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서희는 강이한을 빤히 바라보며 뭐라고 말하려다가 시선이 그의 손에 들린 카드에 닿았다.그 순간 그녀의 얼굴은 창백하게 질렸다.“오빠… 그게 아니라….”그녀는 당황한 목소리로 어떻게든 변명하려고 했다.이성은 지금 당장 부인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었지만 카드를 본 순간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서 말조차 제대로 할 수 없었다.그녀는 흔들리는 눈으로 무섭게 굳은 강이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짝!강이한은 그대로 카드를 그녀의 얼굴에 던졌다.진영숙은 바닥에 떨어진 카드를 발견하고 주섬주섬 다가갔다. 강서희는 황급히 손을 뻗어 카드를 손에 쥐고 뒤로 숨겼다.“그런 거 아니야. 내 말 좀 들어봐, 오빠.”그녀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진영숙도 뭔가 이상함을 느끼고 강이한에게 물었다.“저게 뭐야?”대체 저 카드가 뭐기에 강이한을 이토록 이성을 잃게 만든 걸까?“오빠.”“그래, 어디 변명 좀 해봐.”강이한은 싸늘한 눈으로 강서희를 바라보며 말했다.강서희는 언제나 자상하기만 하던 오빠가 악귀처럼 변한 모습을 보고 저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 하지만 그런 초라한 모습도 강이한의 연민을 자극하지는 못했다.남자는 실망 가득한 얼굴로 바닥에서 카드를 손으로 가리고 있는 강서희를 바라보았다.‘너였구나! 모든 게 너였어!’이때, 머릿속에 이유영이 했던 말들이 떠올랐다. “난 당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어.”“그 카드 진작에 잃어버렸다고!”“내가 한 게 아니야!”그는 한 번도 그녀에게 제대로 해명할 기회조차 준 적이 없었다.그녀는 매번 아니라고 했지만 한 번도 그 말을 믿지 않았다. 그는 단지 자신이 조사한 증거들만 믿었다.가장 중요한 증거라고 생각했던 카드가 강서희의 화장대에서 발견될 줄을 누가 알았을까!“그거 이리 줘!”상황을 지켜보던 진영숙이 무릎을 굽히고 강서희의 손에서 카드를 빼앗았다.강서희는 바둥거리다가 결국 카드를 진영숙의 손에 빼앗기고 말았다.진영숙은 카드를 들고 이리저리 훑어보았지만 딱히 문제점을 발견하지 못했다.“그냥 평범
강이한도 아무 생각 없이 화장대 서랍을 뒤지다가 거기서 카드를 발견하게 될 줄은 몰랐을 것이다.“왜 말이 없어?”강이한은 입가에 싸늘한 미소를 머금고 강서희를 노려보며 물었다.강서희는 겁에 질린 눈으로 강이한을 바라보고 있었다.조급해진 진영숙이 강서희를 다그쳤다.“빨리 말해. 이 카드가 왜 너한테 있어?”예전에 이유영과 강서희의 관계로 봤을 때 이유영이 자발적으로 강서희에게 카드를 건넸을 리는 없었다.설마 도둑질이라도 한 걸까?그럴 가능성이 떠오르자 진영숙은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다.“그건… 한지음한테 받은 거야.”드디어 강서희가 입을 열었다.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한지음을 바라보았다.‘그래! 한지음을 물고 늘어지는 거야.’어차피 지금 이 상황에 무슨 말을 해도 강이한은 자신을 믿어주지 않을 것 같았기에 혼자 죽기 싫어서 한 말이었다.그 말이 끝나기 바쁘게 무거운 정적이 돌았다.강서희에게로 쏠렸던 강이한 모자의 시선이 한지음에게로 쏠렸다. 공허한 눈동자에 하얀 원피스를 입고 얼굴이 창백하게 질린 모습은 마치 금방 세상에 내려온 천사 같았다.시선을 느낀 그녀는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이한 오빠, 저 말을 믿나요? 내가 무슨 수로 언니한테 접근해서 카드를 가져왔겠어요?”부드러운 그 한 마디는 강서희의 해명을 완전히 거짓말로 만들었다.한지음이 이렇게 되기 전까지 이유영에게 접근할 기회조차 없었다는 것은 모두가 다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그래서 굳이 한지음이 나서서 해명할 이유도 없었다.강서희는 그 말을 듣자마자 눈시울이 시뻘겋게 붉어졌다.“한지음, 이 카드 네가 나한테 준 거 맞잖아. 계속 아니라고 할 거야?”그녀는 협박이 다분한 말투로 한지음을 재촉했다.어차피 그 수많은 일들은 둘이 손을 잡고 완성한 것들이었다.그러니 강서희는 절대 혼자 뒤집어쓸 생각이 없었다.짝!말이 끝나기 바쁘게 아찔한 소리와 함께 강서희의 고개가 돌아갔다.남자는 더는 참지 못하겠다는 듯이 분노한 목소리로 고함쳤다.“아직도
