이다. 이유영 역시 그런 것들을 소중히 여겼던 사람이었다.하지만 지금은...강이한의 기억 속엔 지난 생 이유영이 어둠 속에서 느꼈던 절망이 여전히 선명히 남아 있었다.그때의 강이한은 분노와 슬픔으로 가득 차
강이한은 아침 일찍 집을 나섰다.소문으로만 듣던 ‘염 선생’을 만나러 간 것이다.그 시간 동안 우지와 우현은 휴대전화를 빌리기 위해 주변 사람들을 찾아다녔지만, 아무 소득도 없었다. 강이한답게 이미 철저히 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아침에 나갈 때부터 강 선생님의 사람들이 우리를 감시했어요. 외부 사람들과 연락할 기회가 전혀 없었어요.”우지는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강이한이 이유영을 둘러싼 모든 외부 연락을 완벽히 차단하려는 것이 분명해 보였다.이유영은 어둠 속에 조용히 앉아 있었다. 눈앞이 캄캄한 데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하기만 했다.우지가 이유영을 바라보다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아가씨.”“네?”“적어도 부인께는 아가씨 소식을 전해드려야 하지 않을까요?”임소미를 말하는 것이었다.우지와 우현은 임소미가 이유영을 얼마나 아끼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지금 누구보다도 가장 애타게 이유영의 소식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 확실했다.아이를 잃은 뒤로, 임소미는 긴 세월을 고통 속에서 보냈다.그리고 현재 이런 상황까지 겹쳤으니, 임소미의 심정이 얼마나 초조하고 불안할지는 뻔한 일이었다.이유영은 머리가 지끈거렸다.“네.”이유영은 담담하게 대답했다.강이한에게 할 말은 이미 다 했지만, 그 남자는 끝내 뜻을 굽힐 생각이 없어 보였다.“밖에 비가 아직도 오고 있나요?”“네.”지붕을 두드리는 빗소리로도 충분히 알 수 있었지만, 우지의 대답을 듣고 나니 우천시의 비가 얼마나 지독한지 새삼 실감이 났다.이유영은 어둠 속에서 조용히 빗소리를 듣고 있었다.빗소리는 복잡하고 어지러웠던 마음마저 차분히 가라앉히는 힘이 있었다.강이한이 돌아왔을 때, 이유영은 처마 아래 놓인 의자에 앉아 있었다.우지가 걸쳐준 망토를 두른 채, 조용히 비가 오는 풍경과 녹아든 모습이었다.강이한의 몸에서는 축축한 빗물 냄새가 났다.강이한이 다가오자마자 이유영은 그 냄새를 감지했고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하지만 이런 자신의 반응이 너무 싫
이곳이 싫어진 이유가 강이한과 함께 있기 때문일까? 한때는 이런 곳에서 강이한과 평화로운 시간을 보내는 게 꿈이었던 적도 있었다.“우지를 불러줘!”이유영은 강이한에게서 느껴지는 기운을 이제는 견딜 수 없었다.이유영은 이 모든 것을 피하고 싶었다. 하지만 강이한은 고집을 꺾지 않았다.“아까 말했잖아. 우지랑 우현은 네가 좋아하는 음식을 사러 나갔어. 여기 지역은 아침으로 특산 요리가 많거든, 그래서 주방에는 따로 요청하지 않았어.”“...”이유영은 잠시 말을 잃었다.그리고 그저 조용히 앉아 있었다.하지만 이유영의 이 침묵과 순응은 강이한이 원하던 것이 아니었다.이유영은 차라리 말없이 기다리는 쪽을 택했고 절대로 강이한에게 도움을 청하지 않았다.