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온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이시욱은 고개를 떨리고 긴장된 목소리로 말했다.“정국진 회장이 직접 오셔서 유골함을 가지고 출국했습니다. 어젯밤에 유골함을 가지고 떠날 때, 대표님께 다시는 파리로 와서 이유영 씨를 찾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이유영 씨는 생전에 그토록 청하를 떠나고 싶어했고 대표님을 만나고 싶어하지 않을 거라고 했습니다.”청하시는 이유영이 가장 오래 생활한 곳이었다. 하지만 죽는 순간에도 벗어나고 싶었던 곳이기도 했다.이곳이 그녀에게 남긴 건 끝없는 절망뿐이었다.찬바람이 불어와 얼굴을 때렸다.강이한은 멍하니 서서 온몸의 피가 식어가는 것을 느꼈다. ‘또 늦었구나. 지난 생에도 이번 생에도 난 너를 아프게만 했구나.’그는 고개를 떨구고 두 손을 바라보았다. 양손으로 그녀를 벼랑 끝까지 몰아세운 건 강이한 자신이었다.‘내가 또 내 손으로 너를 지옥으로 보냈구나.’“악!”그는 상처 입은 야수처럼 하늘을 바라보고 고함을 질렀다.이유영은 미련 없이 떠났다.어쩌면 화재에 불탄 건 그녀뿐만이 아니라 사랑과 집념, 그리고 끝없는 후회일 수도 있었다.강이한이 다시 의식을 회복했을 때, 그는 이미 병실에 누워 있었다. 이시욱이 병실을 지키고 있었고 진영숙은 그의 옆에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이한아.”눈을 뜬 아들을 보고 진영숙은 애통한 얼굴로 아들의 손을 잡았다.강이한은 싸늘하게 그 손길을 뿌리치고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언제지?”그는 무감각한 목소리로 이시욱에게 물었다.이시욱은 잠깐 당황하다가 이내 눈치를 채고 무거운 표정으로 말했다.“조금 전 입수한 소식에 따르면 정국진 회장은 오늘 장례식을 올리고 이미 무덤에 이유영 씨를 모셨다고 합니다.”결국 그는 마지막으로 이유영을 보내줄 기회조차 갖지 못했다.병실 분위기가 순식간에 냉각되었다.진영숙은 아들이 빨리 정신을 차리기를 바랐지만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기에 머리가 아팠다. 안 그래도 집안이 혼란스러운데 더 큰일이 벌어질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진영숙은 다소
한편, 강이한의 본가.강서희는 예전부터 집에서 오빠를 기다리는 것을 좋아했다.그런데 이유영과 결혼한 뒤로 오빠는 본가에 자주 발을 들이지 않았다.지금도 강서희는 이틀 동안 집에서 오빠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유영의 사망소식이 공개된지도 벌써 이틀이 지났다. 소방대원이 의식을 잃은 그녀를 구조해 밖으로 끌고 나왔지만 결국 병원으로 옮겨진지 한 시간 만에 사망했다고 한다.파리에서 귀국한 정국진이 그녀를 그 자리에서 화장해서 파리로 데려갔다고 했다.강서희는 이유영이 저주스러웠다. 강이한의 마음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 여자였기 때문이었다.하지만 지금은 딱히 기쁨이 느껴지지 않았다.사랑하는 오빠가 죽은 여자를 위해 곧 그녀에게 어떤 처벌을 가할지 상상이 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그녀는 오빠가 보고 싶었지만 동시에 그가 돌아와서 자신의 숨통을 조일까 봐 두렵기도 했다.어쩌면 강이한은 이유영을 보낸 분노와 한을 강서희에게 풀지도 모른다.“아가씨, 오렌지 좀 드셔보세요. 달아요.”왕숙은 손질한 과일을 들고 강서희에게 다가가며 안타까운 말투로 말했다.최근 이틀 사이 강서희는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는 왕숙이 만든 디저트마저 거부하고 방에만 틀어박혀 있었다.“안 먹어.”강서희는 짜증스럽게 대꾸했다.“아가씨, 이렇게 안 드시면 큰일나요. 건강을 챙기셔야죠.”“차라리 불타 죽은 사람이 나였으면 좋겠어.”강서희가 울먹이며 말했다.죽은 사람은 아무것도 느끼지 못할 테지만 살아남은 사람은 고통 속에 살아가야 한다고 생각하니 절망이 찾아왔다.놀란 왕숙이 다급히 말했다.“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다시는 그런 말하지 말아요.”죽고 싶다는 강서희의 말에 왕숙은 당황했다.그녀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강서희를 위로했다.“뭘 그렇게 걱정해요? 사람은 이미 죽었는데 도련님이 설마 죽은 여자를 위해 아가씨한테 해를 가하겠어요?”강서희는 착잡한 얼굴로 고개를 돌려 왕숙을 바라보며 말했다.“아줌마, 오빠가 그 카드를 내 방에서 발견했다는 게 뭘 의미하는
