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이한은 이미 화가 날 대로 난 이유영을 보고도 태연하게 그릇 안의 핸드폰을 슬쩍 쳐다보았다.“이리 와.” 세 글자, 날카롭고도 위엄 있다.이유영은 자리에 앉은 채 움직이지 않았다.순종하지 않겠다는 의사가 분명했다.강이한이 호통쳤다. “다 나가!”현장에 있던 사람들은 특별사면이라도 받은 것처럼 뿔뿔히 자리를 떴다.이유영과 강이한 둘만이 남았다. 강이한이 일어서더니 길쭉한 다리로 성큼성큼 그녀에게로 다가왔다.이유영은 의식적으로 도망치고 싶었으나, 오기로 자리에 계속 눌러앉아 있었다.남자의 강한 기세가 덮쳐와 그녀의 온몸을 감쌌다. 그녀가 정신도 차리기 전에 남자는 병아리 낚아채듯이 그녀를 좌석으로부터 끌어올렸다. “이유영, 내가 그 동안 너한테 너무 오냐오냐했지?”강이한이 어금니를 깨물고 말했다.그는 아예 그녀를 안고 소파에 몸을 내던졌다. 이유영이 몸을 일으키려고 하자 강이한이 바로 옴짝달싹 못하게 꽉 눌렀다.“어디서 겁대가리 없이, 감히 외간 남자 때문에 나한테 대들어, 어?”강이한이 그녀의 목을 점점 더 세게 졸랐다.이 때, 이유영이 안간힘을 써서 눈을 뜨자 강이한의 표독스러운 눈과 마주쳤다.그의 눈에 비친 독기를 보니 그들 사이는 마치 전생으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 그때, 이유영은 의지할 곳 하나 없었고 유일하게 기댈 수 있는 사람이 바로 강이한이였다. 그런데 강이한이 자신을 이처럼 대했을 때, 그때 느꼈던 절망은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재간 있으면 날 죽여!”“죽여?”“……”“내가 왜?”“……”“난 너를 지켜주는 놈들만 하나하나 없애버릴 거야!” 강이한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독기가 차있다.이런 독기를 이유영은 본 적이 있다.전생에서 그가 한지음을 위해 이유영의 각막을 뺏어가려고 할 때이다.“그래?” 이유영이 냉소하며 도발했다.박연준과 정국진도 다들 보통 인물은 아니지만 그들은 아직 모르고 있었다.그들이 알고 나면 강이한 쪽도 머리가 좀 아플 것이다.강자 간의 대결이라!그런 상황은 강이한도 원치 않을
그러나 지금의 이유영은 달라졌다.안된다.그걸로는 부족하다.잘 정리하고 문을 나섰다. 홍문동 밖에서 한참을 기다리고 있던 조민정이 이유영을 보자 걱정 어린 눈으로 바라보았다.“괜찮아요? 전화했었는데 폰이 꺼져있더라고요.”“괜찮아요.”핸드폰을 강이한의 죽 그릇에 던졌으니 전원이 당연히 꺼졌을 것이다.하지만 조민정이 이렇게 걱정해 주니 이유영은 가슴이 뭉클해났다.조민정이 그를 바라보며 쇼핑백을 건넸다.“옷이랑 가방 챙겨왔어요.”“고마워요.”“뭘요.”이유영 목에 난 멍 자국을 본 조민정은 입술을 파르르 떨다가 결국에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어차피 자신은 이유영의 부하직원일 뿐이다. 상사의 사생활에 대해 묻는 것은 좀 그렇다.하지만 그녀와 강이한의 관계를 생각하니 또 갈등이 생겼다.이유영은 말없이 옷을 갈아입고 벗어놓은 옷을 차창 밖으로 버렸다. “......”그렇다.이 모습은 분명히 강이한과 눈곱만큼도 얽히기 싫다는 뜻이다.......이유영은 회사에 도착한 후 하루 종일 기분이 좋지 않았다. 누가 다가오기만 하면 화를 내서 임직원들까지도 그녀가 기분이 언짢다는 것을 알았다.지현우가 문서를 들고 들어와서 미간을 찡그리며 물었다.“무슨 일이 있습니까?”들어오면서 울상을 하고 나가는 직원을 본 모양이다.“별일 없어요.”말은 그렇게 했으나 속으로는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지현우는 다른 사람과 다르다. 외삼촌께서 친히 보낸 사람이기에 아무리 기분이 안 좋아도 지현우에게는 화를 낼 수 없다.하지만 강이한을 생각하면 화를 참을 수가 없었다.속이 터질 것만 같았다.“사생활로 직장에 영향 주는 것은 별로 안 좋습니다. 특히... 여성이라면.”이 말을 들은 순간, 펜을 들고 있던 이유영의 손이 멈칫했다.지현우를 바라보는 눈동자에도 적의가 어렸다.지현우는 그녀의 생각을 알아차리고 말했다.“여성이라고 차별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 전체 분위기가 그렇습니다.”“흥.”워낙 불편하던 심기가 더 불편해졌다.그도 그럴 것이 지금 이 모든