강이한은 가슴이 철렁하며 흔들리는 표정을 감추지 못한 채로 고개를 돌렸다.그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무슨 일인데?”“화재예요. 임강구 소방서가 출동했는데 인력이 부족하여 중심가 쪽에 있는 소방서까지 출동했다고 합니다.”그 말이 끝나기 바쁘게 이시욱의 귓가에 싸늘한 바람이 불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강이한은 이미 대문을 뛰쳐나가고 있었다.이시욱도 다급히 그의 뒤를 따랐다.잠시 후, 거리로 나가자 긴장감 넘치는 경적 소리가 거리에 울려퍼지기 시작했다.현장에 남은 진영숙과 강서희, 그리고 한지음은 구치소에 화재가 발생했다는 얘기를 듣고 가슴이 울렁거렸다.강서희는 저도 모르게 한지음을 바라보았다. 눈빛을 읽을 수는 없었지만 한지음의 입가에 걸린 비릿한 미소를 그녀는 놓치지 않았다.강서희는 저도 모르게 등골에 소름이 돋았다.한편.운전대를 잡은 강이한은 미친 듯이 거리를 질주하고 있었다.뒤에서 다른 운전자들의 욕설이 들려왔지만 그는 질주를 멈추지 않았다.가는 길에도 급박한 소방차의 경적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강이한은 시뻘겋게 충혈된 눈으로 전방을 주시하고 있었지만 운전대를 잡은 손은 사시나무 떨듯이 떨리고 있었다.“유영아….”그는 애달픈 목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괜찮아. 괜찮을 거야!’하지만 긴박한 소방차의 경적소리는 화재가 결코 작지 않다는 사실만 일깨워주고 있었다.왜 갑자기 화재가 난 거지?갑자기 머릿속에 떠오른 익숙한 장면이 있었다. 하지만 그곳은 구치소가 아니라 그와 그녀의 집이었다.어떻게 된 거지?머리가 울렁거리면서 시야가 흐려지고 신호등도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20분 뒤, 강이한은 휘청거리며 차에서 내렸다. 하늘을 뒤덮은 검은 연기와 급하게 물을 뿌리는 소방대원들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하지만 불바다가 된 구치소의 불길은 전혀 수그러들 기미가 보이지 않고 오히려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현장에는 폴리스라인이 쳐졌고 현장은 아수라장이었다.강이한은 가슴에서 피가 흘러내리는 것 같았다. 그는 더 이상 주저
쾅 하는 소리와 함께 사내는 머리를 바닥에 부딪히며 쓰러졌다.혼란스러운 현장에서 비명 소리가 들려왔지만 그에게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다시 눈을 뜬 그는 멍하니 불길을 쳐다보며 이유영의 얼굴을 떠올렸다.“대표님!”이시욱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을 때, 그는 다시 의식을 잃고 말았다.온몸에 힘이 풀리고 끝없이 밑으로 추락하고 있었다.그는 눈을 뜨려고 애를 썼다.‘정신 차려, 가서 유영이를 구해야 해!’하지만 어둠 속에서 무형의 큰 손이 그의 뒷덜미를 잡고 계속 아래로 잡아당기고 있었다.그리고 강이한은 아주 기나긴 꿈을 꾸었다.꿈속에서 그는 교실 앞 창가에 서 있었다. 교실 안에는 조용히 책을 읽고 있는 가녀린 소녀가 보였다.다시 장면이 바뀌고 그는 이유영과 함께 학교 식당에서 같이 밥을 먹고 있었다. 어쩜 이렇게 사랑스러운 사람이 있을까?그가 장미 한 송이를 그녀에게 선물했을 때, 그녀는 환한 미소를 지었다. 그 순간 그는 평생 이 소녀의 웃음을 지켜주어야겠다고 다짐했다.결국 그녀는 그가 사준 아름다운 웨딩드레스를 입고 결혼식장으로 입장했다. 그때의 강이한은 자상했고 이유영의 미소는 눈부셨다.장면이 다시 바뀌더니 그는 불타는 홍문동 별장 앞에 서 있었다.그는 미친 사람처럼 안으로 달려들어가려고 했지만 옆에 있던 사람들이 그를 막아섰다.“불길이 이렇게 거센데 이유영 씨는 진작에 사망했을 거예요. 지금 들어가셔도 소용없다고요.”“아니야. 거짓말이야!”평생 함께하겠다고 약속했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는 결국 사랑하는 여자를 지켜주지 못했다.“그냥 죽게 내버려 둬. 온몸이 불에 탔을 거야. 살아남아도 고통스러울 뿐이라고!”“안 돼!”비명소리와 함께 강이한은 감고 있던 눈을 떴다.병상을 지키던 진영숙이 화들짝 놀라며 그를 바라보았다.“이한아.”강이한은 주변을 둘러보고 거친 숨을 토해냈다.“아!”머리가 빠개질 것처럼 아파왔다.“어디가 아픈데? 엄마한테 말해봐.”진영숙은 고통스러운 그의 표정을 보며 걱정 어린 말투로 물었