강서희는 따뜻한 왕숙의 품에 안겨 아이처럼 울었다.“아줌마….”한편, 병원.진영숙이 화장실을 다녀온 사이, 병상에 누워 있던 강이한이 사라졌다.그리고 침대 위에는 그가 벗어놓은 환자복이 놓여 있었다.“이 비서!”진영숙은 다급히 이시욱을 호출했지만 이시욱도 자리에 없었다.그녀는 급급히 집으로 전화를 걸었다.“여보세요.”“나야.”“네, 사모님.”수화기너머로 왕숙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진영숙은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당장 서희를 노부인한테로 데려가!”“무슨 일인데요?”왕숙이 긴장한 목소리로 물었다.진영숙은 뭔가 불길한 예감을 떨칠 수 없었다.그녀는 자신의 아들을 잘 알고 있었다.한지음이 시력을 잃은 일로 그는 이유영을 온갖 잔인한 방법으로 괴롭혔다. 그랬던 이유영이 사망하게 되었고 아마 그 심정은 누구라도 상상할 수 없을 것이다.지금 그에게는 화풀이할 상대가 필요했다.그리고 그 상대는 분명 강서희가 될 것이다.그날 밤 구치소에 화재가 나지 않았더라면 강이한은 이미 강서희의 목을 졸라 죽였을 수도 있었다.“이한이가 본가로 갈 것 같아.”진영숙이 말했다.강이한이 돌아온다는 얘기에 왕숙 역시 뭔가 불길한 기운을 느끼고 다급히 전화를 끊었다.그녀는 고개를 돌려 창가에 서 있는 강서희에게로 다가갔다.“아가씨.”“왜?”“일단 노부인 있는 곳으로 가요.”말을 마친 왕숙은 그녀의 손을 잡았다.강서희는 심각한 얼굴을 하고 있는 왕숙을 보고 저도 모르게 가슴이 철렁했다.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무슨 일인데?”“일단 가서 얘기해요.”진영숙이 다급히 연락했다는 건 강이한이 이미 오는 길에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조용한 것을 좋아하는 노부인은 별장 맨 뒤쪽에 있는 별채에 살고 있었다. 강서희는 멍한 얼굴로 왕숙을 따라 현관을 나섰다.그런데 갑자기 쾅 하는 소리와 함께 차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려왔다.강서희의 두 눈에는 강이한을 향한 미련과 그리움이 가득 담겼다.매번 강이한이 본가에 올 때마다 짓던 표정이었다.“우리
강서희와 왕숙은 경직된 자세로 고개를 돌렸고 강이한은 음침한 분위기를 풍기며 거실에 서 있었다.그의 뒤에는 이시욱과 형사가 따르고 있었다.강서희는 애처로운 얼굴로 왕숙과 강이한을 번갈아보았다.“오빠, 이게 다 뭐야?”그녀가 멍한 얼굴로 물었다.이틀 사이 그녀는 자신과 강이한이 다시 만났을 때 벌어질 무수히 많은 가능성을 생각했다.싸늘한 질문과 실망스러운 얼굴, 그리고 차가운 태도까지 다 각오했지만 이런 상황은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었다.아무런 얘기도 해보지 않았는데 다짜고짜 형사를 데리고 올 줄이야!그녀는 싸늘한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강이한을 바라보며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그와 함께 한 모든 시간이 어쩌면 자신만의 상상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형사가 천천히 그녀에게로 다가오며 사무적인 말투로 말했다.“강서희 씨, 강이한 씨의 신고를 받고 출동했습니다. 최근 조사 중인 한지음 씨 납치사건과 연관해서 새로운 증거가 제출되어서요. 저희와 함께 서로 가서 조사에 협조해 주시죠.”“아… 나 아니야.”강서희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강이한을 바라보며 말했다.둘의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친 순간 강서희는 온몸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오빠, 어떻게 내 말을 안 믿어줄 수가 있어? 내가 한 일 아니야. 한지음이 시킨 거라고.”“내가 사람에게 상해를 입힐 리가 없잖아.”강서희는 최대한 간절하고 침통한 표정으로 말했다.뒤늦게 정신을 차린 왕숙도 강이한을 바라보며 다급히 말했다.“그래요, 도련님. 아가씨가 어떤 사람인지 잘 아시잖아요. 사람을 해칠 분은 절대 아니에요.”그는 강서희에게 변명의 기회를 주지 않았다. 애초에 그가 이유영에게 했던 것처럼 바로 경찰에 연락한 것이다.물론 어떤 면에서는 이유영에게 했던 것보다 잔인했다.이유영을 대할 때는 천천히 숨통을 조이는 방법을 선택했고 그녀에게 빠져나갈 기회도 주었다.그가 마지막에 이유영을 몰아붙인 이유는 그녀가 자신이 원하는 대로 움직여주지 않아서 실망했기 때문이었