불과 이틀 시간이다.소탈하고 대범하던 이유영이 강이한에게 이렇게 짓눌리게 되다니. 하지만 그녀도 보통내기는 아니다.달갑게 받아들이고 넘어갈 리가 없다.게다가 이유영과 강이한은 어디 보통 사이인가. 원래는 이혼 후 각자 제 갈 길을 가고 서로 보지 않기로 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바뀌었다.강이한의 기세를 보니 이유영을 놔줄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는 것 같았다.그리고 또 하나……강이한의 수단을 보니 대단한 가문과 정략결혼을 시켜 강씨 가문을 키우려는 것도 진영숙의 일방적인 생각이다.강이한은 그런 것 따위 필요없었다.……점심시간이 되었다.강이한으로부터 걸려온 전화가 이유영을 골치 아프게 했다.“지금 바로 내려와.”이유영이 대답이 없자 강이한이 다시 말했다.“내려오라면 내려와!”이유영은 끝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지금 이유영은 이를 악물고 강이한을 참고 있다.그런데 이 갑작스러운 행동은 뭐지?그녀는 순간 당황해났다.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머리를 굴려보았다. 다시 합치는 건……아니야, 이건 아니야!“난 식사 생각 없어. 좀 이따 회의가 있어서 이만.” 이유영의 말은 사실이었다. 실제로 회의 약속이 잡혀 있었다.상대방이 뭐라 하기도 전에 이유영은 전화를 끊어버렸다.지현우의 말을 새기고 애써 마음을 가다듬고 회의실로 들어갔다.“시작하시죠.” 이유영이 입을 열었다.의심할 여지 없이 오늘 회의 주제는 어제 있었던 일에 관해서이다.이유영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강이한이 자료를 회사 내부로부터 전해 받았다고 했던 말이 떠올랐다. 이유영의 눈빛이 어두워지더니 지현우에게 말했다.“재무실장 좀 오라고 하세요.”“네.”지현우는 영문을 몰랐다.원래대로라면 오늘 회의는 재무실에서 참석할 필요가 없었다.필경 전 대표가 남겨놓은 것들이고 자료만 봤을 땐 재무와는 별로 상관이 없었다.그래도 이유영의 지시대로 재무실에 전화해서 회의 참석 요청을 전했다.얼마 지나지 않아서 재무실장이 올라왔다.“대표님.”그의 얼굴에서 불안함이 보였
“대표님도 그동안 힘드셨을 텐데.”지현우가 조곤조곤하게 말했다.이유영은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지 비서님, 어떻게 처리할 계획인지 말씀해 보세요.”이번 일은 작은 일이 아니다.자칫하면 아무리 크리스탈 가든 같은 대기업이라도 불필요한 영향을 받기 마련이다.그것은 이유영이 원하는 바가 아니다.지현우도 그것쯤은 알고 있다.두 사람 사이에 묘한 분위기가 흘렀다.지현우가 뭐라고 더 말하려는 순간, 펑 하는 굉음과 함께 회의실 문이 열렸다.누군가 밖에서 발로 찼다.순식간에 이유영에게 집중되어 있던 시선들이 일제히 문 쪽으로 돌려졌다.문 어구에는 강이한이 얼음장 같은 얼굴을 하고 서있었다.그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을 내려다보았다.워낙 화가 나있던 이유영은 지금 폭발하기 직전이다.하지만 강이한이 위협하는 눈짓을 보고 애써 화를 꾹꾹 누르고야 말았다.“강이한 씨, 이건 좀 실례인 것 같습니다만?”강이한이 길쭉한 다리로 이유영에게로 다가갔다.기세등등한 모습이 다가올수록 그녀는 압박감을 느꼈다.회의실에 있던 사람들은 조마조마해났다.그들도 당연히 강이한의 얼굴을 안다. 그리고 그와 이 대표가 이혼 한 사실도 알고 있다.그런데 지금 이건 무슨 상황이지?헉! 강이한의 행동에 다들 놀라 입이 떡 벌어졌다. 어떻게 사람들 보는 앞에서...이유영은 입술이 따가워났다.방금 전 강이한의 위협에 화는 이미 어느 정도 가라앉혔었다.하지만 지금은 참으려야 참을수가 없다. 이유영은 강이한의 뺨을 치려고 손을 올렸다.찰나, 강이한이 손목을 잡아당겨 그녀를 품안에 꽉 껴안았다. 이유영은 화나서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조그마한 몸집이 강이한 품에서 옴짝달싹 못하고 있다.강이한이 가정폭력 버릇은 없었기 망정이지 아니면 이유영의 덩치로 진작에 맞아죽었을 것이다.강이한은 아랑곳하지 않고 외투로 품에 있는 그녀를 감쌌다. 그러고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당황해서 멍해있는 사람들에게 말했다. “이 대표가 피곤하답니다. 오늘 회의는 끝났습니