강이한은 다음 날 저녁이 되어서야 의식을 회복했다.비가 내린 뒤의 창밖은 습윤한 공기가 물씬 풍겼다.눈을 뜬 순간 다시 아팠던 기억이 떠올라 숨이 막혀왔다.진영숙은 병상 옆 의자에 기댄 채 잠들어 있다가 소리를 듣고 잠에서 깼다.강이한은 주섬주섬 외투를 챙기고 밖으로 나가고 있었다.놀란 진영숙이 다급히 따라가며 물었다.“이한아, 이 상태로 어딜 간다는 거야?”하지만 강이한은 아무런 대답도 없이 곧장 엘리베이터로 달려갔다.아들과 시선이 마주친 순간, 진영숙은 절망이 가득 담긴 그의 눈동자를 보고 저도 모르게 입을 다물었다.그녀는 잠시 후에야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고 말했다.“엄마랑 같이 가자. 이한아!”진영숙은 다급히 강이한의 뒤를 따랐지만 강이한은 엄마에게 시선 한번 주지 않았다.진영숙은 다급히 뒤를 따르며 이시욱에게 전화를 걸었다.“네, 사모님.”“이한이 밖으로 나갔어. 빨리 좀 막아줘.”진영숙은 떨리는 목소리로 이시욱에게 말했다.이틀이라는 시간이 지나고 청하시의 모든 것이 바뀌었다. 이미 세간에는 이유영이 사망했다는 기사가 떠돌고 있었다.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강이한은 환자복을 입은 채, 맨발로 밖으로 뛰어나갔다.연락을 받고 달려온 이시욱은 정신이 나간 듯한 그의 모습에 조심스럽게 그의 앞을 막아섰다.“대표님.”그의 현재 상태로 봐서 아마 진실을 받아들이기 힘들 것이다.하지만 가지 못하게 막는 것도 불가능했다.이시욱은 상사의 눈에 가득 담긴 절망을 보고 천천히 손을 내렸고 강이한은 허겁지겁 밖으로 향했다.이시욱은 조용히 그의 뒤를 따랐다.잠시 후, 그들을 태운 차가 임강구의 구치소에 도착했다.차에서 내린 강이한은 불에 타서 폐허가 되어버린 구치소 현장을 보고 다리에 힘이 풀렸다.건물은 이미 무너진 상태였고 매캐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강이한은 멍한 얼굴로 안으로 들어갔다.‘유영이를 만나야 해. 저렇게 더러운 곳에 유영이를 둘 수는 없어.’이시욱이 다가가서 그에게 말했다.“대표님, 이유영 씨는 이미 여기 없
그는 온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이시욱은 고개를 떨리고 긴장된 목소리로 말했다.“정국진 회장이 직접 오셔서 유골함을 가지고 출국했습니다. 어젯밤에 유골함을 가지고 떠날 때, 대표님께 다시는 파리로 와서 이유영 씨를 찾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이유영 씨는 생전에 그토록 청하를 떠나고 싶어했고 대표님을 만나고 싶어하지 않을 거라고 했습니다.”청하시는 이유영이 가장 오래 생활한 곳이었다. 하지만 죽는 순간에도 벗어나고 싶었던 곳이기도 했다.이곳이 그녀에게 남긴 건 끝없는 절망뿐이었다.찬바람이 불어와 얼굴을 때렸다.강이한은 멍하니 서서 온몸의 피가 식어가는 것을 느꼈다. ‘또 늦었구나. 지난 생에도 이번 생에도 난 너를 아프게만 했구나.’그는 고개를 떨구고 두 손을 바라보았다. 양손으로 그녀를 벼랑 끝까지 몰아세운 건 강이한 자신이었다.‘내가 또 내 손으로 너를 지옥으로 보냈구나.’“악!”그는 상처 입은 야수처럼 하늘을 바라보고 고함을 질렀다.이유영은 미련 없이 떠났다.어쩌면 화재에 불탄 건 그녀뿐만이 아니라 사랑과 집념, 그리고 끝없는 후회일 수도 있었다.강이한이 다시 의식을 회복했을 때, 그는 이미 병실에 누워 있었다. 이시욱이 병실을 지키고 있었고 진영숙은 그의 옆에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이한아.”눈을 뜬 아들을 보고 진영숙은 애통한 얼굴로 아들의 손을 잡았다.강이한은 싸늘하게 그 손길을 뿌리치고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언제지?”그는 무감각한 목소리로 이시욱에게 물었다.이시욱은 잠깐 당황하다가 이내 눈치를 채고 무거운 표정으로 말했다.“조금 전 입수한 소식에 따르면 정국진 회장은 오늘 장례식을 올리고 이미 무덤에 이유영 씨를 모셨다고 합니다.”결국 그는 마지막으로 이유영을 보내줄 기회조차 갖지 못했다.병실 분위기가 순식간에 냉각되었다.진영숙은 아들이 빨리 정신을 차리기를 바랐지만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기에 머리가 아팠다. 안 그래도 집안이 혼란스러운데 더 큰일이 벌어질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진영숙은 다소
한편, 강이한의 본가.강서희는 예전부터 집에서 오빠를 기다리는 것을 좋아했다.그런데 이유영과 결혼한 뒤로 오빠는 본가에 자주 발을 들이지 않았다.지금도 강서희는 이틀 동안 집에서 오빠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유영의 사망소식이 공개된지도 벌써 이틀이 지났다. 소방대원이 의식을 잃은 그녀를 구조해 밖으로 끌고 나왔지만 결국 병원으로 옮겨진지 한 시간 만에 사망했다고 한다.파리에서 귀국한 정국진이 그녀를 그 자리에서 화장해서 파리로 데려갔다고 했다.강서희는 이유영이 저주스러웠다. 강이한의 마음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 여자였기 때문이었다.하지만 지금은 딱히 기쁨이 느껴지지 않았다.사랑하는 오빠가 죽은 여자를 위해 곧 그녀에게 어떤 처벌을 가할지 상상이 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그녀는 오빠가 보고 싶었지만 동시에 그가 돌아와서 자신의 숨통을 조일까 봐 두렵기도 했다.어쩌면 강이한은 이유영을 보낸 분노와 한을 강서희에게 풀지도 모른다.“아가씨, 오렌지 좀 드셔보세요. 