그 말이 끝나기 바쁘게 왕숙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그녀는 당황한 시선을 피하며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도… 도련님….”하지만 지옥을 닮은 강이한의 눈빛을 마주하자마자 고개를 푹 숙였다.“오빠, 어떻게 내 말을 안 믿을 수가 있어?”강서희가 울며 말했다.강이한이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왕숙을 바라볼 때 저도 모르게 가슴이 철렁했다.그녀는 눈물을 잔뜩 머금고 강이한을 바라보며 그가 예전처럼 다가와서 자신을 보듬어 주기를 바랐다.예전에는 그녀가 무슨 잘못을 해도 항상 따뜻하게 품어주던 오빠였다.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전혀 달랐다.“정말 결백하다면 조사를 받으면 나오겠지. 네가 한 게 아니라면 조사에 협조하는 게 현명한 선택 아니겠어?”조사라는 말에 강서희는 숨이 막힐 것 같았다.전에는 모든 흔적을 깔끔하게 지웠다고 생각했는데 카드를 치우지 않은 것이 치명적인 실수였다.카드가 발견되기 전에는 조사를 받으면서도 빠져나갈 수 있다고 굳게 믿었는데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이유영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도 결국 구치소에서 목숨을 잃지 않았는가?게다가 그녀가 모두 참여한 일이니 빠져나간다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강서희 씨!”형사가 짜증스러운 얼굴로 그녀를 불렀다.진영숙이 다급히 집에 도착했을 때, 노부인도 별채에서 나와 현관으로 들어오고 있었다.형사들을 본 둘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이한아.”진영숙은 땀을 뻘뻘 흘리며 강이한에게 다가가서 말했다.“너 서희한테 어떻게 이럴 수 있어?”노부인도 다가와서 강이한을 말렸다.“어떻게 된 거니? 집안 일은 집안 사람끼리 해결해야지 왜 형사까지 끌어들여?”극도로 보수적인 성향인 노부인은 더 이상 집안의 허물이 세간에 알려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안 그래도 여러 가지 일로 집안이 혼란스러운데 더 이상 일을 크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진심으로 강서희를 걱정해서가 아니라 어쨌든 세강의 양녀이고 나중에 이용해 먹을 가치가 있는 아이였다.만약 이대로 경찰에 잡혀간다면 세강은 사람들의 비웃
“오빠, 나 믿어줘. 한 번만 내 말을 들어줘!”강서희는 울음을 터뜨리며 그의 뒷모습에 대고 애원했다.진영숙과 노부인도 조바심이 났다.“엄마!”강서희는 끌려가면서도 진영숙을 애타게 불렸다.이번에 들어가면 조사로 끝나지 않을 거라는 것을 그녀도 직감하고 있었다.강이한이 직접 형사들을 데리고 집으로 왔다는 것은 그의 의지를 표명하고 있었다.아마 그는 알고 있는 모든 것을 동원해서 강서희를 감옥에 보내려고 할 것이다.강서희의 얼굴에 깊은 절망이 깃들었다.진영숙과 노부인도 하얗게 질린 얼굴로 그 모습을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들 중에 반응이 가장 격한 사람은 왕숙이었다.“아가씨! 우리 아가씨를 어디로 데려가는 거예요? 그거 다 제가 했어요! 모든 건 제가 했다고요!”왕숙은 달려가며 강서희의 옷깃을 잡았지만 형사가 달려들어 그녀를 떼어냈다.왕숙은 그대로 차가운 바닥에 주저앉았다.강서희가 울며 소리쳤다.“나 억울해! 오빠, 내가 한 거 진짜 아니야! 한 번만 내 말을 들어줘. 엄마!”그녀는 미친 사람처럼 발버둥쳤지만 전문적인 훈련을 받은 형사들 앞에서는 무용지물이었다.손목에 차가운 수갑이 채워진 순간, 강서희는 절망했다.왕숙이 달려오다가 그대로 바닥에 넘어졌다.“아가씨!”왕숙은 미친 사람처럼 애타게 강서희를 불렀다.진영숙과 노부인도 밖으로 나왔다. 강서희는 그들을 바라보며 한 번도 느껴본 적이 없던 절망을 느꼈다.‘안 돼! 이대로 끌려갈 수는 없어!’이곳은 그녀에게 유일하게 따뜻함을 느끼게 해준 집이었다.“엄마, 할머니!”그녀는 미친 사람처럼 차에서 내리려고 발버둥쳤다.점점 조여오는 불안감이 그녀를 미치게 만들었다.강이한은 한 번도 이런 식으로 그녀를 대한 적이 없었다. 전에는 그녀가 울기만 하면 주저 없이 그녀의 편에 서주던 사람이었다.하지만 오늘은 완전히 바뀌었다.어릴 때부터 함께 자란 오빠가 어떤 사람인지 강서희는 잘 알고 있었다. 그의 잔인함은 상상을 초월했다.드디어 올 것이 온 것이다.그녀