이유영은 다짜고짜 강이한을 때리기 시작했다.이유영이 참다못해 발광하자 강이한이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그녀의 손목은 참 가늘었다. 조금만 힘을 주면 부러질 것만 같았다.이유영은 옴짝달싹 못하게 되었다.그녀는 강이한을 무섭게 쏘아보았다. 분노로 인해 그녀의 두 눈이 시뻘겋게 충혈이 되어있었다.“이제야 눈이 뒤집히는 느낌을 알겠지? 더 설쳐봐 어디? 어?”강이한이 키스를 했다.그는 시비를 걸고 있다.이유영은 알고있다. 강이한이 지금 그녀가 이혼하자고 한 일을 가지고 시비 걸고 있다는 것을.“우리가 왜 이혼했는지 몰라? 무슨 낯짝으로 날 찾아와서 시비 걸어?”“네가 이혼하자고 설친 거잖아. 너 아니면 누굴 찾아?”“감정 따위 그렇게 정리가 안돼? 내려놓지 못하겠어?”이유영은 이성을 잃었다.이렇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었다.그냥 이혼을 했을 뿐인데 강이한이 이렇게 복수할 줄은.하긴 예전에...이유영은 큰 숨을 들이쉬고 물었다.“너 요즘 한가해 보인다?”“응, 네가 프로젝트 두 개 가로채간 덕분에 한가해.”이유영은 말문이 막혔다.“......”또 부지 얘기다.“그건 내 실력으로 얻은거야.”“그 프로젝트 원래는 내 거거든. 내 거 뺏으면 안 될 텐데?”뺏으면 반드시 대가를 치러야 할 것이다.이유영은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랐다.지금의 강이한은 참...재결합의 ‘재’자도 꺼내지 않았지만 그가 하고 있는 모든 일들이 재결합을 위해서이다.점심 식사 중이다.이유영은 음식이 무슨 맛인지 음미할 겨를도 없이 빨리 먹었다.다 먹고 나서 여유만만한 강이한을 바라보았다.“나 이제 가도 되지?”냅킨을 테이블에 내치며 말했다.강이한은 그녀를 힐끗 보더니 대답했다.“가봐.”이유영이 자리에서 일어서는 순간 강이한이 옆 테이블에 대고 소리쳤다.“시욱아, 해외에 전화 좀 걸어봐.”이유영이 다시 풀썩 주저앉았다.강이한은 입꼬리를 올리고 그녀를 봤다.“됐다. 안 걸어도 돼.”이유영이 무섭게 째려보았다.눈빛이 사람을 죽일 수 있다면 강
그를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씹어 삼키고 싶었다.……이유영은 사무실에 돌아왔다.가는 곳마다 사람들이 이상한 눈길로 쳐다봤다. 그러나 그녀의 신분이 두려워 감히 뭐라 하는 사람은 없었다.지현우가 그녀 사무실에 따라 들어왔다.그리고 걱정 어린 말투로 물었다.“대표님, 강이한 씨와는...”“회장님께는 말씀 안 드렸죠?”이유영이 지현우의 말을 잘랐다.지현우가 고개를 흔들었다.“회장님은 모르십니다.”“모르셔야 해요.”“이건”“지 비서님, 로열 글로벌 그룹, 태산처럼 굳건하지 않아요.”이유영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그녀도 이 최근에야 알았다.전에 강이한은 정말로 그녀를 상대할 시간이 없었던 것이다. 이혼에 동의한 것도 그에게는 그녀의 장난을 방치하는 것에 불과했다.그 둘 사이는 종이 한 장으로 끝낼 수 있는 관계가 아니었다.게다가 강이한은 보이는 것처럼 평범한 사람이 아니다. 외삼촌도 그의 본모습을 본 적이 없을 가능성도 있다.“알겠습니다.”지현우가 고개를 끄덕였다.그는 정국진 옆에서 민첩한 관찰력을 믿고 일해왔다. 이 순간 그는 이유영에게서 두려움의 냄새를 맡았다.이유영이 강이한으로부터 위협을 받았구나.그의 표정이 어두워졌다.……강이한은 이유영이 회사에 들어가는 것을 보고서야 돌아섰다.그는 회사가 아닌 강 씨 저택으로 향했다.이곳은 이유영과 결혼 후 들른 적이 별로 없다.진영숙은 아들이 온 것을 보자 기분이 좋아서 평소보다 많이 온화해졌다.이제야 아들이 비슷한 가문의 여자를 마음에 품고 있다. 전에 걱정하던 일들은 이제 더는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너랑 이유영, 어떻게 됐니?”진영숙이 우아하게 차 한 모금 마시고 물었다.그녀의 홀가분한 표정과는 반대로 강이한의 표정은 굳어있었다.“어머니, 전에 그 애를 위협하셨어요?”“뭐? 걔가 너한테 뭐라고 하던?”진영숙은 이 말을 들은 순간 기분이 망쳐져 표정이 바뀌었다.위협이라면, 전에 이유영을 위헙하고 윽박질렀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강이한이 모르고 있는 것들이