달아요.”왕숙은 손질한 과일을 들고 강서희에게 다가가며 안타까운 말투로 말했다.최근 이틀 사이 강서희는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는 왕숙이 만든 디저트마저 거부하고 방에만 틀어박혀 있었다.“안 먹어.”강서희는 짜증스럽게 대꾸했다.“아가씨, 이렇게 안 드시면 큰일나요. 건강을 챙기셔야죠.”“차라리 불타 죽은 사람이 나였으면 좋겠어.”강서희가 울먹이며 말했다.죽은 사람은 아무것도 느끼지 못할 테지만 살아남은 사람은 고통 속에 살아가야 한다고 생각하니 절망이 찾아왔다.놀란 왕숙이 다급히 말했다.“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다시는 그런 말하지 말아요.”죽고 싶다는 강서희의 말에 왕숙은 당황했다.그녀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강서희를 위로했다.“뭘 그렇게 걱정해요? 사람은 이미 죽었는데 도련님이 설마 죽은 여자를 위해 아가씨한테 해를 가하겠어요?”강서희는 착잡한 얼굴로 고개를 돌려 왕숙을 바라보며 말했다.“아줌마, 오빠가 그 카드를 내 방에서 발견했다는 게 뭘 의미하는
강서희는 따뜻한 왕숙의 품에 안겨 아이처럼 울었다.“아줌마….”한편, 병원.진영숙이 화장실을 다녀온 사이, 병상에 누워 있던 강이한이 사라졌다.그리고 침대 위에는 그가 벗어놓은 환자복이 놓여 있었다.“이 비서!”진영숙은 다급히 이시욱을 호출했지만 이시욱도 자리에 없었다.그녀는 급급히 집으로 전화를 걸었다.“여보세요.”“나야.”“네, 사모님.”수화기너머로 왕숙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진영숙은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당장 서희를 노부인한테로 데려가!”“무슨 일인데요?”왕숙이 긴장한 목소리로 물었다.진영숙은 뭔가 불길한 예감을 떨칠 수 없었다.그녀는 자신의 아들을 잘 알고 있었다.한지음이 시력을 잃은 일로 그는 이유영을 온갖 잔인한 방법으로 괴롭혔다. 그랬던 이유영이 사망하게 되었고 아마 그 심정은 누구라도 상상할 수 없을 것이다.지금 그에게는 화풀이할 상대가 필요했다.그리고 그 상대는 분명 강서희가 될 것이다.그날 밤 구치소에 화재가 나지 않았더라면 강이한은 이미 강서희의 목을 졸라 죽였을 수도 있었다.“이한이가 본가로 갈 것 같아.”진영숙이 말했다.강이한이 돌아온다는 얘기에 왕숙 역시 뭔가 불길한 기운을 느끼고 다급히 전화를 끊었다.그녀는 고개를 돌려 창가에 서 있는 강서희에게로 다가갔다.“아가씨.”“왜?”“일단 노부인 있는 곳으로 가요.”말을 마친 왕숙은 그녀의 손을 잡았다.강서희는 심각한 얼굴을 하고 있는 왕숙을 보고 저도 모르게 가슴이 철렁했다.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무슨 일인데?”“일단 가서 얘기해요.”진영숙이 다급히 연락했다는 건 강이한이 이미 오는 길에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조용한 것을 좋아하는 노부인은 별장 맨 뒤쪽에 있는 별채에 살고 있었다. 강서희는 멍한 얼굴로 왕숙을 따라 현관을 나섰다.그런데 갑자기 쾅 하는 소리와 함께 차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려왔다.강서희의 두 눈에는 강이한을 향한 미련과 그리움이 가득 담겼다.매번 강이한이 본가에 올 때마다 짓던 표정이었다.“우리
이유영이 집으로 돌아온 뒤, 임소미는 사람을 시켜 조사를 시작했고 이유영이 강이한 곁에서 결코 평온한 시간을 보내지 못했다는 사실을 이내 알게 되었다. 하지만 어느 정도였는지는 알지 못했다.며칠 동안 진영숙의 광기에 가까운 모습을 목격한 뒤에야 그녀는 대략 짐작할 수 있었다. 그녀의 남편이 왜 서주로 떠나서 죽음을 가장했는지를.모두 이 여자 때문이었다. 진영숙이 그토록 괴롭게 만들었던 것이다.남편뿐만 아니라 지금 강이한의 행방조차 그녀는 알지 못했다. 여자로서 그 책임은 결코 작지 않았다.임소미는 감정을 가라앉힌 후에야 이유영에게 조심스레 말했다. 진영숙이 사실은 월이를 데려가려 했다는 것을.“며칠 동안 데려가겠다고 했다고요?”“그래서 내가 화가 났던 거야.”진영숙의 행동을 보면 며칠은 말뿐인 핑계였다.그녀가 했던 말을 떠올리며 임소미는 차가운 웃음을 지었다.‘이제 아무것도 없고 오직 손녀만 남았다고? 과연 손녀의 의미를 알고는 있는 사람인가?’이유영은 말없이 얼굴을 굳혔다.진영숙은 아이를 사랑해서가 아니라 집착하고 있었던 것이다.“유영아, 이번 일은 그녀에게 연민을 가질 필요 없어.”임소미의 목소리엔 단단한 결심과 냉기가 섞여 있었다.진영숙은 자신이 모든 걸 잃었기 때문에 아이라도 데려가고 싶다고 했지만 그런 상실에 대해 임소미는 전혀 동정하지 않았다.“알겠어요, 엄마. 제가 처리할게요.”이유영은 어머니를 안심시켰지만 그녀의 목소리 역시 차가웠다.“어떻게 처리할 거니?”‘어떻게 처리할까?’이유영의 눈빛이 점점 깊어졌다.그녀는 당연히 생각한 방법이 있었다.임소미를 진정시킨 뒤, 이유영은 백산 별장을 나섰고 밖에선 지혁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아가씨.”“풍산 그룹으로 가요.”이름을 입에 올리는 것조차 마음이 무거웠다. 가능하다면 평생 다시는 가고 싶지 않은 곳이었다.그곳은 과거가 덕지덕지 붙은 장소였고 이유영은 그것들과 멀어지고 싶었다.“윙윙윙.”그때, 휴대전화가 울렸다.발신자는 박연준이었고 이유영은 망설임