“이 비서.”“네, 대표님.”“왜 화장을 선택했대?”그녀가 지난 생과 같은 고통을 겪었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아팠다.지난 생에서 이곳은 완전히 불에 탔고 이유영은 구조되었지만 중도 화상으로 병원에 실려갔다가 끝내는 깨어나지 못했다.그때 그녀는 아이를 임신하고 있었다.그 기억들이 지금의 강이한을 더 숨막히게 했다.이시욱은 긴 한숨을 내쉬며 그에게 말했다.“대표님, 다 지나간 일이에요.”그는 이유영의 마지막을 더 이상 그에게 말해주고 싶지 않았다. 알면 알수록 고통만 더해질 뿐이었다.“나서원 좀 불러줘.”강이한이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이시욱은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지금 그가 알고 있는 일을 강이한에게 말하지 않아도 그는 끝까지 파헤칠 기세였다.“대표님, 사실은….”“말해!”그가 단호한 어투로 말했다.이시욱은 움찔하며 고개를 숙이고 입을 열었다.“사실 이유영 씨는 구조되었을 때 숨이 붙어 있었습니다.”강이한는 눈앞이 캄캄해지는 것을 느꼈다.이시욱은 계속해서 말했다.“하지만 한 시간을 버티지 못하고 결국 사망했어요. 정국진 회장과 마지막 인사도 하지 못했다고 합니다.”침통한 이시욱의 얼굴을 보고 강이한은 숨이 멎을 것 같았다.이시욱은 가늘게 떨고 있는 상사를 보며 말을 이었다.“게다가 돌아가실 때 이유영 씨는….”그는 차마 말하지 못하고 입술을 깨물었다.그때 소식을 전해 들었을 때의 충격이 아직도 남아 있었다. 일개 비서인 자신마저도 그런데 강이한은 얼마나 충격을 받을지 상상이 가지 않았다.“계속해.”강이한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재촉했다.살아 있을 때도 뜨거운 것을 싫어하던 여자였는데 얼마나 아팠을지 생각하면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두 번의 삶을 경과하면서 이유영이 겪었을 고통을 생각하면 강이한은 자결하고 싶은 마음마저 들었다.이시욱은 고개를 떨구고 말했다.“돌아가실 때 이유영 씨는 임신한 상태였다고 합니다.”강이한은 세상이 무너지는 소리를 듣는 것 같았다.‘유영아… 그리고 우리 아이까지!’털썩 하는 소리와
먹구름이 가시고 밝은 햇살이 다시 대지를 비추었지만 강이한의 마음까지 비춰주지는 못했다.그 시각, 홍문동.강이하는 공허한 얼굴로 거실에 앉아 있고 그의 앞에는 심각한 얼굴을 한 한지음이 앉아 있었다.이런 일이 발생했으니 둘의 결혼식은 불가능한 일이 되었다. 이유영이 그토록 비참하게 세상을 떠날 줄을 누가 알았을까?한지음도 이유영을 증오하고 그녀가 고통스럽기를 희망했지만 정말로 죽일 생각은 없었다.단지 자신이 가져야 할 모든 것을 가져간 이유영에게 대가를 치르게 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이유영이 평생 감옥에서 나오지 못하게 하는 것이 한지음이 바라는 것이었다.하지만 정작 그녀의 사망 소식을 들었을 때, 한지음은 별로 기쁘지 않았다.“아줌마한테 짐 정리 부탁할 거야. 네가 살 곳은 따로 마련했어. 이곳은 네가 있기에 적절하지 않아.”강이한이 무거운 침묵을 깨고 말했다.모두의 접촉을 거부하는 싸늘한 목소리에 한지음은 어깨가 흠칫 떨렸다.예전이었다면 이유영 때문에 그러느냐고 불쌍한 척이라도 했겠지만 오늘은 그럴 수 없었다.사람이 죽었는데 굳이 이곳을 차지하고 있어도 알아줄 사람이 없었다.“알았어요.”그녀는 강서희처럼 비굴하게 매달리지 않고 담담히 현실을 받아들였다.강이한은 약간 의외라는 듯이 고개를 들었다가 담배를 입에 물었다.그는 자옥한 연기를 통해 한지음을 바라보며 물었다.“강서희가 한 일, 너도 참여했니?”그 말이 끝나기 바쁘게 한지음은 가슴이 철렁하며 저도 모르게 안색이 창백하게 질렸다.강서희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간병인을 통해 전해 들은 바가 있었다. 그랬기에 저도 모르게 겁이 났다.감옥에서 남은 생을 받아들이는 일은 그 누구라도 두려운 일이었다.“아니요!”잠깐의 침묵이 흐르고 한지음이 대답했다.강이한은 더 이상 질문하지 않고 싸늘한 눈빛으로 그녀를 빤히 바라보다가 자리에서 일어섰다.“이한 오빠.”남자의 발걸음 소리가 들리자 한지음은 처량한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이미 그에게서 온기를 나눠 받으며 그녀의 마음 속
긴장감이 폭발 직전까지 치달았다. 두 사람은 차갑게 서로를 응시하고 있었고 소은지는 두 사람 사이에서 뿜어져 나오는 싸늘하고 날카로운 기운을 온몸으로 느꼈다.소은지는 여태껏 단 한 번도 누군가에게 의지하려고 하지 않았다.소은지의 곁에는 아무도 없었다. 청하시에서도 오직 이유영만이 유일한 존재였을 뿐, 그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하지만 이유영은 기댈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오히려 대부분 이유영이 소은지에게 의지하고 있었다. 게다가 강이한이 나타난 후로 이유영의 삶은 늘 혼란스러웠다.대부분의 시간 동안, 소은지는 위태롭게 흔들리는 이유영을 붙잡아주며 지탱해야 했다.파리에 온 이후, 소은지의 삶은 엔데스 명우에 의해 완전히 파괴되었다. 그리고 누군가에게 의지할 생각을 더욱 하지 않게 되었다.그런데 지금...“흥! 현우야, 앞으로 네가 얼마나 더 보호할 수 있을지 지켜볼게.”엔데스 명우는 비웃듯 말하고는 매섭게 돌아섰다.그의 등 뒤로는 차가운 기운이 스며 나왔다.현우는 소은지를 바라보았다. 