진영숙은 강이한의 표정이 어두워지자 불안해졌다.“네가 날 원망하는 거 알아, 하지만 이한아, 그건...”진영숙은 할 말이 없었다.강이한이 다시 물었다.“일 년 전이라고 하셨어요?”“응, 가장 최근이라고 일 년 전이야. 그 뒤로는 너도 알잖아. 그 일 때문에 나도 정신이 하나도 없었던걸.”이건 강이한도 알고 있는 사실이다.진영숙과 이유영 사이에 갈등이 심하다는 것을 아는 강이한이 진영숙이 이유영의 트집을 잡지 못하게 하려고 일부러 일을 만들어 진영숙을 잡아둔 것이다.일 년 전...그럼 진영숙 쪽이 아니다.강이한이 일어서서 나가려 하자 진영숙은 어리둥절해졌다.“왜, 걔가 너한테 뭐라고 하더니?”진영숙은 이유영이 지금의 위치에 서있으니 꼭 강이한에게 자신의 안 좋은 얘기를 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하지만 답은 강이한이 문을 닫고 나가는 소리뿐이었다.강이한의 태도를 보아 이유영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진짜 뭐라고 했으면 오늘 본가에 들러서 이렇게 몇 마디 대화로만 끝내지 않았을 것이다. 한바탕 난리가 나고도 남았을 것이다.그동안, 강이한이 이유영 때문에 진영숙과 얼마나 싸웠는지 모른다.왕숙이 어디선가 불쑥 나와 진영숙의 뒤에 서서 공손하게 말했다.“작은 사모님이 재주가 꽤 있는 모양이네요.”“어디 꽤 있는 뿐이겠나. 내가 말이야, 전에 걔를 너무 쉽게 봤어.”진영숙은 지금 이 일에 대해서 뭐라고 말해야 좋을지 몰랐다.“그런데 지금... 꼭 작은 사모님이어야 해요?”왕숙이 물었다. 뭔가 다 생각이 있다는 듯한 눈빛이었다. 진영숙이 눈을 지그시 감았다.“지금 다른 방도가 없지 않나.”다른 사람을 찾는다?서로 잘 아는 집안이 아니면 또 어떤 꼴 당할지 누가 알겠는가.이번에 유경원에게서 한 수 배운 셈이다.“사모님, 지금은 작은 사모님이 재결합 동의한다고 해도 강씨 가문에 좋지만은 않을거예요.”“그게 무슨 말이지?”“생각해 보세요. 작은 사모님이 지금은 대단한 외삼촌이 생겼지만 예전에 사모님께서 작은 사모님을 성에
왕숙은 제자리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이마에는 이미 식은땀이 나있었다.......진영숙이 혼자 생각에 잠겼다.강서희를 며느리로 삼다니, 그녀는 줄곧 서희를 딸로 생각해왔다.주변 사람들은 다 강서희가 입양 딸인 것을 알고 있긴 하지만 입양 딸이 며느리가 되는 건... 게다가 전에 이유영 일도 있었고...왕숙의 말대로 했다가는 강 씨 집안 체면이 더 보기가 좋지 않을 것이다.백 번 양보해서 정말로 왕숙 말대로 된다 해도 진영숙 자신이 제일 먼저 나서서 말릴 것이다. 강서희는 그저 입양 딸일 뿐이고, 차라리 이유영 쪽이 낫다.......강이한이 본가에서 나와 차에 탔다. 그러고는 애꿎은 담배만 한대 또 한대 태웠다.차 문이 열리더니 강서희가 순진하게 웃으며 올라탔다. “오빠, 무슨 일로 급하게 불렀어?”강이한은 눈앞에 있는 강서희를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진지한 표정과 차가운 시선에 강서희는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왜, 내 얼굴에 뭐 묻었어?”강서희는 말하면서 얼굴을 만졌다.그녀는 아주 영리하다.강이한이 이토록 급하게 집으로 들어오라고 하는 것은 틀림없이 중요한 일일 것이라는 것을 이미 오면서 짐작은 했었다.이렇게 급하게 부른 것은 처음이니 말이다.강이한은 담배꽁초를 차창 밖으로 던지고 물었다.“네가 보기엔 이유영 어떤 것 같아?”강이한이 말을 꺼내자 강서희는 마음이 더 무거워졌다.몸까지도 잠깐 멈칫 했으나 금방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깍듯하게 말했다.“좋아. 좋은 사람이지.”“좋다고?”“응, 좋아!”“어디가 좋은데?”강이한은 진지하고도 엄숙하게 물었다.강이한의 진지한 모습에 강서희는 심장이 조여드는 느낌이었다.그녀는 물음에 대답하지 않고 되물었다.“왜 그래?”“내가 묻잖아, 어디가 좋냐고?”묻는 말에 대답하지 않자 강이한의 말투가 차가워졌다.이때, 강서희의 얼굴은 창백해져가고 있었다.마음속은 모든 것들이 한데 뒤엉켜 혼란스럽기 짝이 없었다.특히 이 순간 강이한은 뭔가 알아챈 것 같은 눈치다.