이유영에게는 참으로 견디기 힘든 시간이었다.그녀는 임소미의 품에 파고들며 가느다란 팔로 어머니의 허리를 꼭 안았다.“엄마, 미안해요. 제가 잘못했어요.”그녀는 진심으로 반성하고 있었다.오래전 소은지는 이렇게 말했었다. 강이한은 연애 상대론 괜찮지만 결혼은 다르다고.그때 변호사였던 소은지는 경제력이나 사회적 지위가 맞지 않는 결혼이 얼마나 불행한지를 잘 알고 있었다.그래서 그녀가 강이한과 결혼을 결심했을 때, 소은지는 그녀를 말렸었다. 소은지는 그녀의 결혼을 말렸던 유일한 사람이었다.결국 소은지의 말은 모두 옳았음이 증명됐다.끝났다고 믿었던 그 관계는 여전히 그녀의 삶에 깊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고 심지어 가족들까지도 그 여파에 시달리고 있었다.그때, 등에 따뜻한 손길이 느껴졌다.“괜찮아. 엄마가 있잖아. 앞으로는 아무도 너를 괴롭히지 못할 거야.”이유영은 말없이 고개를 숙였고 눈물이 눈가에 가득 차올랐다. 참으려 해도 눈물이 뺨을 따라 끝없이 흘러내렸다.예전에도 어머니는 그녀를 이렇게 품어주었다. 하지만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후, 그녀의 세계는 완전히 무너져 버렸고 그 이후로 어떤 일이 일어나면 모두 혼자 견뎌야만 했다.임소미가 감싸안아 주자 이유영의 마음은 다시금 따뜻함으로 물들어갔다.그리고 이 감정은 그녀의 마음 깊은 곳을 더욱 단단하게 만들었다.“앞으로는 아무도 엄마를 괴롭히지 못하게 할 거예요.”그녀가 말한 '아무도'는 명백히 진영숙을 가리키고 있었다.그렇게 오랫동안 떨어져 지낸 사람에게서 다시 이런 고통이 돌아올 줄은 몰랐다.“엄마가 널 지켜줄게. 꼭 지켜줄게.”임소미는 그 말을 반복하듯 속삭였다.오늘 밤, 임소미의 마음속에 일어난 파장은 누구도 헤아릴 수 없었다.진영숙이 막말을 퍼붓고 손까지 쓰는 모습을 보며 이유영이 강씨 가문에서 겪었을 고통이 얼마나 컸을지를 임소미는 문득 깨달았다.사모님의 우아한 모습은 진영숙에게서 찾아보기 힘들었다.불편한 감정이 들 때마다 손부터 나가는 사람이었고 그런 사람과 살아야
이유영이 돌아오고 그녀는 진영숙과 임소미 사이에서 벌어진 격렬한 장면을 목격하게 되었다. 두 명의 도우미가 진영숙을 붙잡아 끌어내고 있었다.임소미의 얼굴은 창백했고 가슴은 거세게 요동치고 있었다.그녀는 순간적으로 분노가 솟구쳤다.임소미는 이유영을 보자마자 재빨리 붙잡고 말했다.“너 먼저 위로 올라가.”“무슨 일이 있었어?”이유영이 물었다.정씨 가문에 돌아온 지 오래된 만큼 그녀는 자신의 어머니가 어떤 사람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우아하고 온화한 사람인 만큼 지금 이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분명히 알 수 있었다.임소미가 대답하기도 전에 진영숙이 화를 내며 소리쳤다.“이유영, 넌 누가 너한테 눈을 기증해 줬는지 모르지? 강이한이 네게 빚을 졌다고 하지만 사실은...”“입 다물어!”진영숙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임소미가 단호하게 그녀의 말을 끊었다.이유영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조용히 서 있었고 진영숙은 여전히 무언가 더 말하고 싶어 했지만 더는 이어가지 않았다.그녀는 분노로 가득 찬 눈으로 이유영을 노려보았고 그 눈빛엔 전례 없는 증오가 서려 있었다.예전에 강이한과 결혼했을 때도 진영숙은 이유영을 이런 눈빛으로 바라보았다.한 번도 따뜻한 시선을 준 적이 없었다.그리고 지금, 용성시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리며 그 증오가 더욱 깊어진 듯했다.“유영아, 너 먼저 위로 올라가.”“엄마.”“올라가!”임소미는 이유영의 말을 끝까지 듣지 않고 격하게 소리쳤다.임소미가 이런 식으로 이유영에게 말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지금의 상황이 임소미에게 얼마나 큰 충격이었는지 그대로 드러났다.이유영은 무언가 더 묻고 싶었지만 눈앞에서 벌어진 상황에 말문이 막혀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뒤돌아 안으로 들어갔다.그 순간, 진영숙은 자신을 붙잡고 있던 도우미들의 손을 뿌리치고 이유영의 뒷모습을 향해 소리쳤다.“이유영, 강이한은 너에게 빚진 게 없어. 강이한은 오히려 너 때문에 모든 걸 잃었어. 너야말로 가장 잔인한 사람이야. 네 눈조차..