소은지의 얼굴은 여전히 창백했고 방금 전에 있었던 긴장된 상황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한 듯했다.현우는 가볍게 웃었다. 그 소리에 소은지는 정신이 번쩍 들며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뭐가 그렇게 웃겨요?”“당신도 두려움을 느낄 때가 있다는 게 웃겼어요.”두려움? 그렇다.조금 전, 엔데스 명우 앞에서 어떻게든 힘을 짜내 맞서 싸웠지만, 솔직히 말하면 무서웠다.그 순간, 소은지는 진심으로 두려웠다.그리고 엔데스 명우가 떠난 뒤에도 소은지의 등에선 여전히 식은땀이 흘러내리고 있었다.“당신도 알잖아요. 당신 형은 완전히 미친 사람이란 걸!”소은지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현우는 고개를 끄덕였다.“맞아요, 미친 사람이죠.”소은지가 엔데스 명우 곁에 있을 때 어떤 비인간적인 고통을 겪었는지, 여러 번 도망쳤다가 결국 어떻게 붙잡혔는지, 그는 모두 알고 있었다.현우를 만난 뒤에야 소은지는 반격의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그리고 소은지는 모든 것을
한껏 완화된 긴장감은 소은지의 한마디로 다시 불이 붙었다.소은지의 입가에 떠오른 미소는 조롱과도 같았고 어딘가 날카로운 독기를 풍겼다.소은지는 분노로 붉어진 남자의 눈을 바라보았다. 핏빛으로 물든 그의 눈은 분노가 얼마나 극에 달했는지 생생히 드러냈다.하지만 소은지는 아랑곳하지 않는 듯 천천히 숨을 들이쉬며 담담히 말했다.“병이 그렇게 심각했다면 죽음도 끔찍했겠네.”소은지의 말은 고통스러운 기억을 더욱 후벼팠다.설유나는 죽기 직전까지 엔데스 명우에게 애원했다. 설유나는 죽고 싶지 않았다. 온갖 수단과 계략으로 쟁취한 모든 것을 이렇게 허망하게 잃을 순 없었다.하지만 설유나가 신처럼 여기던 엔데스 명우조차도 그녀를 구할 수 없었다.그 상황에선 누구도 설유나를 구할 수 없었다.그렇게 설유나는 엔데스 명우의 눈앞에서 마지막 숨을 거뒀고 그 절망감은 지금까지도 엔데스 명우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고 있었다.그는 설유나를 구할 방법이 있었지만, 결국 구하지 못한 이유는... 소은지 때문이었다.“이게 진짜...”남자는 이를 악물며 낮게 으르렁거렸다.소은지는 미소를 지으며 여유롭게 말했다.“설유나는 시작일 뿐이야.”소은지는 목소리에 힘을 주어 말했다. 앞으로도 엔데스 명우에게 닥칠 일이 더 많을 텐데, 벌써 이렇게 화를 내면 나중에는 어쩌려고?소은지는 가벼운 미소를 띠며 도발하듯 엔데스 명우를 바라봤다.분위기는 폭발 직전의 긴장감으로 팽팽하게 조여들었다.엔데스 현우가 설유나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현장으로 달려왔다.형제 관계가 아무리 냉랭해도 서로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엔데스 현우도 예외는 아니었다.역시나, 엔데스 현우가 이곳에 나타났다.“형, 지금 뭐 하는 거야?”엔데스 현우는 한걸음에 다가가 엔데스 명우의 손에서 소은지를 빼내 품에 안았다.엔데스 현우가 소은지를 감싸는 모습을 보자 엔데스 명우의 분노는 더욱 거세졌다.“너, 저 여자를 감싸는 거야?”“형은 세상이 이미 변했다는 걸 잊었나 보네.”엔데스 현우의 목소리
소은지의 냉정한 태도와 엔데스 명우의 거칠고 격렬한 분노는 극명한 대조를 보였다. 소은지는 지나칠 정도로 차분하고 무관심해 보였다.엔데스 가문의 일원으로 수많은 일들을 경험해 온 엔데스 명우조차도 지금 소은지가 풍기는 차가움에 섬뜩해질 정도였다.“정말 냉정한 사람이네.”남자는 한 글자 한 글자 천천히 내뱉으며 목소리에는 위험이 가득했다.소은지는 차분히 답했다.“미안하지만, 나와 상관없는 사람이나 일에 대해선 공감이 잘 안돼.”일이 직접 자신의 삶에 닥치지 않는 한, 그 감정을 완벽히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이건 냉정함이나 무관심의 문제가 아니었다. 게다가 소은지는 설선비, 설유나와 특별한 관계도 없었다.그들 사이에 관계가 있다고 해도 결코 유쾌한 사이는 아니었다.그러니 설선비와 설유나가 죽음을 맞이했을 때, 소은지는 그저 냉정했을 뿐이다.더군다나, 소은지와 엔데스 명우 사이에 있었던 수많은 일들을 생각하면, 설선비와 설유나가 겪은 일에 어떠한 연민이나 슬픔도 느낄 수 없었다.그 순간, 갑자기 목덜미에 강렬한 힘이 느껴졌다. 엔데스 명우의 손은 마치 소은지의 목을 으스러뜨릴 듯 강하게 조였다.분명한 건, 엔데스 명우는 설선비와 설유나의 죽음이 모두 소은지의 탓이라고 믿고 있었다.설선비는 소은지의 고소로 궁지에 몰려 죽게 된 것이었고 설유나는 소은지의 외면으로 죽음을 맞이했다고 생각했다.“소은지, 너 같은 여자는 이 세상에 존재할 가치도 없어!”남자의 목소리는 칼날처럼 날카롭고 잔혹했다.팍!뺨을 세게 내려치는 소리가 공기를 갈랐다. 모든 것이 멈춰버린 듯 공간은 순식간에 정적에 휩싸였다.