여진우가 돌아왔을 때, 강이한은 여전히 정원 한가운데 서 있었고 떠날 기미를 전혀 보이지 않았다. 여진우는 미간을 찌푸리며 무심코 집 안쪽을 힐끗 보았다.여진우는 주먹을 가볍게 쥔 채 천천히 강이한에게 걸어갔다. 두 사람이 마주 선 순간, 공기는 팽팽하게 얼어붙었다.“지금 상황에 여기까지 올 여유가 있다니, 놀라운 일이군.”여진우가 말했다.서주의 상황은 어떠한가? 정국진이 발을 뗀 이후 이유영은 서주와 거리를 두었지만 여진우만큼은 그곳의 변화를 속속들이 알고 있었다.지금 서주는 강이한과 박연준에게 얼마나 중요한 시기인지.서주의 혼란 속에서도 강이한은 이곳까지 올 결심을 한 것이다.강이한은 여진우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은 이유영을 떠올리게 할 만큼 닮아 있었다. 그 얼굴을 보며 강이한의 눈빛에는 복잡한 감정이 스쳤다.전생에, 강이한은 이유영과 여진우가 남매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사실 조금만 더 주의 깊게 봤더라면 그들의 닮은 점을 쉽게 알아차렸을 것이다.그랬다면 서주에서 여진우를 만났을 때 이유영이 세상에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바로 알았을지도 모른다.“널 과소평가했어. 이렇게 빠져나올 줄이야!”강이한은 서주를 언급하며 말했다.여진우가 만약 능력이 없었다면, 이번 서주 사태는 여진우에게도 큰 위기가 되었을 것이다.하지만... 여진우는 담담히 말했다.“인생은 많은 선택지로 이루어져 있지만 때로는 중요한 것 중 일부를 포기해야 해!”여진우의 말은 깊은 의미를 담고 있었다.강이한은 여진우의 말을 곱씹으며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중요한데 포기한다고?여진우는 강이한이 말할 틈을 주지 않고 이어갔다.“하지만 너한텐 포기라는 건 없어 보이네.”“...”“예를 들면, 이온유...”이온유. 그렇다.강이한과 이유영 사이의 핵심 갈등은 연서였고 그 문제를 가로막는 가장 큰 존재는 바로 이온유였다.강이한은 여진우를 바라보며 입술을 다물었다.여진우는 더는 말을 덧붙이지 않고 등을 돌려 집 안으로 걸어가며 조용히 말했다.“서주로
“정 선생임...”강이한은 믿기 어렵다는 듯 정국진을 바라보았다.강이한이 정국진의 입에서 그런 말을 들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정국진은 냉정하게 말했다.“설마 또 ‘그저 아이일 뿐’이라는 말을 꺼내려는 건 아니겠지?”과거에.강이한은 이유영 앞에서 여러 차례 그저 아이일 뿐이라는 말을 강조해 왔다.그저 아이일 뿐이니까 이유영이 모든 걸 감당해야 한다는 뜻인가? 월이가 희생해도 괜찮다는 의미였던 걸까?그 순간.정국진의 한 마디 한 마디는 강이한의 가슴에 무거운 돌처럼 내려앉았고, 날카로운 칼날처럼 그의 마음을 깊이 찔러 들어왔다.누구나 이성적으로는 옳고 그름을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자기 일이 되면 감정은 편애를 피할 수 없다.그리고 강이한의 편애는 분명히 한지음과 한지음의 딸에게 쏠려 있었다.그는 당시 상황에서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고 믿었다. 하지만 그것은 오로지 자기 입장에서만 내린 판단이었을 뿐이었다. 이유영과 아이에게는 그의 모든 행동이 도저히 용서받을 수 없는 일이었다.“강이한, 이번이 마지막이다.”정국진은 강경하고도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당장 여기서 떠나!”그의 말투에는 명백한 경고와 위협이 담겨 있었다.정국진은 말을 마치고 자리를 떠났다.강이한은 그 자리에서 한동안 멍하니 서 있었다.정국진이 이렇게 많은 말을 하는 것은 극히 드문 일이었다. 하지만 긴 대화 속에서 드러난 결론은 단 하나였다.강이한에게 소중한 사람들이라고 해서 이유영과 월이가 그들을 받아들여야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처음부터 끝까지.한지음도, 한지음의 딸도 그저 강이한에게 중요한 존재일 뿐이었다.월이와 이유영은 어떤 의무도 없었고 받아들일 이유도 없었다.하지만 강이한은?그는 도대체 왜 그랬던 걸까? 강이한과 이유영의 관계는 어쩌다가 여기까지 오게 된 걸까?...백산 별장.임소미는 아이를 안고 집 안을 천천히 걸으며 달래고 있었다. 아이의 감정은 이제서야 조금씩 진정되고 있었다.월이는 강이한의 딸이었다. 그러나 그를 본