임소미는 혈압이 치솟았고 화가 극에 달한 상태였다.“내 말이 틀렸나요?”“틀렸냐고? 제대로 된 일을 한 적은 있고? 당신만 제대로 된 선택을 했더라면 유영이와 강이한이 이렇게까지 망가지진 않았을 거야.”임소미는 참았던 감정을 폭발시키며 격렬히 외쳤다.진영숙의 얼굴이 순간 굳어졌다.임소미의 말이 맞았다. 진영숙은 두 사람 관계에서 많은 잘못을 했다.하지만 지금은 모든 게 달라졌다.강이한은 사라졌고 강서희도 여전히 세상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에게 남은 건 오직 월이 뿐이었다.오늘 이곳에 와서 월이를 보게 된 순간, 월이를 자신의 곁에 두고 싶다는 생각이 더욱 강하게 자리 잡았다.“사람 불러!”임소미가 크게 외치자 집사들과 도우미들이 급히 달려왔다.“이 여자를 당장 내쫓아!”“당신이 감히 그럴 수 있을까?”“뭐라고?”임소미는 잠시 귀를 의심했다.‘이 여자는 지금 도대체 뭐 하려는 걸까?’조금 전 아이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을 보며 아이에게 조금의 정이라도 남아 있는 줄 알았다.하지만 모든 것은 착각에 불과했다.결국 그녀는 후회라는 감정을 모르는 인간이었다.진영숙이 오늘 여기 온 것도, 월이에게 다정하게 굴었던 것도 결국 아무것도 남지 않았기 때문에 한 마지막 발악이었다.그녀의 말은 그저 그럴싸한 포장일 뿐 사실은 월이를 자신의 곁으로 끌어들이고 싶은 마음뿐이었다.그리고 뻔뻔하게도 무례하기까지 했다.진영숙은 임소미의 눈을 응시했다. 조금 전까지 남아 있던 따뜻함은 온데간데없고 그 자리에 남은 것은 매서운 날카로움뿐이었다.그녀는 침착하게 말했다.“우리 아들이 왜 서주를 떠났는지 내가 정말 모를 거라고 생각했어? 임소미, 당신들은 정말 단 한치의 양심 가책도 못 느꼈어?”왜 강이한이 서주를 떠났는지 시간대와 상황을 조합해 보면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추측이 사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확신을 가졌다.특히 떠나기 전, 시윤이 건넨 말이 결정적이었다. 이유영이 용성시에서 수술을 받았던 그 시기에 강이한은 서주에
강이한은 그렇게 어둠 속에서 절망의 고통을 몸소 겪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괴로워도 수술을 받겠다는 생각은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한때 이유영이 어둠 속에서 얼마나 무섭고 무력했는지를 그는 이제서야 조금씩 체감하고 있었다....파리에서 진영숙은 다시 백산 별장을 찾았다. 여전히 강이한의 소식은 들리지 않았고 시윤은 강이한이 이정과 신시욱을 데리고 떠났다고 말했다.그 두 사람의 능력을 생각하면 강이한이 스스로 나타나지 않는 한 그 누구도 그를 찾을 수 없을 것이다.진영숙은 어머니로서 절망에 가까운 마음으로 그를 수소문했지만 아무리 애를 써도 그의 행방을 찾을 수 없었다.그리고 알면 알수록 그녀의 마음은 점점 더 불편해졌다.“정말이지, 당신은...”백산 별정까지 찾아온 진영숙의 뻔뻔함에 임소미는 답답함을 참지 못하고 굳은 표정으로 응수했다.진영숙은 한때 유능한 여성이었고 그런 그녀에게 감히 저런 얼굴을 하는 사람은 없었기에 그녀에겐 익숙하지 않은 대우였다.“저는 아무것도 없어요. 저 좀 봐주세요.”그녀의 목소리에는 전에는 없던 고통이 서려 있었다.그렇다. 지금의 진영숙에겐 주변에 기댈 친척도 함께할 가족도 없었다. 그녀의 앞에 있는 건 손녀인 월이 뿐이었다.오늘도 그녀는 월이를 위해 여러 장난감을 준비해 왔지만 임소미는 그 모든 행동이 불쾌하게만 느껴졌다.“당신도 어머니였잖아요. 제 마음이 얼마나 불편한지 알잖아요.”임소미는 차가운 목소리로 잘라 말했다.‘봐준다고? 당신이었으면 그렇게 할 수 있을까?’이유영이 강이한과 결혼했을 때, 진영숙은 그녀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심지어 뱃속의 아이조차 받아들이지 않았었다. 그런 사람이 지금 이토록 헌신적인 할머니 행세를 하니 임소미는 화가 났다.누구에게 보여주기 위한 연극으로밖에 안 보였다.진영숙의 눈엔 고통이 어렸다.“저는 정말 생각하지 못했어요.”임소미의 말에 그녀는 도무지 어떤 대답을 해야 할지 몰랐다.아무리 자존심 강한 진영숙이라 해도 진실을 알게 된 지금, 과거