엔데스 명우가 손을 놓는 순간, 소은지는 다시 자세를 바로잡고 앉았다.이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도 소은지는 흔들림 없는 고요한 기운을 유지하고 있었다. 소은지에게는 조금의 동요도, 당황스러움도 보이지 않았다.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며 숨을 삼켰다. 현장에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미 엔데스 명우의 사람들에게 통제당한 상태였다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의 마음속에서 너무나도 중요한 존재가 되었을 때, 그 사람에 대한 소식이 진짜든 가짜든 간에 상대방은 긴장하기 마련이다.의심할 여지가 없었다.박연준의 사람들은 이온유가 강이한에게 있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알고 있었다. 만약 강이한이 이 소식을 접하게 된다면, 과연 어떻게 반응할까?아마도 강이한은 그의 사람들로부터 어떤 이야기를 들어도 의심을 지우지 못할 것이다. 박연준은 강이한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강이한이 가진 가장 큰 약점이 무엇인지도 정확히 알고 있었기에 이런 식으로 소식을 흘리기로 결심한 것이었다.“명심하겠습니다!”문기원은 고개를 깊이 숙이며 대답했다.박연준은 낮고 깊은 목소리로 말했다.“유영이를 강이한의 곁에 둘 순 없다.”강이한을 찾을 수 없다면, 그가 스스로 모습을 드러내도록 만들어야만 했다.그동안 서주가 강이한에게 어떤 의미였는지, 박연준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어떤 일이 있어도 이유영을 서주의 소용돌이에 더 깊이 휘말리게 할 수는 없었다. 이미 이유영을 그곳으로 끌어들인 것만으로도 박연준은 마음 깊이 후회하고 있었기에 더 이상 이유영을 위험에 노출시키고 싶지 않았다.강이한의 주변은 결코 안전하지 않을 것이다.“알겠습니다.”문기원은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 역시 박연준의 의도를 잘 이해하고 있었다.비록 박연준은 말로 드러내진 않았지만, 문기원은 오랜 세월 박연준의 곁에서 함께하며 박연준이 이유영을 끌어들인 일을 후회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사람은 종종 되돌릴 수 없는 상황에 처하고 나서야 자신의 마음을 깨닫게 된다.박연준 역시 그랬다.그리고 강이한 또한 마찬가지였다....현재 서주는 마치 시간이 멈춘 듯 정체된 상태였다. 많은 이들이 강이한을 찾고 있었지만, 그는 세상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진 듯 보였다.한편, 파리에서도 큰 사건이 벌어졌다.설유나는 엔데스 명우가 적합한 기증자를 찾기도 전에 결국 세상을 떠났다.반산월.남자는 핏발 선 눈으로 소은지를 노
이렇게 오랜 시간 동안 이유영의 곁에 머물러 있겠다고?이것은 이유영이 도저히 믿기 힘든 일이었다. 하지만 강이한은 자기 말이 진심임을 결국 행동으로 보여주었다. 하루, 이틀, 사흘... 일주일이 지나고 심지어 보름이 지나도 강이한은 떠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그저 말없이 이유영의 곁을 지키고 있었다.강이한의 존재는 너무나 자연스러워졌다. 하지만 이유영은 여전히 파리에 있는 가족들에게 연락조차 할 수 없었고 서주의 상황도 여전히 알 수 없었다.강이한은 매일 외출했지만, 소문으로만 듣던 그 의사는 고집이 워낙 세서 끝내 마음을 열지 않았다.우천시에서 보름이 지나도록 이유영은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못한 채, 다른 의사들로부터 상태를 유지하는 데 그쳤다.강이한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 의사를 데려오겠다는 각오로 노력하고 있었다....한편, 서주에서 박연준이 강이한이 이유영을 데려갔다는 소식을 들은 지 벌써 일주일이 흘렀다. 그리고 이유영의 두 눈이 완전히 실명했을 수도 있다는 소식도 전해 들었다.정국진 쪽에서 들려온 소식에 의하면 그 원인은 알프산에서 있었던 일 때문이라고 했다.“아직도 소식이 없니?”서재 안, 박연준의 목소리에는 날카로운 기운이 서려 있었다.문기원이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아직 없습니다.”이유영의 소식은 단 한 마디도 들려오지 않았다. 강이한이 이렇게까지 할 줄이야. 박연준은 예상하지 못했다. 서주가 이렇게 혼란스러운 와중에 강이한이 이유영을 데리고 사라질 줄은.게다가 벌써 보름 가까이 아무 소식도 없이 사라졌다.“대체 어디로 데려간 걸까?”박연준은 미간을 짙게 찌푸리며 중얼거렸다.이 소식을 들은 일주일 동안, 박연준은 밤마다 뒤척이며 이유영의 걱정에 한시도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이유영의 시력이 원래부터 좋지 않았다. 만약 알프산의 사건으로 인해 시력이 급격히 더 나빠진 것이라면...박연준은 그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점점 조여 왔다.“찾아볼 곳은 다 뒤졌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아무런 단서도 찾지 못했습니다.”박