강이한은 눈썹을 찌푸린 채, 여전히 이유영과 임소미가 사라진 방향을 응시하고 있었다.“그만 쳐다봐!”정국진이 말했다.정국진의 목소리는 예전보다 훨씬 날카롭고 단호했다. 외조카와 친딸의 무게는 결코 같을 수 없었다.많은 일이 있었다. 비록 이유영이 서주에서 돌아온 후 별다른 이야기를 하지 않았더라도 정국진은 여진우를 통해 모든 상황을 알고 있었다.그렇기에 지금 정국진의 태도는 과거와는 완전히 다를 수밖에 없었다.강이한은 정국진을 쳐다보며 조용히 말했다.“방금...”“네가 본 대로다. 유영이의 시력은 급격히 악화했고 의사 말로는 수술하지 않으면 시력을 잃는 건 시간문제라고 하더군.”정국진의 차가운 말이 강이한을 가로막았다.강이한은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과 숨 막히는 답답함에 사로잡혔다.이유영이...“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요?”“유영이 엄마 말로는, 박연준이 유영이를 알프산으로 데려갔다더군.”알프산? 강이한의 표정이 굳었다.“...”박연준이 이유영을 알프산으로 데려갔다는 사실을 들은 순간, 강이한의 마음은 불안과 긴장으로 가득했었다.이유영의 몸 상태로는 그런 추운 지역이 적합하지 않다는 것을 그는 본능적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예상하지 못했다. 문제가 단순히 추위뿐만 아니라 두 눈까지도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는.“눈부신 설원과 강한 햇빛이 유영이의 눈에 치명적인 자극과 손상을 남겼어. 지금 시력이 이렇게 된 것도 그 탓이지.”정국진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강이한은 이미 느끼고 있던 가슴속 고통이 정국진의 이 말로 인해 더욱 심해졌다.결국... 박연준이 이유영을 알프산으로 데려간 탓에 그녀의 시력이 이렇게 빠르게 악화한 것인가? 이 사실을 깨달은 순간, 강이한은 마치 폭풍우가 휘몰아치듯 혼란스러웠다. 얼어붙은 광기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 같았다.정국진은 강이한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다시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다시 찾아오지 마라.”기회는 이미 넘칠 만큼 주어졌다. 강이한은 그 소중한 기회를 스스로 놓치고 말았을
이유영의 가슴은 철렁 내려앉았고 그대로 넘어질 것만 같았다. 그 순간, 허리에 전해진 강한 힘이 이유영을 단단히 붙잡아주었다.익숙한 기운이 스며들며 이유영을 감싸안았다.중심을 되찾는 순간, 이유영은 본능적으로 그를 밀쳐냈다. 그 사람은... 바로 강이한이었다. 자신이 가장 만나고 싶지 않은 남자.“와아아...”멀지 않은 곳에서 아이의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다.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리는 순간, 이유영의 차가운 눈빛은 순식간에 녹아내렸다. 이유영은 당황한 듯한 모습으로 서둘러 아이에게 달려갔다.“월이야, 월이야.”이유영은 아이를 품에 꼭 안았다.“엄마, 무서워요!”“괜찮아. 엄마가 여기 있잖아.”“나쁜 사람! 나쁜 사람이에요...”작은 아이는 두려운 목소리로 강이한을 보고 외쳤다.멀리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강이한은 아이의 입에서 '나쁜 사람'이라는 말이 터져 나오는 순간,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나쁜 사람... 이의 기억 속 자신은 그저 그런 존재일 뿐이었다.그래, 이게 바로 그가 아이에게 남긴 흔적이었다.이것이 바로 그의 존재가 남긴 기억이었다.“그래, 맞아. 저 사람은 나쁜 사람이야. 하지만 괜찮아. 엄마가 있으니까 아무 걱정하지 마.”어떤 나쁜 사람도 월이의 머리카락 한 올조차 다치지 않게 막아낼 수 있었다.이유영은 속으로 조용히 다짐했다.강이한은 멀리서 그들을 바라보며, 그 고요한 광경이 가슴을 날카롭게 찢어놓는 듯한 아픔을 느꼈다. 숨조차 쉴 수 없을 만큼의 고통이 밀려왔다. 그때, 소란을 들은 하인들과 집사들이 급히 현장으로 달려왔다. 그들 역시 강이한을 보자 긴장한 기색을 감출 수 없었다.이내 임소미와 정국진도 급히 현장에 도착했다.임소미는 강이한을 보자마자 적대감이 가득 묻어나는 목소리로 쏘아붙였다.“여긴 왜 온 거야?”임소미의 말투는 한 치의 호의도 담겨 있지 않았다.“유영이를 좀 봐.”정국진이 임소미에게 말했다.임소미는 강이한에 대한 불만이 아무리 많아도 이유영의 이름이 언급되자 그 감정을
임소미는 이유영이 백산 별장을 단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하도록 했다. 심지어 반산월로 돌아가는 것도 절대 용납하지 않았다.결국 이유영은 무력감 속에 남겨질 수밖에 없었다.서재에서 정국진은 이유영을 바라보며 말했다.“네 두 눈은 지금...”정국진의 목소리에는 멈춘 말 속에 깊은 안타까움이 묻어났고, 이유영은 그 감정을 생생히 느꼈다.“아빠...”“수술은 빨리 받는 게 좋겠다. 그래야 네 엄마도 마음이 놓일 테니까.”“하지만 저는...”“걱정할 필요 없다. 네게 가장 뛰어난 의사를 붙여줄 테니.”정국진은 이유영의 마음을 꿰뚫어 본 듯 이유영을 달래며 말했다.사실 정국진과 임소미는 누구보다도 긴장하고 걱정하고 있었다. 수술이 실패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 때문에 모든 준비를 더 철저하게 하고 있었다.