그녀는 어둠에 익숙해지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강이한을 떠난 뒤 어둠 속에서의 삶을 받아들이기 위해 스스로를 단련하고 있었다.신시욱과 이정은 잠시 서로를 바라보다 침묵에 잠겼다. 그 질문은 그들 사이에서도 너무나 무거운 것이었기 때문이었다.이유영이 그때 얼마나 오랜 시간을 그렇게 보냈는지, 사실 그들조차 정확히 기억하지 못했다. 다만 또렷하게 남아 있는 건 그녀가 깊은 괴로움 속에 잠겨 있었다는 사실뿐이었다.그리고 그녀가 괴로워할수록 사람들은 어둠 속에서의 고독이 얼마나 잔혹한 감정인지 조금씩 알아가기 시작했다.그녀는 깊은 절망 속에 빠져 있었다.그리고 지금의 강이한은 어쩌면 그때의 이유영보다 더한 심연 속에서 절망을 겪고 있었다. 그는 스스로를 벌하고 있었다. 그녀가 겪었던 고통을 똑같이 겪기 위해 같은 어둠 속에 몸을 던졌다.“선생님. 각막 이식 수술 관련 소식이 들어왔습니다.”신시욱은 조심스러운 어조로 입을 열었다. 우천시에 머무는 동안, 신시욱과 이정은 한 번도 수술 신청을 멈춘 적이 없었다.그들은 강이한을 잘 알고 있었다. 자존심이 강한 사람이었지만 이유영이 원하지 않는 일이라면 그도 절대 강행하지 않았다.이유영이 시력을 잃었을 때, 그녀는 가족들이 몰래 준비했던 이식 수술조차 그녀는 단호히 거절했었다.그리고 지금의 강이한도 마찬가지였다.오랫동안 기다려 온 기회 앞에서 강이한은 조용히 거절했다.“필요 없어. 다른 사람에게 양보해.”두 사람은 말문이 막혔다. 그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올 줄은 상상도 못 했던 두 사람은 호흡이 가빠지기 시작했다.‘필요 없다고? 그게 무슨 뜻이란 말인가?’“선생님.”신시욱의 목소리는 긴장감에 더욱 떨려왔다.그 어떤 강인한 남자라고 해도 이 순간 목소리에서 전해지는 떨림을 억누를 수 없었을 것이다.최근 며칠간 그가 어떻게 지내왔는지 두 사람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강이한은 자신을 벌하며 살고 있었고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정말 이미 충분했다.‘받아야 할 벌은 다 받았는데 왜 여전히 자신을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어둠 속에서 지낸 지 얼마나 오랜 시간이 지났을까?어둠 속에서 사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이제서야 알 것 같았다. 새들의 지저귐이 더 또렷하게 들리고 사소한 바람 소리 하나에도 감각이 예민해졌다.강이한은 우천시에 있는 주택 마당에 놓인 긴 의자에 앉아 있었다. 우천시에 오늘같이 이렇게 따스한 햇살이 비추던 때가 언제였던가?이정이 조심스레 다가와 담요를 덮어주며 말했다.“햇살은 있어도 아직은 쌀쌀하네요.”말은 없었지만 강이한은 이정의 발걸음 소리와 숨소리로 그가 신시욱이 아님을 알아차렸다.그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번졌다.그때의 이유영도 지금처럼 감각이 예민했을까?“이정.”“네.”“유영이는 이 마당이 어떤 모습인지 전혀 보지 못했겠지?”“네.” 이정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이유영은 이곳에서 몇 개월을 머물렀지만 실상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이 마당은 끝내 그녀에게 낯선 곳으로 남게 되었다.지금 그녀를 우천시로 다시 데려온다 한들 스스로 길을 찾아올 수도 없을 것이다.강이한은 낮게 중얼거렸다.“하지만 유영이는 이 마당에 뭐가 있는지는 알고 있었어.”그렇다. 보지 못했어도 그녀는 감각으로 모든 것을 구분했다. 마치 지금의 강이한처럼.이정이 조심스레 물었다.“이럴 가치가 있었습니까?”그가 이곳에 온 이후, 누군가가 처음으로 던진 질문이었다. 그는 말할 수 없이 쓸쓸한 미소를 지었다.“가치가 있었는지는 사람이 판단할 수 있는 게 아니야.”그것은 마음으로 느끼는 것이다.그리고 그는 알고 있었다. 자신이 이유영에게 진 빚은 결코 눈 한 쌍으로는 갚을 수 없다는 것을. 이건 가치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의 문제였다.예전에 어둠 속에서 더듬거리던 이유영의 손짓을 떠올리면 가슴이 미어졌다. 지금 자신이 어둠 속에서 겪고 있는 공포는 당시 그녀가 느낀 감정에 닿을 수조차 없었다.점심 식사 시간.“쨍그랑.”강이한이 손을 뻗는 순간, 접시와 그릇이 떨어지며 산산이 부서지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공기는 순간 얼어붙었다