강이한은 알아챘다. 이유영이 일부러 강이한을 자극하고 있다는 걸.강이한의 불같은 성격을 알기에 일부러 화를 돋워 강이한을 떠나보내려는 의도였다.이유영은 더 이상 강이한을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아니, 그의 존재 자체를 잊어버리고 싶었다.“네가 무슨 말을 하든 난 절대 떠나지 않을 거야.”“...”강이한이 설마 다 알아챈 건가?“10년이란 세월이야.”강이한은 10년이라는 시간 속에서는 어떤 관계도 서로를 모를 수 없다고 말했다.10년이었다.그들의 관계가 어떻게 시작됐든 강이한은 이유영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이유영은 묵묵히 침묵을 지켰다.점심 식사.무거운 침묵 속에서 점심시간이 흘렀다. 이유영이 가장 좋아하던 우천시의 지역 요리였지만 강이한과 함께 있다는 이유로 모든 음식이 무미건조하게 느껴졌다.말을 너무 많이 했던 걸까? 이유영은 오후 내내 강이한과 대화하려 하지 않았다. 강이한이 무슨 말을 해도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이유영은 철저히 강이한을 무시하고 있었다.강이한은 우천시에서 가장 유명한 간식거리들을 사왔다. 우천시에 오면 꼭 먹어야 한다며 음식을 내밀었지만, 이유영은 한 입도 손대지 않았다.“유영아.”강이한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이유영을 바라보며 가슴이 점점 더 답답해졌다.강이한도 알고 있었다.이유영과 얽힌 수많은 일들만으로도 이유영에게 용서를 구할 수 없다는 것을. 게다가 지금은 연서의 사건까지 얽혀 있으니...이유영의 마음속 상처는 단시간에 치유될 수 없을 만큼 깊었다.“좋은 기분을 유지하지 않으면 눈도 빨리 낫지 않을 거야. 그러면 내 곁에서 빨리 벗어나지도 못할 거야. 잘 생각해 봐.”“...”강이한은 말하면서 싸늘한 기운을 뿜어냈다. 이 남자는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걸까? 강이한과 잘 지내지 않으면 강이한을 떠날 수 없다는 뜻인 건가?아니면 이유영의 눈이 다 나을 때까지 계속 곁에 있겠다는 뜻인 건가?“흥!”이유영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비웃는 듯한 냉소를 흘리며 말했다.“그럴 시간이 있긴
이 정도도 못 견디겠다는 건가? 그렇다면 이유영은? 이유영은 이전에 강이한의 곁에서 얼마나 많은 것을 견디고 참아내야 했던가? 강이한은 그런 기억조차 없는 것처럼 보였다.이유영은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손 놔!”“네 상태가 나아지기만 하면, 네가 뭘 말하든 다 받아들일게!”강이한은 억누른 목소리로 말했다.모든 것은 이유영의 눈이 나아진 뒤로 미루어야 했다. 지금 이유영의 감정이 더 격해지면 안 됐다. 강이한은 진심으로 이유영이 걱정되었다.하지만 이유영은 이런 것을 전혀 개의치 않는 듯했다.강이한은 답답했다. 이유영을 도대체 어떻게 대해야 할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다.“이 손 놓으라고!”이유영의 목소리는 여전히 냉랭했다.강이한은 이유영의 완강한 모습을 바라보았다. 두 눈이 보이지 않아도 이유영의 단호하고 강한 의지는 뚜렷이 드러나 있었다.가장 진실된 이유영의 모습이었다. 그 순간, 강이한의 머릿속에 지난 생의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두 사람의 관계가 최악으로 치닫기 시작한 건 아마 이유영이 실명한 이후였던 것 같았다.실명하기 전까지는 어떤 상황에서도 강이한을 믿었다. 그때를 떠올릴수록 강이한의 마음은 점점 더 쓸쓸해졌다. 이유영이 말했듯 이유영은 강이한에게 정말 많은 기회를 주었었다. 하지만 강이한은 이유영이 준 기회들을 한 번도 소중하게 여겼던 적이 없었다.강이한 스스로가 그 기회를 놓친 것이다. 이유영을 조금도 탓할 수 없었다.“유영아!”강이한은 무언가 말하려 입술을 떼었지만, 목이 메어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이유영은 강이한의 손을 강하게 뿌리쳤다. 그러나 이유영이 다칠까 봐 강이한은 결국 손을 놓고 말았다.이유영은 더듬거리며 숟가락을 잡으려 했다.우지와 우현이 이유영을 돕기 위해 다가가려 했지만, 이유영은 냉랭하게 말했다.“모두 나가줘.”“아가씨!”