“아빠...”“응?”“아빠... 저, 너무 무서워요.”그동안 가족들이 자신을 얼마나 걱정하는지 알면서도 지금 이 순간, 이유영은 두려움을 참지 못하고 가족들 앞에서 자신의 감정을 드러냈다.이유영은 정말로 무서웠다. 어둠 속에서 살아가는 그 고통을 다시는 경험하고 싶지 않았다.지금까지 그토록 자신의 두 눈을 지켜 왔건만 결국 일이 이 지경까지 이르렀다.마음속에서 숨 막히는 듯한 답답함이 밀려왔다.전생에서 눈을 떴을 때, 이유영을 감싼 건 끝없는 어둠뿐이었다. 그 공포와 혼란은 그녀를 미치게 할 지경이었다.지난 생에서 이유영이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그 어둠 속에 적응하려고 애쓰는 것뿐이었다.하지만 이번 생은 달랐다. 한순간에 어둠 속으로 떨어진 것이 아니라 서서히 시야가 어두워져 가는 과정을 느껴야 했다.그 느린 과정이 그녀에게는 더욱 고통스러웠다.“무서워하지 마라. 우리 모두 네 곁에서 함께할 거야.”“네...”이유영은 고개를 숙였고 눈물이 주르르 떨어졌다.그래, 두려워하지 말자. 이번 생은 전생과는 다르니까. 비록 전생의 운명을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더라도 이번에는 가족들이 곁에 있어.전생에는 어둠 속에서 이유영 곁에는 강이한
이유영은 이제야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 시력이 급격히 나빠진 원인이 바로 알프산 방문 때문이라는 사실도.알프산을 다녀온 후 이유영의 시력은 점점 더 악화하였고 자극을 받은 듯한 이상 증상들이 서서히 나타났다.“강한 빛도 견디지 못하면서 어떻게 그런 곳에 갈 생각을 했니?”임소미는 완전히 화가 나 있었다.이제 이유영이 어디를 가든 임소미는 더 이상 허락하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그 장소가 이유영의 눈에 큰 해를 끼칠 수 있는 곳이라면 더욱더.“엄마, 정말 별일 아니에요...”이유영이 조용히 말했다.“더 이상 말하지 마!”임소미는 너무 화가 난 나머지 머리가 지끈거렸다.“잠깐 잊고 있었어요.”이유영은 진심으로 말했다.미리 알았더라면 절대로 가지 않았을 것이다.이전에도 의사가 주의를 당부한 적이 있었지만, 눈 덮인 곳에 갈 일이 거의 없었기에 점점 그 사실을 잊고 있었다.그러다 이번에 큰 자극을 받게 되었고 일이 이렇게까지 심각해질 줄은 이유영 자신도 몰랐다.“잊었다고? 그 잊음 때문에 평생 어둠 속에서 살아야 할 수도 있는데, 그걸 어떻게 잊을 수가 있니?”임소미의 목소리에는 분노를 넘어선 깊은 슬픔이 담겨 있었다.임소미의 다급한 목소리를 들으면서 이유영은 자신도 모르게 마음이 더 조급해졌다.“엄마, 미안해요!”“미안하다는 말은 필요 없어. 나는 네가 건강하게 지내는 것만 바랄 뿐이야, 알겠니?”그것이 바로 어머니의 마음이었다.어떤 상황에서도 자식이 잘 지내길 바랄 뿐이었다.이유영은 그 말에 가슴이 따뜻해졌다.이유영은 손을 뻗어 임소미의 가냘픈 허리를 감쌌다. 나이가 들었음에도 임소미는 여전히 이렇게 날씬하고 아름다웠다.임소미는 평소에도 관리를 열심히 하는 사람이었다.“알겠어요, 엄마. 화 풀어요, 네? 저, 수술받을게요.”“유영아...”“엄마, 이제 걱정하지 마세요, 네?”임소미의 품에 안긴 이유영은 마치 어린아이 같았다.임소미는 심장이 떨릴 정도로 안쓰러웠다.임소미는 이유영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우지는 빠르게 물을 닦아냈다.손바닥에 남은 차가운 물기는 이유영에게 시력이 점점 더 나빠지고 있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떠올리게 했다.언젠가 이유영의 두 눈은 완전히 어둠 속에 갇혀 아무것도 볼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그 공포는 마음 가장 깊은 곳에서 서서히 퍼져 나왔다.아침에 물 한 잔을 쏟은 이후, 이유영은 하루 종일 우지와 우현의 손길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옷을 갈아입고 세수를 하는 과정에서도 마찬가지였다.이유영은 이제 옷장 속에서 강렬하고 선명한 색깔의 옷들만 겨우 식별할 수 있었다.나머지 색깔들은 이미 모두 희미한 회색빛으로 뒤덮여 있었다.아침 식탁.우지는 조심스럽게 죽을 이유영 앞에 놓으며 말했다.“아가씨, 조심하세요. 아직 조금 뜨거울 수 있습니다.”그뿐만 아니라, 이유영이 숟가락을 집으려고 할 때, 우지는 바로 숟가락을 건네주었다.“고마워요.”이유영은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그러나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거센 혼란이 몰아치고 있었다.가슴은 답답하고 꽉 막힌 것 같았다.그때, 임소미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이유영은 전화를 받으며 말했다.“엄마.”“왜 아침 같이 먹으러 오지 않았어?”“좀 늦게 일어났어요. 엄마 먼저 드세요.”