이유영은 자신의 몸에 강이한과 관련된 어떤 흔적도 남기고 싶지 않을 것이다.그녀는 남은 인생에서도 강이한과 어떤 방식으로든 다시 얽히는 일을 절대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월이의 일로 인해 그녀는 너무도 깊은 상처를 입었고 강이한을 평생 용서할 수 없었다.그런 사람의 눈을 자신이 기증받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그 결과는 상상조차 하기 싫었다.그리고 강이한 역시 그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그래서 그는 수술 전에 모든 철수 준비를 마친 것이고 이유영에게는 아무것도 알리지 말라고 지시했다.이미 많은 상처를 준 이후, 아무리 많은 것을 베푼다 해도 이유영의 용서를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을 것이다.자신과 이유영 사이에는 어떠한 선택지도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고 그래서 과감하게 그녀의 손을 놓은 것이다.‘이렇게 되면 두 사람 사이에 더 이상 빚진 것이 없게 되는 걸까?’하지만 단순히 눈을 기증했다고 해서 해결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유영아, 왜 강이한에 관해 묻는 거야? 혹시...”소은지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결국 그녀는 언제나 이유영 편이었다.특히 수술 전, 마지막으로 강이한을 마주했을 때 그가 남긴 말을 들은 후로 그녀조차도 강이한을 용서할 수 없다고 느꼈다.“나랑 장난해?”소은지의 말에 이유영의 표정은 단숨에 싸늘해졌다.그 차가운 기색을 확인한 소은지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그렇지 않아서 다행이야... 그래, 그렇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야.”소은지는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나는 그냥 권력에 그토록 집착했던 사람이 어떻게 갑자기 서주를 내려놓았는지 궁금했을 뿐이야.”“음모일지도 모르지.”소은지는 잠시 생각하다 이렇게 말했다. 그녀는 화제를 서둘러 다른 방향으로 돌리려 했다.“...”‘음모’라는 단어에 이유영은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소은지는 그녀의 웃음을 보고 또 한 번 안도했다.“ 월이 보러 왔을 때, 그 사람이 뭐라고 했는지 알아?”“뭐라고 했는데?”“일어날 일은 언제든지 다시
강이한은 서주에서의 모든 일을 철수하고 사라졌다. 그와 함께하던 사람들도 함께 자취를 감췄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이유영은 그저 강이한의 또 다른 속임수일 거라고 생각했다.강이한과 박연준, 두 사람은 누군가를 철저하게 속이는 데에 능숙한 사람들이었다.박연준은 진짜로 서주의 모든 것을 장악하고 있었고 진영숙은 파리에서 집요하게 강이한의 행방을 묻고 다녔다. 그걸 보며 이유영은 강이한이 정말로 사라졌다는 사실을 확신할 수 있었다.“무슨 생각해?”반산월에서 소은지는 이유영의 어두운 얼굴을 보고 조심스레 물었다.이유영은 고개를 들며 말했다.“은지야.”“응?”“어떻게 된 거라고 생각해?”서주의 현 상황은 여전히 알 수 없는 부분이 많았지만 최근 일련의 사건들을 거치며 이유영은 점점 확신에 가까워졌다.강이한은 정말 그의 사람들과 함께 자취를 감췄다. 그는 마치 세상에서 흔적 없이 사라진 듯했다.권력을 중시하던 인물이었기에 은둔은 아닐 것이 분명했다. 강이한은 모든 것을 내려놓고 홀로 조용히 지낼 성격이 아니었다.“뭐라고?”소은지는 이유영의 갑작스러운 질문을 이해하지 못한 듯 되물었다.이유영은 소은지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을 이어갔다.“강이한이... 정말 사라졌어.”“그래. 그 얘기 예전에도 했었잖아.”이유영이 이제서야 이 사실을 믿게 되었다는 것을 소은지는 알아챌 수 있었다.예전엔 믿지 않았던 이유영의 모습이었지만 이제는 완전히 달라졌다. 그녀는 강이한의 실종을 인정하고 있었다.강이한과 박연준은 이유영의 마음속에서 그리 좋은 사람들이 아니었다.연서의 사건이 터진 이후, 그녀는 두 사람을 음모로 가득 찬 사람들로 생각했고 그래서 처음 강이한이 사라졌다고 했을 때도 이유영은 그것을 단순한 음모의 연장이라 여겼다.두 사람은 늘 서로 무관한 척 행동했지만 그 뒤에는 누구도 상상 못 할 거대한 연관성이 있었던 것이다.신지수는 여러 번 전화를 걸어왔다.강이한이 서주를 떠난 후, 신씨 가문도 연쇄적으로 피해를 보았고 그녀는 그 일을 처리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