“나 혼자 할 수 있어요.”이유영의 목소리는 약간 떨렸지만, 여전히 차가웠다. 우지와 우현은 더 이상 다가갈 수 없었다. 사람은 누구나 자존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유영아.”강이한은 따스하면서도 아린 눈빛으로 온전히 자신을 밀어내려는 이유영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유영을 떠올리면 가슴이 미어졌다.두 사람의 과거는 차마 떠올릴 수도 없을 만큼 뼈아픈 기억으로 남아 있었다. 더욱이 말로 꺼낼 수도 없는 상처였다.입 밖으로 꺼낼 때마다, 이미 아물어가는 흉터를 억지로 다시 뜯어내는 기분이었다. 칼에 찔리는 듯한 고통이 다시 스며들 뿐이었다.하지만 피할 수 없었고 그저 마주할 수밖에 없었다.“네 눈이 나으면... 그때 다시 이야기하자.”강이한은 무언가를 말하려다 결국 삼켜버렸다.그 목소리엔 쓸쓸함이 배어 있었다.이유영은 강이한의 말에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게다가 당장 의사를 만날 수도 없었다. 강이한의 말처럼, 그 의사는 정말 괴짜일지도 몰랐다.결국 오늘도 헛걸음이었던 건가?점심 식사 자리에서.“도와줄게.”이유영이 손을 뻗으려는 순간, 강이한이 이유영의 손목을 붙잡았다.그러나 이미 늦었다. 이유영 앞에 있던 컵이 손이 닿자마자 뒤집혀 버렸고 컵 안의 물이 사방으로 튀었다.우지와 우현이 서둘러 다가와 물잔을 정리했다.그 사이, 강이한은 이유영을 안아 들어 올렸다. 덕분에 이유영은 물이 쏟아지는 불상사를 피할 수 있었다.강이한은 이유영을 안은 순간, 이유영의 몸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을 똑똑히 느꼈다. 강이한을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던 말은 거짓말이 분명했다.어떻게 신경 쓰이지 않을 리가 있겠는가?“유영아.”이유영은 여전히 어둠을 두려워하고 있었다.지난 생에 어둠 속에서 살아가는 데 익숙해졌던 이유영도 여전히 어둠은 공포였다.사실, 어둠 속의 삶을 진심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누구나 찬란한 햇빛 아래서 살아가길 원하니까.다양한 색채를 보고 아름다운 풍경을 즐기면서 말이다. 이유영 역시 그런 것들을 소중히 여겼던 사람이었다.하지만 지금은...강이한의 기억 속엔 지난 생 이유영이 어둠 속에서 느꼈던 절망이 여전히 선명히 남아 있었다.그때의 강이한은 분노와 슬픔으로 가득 차
강이한은 아침 일찍 집을 나섰다.소문으로만 듣던 ‘염 선생’을 만나러 간 것이다.그 시간 동안 우지와 우현은 휴대전화를 빌리기 위해 주변 사람들을 찾아다녔지만, 아무 소득도 없었다. 강이한답게 이미 철저히 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아침에 나갈 때부터 강 선생님의 사람들이 우리를 감시했어요. 외부 사람들과 연락할 기회가 전혀 없었어요.”우지는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강이한이 이유영을 둘러싼 모든 외부 연락을 완벽히 차단하려는 것이 분명해 보였다.이유영은 어둠 속에 조용히 앉아 있었다. 눈앞이 캄캄한 데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하기만 했다.우지가 이유영을 바라보다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아가씨.”“네?”“적어도 부인께는 아가씨 소식을 전해드려야 하지 않을까요?”임소미를 말하는 것이었다.우지와 우현은 임소미가 이유영을 얼마나 아끼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지금 누구보다도 가장 애타게 이유영의 소식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 확실했다.아이를 잃은 뒤로, 임소미는 긴 세월을 고통 속에서 보냈다.그리고 현재 이런 상황까지 겹쳤으니, 임소미의 심정이 얼마나 초조하고 불안할지는 뻔한 일이었다.이유영은 머리가 지끈거렸다.“네.”이유영은 담담하게 대답했다.강이한에게 할 말은 이미 다 했지만, 그 남자는 끝내 뜻을 굽힐 생각이 없어 보였다.“밖에 비가 아직도 오고 있나요?”“네.”지붕을 두드리는 빗소리로도 충분히 알 수 있었지만, 우지의 대답을 듣고 나니 우천시의 비가 얼마나 지독한지 새삼 실감이 났다.이유영은 어둠 속에서 조용히 빗소리를 듣고 있었다.빗소리는 복잡하고 어지러웠던 마음마저 차분히 가라앉히는 힘이 있었다.강이한이 돌아왔을 때, 이유영은 처마 아래 놓인 의자에 앉아 있었다.우지가 걸쳐준 망토를 두른 채, 조용히 비가 오는 풍경과 녹아든 모습이었다.강이한의 몸에서는 축축한 빗물 냄새가 났다.강이한이 다가오자마자 이유영은 그 냄새를 감지했고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하지만 이런 자신의 반응이 너무 싫