예전에 아무리 바쁜 아침을 보냈어도 강이한은 이유영이 아침에 어떤 루틴을 따르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내가 화장실까지 데려다줄게.”“필요 없어.”이유영의 목소리는 차갑고 단호했다.“이러면 몸에 좋지 않아. 그냥 가자.”이유영은 더 이상 강이한과 실랑이를 벌이기 싫어 화제를 돌렸다.“네가 우지 씨와 우현 씨의 핸드폰을 가져갔지, 그렇지?”강이한은 잠시 멈칫했지만 솔직하게 대답했다.“그래.”“부모님께 내가 어디 있는지는 알려드리는 게 맞지 않아?”이유영의 마음속에는 이미 분노가 쌓여 있었다. 어젯밤 우지가 했던 말을 떠올리자, 감정은 더 이상 억누를 수 없을 정도로 터질 것 같았다.강이한은 여전했다. 여전히 타인의 감정은 조금도 배려하지 않았다. 한지음을 위해 이유영에게 어떤 짓까지 했는지, 그 기억은 이제 이유영에게 있어서 더 이상 떠올리고 싶지 않은 고통이 되었다.하지만 강이한은 태연하게 말했다.“이미 쪽지를 남겼어. 네가 눈 치료를 받으러 갔다는 건 부모님도 알고 계실 거야.”“...”“치료가 끝나면 집으로 데려다 줄 거야.”이유영은 강이한의 말을 듣고 차갑게 숨을 몰아쉬었다.“그러니까 지금 우리의 모든 행방을 전부 숨겼다는 거잖아?”이유영의 목소리는 분노로 가득
다음 날 아침, 이유영은 지붕 위에서 여전히 똑똑 떨어지는 빗소리를 들으며 눈을 떴다. 밤새 내리던 비는 아직 멈추지 않았다.옆에서 느껴지던 온기 역시 그대로였다. 이유영이 움직이는 기척을 느낀 강이한이 살짝 안으며 말했다.“깼어?”“당장 떨어져!”어젯밤, 도저히 피할 수 없어 잠들었지만, 이 남자는 대체 어디서 이런 뻔뻔함이 나오는 걸까? 이유영이 몸을 움직이려 하자 강이한의 큰 손이 이유영의 손을 단단히 감싸며 태연하게 말했다.“움직이지 마. 춥잖아.”이불 밖으로 팔을 뻗자 싸늘한 한기가 순간적으로 스며들었다.우천시는 여름에 오면 굉장히 쾌적하다고 한다. 전통 가옥은 단열 효과가 뛰어나 겨울에는 따뜻하고 여름에는 시원했다.강이한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움직이지 말고 그대로 있어.”이유영의 짜증과는 반대로 강이한의 목소리에는 묘하게 부드러운 인내심이 배어 있었다.강이한은 마치 오랜 시간 이런 순간을 기다려온 사람처럼 이 시간을 매우 소중히 여기는 것 같았다.하지만 이유영은 속에서 화가 치밀었다.“일어날래? 내가 옷 입는 거 도와줄게!”“우지 씨를 불러.”시야를 잃은 이유영의 성격은 예전보다 한층 더 예민해져 있었다. 그런데 이 남자는 여전히 자기 멋대로 행동하고 있었으니, 이유영의 화가 터질 수밖에 없었다.강이한은 태연히 대답했다.“우지와 우현은 나갔어.”나갔다고? 말도 안 돼!우지는 이유영이 강이한과 단둘이 있기를 꺼린다는 걸 잘 알았기에, 늘 둘 중 한 명은 곁에 남아 있으려 했다.“강이한!”그러나 강이한은 이유영의 화난 기색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한 듯 여유롭게 말했다.“일어나기 싫으면 그냥 나랑 조금 더 누워 있어.”“...”이유영은 비록 자신의 표정은 볼 수 없었지만, 강이한의 농담 섞인 말에 자신의 얼굴이 점점 어두워지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결국은 강이한이 옷을 입혀주는 것을 내버려둘 수밖에 없었다. 모든 것이 갑작스러운 상황 같았지만 강이한은 의외로 철저히 준비해 온 듯했다.강이한은 이곳의 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