“그럼 오전에는 꼭 돌아와서 월이랑 같이 놀아 줘. 네가 이곳에 안 온다고 하면 월이가 속상해할 거야.”“네, 알겠어요.”월이의 이름이 언급되자 이유영은 가슴이 더 답답하고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월이의 이름을 떠올리는 순간, 이유영의 마음속에는 수술을 받아야 한다는 결심이 더욱 굳어졌다.전화를 끊고 난 후.이유영의 세계는 다시금 무거운 침묵에 휩싸였다.이유영은 곰곰이 생각했다. 여진우가 곁에 있어서 다행이었다. 만약 그마저 없었다면, 지금의 자신은 어떻게 버티고 있을까? 만약 임소미와 정국진에게 이유영만 존재했다면... 그들은 얼마나 더 힘들어하셨을까?다행스러움과 무거움이 동시에 몰려왔다.아침 식사 후.이유영은 운전기사의 차를 타고 백산 별장으로 돌아갔다.임소미는 이유
임신 사실을 알게 된 그날, 한지음이 떠난 후, 이유영은 손으로 배를 감싸안고 한동안 어둠 속에 앉아 있었다.이유영의 머릿속에는 강이한을 떠난 뒤, 아이와 함께 어떻게 살아갈지에 대한 고민이 가득했다.당시의 이유영에게는 눈을 뜨면 온통 어둠뿐인 날들이 이어졌고 어떤 처참한 미래가 닥치더라도 개의치 않을 것만 같았다.강이한을 떠나겠다는 결심은 확고했다. 하지만 배 속의 아이를 알게 되는 순간, 그 용기는 바람처럼 사라지고 말았다.이유영은 두려웠고 미칠 것 같았다.자기 삶이 아무리 비참해도 괜찮았다. 그러나 아이를 볼 수 없다는 사실만큼은 감당할 수 없는 공포로 다가왔다. 그러나 이유영이 강이한의 결정을 기다리기도 전에, 이유영 스스로 선택을 내리기도 전에 모든 것이 한 차례 대화재로 끝이 났다.강이한은 이유영에게 한지음을 용서하라고 했다.한지음이 마지막 순간에 자신의 생명을 대가로 이유영을 위해 희생했다고 했다. 하지만 강이한은 결코 알지 못했다.그것이 오직 자신의 문제였다면, 어쩌면 모든 것을 잊고 포기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문제가 아이와 관련된 것이라면 이야기는 달랐다.용서라는 것은 있을 수 없었다.이유영이 아이를 위해 온갖 고통을 겪었던 그 마지막 시간 속에서 이미 결정되었다.한지음이 이유영을 위해 어떤 희생을 했든 한지음을 절대 용서할 수 없었다.“네, 좋아요! 사모님께 가서 바로 말씀드릴게요. 사모님께서 아가씨가 수술을 빨리 받겠다고 결정하신 걸 들으시면 분명 기뻐하실 거예요!”우지가 기쁜 얼굴로 방을 나가는 모습을 본 이유영은 그저 고개를 천천히 저을 뿐이었다.그날 밤.이유영은 좀처럼 잠들지 못했다. 이리저리 뒤척이다가 새벽에야 겨우 잠들 수 있었다.결과를 받아들이는 일은 이유영에게조차 쉽지 않았다.오랜 세월 지켜온 신념들이 의사의 진단 앞에서 한순간에 무너지고 말았다.어두운 방 안.어스름한 방안에서 날카로운 눈빛이 침대 위에 앉아 있는 이유영을 응시하고 있었다.차가운 손가락 끝이 이유영의 목 아래 울퉁
의사가 이유영의 상태를 면밀히 점검했다.그 결과, 백산 별장과 반산월은 조명에 한층 더 엄격한 기준을 적용하기 시작했다.임소미와 정국진은 최대한 빠른 시간 안에 모든 조명을 다시 교체했다.밤이 되면 이유영이 밖에 나가지 못하도록 막았고 낮에도 햇빛이 강하면 외출을 엄격히 제한했다.임소미가 이유영의 눈을 얼마나 걱정하는지 짐작할 수 있을 정도였다.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했으니 짧은 시간 동안 그녀의 눈에 자극을 주지 않도록 모든 것이 신중히 조율되었다.백산 별장에 밤이 찾아왔다.사람들은 모두 조명이 너무 어둡다고 느꼈고 시야가 흐릿한 이유영조차도 조명이 이전보다 더 어두워졌음을 느꼈다.“엄마, 이 정도까지 신경 쓰실 필요 없어요. 저는 이미 제대로 볼 수 없는걸요.”이유영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이유영이 말한 것은 사실이었다.지금의 이 조명은 이유영에게 아무 의미도 없었다.하지만 임소미는 딸의 말을 단호히 받아쳤다.“나도 알아. 이 조명이 사람들한테 너무 어둡게 느껴질 거라는 거. 그래도 강한 빛이 네 눈에 더 큰 손상을 줄 수도 있잖아.”임소미는 단호히 말했다.“...”하지만 이렇게 어두운 조명은 보이는 사람들에게도 눈에 자극을 줄 수도 있지 않을까?“됐어. 엄마 말대로 해. 네 수술이 성공하기 전까진 이 조명 상태 그대로 유지할 거야.”임소미의 태도는 매우 단호했다.이유영은 잠시 침묵하다가 조용히 대답했다.“알겠어요.”이유영은 엄마의 뜻을 거스를 수는 없었다.임소미가 조금이라도 마음의 안정을 찾을 수 있다면 이유영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기로 했다.그날 밤.이유영이 반산월로 돌아왔다.우지와 우현이 이유영에게 말했다.“조명을 모두 교체했습니다. 이제 아가씨의 눈에는 크게 해가 되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안경은 꼭 착용하셔야 합니다.”“안경이요?”이유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네, 알겠어요.”예전엔 눈이 크게 불편하지 않으면 안경을 굳이 쓰지 않았다.하지만 지금은 그럴 여유조차 없어졌다.